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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2월 22일 (금) 10:09
분 류 사순시기
ㆍ추천: 0  ㆍ조회: 3492      
IP: 211.xxx.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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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사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사순 제 4주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제 1독서 : 1 사무 16, 1b. 6-7. 10-13a

제 2독서 : 에페 5, 8-14

복 음 : 요한 9, 1-4

태생 소경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 복음사가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가운데서 특별히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만약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오시어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보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이 처하게 될 눈멀음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조차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 들이 있다. 즉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것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이에 대해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아주 안타까운 표현으로 끝을 맺고 있다 :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 41).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주제는 다른 주일에서처럼 ‘빛’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요한 복음 첫머리에서 명백히 강조하고 있듯이 서로간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 1, 5)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빛과 어둠의 대립은 사도 바울로가 제 2독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어둠’ 속에 살다가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 살게 된”(에페 5, 8)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초기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존 매순간순간 마다에 펼쳐지고 계속된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우리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며, “모든 어둠의 행위”를 어디서든 또 누가 행하든지 고발하고 단죄함으로써 피하라고 권고한다 :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행위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런 일을 폭로하십시오”(에페 5, 8-11).

 이처럼 빛과 어둠의 대립은 흔히 비밀리에 (‘숨어서’ : 12절) - 공적으로 단죄를 받을까 두려워서든지 또는 보다 더 큰 악을 성취시킴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든지 - 계획되고 실행되는 ‘어둔’ 행위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찬들의 책임도 또한 그만큼 커진다. 말하자면, 각자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빛의 증거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일들 특히 선, 이익, 필요성, 예술, 발전 등을 표면상의 이유로 내세우며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런 모든 악들(예를 들어 성의 해방, 일부 공연예술, 낙태의 합법화, 폭력, 부패한 정치체제 등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발할 수 있는 ‘예언적’ 소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 신자는 ‘빛’의 선포자요 증거자로서 짊어져야 할 그러한 역할이 어떤 어려움과 투쟁의 필요성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러한 것들을 회피한다면, 본질적으로 ‘빛’에로의 부름이며 더 나아가 그 ‘빛’ 속에서 걸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종의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부활’과 같은 세례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제 2독서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주시리라’는 말씀이 이 뜻입니다”(14절).

 바울로가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어렴풋이 그 흔적을 찾아 볼수 있지만(이사 60, 1과 26, 19) 분명히 세례예식에서 반드시 사용되었던 고대 그리스도교 찬미가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세례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에로 그리고 ‘어둠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체험을 해야 하며 그 체험은 단 한 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나 다시는 죽지 않으시는” (로마 6,9)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의 존재 전체를 통하여 입증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자, 이제 요한 복음사가가 아주 극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상당히 긴 오늘 복음을 비록 짧게나마 좀 더 자세히 음미해 보자.

 문학적으로 볼 때 감정, 느낌, 반응, 대립적 상황등이 아주 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완벽한 작품이다. 우선 태생 소경에 관한 기적이 극히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마나셨는데…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9, 1. 6-7).

 그 사람이 태생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를 묻는 사도들의 질문은 단지 예수께서 행하실(2-3절) 권능에 의한 선한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하는 사실에다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곧 이어서 그 질문의 내용 자체보다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이끌어들이고자 하는 여러 가지 다른 질문들이 계속된다 : 제일 먼저 군중이 소경에게 묻고 있고(8-12절) 그 다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13-17절) 또 이어서 그의 부모들과(18-23절) 그 소경 자신의 물음이 (24-34절) 계속되고 있다. 그 장면은 소경과 그를 고쳐준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그 소경의 “주님, 믿습니다”라고 하는 신앙 고백의 장면과 뒤이어 계속되는 예수의 아주 신랄한 해석으로 끝난다(35-41절).

 이야기 전체에서 똑같은 사실을 두고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 하나는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특히 정신적으로까지 전체적인 ‘밝음’의 상태에 서서히 이르고 있는 태생 소경의 태도요, 다른 하나는 사실의 진실성이 거듭 입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또 신적 현존의 징표를 확인하기를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요한 복음사가 보통 ‘유다인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이다. 보기를 간절히 바란 소경은 눈을 뜨게 된 반면, 하느님과 그분의 법을 온전히 안다고 자처하던(“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 28절)자칭 예언자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이처럼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지향에 대해 내려진다. 이제 이 점에 눈을 돌려 보자.


‘빛’으로서의 신앙   

요한 복음사가는 태생 소경의 태도를 통해 거칠고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인 그리스도 신자의 평범한 신앙의 여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단순히 예수께서 침을 뱉아 갠 흙을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는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 위생학적으로 볼 때 이미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을 오히려 멀게 할 수 있는 그런 행위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경은 믿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고 그 결과 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요르단 강물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으로부터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2열왕 5장)를 상기케 한다. 기적을 이루어주는 것은 실로암 연못이나 요르단강의 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또는 그 말씀을 드러나게 하는 예언자이신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신앙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적대 행위와 거짓된 논리를 물리쳐 이긴다. 그 태생 소경은 모든 사람들과 대립되는 입장에 있다 : 그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그의 부모들까지도 유다인들 앞에서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두려워하고(22절)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돌린다 : “예,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저희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제 일은 제가 대답하겠지요”(20-21절).

 그 소경에게는 명백했던 사실을 부인하도록 하기 위해 온갖 협잡이 이루어진다 :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 하고 맞서는 사람도 있어서…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16.24절).

 보다시피 문제의 쟁점은 결국에 가서는 어떤 설명이 가능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이다 : 곤란한 문제를 일으키는 분도 그분이시고, 사람들간에 의견을 엇갈리게 하는 분도 그분이시다(16절). 기적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그분을 받아들일 때 따라오는 모든 결과와 더불어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치유를 받은 소경에 의해 정확히 해결된다 : 그는 엄청난 연구나 세밀한 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위 ‘지혜로운 자들’ - 어제와 오늘의 신학자들일 수도 있다 - 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단순하다는 이유로 미처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실들의 명백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28-33절).

 그 태생 소경의 신앙이 점점 명백해져 가고 있는 사실도 주목해 볼 만하다 : 그는 예수께 관해서 잇달아 질문을 받을 때,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를 ‘예수라는 분’(11절) ‘예언자’(17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이라고 하였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분을 혼자 만날 때는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엎드렸다” (35-38절).

 여기서 그의 신앙은 완전해진다. 즉 그 태생 소경은 마침내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시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라는 분’ 안에서 단순한 지성의 눈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신적 차원 즉 다니엘 예언자의 예언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이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이 볼 때 예수는 그저 한 ‘죄인’(24절)에 불과 하다 : 그는 “진흙을 개어 소역의 눈을 뜨게 해 주었기”(14절) 때문에 안식일을 어겼으며 또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29절)사람이어서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볼 수는 없는 사람이다. 유다인들은 태생 소경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들의 합리적 사고를 혼란케 하고 당신 좋으신 대로 나타내 보이실 수 있는 하느님의  ‘판단’에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안식일이 라고 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여 주는 것이 하느님께 부당한 일이 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특별한 주님 날이 ‘안식일’이 아닐까? 그리고 행해진 기적 그자체가 어느 날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보다도(29 절 참조) 더 위대한 그분의 ‘말씀’이 아닐까?

 그러므로 참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를 ‘죄인’으로 몰아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다.

 그들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눈이 먼 것은 그들의 탓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 이에 관해 예수께서는 이야기 전체의 끝부분에서 당신 앞에 서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펼쳐지는 극적인 내용을 강조하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여기서 예수께서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5절). 이보다 앞서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빛이 있는 곳에서는 밝은 빛을 받아 보기 위해 눈을 뜨는 것으로 족하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온전히 그의 탓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느님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자기 스스로에게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인간들의 구원 또는 파멸은 이미 오직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 있다.

‘빛’으로서의 세례

 모든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이 대목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술 외에도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에 있어서 세례성사의 효과에 대한 가르침을 발견한다 :  그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의 물을 통해 밝은 빛을 얻으며 그로써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또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며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생활의 의미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이미,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세례가 ‘빛’으로 제시되고 있다(히브 6, 4 ; 10, 32 ; 에페 5, 14참조). 그리고 그 주체는 교부들에 의해 폭넓게 취해졌다. 그 중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보자 :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빛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전한 선물을 받아 불사불멸의 은총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가로막았던 어둠의 원천인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분명하게, 밝게 볼 수 있는 정신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Pedagogo, Ⅰ,6).

 그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연못의 이름도 요한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실로암’이라는 명칭은 ‘파견된 자’(7절)라는 뜻이며, 요한 복음사가는 그 파견된 자라는 말을 성부께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분명히 연결시키고 있다 : 그 소경을 낫게 한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실지로 히브리적 문형에 따르면 수동태라기보다는 능동태이다. 즉 파견된 자가 아니라 ‘파견하는 자’이다(실로암 연못에 물을 공급해주는 운하에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례는 하나의 커다란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 자신을 위해 붙잡아 둘 수 없는 빛이다 : 그 빛은 우리를 모든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을 하느님 자신의 눈 즉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빛이다.

 왜냐하면 오늘 제 1독서-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히는 장면을 서술하고 있는-에서 읽게 되는 다음 구절의 내용은 항상 진실된 것이 때문이다 :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사무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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