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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7-01-11 17:50
ㆍ추천: 0  ㆍ조회: 2261      
한국 교회의 쇄신(1962~1984년)
 

. 한국 교회의 쇄신(1962~1984년) 


3-1. 교계 제도 설정과 교회 쇄신

바야흐로 세계 교회는 교황 요한 23세가 선출된(1958년) 뒤로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1962년 이후 세계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아래 현대화 작업을 추진하고, 한국 교회는 1984년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기에 이른다.

1962년 한국 교회는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된다. 교계 제도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요청되는 성사 집전과 관련되는 신품권(ordo)을 통하여 규정된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 내의 입법·사법·행정 업무와 관련되는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의 행사와 관련된 제도이다. 교황청에서는 선교지의 경우 지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치권의 일부를 제한해 왔다. 선교지의 교회는 재치권 행사에 대하여 교황청 포교성성에 직속되어 지도와 지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청은 선교지 교회가 자립 능력을 갖추게 되면 정식 교계 제도를 설정해서 완전한 재치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정식 교계 제도 설정은 교회 제도적 측면에서 일대 발전을 뜻하는 사건이다.

한국 교회의 교계 제도 설정은 한국 교회가 성취한 1950년대의 발전을 감안한 것이다. 교계 제도 설정으로 한국 교회는 종전의 대목구(代牧區, vicariatus apostolicus) 체제에서 정식 교구(dioecesis)로 승격된다. 그 뒤 1963년에는 서울대교구에서 수원교구가 분할 설립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원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가 설정되었다. 1977년에는 광주대교구에서 제주교구가 나뉘었다. 한편 전국 교구장들이 모여서 설립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국내법에 따른 사단 법인체로 설립 허가를 받았다(1962.9.). 한국 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1968년 서울대교구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추기경 서임으로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요 문제를 결정하는 데 그 참여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사와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된다.

교계 제도가 설정된 1962년 전국의 신자 수는 53만여 명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13년 뒤인 1974년에는 두 배 가까이 증가하여 100만 명을 돌파한다. 다시 12년이 지난 1986년에는 200만 명을 상회하게 이른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낮아 1984년 당시 약 4.55%에 불과하다. 현대 한국 교회에서 드러나는 신자 수의 증가 현황은 <표 7>에서 확인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는 신자 수 증가에 변화를 보인다. 휴전 이후 1950년대 이룬 연평균 16.5%의 높은 증가율은 1960년대에 이르러 급격히 하락하여 연평균 6.2%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신자 증가율이 더욱 둔화되어 5.2%로 떨어진다. 특히 1970년에는 신자 증가율이 1.17%에 지나지 않았고, 1971년에는 불과 0.29%를 기록했을 뿐이다. 물론 이 숫자는 통계 집계 방법의 변경과 관련된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이와 같은 저조한 증가율은 1970년대 전국 평균 인구 증가율 2.3%와 비교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성취한 1957년도의 17.59%, 1958년도의 24.18%라는 높은 증가율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1970년대 이후 신자 증가율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였으나, 이 시기에 입교한 신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산층 지식인들이다. 1970년대 이후에 전개된 천주교의 정의 구현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은 당시 교회 일각에서 실천하던 정의 구현 운동에 적극 동조하면서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일부 지역에서는 체제 비판적 성향을 가진 일단의 타교파 청년들이 천주교로 집단 개종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중산층 신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교회는 청년 지식인들로 더욱 활기찼고, 경제적 기반도 강화해 갈 수 있게 된다. 반면 사회 비판 의식이 강한 새 신자들이 교회 일각에 존재하는 권위주의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발하면서, 새로 입교한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탈락되어 갔다. 물론 냉담자와 주소 불명자의 증가는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산업화와 도시화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다른 원인으로는 당시 교회가 드러내던 정의 구현의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대규모 신앙 대회를 통해 쇄신의 노력을 계속한다. 1981년에 개최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는 교회 현황을 점검하고 쇄신하기 위한 교회의 의지에 일정하게 기여한다. 이 행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행사와 사업들이 구체적으로 추진된다. 한편 1970년대를 전후하여 외국 교회들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생동하는 모습에 깊은 관심을 표현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는 한국에서 선교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소개하였는데, 일부 외국의 수도 단체나 신심 운동체가 한국 교회 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 진출해 왔다.


<표 7 > 현대 한국 교회 현황(1962~1999년)


연도  신자 수  전년

대비

증가율

(%)  본당수  성직자  수사  수녀  신학생 

한국인  외국인  한국인  외국인  한국인  외국인  小 大

1962  530,227  7.67  275  298  251  55  43  1,099  135  360  314 

1965  669,348  6.49  313  353  283  74  34  1,875  183  356  465 

1970  788,082  1.17  415  530  369  84  28  1,958  192  356  609 

1975  1.052,691  4.00  480  709  294  157  37  2,531  192  295  791 

1980  1,321,293  6.02  589  916  250  159  39  3,011  158  -  528 

1984  1,848,476  8.01  673  1,094  221  210  36  3,705  226  -  925 

1985  1,995,905  7.97  692  1,130  234  242  31  3,757  170  -  1,015 

1990  2,750,607  5.25  855  1,504  201  326  21  5,215  184  -  1,528 

1995  3,451,266  3.36  1,017  2,208  203  930  7,209  -  1,558 

1999  3,946,844  3.80  1,190  2,726  201  1,170 8,551 -  1,547 


* '수도자'는 교황청 교구 설립 수도회와 재속회, 봉헌 생활회, 사도 생활단등에 속하는 종신서원자, 유기서원자의 숫자이다.


3-2. 한국 가톨릭 문화의 전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는 한국 교회에도 반영되어 1965년 1월 1일부터 공의회 정신에 따라 우리말 미사를 집전하였다. 교회는 우리말 미사를 집전하기 위하여 「미사통상문」을 간행하는(1966년) 한편, 교리 학습을 위한 「가톨릭 교리서」를 편찬하였다(1967년). 또한 박해 시대 이래 한국 교회의 공식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현대화하여 「가톨릭 기도서」로 1968년에 간행하고, 1971년에는 토요 특전 미사를 허용한다.

공의회의 성과는 본당에도 영향을 미쳐, 각 본당별로 본당 신부의 자문 기구인 ‘사목회’가 조직되어 평신도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출범하여 평신도 운동의 전국 조직과 교구별 조직을 갖춘다(1968년). 교회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의 날’을 제정하고 신자들에게 주일 미사 때 강론할 기회를 주기 시작하였다. 한편 4·19 혁명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가톨릭 학생 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어 일반 학생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였으며, 기존의 교회 단체들도 공의회 정신에 따라 쇄신의 방향에 관심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후반기 이후 교회 활동이 본당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의 활동과 전국 조직체를 중심으로 한 활동으로 이원화하였다. 이로써 오늘날의 교회는 본당 단위 활동과 전국 조직체 활동을 상호 조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한국 교회의 전통적 신심인 순교자 신심도 강화되었다. 순교자 신심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시복 운동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68년에 순교 복자 24위의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순교자 신심 운동은 한국 순교 복자 시성을 추진하면서 더욱 고조되어, 1976년에는 한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의 건의와 호소에 따라 순교 복자 시성 운동이 본격화한다. 시성 운동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진행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에서는 한국 문화와 교육 발전을 위해서도 상당히 노력하는데, 한국 교회는 가톨릭 대학교, 효성 여자 대학교, 서강 대학교, 성심 여자 대학교 등 고등 교육 기관을 운영하는 한편, 유아 교육,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 발전을 위해서도 이바지한다. 당시 한국 교회는 문학, 미술, 음악 등 고급 문화 분야 발전에도 이바지하면서 가톨릭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켜 나간다. 한국 교회는 교육 개발 사업과 함께 의료 복지를 비롯한 각종 사회 복지 사업에도 참여하여, 1980년대 초반 한국 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들이 전국 병원의 침상 수 중에 11%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 신자 수가 전국 인구의 3% 내외에 지나지 않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의료 복지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교회는 각종 보육원, 양로원과 여러 사회 사업 기관을 통해서 사회 개발에 참여하는데, ‘소년의 집’, ‘꽃동네’를 비롯한 대규모 복지 시설을 설립한다. 그리고 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설립한 사회 복지 기관들을 위탁받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복지 기관 위탁 경영은 교회의 복지 기관 운영에 대한 신뢰가 다른 어느 단체보다 높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69년 1월에는 신구약 성서의 공동 번역 작업을 시작한다. 이 사업은 1970년에 공동 번역 신약성서가 간행되고, 1977년에 구약성서가 간행됨으로써 완결된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 공동 번역 성서를 공인하여 활용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성서를 받드는 하나의 형제임을 확인하고 서로의 오해를 청산하는 계기를 맞았다.


3-3. 정의 구현 운동의 전개


한국 교회는 교회 쇄신과 사회 참여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촉구하면서 이에 관한 체계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1960년대 후반기 이후 한국 교회는 인간 기본권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데,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교회는 1968년 초에 발생한 강화도 ‘심도 직물’ 노사 분규에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한다. 주교단은 이 공장의 노사 분규에 관여한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되는 가운데,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공동 사목 교서를 발표하여 노동 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이 사목 교서 발표는 한국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사건이다.

1960년대 말 이후 교회의 관심은 경제 개발 과정에서 초래된 사회 문제 해결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산업 사목과 관련된 교회 단체의 활동이 강화되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1966년에는 ‘가톨릭 농민회’가 조직되는가 하면, 1970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공식 기구로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한다.

교회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민주화 문제에 관해서 적지 않은 관심을 가져 왔다. 예를 들면 1969년 군사 정권이 독재 정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3선 개헌을 기도할 때 교회 일각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교회의 정의 구현 운동은 1974년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데, 교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촉발제가 되었다. 정부가 과장 조작해서 발표한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동맹 사건’에 연루하여 그해 7월 16일 원주교구의 지학순(池學淳, 1921~1993년) 주교가 내란 선동죄로 기소된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던 일단의 성직자들이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을 조직하여 불의한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다.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은 전국의 대부분 교구로 확산되었고, 1970년대 이후 가톨릭 인권 운동과 사회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신자들한테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다. 이들은 교회의 사회 교리를 천명하면서 정의와 사랑의 개념을 밝히고 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교회가 전개하는 정의 구현 운동 또는 반독재 투쟁은 당시 사회 양심 세력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원을 받으면서, ‘민주 회복 국민 회의’와 같은 반독재 투쟁의 중심 기관에 윤형중(尹亨重, 1903-1979년) 신부가 상임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교회는 사회 양심 세력과 연합하면서 정의 구현 운동을 전개하고, 그 연합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독재 정치의 종식, 정보 정치의 철폐, 인권 유린에 대한 반대, 부정 부패의 추방, 기본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제단에서는 구속자 석방을 주장하고, 군사 정권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정권 아래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한 각종 ‘시국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인혁당 사건에 대한 문제 제기에 동참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시노트 신부가 추방당하였다. 그 뒤 교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76년 서울 명동 대성당에서 이른바 ‘3·1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유신 독재에 대한 가장 선명한 저항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에는 안동교구 농민회를 탄압 하는 ‘오원춘(吳元春) 사건’이 발생하자 교회는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교회의 비판적 태도에 맞서 군사 정권은 교회를 탄압하였다. 군사 정권은 집권 시기에 여러 성직자를 구속 수감하였으며, 교회 신문에 발표하는 사목 교서도 검열하였다. 심지어는 본당 간행물인 「주보」를 정기 간행물 등록법 위반으로 몰아서 폐간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교회의 정의 구현 운동에 교회 구성원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다. 몇몇 성직자들은 이 운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몇몇 교구장들은 교도권을 동원하여 정의 구현 운동에 제동을 걸기도 하였으며, 1977년에는 노장 성직자 일부가 ‘천주교 구국 위원회’라는 기치 아래 ‘사회 안정’을 이유로 정의 구현 운동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한국 주재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른바 ‘반한(反韓)’ 활동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 극소수의 신자들도 ‘한국 천주교 정의 신자단’을 급조, 교회의 정의 구현 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발언은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을 밝히려고 노력하던 일단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1980년 7월 신군부의 수사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82년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때에는 수습을 원만히 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제가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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