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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7-01-11 17:46
ㆍ추천: 0  ㆍ조회: 1346      
교회와 민족주의 운동(1876~1945년)
 

5. 교회와 민족주의 운동(1876~1945년)


5-1. 민족 운동에 대한 입장

교회는 우선 자신이 자리 잡은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그 민족의 구원을 위해 봉사한다. 여기에서 교회와 민족의 관계가 성립하며,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교회는 민족사의 전개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민족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한국 교회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물론 교회가 민족주의적 단체일 수만은 없다. 교회의 사회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환원주의적(reductionism) 위험성은 충분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항 이후 한국 교회도 민족사의 전개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교회는 당시의 역사에 초연한 입장을 취할 수는 없었다.

개항 이후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심적인 담론은 민족주의(nationalism)와 근대화(modernization)이다. 근대 민족주의는 18세기 말엽 유럽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 사조는 인종주의와 더불어 침략적 특성을 점차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서유럽 국가들이 19세기의 70년대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을 강화해 나갈 때 서유럽 일부 국가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결합된 양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이와 같이 부정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에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교회는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특히 보편 신앙을 추구하는 가톨릭에서는 당시의 민족주의를 지역적·혈연적 특수성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민족주의에 대한 서유럽 교회의 부정적 인식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제3세계 지역의 민족주의는 유럽의 경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유럽 지역의 민족주의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치우친 공격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의 민족주의는 유럽 열강과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거나 쟁취할 수 있는 정신적 기초로, 지역의 방어적 민족주의는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교회는 민족주의라는 용어의 유럽적 의미 때문에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거부해 왔다. 이는 아시아·아프리카 등지의 제3세계 지역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파생된 현상이다.

개항을 계기로 하여 조선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다. 조선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강요당하던 개항기와 식민지 시대에, 조선은 자신의 근대화를 추진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무장 저항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독립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민족주의 운동은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가적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방어적 운동으로, 조선 민족 구성원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의 조선 교회는 민족사의 이러한 특성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교회는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을 위한 근대화 운동과 반침략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교회에서 전개한 근대화 운동은 교육과 언론 계몽 운동 등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5-2. 비폭력적 민족주의 운동


개항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교육과 언론 출판 운동을 통한 평화적 방법의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주권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과 방법들이 검토되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들도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평화적 방법에 따른 민족주의 운동에 찬성하고 이를 후원한다. 개항기 천주교회가 평화적 방법에 따라 전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교육 운동을 들 수 있다. 조선에 근대적 교육이 시행되던 시점에서 1882년 인현서당(仁峴書堂, e첽ole)을 개교한 이후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 수는 점차 증가되었다. 1893년 통계를 보면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36개교에 이르고, 1904년에는 75개교로 늘어났다. 그 뒤 1900년대의 첫 10년 동안 조선 천주교회는 전국에 124개교의 학교를 세워 운영한다. 교육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대체로 초등 교육 분야에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대중 계몽을 소수 지식인 양성보다 시급한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관심은 중등 교육 분야로까지 그 폭을 넓혀 갔다. 한편 천주교회는 1901년 제물포와 서울에 여학교를 세워 여성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또한 성직자와 신자들은 측량 학교, 농업 학교 등을 세워 실업 교육에도 착수하였으며, 야학교를 세워 근로자 계층에게도 학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초등학교 교사 양성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의 베네딕도 수도회를 초빙하여 교육 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노력은 1908년부터 본격화하였지만 일제 통감부의 탄압으로 결실을 보기가 어려웠다.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 과정에서 조선인을 우민화하는 정책의 하나로 사립 학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 공포해서 교육 운동을 탄압하였다. 대부분의 학교는 일제의 교육 탄압 정책과 재정난 때문에 폐교를 강요당하였다. 그 결과 한일 합방이 단행된 1910년에 천주교 계통의 학교 수는 46개교로 감소하였다. 1910년 교구 통계에 학교 총수가 124개교로 집계되었음을 감안하면, 78개교가 ‘사립학교령’에 따라 폐쇄되거나 탄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개항기 조선 교회는 교육 운동을 부지런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교육 운동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전국에 2,000여 개소의 학교를 세워 교육하고 있었고, 천주교보다 뒤늦게 들어온 개신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1909년을 기준으로 할 때 800개교 이상에 이르고 있었다.

일제의 지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1910년 이후 교회의 교육 운동은 큰 시련에 부딪힌다. 그러나 교회는 이에 굽히지 아니하고 1911년 서울에 사범학교인 숭신 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한다. 숭신학교는 일제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1913년에 폐쇄된다. 비록 폐교되었으나 당시 사범학교를 설립한 사실은 교회가 교육을 통한 봉사와 계몽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였다. 또한 교회는 1911년에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세워 수준 높은 실업 교육을 시행하였는데 이 학교도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폐쇄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가속화하여 각 지방의 교회에서 운영하던 여러 학교가 점차 폐쇄되어 갔다. 일제 시대를 통하여 교회는 동성 상업 학교(東星商業學校), 계성 여학교(啓星女學校) 등 몇 개의 교육기관만을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한편,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언론을 통한 구국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개화기 천주교회가 전개한 애국 계몽 운동에는 언론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교회의 대표적 언론 기관은 주간지로 간행되던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은 당시에 전개되던 애국 계몽 운동과 보조를 같이하여 “참된 개화와 거짓 개화를 분별시키고 올바른 개화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하여”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독립 협회’와 같은 애국 단체에 참여하던 신자들과 교회 당국이 운영하였다. 그 후 이 신문은 당시 신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적극 환영을 받았고,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성장하였다. 개화기 당시 교회가 추구하던 공식 입장은 애국 계몽 운동 차원의 온건한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를 통해 전근대적 문화를 타파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침략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애국 계몽 운동 차원의 활동까지 탄압한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많은 학교가 폐쇄되었고, 「경향신문」도 일제의 탄압으로 1910년 폐간되었다.


5-3. 국권 회복 운동


비폭력적 애국 운동 가운데 하나로는 국권 수호를 위한 기도회를 들 수 있다. 1904년 서울의 천주교 신자들은 황무지 개간을 빌미로 하여 한국의 국토를 약탈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반대하여 서울 명동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신자들은 이러한 애국 계몽 운동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갖추어 나가며, 국권을 수호하거나 회복하려는 반침략 운동에 가담한다. 천주교회가 반침략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때는 1904년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국토를 침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황무지 개간이란 명목 아래 새로운 침략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 명동 성당에 모여 ‘황무지 개간령’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일제에 대항하는 교회의 반침략 운동은 이 기도회를 계기로 하여 촉진된다. 조국의 주권 수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시 한국 천주교 신자의 일반적 정서였다.

한편 기도회와 같은 비폭력적 저항과 같은 노선에서 우리는 1907년도 신자들이 전개한 국채 보상 운동을 주목할 수 있다. 당시 구한국 정부는 일본에서 국채 1,30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이 차관이 일본의 침략을 더욱 촉진하는 것으로 판단되었으므로 국채를 국민의 힘으로 보상하여 침략을 막아 보려는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을 발기한 사람은 대구 지역 신자인 서상돈(徐相燉, 1849`~1913년)이었다. 그의 주장에 호응하여 전체 교회가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했으며, 당시 교회에서 간행하는 「경향신문」을 통해 이 결과가 속속 보도되었다. 「경향신문」과 교회를 통한 국채 보상 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무장 저항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909년, 약 1년 동안 일제와 벌인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부상한 한국인이 5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이 무장 저항은 치열하였다. 교회는 이러한 무력 저항의 가치를 부정하였으나 무장 저항 운동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존재가 일부 확인되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고 전국에서 의병 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에 소수의 신자들이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상태(金尙台)는 일본군에게 잡히어 사살될 때까지 묵주를 몸에 지녔고, 강원도 풍수원 성당에서는 의병들을 보호하는가 하면, 신자들이 의병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민족 운동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항기 반침략 운동에 적극 참여한 대표적 인물로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년)을 들 수 있다. 황해도 지역의 저명한 천주교 가문 출신인 안중근은 빌렘(Wilhelm, 洪錫九, 1860~1938년)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그를 도와 가톨릭 운동에 투신하여 교리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국권이 침탈당하는 현실을 목도하고 진남포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맡아 교육 운동에 투신하였다. 뮈텔 주교에게 대학교 창설을 요청하였으나, 이 요청이 거절된 직후 조선을 떠나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무장 의병들을 이끌고 조선에 진공했지만 전투에 참패한 다음, 구사일생으로 블라디보스톡에 귀환할 수 있었다. 그 뒤 안중근은 만주의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응징한 뒤 “십자 성호를 긋고 대한 만세를 불렀다.” 그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행동에서 애국심과 신앙심의 조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일 합방이 강행된 후에도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합방 직후인 1910년 말에는 ‘안악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황해도 지방의 유력한 신자 안명근(安明根)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또한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에도 이기당(李基唐)과 같은 천주교 신자가 관계되어 있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동향에 심정적으로 동조한 성직자나 선교사도 있었다. 강원도 풍수원 본당의 경우가 그러한 사례이다. 그리고 안중근의 세례 신부인 빌렘의 경우에도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일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후일 동료 선교사들의 결정에 따라 프랑스로 추방된 다음에도 상해 임시 정부의 김규식 등을 도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안성이나 장호원 등 일부 지방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도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1919년에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서울, 강화, 안성, 수원 그리고 평양, 해주, 대구 등지에서 다수의 신자들이 참여하였다. 서울의 ‘예수 성심 신학교’와 대구교구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들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몇몇 신학생들은 퇴학을 당했으며, 그해에 있을 예정이던 서품식이 취소되었다. 또한 안성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그곳의 공베르(Gombert, 孔安國, 1875~1950년) 본당신부도 일본 경찰에 쫓기는 주민들을 성당에 수용하여 보호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신자들이 속출하였다.

3·1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적극적인 무장 항쟁을 위한 노력들이 다시 전개되었다. 특히 만주의 간도 지방에서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고 있었다. 이때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주체가 되어 ‘의민단’(義民團)이라는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였다. 방우룡(方雨龍)의 지휘를 받으며 한반도 수복 작전을 주장하는 매우 강경한 노선을 견지하던 의민단은 무장 규모와 병력 수에서 간도 지방의 독립군 단체 중에서 매우 유력한 존재였다. 의민단은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 부대 등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에도 함께 참여한다. 방우룡과 의민단은 그 후 상해 임시 정부 산하의 무장 세력으로 편입되어 활동을 계속한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되었다. 여기에 안공근(安恭根), 곽연성(郭然盛)과 같은 신자들이 적극 활동하고 있었고, 은율의 윤예원(尹禮源) 신부는 임시 정부의 국내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안학만(安學滿) 신부는 만주의 독립군 단체에 직접 가담하여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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