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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7-01-11 17:52
ㆍ추천: 0  ㆍ조회: 2383      
현대 교회의 좌표(1984~2000년)
 

현대 교회의 좌표(1984~2000년) 


4-1. 신자·수도자·성직자

1980년대 한국 교회는 연평균 신자 증가율이 7.5%를 나타내며 꾸준히 성장하면서, 개신교나 전통 종교보다 2.1배 이상 높은 성장률을 나타낸다. 1980년대 가톨릭 교회가 성취한 성장률은 1960년대(6.2%)나 1970년대(5.2%)의 성장률보다 높다. 1984년 한국 교회의 신자 수는 모두 185만여 명에 이르고, 이는 당시 전체 인구의 6.0%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자 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둔화하면서, 1999년의 증가율은 3.75%로 줄어든다. 그러나 전체 신자 수는 394만여 명으로 남한 인구 중 8.3%에 이른다. 신자가 증가하는 요인으로는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는 다종교 사회이면서 동시에 무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시대 영세 입교자 중 대부분은 종교적 개종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가톨릭에 입교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입교의 용이성이 외국과는 다른 문화적 특징으로 평가된다.

오늘날의 한국 평신도들은 교회를 위한 봉사에 기꺼이 즐겁게 투신한다. 이미 1980년대에는 이들의 자원 봉사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사업’(1981년)을 추진한 바 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1984년)과 ‘제44차 세계성체대회’(1989년)를 비롯한 대규모 교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교회는 중산층화의 길을 걷는다. 이 시기의 한국 교회는 세례 받은 신자들의 재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였으니, 1984년 천주교 통계에 따르면 전체 신자의 23.4%에 해당하는 약 45만여 명이, 1999년에는 전체 신자의 31.7%에 해당하는 약 125만여 명의 신자들이 거주 불명자 등 냉담자로 집계되었다. 이와 같이 냉담자의 비율이 30%를 넘는 현상은 현대 교회에 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특성은 교구 중심의 사목 활동으로, 이 시기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본당 숫자도 증가하여, 1984년도 한국 교회 본당 수는 673개였지만 1998년에는 1,147개로 늘었다. 그럼에도 본당 평균 신자 수는 1984년도의 2,747명에서 1999년에는 3,317명으로 증가한다. 이러한 본당 내 신자 수는 도시와 농촌에 따라서 큰 차이를 드러내는데, 대도시에서는 본당 신자 수가 1만여 명이 넘는 거대 본당이 속출한다. 전통적으로 소규모 신자 공동체이던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신자들의 급작스런 팽창은 사목적 배려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한국 교회 성직자는 1984년 이후 1999년에 이르는 기간 꾸준히 증가하는데, 1998년 말 현재 한국에 있는 성직자는 모두 2,800명(한국인 2,606명, 외국인 194명)으로 집계되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363명에 이르던 1970년도 이래 한국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 성직자 중 46%에 달하던 1962년도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의 비율은 급속도로 감소하였다. 그리하여 1999년도에는 전체 성직자 중 외국인 성직자의 비율이 6.9%로, 한국인 성직자의 비율이 93.1%로 증가한다. 해방 당시에는 5개의 대목구 가운데 3개 대목구를 외국인 선교사가 관장하였으나, 1999년 남한 교회에는 3개 대교구와 12개의 교구를 한국인 주교 또는 보좌 주교가 관할하고 있다.

한편 현대에 이르면서 한국에서는 수도회의 활동이 매우 강화되어 가는데, 1984년 28개이던 남자 수도 단체가 1998년에는 43개로 증가한다. 여자 수도 단체도 44개에서 93개로 증가한다. 수도자 숫자도 이에 비례하여 늘어, 남자 수도자는 246명에서 1,145명으로 465%의 증가율을 보이고, 여자 수도자는 3,931명에서 8,290명으로 210% 증가한다. 수녀들 가운데 상당수는 본당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으나, 적지 않은 수도자들이 국내의 교육과 사회 복지 분야에서 일하고 있으며, 일부는 외국 교회를 돕기 위해서 해외에 파견되어 봉사하고 있다.


4-2. 현대 교회사의 진행 방향


1984년은 한국 교회가 창설 2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현대 한국 교회에서는 여러 분야에 걸쳐 기념비적 사업을 진행한다. 우선 교회는 200주년 기념 사목 회의를 개최하여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였다. 이 사목 회의를 통해서 건의된 내용들은 1995년에 반포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에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계기로 하여 한국 순교 복자 103위의 시성식이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신앙 대회 중에 거행되었으며, 9월 20일을 한국 순교 성인들의 축일로 정하여 세계 교회는 해마다 이날 한국의 성인들을 함께 기억하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인들과 만나 복음을 선포하고 화해를 다지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여 이 시성식을 주관하였다. 사목적 목적으로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교황은 한국 교회 200주년을 함께 기뻐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군사 정권 아래 놓여 있었다. 바티칸 시국의 국가 수반인 그의 방한은 한국 정부와 외교 문제에 속하기도 하였으니, 한국을 방문한 교황은 당시 국가 원수이던 독재자를 ‘포옹’하였다는 혐의를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목자로서 한국을 찾았고, 한국 교회 사목 회의에 참석하며 시성식을 주관하였다.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을 만났고, 군부에 의해 학살이 진행된 광주를 찾아 화해를 말하기도 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 개최한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다시 한 번 방한하였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표어로 하여 개최된 이 성체대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는 쇄신의 기회를 새로이 다지면서 세계 교회와 연대를 강화하여 나간다. 성체대회가 종료된 뒤에는 그 정신을 계승하여 몇몇 교구에서는 ‘한마음 한몸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통해서 한국 교회는 사회 개발과 사회 복지를 위한 국내 단체 지원을 강화하는가 하면, 서울대교구의 한마음 한몸 운동 본부는 세계 교회 지원을 체계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한편 이 시기 한국 교회 성서학자들은 새롭게 ‘200주년 기념 성서’ 번역 작업에 착수한다. 이는 공동 번역 성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성서 연구자들에게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20세기 말에 이르러 마치는 방대한 작업이다. 또한 한국 교회는 새 「교회법전」을 번역, 간행함으로써 교회 조직과 운영에 대한 이해를 높여 준다. 이와 함께 한국 교회는 대외 선교와 원조를 강화해 나간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서울대교구 한마음 한몸 운동 본부 등에서는 해외의 재난 지역에 지원을 강화하고, 지역 사회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100여 명 내외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선교사들이 해외 교회에 파견되어 지역 복음화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다. 해외 선교를 위한 이러한 노력은 한층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교회는 1999년 말 현재 신자 수가 400만에 달하며, 북한 지역의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그리고 덕원자치수도원구 등 3개 교구와 남한 15개 교구를 포함 18개 교구에 이르며, 추기경 1명, 대주교 4명, 주교 20명(외국인 2명 포함)이다. 또한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 기관은 모두 294개에 이르며, 이보다 많은 사회 복지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해 한국 교회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 교회 일각에서는 1970년대의 사회참여 전통을 이어받아 그 범위를 더욱 확대시켜 ‘창조 질서 보존 운동’ ‘생산 협동 조합 운동’ ‘도시 빈민 운동’ ‘민족 화해 운동’ 등을 새롭게 전개하고 있다. 1985년 한국 사회에서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는 여론이 일어난다. 서울 명동 성당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시국 기도회가 열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시국 기도회 강론과 성명서를 통해서 개헌의 시급성을 거듭 천명하며 민주화 운동을 격려한다(1986.3.; 1987.4.). 1986년 당시 부천에서 일어난 한 여성 운동가에 대한 성고문 사건은 이러한 민주화 운동에 불을 댕긴 사건이다. 명동 성당은 성고문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집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1987년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당시 치안 본부 대공 수사단이 조작한 박종철(朴鍾哲) 학생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전 국민적 저항을 유도해 냈다. 교회와 국민의 이러한 투쟁 결과로 우리는 이른바 1987년의 6·29 선언을 쟁취해 낸다.

1980년대 당시 교회의 민주화 운동이 이룬 성과 가운데는 언론 운동이 있다. 당시 공영 방송인 한국 방송 공사(KBS)가 앞장서서 정부 시책을 선전하고 사실을 왜곡한다고 판단, 전주교구 고산 성당과 가톨릭 농민회에서는 1984년부터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1986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통해서 여러 교구로 확산되면서 국민의 동의 속에 전국적으로 번져 갔다. 이 운동은 관제 언론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강화하였으며, 왜곡된 방송의 방향을 수정시키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한편, 1980년대는 적대적이던 남북한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민간측의 노력이 고조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1989년, 천주교 신자인 대학생 임수경이 남한의 실정법에 도전하며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청년들과 통일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를 지지하고 임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의 구현 사제단은 문규현(文奎鉉) 신부를 북한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귀국 직후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였다.


4-3. 북한의 신자 공동체


북한 사회에서는 1970년대 이래 조국 해방과 통일을 위한 통일 전선론이 강화된다. 이 원칙 아래에서 북한 당국은 종교 신앙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1980년대 이래로 북한 정권 당국은 종교 또는 천주교에 대한 정책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여, 1983년에는 한국 전쟁(1950~1953년) 이후 처음으로 복음서가 북한에서 출간된다. 1988년 평양에는 개신교 교회당과 천주교 성당이 한국 전쟁 이후 처음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 단체인 ‘조선 천주교 인 협회’가 천주교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창설되어, 1999년에는 ‘조선 카톨릭 협회’(위원장: 장재언)로 이름을 변경하여, 평양 선교 구역에 자리잡은 ‘장충 성당’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평양의 ‘조선 천주교인 협회 중앙 위원회’에서는 1991년 4·6배판 560면에 이르는 「카톨릭 기도서」와 몇몇 선교용 팸플릿을 간행하기도 한다. 북한 신자들에 대한 남한 교회의 관심은 계속 이어져 온다. 한국 교회는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계기로 하여 북한 선교 위원회를 조직해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95년 서울대교구는 민족 화해 위원회를 조직하여 북한 문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는데, 민족 화해 위원회에서는 남북 문제에서 주로 사용하던 ‘통일’이란 담론의 틀을 ‘화해’로 바꾸어, 민족 재일치의 방법과 지향점을 동시에 담아 낸다.

1984년부터는 외국 국적을 가진 한국계 성직자들의 북한 방문이 가능해지면서, 미주 지역에서 교민 사목에 종사하는 성직자들이 북한을 정기적으로 방문, 북한 신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1989년에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서울대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하였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평양을 방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를 전후하여 북한 신자들과 남한 신자들은 해외에서 간헐적으로 만났다. 그뿐 아니라 1998년 5월에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최창무(崔昌武) 주교 일행이 사목적 목적으로 평양 장충 성당을 방문하여 평양의 신자들을 직접 만났다. 그 후 남한의 성직자와 신자들은 인도적 지원을 위해 북한 신자들과 자주 접촉하게 된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남한 교회는 북한 신앙 공동체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는 대략 52,0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1988년 당시에는 모두 800여 명의 신자들을 기반으로 ‘조선 천주교인 협회’가 평양에서 창설된다. 1998년 5월 현재 대략 3,000여 명의 신자들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한국 전쟁 이전에 세례를 받은 구교우뿐만 아니라 1980년대 후반 이후 새롭게 영세 입교한 신자들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북한 지역 신자들은 남포(南浦)와 원산(元山) 등지에 공소를 세우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현재 북한에는 단 한 명의 성직자나 수도자도 없다. 그러므로 북한의 신앙 공동체는 평신도·수도자·성직자로 구성되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7성사가 모두 집전되고 교계 제도를 갖춘 완벽한 교회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비록 북한의 신앙 공동체가 이렇듯 평신도 지도자들을 통하여 인도되고 있다 하더라도,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진정한 일부임이 확인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며, 합당한 세례를 통해서 형성된 신자들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교구 민족 화해 위원회는 1999년 말 현재 10여 회에 걸쳐서 북한 신자들과 접촉하며, 북한 복음화 가능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5년 이후 현재까지 냉해와 홍수, 해일 등과 같은 자연 재해로 북한은 기근에 허덕이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다. 한국 교회는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북한의 기근을 돕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여, 민족 화해 위원회에서는 북한 돕기 캠페인을 통해서 모금된 금액 60억여 원으로 식량과 비료 등을 구입하여 북한 주민들을 지원한다. 서울대교구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적으로도 북한의 기근 피해자를 돕기 위한 노력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전개되었으니, 이러한 북한 동포에 대한 교회의 지원은, 현대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구원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인류애 또는 동포애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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