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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교회사
작성일 2007-01-11 17:44
ㆍ추천: 0  ㆍ조회: 1081      
천주교와 타 사상의 만남(1876-1945년)
 

. 천주교와 타 사상의 만남(1876-1945년)


4-1. 천주교와 전통 종교

개항기 한국 사회의 전통 종교 사상 가운데 유교의 존재가 우선 주목된다. 개항기 재야의 유교 지식인들은 외래의 시대 사조에 대항하여 척사 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재천명하였고, 이로써 유학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이론으로 재생산되었다. 척사 위정의 논리는 초기 의병 전쟁 과정에서도 저항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하여 1877년 평양에 척사 기적비(斥邪紀蹟碑: 1866년에 있었던 제네랄 셔먼 호 사건의 극복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석)가 세워졌고, 1881년에는 척사윤음이 다시 반포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령이 전국에 포고되었다. 이와 같은 박해의 움직임은 개항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지방관이나 지방민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척사윤음’이 반포되기는 했지만 중앙 정부 차원의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른바 박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은 ‘조상 제사 문제’이다. 개항기 천주교회에서도 교황청의 이 결정에 따라 조상 제사를 미신 행위로 판단하여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상 제사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받았다. 이에 조상 제사 문제가 다시 검토되었고, 1939년 로마 교황청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 허용 시기는 너무나 늦었다. 조상 제사를 허용한 것은 신사 참배 문제를 최종 결정하는 데서 파생한 결과였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당시의 한국 천주교회는 불교를 범신론적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있었다. 교회는 불교가 지닌 정신문화적 가치와 조선 사회에서 불교가 발휘하고 있는 종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당시 천주교는 불교와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마저 갖지 못하였다.

개항기 이래 일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천도교를 비롯한 각종 신흥 종교가 성행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자신의 전통 문화와 사상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신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신흥 종교들을 불교나 유교보다 더 저급한 ‘미신’ 행위로 보고 그들과 대화하거나 협동하는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전통 종교와 신흥 종교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는 조선에 수용된 지 일천한 천주교 신자들이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사전에 방지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는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관습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는 민족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4-2. 천주교와 개신교


조선의 개신교는 1879년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1848~1926년) 등이 중국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조선 개신교는 신앙 공동체 형성 직후부터 성서 번역에 착수하였고, 1884년 미국계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천주교와 함께 개신교의 선교도 착수되어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더욱 폭넓게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지에 개신교가 전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신교가 전래되기 40여 년 전인 1840년대부터 신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경계의 말을 하였다. 개항기 당시 조선 천주교는 개신교의 선교에 경쟁 의식과 위기 의식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개신교 선교가 본격화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1890년대로, 1900년까지 10년 동안 개신교는 급격히 발전한다. 1897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개신교인들은 6,800여 명이나, 1900년에는 13,569명에 이르고, 1905년에는 37,407명이다. 그리고 1907년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신자 수가 72,968명에 이르러, 당시 63,340명으로 집계된 천주교 신자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당시 개신교 신자의 급격한 증가 현상은 다음 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표 5> 그리스도교 신자 증가표(단위: 명)


연도 천주교 개신교 연도 천주교 개신교

1897 32,217 6,800 1907 63,340 72,968

1900 42,441 13,569 1910 73,517 140,470

1905 64,070 37,407 1919 88,553 144,062


개항기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889년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 기근이 들자,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호금을 걷어 기민 구제에 사용해 달라고 천주교 선교사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니, 조선의 천주교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선교에서 불로 소득을 노리는 무리 정도로 이해하였다. 물론 100여 년의 박해를 거쳐서 이제 막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회는 순교의 결실을 거두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해의 시련을 거친 바도 없는 개신교가 선교를 하겠다고 할 때, 이를 환영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는 천주교 선교사는 없었다. 그러나 개항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개신교 선교가 천주교보다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개신교를 이단이요 열교로 규정하며 「예수진교사패」와 같은 책을 간행하여 개신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또한 근본주의 신학에 기초하는 개신교 선교사들도 대부분 천주교를 배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신교 선교 초기에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서로 충돌하면서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1895년 평양에서는 성당의 대지 문제 때문에 자그마한 충돌이 일어났으며, 1901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해서 교안(海西敎案)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부의 중재로 마무리되긴 하였으나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는 결코 원만한 사이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와는 달리, 식민지 시대 간도 지방(間島: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의 지역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던 곳)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서로 협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학교나 금융 회사를 공동으로 설치·운영하고 있었으며, 독립운동도 서로 발을 맞추어 갔다. 교회 일치라는 차원에서 볼 때 당시 간도 지방의 신자들이 보여 준 모범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4-3. 교회와 공산주의


식민지 시대 조선 사회에서는 3·1 운동 이후에도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독립을 위한 노력으로는 상해 임시 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주목할 수 있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조직되어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종교를 미신으로,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고 반종교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물론 공산주의의 종교에 대한 교조주의적 비판은 반제국주의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193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통일 전선론이 제기됨에 따라 변화되어 갔다. 통일 전선론은 종교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며, 종교 기관이나 종교인들도 반제국주의 운동에 공산당과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공산주의가 규정한 종교의 가치는 매우 제한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교황청은 사상적 측면에서 가톨릭과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일본은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려고 자신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일제의 반공주의는 침략 정책을 호도하기 위한 방책의 일부였다.

한국 교회 역시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데 노력하였다. 교회는 책자를 통해 반공의 입장을 제시하는 한편, 교황의 반공주의적 교서들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공산주의의 각종 오류를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단죄하였다. 일제 통치 아래 조선 교회는 통일 전선 이론에 무관심했으며, 타 종교나 정치 집단과 어떠한 연결 고리도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출판물들이 펼친 반공주의적 논설들은 식민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구체성에 입각한 공산주의 비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론적 입장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적 비판이었다. 당시 교회 지도층 일부에서는 일제가 대륙 침략 정책을 호도하기 위하여 제시한 반공주의 정책과 교회에서 주창하는 반공주의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일제의 반공주의 정책에 찬동하거나 묵인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일제의 침략 정책에 대한 교회의 비판 기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국 교회가 형성해 놓은 반공주의적 태도는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사 전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교회의 반공주의적 태도와 관련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북한 교회는 오랜 동안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북한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할 때 한국 교회가 이에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일제의 지배를 거치는 과정에서 형성된 반공주의적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4-4. 천주교와 신사 참배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강력한 ‘일본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사 참배 강요였다. 신사 참배는 일본의 전통적 종교 의식이라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근대 국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 국민 정신의 기초로 강조되었으니, 신사 참배에는 국민 의례적 성격이 추가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과 그 세력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군국주의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호전 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다. 여기서 조선 천주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 당국은 신사 참배가 단순한 ‘애국적’ 의식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 신사에서 거행되는 의식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 의식과 국민의례의 성격이 혼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 참배에 포함되어 있는 신도 의식적 요소 때문에 이를 거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 천주교는 1925년 「교리교수 지침서」에서 신사 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와 일본 총독부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예리하게 대립하였다.

1932년 일본 천주교회는 일본 정부에 신사 참배가 종교 의식인지, 국민의례인지에 관하여 정식으로 회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신사 참배가 국민의례의 일종임을 강조하는 답변을 보내 왔다. 이 답변을 근거로 1936년 로마 교황청은 일본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해도 괜찮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조선의 주교들은 반대하던 종전의 태도를 철회하고 일본 주재 교황대사의 훈령에 따라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천주교인들에게 신사 참배는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황도 정신’의 발양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의 민족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만 관심이 있던 반면, 조선 교회는 그 종교성 여부와 함께 민족 감정을 감안해야 하였다. 그러기에 당시 평양지목구장이던 모리스(Morris, M.M.) 신부는 이에 반대한 결과 자신의 선교지를 떠나야 했다. 또한 상당수의 조선인 신자들은 교회의 이 같은 결정에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신사 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근무하던 학교나 병원을 사임하는 수녀들이 잇따라 나타났으며, 학교와 성당이 폐쇄되는 고초를 무릅쓰고 신사 참배를 완강히 거부한 성직자도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몇 명의 성직자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전시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신사 참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만 제한해서 생각하였다. 따라서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개신교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약하였다. 물론 개신교계의 ‘주류’도 우여곡절 끝에 신사 참배를 용인하였지만, 장로교의 일부 신자들을 비롯해서 보수 신앙을 견지하던 개신교 일각에서는 신사 참배에 강하게 항거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순교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천주교는 뒷날 신사 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신자들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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