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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자료실
작성자 대림절, 육화
작성일 2002-06-02 10:18
ㆍ추천: 1  ㆍ조회: 891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님
 

교회는 대림4주간을 맞이하였고 이 한 주간 즉, 17일부터 24일까지 예수님의 탄생을 좀 더 깊이있게 준비하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오늘은 그 첫날로, 예수께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심, 즉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성장한 후 갓난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나심을 묵상하며 지냅니다(마태 1,16 참조).

예수님의 탄생이란 곧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으로 교회는 이 사건을 강생(降生) 혹은 육화(肉化)라 부릅니다. 사실상 하느님의 독생성자가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강생의 교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이자 중심이 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다”라는 주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하필이면 인간이 되려 하셨는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면 인간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정말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등.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 기도하는 이 시간, 먼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살펴본 후, 인간을 위해 하느님은 무엇을 하셨는지(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알아보고, 마침내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하여 확인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깊은 뜻을 발견함은 물론이거니와 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 인간의 조건은 어떠합니까?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마치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진이나 홍수, 폭설, 폭염, 전염병 등과 같은 천재지변에 속수무책인 인간의 모습, 무질서하고 타락한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각종 질병들과 낙태와 전쟁으로 인한 살인, 기아, 황금만능주의, 쾌락주의, 급기야 반인륜적인 사건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건들이 바로 우리 곁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수가 있을까”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고 보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감마저도 들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웃음을 선사하는 일들 또한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들, 자신의 전재산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들, 인류의 평화, 인권, 자유, 평등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 등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인간에게 빛으로 다가오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역시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구나. 이제 멀지 않아 우리의 세상은 낙원이 될거야”라는 기대감을 갖게도 됩니다.

즉 인간은 다분히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대로 인간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창조물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현실 조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기대감, 즉 이제는 하느님께서 직접 양팔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때이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인간의 조건은 비구원의 상황과 구원의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수천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매한가지일 뿐 아니라 비구원의 상황이 오히려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하느님께서     는 인간의 지난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처신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당신의 모상을 닮도록 하셨으므로 인간과 세상은 당신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인간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죄와 병고, 죽음, 악마라는 4중주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바로 이 때문에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악마-죄-죽음-병고에서부터 구원되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점차로 확산되어 마침내 인간 사회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만큼 죄로 가득찬 사회가 되어버렸고 그러한 세력은 더 이상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할 수가 없을 만큼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그대로 방관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타락이래로 끊임없이 그리고 서서히 인간 구원을 위해서 준비하시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역사 안에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모세의 부르심, 재앙, 탈출, 계약 등의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은 이 세상사에 개입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계약으로, 하느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며, 무엇보다도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후로도 세기를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과 계약을 맺은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을 계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법전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당신의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격려하시고, 꾸짖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포기가 없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도 당신 백성들의 잘못된 정신을 일깨워 주시고 당신에게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시련을 정화와 보속의 기간으로 삼으셨고 다가올 구원에 대한 희망을 통해서 인내와 믿음을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가장 숭고하고도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시고자,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의 유한한 시간 속으로, 이 세상 도시의 소음속으로, 이 세상의 산과 계곡으로 보내셨습니다.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은 맨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생겨난 것치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겨레는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곧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외아들다운 영광이라 그분은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셨다”(요한 1,1-5.10-14).

바로 이렇게 타락한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역사 안에 점진적으로 개입하시며 서서히 당신을 드러내셨던 하느님께서는 이제 직접 세상에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3.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는 것 외에 또다른 방법이 없으셨을까요? 하느님은     왜 굳이 인간이 되셨을까요?


하느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심은 한없이 깊은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연약하고 평범한 아기가 젊고 평범한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는데, 이 아기 안에서 하늘과 땅,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으로 가장 깊이 들어서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무한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강생은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하느님이 육신을 입으신 것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왕자가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쁜 시골 처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고자 세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첫째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왕자의 권위를 그 처녀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처녀의 진정한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둘째는 그 처녀를 왕궁으로 초대해서 왕실의 영화를 보여주면서 구애를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처녀의 진심을 읽기 어렵기에 포기 했다. 마지막 방법은 왕자 자신이 처녀와 같은 평민의 신분으로 돌아가서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없이 순수하게 서로간의 사랑을 약속하는 방법이었다. 왕자는 이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왕국을 떠나서 평민의 신분으로 시골마을로 들어갔다.


인간의 순수한 사랑도 이렇게 큰 감동거리가 된다면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된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그것도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벅찬 감동을 주는 것입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당신 사랑을 보이셨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강렬한 것이며 또 얼마나 애절한 것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당신의 크나큰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면서 권위를 나타내셨다면 그분을 믿지 않을 사람이 여러분 중에 계시겠습니까? 또 우리에게 영화로운 천국을 보여주시면서 믿으라하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시지도 않으셨고 또 달콤한 솜사탕만을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신 것은, 오직 당신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오신 또 다른 이유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죄의 결과는 사람과 사람을 갈라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동료 인간들부터도 갈라져 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리스도 안에 일치함으로써 다시금 인간 상호간에 일치를 이루고 또한 하느님과도 일치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일치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면 일치의 촛점인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끼리도 서로 일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므로 그리스도와 일치하면 우리는 하느님과도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베들레헴 구유의 목적입니다.

인간을 동료 인간들과 일치시키고 또한 당신 자신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하느님이 가장 인격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당신의 섭리에 있어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축복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들에게 영원하고도 보편적인 왕국이 주어지리라는 약속을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약속된 왕국을 창건할 후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예수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분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마태 1,1-17) 소개한 것입니다.



4. 이제 성서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성서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성(人性)을 갖추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신화에서 볼 수 있듯 하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이 되셨다가 다시 영신적인 천상 세계로 돌아가는 천상인(天上人)이 아닌 것입니다.1) 이것을 마태오 복음저자는 예수의 족보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야곱은 (···) 다윗은 우리야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 솔로몬은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마태 1,1-16).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얼핏 보기에 별 뜻이 없어 보이지만, 이 무미건조한 듯 보이는 족보야말로 하나의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면, “2천년 전에 나자렛이란 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나시고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은 예수란 분이야말로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2) 우리는 이 거룩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입에 담고 있으나 그 이름이 어떤 신앙선언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곧 구약에서 예언되었듯이 인류를 구원하려고 내려오신 메시아라는 믿음의 선언인 것입니다.3)

하느님께서는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그리고 온전한 자유 안에서 시간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십니다. 영원하시고 자유로우신 그분은 운명에 매여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역사 속에서 운명에 속박당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분의 사람되심이 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역사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심으로써 ‘운명’을 떠맡으셨다는 것입니다.4)



5. 교회는 그 초기부터 다음과 같이 가르쳐 왔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며 응답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1요한 4,10; 4,14; 3,5 참조).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1요한 4,9; 요한 3,16 참조).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함의 표양이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마태 11,29; 요한 14,6 참조). 그리고 성부께서는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산에서 명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르 9,7). 참으로 그분은 지복의 표양이시며, 새 율법의 기준이십니다(요한 15,12; 마르 8,34 참조).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육화)이라고 부릅니다(요한 1,14 참조). 하느님 아들의 참된 강생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입니다(1요한 4,2 참조).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 초창기부터 “참으로 경외의 신비는 위대합니다”하고 노래한 기쁨에 찬 확신인 것입니다. “그분은 육으로 나타나셨도다”(1디모 3,16).5)

하느님 아들의 강생이라는 유례가 없는 아주 독특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분적으로 하느님이고, 부분적으로 인간이시라거나, 하느님과 인간의 불분명한 혼합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참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6. 이제 다시 한 번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인간 관계라는 복잡한 사슬에 인연을 맺고 인간 역사와 과거의 굴레와 여러 세대를 거쳐 온 유산에 눌리시며, 하느님이 하나의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한가운데 계십니다. 이것은 그분이 우리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는 헛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상의 용모를 갖추고 지상으로부터 아득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분, 하나의 숭고한 영상에 불과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두 발로 이 굳은 땅을 딛고 서 계시는 분, 다사다난한 인간사의 한가운데, 그리고 우리 인간들 가운데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에게는 인간의 위대함도 보이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의 어두운 그림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6).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사랑 자체라고 믿고 있습니다(1요한 4,8). 사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조건없이 남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상대편에게 내줍니다. 그는 상대편의 운명에 전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이 바로 상대편이 되어, 필요하다면 상대편을 대신하여 기꺼이 죽으려 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악하고 타산적인 인간의 눈에는 이 사랑이 어리석은 바보짓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어느 사제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은 바로 어리석게도(?)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요한 3,16).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기에 구태여 인간이 되지 않고서도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들처럼 타산적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끝이 없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선사하셨고,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인간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동참하기 위하여 당신을 극도로 비우셨을 때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예기치 않게 주어진 사랑의 화신, 하느님 자신이다. 그는 인간이 되어, 인간과 동고동락하며 함께 계신 하느님, ‘임마누엘’이시다(마태 1,23).7)


  

7.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독생성자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강생한 성자의 뒤를 따름은 자신을 송두리째 남에게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존재의 맨 밑에서부터 사랑으로 가득찬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와 ‘우리’만을 생각하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남’, 특히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강생한 성자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헌신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타적인 삶이란 참으로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용기 그리고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청합시다.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더해달라고 말입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용기는 생각이나 마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체득되는 것입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체험들을 생각해 봅시다. 처음부터 용기있는 사람은 극히 드묿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합니다면 하느님께서는 용기를 주실 것이고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께 희망을 둡시다. 희망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느님은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8.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구원의 촛불


그리스도의 강생사건은 우리의 역사 속에 담겨진 사랑의 불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연소시켜 세상의 어둠을 밝힘으로써 모두를 구원하는 촛불에서 강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불붙기 시작한 사랑의 불꽃을 세상 끝날까지 이어가는 것이 하느님 아들의 강생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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