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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리스도교 학파의 기원
작성일 2003-08-28 01:43
ㆍ추천: 1  ㆍ조회: 2913      
오리게네스-성서주석 작품, 영성신학,원리론,첼수스 논박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의 생애는 에우세비우스, 에우세비우스의 소실된 작품들에서 자료를 모은 히에로니무스, 포티우스의 상세한 보고 및 그의 제자인 기적가 그레고리우스의 「감사의 연설」에서 전해진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이전의 어떤 그리스도교 저자보다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의 교육과정에 따라 초등교육 외에 탄탄한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201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로 순교하였을 때, 어머니는 오리게네스의 옷을 숨겨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여 순교를 열망하는 그의 젊은 혈기를 꺾을 수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열망을 전 생애 내내 지녔으며,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한 뒤 고위관리가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기 때문에, 오리게네스는 어머니와 여섯명의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데메트리우스 주교가 오리게네스에게 문법학교에서 세례지원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여 그는 얼마 뒤 이 강의에 전념하였다. 그는 지나친 열정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교 문제만 전념하기 위하여 비종교적인 모든 책을 팔았다. 그러나 그는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강의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젊고 급진적인 혈기를 지닌 그는 하늘나라 때문에 고자가 된 사람들에 관한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 그는 학교가 번창하자 세례지원자 강의를 제자 헤라클레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이전의 클레멘스처럼 교양 있는 이교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과 신학에 몰두하였다. 오리게네스가 암브로시우스라는 부유한 사람을 영지주의로부터 개종시킨 일은 유명하며, 암브로시우스는 그에게 막대한 자금을 후원하였다.

오리게네스는 30대에 저술활동을 시작하였고, 수많은 여행을 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히폴리투스를 만났으며,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와 예루살렘에서 그곳 주교들의 친구가 되었다. 체사레아와 예루살렘의 주교들이 그가 평신도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우스는 이에 항의하였다. 또한 요르단 지방장관의 초대로 그곳에 갔으며, 황제의 모친 율리아 맘메아에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안티오키아에 갔다. 이러한 수많은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과의 교제는 그가 누린 명성과 존경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교제는 중요한 논쟁들의 원인이 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와 결별하는 동기가 되었다.

231년경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주교들은 그곳의 이단자들과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고 오리게네스를 초빙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팔레스티나를 거쳐 그곳으로 가는 육로 여행중 체사레아에 있는 주교인 친구들이 데메트리우스 주교의 허락 없이 그에게 사제품을 주었다(그는 고자였기 때문에 사제직을 받을 수 없었다). 이에 데메트리우스 주교는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오자 교회회의에서 그의 사제직을 박탈하고 그를 국외로 추방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판결이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로 떠나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서남아시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사상, 해석 방법, 신학을 전파하였다. 오리게네스는 그곳에서도 매일 설교를 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도움으로 일곱 명 이상의 속기사들이 그의 설교를 기록하였지만, 그가 행한 수백 번의 설교 가운데 단편 하나만 남아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순교할 기회를 놓쳤지만 데치우스 황제의 박해(250/51년) 때에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유명 인사가 공개적으로 배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리라는 생각에 박해자들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고통을 불굴의 정신으로 견디어냈으며, 이 가혹한 박해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끝나 다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후유증으로 건강을 해쳐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말년을 마지막 휴식처인 티루스에서 보냈으며, 13세기에도 그의 무덤이 그곳에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생활환경과 여러 특징이 그와 비슷한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하고는 고대교회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저술가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리게네스 자신과 그의 작품에 관한 후대의 논쟁 때문에, 저서 가운데 많은 그리스어 원본이 소실되었다. 게다가 4세기에 루피누스가 친오리게네스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는 부분들을 수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라틴어 번역본들은 신중히 이용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작품 목록과 수많은 단편 외에 오리게네스의 저서 가운데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단편들은 주로 성서주석서 선집, 「필로칼리아」(대 바실리우스와 그의 친구인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가 360년경 기획한 오리게네스의 작품 가운데 교의적 단락들의 모음집), 체사레아의 팜필루스의 「오리게네스 변론」, 친구와 반대자들의 작품, 오리게네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히에로니무스의 성서주석서에 남아 있다.



6.3.1. 성서주석 작품

오리게네스의 작품은 성서주석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오리게네스는 알레고리 해석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지만, 그도 맨 먼저 성서 본문을 문헌학적․비평적으로 탐구하는 낱말의 의미, 곧 역사적․문법적 의미를 성서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230년경 구약성서의 여섯 번역본(히브리 원본, 히브리 원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심마쿠스, 70인역과 테오도치온의 그리스어 번역본)을 대비(對比)하였다. 이때문에 이 육중역본을(시편의 경우 그밖의 다른 그리스어 세 번역본도 참고하였을지라도) “헥사플라”라고 부른다. 이러한 목적은 교부들이 문자적으로 영감을 받았다고 여기는 70인역의 본문을 가능한 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성서주석의 원칙을 「원리론」Ⅳ2,4-5에서 서술한다. “성서의 의미들은 세 가지 방법으로 영혼 안에 기록되어야 한다. 단순한 것은 문자의 육체로 세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명백한 의미라고 부른다. 문자의 영혼에서 약간 더 나아간 것과 완전한 것은 …‘장차 있을 좋은 것들의 그림자’인 영적 율법으로 세워진다. 인간이 육체, 영혼, 정신으로 이루어지듯이 성서도…. 그러나 육체적인 내용을 전혀 담지 않은 성서 본문들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영혼과 정신만을 찾아야 한다. ” 따라서 오리게네스는 세 가지 의미(육체적 또는 문자적 의미, 영혼적 또는 도덕적 의미, 정신적 또는 신비적 의미)로 성서를 해석한다. 이 경우 문자적 의미는 오로지 낱말의 직접적이고 명백한 의미일 뿐, 성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상징적 또는 전의적 의미가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상징적․전의적 의미에 관한 성서의 구절들을 결코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 성서 본문의 각 낱말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문자적으로 씌어 하느님께 적합하고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이런 의미는 더 높은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도덕적 의미는 성서 안에 담긴 계명들과 문자적 규정들을 넘어서 공동체 설교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성서에서 끌어낸다. 신비적 의미는 마침내 다음 세 가지 기능을 다룬다. 이 의미는 예형론적 해석으로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추론하고, 구원사에서 신앙에 관한 진술을 해석하며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희망을 설명한다. 곧, 신비적 의미의 중심과 실마리는 자신의 삶에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고 동시에 자신의 재림을 암시한 예수이다. 따라서 복음은 실재를 반영한다. 그러나 현세의 복음은 영원한 복음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미 복음과 교회의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요한 카시아누스는 덴마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6각시로 표현한 성서의 네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Li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문자는 사실들을, 알레고리는 네가 믿어야 하는 것을 가르친다.

도덕적 의미는 네가 행해야 하는 것을, 아나고기아(신비적 의미)는 네가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성서주석의 해석을 종종 이해할 수 없고 불합리한 것같다. 그러나 이 원칙들은 타당성을 지니며 이미 신약성서에서도 이 원칙들이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의미(마태 12,39-40) 또는 할례의 영적 의미(로마 2,29)〕. 오늘날의 독자나 해석가도 이 원칙을 이용하지 않고는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리게네스는 성서 본문을 문헌학적․비평적 의미로 정확히 파악하는 데 바탕을 두고 성서주석 규칙들을 이용하면서 많은 주석 작품, 곧 성서에 관한 거의 모든 작품을 세 가지 문학 장르에 따라 저술하였다.

-τομοι(토모이) = 학문적인 신학 주석서.

-σχολια(스콜리아) = 성서 본문에 관한 각주 또는 어구 설명.

-όμιλιαι(호밀리아이, 강해) = 속기사가 기록하고 뒤에 부분적으로 개작하여 출판된 공개적인 설교.

오리게네스의 주석서 가운데 어떤 작품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 「마태오복음 주석」가운데 8권, 「요한복음 주석」가운데 9권만이 그리스어로 전해지며, 「아가서 주석」가운데 4권, 「마태오복음 주석」가운데 후반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10권이 라틴어로 남아 있다. 스콜리아는 단편으로만 전해지며, 강해는 총 279편이 전해지나 그 가운데 21편만이 그리스어 본문이다.



6.3.2. 영성신학

오리게네스의 영성신학은 모든 성서주석서, 특히 강해에서 펼쳐진다. 그는 「아가서 주석」에서 신부를, 한편으로는 교회로,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결합된 인간의 영혼으로 해석하였다. 두 해석은 교부시대의 해석의 기초가 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의 산에 올랐듯이, 참된 영지주의자(여기서는 필로와 클레멘스를 가리킴)는 영적으로 하느님께 올라간다. 이를 위해 참된 영지주의자는 기도하고 덕을 행하여 정욕을 끊어야 하며, 육의 감각 기능들을 영의 감각 기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인간이 다섯 가지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참된 영지주의자는 하느님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기 위하여 내적인 감각 기능을 지녀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타락으로 가려진 그의 완전한 모습을 되찾는다.



6.3.3. 「원리론」

오리게네스는 220-230년에 저술한 신학 작품에 Περι άρχων이라는 적절한 표제를 달았다. 그는 신학의 근본 내용을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 기록하였다. 제1권에서는 창조 이전의 세계, 삼위일체와 영적 창조물, 제2권에서는 창조주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의 동일성, 세상과 인간의 창조와 구원, 제3권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 유혹, 죄, 종말에 모든 사물이 하느님께 본디의 상태로 돌아감, 제4권에서는 신앙의 원천인 성서의 영감과 해석을 다룬다.

오리게네스가 서론에서 강조하듯이 성서와 “신앙의 규범”은 모든 신학의 기초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신학이 정통적이며 교회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음을 명백히 제시한다. 이 사실은 당시의 이단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마르치온파에 대해서는 창조주의 자비, 예수의 아버지와 창조주의 동일성, 두 성서의 일치를, 발렌티누스파에 대해서는 자유의지와 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그리스도 가현설파에 대해서는 구원의 전제로 그리스도의 참된 육화를, 양태론파에 대해서는 신적 세 위격의 자주성을, 입양성파에 대해서는 성자의 영원한 탄생을 증명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은 후대에 더 이상 정통신앙으로 간주되지 않아 오리게네스 존쟁을 일으킨 신앙에 관한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다.

1) 그의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를 명백히 구분한다는 점에서 종속적이다. 그는 이 구분에서 성자를 하위의 능력으로 본다.

2) 영혼의 선재론: 인간의 영혼은 세상 이전에 창조되었다. 그러나 영혼이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 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3) 아포카타스타시스에 관한 설: 성자의 구원행위는 종말에 사탄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존재를 다시 복된 본디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한다.

「원리론」은 몇몇 그리스어 단편을 제외하고는 루피누스의 라틴어 번역으로만 완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라틴어 번역은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정확히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루피누스는 397년 오리게네스의 신학에 관한 첫번째 논쟁 때문에 이 작품을 번역하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손질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399년 히에로니무스가 글귀를 충실하게 번역한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소실되었다.



6.3.4. 「첼수스 논박」

서론에서 밝혔듯이 니체아 공의회 이전의 그리스도교와 이교인의 논쟁은 교양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 논쟁이었다. 오리게네스는 논쟁에 선뜻 나서지 않았지만 논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교인 철학자 첼수스는 178년경 그리스도인을 논박하는 「참된 가르침」이라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이 작품은 세간에 널리 퍼진 대중의 선입관에 따라 그리스도교를 비방하는 작품들과는 매우 달랐다. 첼수스는 그리스도교에 관해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철학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논박하였다. 그는 당시의 플라톤 철학과 혼합주의 철학에 쉽게 결합된 로고스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올바른 철학의 목표이기도 한 훌륭한 윤리와 모범적인 생활방식을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유다교․그리스도교의 메시아에 관한 특징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첼수스에게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사기꾼이고 마술가였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신화는 사도들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인의 철학적 신에 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참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에게 전혀 호응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피해를 가능한 줄이기 위하여 오리게네스에게 이에 대해 변론하라고 독촉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왜곡된 비난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극복할 수 있고 신앙 안에 굳건히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비난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는 신념에 따라 처음에는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아직도 전혀 맛보지 못했거나 바울로 사도의 말대로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마침내 반박서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245-248년경에 저술되었으며 8권으로 구성된 「첼수스 논박」은 첼수스의 논증을 면밀하게 다라가며 많은 구절을 첼수스의 작품에서 인용하였다. 이 논박서로 소실된 원본의 4분의 3정도는 복원할 수 있다. 첼수스의 작품은 대략 세 가지 중요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1) 신적 근원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인간적 근원에서 유래하는 유다교에서 떨어져 나간 종파로서 그리스도교.

2)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왔다는 것에 바탕을 둔 한 메시아의 실존 불가능성.

3) 모든 관점에서 전통철학보다 열등하고, 그리스도교의 종파적 유일신론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무가치.

오리게네스의 반박서는 첼수스의 작품 순서에 따라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유래 및 신론과 육화론으로 시작하며, 그리스의 영웅숭배와 제신숭배를 그리스도와 비교한다. 제4-6권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인 삼위일체, 창조, 선과 악, 하느님과 세상,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교회, 그리스도교적 삶, 종말론을 설명한다. 제7-8권에서는 마지막으로 이교인, 유다인, 그리스도인의 신 흠숭에 대한 근원적 문제점으로 돌아가 한 분이신 참된 하느님과 그분에 대한 흠숭을 논증한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로 그리스도의 기적 및 그리스도인이 늘 실행하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로 논증한다.

6.3.5. 오리게네스 논쟁.

오리게네스 신학의 유포와 영향은 중세 이후의 몇 세기 동안은 올바로 평가될 수 없었다. 4세기 말경 오리게네스 신학에 관한 세기에 걸친 논쟁이 시작되었다. 논쟁을 일으킨 사람은 콘스탄티아의 주교 에피파니우스였다. 그는 당시까지의 모든 이단을 다룬 방대한 작품 「약상자」에 오리게네스도 포함시켰다. 그는 393년 예루살렘에서 교회축성 축일 설교를 하면서 그곳의 주교 요한을 오리게네스주의자라 비난하고, 그에게 오리게네스를 단죄할 것을 요구하였다. 곧이어 어떤 수도자가 이에 대한 지지를 얻고자 팔레스티나의 수도원을 순회하였다. 루피누스는 이 수도자가 이에 대한 지지를 얻고자 팔레스티나의 수도원을 순회하였다. 루피누스는 이 수도자의 제안을 거부하였으나 히에로니무스는 호의를 가지고 그를 맞이하였다. 이 사건으로 에피파니우스, 히에로니무스,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가 한편이 되고, 루피누스와 예루살렘의 요한이 한편이 되는 첫번째 오리게네스 논쟁이 일어났다.

6세기에 시나이에 있는 두 곳의 은수자-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오리게네스 신학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오리게네스 논쟁은 정점에 이르러 결말을 내리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43년 교황도 총대주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반오리게네스 칙령을 반포하였다. 칙령에 따라 황제의 치안관이 오리게네스의 모든 작품을 가능한 한 몰수하여 없애버렸다. 이때문에 오늘날 오리게네스의 작품 가운데 원본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더욱이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는 규범규정 11조의 이단자 가운데 오리게네스도 언급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초안에도, 공의회를 승인한 비길리우스 교황의 편지에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의회가 오리게네스를 단죄하지 않았으며, 그의 신학을 이단으로 분류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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