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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2월 5일 (화) 17:27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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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사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사순 제 2주일



        23. 김정진 신부(다)/55

        24. 이형수 신부(다)/56           25. 신은근 신부(다)/59

        26. 홍금표 신부(다)/60           27. 서경윤 신부(다)/62

        28. 조재형 신부(다)/64           29. 강길웅 신부(다)/66

        30. 유영봉 신부(다)/68           31. 강영구 신부(다)/70

        32. 자, 하산합시다!/74           35. 거룩한 변모/75

        36. 거룩한 변모/77                 37. 거룩한 변모/79



24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하신 다음에 이어 말씀하시기를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지금 실현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잠깐 동안 세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타볼산 위에서 당신의 모습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옷과 예수님의 얼굴은 완전히 변모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의 빛으로 찬란히 빛났고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가 그 영광에 싸여 잠깐 동안 나타난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의 찬란함의 일면을 알게 된 것에 뜻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어두움이 언젠가는 찬란한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며, 우리의 온갖 고통이 영광으로 바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과 십자가를 통한 준비가 있을 뿐입니다.



이 길은 통해서만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아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당신이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일, 곧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서 우리가 느끼는 점은, 즉 영광과 수난, 빛과 어두움, 영원한 생명과 일시적인 죽음, 하늘의 말씀과 인간의 침묵 등 이러한 대비(對比)가 이 한 장면에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압니다. 이 같은 대비의 생활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겪어야 할 생활이 될 것입니다. 즉 우리 신자들은 영광과 수난이 교착(交錯)하는 길, 빛과 어두움이 넘나드는 길을, 영원하고도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 앞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자들과 우리 모든 이를 위해서 하신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 때 까지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비밀, 즉 예수님은 고통의 길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게 되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아를 보고서 분명히 메시아, 구세주 시대가 도래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길은 부활과 세상 종말 시의 영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성 베드로는 이 같은 예수님이 걸어야 할 길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성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 29)라고 훌륭하게 신앙 고백을 하며 어슴푸레나마 구세주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하겠으나 때로는 엉뚱한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당신의 죽으심에 관하여 말씀하셨을 적에 성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럴 수 없다고 하며 야단하였다(마르8, 32)고 합니다.



이렇게 성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환경과 처지에서 성 베드로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시에 지어 드리겠다고 한 초막 같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성 베드로가 고백한 것과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임을 선언한 셈입니다. 이러한 천주 성부의 선언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가치가 있고, 그의 길을 따를 가치가 있음을 명백히 한 셈입니다. 구름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리어진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저버림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사람의 아들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당신 자신을 위해서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천주 성부의 말씀을 반드시 들어 이에 순순히 따라야 할 제자들과 우리 모든 이를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과 세말의 재림시의 영광에 다다르게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영광에 이르게 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부활의 신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같이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서 경험한 바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을 이해하고 참아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상생활에서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할 적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변모를 이루게 되어 언젠가는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음을 명심합시다. 아멘.











25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이형수 신부



요즈음 같이 상쾌한 가을철에, 탐스럽게 열매맺은 오곡백과를 추수하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농부는 이미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손발이 부르트도록 힘겨운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다.



올림픽 경기에서 영광의 금메달을 따내기 위해서 운동선수들은 장기간에 걸쳐 피땀어린 강훈련을 수 십 번 수 백 번 반복해야만 했다. 귀여운 한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뼈아픈 산고가 먼저 있었을 것이고, 그 아기가 사람 구실을 할만큼 성장하기 위해서 부모는 수 십년 간 각고를 치루어 가며 그 어린 자식을 뒷바리지 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세상 살면서 자기의 귀중한 생명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보람있고 값지게 하기 위해서 항상 계속해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성취해 가면서 살아가도록 마련되어 있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모든 인간적인 능력을 총동원해서 힘겨운 수고를 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 수고가 정성을 많이 들인 값지고 귀한 것이었다면, 거기에 비례해서 그 일의  성취도 또한 값지고 위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심을 증명하는 한 신비로운 사건을 보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입으실 영광에 대한 예표인 것이며, 동시에 그 신비로운 장면을 본 몇 몇 사도들에게는 그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게 하는 경이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거룩한 변모 사건이 갖는 의의는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구약의 중심이 되는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아가 등장하여 예수님과 함께 나눈 대화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결정적으로 성취하실 구원 사건, 즉 그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였다.



장구한 세월동안 구약시대에 온 이스라엘 민족이 애타게 기다리고 바랐던 대망의 메시아 구세주는  그들이 모르는 가운데에 이미 그들 안에 와 계셨고, 그 분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그 때까지의 사람들 대부분이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던 수난과 죽음이라고 하는 힘겨운 고통과 시련의 길을 통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영광의 찬란함 속에 수난과 죽음이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 용해되어 있는 이 신비적 사건, 예수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구세주이심을 드러내 보이셨고, 그의 구원 방법이 어떠한 것인가를 미리 암시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수난과 죽음이 곧 영광과 구원에로의 길이라고 하는 역설적인 이 구원신비의 기본 진리를 성부께서는 엄숙히 확인하셨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마지막에 성취하실 사건에 대한 엄숙한 선언이었다.

사람의 궁극적 구원이 하느님과 하나됨에 있는 길일진대 인간구원을 해방하는 결정적 요소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상반되는 증오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류 세계 안에는 일치가 무너지고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의 세력의 근원은 바로 증오와 분열이며 이것을 사랑과 일치로 되바꾸어 놓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가능케 하기 위해 악의 세력을 정복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사랑이 요구된다. 그리고 사랑의 행위는 마치 촛불이 남은 비추되 자신은 소멸해가듯 남은 이롭게 하지만 자신에게는 결국 희생과 봉사 헌신이라고 하는 고통과 시련의 짐을 지워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걸어가신 길이 바로 온전한 위타적 삶이었고, 그 결과로는 자신은 수난과 죽음에까지 붙여지는 그러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고난의 길이기는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의 업적만이 영구히 불멸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로서 증명되었고 그 부활의 영광, 승리의 영광을 미리 예표한 것이 오늘 예수의 거룩한 변모사건이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영원한 참된 삶, 참된 행복을 최후 희망으로 가지고 구세주 예수를 믿고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신앙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은 남을 위하는 사랑의 길을 소홀히 외면한 채 형식상의 교회의 어떠한 규범만을 지키는 그러한 삶이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남을 위한 삶을 영위하는데서 생겨나는 모든 고통과 시련의 극복없이 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괴로움, 그 위에 덧붙여 신앙 생활에서 오는 내적 외적 숱한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에 동참하는 데에 필요한 값진 조건이다. 사랑의 업적에서 비롯되는 모든 어려움과 시련들, 한마디로 십자가들은 우리의 구원, 종말의 부활을 보증해 주는 것이며 그러기에 값진 것이다.



결실의 기쁨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삶이 보람있고 값진 것이 되기 위해서 힘겨운 수고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자연의 법칙 그 이상으로, 부활에로의 영광을 위한 길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악과 속됨과 악에 물든 자아에 죽고, 사랑의 계명에 의거한 자기 헌신이라고 하는 크나큰 어려움과 시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한 길을 걸음으로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가능하게 된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이 장차 누릴 영광을 미리 선보이셨고 결국 그것을 성취하셨다. 그러나 그 영광은 고난과 시련의 극복을 전제로 하고서 성취된 값진 열매였음을 깊이 명심하자.











26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주님께서 모습을 바꾸시다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과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갑자기 온 몸이 변하고 옷은 눈부시게 빛났다. 현실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언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웠을까. 베드로는 그곳에 오래 머물자고 했다. 평범하고 조용했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찬란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을까.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다. 제자들의 절망과 방황도 내다보셨다. 그때를 대비해서 당신의 천상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해 본다. 수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이다. 오늘의 체험을 떠올리며 의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당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던 위안과 격려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은 순간이었지만 영원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스승에 대한 확신을 더 깊이 간직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을까. 우리에게는 그분의 변모 사건이 없을까. 신앙 안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해 오신 사건은 없을까. 이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이다.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이게 되면 좋았던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제자들도 그랬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수난의 순간이 오자 스승의 죽음을 이해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변모 사건의 기억도 소용없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주님께서 다시 다가 가셨기에 제자들은 사도로 바뀔 수 있었다.



우리도 영세 후 많은 은혜를 받았다. 신자가 되기 전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진정한 신자는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잊어버리면 감사할 수 없다. 잊지 않기에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 신앙은 힘이 된다. 누구에게나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있기 마련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라.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던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들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마무리되었던가. 우연인 듯 느껴져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 역경을 만나 기도했는데 역경이 끝난 뒤에는 우연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가. 너무 쉽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유혹인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은혜로운 기억이 있다. 고통으로 왔다가 안도와 유익함으로 마감된 사건들이다. 주님의 개입 없이 가능했을까. 신앙 안에서 힘을 내라고 그분께서 베푸신 은총이며 신앙인 각자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변모 사건이라 해석해 본다.

은총은 예고 없이 온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온다. 하느님은 아버지시기에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그냥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평소의 작은 기도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을 모셔오는 것이다. 그분께서 한번만 봐 주셔도 우리의 운명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변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가끔씩 부활을 생각해야 한다. 무작정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부분이 부활해야 할지 생각하며 사순절을 보내자.











27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미래를 향한 희망

홍금표 신부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공포와 불안은 죽음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두려운 것은, 의지나 행위의 주체인 인간이 스스로 삶의 지고한 목표를 잃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태 즉, 미래의 희망을 잃은 정신적 상태를「절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절망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병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비록 현재 상황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미래를 볼 수 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고 창조하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위대성과 지고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한다.



이 둘의 차이는 미래를 향한 희망, 이것을 간직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신앙 안에서도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켜야될 기본적인 덕을 3가지 즉, 향주삼덕(向主三德주)이라 하는데, 희망을 그 중의 하나의 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믿음 안에서 가지는 희망의 중요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합리적이고 명확한 근거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사순 제 2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을 보게 된다.

이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 나오는 소재들은, 하느님이 옛날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 나오는 소재와 비슷한 것들이 많이 있다.「산」과「구름에서의 소리」「동반자 3명」등이 그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리고「모습이 변하다」「옷이 빛나다」등은, 묵시문학의 종말 서술에서 빌어온 소재로, 이는 예수님께서 종말을 앞당겨 사신 종말론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세와 엘리야는, 바로 구약을 대 표하는 인물들 즉, 율법과 예언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주인공으로, 율법을 선포하고 유다교를 창시한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고, 엘리야는 아합왕 시절 유다교와 율법이 바알 신앙 앞에서 위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홀로 율법을 수호한 대표적 예언자이다.



그런데 이 분들은 공통점을 가지는데, 그것은 예수 시대 사람들이 그들은 모두 승천하였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승천은 명백히 성서에 나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모세는 모세 오경에 땅에 묻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민간 전승에서는 모세 승천기가 전해지고 있었고, 모두 모세를 승천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승천. 하늘에 올랐다. 이것의 의미는 하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을 알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하늘은 단순히 공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장소를 상징한다. 때문에 「승천하셨다」라는 사실은, 단순히 공중으로 올라간 사실을 이야기하는 용어가 아니라, 하느님이 계신 하느님 나라에 오름,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 때문에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천상적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장차 하느님 안에서 구원받을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하나의 시현 사화로서, 예수님의 초월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을가?  단언 할 수 없지만, 미래를 향한 하나의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즉 박해와 고난 앞에서 용기를 잃지 말고, 희망을 간직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바로 이 변모 사건 앞뒤에 수난 예고가 나오는 점만 보더라도, 수난과 이 사건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두운 밤 폭풍우 속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등대가 바로 이 변모 사건의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박해와 위기 상황 속에서 포기하고픈 유혹을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었던 힘도, 그들이 누릴 미래의 영광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삶에는 많은 위기의 순간이 있다. 길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 거기에 더하여 나를 위로해줄 단 한 명의 동료도 보이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나를 버린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죽음이 차라리 행복일 수 있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때 우리를 다시 구원할 수 있는 힘은, 그 고통 속에 잉태된 미래의 결과를 볼 수 있는 눈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나의 실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누릴 마지막 영광의 모습을 묵상해 보자!











28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그분의 모습이 달라졌다.

서경윤 신부



나에 대한 첫 인상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냉정하고 차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고 뻣뻣하다고 합니다. 또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날에 한번은 어떤 수녀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는데, 마침 내가 만나려던 수녀님은 안계시고 함께 사는 아주 젊은 수녀님이 나를 맞이했습니다. 그 수녀님이 나더러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 대답을 하지 않고, 내가 찾는 수녀님이 언제 돌아오시는지 물었습니다. 그 수녀님은「아마 늦게 오실거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 표정이 이상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나중에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고 본당신부님께 가 있었습니다.



잠깐 후 외출했던 수녀님이 돌아왔는데, 그 때는 잊고 있다가 저녁 식사 때 갑자기 생각나서 그 젊은 수녀님이 말하기를 “아! 참, 오후에 웬 시꺼먼 사람이 검은색 점퍼를 입고 수녀님을 만나러 왔는데, 안 계신다고 했더니 나중에 또 온다고 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수녀님, 조심하십시요! 꼭 사기꾼같이 생겼습니다.”했습니다. 그 수녀님은 어떻게 생겼더냐? 안경을 썼더냐? 등등 물어봤더니, 아무래도 내가 다녀 간 듯해서, 그렇다면 본당 신부님께 연락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제관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나도 본당신부님과 얘기가 길어져서 저녁 식사까지 같이 하다가 수녀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식사 후 수녀원에 가서 얼마나 유쾌하게 웃었던지! 그 때 당황해 했던 그 수녀님도 이제는 원로(?) 수녀님이 되셨으며, 나는 지금도 그 분의 수도본명과 호적 이름까지 잘 기억하고 자주 생각합니다. 그 후 나는 적어도 나쁜 인상만은 주지는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요즘은 그나마 포기하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첫 인상을 좋게 심어주는 것은 큰 은총인 듯 합니다. 나는 나의 이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잘 하는지, 가끔 질문을 받습니다. 이때 나는 대단히 당혹한 느낌을 갖습니다. 사실 나도 기도 잘 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런데 수도회 신부로서 나도 기도 할 줄 모른다고 하기가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모른다고 말해도 믿으려하지도 않아서 답답했던 적이 많습니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은 기도의 효험얘기를 잘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내 기도는 도대체 효험이 없었습니다. 대학예비고사 미사봉헌에서 합격률이 1~2할 정도입니다. 남들은 효험 있는 기도도 잘 하는 모양인데, 나는 왜 기도하는 것마다 거꾸로 실현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역시 기도 할 줄 몰라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 심정도, 기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개인 교수나 며칠 강습이라도 받아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성서에서는 예수님이 「다볼산」에서 기도하실 때에「그분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기도 함으로써 달라진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인상도, 부정적인 이유는 곧 내가 기도할 줄도 모르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위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을 주려고 얼굴 표정을 만들어 봤자 잠시 뿐이며, 대화나 관계는 오히려 어색하기 이를 데 없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한번은 성공적으로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다면 역시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하려고만 하면 무슨 일이 생기고, 또는 바삐해야 할 일이 생각나고,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분심 중에 기도하는 것 보다, 할 일을 다 해놓고 차분한 마음으로 기도하려 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 못 하게 됩니다. 또 모처럼 시간을 내서 십자가 앞에 앉으면 영락없이 분심이 생깁니다. 평소에 전연 생각치도 않던 사람이나, 과거의 사건들이 머리에 떠올라, 그 생각에 흠뻑 빠져 있다보면, 기도 시간인지 자유로운 공상 시간인지 구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사 도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는 미사 경문을 외우지만 머리에는 오만가지 생각으로 꽉 차있습니다. 어떤 때는「기도를 잘해야지, 분심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미사 경문을 틀리게 읽기도 합니다. 바로 지난 주일날엔 강론 후 잠깐 묵상 중에 「신자들의 기도들 어떻게 시작할까!」하다가 해설자가 모두 일어나라고 하기에, 얼떨결에 신자들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수녀님을 보니까 무어라고 말하는 입 모양이 「사도신경」을 했습니다. 그 때서야 내가 사도신경을 빼먹은 줄 알았습니다.「잠깐 묵상합시다!」했으면 나도 함께 묵상 할 일이지, 딴 생각은 왜 합니까.



기도 뿐 아니라 매사에, 한 가지를 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면 결국 그나마 소홀해지고, 실수하고, 따라서 마음의 안정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이런 상태에서는 상대방에게 편안한 마음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가!”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으면, 상대방은 나한테서 “내가 이런 말을 하고는 있지만, 실수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어쩐지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얘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뭔가 감추든지, 속이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되면, 때로는“사기꾼”,“위선자” 또는“이중 인격자”같은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내가 수녀원에 갔을 때, 나는 수녀님을 찾아 온 용무를 감추었고, 그 결과 나는 사기꾼이 되었으며, 따라서 그 수녀님은 내가 만나려는 수녀님이 돌아오실 시간을 숨겼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그 분 앞에 뭔가를 감추거나 어떤 변명을 하려고 한다면, 기도가 잘 안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이기에, 이러한 대화를 새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기도함으로써 뻣뻣하고 냉정한 인상으로부터 부드럽고 다정한 인상을 주는 자로 모습이 변화되고 싶습니다.











29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새로운 삶을 향해 가는 골고타의 길

조재형 신부



우리는 사순 시기를 맞이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골고타 언덕을 향해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죽음의 현장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현장이 바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현장이기에, 우리는 희망을 안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과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건, 바로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의미는 무엇인지, 구원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함께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이스라엘과의 약속에 의한 구원

오늘 2개의 독서와 복음 말씀의 주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말을 한 사람에게는 자유가 곧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이 말의 의미는 아무리 그래도 배가 불러야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서, 빵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싸워왔습니다. 그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던졌을까요?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인류의 구원은 두 가지 관점, 즉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유목민족이라서 방랑생활을 해야 했고, 그래서 자기의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희망에 불과할 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손의 번성은 민족적인 문제로서, 민족이 부흥하느냐, 못하느냐라는 문제에 결정 적인 요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민족적 배경을 지닌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은 땅의 소유와 후손의 번성을 오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계신 겁니다(창세 15,5-8). 이는 곧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이는 물론 창세기 15장 6절에서와 같이 야훼께 대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는 다시 말씀드려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후손의 번성이라는 시간적 측면의 확장, 땅의 소유라는 공간적 측면의 확산을 가져오고, 이는 곧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성취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의 죽음에 의한 인류 구원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하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구약성서의 위대한 성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변하신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그 자리의 의미를 나타내 주는데,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과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서, 그리고 35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선택된 아들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의 주체이심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세 분이 나눈 대화의 주제가 죽음(31절)이었다는 것을 통해, 구원의 주체자이신 예수께서 인류에 대한 구원을 실행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희랍어로 된 성서를 보면, 죽음을 ‘탈출'이라고 번역 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이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탈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탈출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만을 뜻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기 위한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거룩하고 고귀한 분이셨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난에 찬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모습에서 신앙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보아야겠습니다.

교회는 어찌 보면 가장 부끄럽고 창피한 시간들을 가장 소중하고 귀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절한 죽음으로 막을 내린 십자가 사건을, 사십일이나 걸려서 묵상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가 기념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등을 볼 때, 우리 모두 민족의 자부심, 해방, 긍지를 축하하고 기억하는 날들입니다. 우리 민족이 패망하고 좌절에 빠졌던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낙은 거의 없습니다.



절대적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

오늘의 제2독서는,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들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생활해야 하는지를 들려줍니다.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주님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의 비천한 몸이 그분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구원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여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필립 3, 18-29).

이 말씀은 곧,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믿음이 인간적 고집이나 아집에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세주로 믿는 참 신앙인지 반성케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도외시한 채, 인간적인 생활 양식, 풍습으로 인해 세워진 신앙의 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참 신앙을 다시 건설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절대적인 포기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며, 절대적인 믿음은 바로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라 정처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아들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서도 오히려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일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는 각종 부조리한 사건들, 고통과 괴로움은, 하느님과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뚫고서 새싹은 어김없이 돋아나듯이, 언제나 변함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야겠습니다. 그러한 믿음과 신뢰의 뿌리 위에 고난의 십자가가 세워질 수 있고, 바로 그 십자가에서만이 부활이라는 열매는 맺어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0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참으로 험난한 축복의 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5,5-12.17-18 (하느님께서 충성스런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제2독서 필립 3,17-4,1 (우리를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복 음 루가 9,28b-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아브라함은 본래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기름진 땅에서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에 도착해 보니 아주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흉년이 들어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신세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늘그막에 자식도 하나 없고 손바닥만한 밭뙈기 하나 없었습니다. 참으로 외롭고 서글펐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느님을 믿고 정든 고향을 떠났던 일들이 참으로 야속했습니다. "가라"해서 떠났고 "오라"해서 왔지만 어디 맘붙여 살 만한 건더기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라나선 것이 그저 속없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별처럼 많이 불어날 것이다."

그뿐만도 아닙니다.

“나는 에집트 개울에서 큰 땅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



너무도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성은 아주 희박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평생에 얻은 것이라곤 아들 하나였으며 그리고 살아 생전에 차지한 땅은 마누라의 무덤을 쓴 막벨라 동굴이 있는 작은 밭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언제고 그분의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여느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믿음의 결과를 현실에서만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아브라함은 좋은 모범이 됩니다. 믿음은 결코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현실에서 걸어가기에는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많게 됩니다. 믿음은 현실과 자주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믿기 위해선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굽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모습이 변화되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라봤을 때 그때 예수님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얼른 “선생님, 저희가 여기 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고 여쭈어 봤습니다. 너무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사실 이 변모 사건은 예수님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은 본래 엄청난 길이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사건보다 더 외롭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잡혀서 죽습니다. 십자가에 참혹하게 매달릴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을 때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함께 얘기를 나눴습니다. 아마 주님에게 큰 용기와 힘을 드린 것 같습니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한 것으로 봅니다. 모세는 그때 홍해바다를 건넜고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던 분입니다. 그걸 보면 예수님도 죽음이라는 바다를 건너시게 되고 또 그 사건을 통하여 부활이라는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으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약속을 미리 체험하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걷기 위해 자신을 꺾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당신의 아들로, 딸로 부르셨기 때문에 자녀의 길을 아버지의 뜻대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에는 외로움도 있고 가시밭도 있으며 높은 산과 깊은 강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그런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믿음이 자주 세속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게 됩니다. 믿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재물과 건강과 현세적인 복뿐입니다. 병 낫고 사업 잘되며 가정 평안한 것만을 원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을 바로 거기 에 둘 때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세례를 받았는데 막상 신자가 되고 보니 고달픈 것 이 많았습니다. 우선 낙태를 못하니까 원하지 않는 아이를 셋이나 더 낳아 자녀를 다섯이나 키우게 되었으며 또한 장사도 양심적으로 하려니까 수입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래저래 그녀는 성당에 발을 들여놓음으로 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스럽고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약속의 땅이 있고 또한 올라가게 될 영광의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은 보상해 줄 수 없는 축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이 힘들다 해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아브라함처럼 또 예수님처럼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31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십자가와 죽음 없는 부활과 승천은 없다

유영봉 신부



묵상 :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수난이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기도 중에 산 위에서 드러내신 예수님의 신적 변모에 취한 베드로는 ‘초막을 짖고, 계속 머물기를’청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죽음의 길을 계속 가신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음을 명심하자.



1. 이 분이 누구신가?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과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그리고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만일 우리가 함께 등산을 은사님이 갑자기 ‘모습이 변하며, 옷이 눈부시게 빛이 나서’ 도저히 바라볼 수 없게 되는 일을 체험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자신을 꼬집어 볼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여러차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분의 권능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 9,20)라고 믿음을 고백하였였다. 그런데도 함께 먹고 마시며, 길을 걷고, 목말라 하시고, 피로해 하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며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서의 당신 신성(神性)의 면모를 보여주신 것이다. 게다가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하는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원(身元)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려고 하느님 아들로서의 당신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는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2.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머리에서 뿔처럼 빛을 발했던 십계명을 받아 전한 모세와 불가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대표적인 예언자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으로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눈부신 황홀한 모습을 목격한 베드로는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홀경에 취한 베드로는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루가 9,33)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제안에는 응답도 없이 산을 내려오셨고, 당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베드로는 기쁨과 희열의 순간에 그대로 안주하고자 하였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던 것이다.



3. 십자가와 죽음 없는 부활과 승천은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루가 9,29)라고 전하고 있다. 신앙인은 때때로 피정이나 연수회, 기도모임(묵상회) 등을 통해 신앙이 없는 이들이 체험할 수 없는 영적인 체험을 한다.



타볼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경험했던 그런 기쁨과 희열, 은총의 감미로움을 체험할 때가 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던 몇몇 제자들이 한 순간 경험했듯이, 그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 얼굴을 맞대고 볼 천상기쁨의 조각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이런 영적 희열을 추구해야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채우기 위한 희생과 헌신, 자기 비움과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고, 영적 위안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자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겨야 한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몫)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과의 싸움의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다. 십자가의 죽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내가 벌써 여러번 여러분에게 일러준 것을 지금 또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바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필립 3,18)고 말씀하신다. 나의 삶은 어떤가?



4.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시대의 문제는 ‘쉽고 편한 것을 다 좋은 것이고, 어렵고 힘든 것은 다 나쁜 것’인양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어려울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때로는 영적인 위안과 위로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현세적인 복을 얻는 데만 열중하는 祈福宗敎가 아닐뿐더러, 심리적인 위안만을 찾는 종교는 더욱 아님을 더욱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요즈음 ‘구제금융 시대’를 살며, 특별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순절을 맞아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리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속죄와 구원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자. 이것이 구름 속에서 들려온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일 것이다. 











32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기도 - 잃었던 자신을 찾는 시간

강영구 신부



오늘은 사순 제2주입니다. 우리가 재(灰)를 머리에 받고 올해의 사순절을 시작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사순절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철저히 반성함으로써,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올해의 사순절 동안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큰 진전 있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사순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관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이야말로, 이 사순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성서의 표상에 의하면 산은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산은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호렙이라는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세는 양에게 풀을 뜯기려고 호렙 산으로 갔었는데,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됩니다.

또 출애굽기 19장에서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소가 역시 산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불기둥 가운데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열왕기 상권 19장9절 이하에는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40주야를 걸어서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동굴에 누워 있었는데 그 때 불길이 지나가면서 그 속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사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는 자리이며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셔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끄럽고 분주한 일상을 떠나 조용하고 높은 곳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높고 조용한 곳, 예수의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을 찾는 계절입니다. 꼭 그 장소가 산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상의 분주함을 벗어나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잠심(潛心) 중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곳이 집이든 성당이든 시장 바닥이든 상관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시끄러운 것에 길들여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심 중에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도 또 조용히 기도할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잊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것만이 바르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함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높고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잊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찾는 시간입니다.



오늘 루가 복음은 예수의 모습이 기도하는 중에 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 루가는 복음 전편을 통해서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신비스럽게 기도하시는 모습을 전해 주는 곳은 오늘 우리가 들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는 평소에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셨고, 죽은 라자로를 살려내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병든 사람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바다의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그물이 끊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하실 때는,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는 중에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신의 본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놀라운 일을 하시면서 분주하게 활동하실 때보다 잠심 중에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가장 구세주다운 모습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인간이 잃었던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시간이며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또한 기도란 인간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시간은 바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당신의 모습이 변모되셨듯이, 우리도 조용함 가운데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을 닮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의 변모뿐 아니라 생활의 변모까지도 가져다 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사람이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엇인지, 하느님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고, 어린이와 같은 심정이 되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고 하느님을 닮게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신 만만할 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줄도 모르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또 너무나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성이 메말라 가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게 됩니다.

  기도란 결코 할 일이 없는 사람,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심심풀이 삼아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시간이며,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느님을 닮는 시간입니다. 더구나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우리에게 기도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자라는 껍데기만 덜렁 남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알맹이 없는 공허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내는 이 사순절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잃었던 모습을 되찾는 계절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높고 조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파견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신 본래의 모습을 제자들 앞에 드러내신 것은,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황홀함에 도취되어 거기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힘과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보게 된 제자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을 등지고 조용한 그곳에서 황홀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 꿈 같은 현실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인 사람들은 자기 도취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하고 시끄러운 시장 거리로 나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끔 조용한 곳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그곳에 머물기 위함이 아닙니다.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서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 길,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길과 같고,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과 같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고, 우리는 그 유혹과 시련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자주 잠심 중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유혹과 시련 가운데서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됩니다. 예수의 변모 사건 이후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용기 있게 올라갔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의 길을 용감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절은 복잡하고 분주한 생활 속에서 잊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또한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시간입니다. 이 사순절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되찾고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33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자! 하산합시다!



 베드로가 얼떨결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또 다른 하나는 엘리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바람은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와야만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함께 하는 산 위에서의 삶, 천국과도 같은 삶을 갈망했지만, 아직 때가 안 되었고, 또 이루어야할 것들이 있었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산밑의 세

상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산 아래에서의 삶은 산 위에서의 그것처럼 그리 신비롭고 거룩하지가 못할 것입니다.

평화와 기쁨․환희보다는 고통과 갈등․슬픔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마저도 그 산 위에 머물지를 않으시고 산밑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것은,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셨고, 또 산 밑의 현실을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외딴곳에서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다가, 마침 물이 말라있는 빈우물이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호랑이의 발이 닿지 않을 곳까지 정신없이 기어내려 가서 한숨을 돌리며 밑을 보니, 거기에는 커다란 뱀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도 밑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우물 속 벽을 뚫고 나

와 있는 나무뿌리를 붙잡고, 몸을 지탱하며 호랑이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팔의 힘은 점점 빠져가는데 호랑이는 도무지 돌아갈 생각을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엎친데 겹친격으로 어디선가 쥐들이 나와서는 남의 속도 모르는 듯 이 사람의 목숨줄인 그 뿌리를 마구 갉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그 사람은, 옆에 달려있는 벌집에서 꿀을 찍어먹으며 순간 그 맛을 즐겼다고 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잘 표현해 주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살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온전한 평화와 만족 중에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 같고, 도리어 ‘인생고해(人生苦海)’라는 말을 더 실감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고, 그 산을 넘었는가 싶으면 또 다시 그 앞에 강이 놓이곤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갖고’ 살며, 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무언가를 즐기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이 ‘산 아래의 현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 세상을 맑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말”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고, 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당신을 믿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부활, 영생을 믿으며 희망하는 삶! 이것이 산아래 현실을 사는 우리 삶의 양식(樣式)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준비하시며 타볼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때「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게」되었다. 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종살이에서 구해낸 모세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부활’로써 이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셨고, 또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처럼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런 승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34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우리는 사순절 동안 보통 4개의 산봉우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묵상하게 됩니다. 유혹의 광야인 파란치산, 영광과 행복의 변모인 타볼산, 예수께서 피땀흘려 기도하신 올리브산, 십자가의 죽음으로 승리하신 갈바리아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의 타볼산을 묵상합니다. 여기서의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과 그 아름다움, 행복에 대한 희망을 안겨 줍니다.

이 변모는 너무도 휘황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다마 그의 옷이 눈부시게 빛났으며,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고 감탄사만 늘어놓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올라가야 할 갈바리아산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즉, 고통의 언덕에서만이 영광의 빛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언덕에서 영광의 빛을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시련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시련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예를 한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날 사형수와 광부가 곡괭이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수는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파고 있었으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숨만 내쉬며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대단히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광부는 금광을 발견하고 금맥을 따라 금광석을 파고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설레이며 금덩이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같은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지만, 한 삶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또 한 사람은 영광과 희망을 갖고 땅을 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마는 2명의 장사꾼 아들을 둔 한 노파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비가 올 때는 짚신을 파는 아들이 걱정, 날씨가 좋을 때는 나막신을 파는 작은 아들이 걱정인 노파는 고통과 시련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날씨가 좋으면 짚신이 잘 팔려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날씨가 궂으면 나막신이 잘 팔려서 하느님께 감사한다면 날이 궂든 좋든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에 긍정적인 수용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차원은 우리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무엇보다 변함없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있기 때문이며,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기에 무한한 은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볼산은 우리에게 전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로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도록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의 영광과 행복을 보고 오늘의 시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의 의미를 포도나무의 예를 들어 깊이 있게 가르쳐 주십니다. 주인이 포도나무에서 가지를 자르는 것은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매질을 하는 것이 미워서거나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잘못하여 당하는 고통이 아닌 한,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천국의 영광과 부활의 희망을 일깨우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로는 “장차 우리에게 올 영광에 비우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설파하였습니다.



끝으로 어느 폐병환자의 기도를 묵상해 봅시다. 

“고통을 피하지 마시오, 내 것으로 주와 함께 하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끌어안으시오. 주여!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시련을 우리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시지 마시고 형제들의 고통을 저에게 지워주소서.”











35            사순 제2주일   루가 9,28-36 (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우리는 땅을 보며 걸어갑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하늘을 쳐다보며 상승(上昇)의 가치를 지니라 명하십니다. 속죄와 정화의 사순절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현실적, 일상적 삶에 얽매인 우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새로운 묵상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사순 제2주일, 오늘의 성서 말씀은 하늘이 주제입니다. 하늘을 보며 믿음을 다짐해야 했던 제1독서의 아브라함, 영광의 그리스도, 내면과 초월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았던 제2독서의 사도 바울로, 높은 산에서 하늘의 빛,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케 하신 복음의 예수, 이들은 모두 우리 신앙의 길잡이며 근거, 그리고 목적입니다.



제1독서는 창세기 15장의 말씀입니다. 성서학자들은 15장의 내용이 J문헌(하느님을 야훼(Jahwe)라 표시한 부문, 1-6절)과 E문헌(하느님을 엘로힘(Elohim)으로 표현한 부문, 7-21절)이 복합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이 두 번 반복되는 셈입니다. 어쨌든 오늘의 제1독서는 E문헌의 결론과 J문헌을 연결, 종합시키고 있습니다.



성서의 중심사상이기도 한 하느님의 약속과 그에 따른 계약체결이 오늘 1독서의 핵심입니다. 노령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실망과 좌절을 뜻합니다. 아브람은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에게 하느님은 희망을 예고하고 축복을 다짐하십니다. 그 표시로 하늘과 무수한 별을 제시하십니다. 이 때문에 사실 후에 아브람(하느님 아버지는 높으신 분이란 뜻)의 이름은 아브라함(만민, 만백성의 아버지란 뜻)으로 개명됩니다(창세 17,15).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 고향 떠난 나그네 아브라함, 그는 하늘을 보고 별을 세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곧 불신과 회의가 엄습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더욱 구체적 징표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계약이 체결되는 것입니다. 암소, 암염소, 양, 비둘기 등을 잡아 반을 갈라놓고 다짐했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강한 무조건의 요청이며 인간 편에서는 그에 대한 응답, 그리고 응답을 위한 다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설마와 혹시’하는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는 자기 결단인 것입니다. 계약을 체결할 때 동물을 자르는 것은 자신의 전존재와 인격을 건 신의의 다짐이며, 약속을 어겼을 때에는 잘라진 동물과 같이 비참한 운명에 처해질 것이라는 경고와 어떠한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결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예레 34,18).



생명을 걸고 피로써 맺은 약속, 그것은 곧 충실과 신의, 신뢰를 뜻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늘을 쳐다보고, 그 별들을 보며 미래의 영광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들 위에 솔개들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솔개들을 계속 쫓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한번만의 결단이 아니고 결단의 무수한 반복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해이해져서는 안되는 긴장의 삶입니다. 사실 약속의 땅에 가기까지 이스라엘은 숱한 실패와 불충실, 좌절과 아픔을 겪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회의, 이스라엘의 피곤, 이것은 모두 우리의 현실적 상황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자녀들인 우리는 이 시간에 하늘을 쳐다보며 무수한 별들이 주는 교훈을 읽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성서였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그리고 별들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의 아들, 딸, 그리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2독서에서도 사도 바울로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과감히 외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추종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추종을 방해하는 요소들과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로는 이들을 엄하게 질책하며 “개들과 악한”(필립 3,2)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매우 거칠은 표현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과거만을 고집하고 외형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들이며 악한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거부하고 땅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는 내용과 방법은 그리 문제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은 정한 동물, 부정한 동물, 먹을 수 있는 것, 없는 것, 이런 것에 너무 집착되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곧 복(腹)을 하느님으로 삼는 것과 같다고 바울로 사도는 꾸짖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지향적이며 전통만을 고집하는 것은 수치스럽다는 것입니다. 누가 만일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랑삼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가 바로 그러한 부류의 사람입니다. 세상일에만 힘쓰고 자신의 뜻만을 앞세우는 오만 불손하고 교만한 자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개들이며 거부해야 할 악한들입니다.

이에 바울로는 하늘의 가치를 제시합니다. 신앙인은 하늘의 시민입니다.



세상에서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사람, 그런 사람만이 하늘의 시민일 수 있습니다. 개헌(改憲)을 해야 한다, 절대로 못한다하고 열(熱) 올리고 있는 우리는 그에 앞서 더 큰 것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도둑과 강도가 대화의 대상인지 아니면 거부의 대상인지 말입니다. 하늘의 시민은 부당한 제도와 법의 운용 및 적용에 이와 같은 가치관을 갖고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갈바리아 언덕이 있습니다. 고통의 언덕 너머 영광의 빛이 있음을 오늘 복음은 앞당겨 줍니다. 사실 옷이 눈부시게 빛나고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은 예수의 부활 사화를 연상시킵니다. 이제는 모세와 엘리아의 시대가 끝나며 새로운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떠나야 하는 또 다른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출애굽은 수난과 죽음을 거쳐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40년의 여정을 거친 것처럼 그리스도도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서 머물러 계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의 여정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미래를 창조하는 삶, 그러한 삶이 바로 오늘의 속죄와 극기, 기도를 가능케 합니다.











36             사순 제2주일   마태 17,1-9 (다) 예수의 거룩한 변모



복음성서를 보며, 때때로 예수께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지만 반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듣게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말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저자인 루가도 사도 바울로와 같이, 신자들의 일상생활을 훈계하고 지도하는 내용을 써서 그 당시 신자들에게 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주 귀중한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자태를 잠잠히 묵념해 보기를 루가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과 그 생애에 대하여 명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의 인생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길은 많은 사람들과의 충돌과 갈등을 운명처럼 타고난 길이기도 했습니다.



루가 복음은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과의 대화로 가득 차 있고, 또 자신의 인생행로가 가장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과의 논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수의 사람들만이 예수와 함께 예수의 길을 가고 있으며, 예수의 원의를 이해하고,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자 할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당신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 길은 백성의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고 재판을 받고 고통을 당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 발을 딛는 사람은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길이요, 걷고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를 하느님의 백성이 배척한다는 사실은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의 제자들과 친척들은 예수께서 종교적 정치적 대변혁을 일으키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만일 이들이 예수께서 걷는 길이 고통과 죽음으로 향한 길임을 알았던들 아마 적지 않은 이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을 지나서 부활로 통하는 이 길에는 비참한 순간과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고 영광의 개선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루가는 산 위에서 고독하게 계신 예수의 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독을 기도하는 모습으로 빛내시며 성부의 뜻에 전면하시는 상을 제시하여 줍니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 백성과 새 시대에 새로 만나시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태양같이 빛나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언자로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고 위로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찬란한 구음의 출현을 볼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때 광야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던 구름을 상기하게 되며,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이 세상에 이루어짐을 암시하는 것임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 중에도 거룩하게 변하신 이 분은, 이 신비의 인물은, 당신 백성들에게서, 당신 백성들 때문에,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운명처럼 지니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당신 백성과 만나시고 그들을 당신의 자유에로 인도하십니다.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하여 가시는 하느님의 길은 완력에 의한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 와서 아직도 불분명한 앞길을 가는 제자들처럼 우리의 신앙도 앞을 밝히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미래의 삶을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수난과 고통에 신앙과 희망을 가지고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그분의 승천을, 그분의 천주성을 굳게 믿으며 희망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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