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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자료실
 
작성자 교회사,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2-06-04 16:33
ㆍ추천: 0  ㆍ조회: 694      
최창현
 

총회장 최 창현(요한, 1759 - 1801)

  역관(譯官) 출신 최 창현은 한양의 입정동(笠井洞)에서 살았다고 하여 교우들은 그를 관천(冠泉)이라는 호를 붙여 불렀다. 책을 베끼는 솜씨가 남달리 뛰어난 그는 천주교를 신봉한 이후로 교리서를 베끼는 일로 교회에 봉사하였다. 그는 「주일과 축일 성경의 해석」이라는 한역서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교회 서적을 원하는 신자들은 그에게 찾아와 부탁하였다. 최 창현은 가성직 교계제도의 초창기 교회 안에서 신부로서 활동하면서 집을 한 채 세내어 미사성제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장소로 제공하였다.

  활동적이었던 그는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에게 성사받을 준비 시키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완수하였다. 부친 또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집에서 열리는 교회 집회를 두둔하고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1788년에 가성직 교계의 교회가 해산된 이후로 최 창현은 윤 유일, 최 인길, 지 황(사바), 강 완숙(골롬바) 등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성직자를 모시는 일을 계획하여 1795년에 성공하였다.

  주 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에 최 창현은 총회장으로서 사목활동을 수행하는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시기도 하고 신부를 대신하여 신자들에게 교리도 가르쳤다. 그는 지혜롭고 견식이 넓은 사람으로서 간결하면서도 자세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교리를 설명하여 듣는 이에게 영적 이익을 주었다. 또한 최 요한은 고통 속에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여 누구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그는 초창기 교회에서 덕망이 높아 모든 이에게 신뢰를 받던 지도자였다. 1800년 말에 조선 왕국의 정부가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최 창현은 교우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병이 들어 치료를 받기 위해 1801년 1월 5일(음력)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정부는 최 창현이 천주교의 주요 인물임을 알아내고 배교자 김 여삼의 밀고로 그를 체포하였다. 최 창현은 포도청의 심문에서 매에 못 이겨 한때 베교하여 풀려났으나 곧 다시 포도청에 와서 그의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하겠다는 결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치도곤 13대를 맞고도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을 설명하였다.   그는 왕에 대한 불경죄와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어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넘어가 2월 25일(음력)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다음날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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