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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사,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2-06-04 16:31
ㆍ추천: 0  ㆍ조회: 1003      
진산사건, 윤지충
 

진산사건

  중국의 전통적 의례인 배공제조에 대한 교황청의 금령은 조선왕국에 있어서도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조상 제사 문제로 조선 교회가 처음으로 박해를 받은 계기는 1791년(신해년)에 전라도 진산에서 일어난 사건(신해박해)이었다. 신해년의 진산사건은 윤지충(바오로)이 모친상을 당하여 천주교의 금령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神主)를 소각시켰을 때, 이에 동조한 내종사촌이 권 상연(야고보)와 함께 주자가례를 위배하였다는 죄목으로 순교함으로써 일어난 정교의 충돌, 즉 천주교와 조선의 유교 사회 사이에서 발생한 최초의 공식적 충돌이었다.

  윤 지충의 집안은 본래 전라도 해남의 양반 가문으로서 그의 아버지가 한의사로 성공하여 진산의 장구동(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으로 이사왔다. 그는 이곳에서 1759년에 태어나 25살에 과거(소과, 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1784년 겨울에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어가 읽고 연구, 묵상하면서 그의 사촌 정약전(바오로)에게 천주교 도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1785년에 천주교 탄압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교리서들을 불살랐지만, 1790년에 윤유일이 전달한 조상 제사와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북경 주교의 명령에 순종하여 집안에 보존하였던 신주를 소각하였다.

  안동이 고향인 권 상연은 공주로 이사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윤지충에게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읽으면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도 천주교를 신봉한 이후로 부모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

  윤 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1791년 여름, 제사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가 정적으로 표명되는 기회가 닥쳤다. 이때 윤지충은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자식으로서 드릴 수 있는 상례를 모두 드리기는 하였으나 자기 신앙 때문에 제사만은 지내지 않았고 어머니의 위패도 모시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유교 사회의 부가장권적(父家長權的) 가족주의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인륜(人倫)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주위의 친지들은 윤 지충의 태도에 대해서 욕설을 퍼붓고 관가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권 상연만은 윤 지충의 행동을 적극 옹호하였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홍 낙안이 이 소식을 듣고 1791년 9월에 좌의정인 채 제공에게 청원서를 내어 윤지충의 엄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진산 군수인 신 사원에게는 범인의 집을 수색하여 체포하라고 독촉하였다. 처음에 이 소식을 들은 윤 지충과 권 상연은 피신하였다가 10월 26일(음력)에 진산 관청에 자수하였다.

  한편 한양의 조정에서는 홍 낙안의 청원서 때문에 사방에서 체포된 두 사람에 대한 극형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남인계로서 친지들 중 천주교인이 있던 채 제공은 온건한 판결을 주장하면서 국왕에게 진언하였다. 정조 역시 이 문제를 중앙 정무(법조)보다는 지방(군수)에서 조용히 해결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 사건이 남인 사이의 싸움임을 통찰하고 남인계의 영수인 채 제공에게 사건을 종결짓도록 위임하였다.

  진산 군수는 윤 지충과 권 상연에게 천주교라는 이단에 빠진 이유를 물으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는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배교 요구를 거절하였다. 군수는 잡아 가두었던 윤 지충의 삼촌은 석방하고 두 사람을 전라도 감영으로 보냈다. 여기서도 윤 지충과 권 상연은 감사 정 민시에게 비슷한 심문을 받고 공술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공술서에서 천주교 입교 동기와 천주교의 교리와 윤리를 설명하면서 특히 천주교의 계명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왕에 대한 충성을 명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감사는 두 사람을 다시 심문하고 형조에 보고하였다.

  정조는 형조판서 김 상집을 통해 전라도 감사의 보고를 받고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엄벌을 요구하는 주위 인물들의 재촉에 못이겨 좌의정에게 판결을 내리도록 지시하였다. 결국 진산사건을 조용히 마무리 짓기를 원하던 채 제공이 국왕에게 극형을 촉구하였다. 정조는 죄인들을 참수형에 처하고, 잘라진 머리를 5일 동안 매달아 주민들에게 보여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명령하였다.

  1791년 12월 7일에 윤 지충과 권 상연은 잔치집에 가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기도와 강론을 하면서 사형장(지금의 전주 풍납문 앞)으로 끌려갔다. 사형받기 직전에 두 사람은 형집행을 주재하는 관리에게 신주 공경과 배교의 요구를 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33세의 윤 지충과 41세의 권 상연은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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