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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사,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2-06-04 16:32
ㆍ추천: 0  ㆍ조회: 764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진산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는 조선 교회 안에 지도층의 변화를 가져왔다. 양반층의 지도자들이 사망하거나 순교 또는 배교하여 교회 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새로운 지도층으로 중인 계급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교회 지도자들은 최 창현(요한), 최 인길(마티아스), 지 황(삽바스), 강 완숙(골롬바) 등이다.

  1793년에 이르러 박해의 소용돌이가 잔잔해지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를 모시는 계획을 다시 추진하였다. 이미 두 차례(1789/90, 1790)에 걸쳐 북경을 왕래한 윤유일을 책임자로 지황과 몇 신자들로 구성된 북경 파견 밀사단을 조직하였다. 최인길은 조선에 파견된 신부의 숙소를 서울에 마련하여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1793년 말에 윤유일 일행은 조선 왕국의 사절단에 끼여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국경 지대에 이르자 윤 유일은 의주에 머물며 신부를 만나기로 하고 지 황과 다른 한 명의 교우가 북경으로 들어가 구베아 주교를 방문하고 신해박해의 소식과 조선 교회의 사정을 보고하면서 성직자를 모시러 왔음을 알렸다. 북경 주교는 목자 없는 조선 교회에 성직자를 파견하기로 결심하고 일단 밀사들을 국경 지대로 보내어 그곳에서 신부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는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망한 레메디오스 신부 대신 42세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선임하였다.


9.1.1 조선 입국

  주 문모 신부는 1752년에 중국 강남성 소주부 곤산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윈 그는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자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서구 학문에 흥미를 느끼면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후에 그는 북경에 올라와서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첫 졸업생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주 문모 신부는 신앙심이 깊은 성직자로서 중국 문학에 능통하였고 신학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주 문모 신부는 ‘벨로조’라는 포르투갈식 이름을 갖고 있엇다. 그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성무 수행을 위한 특권을 위임받고 1794년 2월에 그의 임지인 조선으로 떠났다. 20여 일을 걸어 국경 지방의 약속 장소에 도착한 주 신부는 조선의 연락 교우들을 만났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압 정책으로 그들은 국경 감시가 삼엄한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때문에 중국과 조선을 가르는 압록강을 이용해야 했는데 이미 강물이 녹아서 겨울철에 강이 언 다음에 입국하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주 문모 신부는 10개월 동안 약속한 날을 기다리면서 구베아 주교의 지시대로 만주에서 교회를 순회, 방문하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그해 12월 하순에 주 문모 신부는 지 황을 만나 조선인으로 위장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23일에 입국, 다음해 1월 초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주 신부의 입국은 5년 동안 성직자를 모시기를 원하던 조선 신자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무한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9.1.2 사목활동

  주 문모 신부는 신자들이 마련한 한양의 북촌(지금의 계동)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성무를 집행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795년 성주간에는 성세와 보례를 집전하면서 한자를 통한 필문필답으로 신자들의 죄의 고백도 들었다. 마침내 한국 천주교 역사상 이 땅의 신자들을 위한 최초의 미사 성제가 부활 대축일에 감격스럽게 봉헌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목 생활 6개월 만에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의 입국 사실과 거처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영익 이라는 신입 교우를 통해서 조정에 알려져 그해 6월 27일에  체포령이 떨어졌다. 다행히 일부 신자들이 배교자의 밀고 사실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 신부는 양반 가문의 여교우인 강완숙의 집에 있는 나무광에 피신하였다. 조선 사회의 양반 집은 관헌의 사찰과 가택 수색을 받지 않으며, 더우기 부녀자가 주인인 집에는 외간 남자의 출입이 금지되는 고유한 관습이 있었다. 때문에 강완숙의 집은 주 신부가 머물러 있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주문모 신부는 순교할 때까지 6년 동안 강완숙의 집을 사목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 동안에 주 문모 신부는 어느 정도 조선 풍습을 익혔고,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럽게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발각의 위험 때문에 그의 가정 방문과 사목활동은  비밀에 싸여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제한된 활동 속에서도 주 신부의 입국 이후 신자수는 6천여 명이 증가하여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개종자들 중에는 왕족도 있었다. 주 신부는 1786년에 역모리로 사형 또는 귀양으로 처벌된 왕손의 두 부인을 영세 입교시켰다.

  주 문모 신부는 사목활동 중에서 신자들의 교리교육과 영성 강화에 주력하였다. 주 신부는 언어 장벽 때문에 필담이나 통역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치고 영적 훈화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또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책을 쓰는 등 저술 활동을 통해서 사목활동에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사순절과 부활 시기의 준비를 안내하는 소책자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신자들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을 때에 갖추어야 할 마음의 준비에 대해서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한 신심서로서 후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명도회’(明道會)라는 평신도 단체를 설립하여 회칙을 만들었으며 회합 장소를 정하고 사회자를 임명하였다. 명도회의 회원들은 소수로 구성되어 집회에서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신앙의 진리를 신자들과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협조하였다. 황사영의 진술에 의하면 이런 모임이 여섯 곳에서 열렸다고 해서 ‘육회’(六會)라고 불렀다.

  주 문모 신부는 조선의 정부 당국으로부터 신교의 자유를 얻고 안전한 선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계속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포르투갈 왕에게 대선박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 조선 왕국과 포르투갈이 국교를 체결할 것을 건의하였다. 주 신부는 이 편지를 북경 교회에 전달할 사람으로 신자들이 천거한 황 심(토마스)을 택하였다. 이 밀사는 옥천희(요한)와 함께 1797년에 조선 왕국의 동지사행에 끼여 북경 주교를 방문하여 편지를 전하였다.

  북경 주교는 주 문모 신부와 조선 교회 신자들의 건의에 대해서 “내가 마땅히 우리 나라(포르투갈) 임금에게 보고하겠으나 배를 청하여 오게 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우리 나라에서 만일 조선 왕국에 금교령이 있는 줄을 알게 된다면 국가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믿지 마십시오”라고 답변하였다.

  이후에도 1798년부터 1800년까지 매년 밀사들이 파견되어 북경의 구베아 주교를 방문하여 조선 교회의 편지를 전달하고 답장을 받아왔다. 북경 주교는 서양의 큰 선박이 파견되는 것은 어렵다고 전하면서도 성직자는 계속 보내겠다고 답하였다.   


9.1.3 자수 및 순교

  1800년 6월 28일(음력)에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던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국왕에 즉위하자 그 계증조모인 왕대비 김씨 정순왕후가 섭정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실권자인 대왕대비 김씨는 정치적 보복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801년 1월 10일(음력)에 왕대비 김씨의 이름으로 천주교를 사교로 엄금하는 국왕의 교서가 반포되고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이때에 주 문모 신부는 또 한번 배교자의 밀교 대상이 되었다. 김여삼이라는 냉담 교우가 주 신부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이뭉과 개인적 물욕 때문에 포도청에 가서 외국인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고 있을 것이라고 고발하였다. 밀고자는 관리에게 적지 않은 봉급이 보장된 관직을 약속받고 주 신부의 숙소에 안내할 날을 정하였다. 그러나 김여삼이 여행 중에 병이 들어 약속한 날에 귀가하지 못하여 신부의 체포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주문모 신부는 이 사실을 신자를 통해서 보고받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신부의 은신처에 대해 추궁을 받고 불응하는 경우에는 죽음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희생된다고 보고 자기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신자들의 어려운 처지가 해결된다고 믿었다. 신자들의 집에 잠시 숨어 있다가 귀국길에 오른다. 그는 도중에 목자로서 자기 양떼와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정부당국이 박해의 초점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니 신자들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의금부에 가서 자수하며 “나도 천주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인데, 들으니 조정에서 그겻(천주교)을 엄중히 금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에 스스로 와서 죽기를 구하는 것이오. 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찾는 그 신부요”라고 말했다. 그는 곧 감금되었다.

  주 문모 신부는 심문 중에 자기의 입국 목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있으며 천주교 신도들이 반역죄로 기소, 처형되는 사실에 반론을 전개하면서 천주교가 역적 행위를 할 이유가 없음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주 신부가 외국인, 특히 중국인이라는 점에서 외교상의 문제 때문에 격론이 일어났으나 다수의 강경파들이 그를 군법에 회부, 효수형에 처하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로 결정하였다. 1801년 4월 19일에 주문모 신부는 한강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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