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 홈 | 거룩한독서 & 성경 | 가톨릭자료실 | 미사웹진 | 사제관 | 갤러리&미디어 | 음악카페 | 사무실|신자광고 | 미사웹메일

회원등록 비번분실

  News  
가톨릭자료실
구약성경이야기
신약성경이야기
타종교자료실
신학자료실
가톨릭사전
교회법자료실
가톨릭유머
배꼽잡는이야기
신학자료실
전례자료실
가톨릭교리자료
교회사자료실
신삼위일체론
신학자료실



 column,criticism
교회사 자료실
 
작성자 교회사,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2-06-04 16:32
ㆍ추천: 0  ㆍ조회: 917      
신유박해
 

신유대박해

10.1.1 박해의 원인

  전국 규모의 첫 대박해인 신유대박해의 원인은 조선 왕국의 동양적 유교 관념과 천주교의 서구적 그리스도교 사상의 대립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난 사회적 충돌에 있었다.

  조선 왕국의 천주교인들은 천주님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인 동시에 주재자로서 하늘과 땅의 대군(大君) 및 대부(大父)이시며 육친 부모와 세속 군주보다 높은 절대자라고 믿었다. 이러한 천주 신앙의 절대론은 조선 유교 사회의 부가장권적(父家長權的) 가족주의와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절대 전제군주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위협이었다.

  천주교 신도들은 전통적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의 이단 행위로 배격하여 이를 폐지하였고 국왕을 천주 밑에 예속시킴으로 왕권을 상대화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의 폐지는 인륜을 부정하는 패륜(悖倫) 행위로 낙인찍혔고 왕권의 상대화는 국가 및 국왕 우선의 정교일치 체제인 조선 왕국의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반체제 요소로 보였다. 따라서 위정 당국은 천주교를 조선 유교 사회의 기본적 충효 사상을 파괴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단죄하여 박해를 선언하였다.

  또한 천주교의 그리스도교적 평등사상은 양반 중심의 봉건적 계급주의를 부정하였다. 이 평등사상은 중인 계층의 교회 지도자의 등장과 활동, 신분 계급을 무시한 신자들의 결혼, 노비의 해방 등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조선의 지도층에게 사대부 중심의 신분 계급을 파괴하는 계기가 되리라는 위기 의식을 초래하여 천주교는 위정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유대박해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 원인은 왕위 계승과 예론(禮論)을 둘러싸고 학벌(學閥), 지벌(地閥), 인맥(人脈)으로 연결된 양반 계급 사이의 파벌적 당쟁과 이에 따른 국왕의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의 등장과 함께 벽파와 시파의 새로운 붕당의 대립에서 나타난 벌열정치(閥閱政治)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 있었다. 조선 왕국의 고질적 당쟁은 1575년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으로 시작하여 이합(離合)과 집산(集散)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숙종(肅宗) 9년(1683)에 이르러 동인계의 남인(南人)과 소북(小北), 서인계의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등의 사색 당파가 고정되었다.

  그러나 소북은 이미 2년 동안 집권하다가 1608년에 실권하여 그 명백만 유지하고 있었고, 남인계는 1687년에 정권을 잡았으나 갑술옥사(1694)로 치명적 타격을 받아 다시 정치 무대에서 독립된 집권당으로 등장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이후부터 소론과 노론의 생존 경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투쟁이 일어나 영조(英祖)의 즉위와 함께 노론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다시 임오년(1762)의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으로 벽파(辟派)와 시파(時派)라는 새로운 파쟁을 일으켰다.

  영조는 1750년에 사도세자에게 대리 청정(代理聽政)을 명하였으나 세자는 학문을 게을리 하고 국정에 소홀하며 방탕한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따라서 일부 대신들이 세자의 부덕(不德)을 임금에게 상소하여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서 비참히 죽게 하였다. 이러한 사도 참사를 둘러싸고 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한 소수파 노론은 죽은 세자를 동정하였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오빠인 김귀주의 다수파 노론은 사도세자의 잘못을 주장하였다.

  홍 봉한 일파는 시파 또는 북당(北堂)이라고 불렸고, 김귀주의 파벌은 벽파 또는 남당(南堂)이라고 일컬었다. 이러한 시파와 벽파의 분열은 재야의 소론, 남인, 소북에서도 발생하였는데 이 파벌들은 대부분이 시파에 속하였다. 특히 남인계 시파는 천주교인이거나 천주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조 말년에는 벽파인 김귀주의 외척 세력이 득세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장기 집권을 위해 세손(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위임하고 승하하였다. 이제 세손(정조, 正祖)이 즉위하자 김귀주 일파는 시파계 노론의 외척 세력인 홍봉한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숙청되었고 김귀주는 흑산도로 유배갔다가 9년 후에 복귀의 은사를 받아 나주에서 어려운 생활 중에 병사하였다. 정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시파계의 노론, 소론, 남인, 소북을 골고루 관직에 기용하였다.


10.1.2 박해의 과정

  1800년 6월(음력) 정조가 승하하고 6일 후에 11세의 나이 어린 순조(純祖)가 등극하자 증조모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실권자가 된 김 대비는 오빠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개인적 복수 감정에서 천주교인 또는 신서파에 속하는 남인계의 시파인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 정책을 하였다.

  따라서 그는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선언하였으며, 이는 천주교가 시파와 벽파의 당쟁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정순왕후가 1800년 12월 17일(음력)에 최필공(토마스)을 체포, 구속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1801년 1월 10일(음력)에 대왕대비는 사학(邪學) 엄금의 교서를 공포하여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여 금지하였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여 신자들을 색출, 고발케 하고 배교하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을 엄명하였다.

  오가작통법은 성종(成宗) 16년(1485)에 한명회가 주창한 것으로 다섯 집을 한 통으로 조직한 것을 토대로, 숙종 1년(1675)에 윤 휴가 자치 조직법으로 제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법은 인보상조(隣保相助)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기근에 대한 대책으로 마을에서 식량을 관리하는 데에 연유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이(理), 방(坊), 통(統)을 조직하여 서울은 5호(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를 두고 그 위에 방을 두어 관령(管領)이 담당하였고, 지방은 5호를 1통, 5통을 1리로 편성하여 상부 조직으로는 면(面)이 있어 여기에는 권농관이 관장하였다. 그러나 후에 오가작통법은 부역자의 동태를 살피는 데에 이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편성하여 통단위로 연대 책임을 지우는 제도로서, 서로 감시하고 고발함으로써 인화(人和)를 파괴하는 비인도적 사찰 제도의 악법으로 변모하여 천주교인들을 적발하는 목적과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사학 엄금의 교서 반포 이후 천주교 박해는 한양의 총회장 최창현(요한)의 체포를 시작으로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자수와 함께 공서파의 상소로 교회 지도급 인물인 권철신(암브로시오), 이승훈(베드로), 정약종(아우구스띠노), 홍낙민(루가),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존창(곤자가의 루도비꼬), 유항검(아우구스띠노), 강완숙(골롬바), 황사영(알렉산데르) 등이 체포되어 사형 또는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 외에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증거하여 신해대박해로 희생된 신자수는 기록에 다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1백여명이 순교하였고 4백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유배형을 받아 5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해년 말에 정부 당국의 탄압이 완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대한 청국의 반응을 걱정하였고, 국왕 순조가 천주교인의 색출과 처형으로 일어나는 사회 혼란의 저변 확대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10월 21일(음력)에 토사교문(討邪敎文)이 반포되었다. 이 윤음은 정부 당국이 천주교 국가의 기반을 위태롭게 하고 사회 윤리를 파괴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엄금하면서 동시에 일단 처벌을 받은 천주교인과 남아 있는 신자들을 색출하여 관청에 고발하는 것을 금지 시킴으로 공식적 천주교 박해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토사교문은 천주교 신봉을 금지하는 법령으로 이후 천주교 박해의 근거를 제시하는 기본법이 되었다.


10.1.3 박해의 결과

  토사교문이 반포된 이후 1802년에 들어서면서 광폭한 천주교 박해의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신자들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차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신유대박해는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 커다란 변화를 갖고 왔다.

  첫째로 조선 왕국의 천주교회는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목자를 잃은, 33년 동안의 목자 없는 시대(1801-1834)에 들어섰다. 신자들은 여러 가지 고통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그들은 극심하게 정신적인 고통이나 물질적 곤란을 받았다. 양반 계층의 신자 집안에서는 가장을 잃은 부녀자와 어린이가 귀양 속에서 노비 생활을 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여 걸인 신세가 되었다. 일반 서민층의 신자들은 체포나 구속, 처형의 위험은 적었지만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격려하던 신부와 지도자들을 잃고 서로 연락도 하지 못하고 헤어져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천주학쟁이’라는 조롱과 학대 속에서 생활하는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자들은 박해 중에 교리서와 성물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비웃는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비밀히 기도하며 지냈다. 이들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 없다는 종교적 갈등을 극복해야 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신앙심이 약한 신입 교우들은 아무런 교리적 지식과 신앙적 격려를 받지 못하고 실망에 떨어져 천주교 신봉은 자기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만을 안겨다 주었다면서 원망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배교하기까지 하였다.

  둘째로 교회 조직에 있어서 초창기 교회의 양반 계급 지도자들이 순교한 이후 지도층이 세대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새로운 조선 천주교회의 제2세대의 인물로 바뀌었다. 순교한 양반 계층의 제자들과 특히 중인 계급의 신자들이 교회 지도자들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박해 중에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모으고, 냉담 교우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도록 권면하면서, 외교인의 눈을 피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외진 곳에 ‘교우촌’을 형성하여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335 최창현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689
334 교회 지도자 : 한국교회 첫 회장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599
333 신유박해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917
332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762
331 진산사건, 윤지충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999
330 중국 교회의 의례 논쟁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726
329 예수회의 중국 선교 방법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623
328 북경교구의 조선 교회 담당과 선교사 파견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629
327 성직자 청원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720
326 가 성직제도의 문제점 발견 교회사, 한국교회사 2002/06/04 574
1,,,11121314151617181920,,,44
올바른 인터넷 문화를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