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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연구
작성일 2008년 2월 29일 (금) 13:03
분 류 사순시기
ㆍ추천: 0  ㆍ조회: 2619      
IP: 211.xxx.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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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사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1. 말씀읽기: 요한9,1-4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다

바리사이들이 개입하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



2. 말씀연구

 눈먼 소경을 만나게 되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 사람이 죄로 고통을 받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죄를 지어야만 병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병자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나보다 조금 몸이 불편한 것뿐인데..., 나랑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부끄럽다고, 남의 시선이 의식된다고 성당에 나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시선을 그에게 던진 것일까요?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에게 당신 자비의 손길을 펼치실 것입니다. 하지만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단정 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을 죄의 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태생 소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 때문인지(아이가 뭔 죄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궁금해 하게 됩니다.



2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병을 얻게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생각이 바로 오늘 이 질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눈이 멀게 되는 병고는 죄에 대한 벌로 나타납니다(창세 19,11). 신명기 28,28에도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을 소홀히 하는 이들이 받는 벌을 "미치게 하시고 눈멀게도 하시고 정신을 잃게 하실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소경을 보는 관점은 그 사람이 어느 한 때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부모가 범죄 하였기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탈출20,5;신명5,9). 그런데 이런 논리라면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으면 어떤 죄를 지을까요? 분명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죄로 아이가 눈이 멀었다면 그것 또한 불합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세상에 현존하는 사탄의 힘의 표시로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결코 특정한 병이 개인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다 부정을 하십니다. 이제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시겠지요. 그 소경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4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어둠의 힘이 더욱 당신 주위에 몰려드는 것을 깨달은 예수님께서는 그 어둠이 당신을 덮칠 때는 당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즉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이 마칠 때까지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셔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표현된 것은 교회가 항상 경험해야 되는 세상의 적대와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의 일을 계속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두움을 밝힙니다. 빛은 숨을 것을 드러내고, 잃은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며,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으로 보는 것입니다.



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기적은 두 가지의 다른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침으로 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셨을까요? 사실 우리야 눈에 흙이 들어가면 안보이겠지만 소경은 눈에 흙을 발라도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눈을 감은 채 당신을 따르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냥 씻으라고 했으면 분명 안 씻었을 지도 모릅니다. 마치 엘리사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할 때 불평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진흙을 빚어 눈을 바르는 의식을 하는데,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을 세례의 표시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진흙을 바라는 것 자체가 오래 전부터 세례의식이었고, 침을 사용하는 것은 나중에 와서 예식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 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행동은 당시 민간요법을 따라 하시면서 그에게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면 그도 분명 불신으로 흘렀을 것입니다.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실로암(또는 실로아)은 본래 “물을 내어보냄” 또는 “수로, 운하”인데 사도요한은 “파견된 자”라고 의역하여 그리스도와 관련을 짓습니다. 이 못은 예루살렘 도시 남동쪽에 위치한 기혼 샘물의 저수장으로서 오늘날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실로암이라는 이름을 파견된 자로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을 의미하게 하였습니다. 곧 소경은 예수님의 뜻에 해당하는 이 못의 물로 자기를 씻도록 초청되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치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치유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태생 소경이니 눈을 뜨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해봤을 텐데. 그리고 이제는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고 살았을 텐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으니 그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된 다는 것을 태생소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사람들은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소경으로 구걸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치유 받은 소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만 합니다.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나에게만 불가능한 것이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10 그들이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사람들은 눈을 뜨게 된 소경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얼마나 좋으냐고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누가 제일 기뻐하겠냐고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먼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있는 그대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대로 했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그 눈을 뜨게 된 소경은 나에게도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믿고 있다면 믿는 대로 해보시오! 그러면 구원 받을 것입니다. 믿음이 이뤄질 것입니다.



12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여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함을 잊고 있습니다. 너무도 기쁜 그는 지금 그가 눈을 뜬 그 자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관계있는 사건을 조사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였습니다. 사람들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기에 눈을 뜬 소경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로 데려 갑니다. 부모에게 데려다 주지 않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려 갑니다. 이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태생소경의 치유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게도...,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이라 하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음으로 미뤄야 하는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분명 미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일 그런 기회를 잡게 된다면 분명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남의 일이기에,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기에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측은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 사람. 그는 지금 기쁨을 나눠야 하는데 어느덧 죄인처럼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께서 하라 하시는 대로 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다고 다시 한번 말하게 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었다면“당신들도 그분의 말을 들으면 나처럼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의 경이와 기적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잘못을 꼬집어내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서 그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군중은 두 편으로 갈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는 사람과 죄인으로 보는 사람. 인정할 것은 좀 인정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함께 기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어떻게 눈을 떴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먼저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의 경이와 기적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잘못을 꼬집어내어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우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래서 그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18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기뻐해 주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소경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소경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작당한 사기꾼일 것이라고. 그래서 소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려고 소경의 부모를 불러서 묻습니다. 어리석게도...



19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가끔은 거짓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수라고 하면서 그것을 눈에 발라서 보이게 되었다고 과장 선전을 합니다. 먼 타지에서 일어난 일을 선전하면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한번 선전이 이루어지면 교회가 아무리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한다고 말합니다.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기적은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제 이 기적이 참됨을 부정하고 싶은 이들은 부모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그들이 듣고 싶은 대답은 소경이 아니었다는 대답일 것입니다.



20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고 진술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떴지만 두려움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나이를 먹었으니 제 일은 스스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눈을 떴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서 대답을 회피합니다.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누가 아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나이를 먹었으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이 말을 통해서 얼마나 유다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22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이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는 유다인 사이에서 파문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가장 가벼운 파문은 <네지하>라 하고 1주간 내지 1개월간 죄인을 특별히 다룬다는 일종의 견책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배척(냇도우이)으로서, 죄인은 1개월 동안 땅에 앉아서 상복을 입고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목욕하지 않고 향을 바르지 않고, 또 공적 기도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셋째 (헤렘)은 가장 가혹한 것으로 그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재산 몰수도 포함할 경우가 있고, 범죄자와의 개인적 관계는 말할 나위도 없고, 모두와의 교재가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지자, 또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벌을 내리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다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자들을 이단자로 여겨 회당(유다인 공동체)에서 영구히 추방했습니다. 랍비 가믈리엘 2세(90년경)때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를 18기도문(쉐모네 에스레)에까지 삽입했다고 합니다.



23 그래서 그의 부모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이다.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라는 것은 다 자란 사람이니 법적으로 유효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소년은 13세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소경이었던 그의 부모의 대답으로 인해 더욱 난처해졌습니다. 



부모들은 유대인들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그의 부모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회피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도 얼마나 답답할까요?



24 그리하여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 하고 말하였다.

 참으로 끈질긴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옳게 바라본 사람들의 목소리도 정작 죄인들의 목소리에 의해 묻혀 버립니다.

“사실대로 말하시오”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훼 하느님께만 영광을 드리도록 강조한 구약성경적인 표현입니다(1역대16,28-29; 시편65,2;67,35;이사42,12;바룩2,17-18;에제27,10).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께 자기 잘못이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언급되었습니다(여호7,19;1사무6,5;2역대30,8;예레13,16참조). 따라서 여기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위반한 죄인으로 말하도록 유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5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기쁠 뿐입니다. 지금 그는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그의 부모들처럼 교묘하게 유다인의 지도자들의 함정을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이냐 아니냐를 정하는 것은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사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신 있게 말하는 이 소경이었던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나 또한 그런 소신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26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소?” 하고 그들이 물으니,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치유 받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모순을 찾기 위해 재차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심문을 잘(?)해서 거짓 자백을 얻어냈던 수사관들이 이 사람들의 수법을 잘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다양하게 여러 번 시험해 보는 심문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랬겠지만 막상 예수님께는 죄를 덮어씌우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27 그가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권력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경을 고쳤는지 다시 말해 보라고 하여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소경은 분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남을 깎아 내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합니다. 결국 자기가 당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심한 모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모욕을 가한 것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모욕을 받은 것 뿐 입니다.



28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그들은 욕을 하면서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경멸하고 모세를 존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임은 수치이지만 모세의 제자임은 영예라는 뜻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대립된 당시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표현에서 바리사이들이 곧 율법학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29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소경으로 구걸하던 사람한테 이런 모욕을 당했으니..., 그들은 화가나서 “너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우리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말을 합니다. 자신들은 모르겠지만 이 말을 통해서 자신들이 눈을 뜨게 된 소경보다 못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시인하게 됩니다. 모세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제자가 모세의 제자보다 훌륭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그들 입으로 고백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를 모릅니다. 모세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모르고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30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눈을 뜬 이는 이제 유다인들을 가르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신앙에 관계된 모든 것들을 분별하고 해결해주면서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느님의 일을 식별할 줄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31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 눈뜬 사람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①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과 ②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의로운 이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치유기적을 행하셨으니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32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의 신앙이 평생을 신앙을 연구하고 신앙생활 해온 사람보다 훨씬 낫습니다. 진리란 복잡함에서 오지 않고 단순함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경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해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확고한 사실은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성경을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소경이었던 그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33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어찌 보면, 이것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지한 사람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주 작은 꼬맹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모른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소경을 쫓아냅니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어둠 속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이 보이자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이 모습은 일상생활 안에서 많이 들어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아이들을 혼내는 부모님들의 모습 안에서. 말문이 막혔을 때 배우자를 공격하는 모습 안에서...,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화를 낼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네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부족해서 화를 내는 거야!”

바리사이들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불행을 부모의 죄로 돌리고, 그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몰아세웁니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쫓겨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그는 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이 죄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체험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하십니다. 이 소경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초자연적인 인물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습니까? 라고 물어보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약간 숨긴 채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준비자세를 시험해 보기 위한 방법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치유 받고 회당에서 추방당한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를 찾아와 만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를 믿음으로 이끌고자 하심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매일 우리가 드리는 기도 또한 이 기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당신께로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그런데 나와 소경의 차이점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꿇어 절을 하면서 말합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나의 응답은 "믿습니다." 하고 답하지만 굻어 절하지는 않습니다. 치유 받은 이의 온 마음은 예수님께로 가 있지만, 나는 입술만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충만한 믿음을 갖도록 자기 자신을 분명히 계시하십니다.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다한 다음에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되기를 늘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이제 소경이었던 그는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이제 눈을 뜬 그는 믿음의 눈까지 뜨게 됩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하느님께만 드릴 경배자세를 예수님 앞에서 취함으로써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계시자, 곧 구세주로 믿는 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현존과 계시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분명히 결정하도록 요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의 심판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을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불신으로 인해 심판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람들 가운데서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로 구별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심판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소경)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생소경은 예수님으로 인해 육신의 눈 뿐 아니라 신앙의 눈까지 뜨게 되었으나 외적으로 볼 수 있는 자들은 영적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보는 것은 하느님 빛의 영역으로 이끄는 믿음을 말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은 빛을 거절하고 어둠의 세력에 빠져버린 불신을 가리킵니다. 불신자들은 결국 보지 못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어둠 속에 계속 머무는 자들은 소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럼 아닌 줄 알았단 말인가?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도, 소경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볼 수 있는 그를 보고도 믿지 않았으니 눈 뜬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눈은 있으되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러 오셨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력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들이 한 행동이 감추어지도록 어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을 더욱 깊은 암흑에로 빠져들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이 본다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본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본다고 자처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니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신앙인이면서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아직 소경에 불과합니다. 좀더 정확한 계산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영생을 위해서 확실한 계산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따뜻하게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있습니까? 오시는데 얼마나 어려우셨냐고 말 한마디 건네고 있습니까?



2. 나는 볼 눈이 있는 사람입니까? 눈을 뜬 장님입니까? 보고 있다면 내가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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