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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회사,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2-06-04 16:30
ㆍ추천: 0  ㆍ조회: 727      
중국 교회의 의례 논쟁
 

중국 교회의 의례 논쟁

  중국의 전통적 의식 문제는 선교사들에게 당면한 가장 곤란한 현안 문제로서 중국 교회의 생사(生死)가 걸린 쟁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였다. 여기에 서구국가의 정치적 경쟁과 수도회의 상호 대립이 얽혀 더욱 복잡해졌다. '의례 논쟁'으로 중국 교회는 내적 분열과 외적 박해의 시련을 자초하였다.

  1635년에 도미니꼬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마테오 리치의 적응화 선교 정책을 따르고 있던 예수회를 교황청에 고발함으로써 중국 의례 문제는 전체 가톨릭 교회 안에서 격렬한 신학적 쟁점이 되었다. 이어서 1643년에 다시 도미니꼬회의 후안 밥티스타 모랄레스가 포교성성에 질문서 형식으로 예수회의 선교 방법을 고소하자 1645년 9월에 교황 인노첸스 10세(1644-1655)는 모랄레스가 지적한 예수회의 중국 의례 내용을 잠정적 결정으로 단죄하였다.

  이러한 조처에 대해 중국 예수회도 대표를 파견하여 모랄레스의 고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 그들의 선교 정책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결과적으로 1656년 3월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55-1667)는 "중국인 신자들의 공자 공경과 조상제사에 대한 의식이 단순히 국가적 행사이며 전통적 민속에 속하는 행위로서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에 대한 배교 표시의 위험만 없다면 허용될 수 있다"는 잠정적 결정을 내렸다.   한편 중국에서는 1667년 말,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모두 모여 1656년의 교황청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도미니꼬 수도회는 1656년의 교령으로 1645년의 교령이 효력을 상실하는지에 대해 교황청에 문의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1669년 11월에 교황 끌레멘스 9세(1667-16690는 환경에 따라서 두 교령이 모두 적용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조처로 중국 교회는 의례 논쟁으로 더욱 혼란에 빠졌다.

  도미니꼬 수도회와 빠리 외방 전교회는 예수가 중국 지도층의 환심을 사고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가톨릭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매도하였다고 비난하였고,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반대파들이 중국인 정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의 선교 업적을 파괴하려 한다고 반박하였다.

  1693년에 복건성의 교황 대리 감목인 샤를르 매그로 주교(빠리 외방 전교회 소속)는 자기 관할 지역의 성직자들에게 배공제조의 의식 및 상천과 천이라는 단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모든 성당에서 경천(敬天)이라는 표시를 제거하도록 명령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특사를 파견, 중국 의례 문제를 재검토, 결정하도록 요청하였다.

  반면에 예수회는 중국의 황제 강희제에게 배공제조와 '상천'과 '천'이라는 용어에 대해 중국적인 참된 의미를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황제는 "공자에게는 다만 입법자로 공경을 드리는 것이고, 조상 제사는 죽은 이의 업적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이며, '천'은 하늘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을 의미한다"고 답변하였다.

  예수회는 황제의 답변서를 로마 교황청에 보냈다. 1701년에 로마에서 신학자들이 양측의 주장을 검토한 후에 예수회의 정책을 단죄하였다. 이어서 1704년 11월 20일에 교황 끌레멘스 11세(1700-1721)는 로마 신학자들의 결정을 교서로 반포하였고, 1715년 3월 19일에는 중국 의례를 금지하는 교서를 공포하였다. 이어서 1742년 7월 11일에 교황 베네딕또 14세(1740-1758)가 교서로써 끌레멘스 교황의 금령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결정은 향후 200년 동안 동양에서 가톨릭 선교 활동을 지배하였으며 이는 교회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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