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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작성자 김태형 님의 글
작성일 2007-12-12 (수) 11:41
분 류 mb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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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TI의 문제점과 과제 ”

MBTI의 문제점과 과제



2007년 10월 16일 화요일

심리학자 김태형



내가 여러 인물들에 대한 성격분석을 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로 하는 얘기는 “MBTI는 검사를 통해 자기 유형을 파악하는 것인데, 당신은 어떻게 검사도 하지 않고 유형을 판단하느냐?”라든가 “MBTI 검사결과와 당신의 유형판단이 다르다”는 것이다.





MBTI 검사와 성격이론의 차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문제제기들은 내가 성격분석을 할 때 사용하는 영어 이니셜과 성격을 16가지로 분류한 것이 MBTI와 동일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그러나 비록 일련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MBTI 검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으며 그 진영의 학자들과는 다른 이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한 분들은 MBTI 책들과 내가 공저한 <성격과 심리학>(김태형·전양숙, 새뜰심리상담소, 2007)을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이런 점을 분명히 하면서 위의 질문에 대답을 해보겠다.





우선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

내가 제시한 성격이론은 각각의 심리적 유형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해명에 기초해 한 개인의 성격을 추론해나가는 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나는 성격분석을 할 때 MBTI 검사를 전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MBTI 검사가 부정확하다고 보기 때문에(그러나 MBTI 진영의 학자들도 검사가 불가능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유형판단을 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MBTI와 내 성격이론이 같은 영어 이니셜을 사용하고 있는데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왜 MBTI의 개념을 무단으로 차용해서 사용하느냐’라는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MBTI의 영어 이니셜과 개념은 칼 융(Carl Gustav Jung)이 제시한 것이지 MBTI 검사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와 MBTI 이론가들은 모두 융의 개념을 기초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융의 이론을 더 올바르게 과학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는가 하는 점은 앞으로의 학문적 논쟁과 성과가 말해줄 것이다.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

MBTI 검사결과와 나의 유형판단은 당연히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MBTI 검사가 빈번하게 부정확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MBTI 검사 결과가 정확할 경우에는 나와 같은 유형판단이 내려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내가 진행하는 성격분석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비판은 MBTI와 내 성격이론을 똑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분들의 비판은 초점을 비켜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을 하려면 <성격과 심리학>을 통해 제기한 내 성격이론을 비판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비판적 의견을 경청하고 학문적 토론을 할 의사가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MBTI는 심리검사가 아닌 유형판단 지침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에 대해 약간 짚고 넘어가겠다.

마이어와 브릭스가 개발한 MBTI는 Indicator(지시서 혹은 지침서로 해석할 수 있다)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심리검사가 아니다. 단지 유형을 판단할 때 사용하는 ‘참고서’일 뿐인 것이다.

MBTI가 심리검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이 ‘신뢰도’와 ‘타당도’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도’란 용어는 심리측정학에서 쓰일 때는, 항상 일관성(consistency)을 의미한다. 검사신뢰도란 동일한 검사(identical test) 또는 그 검사와 동등한 검사 형(equivalent form)을 가지고 재검사할 때 똑같은 사람들한테서 관찰된 점수들의 일관성을 말한다.(<심리검사론>, Anne Anastasi/김완석·손명자 역, 율곡출판사, 1994, 48~49쪽)





동일한 사람이 시차를 두고 MBTI 검사를 했을 때 각기 다른 유형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이 지침서의 신뢰도가 매우 빈약함을 보여주는 한 예일 것이다.

타당도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타당도는 심리검사가 측정하려는 것을 실제로 얼마나 정확히 측정하는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로 검사의 예언능력과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MBTI의 문항들은 타당도와 관련된 정확한 준거틀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그 검사의 예측능력 또한 불확실하다.

신뢰도와 타당도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카드점이나 사주팔자 같은 것들보다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더라도 MBTI는 심리검사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MBTI의 부실한 이론적 기초





유형판단의 지침서인 MBTI에 문제가 많은 것은 본질적으로 그 이론적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이어와 브릭스가 MBTI를 개발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여러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를 기초로 사람들 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차이에 기초해 유형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 유형분류가 융이 제기한 심리적 유형과 비슷하다는데 착안해 융의 개념을 접목시켰다.

마이어와 브릭스의 이러한 연구방법론은 전형적인 미국식 귀납추리라 할 만하다. 즉 아주 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특성을 실증적으로 관찰하고 수집해 그것을 각 유형별로 분류해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집돼지와 멧돼지를 열심히 관찰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특성들을 밝혀내고 그것들을 각각 집돼지와 멧돼지에게 할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분류된 특성에 근거해 다시 집돼지와 멧돼지를 구분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즉 멧돼지는 집돼지에 비해 이빨이 길고 날카로우며 달리는 속도도 더 빠르다는 특성들을 파악하고 그것을 멧돼지의 특성으로 규정한 다음 그것들에 기초해 돼지들을 집돼지와 멧돼지로 나누는 식의 이론을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MBTI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마이어와 브릭스는 집돼지와 멧돼지가 가진 각기 다른 구체적인 특성들은 찾아냈지만 ‘왜 그런 특성들이 발생하게 되는지’를 이론적으로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은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수집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런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본질까지 밝혀내야 한다. 예를 들어 직관형(N)이 미래지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밝히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직관형(N)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특성들이 나오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직관형(N)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규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MBTI 이론은 대부분 각각의 유형이 가진 특성을 나열하는 데만 주목할 뿐 그런 특성을 만들어내는 근원인 ‘심리적 유형’에 대한 본질적이고 이론적인 해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MBTI는 여러 특성들을 유형에 맞춰 분류는 잘 해놓았지만 왜 그것들이 그런 식으로 분류가 되는지 또 각각의 유형이 어째서 그런 특성들을 낳는 것인지는 거의 밝히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 심하게 말하자면 많은 MBTI 연구자들이 각각의 유형이 가지는 특성들을 외우고 그 지식에 근거해 유형을 판단하는 수준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명쾌한 과학적, 이론적 해명이 없는 현상 외우기식 연구는 논리적 추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고형(T)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해명이 이루어진다면, 비록 책에서 언급되거나 제시되지 않았더라도, 그 유형이 가질 수 있는 다른 특성까지도 추론할 수 있게 해주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MBTI 책들이 대부분 내향(I)-외향(E), 감각(S)-직관(N), 감정(F)-사고(T), 실천(MBTI의 경우에는 판단)(J)-인식(P)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해명은 거의 하지 못하거나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넘어간 채, 각각의 유형이 가진 특성들만 잔뜩 나열해놓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태양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은 태양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현상들도 해명할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만 잔뜩 외우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외운 것과 조금만 다른 현상이 발생해도 혼란에 빠질 것이고 결코 태양의 본질에 접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응용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MBTI 검사지의 문제점





MBTI 검사지는 이렇게 허약한 이론적 기초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몇 가지 문항을 예로 들어 그 문제점을 살펴보자.





- 나는 대체로

(A)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사람이다.

(B) 보다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다.





여기서 (A)는 외향형(E)의 특성이며, (B)는 내향형(I)의 특성이다(다행히 아마 이런 항목은 오차가 별로 없을 것이다)





- 자신은 평소에 어떤 형의 사람들과 잘 어울립니까?

(A)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B)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





여기서 (A)는 직관형(N), (B)는 감각형(S)의 특성인데, 이런 질문에는 오답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사람은 반대유형을 좋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A)를 선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직관형(N)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도 개인에 따라 해석하기 나름이어서 그것을 ‘허황된 인간’이라는 식의 나쁜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은 어떤 형의 사람 아래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까?

(A) 항상 친절한 사람

(B) 언제나 공정한 사람





여기서 (A)는 감정형(F), (B)는 사고형(T)의 특성이다. 이런 질문 또한 문제가 많다. 일반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친절한 사람보다는 공정한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문항들은 문화의 차이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공정함과 실력보다는 아부나 인맥이 판을 치는 부패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유형과 상관없이 (B)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겠지만, 사회적으로 정의가 많이 실현되어 있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친밀하지 못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A)를 선택할 가능성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MBTI 설문지는 이렇게 각각의 유형이 가진 특성을 문장으로 제시하여 검사자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고, 그것을 통계로 처리해 유형을 판단한다.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많은 문항들이 자기 유형을 정확하게 보고하지 않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현재 모습보다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 유형과 반대되는 문항에 답을 하는 경우가 많다(4가지 유형이 모두 반대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고 한 두 개가 반대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성격이론 진영은 향후에 16가지 성격을 판별해낼 수 있는 검사도구를 개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62년에 개발된 MBTI가 여러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이 검사도구로는 정확한 자기 성격을 찾아내기 힘들다. MBTI는 사람들의 ‘실제 성격’보다는 그들이 ‘희망하는 성격’을 밝혀 주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MBTI가 판별해 주는 성격은 진짜 자기 성격이 아니라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성격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성격과 심리학>, 186쪽)



MBTI 진영의 과제

또한 MBTI 이론가들은 주로 ‘선호’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융의 이론에 대한 무지이거나 왜곡이다. 물론 억지로 사용하자면 ‘무의식적 선호’라는 말도 가능하겠지만 통상적으로 ‘선호’라는 것은 의식적인 호감-비호감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MBTI 이론가들이 ‘서로 다른 심리적 유형을 선호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융의 의견대로 심리적 유형을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으로 본다면, 유형의 차이는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발달과 여기에 추가되는 개발의 문제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인식기능의 차이로 인해 구별되는 감각(S)형과 직관형(N)의 경우, 사람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자기 유형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감각기능, 직관기능의 발달에 의한 결과이지 ‘선호도’에 의한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MBTI의 표면적이고 경험적인 연구방법은 구체(개별)에서 추상(일반)으로 그리고 다시 구체로 이어져야 하는 연구과정에서 구체에 머물 뿐 추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심리적 유형이론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해명하는 것이다.

첫째, 왜 그리고 어떤 식으로 심리적 에너지의 방향, 인식기능, 판단기능, 실천능력의 차이라는 네 가지 요인이 사람의 심리적 유형을 규정하는가?(이것이면 충분한가? 혹시 중복되는 것은 없는가 아니면 또 다른 것은 없는가?) 이것은 사람의 근원적인 심리적 특성을 규정짓는 네 가지 요인을 규정하고 그것들의 본질과 관계를 해명하는 문제이다.

둘째, 심리적 유형이 내향(I)-외향(E)처럼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정확히 해명되어야 각각의 심리적 유형(네 가지 요인에 따른)이 세 개나 네 개가 아니라 두 개로 구분되는 근거를 알 수 있고 각 유형의 본질과 관계를 알 수 있다.

셋째, 각각의 유형들의 본질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심리적 특성을 낳는가? 이 문제가 해명된다면 각각의 유형들이 만들어내는 수다한 특성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각 유형들의 결합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를 들면 직관형(N)과 사고형(T)의 결합은 아주 독특한 직관사고형(NT)의 특성을 낳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해명하는 문제이다. 성격은 INTJ나 ISFJ처럼 네 가지 유형의 결합이기 때문에 각 유형의 결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심리적 유형과 관련된 이러한 본질적인 의문들에 대해 실증주의적인 미국학자들인 마이어나 브릭스(그 추종자들 포함)가 현상나열에 그친 것과는 달리 융은 이론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융은 이를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죽었기 때문에 심리적 유형에 대한 이론적 완성은 후세의 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나는 <성격과 심리학>을 통해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융의 심리적 유형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론틀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물론 앞으로 좀 더 검증하고 수정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이론적 타당성이 있다고 감히 생각한다). MBTI 이론가들 또한 여기에 초점을 맞춰 이론작업을 해야 자기의 치명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니 심리적 유형에 대해서 서로 간에 활발한 토론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언젠가는 MBTI를 대신할 수 있는 정확한 검사도구도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추신 : 일부 사람들은 나의 이론활동에 대해 ‘석·박사 학위가 없다’, ‘자격증이 없다’는 등의 말들을 하는데, 나는 그런 비난들이 아무리 많이 들려오더라도 학력을 위조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으니 오로지 성실한 연구와 이론적 실력으로만 대답하겠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출처: 심리학자 김태형의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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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리스도교 영성
작성일 2007-09-12 (수)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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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사적 계시와 예언에 관한 영의 식별 지침 ”
 

5. 사적 계시와 예언에 관한 영의 식별 지침1)

  1) 어떤 계시도 성서 말씀이나 그에 근거한 교리, 윤리에 어긋나면 거짓된 것으로 배척해야 한다.

  2) 그것이 정통 신학자들의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가르침에 위배되는 경우엔 의심스럽다.

  3) 계시내용의 전반적인 것은 신빙성이 있으나 일부의 세부 사항이 거짓일 경우 모든 부분은 배척할 필요없으며 좀 더 신중히 조사한다.

  4) 어떤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곧 그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틀림없이 왔다는 결정적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악령으로부터 올 수도있기 때문이다.

  5) 단순히 이상하거나 필요없는 것들에 관한 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자세하고 길며 필요 이상의 증명과 이유를 늘어놓는 계시도 마찬가지로 배척해야 한다. 하느님의 계시는 일반적으로 간결 명료하고 정확하다.

  6) 계시를 받는 사람은 조심스러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 신체 및 정신 건강, 기질, 성격, 인품, 사회성 등 그의 전인적 측면에서 조사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 결실인 평화와 기쁨 그리고 겸손과 애덕을 지니고 있으며 사려가 깊은지, 영적 삶에 진보하려 애쓰는지 등을 살핀다. 영적 결실을 거스리는 말이나 행위들은 계시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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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리스도교 영성
작성일 2007-09-12 (수)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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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성령의 표지의 식별 ”
 

4. 성령의 표지의 식별1)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표지의 진위성에 대해 식별하기 위하여 시험하길 권고한다.“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1요한 4,1).

  바오로 사도도 그 표지를 지닌 행위를 그 반대의 것으로부터 가려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깨어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령은 어떤 이들에게 어느것이 그분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1고린 12,10)을 허락하신다.

  실제로 교회 역사 안에서 사목자들 뿐 아니라 많은 수도자, 평신도들이 이 선물을 활용하면서 개별적 및 공동체적으로 영적 지도에 도움을 주어 왔으며,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이런 카리스마의 권위와 신빙성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위탁된 교회(마태 16,18-19: 28,18-20 참조)의 보증을 필요로 한다. 교회헌장은 12항에서 이례적인 카리스마와 일반적 카리스마를 논한 후 이렇게 결론지어 말한다.“카리스마의 진실성과 온당한 행사에 관한 판단은 교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 속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선물을 받은 개인은 교회의 사목자와 일치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1데살 5,12 참조). 한편 이 선물을 허락한 이는 교회가 아니고 “불고싶은대로 부시는”(요한 3,8) 성령이시므로 교계 제도는 개인 안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영감을 꺼버리지나 않을까 항상 유의해야 할 것이다.(1데살 5,19-20).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령의 표지의 식별척도를 찾아낼 수 있다.

  1) 성령의 열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삶의 열매를 살펴봄으로써 알아낼 수 있다. 성령이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정의, 온유 그리고 절제이다(갈라 5,16-22; 에페 5,8-1); 로마, 7,4-5 참조).

  이미 예수께서 친히 식별 기준을 가르쳐 주신 바 있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 7,16). 예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후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사나운 이리라고 하신다(마태 7,15 참조).

  2) 계시와의 일치: 로마서에서 이례적인 카리스마인 ‘예언’에 대해 하나의 식별법이 언급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라면 자기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써야 합니다‘(로마 12,6)

  하느님과의 종속 관계에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위탁된 메시지에 아무 것도 .보태거나 빼선 안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성서와 일치해야 한다.

  3) 교회와의 일치: 성령께로부터 오는 신빙성 있는 선물인 카리스마는 “교회를 돕는 것”(1고린 14,4.12.26)이고 “공동 유익을 위한 것”(1고린 12,7)이다. 카리스마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봉사의 선물로 쓰는지 혹 자신의 유익을 위해 쓰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4) 형제적 일치로서 사랑: 성령의 현존의 표지를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척도는 사랑이다(1고린 13,1-13 참조). 사랑은 다른 이의 특성과 카리스마를 존중하고 또 사랑하게도 한다.(1고린 12,1-31 참조).

  5) 참된 신앙 고백, ‘예수는 주님이시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1고린 12,3) 이것은 성령의 표지의 일차적이며 최고의 척도이다. 그러한 고백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주님이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총(마태 16,15-18 참조)을 통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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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007-09-12 (수) 00:27
분 류 건전한영성과빗나간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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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성 ”
 

3. 그리스도교 영성의 특성

  오늘 우리 주변엔 수많은 형태의 영성들이 나타나고 있어  어느것이 진정으로 가톨릭적 그리스도교 영성인지 식별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다음의 기준들은 우리의 그러한 식별을 도와주게 될 것이다.

 1) 삼위일체적 영성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삼위일체적인 것(trinitarian)이지 그것을 부정하는 일신론적인 것(unitarian)이 아니다.

  우리는 성부에 의해 창조되고 불림받고 지탱되며, 성자에 의해 구속되고 재창조된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쇄신되고 충만하게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만일 성부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형성하려 하거나, 성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이루려하는 영성 또는 성령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주장하는 영성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히느님의 첫째 위격만을 주장하는 유니타리안교(Unitarianism) 경우, 그들은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존재와 업무에서는 본질적으로 동떨어져있는 먼 하느님을 전한다. 그것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 관념을 갖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분께 특별한 경우에 입으로만 경우를 표시하며 그분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도록 그를 혼자 내버려두신다.  그들은 또한 어떤 특별한 역사적 사건(육화 사건 등)과는 관계가  없는 성령을 전한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현재의 성령체험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삼위일체적인 것이지 일신론적인 것이 아니다.


 2) 복음적 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은 시종 일관 복음적이다. 어떤 이념이나 파벌적 사고나 삶이 아닌, 하느님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영성의 규범과 교과서는 성삼위의 신비 안에서 성부의 뜻을 찾고 행하시며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께 관해 기록한 책인 복음 성서와 그 밖의 성서 말씀이다.

  

 3) 하느님 나라 지향적인 영성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하늘나라로 나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면 따라서 하느님나라에로 지향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인 동시에 정의와 평화의 나라이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권의 제 요구에 항상 응답적인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요구와 울부짖음에 대하여 단절되어 있거나 무관심할 수 없다.

  정의는 중요 덕목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결여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함의 본질적인 어떤 것이 없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은 예수님의 설교와 선교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의 말씀은 그분의 주요 사명이 무엇인지 잘 들어내 준다.“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마태 11,4-5)

  예수님 자신이 그분의 교회의 사목자들을 위한 규범을 정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그분이 하신 것 같이 사목하길 원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에만 집착하여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합법적인 요구에 둔감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지향한 영적 생활 양식을 배양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교회의 직무들, 의식들, 법률들, 전통들 그리고 관습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하느님께 대해 주의를 기울이며 그분께 봉사하는 것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 및 사목적 영성은 하늘나라 지향적인 것이지 종교 지향적인 것(종교제도 자체, 형식적 종교 생활)이 아니다.



 4) 교회지향적 영성

  교회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엇보다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로부터 생겨나며 세례와 견진성사로써 확증되고 성체성사로써 지속적으로 양육되며, 끊임없이 신앙 공동체 자체 안에서 성장되고 지탱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영성은 교회의 생활, 특별히 전례 및 성사 생활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체성사를 그 중심에 두지 않는 영성은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이라 할 수 없다.

  성체께 예배드리는 것이 교회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이며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에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 및 사목적 영성은 교회론적으로 균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공동체로서, 제도로서 그리고 신비체로서의 교회의 본성 전체를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과 예배와 증거, 봉사라는 교회의 사명 전체를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참으로 교회적인 것이지 독자적인 것이거나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5)성사적 영성

  믿음의 공동체의 삶의 체험인 전례생활은 영성의 중요 부분이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다. 또한 “전례, 특히 미사성제에서 샘에서와 같이 우리에게 은총이 흐르고 여기서 성교회의 모든 활동의 목적인 성화와 하느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가작 효과적으로 실현되는 것”(전례헌장 10항)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또한 효과적으로”(전례헌장 11항) 참여하도록 불린다.

  그리스도인에게 공동체와의 연결(일치)은 온갖 부류의 인간 생활을 신앙의 맥락 안에서 포용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조명되어 자신들의 세계와 역사를 볼 수 있는 공통 목적, 관심 그리고 목표를 제공한다.

  실로 미사 안에서 신자들이 만남, 친교, 나눔의 장이 이루어져야 하며 하느님께 공동으로 기도하고 또한 공동으로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일 미사를 공동체나 이웃과 단절된 채 하느님과 개인적 관계로 즉 채워져야 할 의무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또한 성세, 견진, 고백, 성체, 혼인 성사 등을 생활 안에 구현하도록 해야한다.

  한편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어디서나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므로 모든 실재, 즉 개인적, 자연적, 역사적, 우주적 실재는 성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제 실제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제 실제에 의하여 전달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지평 또는 범위는 항상 창조된 질서 자체와 마찬가지로 광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역설하였듯이, 항상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인간 실재의 중요한 구성 요소들, 즉 전례와 기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예술, 문화, 과학, 그리고 오락 등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에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6) 전인적(全人的) 영성

  인간은 순수한 육체적 피조물도, 순수한 영적 피조물도 아니다.  인간은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고 육체와 정신(또는 영혼)의 존재이다.

  바울로 사도의 편지에서 나타나는 영과 육의 대결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데로 지향되어 있는 전인적인 인격의 대결이다. 바울로 편지에서의 영과 육의 대결을 잘못 이해할 때엔 육체, 인간의 정서, 정열, 사회적 관계들, 물질적 환경 등을 경시하는 경향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할 경우, 마치 인간은 참으로 영과 육의 존재가 아니라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풀려나기를 늘 기다리며 육체 안에 갇혀있는 영적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육체를 경시하는 영성은 실상 창조주이시고 구속자이시며 성화자로서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역사하심을 부인하는 영성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다. 설령 인간이 육체적인 방식으로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적 존재는 말씀의 육화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인간은 항상 활기를 얻게 되었고 그 안에 하느님이 끊임없이 현존하심으로써 새로워지게 되었다.

  물론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만이 아니듯이, 육체적인 피조물만도 아니다. 그러므로 영을 제외하면서 육체를 들어 높인 영성은  모순적인 것이며 빗나가 있는 것이다.

  사목자는 영적인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육체적 곤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이한 봉사까지 지향해야 한다. 사목자가 육체와 영혼을 지닌 사람인 것처럼 그 사목자가 봉사하는 사람들 또한 육체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목적 영성은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7) 타자 지향적 영성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여성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적인 것으로만 제한하고 고립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해야하는 것이지 그들로부터 우리를 폐쇄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인과 함께 살 수 없다” 라든지 “성인과 함께 사는 것은 순교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가끔 신성함을 괴상함이나 이상함과 동일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사람이 성인같아서 함께 식탁에 앉으면 좀 야한 농담조차도 결코 해선 안된다든지 너무 조심스러워해야 할까?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함께 기도하기를 강요한다고 할 때 그의 그러한 열성 때문에 성인이랄 수 있겠는가? 성인과 결혼했다면, 그의 거룩함이란 정열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거룩함이나 신성함이란 괴상함이나 괴팍함이 아니다. 그것은 건전함이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건강한 것이다. 만일 성인이 우리에게 복음의 가장 높은 규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따라 생활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실패를 상기시켜 주기만 한다면 성인과 함께 살거나 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성인들은 덕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현명함과 정의 그리고 절제와 용맹의 덕을 지닌 분들이다.  그들은 자비와 연민의 정을 지닌 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우리의 유한한 인간적 여러 요구와,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분명히 보기 때문에 섬세한 유우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기적인 거시 아니라  타자 지향적인 것이다.


 8) 다양적 영성

  우리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또한 의식과 자유라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개인이기도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 개인이 어떤 비인격적 집단에 흡수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어떤 수도회나 어떤 영성학파 또는 어떤 교회 운동이나 특별한 집단도 영성이나 신성함을 독점할 수 없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데 있어서나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유일한 길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영성을 개발하기 위한 가능성은 매우 다양한 것이다.

  따라서 영성의 어떤 특정한 형태도 사목자들을 포함한 신자 어느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다. 각 사람은 언제나 일반적인 교회 및 신자들이 관련된 특별한 신앙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하느님과 지기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를 돈독히 할 자유를 지녀야만 한다. 여기에는 취해야할 균형이 있다. 어떤 영성도 특이하고 인지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개별화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영성도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만큼 획일적이어선 안 된다. 즉 그 영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혹은 부지불식간에 비난받고 질책받아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제가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하나의 사제적 영성은 없으며 수도자들이나 교리교사들 그리고 신자들을 위한 어떤 하나의 영성도 없다. “필요한 일에 있어서 일치하고 불확실한 일에 있어서 자유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1) 그리스도교 영성은 다원적인 것이지 완전히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9) 인간적인 영성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 안에 하느님은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 실로 하느님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정의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창조와 구속에 대한 제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자연적인 것 만질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역사적인 것, 구체적인 것들을 거절할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도 인간적인 것들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하게 지지하거나 또는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 존재의 전체적 구성 요소들(예: 정열들이나 보다 낮은 욕구들)에 무관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것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지탱해 주시는 하느님과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을 구속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인간들 상호간에 그리고 하느님께 좀더 가깝게 이끄시는 성령께 무관심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인간적인 것이지 반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10) 희생적인 영성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을 받았지만 역시 죄인이다. 죄 속의 성인인 것이다. 십자가를 벗어난 그리스도 영성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영성은 언제나 희생, 이기주의와 자기 모순까지 극복해야하는 절제, 극기 등을 내포한다. 그것은 언제나 원죄의 영향, 즉 교만, 정욕, 위선, 인색, 나태 등을 주의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대축일 없는 성 금요일을 생각할 수 없듯이, 성 금요일 없는 부활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인간으로서 희생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사랑은 그 본질상 희생적인 것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타산 없이 준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가정 안에서 희생적으로 사랑을 지향하듯이, 보다 큰 가정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 더 큰 인류의 가정 안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희생적 영성은 향주덕과 윤리덕(지덕, 의덕, 용덕, 절덕)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마련이다. 희생적 영성의 중심은 항상 사랑이다. 사랑 없는 희생은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11)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성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성에의 소명은 보편적인 것이다.2) 사제나 수도자를 위한 ‘더 높은’ 영성이나 평신도를 위한 ‘더 낮은’ 영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온 교회는 성성에로 불림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결코 위계적인 것이거나 혹은 선발된 자만의 것이 아니다. “신분이나 계급의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실현하도록 불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일이며...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성성과 자기 신분의 완덕을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서품이나 수도서원에 근거를 두고있는 것이 아니며 세례 및 견진성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다.

  

 12) 신학적으로 검증되고 뒷받침되는 영성

  영성은 신학과 연관되어 있다. 영성은 실천적 삶이고 체험이지만, 한편 신학에 의해 제시되고 반성되며 평가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계시진리에 의한 신학적 뒷받침 없는 영성은 빗나갈 수 있는 것이다. 빗나간 영성은 비복음적인 동시에 비신학적인 것이다.

  특히 영성신학은 하느님의 계시원리에서 출발하여, 경험적 자료들(그리스도인들의 체험, 생활 경험, 심리학, 사회학적 자료들)을 이용하며, 영성생활의 성장과 발전을 다루는 법칙과 규정을 제공해 준다. 즉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의 시초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으로 거쳐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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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성의 성격 및 식별기준
작성일 2007-09-12 (수) 00:26
분 류 건전한영성과빗나간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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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11.xxx.74
http://missa.or.kr/cafe/?spirituality.36.
“ 2. 영성에 대해 잘못 이해된 관념 ”
 

2. 영성에 대해 잘못 이해된 관념

  그리스도인이 영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관념을 가질 때 그의 영성 생활은 빗나가게 된다.

  1) 영성이 신비적 체험이나 종교적 감동(감상주의)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신비적 체험과 동일시할 경우 영성생활을 하나의 환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종교적 감상주의와 동일시 할 경우에는 영성 생활에서 인격적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영성생활에서 넓은 의미의 신비 체험(기도, 성사생활, 감사로움 체험 등)은 필요하다. 그러나 흔히 신비 체험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의 신비 체험으로서 시현, 탈혼, 말씀(locution), 계시, 성흔, 공중 부양 등을 뜻하는데, 이러한 현상들이 중시되며 강조될 때 영성 생활에 문제점이 나타난다.

 영성 생활에는 정적 측면이 경시될 수 없고 오히려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감정에 지나치게 호소하거나 예속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엔 지(知), 정(情), 의(義)의 조화가 요청된다.



  2) 영성 생활이 어떤 비현실적인 영적 이상(理想)과 혼동될 수 있다.

   영성 생활은 비현실적인 영적 관념으로부터 지배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영성인(루가 6, 46: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 갈라 5, 25: 성령의 지도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혼동할 경우엔 이원론(二元論)적 영성으로 빗나갈 수 있다.

  

  3) 영성은 윤리주의적 미덕 추구나 엄격한 율법주의적 자세로 이해될 수 있다.

   윤리적 미덕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강요되는 의미없는 형식적 법이나 전통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잊게 하며 소심하고 법칙 준수로 자족 자만하는 율법주의적 사고 방식은 오늘의 율법주의적 사람을 형성한다. 교회법과 영성 및 윤리 규범이나 지침들을 경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성실히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외적 형식보다 그 근본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영성 생활의 본질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삶이다. 율법주의 자세는 Pelagianismus1)의 경향으로 흐르게 한다.



  4) 영성이 무조건적 열심과 혼동될 수 있다.

   지(智), 정(情),의(意)가 조화롭게 성숙되어 가지 않고 정적인 측면에 불균형적으로 기울어지는 신앙 자세는 흔히 빗나간다. 그러할 경우 감상주의나 열광주의로 기울어질 수 있다.  



  5) 영성이 경건한 자태나 정적(靜寂)주의(Quietismus)2)로 착각된다.

   영성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역동적인 힘에 이끌려 밖으로 들어 나는 것이다. 영성 생활은 보다 강한 생활로 그리스도와 밀접히 일치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동적인 힘에 인도되어 언제나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정체적일 수 없다.



  6) 영성이 수도자적 완덕의 삶과 동일시될 수 있다.

   교회의 생활 안에서 오랫동안 수도자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완성의 길로 여겨지면서  ‘영성’이란 용어는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자의 삶과 동일시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소에 따라 다른 생활 상태에서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영성의 다양성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 같은 영성을 사는 두 우열 계급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러나 영성이란 수도자적 완덕의 삶뿐 아니라 성삼위의 친교 안에 사는 각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포함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어떠한 생활 양태와 직책에서든지 각 그리스도인들이 성성(聖性)에 즉 완덕에 불리었다고 선언하였다.3)



  7) 영성이 물질이나 육을 배제하고 벗어나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영성은 역사 안에서 흔히 육체, 물질 혹은 세상 등과 대칭 또는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져 매우 제한적 개념을 갖곤했다. Platon적 이원론을 언제나 교의적으로 배격해온 교회 안에서 실제적인 신자들의 영성 생활은 자주 2원론적 경향이 짙었다. 세상, 물질, 육체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인 종말적 영성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8) 영성이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서 이루어질 수 있는 하느님과의  특수한 내면 관계로 제한된 채 이해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영성의 개념은 흔히 기도, 관상, 참회, 속죄, 수덕, 세상을 떠남 등 고전적 주제들이 내포되었다. 오늘도 영성이 그러한 그리스도인 생활의 특수한 부분으로 축소 이해되어 제한적 관념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성이란 하느님과 우리의 특수한 내면적 관계 뿐 아니라 일상생활 체험 전반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최근의 영성 저자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전통적 측면(기도, 관상, 속죄, 수덕 등)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주제들과 그 모든 상호관계 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상 체험으로부터 일어나는 문제점들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다.

  실로 영성이란 일상생활의 모든 상황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 앞에 서 있으며 어떻게 응답하고 처신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다음의 보완적이며 불가분적인 두 차원을 내포한 한 측면은 하느님과의 관계로서 기도의 삶이며, 다른 한 측면은 우리가 살고 영향받으며 또한 발전시켜야 할 이 세계 그리고 그 문화와의 관계이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핵심인 하느님과의 만남의 추구는 또한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하느님 현존의 추구로 이어진다. 한편 일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 봉사, 정의추구 등 사회활동은 우리를 비인간적이게 할 수 있는 어떤 단순한 이념이나 형식적 행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관상적 측면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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