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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2월 5일 (화) 17:20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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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사순 제 1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사순 제1주일

42. 김몽은 신부(다)/ 107

43. 안병묵 신부(다)/ 109           44. 함세웅 신부(다)/ 110

45. 함세웅 신부(다)/ 112           46. 강영구 신부(다)/ 114

47. 유영봉 신부(다)/ 118           48. 강길웅 신부(다)/ 120

49. 서경윤 신부(다)/ 122           50. 허  환 신부(다)/ 124

51. 홍금표 신부(다)/ 127           52. 이완영 수녀(다)/ 129

53. 윤공희 대주교(다)/130          54. 장  익 주교(다)/ 130

54. 신은근 신부(다)/ 132           55. 서인석 신부 / 134

56. 서인석 신부 / 143               57. 서인석 신부 / 151

58. 정양모 신부 / 160



42.      사순 제1주일 루가 4,1-13 (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김몽은 신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유혹을 당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빵에 대한 유혹은 원초적이며 가장 강한 유혹입니다. 누구든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짓는 죄 중에서 빵 때문에 짓는 죄가 제일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먹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것이므로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을 동물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유가 있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빵과 정신’, ‘육체와 영혼’ 이 두 가지는 다 소중하지만 거기에도 순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순서를 뒤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먹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물질적으로 빈곤하게 살다 보니 그런 생각도 날 만하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절대 소중한 것이지만, 하늘은 땅보다 위에 있고, 또한 땅이 생기기 이전에 먼저 하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보다 높고, 땅에 앞서 소중한 것입니다. 시간과 영원은 다같이 소중하지만 시간은 사라져도 영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소중한 것을 알았지 영원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당장 육신의 안일함과 쾌락을 생각한 나머지 영혼을 망각하는 처사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빵의 기적을 거절하신 이유는, 빵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마에 땀을 흘려서 얻은 빵”(창세 3,17)이 아닌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빵의 품위를 높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육신의 지나친 쾌락과 안일을 탐내지 말고, 정신적인 면을 앞세움으로써 육신과 물질의 품위를 높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한 둘째 유혹은 ‘권세와 영광’입니다. (마태오는 둘째와 셋째의 순서를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소위 부유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매력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지성인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돋보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만 이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자기 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유혹입니다. 현세적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자기가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해주지 못한다는 터무니없는 교만에 빠지기 쉽고, 돈과 명예를 차지한 자는, 만민이 그 돈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잘나서 고개 숙이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만이 이 세상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고 우리가 예배하고 섬길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신명기(6, 13)를 인용해서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려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소위 유명하다는 종교지도자들이 당하기 쉬운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도취에 속아넘어가 이단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유혹은 부지불식간에 그릇된 신앙의 길로 인간을 유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데 어찌 이런 일도 못하실까?” 이런 따위의 생각은 하느님을 옳게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생기는 그릇된 생각들입니다. 그와 비슷한 유혹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은 “하느님은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해줄 수 있을까?” 또는 “하느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도 눈앞의 것만 보고, 안이한 일에만 집중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입니다. 눈을 들어 먼 앞날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하심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믿음을 갖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을 그 완악한 사탄의 유혹된 마음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꿔 놓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서 자기의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그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독생 성자까지 우리 인간에게 보내 주셨건만, 인간들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아버지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크신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사탄에 사로잡힌 우리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사탄의 사슬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어 당신께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다운 행동이 무엇이며, 인간의 삶의 보람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룩되기 위해 인간들의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어 주시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43.            사순 제1주일 루가 4,1-13 (다) 악마의 유혹과 회개

                                               (안병묵 신부)



 우리는 지난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받으며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할지어다”라는 말씀을 듣고 단식과 금육재를 지키며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하는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 성서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기도하시고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셨을 때 대답하신 말씀을 들어 봅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시험하지) 말라” “사탄아, 물러가거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하신 말씀이 씌어 있다”(마태 4, 4.7.10)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현세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무수히 유혹을 받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유혹, 생활에서의 유혹, 명예욕에 대한 유혹 등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유혹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부자나 굶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부자이건 권세 있는 자이건, 빈부와 귀천을 막론하고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며 여기서 특히 물질의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처지, 능력, 성격 등을 고려하지 않고 달콤한 남의 이야기만 듣고 금방 억만장자가 될 것같이 생각하여 남의 유혹에 빠져 자기가 가졌던 재산까지도 탕진하고 패가망신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광신적 생각으로 어떤 일을 자기 분수에 맞지도 않게 벌여 놓고, 나는 자칭 열심한 신자이니까 하느님이 도와주시어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망상을 가졌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이고 누구고 다 집어치우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실패의 원인을 다른 미신행위로 해결하려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세력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서, 또는 더 오래 누리기 위해서 천주교 신자라는 이름을 팔아 신자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사기해 먹는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볼 때, 남의 유혹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때에 따라서는 우리 자신이 남을 유혹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성서에서 예수님이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셨을 때, 대답하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과 구원을 얻는 길은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을뿐더러 남을 유혹하는 일이 없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성소에 따라 각 분야에서 자기 능력대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을 성취합시다. 사순절의 위대한 교훈은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틈만 있으면 빠져나가고자 하는 우리의 그릇된 욕망 즉 교오, 탐도, 질투, 미색 등에서 자신을 죽이고 올바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기 사랑에 치우쳐 있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자기 중심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사순절은 또한 구원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주의 교회는 “고의를 입고 재 가운데 앉아 밤을 새우나이다”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사순절 동안 진심으로 회개하여야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항상 인류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쳐 오셨습니다. 특히 이 사순절은 우리가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통회하며 보속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사순 시기 동안 사치를 멀리하고 되도록 절제와 고신 극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44.                       사순 제1주일 루가 4,1-13 (다) 신앙고백,

                                                  함세웅 신부



 우리들은 신앙을 고백할 때 거짓된 방법을 피해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십시오” 즉 위선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종교 단체로부터 보호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심한 마음으로 경건치 못한 것과는 일체의 접촉을 피해 접촉에서 생기는 해악을 피하고자 하는 이들이었고 양심적으로 공공연하게 모든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직업적인 금욕주의자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율법을 위해 사는 이들이라고 할 만한 이들로서 율법이 곧 그들의 학문이며, 신심이며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 전체의 규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바로 이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백성 전체를 망쳐 놓은 부패한 누룩과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쐐기와 같은 효과를 냈고 또 이 말씀은 직업적으로 종교와 예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양심 성찰을 잘하라는 영원한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직업 근성이란 것은 쉽게 일상적인 타성에 빠지기 쉽고 공허한 메카니즘에 휘말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내적인 열의가 없는 활동보다 종교에 더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본질 자체가 외모와 상응하지 못한다면 표면상의 거짓된 성덕만이 활개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앙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은 지붕 위에서 말씀을 크게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히 빛이 가득한 밝은 곳에서 말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세력을 잡고 있는 관리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구석에서나 겨우 불안한 마음으로 믿음을 나타내는 정도에 그쳐서도 안됩니다. 제자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스승 예수께 대한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이들의 평판에 구애됨이 없이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자들과 우롱자들 앞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주님은 또 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시길 잊지 않고 계십니다.


두려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실상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원수들이 육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의 피안에서 사람이 하느님의 법정 앞에 설 때 인간은 진정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잘못이 있음이 판명되면 육신의 죽음에 영원의 죽음이 뒤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의 심판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승의 생활에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자기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별 가치도 없는 참새까지 잊으시는 법이 없고 개개인의 머리칼까지 낱낱이 세어 두신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더할 수 없이 돌보심은 물론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오직 한 가지, 도피가 있을 뿐이며 그 도피야말로 뜻깊은 도피, 곧 하느님 자비에의 도피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어두운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제자들 편에 서 계심으로 제자들은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결정적인 심판은 법관복을 입은 사람들의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정에서 내려지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사람의 아들’을 증거한 이는 심판날 아들의 총애를 받아 아들이 그 사람을 위해 증거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에 이어 세 번째 위(位)이신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이는 이러한 행동을 고집하는 한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지만 성령을 두둔해서 말하는 이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됩니다. 원수들은 분명 제자들을 세력가들과 권력자들 앞에 끌고 가 신앙을 거슬러 심문할 것이지만 그때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입에 의롭고 올바른 말씀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안전은 삼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당신 말씀이 정당한 것임을 훌륭하게 증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두려워하시지 않았고 모든 이들 앞에서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을 죽일 것이지만 거기에 상관없이 예수님은 당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승리는 그리스도께 전해질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의 지상 심판자들인 유태인들과 이교도들 앞에서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성령에 의해 발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스도의 고통, 그리스도의 승리가 두려움 없이 자기 믿음을 드러내라는 당신의 요청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적인 편에선 조금도 안전한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불안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매번 적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 뿐입니다. 그에 비하면 그리스도인은 영원의 세계에서 내다볼 때 결국 최후의 승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전이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무한한 하느님께의 신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5.                     사순 제1주일 루가 4,1-13 (다) 유혹,

                                                 함세웅 신부



 예수님의 탄생 과정이나 또는 세례받는 장면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실증해 주며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에 나오는 예수님은 인간과 동고 동락하는 그야말로 ‘사람의 아들’임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 첫 주일의 복음이 지향하는 내용입니다. 광야 또는 사막에서 유혹을 받으며 지낸 ‘인간 예수’의 길, 그것은 우리 모두가 걷고 걸어야 할 ‘인생의 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광야 또는 사막이란 말의 뜻은 시련의 장소, 곧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 거치지 않으면 안될 불가결의 조건이며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받은 광야에서의 유혹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 홍해를 건넜고 하느님의 은총, 기적의 선물을 담뿍 받았어도 ‘약속된 땅’ 가나안에 가기까지 수없이 당한 쓰라린 체험 - 그러나 인간적인 것이기에 그것은 고귀한 것 -을 연상시켜 줍니다.


인적이 끊어진 광야는 맹수와 악마의 손길이 가까이 있습니다. 이 악마의 손길을 이겨내고 맹수도 길들일 수 있는 이 예수님의 모습은 곧 ‘새로운 아담’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유혹의 기간은 40일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그들의 사명을 이해하기 전에는 높은 산에서 기도하며 단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구약의 모든 역사, 과정을 한 장면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약속된 메시아는 이 세상을 구원하였듯이 유혹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겨내셨습니다. 유혹의 단계는 루가 복음과 마태오 복음이 똑같이 셋을 나열하고 있지만 순서가 다릅니다(루가 - ① 빵 ② 온 천하 ③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태오 - ① 빵 ② 예루살렘 성전 ③ 온 천하). 이 이유는 루가의 신학과 마태오 신학의 강조하는 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늘은 루가 복음(루가 4,1-3)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네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이 유혹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순 인간적인 원의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속 시원하게 빨리 빨리 우리가 바라는 이것을 채워주면 될 것이 아니냐!”고 인간 예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 또는 심리학의 표현을 빌면 식욕이 첫째라는 데서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의 손길은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이고, 하느님이고, 교회고, 기도고, 뭐든지 우선 먹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 이러한 외침이 이른바 현대화하는 교회, 박애주의를 부르짖는 인간적 교회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영원히 변치 않는 교회, 신앙에 기반을 둔 하느님 교회의 대답이 있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의 유혹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명예, 권세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란 쉬운 일입니다. 이 바람, 저 바람을 타고 그저 옳기만 하다고 아첨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에게 인격은 필요 없습니다. 신앙은 더더구나 무의미합니다. 양심은 이미 수술을 해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저 절만 꾸벅하면 됩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절만 꾸벅하는 것, 그러나 이것만은 못하겠다 하여 피흘려 간 순교자들, 그 중에는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있고 그 후에도 우리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를 꽃피게 하라”는 옛 주교님의 말씀은 그만두고 다만 “순교자의 피를 제발 더럽히지만 말라!”는 외침이 울려옴은 어찌 된 일입니까!


세 번째의 유혹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루가는 모든 것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전교 목적지가 예루살렘이고, 그분의 발길은 항상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 예루살렘은 바로 천상 예루살렘, 참된 교회, 하느님의 집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의 유혹 과정을 다 이겨냈어도 또 다른 유혹의 손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솔솔 부는 봄바람과도 같습니다. 매우 부드럽습니다. 얼핏 보고 생각하면 하느님의 손길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성당으로 향했고 성당에 와 있지만 소곤소곤 하며 성당 밖으로 끌어내는 꾀임이 있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그 정문 앞에서 또 다른 꾀임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추고 또는 다른 길로 접어들라는 꾀임도 있습니다. 시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외출했다가, 자녀 때문에, 집안 일 때문에 빨리 돌아와야 하는 그 경우에도 체면이라는 것이, 명예라는 것이, 호기심이라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 건강이라는 것이, 사교, 우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발걸음을 늦추게 합니다. 그것은 단 한 잔이라는 술일 수도, 따끈한 커피 한 잔, 차 한 잔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어디론가를 목적하고 떠난 여행자들입니다. 우리의 여행에는 결정적인 세 가지의 장애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빛나는 예수 부활을 향하여 떠난 신앙인이라면 영세 때에 약속한 끊고, 믿고, 행하는 소금과 촛불의 의미를 주는 ‘새로운 사람’, ‘새로 탄생된 사람’으로서 앞으로 앞으로 걸어야만 합니다.














46.                사순 제 1주일 <루가 4,1-13>(다)  깨달음의 길

                                                              강영구 신부



오늘은 사순 제1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고 올해의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사순절이란 글자 그대로 사십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 대축일 전 40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한 의미에 있어서의 40일이 아닙니다. 성서에는40이라는 숫자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의 시간, 참회와 속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세상을 정화하시기 위해서 40일간 밤낮으로 비를 내리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40년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가나안 땅에 머물면서 시련과 단련의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뼛속 질이 아로새겨야 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그들은 약속 된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도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모세가 십계판을 받아서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모습이 되어서 내려왔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40일을 엄재한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하느님의 십계판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고 엄재하심으로써, 앞으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정화와 단련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께는 이 시간이 유혹의 시간, 당신 자신과의 싸움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예수에게 있어서 광야에서의 40일간은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예수께 던져진 첫번째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마는 굶주린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시오.” 하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4장4절에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라는 대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이 대답에는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도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악마는 굶주린 예수께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그 주린 배를 채우라고 유혹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악마는 사람을 배만 부르면 살아갈 수 있는 짐승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배만 부르다고 살 수 있는 짐승이 아닙니다. 예수는 단호히 악마의 이 유혹을 거절합니다. 결코 인간은 짐승일 수 없으며, 짐승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여야 합니까? 인간은 짐승처럼 네 발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두 발을 땅 위에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해 저 높은 곳으로 향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빵으로 배만 채우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살찌우려 해야 할 것입니다. 짐승과 달리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기에 인간은 결코 배만 채운다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배부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불행의 근원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그것으로 배를 채우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 던져진 두 번째 질문은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악마는 애수께 온 세상의 권세와 부귀 영화를 한순간에 보여 주면서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서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이는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목표는 도대체 무엇이며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또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예수도40일 동안 광야에서 엄재하시면서 이 문제와 심각하게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악마는 돈과 재물과 권력, 부귀 영화야말로 인생의 최고 가치이며 삶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악마인 자기에게 절하라고 예수를 유혹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부귀 영화와 권력이 인생의 최고 가치이니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이 없지 않느냐, 악마에게 절하고 악마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차지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악과 타협하고 악마의 하수인이 되면, 우리는 쉽게 부귀 영화와 권세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향락과 편안함과 재미를 마음껏 누리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돈과 재물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악마의 하수인으로서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돈과 재물과 권세가 제공하는 향락과 안일을 누리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의 하수인들은 온갖 부정과 부도덕 그리고 범죄들을 저지르고, 이 세상을 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서 부귀 영화와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부귀 영화와 권세가 인간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우리 인간들을 영생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단호히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시고 “하느님을 예배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만이 당신이 가실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인간이 당하는 불행은 물욕에 사로잡혀서 그것 때문에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께 던져진 질문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악마는 예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악마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안전하게 뛰어내릴 것을 제의했습니다. 마치 육백만 불의 사나이처럼‥‥ 그래서 사람들이 그 놀라운 모습을 보고 모두 기가 죽어서 당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께 그런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것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인간들을 압도하고 그 위에 군림하시기보다, 하느님의 능력에 철저히 의지하는 약한 인간이 되시고자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무한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의 그 무한한 권능 앞에 아무리 큰 능력을 지닌 인간이라 할지라도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신앙인이 되어 하느님 앞에 귀의할 수 있는 첫걸음은 하느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인간의 구원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께 귀의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만이요 자만입니다. 또한 멸망의 시초입니다.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과 하와가 그래서 망했고, 바벨탑을 쌓으려했던 인간들이 그래서 망했고, 노아의 홍수에 휩쓸려 갔던 인간들도 그래서 망했던 것입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하느님께 귀의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철저히 귀의함으로써 가장 약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유혹하는 악마에게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40일을 엄재하시면서 깨달음을 얻고 인간을 구원하는 길에 나서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절 70일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하는 시간입니다. 이 사순절이 여러분 모두에게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47.            사순 제1주일 <루가 4,1-13>(다)  말씀의 능력으로 유혹을 이기자   

                                                             유영봉 신부



묵상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자유란 선택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선택은 항상 갈등과 고뇌를 동반하는 것이며, 이는 항상 유혹을 불러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유혹을 이길 수 있다.



1. 사순절의 의미를 살리자

사순절(四旬節)의 旬은 初旬, 中旬 하듯이 10일을 의미하며, 사순이란 40일을 뜻한다고 하겠다. 즉 사순절이라 교회 전례에 안에서는 속죄의 재계(齋戒)를 통해, 그리스도의수난에 동참하며 부활 축일을 준비하는 40일을 말한다.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신자들의 머리에 재(灰)를 뿌리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파스카 준비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 생명에로 건너가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음으로써 가능하다. 교회는 예부터 기도와 재계와 희사를 속죄의 방법으로 제시해왔다. 이기적인 삶의 껍질을 벗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지기 위해 내가 벗어버려야 할 악습이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악습을 극복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하자.



2. 유혹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조건 



오늘 복음은 유혹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준다. 우리는 가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원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인간에겐 죽음도 인생고도 없었을텐데․,․"하며 인간을 시험하신 하느님을 원망하고픈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의 원조 타락 이야기를 잘 이해해야한다.

  

인간은 본능이라는 하나의 행동양식을 지닌 동물과는 달리 자유를 지닌 존재다,

자유(自由)란 무엇인가? ‘자유'와 모순되는 개념은 ’필연(必然)'이라고 한다. ‘필연'이란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자유란 두개 이상의 가능성 앞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항상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등과 고뇌를 겪지 않을수 없다. 여기에 신(神)도 동물도 아닌 인간이 유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사에 유혹당하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태 창세기가 묘사하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와 쳐다보니 먹음직하여, ‘먹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며 고뇌하는 모습은 바로 자유를 지닌 인간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유혹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참으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아들'이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빵(돈)에 대한 유혹, 자기 과시와 명예에 대한 유혹, 권력과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등은 우리들이 세상살이에서 매일 당하는 유혹들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크건 작건 간에 돈을 위한 도박과 사기, 자기 과시를 위한 교만과 과소비, 권력과 명예를 위한 중상모략의 유혹을 받고 살아간다.



3. 유혹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비법



  예수님은 유혹 당할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그 유혹을 물리치신다. 유혹을 이기는 길은 내 뜻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말씀을 한치도 어김없이 지키는데 있음을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히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이는 겸손되이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만과 경거망동은 유혹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4. 한번의 양보는 모든 것을 잃게 할 수도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다. 인간은 절제와 희생을 하는 만큼 성숙된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하루에 한끼만 먹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먹고 싶은 대로 먹다보면, 모든 욕심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바 있다.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말(馬)이 생기면 마부 두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욕망은 한줄기에 갈린 감자처럼 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악과 한번 타협하고 나면, 결국 줄줄이 밀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사순절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온갖 악의 사슬에 묶여있는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고, 영적인 자유로움을 되찾는 은총의 시기며, 진정한 인간성 회복의 시기다. 내가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신앙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보다 새로워지기 위해, 뿌리뽑아야 할 나의 악습은 무엇인가? 각자 자기 자신이 제일 잘안다.



구체적인 결심이 요구된다. 악과의 싸움은 내 혼자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고자 성체성사로 항상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죄와 악의 세력보다 은총의 힘이 더욱 위대함을 체험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하자,



48.       사순 제 1 주일 (다해)   사순절은 새로운 광야의 길    

                                                   강길웅 신부





은혜로운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이 은혜로운 것은 우리가 이 시기 에 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부활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필요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늘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 은 첫 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생활을 했으며 그리고 약속의 땅을 얻기까지에는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게 되니 그 감회가 얼마나 깊었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세월 어려웠던 사건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죄의 결과였으며 그때마다 하느님은 벌을 주셨지만 그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기 위한 그분의 섭리 요 계획이셨습니다. 지내고 보니 하느님의 사랑이 아주 새롭게, 그 리고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은 누구나 광야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몸 붙일 곳이 없는 황량한 벌판을 혼자서 고달프게 걸어가며 여러 가지 고난을 두루 체 험할 때가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느끼기도 하며 버림과 치욕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느님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드뭅니다.



언젠가 병상에 누워 있는 어떤 형제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아프고 보니 예수님이고 하느님이고 안 보인 다는 것이며 기도하며 선하게 살았던 결과가 고작 그것이냐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사실 고통을 말할 자 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없다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던 바로 그 비슷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하시며 시험을 받으십니다. 성서에서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곳이며 또한 마귀의 유혹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예수님 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사순절이라는 광야에서 똑같은 것을 체험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셨던 세 가지 유혹, 즉 빵 과 권력과 공명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욕망에 대해 묵상을 해야 하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는 오히려 가지고 있는 그것들을 나누기 위해 우리의 '광야'를 걸어가야 합니다. 사순절은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을 새로운 각도에 서 다시 한번 바라보는 시기입니다.



돈이고 권력이고 채우면 채울수록 부족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마 치 바닷물과 같아서 배가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인데도 "물! 물!"하면 서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나누면 나눌수록 넉넉하게 됩니다. 호 주머니에서 아무리 꺼내어 나누어 줘도 늘 가득 차 있는 넉넉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은혜입니다.



성당마다 아름다운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서 자신들을 희생하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자들을 보 면 그 안에 꼭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고의 영광을 자기들이 얻으려는 공명심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돌리면 얻는 명예와 은혜가 더 큰데도 그걸 모르고 이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기가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요즘 가정에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자녀가 여럿일 때는 형제들이 서로 이해와 양보와 희생이 저절로 뒤따랐습니다. 그래야만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가 하나나 둘이기 때문에 그들이 양보와 희생을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집,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형제들간에 위 아래로 부딪치면서 고통을 배워야 하는데 그 수련이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화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광야를 체험하고 고난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를 봉헌할 때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에서 내 자신을 이웃에게 내주고 베풀어 줄 때 참다운 신앙고백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사순절은 교회 가 의미있게 걸어가는 광야의 길입니다. 고통을 체험하며 그것을 은혜로 성화시키는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또다시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용기있게 걸어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코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49.                사순 제1주일 (다)   예수님이 당한 유혹

                                                          서경윤 신부



간첩신고 포스터에는 하나같이 간첩에 대래서 붉은 얼굴, 검은 그림자와 긴  손톱을 그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긴 사람을 찾아 간첩신고를 하려면 헛수고 일 것입니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어릴 때 잡힌 간첩의 사진을 보면서 내 친구가 한 첫마디 말은 “어! 사람하고 똑같네?”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간첩은 마귀처럼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마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마귀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내가 어디서 마귀 그림을 보고 내 나름대로 마귀 생김새를 상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상상하던 마귀는, 무서운 얼굴에다 머리에는 뿔이 나고, 온 몸에는 털이 나 있고, 꼬리도 나있는 괴물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정말 이런 모양으로 사람한테 나타나서 사람을 유혹한다면 누구나 쉽게 마귀들 알아보고,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면 평생 한번도 마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는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음 속 은밀한 곳에 숨어서 암약합니다. 마귀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갓 신부 돼서 아주 작은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생각이 납니다. 아마도 백리 안에 사는 미친 사람은 내가 다 만난 듯 합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는 정신이 좀 이상하다싶으면 일단 성당에 데리고 와서, 마귀 든 사람인지 확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인지, 자꾸만 성당에 데려왔습니다. 연세 많으셨던 전임신부님이 하셨다는 대로 기도해 달라면 기도해 주고, 안수해 달라면 안수해 주고, 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한 부인은 내가 두 손으로 그분의 머리를 감싸고 주모경을 외운 다음, 앞뒤 목에 십자가를 긋고 성수를 뿌리고 강복을 주면, 그렇게도 아프던 머리가 개운하게 낫고, 시원하다면서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물론 이 방법도 그 부인이 전임 신부님에게서 배운 것이지, 나는 단지 부인이 시킨대로 했을 뿐입니다.

전기 불이 없던 본당이라 밤에도 불이라곤 성당 안에는 성체등만 켜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정신이 좀 약한 사람들도 자의로 흑은 가족들이 보내서 기도하러 많이 왔습니다. 어두워진 다음 성당에 들어갔다가 머릴 끝까지 쭈삣하게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성당복사(지금의 사무장)가 성당문을 열러 갔다가 혼이 났습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순간, 성당문안에서 비명같은 고함소리가 났습니다. 간밤에 그 사람이 성당 안에서 잠든 사이에 복사가 문을 잠궈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평소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는데, 문 앞에다 큰 일 작은 일 다 봐놓고선, 그 책임은 복사한테 있다면서 화가 잔뜩 나서 한참 꾸지람(?)을 하고는, 배가 고파서 자신은 아침 먹어야 한다면서 집에 가버렸습니다.

착한 복사는 빙그레 웃더니 성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는 코를 움켜쥐고, 확인 않고 문 잠근 보속으로 성당 청소를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모두는 마귀 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은 예수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상상대로 머리에 뿔 난 마귀가 돌멩이를 들고 예수들 유혹했다기 보다, 예수가 돌멩이를 들고「배가 고프니 아버지께 청해서 이걸 빵으로 만들어 배를 채울까?」하다가, 아니다「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을 것입니다.

또 꼬리 달린 마귀가 앞장서서 예수를 높은 곳으로 안내하여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화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그 유혹을 포기한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 올라간 예수는, 뭇 사람들이 보는 데서 뛰어 내린다면, 그리고 다리를 다치지 않는다면 성서의 말씀도 진실이 증명되고, 사람들의 탄성이 대단할 것이라 일순간 생각했지만, 「주님이신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성서말씀이 생각나서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사막에 가실 때도, 마귀의 안내로 성전 꼭대기에 가실 때도, 남들이 보기에는 혼자 가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악으로 유혹하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밀한 마음 속에 잠입하여, 나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도록 유인하는 능력 말입니다. 스스로는 활동을 못하고, 어떤 실체(뱀, 돼지 등) 에 붙어서 활동하므로, 실체인 사람은 자기의 결단으로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악을 저질렀으면, 그 책임을 자신이 져야합니다.

  정신병적 증세를 드러내는 사람이 마귀 들린 사람은 아닙니다. 악으로의 유혹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악한 세력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마귀 들린 사람입니다. 이들도 다른 사람들과 외형으로 전연 다른 데가 없으며, 때로는 자신도 그런 상태에 있음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경험으로 세상살이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재물과 권력과 향락입니다. 재물에 눈 먼 사람, 권력에 잡혀있는 사람, 향락에 빠져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거기로부터 헤어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마귀 든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성서에는 이러한 유혹들과 이 유혹들에 대한 극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며 특별히 재물의 유혹, 권력의 유혹, 향락의 유혹, 이 3가지 유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로 결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인정하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특별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오늘 아침 일간 신문을 보면서 나 혼자 한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선거 날에 마귀 들린 사람들한테는 투표하지 말아야겠다」고. 그래서 미리 잘 관찰해야겠습니다. 내가 투표하려는 사람이 흑시 재물이나 권력이나 향락에 마음이 온통 뺏겨 노예가 된 인물은 아닌지? 그런 마귀들린 사람이 당선 된 다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 신문에 실려, 신문에 실린 얼굴을 보면서 “어, 보통 사람하고 똑 같네?”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50.                  사순 제1주일 (다) 생사의 갈림 길에서 내려야 할 판단

                                                       허 환 신부



우리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는 사제의 말씀을 듣는다. 재가 지니는 심오함을 되새기며 진지하게 우리의 삶과 죽음, 회개와 믿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게된다.

  

사순절의 모든 전례는,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믿음의 철저함을 요청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한 결단이 어떠해야 하고,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그리스도 예수를 표본으로 하여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속죄와 기도, 단식의 시기인 이 기간은 부활을 위한 필연적 과정임이 재삼 강조되고 있다.



인간의 뜻에 맞추려는 집요한 유혹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그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 유혹 사건은 예수님의 세례에 뒤이어 다루어지고 있기에,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보아야 한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의 공관 복음은 모두 이 광야에서의 유혹을 전하고 있지만, 마르코는 세 가지 유혹에 대해서는 하나도 전하지 않으며, 마태오와 루가는 유혹의 순서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전제로 하여 우리의 관심은 이 복음이 갖는 사순절 체험과의 깊은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 있다.

  

첫째로, 루가에게 있어서 그 ‘유혹'은 예수께서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 즉 ‘수난'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즉 이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걸쳐 계속되는 유혹으로 이해된다.

루가 복음의 특징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4, 1-2)는 것과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4, 13)고 진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분명 ‘다음 기회'란 ‘수난의 때'를 말한다. 그때 악마는 유다의 배반과 그리스도를 거슬러 육체적 폭력과 탄압의 지휘자로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복음은, 사탄이 능란한 솜씨로 예수를 전복시키려 애쓰는 ‘유혹'의 특성을 잘 알려주고 있다.

 

둘째로, 유혹사화는 예수께서 성부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엄숙히 선언되었던(루가 3,7) 세례의 장면에 뒤이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사탄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그분의 역할을 승리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전락시키려 한다.

이같은 유혹은, 예수께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어 생활의 계획을 보다 더 쉽고 안일하게 실현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뜻보다는 인간들의 원의에 맞추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고 격렬하게 사탄이 야기시키는 무서운 유혹이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그리고 끊임없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기도 하다. 즉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제서 당신 자신의 모범을 통해 원하셨던 것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의 기대에 맞도록 들어 높이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자신들을 맞추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고 있는 사탄의 영원한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께는 이러한 유혹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성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절대적으로 당신 자신을 충실히 못박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탄의 유혹을 쳐 이기시기 위해 계속해서 성서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당신을 배후에서 존재케 한 그 배후의 절대자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순절에 대한 또 다른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즉 그 말씀을 경청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실한 계획에 따라 우리의 생활을 변모시켜 나감으로써, 그 말씀의 요구를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편의주의적 그리스도교 사상-하느님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더 애쓰는-의 집요한 유혹을 쳐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던져주는 긴 죽음의 시간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는 과정으로 시작되는 사순절은, 세례성사로 시작되는 우리 신앙의 여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세례에 뒤이어서, 바로 유혹의 깊고 험난한 여정, 즉 광야의 삶으로 들어가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의 삶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경험한 광야의 유혹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삶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들에게 구원의 약속이요, 보증이지만,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피땀을 흘리는 고통과 수난을 수반하고 있듯이‥‥

  

사순절의 길고도 긴 어둠과 죽음의 시간들은, 내일을 밝히는 밝은 태양을 우리에게 희망으로 던져준다. 사순절이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신앙에 대한 새로운 결단은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됩니다"(로마 10,10)라는 오늘의 제2독서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때, 이 행위는 비록 내적으로(마음으로)하는 신앙고백이지만, 공동체 앞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적으로(입으로) 하는 신앙 결단이다. 즉 우리의 내적 신앙고백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적 결단을 지향하고 있다.

  

공동체적 신앙 결단이란, 우리를 삶의 현장과 무관하게 저 먼 곳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를 삶의 깊고 험난한 골짜기로 안내하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도전으로 이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분처럼 온몸으로 응답할 십자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수난을 거부하지 않으셨듯이, 그분의 삶을 따르려는 우리들은 우리에게 던져지는 이러한 요구에 온몸으로 답해야한다. 사순절에 행하게 되는 단식재를 통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욱 뜨겁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과의 긴밀한 유대, 내적인 신앙고백, 공동체적 신앙 결단이란 주제로,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의 수난으로 인도하고 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란, 철저하게 짓밟히는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고난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으며, 이 깊고 어두운 터널 너머에 밝아오는 내일에 대한 강한 희망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51.                사순 제1주일 (다) 구원의 요소

                                                   홍금표 신부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자기 완성, 자기 실현, 혹은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종교에서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구원이나 해탈이란 용어를 사용하다. 이런 말들의 의리를 단적으로 이것이다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삶에는 뭔가는 모르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채워 가는 과정이 인생이고, 이 부족한 부분이 채워 진 상태를 사람들은 자기 완성 혹은 자기 실현이라는 의미로 알아듣는다.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실현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 방법이나 지향점은 다르지만, 부단히 이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족한 부분이「돈」또는「권력」등으로 채워 질 때, 우리 인생은 완성된다고 생각하기에, 돈과 권력을 위해 우리는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을 읽게 된다. 사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전 생애의 사상을 서술하는 대목으로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는 구절이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어떤 중요한 일을 준비하는 기간」이기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고 유혹을 이기셨다는 것은, 공생활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때문에 유혹사화를 읽으면서, 이들은 세상을 향한 교회는 항상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우리가 해야할 오늘의 40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광야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광야는 성서에서 고통과 시련의 장소인 동시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축복과 은총의 장소로 나타나기에,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광야로 나아가신 모습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야 할 오늘날 우리 삶의 광야를 찾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서 묵상해야 할 주제는, 아마 예수님에서 받으셨던 3가지 유혹의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은 아직까지도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돈과 권력 그 자체를 거부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결코 빵과 권력, 그 자체를 멀리해야만 할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와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분명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빵을 준비할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왕이심을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유심히 보면,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치시는데 거부하신 내용은 빵과 권력 그 자체보다는, 그 전제 조건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유혹에도 나타나지만, 예수님은「돌더러 빵이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수고하지 않는 빵, 노동의 결실로써 얻어지는 수고의 빵이 아닌 것에 대한 거부이리라.  즉, 돌이 빵이 될 것을 요구하는 인간의 허황된 욕심에 대한 거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악마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권력과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 사실 예수님이 꿈꾸었던 하늘나라는, 하느님 아버지를 유일한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였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통한 세상의 통치에 강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구절은, 권력 자체의 포기보다는 전제 조건인「악마에게 엎드려 절을 하는 행위」에 대한 거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정한 방법과 불의한 수단 등, 악마적 방법을 통한 권력욕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요구.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요구」. 이 유혹은, 우주적 자연적 질서를 넘어서는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기술에 대한 욕심이리라. 그러기에 이 거부를, 과학이든 학문이든,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질서를 존중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너무 추상적인 이해일까.

  

어찌하든 오늘 복음을 보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자기완성을 위해 빵과 권력 그리고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과 우주적인 질서가 파괴되고, 나의 수고와 노력이 없는 빵과 권력 기술은 결코 인간완성 즉, 구원의 한 요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성서를 읽기 위해 초를 훔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본다!












52.                         사순절 세례자 요한의 기도  

                                                 이완영 수녀 (성가소비녀회)



명동 사순특강으로 '사순절 세례자 요한의 기도'라는 주제를 받으면서 내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씀은 ꡒ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ꡓ(마태오 3,2)는 요한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기도는 이 회개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 몰려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ꡒ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ꡓ



요즘 우리 주위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실천하는 진정한 신자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오랜시간 성당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더라도 돌아서서는 금방 형제와 이웃을 외면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자주 만나고 있지 않는가. 이 사순절에 하느님의 말씀 특히 복음서의 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없이는 회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회심'이 매순간 모든 날에 지속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ꡒ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ꡓ(요한 3,30)는 세례자 요한의 간절한 기도를 묵상하면서 다시 확인했다. 이 말씀은 매순간 육신의 안일과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약해지는 나에게 꼭 필요한 기도이며 삶의 지표라고 생각한다. 그분 즉 예수님이 커지셔야 함은 그분의 말씀이 나의 생각이 되고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내 행실이 날로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히 사순절부터라도 아침에 눈을 떠서 ꡒ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ꡓ는 마음의 기도로 시작한다면 분명히 사랑 기쁨 평화 용서 화해로 우리의 주변을 생기넘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내 안에서 그분의 사랑이 더욱 커지고 나의 욕망과 이기적인 행동들이 점점 작아지면 그 분 앞에 서는 날, 그분을 많이 닮은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3.                     사순절  예수님의 기도       

                                      윤공희 대주교 (전 광주대교구장, 은퇴)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나 비중이 크다. 사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본이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요, 삶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안에서만 하느님을 알아 뵈올 수 있다는 사실에 기도의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 믿음 자체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앞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신다 하더라도 믿음 없이 우리가 그 분을 알아 뵈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예수님의 지상생활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하였지만 모두가 다 그분을 믿지는 않았다. 믿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로써 깊어지고 밝아지고 완성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잘 전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전도생활의 하루하루를 지내시면서, 매순간 성령 안에서 성부와 함께 하시는 삶을 사시기 위해 기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침에 기도하시고 저녁에 기도하시고 밤중에 기도하시고 하루 중에도 수시로 기도하시고, 결국 끊임없이 기도하셨다.(마르꼬 1, 35; 마태오 14,23; 루가 6,12;5,16)



예수님의 이 모든 기도는 성부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당신의 구원 활동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중요한 순간마다 아버지의 뜻을 찾는 것이었다. 당신의 삶이 온전히 그러했듯이, 예수님의 기도 역시 아들로서 당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합치시키는 끊임없는 응답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된 기도가 되고 하느님 아버지께 가납되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러한 마음의 회개를 여러모로 강조 하셨다.



예수님은 또 ꡒ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ꡓ고 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참으로 '하느님과의 사랑의 대화' 가 되게 하려면 한 사람도 당신의 사랑에서 제외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 주시는지를 모르고 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 구하는 것은 '모두' 들어 주신다고 말씀 하셨으니까 - 우리가 구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의 청원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런데 자기가 소망하는 바를 확실하게 알려면 자유의 성령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도 이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아버지께로 나가는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고,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봉사하는 사도직에 헌신해야 하겠다.

















 54.          사순절 특별강연 (다)    파리 노틀담대성당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





아시아 대륙에는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살고 있으며 20세 이하의 젊은이와 어린이가 절반을 차지한다. 인종과 언어, 습속과 문화도 너무 다양해 대륙이라기 보다는 여러 세상이라고 해야 옳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고등 종교와 사상이 여기서 싹텄고, 예수님도 아시아인으로 강생하셨다. 그런데도 아시아인들은 예수님을 왠지 외국인으로 느끼고 여기며, 2000년에 걸친 선교에도 천주교인 수는 전체 아시아인의 2%에 불과하다.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는 재래 종교 및 문화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삼중대화가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중대한 과제는 어떻게 오늘의 다원적인 아시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구원자로 알리고 입증하느냐는 것이다.

아시아는 너무나 다양해 과연 '아시아적' 이라고 할만한 공통점이 있을까 하고 묻게 되지만 본래 침묵과 직관의 숭상, 깊은 가족 사랑, 근면과 인고, 화합과 생명존중, 정신 도덕가치의 추구 등 복음화 씨앗의 좋은 토양이 될 만한 덕목들도 많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시아가 오늘날 미증유의 위기에 놓여 있다. 위기라 하면 몰락과 도약의 계기를 동시에 말한다. 이를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아시아의 앞날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운명도 좌우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사회․문화적 소용돌이 속에서 가치관 붕괴, 세계화의 물결과 시장경제의 이념화,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적 극대화, 가정의 와해와 이기주의 등 파괴적인 힘에 휘말리면서 자아상실마저 강요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에게 ꡒ십자가 나무가 제1천년기에는 유럽에 심어지고 제2천년기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 심어졌으나 이제 밝아오는 제3천년기에는 아시아 땅에서 큰 열매를 기대한다ꡓ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려면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 신앙을 누구나 승복할 수 있게 증언해야 한다. 복음에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듯이 우선 그분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정연한 교리체계의 제시가 우선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분과 살아있는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상황을 함께 절감한 아시아 교회들은 특히 1970년 이후 아시아 주교회의연합(FABC)과 1998년의 아시아 주교 대의원회의를 통해 서로 다른 처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형제애로 공감대를 이뤄 나갔다. 그리고 교회 자체가 복음적으로 변신해 예수님의 아시아적 모습을 삶으로 드러내 보이는 노력을 함께 기울이기로 했다.

고맙게도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신자들의 자발적 신앙추구, 실로 혁명적이라 할만한 복음공동체 생활의 귀한 유산에 더하여 순교에 이르는 믿음의 입증이 오늘과 내일을 참되게 살게 해주는 힘의 샘이 되어주고 있다.



세상에 말이 모자란 적은 없다. 신자 개개인이나 신앙공동체로서도, 참된 삶만이 문제이다. 마더 데레사처럼 삶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얼굴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우리는 진정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머리말 대로 살수 있도록 변신해야 한다.

ꡒ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ꡓ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할 신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인간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54.          사순 제1주일  (루가 4, 1-13) (다) 광야에서의 유혹

                                                     신은근 신부



재의 수요일, 우리는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는 사실을 묵상하였다. 감각적인 오늘날 머리에 재를 뿌리며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신앙인들 외에 누가 있겠는가. 어린이들도 많이 나와 재를 받았다. 하나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이 신기하고 장난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 예절이 죽음과 연관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알았더라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이들만 그랬을까. 누구라도 죽음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죽음은 나와 거리가 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재의 수요일에 교회는 강압적으로 죽음을 묵상케 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허무감을 주거나 두려움을 심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재를 받으면서 우리는 언젠가 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니 유혹 앞에서 어떻게 해야겠는가. 죽음을 떠올리며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순절 동안만이라도 이 연습을 시도하라는 것이 재의 수요일에 담긴 교훈이다. 무엇을 끊어야 할지는 오늘의 말씀 속에 들어있다.



첫째는 빵의 유혹이다. 얼마만큼 소유해야 잘 사는 것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무작정 소유의 충족만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일생이 계획대로 되는가. 그렇지 않다. 계획의 삼분의 일만 이루어도 대성공이다. 나머지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행복으로 갈 수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소유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이끄심을 찾아야 한다. 생활 속에 잠겨있는 그분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왜 사는지, 누구를 위해 살고 있는지, 삶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사탄은 예수님과 함께 성전 꼭대기로 가서는 뛰어내리라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면 천사들이 바쳐 줄 것이 아니냐며 유혹했다. 그래 '뛰어내리마' 하고 뛰어내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 나서야 할 자리인지 아닌지는 쉽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았는데 이럴 수 있는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각이 과거에 얽매이면 잔소리꾼이 된다.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신앙인이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고 했다.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말씀이다. 모두가 내 몫이며 내 책임인 것이다. 무모하게 뛰어내리지 말라고 하신다. 무모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유혹받으셨다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그분을 유혹한 사탄이라면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혹은 죄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삶의 한 형태일 뿐이다. 실제로 인생은 절반이 유혹이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다. 끊임없는 기도만이 유혹 앞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얼마나 자주 이 기도를 바쳤던가. 그만큼 필요한 기도였다는 증거다. 결국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인생이다.



재의 수요일, 머리 위에 뿌려진 재 속에 이 진리가 숨어있다. 그러니 소유의 유혹 앞에서 인정받고 싶은 유혹 앞에서 다시 끊고 돌아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금년 사순절동안 실천 해야 한다. 또 다른 기쁨으로 부활절을 맞이할 것이다.





55.          신앙은 가능한가?  ( 1976.   사순절에)

                    십자가의 절규에서 탄생한 우리의 믿음

                                              서인석 신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의 뒤안길에만 버려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권태와 부조리가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욥과 전도서에서처럼 모순되게,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신앙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불안한 내일이 조용한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만, 우리는 전도서의 말씀과 더불어 “만상이 헛되도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이나, 시편 51의 저자와 같이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잿더미 위에서 회개함으로써, 실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덕(德)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활동을 믿고,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에 참다운 생명을 주시는 것을 믿는 일은, 희망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새 계약의 속죄자이신 예수께서 가지고 오실 하느님의 왕국을 믿고, 바라고, 갈망해야 합니다.



시인 뻬기는 말하기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덕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또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과 희망은 형제지간입니다. 그러나 어둡고 침울한 생활에 부대끼다 보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잊기가 쉽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세상에는 왜? 고통이 범람하고, 불의가 자행되고 있는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 지나간 월남 전쟁, 우리 조국을 초토화시킨 6.25전쟁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전쟁은 죄 없는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까지 무턱대고 학살합니다. “상대방 적군의 전의를 꺾자는 데 있다!”는 이유로, 초라한 변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역사상 무수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태어났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선의의 숱한 사람들이 부조리와 악덕에 의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아름답고 숭고하게 창조된 인간은, 왜 이토록 부조리하고 무자비한 고통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까? 인간이 성숙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왜, 이러한 참경을 묵인하고 계시다고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이러한 비극을 허락하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고통의 신비를 알아듣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다 하겠습니다.

월남 전쟁에서 어느 조종사가 적진으로 오판하여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그곳에 있던 고아들만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경우, 하느님은 무자비한 분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은 결코 계시지도 않는다고도 외칠 것입니다.



그럼으로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걸고 있는 우리들까지도 의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은 부조리한 고통 앞에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로 인류의 역사는, 투쟁과 증오와 살상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참되게 이해하려면, 그 뒤에 숨은 ‘고통의 역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부자나, 빈자나, 지식층이나, 무식층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비극은 지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부셔버립니다. 이와 같은 고통과 불의에 항거하지 않고, 죄 때문이라고 안이하게 회피해버린다면, 그 신앙은 인간적인 신앙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라면, 참된 희망조차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이나, 공산주의에 빠져버린다면, 그것도 해결이 아니라 도피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그 아무도 인간 자체 내의 부조리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의 말과 같이, “사람은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무력한 존재입니다”(시편 146,3-4). 아담의 아들이 무슨 재주로, 그 고통의 신비를 해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항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넘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 과연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전통 유신론은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지으신 것이며, 피조물은 하느님을 반영시키는 거울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 속의 하느님은, 우리 생활 구석구석까지 개입하지 않고, 칠층 고도의 높은 하늘에 홀로 앉아, 정적에 뭍혀 계신 하느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울인 이 세상에, 인간이 자유를 무시한 어떤 악이 들어와 산산조각을 내고 있다고 한탄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만족할 수 없으며, 단순환 우연을 믿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무신론은, 윗 질문의 바탕이 되시는 하느님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있습니다. --- 스땅달이나 니체와 같이, “신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답변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창조주가 자기사업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신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을 제거하고, 스스로 운명을 해결한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를 인간이 차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을 역사의 장에서 추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는 인간은, 고독의 심연 속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전체 그리스도교 역사를 볼 때, 수난과 고통을 받으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약하고 병들고, 억울한 이들의 충실한 벗이 되어 오셨습니다.

억울한 고통, 불의한 고통, 무고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공의하심을 이해할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무도 멀리 계셔서,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듯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이 세상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의 고통을 머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참여, 아니 짊어지고 계십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주님의 외침은, 우리 중의 어느 누구의 애소보다 더 짙은 절규입니다. 이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하느님이십니까? 이 얼마나 사랑에 찬 하느님이십니까?



예수께서는 마태 25장에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고통이 있을찌라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신앙이 낳은 결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을 통해 신앙이 탄생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고통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던 예수님의 외침과 더불어, 헛된 것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조리한 고통 속에서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은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 그 고통의 가시를 극복하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신앙을 얻게 된 것입니다.




                           < Ⅱ >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죽으셨다고 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전하시는 메시지를 보고, 감히 하느님과 동등한 지로 자처한다고 여겨, 예수를 죽음에 붙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께서 ‘로마의 평화를 위협한다’고 여겨, 십자가형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33년 동안 말과 행동으로,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에, 신앙의 고통의 문제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당하고 멋지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통과 번뇌 속에,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시편 22의 첫 구절 :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마르 15,34절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절규를 담은 시편 22를 생각하는 것도, 고통과 신앙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편 22는, 억압받던 한 시인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억울한 고통에 잠긴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노래였습니다.

히틀러의 가스실로 끌려가던 600만의 유대인들이 읊은 최후의 노래로도 유명합니다. 이 아름답고 처절한 노래는, 인류 고통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꾸밈이 없고 사실적이며, 고통 당하는 인류의 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표출해 줍니다.



이 시편은, 시상과 이미지가 예레미아 예언자의 고백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기원전 586년 유대인이, 원수나라 바빌론으로 압송되어 가기 전, 어느 시기에 작성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가난한 시인은, 살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당한 후, 그래도 하느님의 구원을 감사하기 위해 제사를 바칠 즈음에, 이 시를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

그는 자기가 당했던 고통과 절망을 2-27절 사이에, 있는 그대로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그리스도를 닮은 예언자 예레미아의 고백록을 방불케 합니다.(예 15,16-20/ 12,1-5/ 8,18-23/ 17,14-18/ 18,18-23/ 20,7-9/ 20,14-18).



시인은 고통과 실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실망을 번갈아 가며 노래하였고, 때때로 고통에 대한 그의 노래는 대신비가의 독백처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복음이 “행복하여라!”라고 축복한, 그러한 가난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제도와 역사의 오만 때문에 버림받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소연 할 곳이라고는, 하느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가난한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수난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마치도 엎질러진 물과도 같이, 내 모든 뼈들은 무더났나이다. 밀초같이 되어버린 이 내 마음은, 스스로 내 속에서 녹아버리나이다. 기왓장처럼 내 목은 칼칼하고, 내 혀는 입천장에 들어붙어, 죽음의 재 가운데 이 몸은 누워있나이다”(시편 22,15-16)



성서가 병든 한 시인의 모습을 처절하게 이토록 묘사한 일은 없습니다.

그의 뼈는 으스러지고(시 50,1), 상처마다 피가 솟았습니다(시 51,16).

그러나 이 시인은, 무엇 때문에 처절한 고통과 병고에 시달려야만 했습니까?

성 예로니모는, 17절에 대한 주석에서 말하기를, 긴 세월의 옥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난한 시인의 옥중생활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숱한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무리 이 몸을 에워쌌나이다.

그들은 내 손과 발을 묶어, 죽음의 재 가운데 이 몸 뉘었나이다.

내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어도, 그들은 익히 보며, 좋아라 나를 보며, 저희끼리 내 겉옷을 나눠 가지고, 제비뽑나이다”(16절-19절).



이 시인은, 감옥에 같였던 예레미아와 같이(예레37-38), 옥중생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벗한 사람이라고는, 죽일 듯이 노려보는 간수들과 비웃는 무리밖엔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도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꺼리, 사람마다 나를 업신여기고, 머리를 끄덕대며 비쭉거리나이다(7-8)”라고 외쳤습니다.

정신적 고통 또한, 육체적 고통 못지 않게, 이 시인을 괴롭혔습니다.

고독과 소외와 좌절 ---- 이 엄청난 고통은, 어디서 왜 생긴 것이겠습니까?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에 사직당국과 불의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온갖 욕설을 다 뱉았습니다.

시인은 무자비하게 고문하던 원수들을 보고, “들소의 외뿔, 사자의 부리, 개의 발톱”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시인에게는 실망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으나, 외면당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고 빌건만, 멀리 계시나이다! 진종일 외쳐봐도 들은 체 않으시고, 밤새껏 불러봐도 알은 체 아니 하나이다”(2-3절).

애끓는 이 시인의 절규는, 여기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마음을 처절하게 했던 것은, 고문도, 간수도, 시직 당국도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갈망했던 것은, 이러한 불행의 종식이라기 보다,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왜, 하느님은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하느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왜, 무고한 이가 잿더미 위에서 울부짖도록 버려주시는가?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가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그러한 가난한 이 시인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하느님의 현존을 철저하게 믿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친구와 친구, 아내와 남편이 서로 마주보며 사랑의 대화를 나누듯이, 이 시인도 하느님의 현존을 피부로 느끼듯 하였습니다.

“모태로부터 이 몸 나게 하시고, 내 어미 젖가슴에 포근하게 해 주셨기에, 날 때부터 이 몸 당신께 바쳐진 몸, 모태에서부터 당신은 내 주님이시오니이다. 멀리 하지 마옵소서. 이 몸은 괴롭삽나이다. 가까이 하소서, 도울 이 없삽나이다.”



이 시인이, 가장 괴로워한 것은, 과거에 반겨주던 하느님이, 지금은 자기를 버렸다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자기의 고뇌를 탁월한 영적인 차원, 아니 신앙의 차원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결코 하느님께서는, 인류역사 전체의 고통을 대변한, 이 가련한 시인의 절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사 53장의 “수난 받는 종!”을 보십시오! ---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그 종의 모습을 그대로 취하셨고, ‘구더기, 천더기, 조롱꺼리’(시 22,7)가 되셨습니다.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은, 십자가 위에 달린 나자렛의 예수님을 보고 빈정댔습니다. ----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지?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구하여라! 남을 살리면서, 자기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구나. 저분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어 드리겠는데. 저분은 하느님을 믿고,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이제 그를 살려 보시라지!”(마태 27,38-44) ---- 이 말은, 인류의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 퍼부은, 모욕의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아버지신 하느님을 철저히 믿고, 신뢰한 신앙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십자가상에서 ----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2편의 저자가 토로한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의 고통을 짊어지신 ‘하느님의 어린양’이시셨습니다.



                           < Ⅲ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22의 가난하고 억울한 시인의 절규를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던, 시인의 그 울부짖음을,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상에서 외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업신여기며, 삐쭉거리던 시인의 호소를,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 “하하, 너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목숨이나 건져라!”(마르 15,29/ 마태 27,39/ 루가 23,35).



주위 사람들은, 시편 22의 저자를 보고, ---- “주께 의탁했으니, 구하시렸다. 그를 사랑하시니 빼내주시렸다!”(시 22,9)라고 놀렸습니다.

대제관이나 율법학자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 “자칭 하느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어디 한번 살려보시라지!”(마태 27,43)라고 놀렸습니다.

시편 22의 저자는, --- “기왓장처럼 목이 칼칼하고,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라고 했                         습니다.(시편 22,16)



예수께서도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22에서와 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나눠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았습니다(요한 19,24/ 마태 27,35/ 마르 15,24/ 루가 23,34).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번뇌와 불의를 대변한 시편 저자의 외침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통의 극치인 죽음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끝내 부활하셨습니다.

성자께 대한 성부의 지극한 사랑이, 그 부활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한 성자의 수난과 고통이, 성부로 하여금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난은, 인류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요 극치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또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한 시편 22는, 인류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 수난에의 신비에 참여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할 때마다, 이 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가난한 시인의 절규는, 성부의 버림을 받고 죽기까지 하셨던 그 사랑의 신비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그 가난한 신앙인의 호소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의 고통 앞에서 침묵을 지키시는 하느님께 의아심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생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은 오직 십자가상의 절규와 수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느끼는 곤혹(困惑)은, 멀리 계시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 때문이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이 하느님을 체험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神의 죽음 운운하는 ‘세속의 도시’의 사람들에게, 신의 죽음을 말한다면, 니체의 말과 같이 “신은 영원히 죽어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은, 죽음의 세계로 내려갔지만, 그 세계를 처 이기신 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때로는 버림을 받은 듯한 허무감에 휩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는데, 하물며 우리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새벽녘의 어두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결코 외롭거나 고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도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천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에 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서는 죽음이 설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라는 말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꼭 같이,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더불어 우리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고린 4,8-14).



성금요일에 우리가 묵상하는 기도인 시편 22는, 그리스도의 기도이기 때문에 더욱 중대합니다. 이 시는, 교회가 고통 당하고, 경멸 당하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숨져 가신 것은, 나와 우리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고통을 당하시고 버림을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고통과 버림받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나아가 부활은 인류에 대한 관심이며, 인류에게 대한 지극한 사랑의 결실입니다. 이 사실은 요한 사도가 누구보다도 더 잘 피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한 3,16)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이 고통과 경멸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신뢰를 잃습니다. 교회는 스승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또한 스승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고, 억울하고, 헐벗은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시편 22의 가난한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편 22,27의 노래와 같이, “가난한 이들, 배부르게 먹으리이다! 주를 찾는 사람들이 당신을 기리며, ‘너희 마음 길이 살라!’ 말하리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22는, 하느님 백성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체험하는 신앙인이라면, 홀로의 구원에만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백성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시편 22의 노래도, 투쟁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류전체의 신앙과 소망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한 희망은, 바오로의 말과 같이 세세대대에 ‘신음하는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할 때, 다른 모든 지체도 아파하지 않습니까?”(1고린 12,26)라고 한, 바오로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한 개인이 아파해도 함께 아파하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다. “당신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33).



신앙은 가능합니다. 신앙은 주 예수와 더불어 가능합니다.

신앙은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투쟁합니다.

신앙은 또 항구합니다. 신앙은 결코 평온한 대양 위를 노니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선박이 거센 파도를 만나도 굴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자세가, 바로 우리 신앙의 자세입니다.

고요한 항구로의 피신을 꺼려하고,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용맹이 바로, 예수께서 요구하신 신앙의 태도입니다.

신앙은,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



   56.                 하느님의 사랑

                         - 거룩하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

                               1976년 사순절에     서인석 신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바라고 신뢰한다면,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그 애틋한 사랑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가슴 뭉클한 감격을 체험할 때, ‘내일’이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미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지 위에, 하느님의 사랑이 움틀 희망의 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이 가져올 부활의 때이며, 영원한 생명의 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3, 16)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붙이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짧은 기간 살다가 죽더라도 그 죽음에 관심을 표하시며, 우리의 괴롭고 억울한 사정 하나 하나를 흘려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시어, 우리에게 대한 미래의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상징입니다. 이토록 하느님의 사랑은 지극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주기도 힘들고, 받기도 힘든다는 것이, 요즈음 심리학의 정설입니다. 따라서 소외와 좌절 속에 자라온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이 믿기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러한 사랑이 가능할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멜로드라마 속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사랑의 얘기들, 이 통속적 사랑의 눈은, 하느님의 순전(純全)한 사랑의 얘기들, 얼마나 흐릿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멜로드라마 속의 사랑이란, 오로지 상대를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자기의 성취감을 맛보자는, 이해득실 일변도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배제한 육체의 무덤 속에서는 순수하고 그윽한 사랑의 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들만이 하느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이고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랑에 공명할 수 있고, 예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 오빠입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형님이시오 오빠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성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들, 어린이가 된 우리들에게는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가 눈물겹도록 감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여야만, 그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하느님은 우리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요한은 묵시록 (3, 20)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요구를 이렇게 들려 줍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으며 다정하게 마주앉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다정하게 식사를 나눌 정도로 친한 벗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친하다 못해 사랑하는 벗까지 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우리의 벗이 되길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정입니다. 이 우정은 사랑을 전제로한 우정입니다. 참된 우정이라면 사소한 이해관계는 아예 초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성(理性)이나 합리(合理)가 들어 와 좌지우지할 입장도 못됩니다. 이 우정 속에는 서로 위하고, 서로 마주보려는 마음만 가득합니다. 또한 이러한 우정 속에는 짙은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대화는 조용한 저녁의 식탁에서와 같이 다정하고 풍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입니다. 따라서 산천을 호령하는 대자연의 창조주와 나누는 듯한 경외와 공포 속의 대화가 아닙니다.



그 대화는 엄부(嚴父) 앞에 꿇어 앉은 자녀의 자세도 아닙니다. 그 대화는 우리 마음 속속들이 털어놓을 수 있는 다정한 벗끼리의 대화와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여러분들을 내 종들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은 내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 모든 비밀을 말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5, 15이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우정 속에 사는 신앙인에게는 이 세상의 고통과 번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항거할 수 없을 강한 힘으로, 우리를 당기십니다. 모든 성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좇는 성실한 신앙인이라면, 이미 하느님과의 우정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기뻐하시는 것만 바라며,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배척하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다정한 대화 속에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우정이란 앞서 묵시록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가족끼리 식탁에 오여 앉아 친밀한 대화와 친밀한 시선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다정한 친구입니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바로 이 우정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고 우리의 잘못이 아무리 크더라도 하느님과의 이 우정만은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쳐다 보시는 그 사랑의 시선은 절친한 친구의 시선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 속에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려는 간절한 소망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 속에는 우리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 어떤 요청이라도 들어주시리라는 신뢰가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참된 벗으로 삼는 생활은 새로운 생활의 출발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다정한 벗으로 우리의 식탁, 우리의 마음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홀로 오신 것이 아니라 전 인류와 더불어 오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느님은 내 좁은 마음을 크게 넓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 마음 속에, 그 나가 들어와도 좁다고 불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날이면 인류가 모두 나의 친구가 됩니다. 하느님이 벗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해 주실 대, 그 사랑은 반드시 형제애를 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과 우정을 맺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친구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서의 줄기찬 사상의 흐름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인(戀人)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대변자인 예언자들을 통해 이와같이 요구하셨습니다. 사뭇 그리워하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사랑보다 더 짙은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류 각자 각자에게 연인과도 같은 열렬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사랑은 비현실적 사랑도 아니요, 애수에 잠긴 꿈 많은 소녀의 감상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요원의 불길과도 같은 정렬을 안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화염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 서서 너희를 기다리며, 한 남자가 여인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듯이 부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호소하시는 사랑은 어느 한 설교자의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란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란 하느님이 주신 사랑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성서에 따라 전달할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이야기는 하나의 드라마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드라마는 봄철의 꽃처럼 화사하게 피었다가 비참한 비극으로 끝난 드라마입니다.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에제키엘 16장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에서 인간을 빚어내신 날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던 날 세상에 그 누구도 피투성이의 알몸으로 태어난 너를 목욕시켜 주고 보살펴 주기 위해 너를 들여다본 사람 없었다. 너는 마치도 아무도 원치 않았던 갓난  아기처럼 추운 겨울날의 다리 밑에 강보에 싸인 채 버려져 있었다. 그 날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 너를 보았다. 너는 피투성이의 강보에 싸여 하늘을 향해 울고 있었다. 나는 상처와 유혈이 낭자한 너를 치료하였다. 너는 점차 튼튼하게 자랐으며 몸이 제 꼴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상한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어린아이였을 대에 진정 너를 사랑하였다. 그래서 나는 너를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불러 내었고, 너에게 걸음마을 가르쳐 주었고 내 품속에 꼭 껴안아 주었다. 나는 인간이 가진 모든 애정을 다하여, 젖먹이가 귀여워 안아들 듯이 너의 두 볼을 비벼대었다. 나는 왼종일 너에게 애정에 찬 시선을 던지고 먹을 것을 너의 입에 넣어 주었다”(호세 11, 1․3-4).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을 빌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날 너는 여전히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고, 가난하고 비참한 한 피조물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나는 네 앞으로 다가가서 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헐벗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날은 너희 인간과 하느님인 내가 갖던 사랑의 계절이었다. 그 계절은 우리 애정의 계절, 우리 결혼의 계절이었다(이런 용어는 하느님이 직접 쓰신 용어임). 나는 네 위에 나의 사모관대를 입혔으며, 나는 너에게 맹서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한 부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자세를 보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에게다 갖다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산입니다. 위의 말씀은 성서가 묘사한 그대로이며, 하느님의 사랑이란 완전 헌사적이고 사랑 자체인 분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인류에게 온갖 선물을 다 주었다. 금실로 수놓은 비단옷을 고급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명주 두루마기를 주었다.” 이러한 선물은 한 남자가 사랑하던 여인에게 주던 선물입니다. “나는 너를 칠보단장으로 꾸몄으며, 너의 팔목에는 팔찌를, 너의 목에는 목걸이를, 너의 머리 위에는 화려한 금관을, 선물로 주었다. 진정 너는 여왕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것은 인류의 영혼이 받은 하느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에제키엘을 통해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금은 보석으로 장식되었으며, 너는 가장 기름진 땅의 소출로 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다. 너는 지상의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너는 진정 완벽한 존재가 되었다. 너는 내가 입혀준 영광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땅이 우리에게 소출로 내주는 부와 재산, 다시 말해 쌀, 보리, 석탄, 석유, 우라늄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선물입니다. 시편 8의 노래에서와 같이 인간은 연인인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님은 우리를 천사들 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비극적인 드라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토록 사랑을 받던 인류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너는 오만한 여인이 되었으니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네 미모에 도취되었다. 드디어 너는 네 미모에 사로잡힌 나머지 거리에 나서서 매음부가 되었다.” 창녀가 된 인류, 이것은 성서의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잊어버리고 권력과 지배와 황금과 우상의 노예, 그리고 간음녀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거부하거나 하느님을 자기 생활 속에 살리지 못하는 삶은 바로 “매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저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게 되면 별 수 없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 우상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좋고 금력도 권력도 좋습니다. 다시말해 하느님이 들어서실 자리에 먹을 빵이나 성(性)이나 인간 스스로가 우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먼저 주신 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준 선물로 우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우상들은 아무 것에서도 너의 배를 채워주지 못하였다. 오! 너희 마음은 우상들의 유혹에 얼마나 약한가!” 하느님께서는 우상을 찾아 광분하는 시간을 두고 암캐를 찾아 헤매는 수캐에 비교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이 이성과 수치심을 잃고 암캐 뒤를 좇는 짐승에 비유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자기를 외면하면 창녀보다 더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창녀들은 몸값을 요구한다. 그러나 너희 인류는 품위를 짐승보다도 못하게 타락시키는 그녀들에게 돈을 물쓰듯 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석탄과 석유와 원자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살생과 정복의 도구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원자 무기의 경쟁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없다’고 하고 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이 언어와 혀를 속이고 헐뜯는 데에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때 하느님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 분노는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목격한 분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충격을 받을 만큼 우리의 연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언사는 거칠어지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간음죄를 번함 자와 같은 형벌을 내리겠다. 그 형벌은 살인자에게 내리는 벌과도 같을 것이다. 너는 네 젊은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으며, 내가 너희에게 쏟은 사랑을 기억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내 분노를 터뜨리게 하기 위하여 모든 행동을 삼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 네 행실의 결과가 네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할 것이며, 네 마음 속에 품었던 나에 대한 증오가 네 위에 떨어지게 할 것이며, 네 정신 속에 품었던 분열과 이간질을 네 머리 위에 떨어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혹독한 선언은 인간이 하느님을 망각했기 때문에 자초한 운명입니다. 번갈아 가며 하느님의 사랑과 미움을 사는 인간의 운명은 은총을 거절할 수 있는 인간 자유의 비극적 드라마입니다. 이 비극은 또한 오늘날 일뉴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밀물과도 같이 밀려오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젼의 물결 속에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 사랑하는 부모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릴 때, 우리가 하느님 아닌 우상에 송두리째 마음을 앗길 때 그것은 예언자의 말대로 하느님 대전의 간음입니다. “네 마음을 둔 그곳에 네 보물이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간음죄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이 준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우상에 고집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순되게도 우리의 끈질긴 고집을 보고도 마음의 어름을 스스로 녹이십니다. 하느님의 어조는 다시 인자한 아버지, 다정한 어머니의 애정담긴 모습으로 바뀝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랑에 굶주린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고집불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의 길을 찾으십니다. 호세아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나는 내 분노의 불길에 따라 보복하지 않으리라, 나는 너를 파괴하기 위해 되돌아 오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이지 결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거룩한 분이다”(호세 11, 9).



이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인류의 끈질긴 고집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너는 제발 일어나라. 포로가 된 너, 인류야 일어나라. 노예의 포승을 끊고 일어나라” “온 일이 폐허가 된 한 버림받은 여인처럼 된 너에게 나는 호소하니 회개하여라.” “ 아 어떻게 내 청춘시절의 아내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잠시동안 내가 너를 저버렸으나 무한한 연인의 정에 사롭잡혀 너를 기억하엿으니, 이제 다시 네가 나에게 되돌아 오기를 바란다. 내 잠시 분노하여 내 얼굴을 숨겼으나, 내 영원한 사랑과 무한함 때문에 너를 다시 기억하였도다”(이사 54). 이 사순절,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되돌아 간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내와도 같은 인류가 우상인 바알과 밀회를 즐기러 나갈 때 방해를 하십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녀의 길에 가시덤불을 놓아 가로막을 것이며, 거기에 울타리를 쳐서 자기 애인의 집으로 가는 오솔길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 애인을 뒤쫓아갈 것이나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는 내 첫 남편에게로 되돌아 가리라. 그때가 나에겐 지금보다 더 행복하였기 때문이다’하고 말하게 할 것이다”(호세 2, 8-9).



질투하는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상과 놀아나는 아내의 속임수보다 더한 책략을 꾸미십니다. “보라 나는 그 녀을 유혹하겠다. 그녀를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그녀의 마음에 사랑을 속삭이겠다. 그녀가 사막에서는 젊은 시절의 날들처럼, 그녀가 이집트에서 올라오던 그날처럼 내 사랑에 응답할 것이다”(호세 2, 1-17).

이와같이 호세아 예언자는 인간이 사막에 놓인 날에야 하느님께 응답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겨우 물도 음식도 없는 황량한 사막 위에 놓여서야 하느님을 찾을 것입니다. 이 목마른 사막의 길이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막은 바로 인류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소생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막에서 인류를 당신의 영원한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 당신 아들의 십자가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날, 십자가는 그 사랑의 드라마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하느님에게만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의 희망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 상황 안에서도 참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막의 사순절, 그리고 예수 십자가의 메시지는 우리의 고통과 불안과 번민과 죄를 비쳐주고 또 답해 줍니다. 십자가는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우리 인간을 도와주고, 또 고독과 암흑과 죄에서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사막에서 성취된 하느님 사랑의 정복은 옛 예언자들에게서 시작하여 유일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기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베풀고 화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 이 해방의 목적은 우리를 생명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이상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최초 봄의 꽃잎처럼 희망 속에 부풀었다가 결혼시절의 기쁨처럼 화사하게 번지지만, 끝내 유혈이 낭자한 십자가의 어두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그 피흘림은 밀알 하나가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성실하게 추구할 대,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 악의 새력이 범람해도 우리는 은총과 사랑의 힘으로 영원한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이 깊은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을 망각하지 말고,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수난하신 주님의 철저한 모습을 그려보는 사순절! 우리는 그 사랑의 숨결 어느 한 줄기도 잃지 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무던히도 부모님의 사랑을 피해 속썩이던 우리, 지난날 잘못을 아파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참되게 따를 수만 있다면 그 어느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지셨던 그 사랑에서 나를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는데 거져 주시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두고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역경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박해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굶주림과 헐벗음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혹 위험이나 칼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로마 8, 31-39)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남편 형님 오빠로 번갈아 가며 사랑을 호소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이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신 희생된 ‘천주의 어린양’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인이 갖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바탕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여기에 응답하는 사람들이여! +

57.              희망은 가능한가?

                           - 실망한 욥과 코헬렛 -

                                                (1976년 사순절에 서인석 신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Ⅰ



단식과 금육이 선포된 재의 수요일, 우리는 사순절의 막을 여는 엄숙한 이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줄지어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성당 안팎은 온통 자주빛 일색이었습니다. 제의도 영대도 모두가 자주색이었습니다. 이 자주색은 슬픔과 참회를 상징합니다. 신부님은 지난해 성지주일, 우리에게 나눠준 종려나무가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쟁반에 담아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제대 앞 무릎 끊은 우리의 머리 위에 그 재를 뿌리면서 외쳤습니다. ‘사람아,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 숱한 인생의 의미는 이 한마디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혼자서 있을 수 있다고, 아니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우쭐대던 우리는, 이 재뿌림 속에서 참회해야 할 신앙인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니,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보소서. 나는 죄 중에 생겨났고

내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배었나이다”.(시편 51 참조)



어둡고 비참한 인간의 조건,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시편 작가와 함께, 우리 뇌리 속에 명멸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정 참회하였습니까? 오직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까? 하느님이 보내신 성자를 믿고 그분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우리의 희망을 바쳤습니까?



우리는 머리 위에 재를 얹은 채, 잿빛 하늘 아래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거리는 온통 사람의 물결로 이어져 한 뼘의 여유도 없이 붐볐습니다. 어디로 향해 밀리는 물결입니까? 풍족한 삶의 공허를 메꾸기 위해, 쾌락과 기쁨을 찾아 나선 사람도 있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방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가는 날로 치솟고, 일자리 구하기는 날로 힘겹습니다. 점점 어렵고 각박해지는 현실입니다. 토담 너머 오가던 따스한 인정의 이웃은, 이제 내가 차지할 밥을 빼앗아 가는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풍족한 사람들의 호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불우 이웃을 돕자는 구호도 나붙습니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먹고 입고 잘 곳이 있을 때의 이야기라고 흘려 버립니다. 수백만이 붐비는 대도시라 이웃에 온정을 베풀 수 있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호구지책에 허덕이는 우리에게는 이웃 사람이 한낱 사치로 비칠 때가 더 많습니다. 대 도시의 고독과 소외감에 젖은 현대인들에게 이웃이란 황량한 사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살을 비비고 사는 이웃끼리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성당에 가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는 한, 요한 세자의 것과 같은 세찬 설교를 듣지 않는 한, 하느님이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 존재가 바로 우리인지도 모릅니다. 스쳐 지나가는 고독한 행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달리는 흉기, 짐짝처럼 흔들리는 버스 속의 표정들을 읽어보십시오. 하느님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피로만이 서려 있습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는 도무지 하느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잿빛 하늘 아래 헤매다 지친 피로와 좌절만이 겹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시선에 그리고 물밀 듯 밀려다니는 저 많은 인파에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까? 과연 하느님은 ‘숨어 계시기만 하는 분’입니까? 우리도 머리 위에 재를 얹은 채, 붐비는 거리를 통해 집에 닿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재를 뿌리며 던져준 그 말씀을 조용히 되뇌어 봅시다. 우리도 언젠가 한번은 기고만장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숱한 실패와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늘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세상은 온통 잿빛과 어두움뿐이었습니다. 이제 삶에 지쳤고, 세상 만사가 수수께끼만 같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말하던 흙에서 나온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1년전에 유행하던 『정처없는 나그네길』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인간의 자랑인 동시에 고뇌의 원천이기도한 이성(異性) 그 알고자 하는 의욕은 어디서 왔습니까?



대기의 오염을 무릅쓰고라도 자연을 정복하여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집념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는 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칩니까? 그런데 이토록 갈구하는 자유에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팎에서 난무하는 악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까? 노래마디, 영화 장면, 소설 구절마다 오르내리는 사랑이란 또 무엇입니까? 사랑에는 한계가 없어 아무리 사랑을 해도 직성이 풀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정말 사랑해 주는 연인이 있을 때, 우리 주위에 언제나 행복에 겨운 나날만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에서는 헤어날 수 없습니다. “선생님 소생할 가망이 있습니까?” “미칠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목전에 둔 주위의 애처로움은 궁극적인 질문을 낳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안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으며, 마침내 죽음이란 미지의 수수께끼에 봉착하게 됩니다. 따라서 피스톤 같이 움직이는 복잡한 생활 속에서도 한번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를 이토록 궁지로 몬 고통과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죽음을 너머 참된 행복을 구가할 영원한 나라는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실로 우리 인간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숱한 사상가 숱한 신학자들은 저마다 이 물음에 답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여느 동물과 같이 하나의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이다. 자연과학과 인지가 발달하면 이 유기체의 비밀을 완전히 밝혀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심리학을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Ego)라는 감옥 안에 갇혀있는 하나의 개체로서, 온갖 관심과 이익추구와 정념으로 죽 꿇듯 하다가,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을 ‘자기’안에 끌어들여 버리는 한 개별적인 존재다.”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지쳐버린 인간은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존재다. 인간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그 실존(實存)은 실로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것이다.”



그러나 머리에 재뿌림을 받은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임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존엄을 가진 신비의 존재이며, 이웃에게 자신을 열어야할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전적으로 다르신 분’(全的他者)이신 하느님께 전인적으로 나아가야할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啓示)하시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시편 8의 작가는 인간을 두고 하느님의 따뜻한 방문을 받는 존재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 손가락의 업적인 저 하늘들을 우러러보며,

주님께서 굳건히 고정하신 달과 별들하며,

죽을 인간이 무엇이나이까?

주님은 그를 기억하시나이까?

아담(흙)의 아들이 무엇이나이까?

주님은 그를 은혜로이 찾아주시나이까?    (시편 8)



이 시인은 인간의 죽음에도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인을 놀라게 한 것은 흙에서 빚어진 인간 그리고 죽을 인간을 잊지 않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우리 인류를 따뜻하게 방문하고 계십니다. 이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시편 8의 저자가 보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지혜로운 인간(Home Sapiens)으로서 사고(思考)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연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의 사상은 빠스칼의 말로 표현해 봅시다. “인간은 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물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갈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사고(思考)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는 복음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사랑’ 위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연인이 될 자격을 갖춘 인간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교부 이레네오는 “살아있는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은 하느님을 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Ⅱ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랑의 길’은 쉽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회의와 좌절, 고통과 불안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인파로 붐비는 어두운 길목에서 그 사랑의 길을 잃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서도 이와같은 우리의 조건은 먼저 알고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유대인들이 희랍의 식민지로 있을 때 코헬렛이란 성서 저자가 쓴 작품에 지금 우리의 번민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하고 외친 코헬렛(전도서)은 비록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 앞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 대전에 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과 번민 중에 숨어계신 듯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기까지 무서운 내적 투쟁을 벌인 희망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도 코헬렛과 같이 우리와 우리 주변을 둘러봅시다. 우리는 지금 격동의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며, 코헬렛과 같이 만상이 허약하고 헛된 듯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애와 실망 속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오직 부조리와 환멸뿐, 그 무엇 하나 영구한 안정은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제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바람이라도 추적하듯 헛되게 보입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과 제도는 항용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 애써 발버둥쳐야 하는 우리의 고휴, 앞사람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생존경쟁, 이 모두는 선현들이 권장해 오던 지혜와 덕행과 예의를 무색케 합니다. 이성(理性)을 자랑으로 삼는 현대의 지식인들도 온갖 좌절에 부딪쳐서 지식의 헛됨을 뼈저리게 통감하기도 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서정쇄신을 부르짖지만, 이게 바로 정의로구나! 하고 반길만한 현실은 보아오지 못했습니다. 코헬렛은 시편 73의 시인과 더불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 발은 아슬 아슬 헛디더지고

걸음은 비실 비실 넘어질 뻔하였으니

어리석은 자들을 시기한 탓이로다.

악한 자가 잘되는 꼴을 바라보면서

미상불 그들은 아무 고생도 없이 몸뚱이는 피둥 피둥

살쪄 있도다.

인생의 고초란 겪지도 않고 남들처럼 고생도 하지 않기에

교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 입은 옷이로다.

내 마음 깨끗하게 보존하고 죄없게 손씻은 것이

허사였던가?!

쉴새없이 얻어만 맞고

날이 새면 받는 것이 책벌일 바에야    (시편 73).



의인은 불행하며, 악인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사필귀정의 원리를 무시합니다. 오늘날의 코헬렛도 이러한 현실을 보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헛되단 말입니까? 우리는 코헬렛과 더불어 조용한 잠자리에서 생각해 봅시다. 회초리처럼 우리를 몰아붙이는 시간을 생각해 봅시다. 세월은 유수(流水)같다고 합니다. 세월도 날으는 화살처럼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속박하고 때로는 마음 조이게 하는 이 시간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은 시간적 리듬에 얽매어 있습니다(전도 1,1-11). 인생과 사건은 한번 지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저마다 자기 ‘때’를 가져,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울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으면 평화로운 때도 있습니다(전도 3,1-8).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현존(現存)이 비현존(非現存)에 의해 위협을 받는가 하면 끝내는 비현존이 현존을 삼키고 맙니다. 한 세대가 오는가 하면 다른 세대가 넘어가 찾을 수가 없습니다(전도 1,4). 인생의 황금기인 청춘도 일장춘몽처럼 사라지고(전도 11,10), 삶의 뜻깊은 사건들이 기약하는 행복의 풍성한 온갖 약속도 ‘모든 강물을 집어삼키고도 범람하지 않는 바닷물’과 같습니다(전도 1,7).



인간의 시선은 욕망과 탐욕과 배금주의에 젖어있고(전도 4.7-8;5,9), 그 입은 욕망을 뱉어내고(전도 6,7), 미련하게도 만족을 모르고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바람과 같이 사라지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전도 1,9). 사람들은 보다 여기에 새로운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이미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이라는 상표만 붙였을 따름입니다(전도 1,10-11).



이와같이  시간은 화살처럼 제 갈길을 재촉하며 흘러갑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이며, 한번 일어났던 일이 반복될 것이니 거기에 새로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코헬렛은 한탄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갇혀 또는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데, 우리가 하는 일은 어제 있었던 것을 내일에 끼워 맞추는데 지나지 않습니다(전도 3,15). 코헬렛은 이같은 순회적인 사건의 움직임을 보고(전도 1,6-9), 오직 망각과 단조로움과 지루함밖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폐쇄된 이 세상을 생각하는데에 지쳤습니다. 시간은 우리 마음속에 회복이 불가능한 환멸과 상처만 줄뿐입니다.



현대의 우리 코헬렛들은 인간이 내세우는 제 가치관에도 비애를 맛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의 직분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태양 아래를 훑어보십시오. 법이 차지해야할 자리에 범죄가 있고, 의인이 들어선 자라에 죄인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하느님께서 의인과 죄인 이 둘다 판단하실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제 때가 있다”(전도 3,16-17)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판관은 그릇되게 판단하고 예루살렘의 왕은 늙고, 우둔하기 짝이 없다”(전도 4,13-016)고 생각합니다. 지방장관들도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뇌물수수에 급급하고 있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아무에게도 도움받을 길이 없습니다(전도 5,7).



착한 행실, 근면한 노동, 윤리적인 덕행도 아무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전도 8,8-10). 오늘을 쳐다본 코헬렛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행해지는 또 하나의 헛됨이 있다. 그것은 의인들이 악인들의 행실에 따라 대접받고, 악인들이 의인들의 행업에 따라 대접받는 부조리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헛되고 헛되다”(전도 9,11). 개인의 능력이 제 아무리 빼어나도 ‘줄타기’에 실패하면 인정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도 코헬렛과 같이 무관심과 허탈의 유혹에 저항할 기력마저 잃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된 양극인 날 때와 죽을 때(전도 3,1)는 모든 것을 허무화시키며, 죽음은 현자와 우둔한 자를 가리지 않고 덮칩니다(전도 2,12-16).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귀다툼을 벌리며 고투하고 있습니까? 선현들에게서부터 줄곧 내려오는 지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헛도니 부조리일 뿐입니다”(전도 11,8).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치관이 경멸의 구석으로 몰리고 있으니 코헬렛과 같이 역겨움만 느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의 허무함을 보고 헛되다고 부르짖던 코헬렛의 외침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백명의 아들들보다 낙태된 아이가 더 행운아가 되고(전도 6,3), 살아야할 생명을 가진 산 자들보다 이미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아 태양 아래 자행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 행복하다(전도 4,2)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 또한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써 재산을 모아 창고에 넣어도 먹어치워 버리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전도 5,10). 뼈빠지게 수고해도 그 결실을 얻지 못하고(전도 2,18-23), 얻어도 남에게 빼앗기기 일쑤입니다(전도 6,1-2).

재산이나 재물이 있어도 갑자기 닥쳐오는 재앙에서 보호할 수 없으며, 평생의 사업으로 벌어들인 재산도 대대로 물리기는 힘든 법입니다. 인간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발가숭이로 태어났듯이 죽을 때에도 빈 몸으로 갑니다. 애써 벌어들인 재산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전도 5,12-16) 예수께서 비유를 드신 복음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미련한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네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0)



                                  Ⅲ



이상과 같은 코헬렛의 체험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반성과 공감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이 ‘헛되다’라는 코헬렛의 말은 일시적이요, 아무 유익도 없이 불안정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절개도 지조도 없는 입김이나 수증기와도 같다는 말입니다. 코헬렛의 이 ‘헛되다’는 말은 인간 실존에서 이러한 헛됨을 못 보게 하는 완강한 적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하느님의 연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무상(無常)을 파헤치고자 해도 잠시동안의 행복에 눈이 먼 우리의 심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빠스칼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심연이 가져다줄 파멸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 앞에 장애물을 세워놓은 뒤 그곳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팡세 276). 우리는 인생의 종막이 죽음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눈가림하고 없는 양 헤맵니다. 인간의 우매함이란 이 지상에서 자기가 나그네라는 점을 잊으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솔직하게 고백하여 인간 경험세계의 한계점을 파헤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느님을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환멸을 은폐시키려는 거짓과 기분풀이의 정감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절대 희망이신 하느님과 겸허한 사랑의 유대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헛된 우상을 파괴한 폐허 위에서야 ‘숨어계신 하느님’이 드러납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는 어두워진 마음과 눈으로는 참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둘 때 하느님을 계시하는 탁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 위에 앉아있던 욥을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는 산다는 것이 하나의 의무요 고통이었습니다. 의로운 일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이란 잿더미와 고통뿐이었습니다. 그 무엇하나 항구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재앙을 당한 뒤 위로해 주러 온 친구조차 엉뚱한 소리만 내뱉고 가버렸습니다.

하느님도 침묵을 지켰으니, 혼자 번민을 안고 고독에 떨 뿐이었습니다. 욥이 하느님께 던진 질문도 아무 대답을 얻지 못한 채 허공만 맴돌았습니다. 우리도 욥과 마찬가지로 우주와 역사 사이의 비극적인 부조화(不調和)를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뿌리째 흔들리고 우리의 인생관은 초점을 잃고 있습니다. 고독한 우리의 삶은 쉽게 주위에 상처만 입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꼭 먼 곳에만 계시는 것같고 세상은 불안하고 성가십니다. 우리는 욥이나 코헬렛과 같이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인생이 이토록 톱니가 맞지 않으니,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잘못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시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덕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또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신앙해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과 희망은 형제지간입니다”(뻬기)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보다 더한 고통과 실망을 체험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하셨습니다.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누리던 욥도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다. 그는 끝내 삼베옷을 걸치고 삭발한 채 재를 머리에 뿌린 후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나는 알몸으로 내 어머니 태중에서 나왔다가 그곳으로

되돌아 가오리니,

하느님 주신 것, 하느님 다시 거두어 가셨으니,

하느님의 이름 찬미 받으소서.      (욥 1,20)



욥은 처음 자기가 태어난 날까지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겸허하게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숱한 오해와 경멸 속에 고통받아야 했던 욥은 영광스런 부활의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잿빛 하늘 아래 정처없이 방황하면서, 그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일이 있습니까? 고통받던 의인 욥처럼 과연 잿더미 위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갖가지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현실에서도 절망을 딛고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폐허 위에 욥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비쳤습니다. 그 폐허 위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보여집니다. 욥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생활하신 하느님이 말씀을 걸어오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욥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제가 주님께 대해 소문으로만 들어 왔지만

이제 눈으로 당신을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제 스스로 제 잘못을 고백하고, 먼지와 잿더미

위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 이하)



그리고 욥은 하느님께서 결코 우리를 저버리시는 일이 없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억울한 고통이 엄습해와도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이라면,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 아닌 누구가 하늘에서 날 위해 주오리까

당신과 함께 있노라면, 즐거운 것 땅에는 없습나이다.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            (시편 73,25-26)



행복하여라,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리니!         +





  58.                  사순절 특별 강론 초고( 1976년도)

                                                                   정양모 신부



        1. 주님은 나의 희망 - 충격적인 인물 - 예수의 생애와 사상

        2. 비극적인 인물 -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3. 희망의 주인공 - 예수 부활







        1. 충격적인 인물 -예수의 생애와 사상



인간이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타인의 생애와 사상을 논하는 것은 언제고 외람된 일입니다. 더군다나 옛날 옛적 멀고먼 나라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화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논하는 것은 두렵기까지 합니다. 두려운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사학도의 견지에서 그분의 지나간 삶을 밝히기도 쉽지 않지만, 신앙인의 관점에서 그분의 현존을 해명하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인간 정신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 묻게 되고,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I. 방법론적 반성



예수님은 문맹이 아니셨지만 아무런 필적도 남기지 않고 기원 후 30년경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석가와 소크라테스 같은 대사상가들이 집필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삼년 가까이 따라다닌 직제자들 역시 예수님 생시에나 예수께서 처형되신 직후에 스승에 대해서 기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말씀과 행적을 입으로 전했을 따름입니다. 제자들이 구전으로 전한 스승의 말씀과 행적은 대체로 짤막짤막하며 일정한 틀, 곧 양식(樣式)에 속합니다. 잡다한 말씀들을 양식에 따라서 정리하면, 예언어, 지혜어, 법률어, 비유, ‘나’-말씀, 추종어 등의 부류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양식에 따라서 정리하면, 상황어, 논쟁대화, 사제간대화(師弟間對話), 이적사화, 예수님과 무관한 사화, 수난사화 등의 부류로 구분됩니다.



이처럼 전대 제자들이 입으로 전한 짤막짤막한 말씀-전승과 이야기 전승을 후대 제자들은 함께 모아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기원 후 60년대를 전후해서 마르코 복음서와 예수어록(Q)이 씌어졌습니다. 그 중 마르코 복음서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지만, 어록은 그 일부만 마태오 및 루가 복음서에 전제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다음에 마태오 및 루가 복음서가 씌어졌습니다. 두 복음작가는 마르코 복음서와 어록을 참고했을 뿐 아니라, 각기 별도로 예수께 관한 전승을 수집하여 복음서 편찬에 이용했습니다.



끝으로 90년경에 또 한 가지 새로운 복음서가 씌어졌습니다. 곧 요한 복음서입니다. 요한 복음작가는 자기 나름대로 예수께 관한 전승을 수집하고 아울러 예수께 관해서 많은 사색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께 관한 전승과 함께 자신이 사색한 것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현존하는 복음서에서 예수께로 소급하는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네 복음서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단편적인 전승으로, 단편적인 전승에서 역사상의 예수께로 소급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 모임의 성격상 구체적으로 방법론을 논할 필요는 없고, 방법론에 의해서 밝혀진 결과, 곧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I. 생애 윤락



예수께서는 기원 원년에 탄생하셨다고 흔히 생각하나 실상은 기원 전 4년 이전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분이 헤로데 대왕 생존시에 탄생하셨으므로, 대왕이 사망한 해(기원 전 4년) 이전에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기원 전 6년경에 탄생하셨다고 봐 무방할 것입니다. 그분은 기원 후 27년경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까지(루가 3,1) 이스라엘 북부 나자렛 촌에서 조용히 살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공적으로 활약하실 때 ‘나자렛 사람 예수’로 통했습니다.



그분이 나자렛에서 어떻게 나날을 보내셨는지 알 수 없으니, 여느 사람들과 별다른 것 없이 평범하게 살으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기술자로 통했습니다(마르 6, 3). 미장이, 대장장이, 목수가 하는 일을 두루 하셨던 것 같습니다. 특기할 현상은, 당대의 조혼 풍습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고 내내 독신으로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기원 후 27년경, 그러니까 그분이 33세쯤 되셔서, 사해 북부에서 심판과 회개를 외친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일단 세례를 받으시고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갈릴래아 각 지방을 두루 다니시면서 충격적인 말씀과 행위를 하셨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사상편에서 설명이 있겠습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서는 고향·직업·부모친척을 멀리하신 것은 그 무렵에 강렬한 소명을 의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 때 그분에게 하느님의 영이 임하셨다고 네 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말합니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가 3,21-22: 요한 1,32-34). 예수께서도 요한 세례자와 그가 베푼 세례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마르 11,30; 마태 11,9-11. 21,32). 세례를 받으시고 오래지 않아 갈릴래아로 돌아가셔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은 인종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불순한 지방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이 꽤 많았고 희랍 사상이 침투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분은 주로 갈릴래아 호수 북변에서, 특히 가파르나움 포구를 거점 삼아 활동하셨습니다(마태 4,12).



공적으로 활동하신 기간을 밝히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공적인 활동 중 세 번 해방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순례했습니다(2,13; 6,4; 11,55).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분은 약 삼년 동안 공적으로 활약하신 셈입니다. 즉 기원 후 27-30년에 공공연히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분이 출가하신 것을 심히 못마땅히 여겨 고향으로 데려오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입니다(마르 3,20-21·31-35; 요한 7,5).

한 동안 예수님의 인기가 충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왔습니다.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지만 오천 명이나 모인 때도 있었다고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말합니다(6,44). 그러나 차츰 인기가 하락하여 그분은 고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분이 고립되어 가는 흔적을, 코라진과 벳사이다 및 가파르나움에 대해서 발설하신 경고(마태 11,20-24), 미약한 양떼를 격려하는 예언어(루가 12,32),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3-9),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기사(요한 6,66-69) 등에서 명백히 보게 됩니다. 그분이 고립된 이유는, 군중이 메시아에게 건 정치적 기대를 예수께서는 실현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로, 유대 지도계급, 특히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그분의 충격적인 가르침과 파격적인 처신을 맹렬히 공격한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불길한 앞날을 예감하시고 또한 예고하시면서 열 두 제자 및 몇몇 부인과 함께 기원 후 30년경 해방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 때 일어난 역사적 비극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국사범으로 몰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약 36세를 일기로 외롭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사건은 십자가로써 끝나지 않았고 그분은 부활하여 세세대대로 방방곡곡에 현존하신다는 불가사의한 주장을 그의 제자들을 외쳤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제자들의 외침이 우리 나라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기회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 상세히 말씀드릴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III. 사상



어느 문화권에고 그 문화권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분위기가 명랑하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분위기도 밝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식민정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율법의 중압감 때문이었습니다. 시민법이면서 동시에 종교법인 율법이 인간의 삶을 옭아매었습니다.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법규가 무려 613조항이나 되었습니다. 그중 365조항은 금령이고 248조항은 명령입니다. 법률은 활개치고 사람은 허덕이는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고 ‘수고하고 짐진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처신을 살펴보면,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면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선 그분의 처신을 살펴봅시다: 열심한 사람들은 불결한 사람들과 상종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에 개의치 않으시고, 예수께서는 자주 죄인들 특히 세관원들과 어울려 잡수시고 술잔을 나누셨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사람,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마르 2,16-17). 세관원들은 부정수입을 노릴 뿐 아니라 줄곧 이교도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신분 자체로서 불결한 사람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이 포목을 재는 데 사용하는 자막대조차 불결한 물건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 예수께서 자캐오의 집에 유숙하신 것은 파격적이며(루가 19,1-7), 세관원들과 창녀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반해서 의인들은 천국에서 제외되리라는 말씀은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음식규정에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 쥐고기, 뱀고기, 토끼고기, 낙타고기, 개고기,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피를 금기식품으로 간주했는데, 예수께서 그 규정을 따르지 않아서 비판을 받으시자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고 단정하셨습니다(마르 7,15).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규정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밀이삭을 비벼먹었습니다. 이것은 추수작업이라고 바리사이들은 판단하고 항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않습니다”고 답변하셨습니다(마르 2,18). 법률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명답입니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 법을 위한 법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는 명답입니다. 오늘날에는 상식에 속하는 말씀입니다만, 당대의 법률관으로 볼 때 파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제 율법에 대한 말씀을 살펴봅시다: 여기서는 마태 5,21-48에 있는 명제와 반명제만을 고찰할 것입니다. 명제는 구약성경과 거기서 파생한 전통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반명제는 명제에 대한 예수님의 단언으로서 명제를 심화하는 경우도 있고 명제를 완전히 폐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명제

반명제

비고

21-26

27-28

33-37

31-32

38-42

43-48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맹세를 하지 말라

이혼장을 써주고 이혼하라

손해에 비례하여 보복하라

원수를 미워하라

분노하지도 말라

음욕도 갖지 말라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절대진실)

이혼불가

보복불가

원수를 사랑하라

명제심화

명제심화

명제심화

명제폐기

명제폐기

명제폐기




구약성경(하느님의 말씀!)과 거기서 파생한 전통을 문제시한 반명제야말로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사들이 그분을 적대시하고 마침내 그분을 죽이고자 작심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율법관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성경에 담겨져 있다는 사상이 신명이 이후부터 강하게 대두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전에 생동하던 종교가 서적종교로 경화되어 갔습니다. 유대교의 율사들은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해설하는데 전심전력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전대 율사들이 전한 해설에 성경이 성경에 준하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전통입니다. 성경과 전통에의 집착은 유대교가 사활우기에 처했던 시기 즉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말살시키고자 한 기원 전 170년대에 한층 더 굳어졌습니다. 예수 당대에는 성경과 전통은 가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왜 그분이 그렇게 하셨을까? 하느님을 지극히 가깝게 느끼시면서(압바!), 하느님의 뜻과 처사를 마음 깊이 의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며(마태 5,45),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한층 더 온정을 쏟으시고(루가 15,11-32), 여자들조차 인격으로 대우하여 아끼시는(마르 10,1-9) 압바의 심정과 처사를 예수께서는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성경문자와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철저하게 압바의 뜻과 처사를 구현하는 일에, 곧 철저하게 사람을 위하는 일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요나와 살로몬(루가 11,29-32) 혹은 아브라함(요한 8,56-58)보다 위대한 분으로 자처하실 만큼 전전의식을 갖고서 말입니다.



압바의 뜻과 처사대로 사람을 극히 아끼신 예수님은 철저한 인도주의자이십니다. 그분이 율법에 대해서 취하신 태도에도 인도주의적인 면이 환히 드러나지만(특히 마르 2,18!), 반명제에도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가치관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가치를 일컬어 흔히 진선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절대적인 진실을 요구하였습니다(마태 5,33-37).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여 하느님을 증인으로 등장시키는 명세행위를 금하시면서, 맹세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진실되기를 예수께서는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을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가치를 신앙의 세계에서는 흔히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일체의 보복을 단죄하시고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분이 제시한 예들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오른 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마저 돌려대주고,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라고 강요하면 십리를 가라고 합니다. 너무나 엄청난 말씀을 두고 주석가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몇 가지 설을 말씀드리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을 환히 아시면서도 요구하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인간의 무능력 내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윤리를 제시했다는 설입니다. 또 다른 설로는, 일상생활 가운데 실천할 윤리가 아니라, 곧 닥칠 세말위기를 목전에 두고 잠시 동안 전력투구하라는 비상윤리에 불과하다는 견해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 가지 설은, 산상수훈의 요구는 결국 일상생활에는 무용지물이라는 견해입니다.



정반대로, 그 요구를 매일매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그는 ‘부활’의 작중인물 네후류도프가 산상수훈을 읽고 느낀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오늘 비로소 산상수훈 속에서 추상적이면서 아름다운 사상, 대부분 과장된 실행 불가능한 요구로 보이는 그런 사상이 아니요, 단순하고 명백하며 실제적이고 실행하기 쉬운 계율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계율은 실행하기만 하면-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인간사회가 전연 새로운 조직으로 제정되어, 그렇게도 네후류도프를 분개케 하던 온갖 폭력이 자연히 소멸될 뿐 아니라, 인류에게 허여된 최고최대의 행복-지상천국-을 누리게 될 수 있는 실로 중대한 계율이었다.” 톨스토이가 예수님의 요구를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고 극히 존중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과연 ‘씌어진대로’ 예수님의 요구를 쉽게 실천할 수 있겠는지 의문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예수님의 철저한 요구를 견지하되, 그 요구를 문맥에 따라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열거하신 엄청난 예(마태 5,39b-42)는 결국 복수하지 말라는 근본적인 지침(5,39a)을 주지시키기 위한 자극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낡은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행동원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마르 12,28-34): “첫째 계명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온 마음과 당신의 온 정신과 당신의 온 생각과 당신의 온 힘으로 주님이신 당신의 하느님을 사랑하시오”. 둘째 계명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이웃을 당신처럼 사랑하시오.” 여기에 몇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1) 사랑은 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행동원리입니다. 법이 간섭할 수 없는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2) ‘이웃’은 우선 지금 이곳에서 나와 함께 사는 구체적인 이웃입니다. 가까이 함께 사는 이웃을 미워하면서 삼천만 동포, 세계 만민을 상대로 한 박애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웃사랑은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점차로 넓게 확산되어야 합니다.

(3)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흔히 말하는데 여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 계명에 자애(自愛)가 전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 역시 인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인간은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극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4) 우리 국민은 가족․친족을 중시한 나머지 가족적 이기주의, 친족적 이기주의가 강한 민족인 것 같습니다. 가족, 친척 혹은 동창, 고향사람은 위하면서 그 밖의 사람을 못본 체 하는 습성은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겠습니다. 그런데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많은 시민들이 “가정을 외부세계의 긴장으로부터 헤어나는 장소로 생각하고, 자기 보존의 수단으로서 사회적 은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적 이기주의는 오히려 더 강해질 우려가 다분히 있습니다.

(5) 이웃사랑과 사회참여의 문제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위험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루기 지난합니다. 극히 일반적인 말이기는 합니다만, 이웃사랑의 내용을 줄여서도 안되고 사회 현실을 어느 한 관점에서 평가해도 안되겠습니다. 이웃사랑은 교회 제의방에 감금되기에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사회 현실은 사랑의 원리 하나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2. 비극적인 인물 - 십자가 사건 -



        I. 수난 예고 및 수난사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아끼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진실과 사랑을 외치고 구현하는 데 전심 전력하셨습니다. 당대 사람들, 특히 지도급 인사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평성대에 불안을 안겨주는 위험한 인물로 보였습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처세술을 익힌 사람들이 보통 제 명을 다 누리는데 반해서, 철저하게 ‘위하는 삶’을 영위한 사람들은 흔히 비명에 갔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마하트마 간디, 디트리히 본회퍼, 마르틴 루터 킹 같은 분들이 두드러진 예입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질분자를 제거코자 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생리입니다.



 예수께서도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시고 때때로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군주인 헤모데 안티파스가 당신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우’같은 군주가 무슨 협박을 하든 한 동안 소신껏 활동하시다가 끝장을 볼 각오를 하신다는 결의를 표명했습니다(루가 13,31-32).



 야고보와 요한이, 신국이 곧 도래할 줄 믿고 자기네에게 좌의정, 우의정 감투를 안배해 달라고 예수께 청하자, 그분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네는 내가 마실 잔을 마실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께서 마실 잔은 불운 즉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그분은 예감하셨던 것입니다(마르 10,38).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실 때 어떤 여자가 향유를 갖고 와서 그분의 머리에 부은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례 때 시신을 기름으로 바르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당신의 시신을 기름으로 바르는 예절을 앞당겨 했다고 예수께서는 해석했습니다(마르 14,8).

 특히,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음식을 나누신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것을 절감하셨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따로 축성하신 것은, 몸과 피가 갈라질 것을 뜻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겟세마니에서는 죽음을 예감하시면서 지독히 고민하십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달라붙듯, 당신의 압바에게 호소하십니다. 죽음의 관을 거두어 주십사고. 그러나 즉각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덧붙이셨습니다(마르 14,32-42). 이 순간에라도 원하셨다면, 예수께서는 해방절에 예루살렘에 순례온 군중들 사이로 잠적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걸어가신 길을 죽음으로써 날인하는 것이 압바의 뜻임을 의식하시고 조용히 체포되셨습니다. 때는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사건들은 신속히 진행되었습니다. 금요일 아침에 유대 최고의회가 협의한 결과(마르 15,1)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14,62-64). 그러나 유대 최고의회는 사형언도를 내릴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압송하여 엉뚱하게도 정치적인 죄목으로 고발했습니다. 예수께서 로마 황제의 허락도 없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하여 총독이 예수께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요?”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15,2). 그러고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순간까지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마르코의 기록). 예수님을 처단코자 주력한 사람들은 유대 지도급 인사들, 특히 고급 제관들이었습니다. 군중은 지도급 인사들의 충동을 받는대로 움직였구요. 예나 지금이나 군중이란 그런 것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께서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 아닌 것을 즉각 알아차리고서 석방코자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민의에 못이겨 예수께 사형온도를 내렸습니다.



총독의 눈에는 갈릴래아 출신 청년의 운명쯤 대수롭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민의를 따랐던 것입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스승이 십자가에 달리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공관복음서의 기록).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따랐던 몇몇 부인은 끝까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15,40-41).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로다”하는 말은 적어도 십자가 아래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또 한 마디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예수님 모국어로 전해오는 한 마디 말씀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였습니다. 시편 22장 1절의 말씀입니다. 이 시편에 대해서는 서인석 신부님께서 3월 13일 강론 때 자세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백성과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하느님에게조차 버림받은 심정으로 예수께서는 이승을 마치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없는 고독을 맛보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섬기고 끝까지 사람을 아끼신 분(마르 14,36;요한13,1;15,13)의 죽음 치고는 너무나 처절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II. 신학적 반성


(1) 우선 십자가는 비극적 종말입니다. 진실과 사랑을 부르짖고 구현하신 예수께서 처절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원시교회에서도 십자가를 스캔들이요 어리석음이라 했고(1고린 1,23), 거기에 달리신 분을 저주받은 분이라고 했습니다(갈라 3,13). 비극을 미화해서는 안됩니다. 역가치를 가치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2) 십자가, 거기에 달린 몸, 거기서 흘린 피가 값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지시하는 고통이 가치일 수도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극한상황 아래서도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가치입니다.


(3) 그러나 삶이 허무로 완전히 무너진다면 사람인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언젠가 만사가 끝없는 허무로 귀착한다면 사랑과 성실이 정말 뜻있는 것일까요?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자유와 속박 간의 차이를 정말 견지할 수 있을까요?...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차이도 없이 결국 고철더미에 던져져 그곳에 영원히 머무른다면, 거짓과 불의를 거스려, 진리와 정의를 실현코자 투신하는 것이 정말 뜻있는 것일까요?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무로 끝난다고 하면 일체의 의미와 일체의 인간윤리행위를 근본적으로 뒤엎게 됩니다.”

   

   이점을 어느 정신의학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에게 요망되는 것은 몇몇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인생의 무의미를 견디어가는 일이 아니요, 오히려 인생의 절대적인 의의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로고스는 논리보다 깊다. 초월적 의의를 배제하는 정신의학자는 조만간 환자들로부터 난처함을 겪게 된다”(프랭클).





        3. 희망의 주인공 - 예수 부활 -



       I. 사학의 한계



 기원 후 30년경 해방절 주간 금요일 오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숨을 거두시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그분을 석회석 언덕에 뚫은 무덤에 안장했습니다(마르 15,46).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다른 부인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입구가 열렸고 예수님의 시신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은 여러모로 확실시됩니다.



(1) 빈 무덤을 맨 먼저 발견한 이들은 부인들이었습니다(마르 16,1-6). 조작한 이야기라면 남자들이 발견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남존여비사상이 강했던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증언을 법적으로 인정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 자체는 유대교인들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게 된 원인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대인들 간에 다툼이 있었을 뿐입니다.


(3) 빈 무덤을 발견했다고 해서 부인들이나 제자들이 예수 부활신앙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활관을 참고한다면(1고린 15,44) 무덤에 시신이 있건 없건 별 관계 없이 예수 부활신앙은 싹틀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빈 무덤 발견사화를 조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빈 무덤 발견사화 이외에 또 한 가지 사학의 영역에 극하는 것은 제자 예수 발현사화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려서 발현하신 그리스도는 시공을 초월하는 분이므로 사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제자들의 체험은 시공 안에서 있었던 것이므로 사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1고린 15,4-8에 원시교회에서 작성한 발현 목록이 있습니다. 발현 체험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게파 베드로, 열두 제자들(부활 선포 사명을 준 공적 발현), 한꺼번에 500명 이상(55년 경에 대부분 생존), 예수님 친척 야고보(생시에 예수님을 불신), 모든 사도들, 바오로(교회 박해자)



 발현 체험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할 마음 자세가 전연 안된 사람들이 있습니다(야고보, 바오로). 또한 바오로가 기원 후 55년 경 고린토 전서를 쓰면서 발현을 체험한 500명 이상의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당시까지 생존해 있다고 장담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했다는 증언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예수 처형 때 낙담한 나머지 도망친 제자들이 미구에 예루살렘에 집결하여 용맹스럽게 예수 부활을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진 이면에는 확실히 극적인 체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체험을 했기에 그처럼 달라졌을까? 그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노라고 말합니다. 현대인이라고 해서 앞서 간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 목숨을 걸고 한 증언을 무시할 권리는 없습니다.



        II. 신학적 반성



(1) 예수 부활은, 철저하게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신 예수님의 생애가 옳았다는 영원한 확인입니다. 그분이 추구한 진실과 사랑의 가치가 새로운 차원에서 영원히 구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리이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진시로가 사랑을 허무로 돌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렴풋이 의식하면서 속삭이는 사랑의 영원성이(영원한 사랑, 한없이 사랑하오) 허황한 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을 신생과 영생으로 바꿀 수 있는 위력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경우는 소크라테스, 공자 같은 여느 위인들과는 달리 그분의 사상만이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그분 자신이 현존하십니다.


(3) 그러나 그분은 공간에서 해방된 양식으로 현존하십니다. 또한 공간 속에 있는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생성소멸법칙에서 탈피한 양식으로 현존하십니다. 하느님의 존재양식을 취하셨다고 하겠습니다.


(3) 부활은 세말사건이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세말을 앞당겨 사시는 분입니다. 역사의 종점인 세말을 앞당겨 사시는 예수님에 의거해서, 신앙인은 역사의 의의를 파악하게 됩니다. 역사는 맹목적으로 계속되다가 비극으로 끝맺은 것이 아니고 영원한 삶으로 옮아갈 것입니다.


(4) 예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양식을 취하셨기 때문에, 시공에 밀폐된 우리에게는 그분의 현존이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오관으로 도착 불가능한 양식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현존은 동시에 비현존이기도 합니다.


(5) 우리가 오관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포착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놀라운 사건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부활선포를 듣고서 우리의 부활신앙이 싹틀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부활선포를 듣는 순간 부활하신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시면 부활신앙은 싹틀 수 없습니다(사도 1,8).


(6) 신앙인은 단순히 하느님의 분위기 안에서 살 뿐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감싸주시는 주 예수께서는 당신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도록 요구하시고, 또한 당신의 요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충동을 받아 경천애인(敬天愛人)에 헌신하고 진실과 사랑의 가치 구현에 가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이승에 살며 또한 세말 이전에 살고 있으므로, 거짓과 비정에 가담하는 수가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비관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충동으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절망적인 사관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미래에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로부터 예수님을 벌써 부활시키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우리의 하찮은 진실과 사랑까지도 영원히 구제하실 것을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활의 희망으로 통하는 위력임을 믿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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