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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2월 5일 (화) 17:27
분 류 사순시기
ㆍ추천: 0  ㆍ조회: 4300      
IP: 211.xxx.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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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사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사순 제 2주일

        12. 백은기 신부(나)/24

        13. 표창준 신부(나)/27           14. 안충석 신부(나)/33

        15. 최영철 신부(나)/38           16. 곽종남 신부(나)/39

        17. 강길웅 신부(나)/40           18. 민병섭 신부(나)/42

        19. 신은근 신부(나)/46           20. 김영진 신부(나)/48

        21. 김영남 신부(나)/50           21. 서울교구 주보(나)/52

        22. 유안진 교수(나)/53   



12          사순 제2주일   마르 9,1-9 (나)  예수의 거룩한 변모

백은기 신부



대지에선 긴긴 침묵을 깨고 만물이 기지개켜는 봄의 소리가 들립니다.

먼 동녘에는 해뜨는 소리가 나고, 곱고 맑은 아침이 밝아오는 소리, 고요한 마을에선 아침 밥짓는 소리가, 일찍이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근하는 아빠들의 부산한 소리, 사업을 위해 발버둥치는 경쟁의 소리 사회에서는 내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소리, 진리와 학문에 몰두하는 소리, 물가 오르는 소리, 인생을 비관하는 소리, 인간 생명이 다해 바로 죽음의 목전에 두고 있는 무상의 소리, 양심에 가책을 받는 소리, 전쟁터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가는 젊은이의 마지막 절규의 소리, 평화와 자유와 인권을 회치는 소리, 인간의 생명권과 자율권을 침범하는 소리, 공동선에 아픔이 오는 소리, 인류 문화를 위해 연구 노력하는 소리, 생명이 탄생하는 소리, 인류 문화를 위해 연구 봉사하는 소리, 자기 죄를 뉘우치고 아파하는 참회하는 소리, 하느님을 찾아 헤메는 애소어린 소리, 주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소리들이 우리 귀에는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같이 인간은 자연의 소리와 함께 세상의 소리와 또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경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일생동안 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우리 모두는 그 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다 같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죽음 없이는 삶도 있을 수 없고, 부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로마 시대였던 기원전 3세기 때, 카르타고 전쟁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범들을 처형하던 하나의 사형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는 수치스럽고 창피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이 십자가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이며, 바울로의 서간경들입니다. 신약은 예수께서 십자가 나무 위에서 육체적인 고난을 겪으신 것만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수난을 동반하는 수치와 인격의 손상에 대하여 더 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필립보 서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계획한 인간의 지혜는, 곧 하느님을 죽이려고 했던 결과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지혜는 바로 하느님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려는 것과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때문에 인간의 약성을 증명해 주셨고, 인간 육체의 무력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하느님의 승리를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음은 말한 나위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서간에서 하느님께서는 채무 이행에 대한 여러 가지 달갑지 않는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 빚 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시고 말았다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 때문에 우리 죽음의 빚을 탕감해 주시고, 차용증서를 없애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상환해 드리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빚쟁이로서 대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대 희랍인들처럼, 믿기 전에 인식하려 하고, 이해되어야 믿으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인들이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교훈은 세상에 대한 개념과 현상뿐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은 미련한 바보들의 짓이라고 판단하여 조소와 경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단지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우직스러움을 터득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고 있는 우리 신자들뿐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인간의 약함이 곧, 하느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십자가에서 파악하게되는 것입니다.



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육체적인 인간의 요소로서는 분명히 약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강한 능력 때문에 다시 살아나신 것도 명백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2고린 13, 4)



사도 바울로는 십자가 때문에 그의 사상이 확고해 졌습니다. 이 이유는, 그가 예수의 십자가를 맹렬히 반대했고,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사건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바울로가 무엇 때문에 중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찬란한 하느님의 계시를 통하여, 그가 보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곧,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의 일이었습니다.(사도 9, 1이하참조)

하느님께서는 이미 바울로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당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은총으로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로 인해서, 그가 주님을 위해 확고한 신념이 생겼고, 자신의 결단으로 따를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가르침과 구원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십자가 소리를 사랑하고 따를 결심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생명으로서 일치할 수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아끼고, 거룩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부르짖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이고 전 인류적인 화해는, 바로 이 십자가의 피와 죽으심에 의한 공로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 십자가를 질 줄 알고 따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과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마음이 겸손하며,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지 않은 사람은 결코 예수가 지신 십자가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8, 34)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골고타 산으로 오르심과 같이, 모든 크리스천들은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선택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와 생명으로서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도 나에게 대하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갈라 6, 14)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질 수 있는 크리스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은, 인류를 위한 사랑 그 자체였으며, 하느님과 화해 시켜주기 위한 거룩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심판으로 인해서, 세상은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하느님의 강함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에 물들고 세속화하며, 하느님을 멀리하고 그리스도 교회를 떠나는 길은, 또다시 그리스도를 우리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의 회개와 통회와 보속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지는 결과가 되며, 새 은총의 샘물을 받아 마시는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요한 4, 1-42).



오른쪽 도둑과 같이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천국에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상은, 크리스천들의 새 삶과, 새 생명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십자가의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주님 안에 속해 잇는 믿음의 가족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의 정욕과 인간의 욕망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에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각오를 가지게 될 때, 참으로 의화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세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생 그리스도가 지시고 가신 십자가를 사랑으로 나누어지도록 해야 하며,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소리는 주님의 생명이 싹트는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소리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초대의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소리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소리는 끝없는 주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승리의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소리는 곧 하느님의 소리이며, 영원한 구원에로 이르게 하는 희망의 소리입니다. 감사합니다.











13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예수의 거룩한 변모

표창준 신부



광복절은 우리 나라의 4대 국경일 중의 하나로서 우리 나라가 일본의 치하에서 자유를 빼앗겨 쓰라린 억압을 받으며 살다가 해방된 것을 온 국민이 되새기며 경축하는 뜻깊고 기쁜 날입니다. 당시 일제의 압제하에서 자유를 빼앗긴 설움을 겪은 어른들은 해방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실제로 억압받다가 거기서 풀려난 해방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뼈저린 체험이 없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나라 잃고 자유 빼앗긴 설움이 얼마나 치욕적인 생활이지 얘기해 줌으로써 해방된 자유의 생활과 국가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런 해방절이 있었습니다. 강대국 에집트 나라 땅에서 억압받고 살다가 홍해를 건너 탈출해서 해방된 그 날을 기념하는 해방절 축제, 그들의 말로 빠스카 축제가 있었습니다. 강대국 에집트 나라 땅에서 억압받고 살다가 홍해를 건너 탈출해서 해방된 그 날을 기념하는 해방절 축제, 그들의 말로 빠스카 축제가 있었습니다.



빠스카 축제날이 다가오면 그 나라가 수도인 예루살렘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붐비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로 모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축제날엔 한 가정의 가장은 희생 제물로 바칠 양을 한 마리 사서 성전에서 바치게 되는데 성전 마당에서 어린양들을 잡아서 그 피는 제관들이 제단에 붓고 고기는 가장이 집으로 가지고 와서 가족들과 함께 구워 먹게 됩니다. 에집트에서의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기억하기 위하여 쓴 나물과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주신 일을 생각하기 위하여 누룩이 안든 빵을 같이 먹었습니다.



빠스카 만찬 중에 맏아들이 “이런 의식을 왜 합니까?” 학 묻게 되면, 아버지가 그 뜻을 설명해 주게 됩니다. “야훼께서 이집트 치하 쓰라린 종살이에서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내시어 해방시켜 주신 그 위대한 일을 기념하고 감사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 줍니다. 잔을 돌리며 음식을 먹으면서 하느님의 위업들을 되새기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잔을 축복의 잔이라 하였고, 시편의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예식이 진행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 생활과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살게 해 주시는 분으로 야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분께 대대손손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분이 이끌어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고 살고 있습니까?



두봉 주교님께서 경향잡지(1976. 3월)에 이런 글을 쓰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에 열심한 한 처녀가 있었다. 어느 모로 보든지 모범적이었다. 기도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하고 본당 일에 꾸준히 하고 본당 일에 늘 적극적이었다. 성가 연습에도 빠지지 않았고, 아동 교리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다. 다른 신자들은 그의 신덕이 부럽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결혼 문제가 생겼다. 상대자가 외인이어서 그런지 열심한 그 처녀의 마음은 변했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이다. 신앙을 잊어 버렸다. 주위 신자들이 찾아주고 권면해도 소용이 없었다. 관면도 청하지 않고 예식장에서 결혼을 했으며 냉담 상태이다. 갑자기 신앙 생활을 떠나는 이런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본당 신부님들한테서도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들었다. 예외가 아닐 정도이다. 이런 신자의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인지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깊이가 없다. 껍질뿐이지 속마음은 신자가 아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많은 처녀들이 그렇거니와 일반 신자들은 믿음의 깊이가 있다고 보아야 하겠는가? 이것 역시 의문이다. 일상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신자들은 비신자들과의 차이가 있는가를 몇 해 동안 여러 방면에 걸쳐 조사를 해본 바가 있다. 불행히도 그 결과는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개인적으로는 신앙 생활을 한다지만 가정 생활,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는데는 비신자들과 두드러지게 다른바가 없다. ․․․․․․․․ 금전문제, 결혼문제, 출세문제 등으로 긴장하게 될 때에 깊은 잠재의식에서 흘러나오는 반응은 신자다운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먹고사는 문제에 쫓기거나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골치 아픈 문제를 불러일으킬 때 하느님을 신뢰하는 자세라든가 형제를 위해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정신을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말기가 일쑤인 것이 우리들 각자의 모습이 아닌지요?



참으로 서글퍼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 분의 뜻인 정의와 진실, 양심이 옳고 힘있는 것이라 믿겠다고 나선 신앙인이면서도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칠 때면 하느님과 진리에 대한 신뢰는 마음과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은 우리 모두의 서글픔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생활 현실의 거센 풍파와 자신의 이해 관계, 사업문제, 결혼, 친구관계, 체면에 상관될 때 하느님과 그 분께 대한 신뢰는 뒤고 밀려나야하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며 그대로 묻혀지고 잊혀져도 좋은 것입니까?



하느님은 이 땅의 하느님이요, 우리 생활과 역사 속에 살아 계신 분이 아닙니까? 천국만의 하느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쓰라린 고역을 치를 때 모른 체 하지 않으시고 그 분이 큰 자비로운 마음을 발휘하시어 크나큰 권능으로써 종살이에서 빼내어, 우리가 일제하의 고생에서 해방되었듯, 해방시키지 않았습니까?



그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가르침과 그 분의 말씀만을 들은 것이 아니었고, 야훼 하느님께서 그들을 실제로 해방되게 손써 주셨음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걸 해마다 되새기며 그 분의 사랑과 권능을 찬양하고 감사하지 위하여 천 몇 년간 빠스카 축제를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고생하던 죽음의 땅에서 하느님께 인도되어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그 은혜로운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생활과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일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40년간 광야의 거친 환경을 유랑하는 동안 시련을 겪고 단련되어 가면서 참으로 복된 삶으로 들어가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오랜 세월 그들이 체험한 그 야훼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그 분의 사랑의 말씀과 손길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인도되어 가면서 중요하고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비참해지는 노예 상태는 에집트 땅에서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가 곧 노예 상태요, 이웃을 천대하고 사랑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하는 상태가 곧 그들이 비참과 죽음의 골짜기에 빠져있게 하는 노예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랍니다.

사실 그들은 이집트를 빠져 나와 해방된 것을 기뻐했지만 진정한 해방에 이르려면 그들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노예 정신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일치되어야 자유로운 해방된 처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재물, 권력, 우상을 섬기고 자기 안에서 안전을 찾는 낡은 습관을 벗어나서, 즉 자기를 떠나서 하느님께 신뢰하는 것만이 약속의 복된 땅으로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생각지 않고 자기 이득만을 찾으며 자기 안에 안주하려는 유혹이 그들을 해방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라는 것을 그들은 광야 40년 방랑 생활에서 깨닫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언제나 새삼 다시, 에집트에서 그들을 하느님이 이끌어 주셨듯이 자기 안에 안주하려는 상태, 참된 해방과 자유와 기쁨이 없는 비참과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인도해주시는 하느님의 운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안에 안일하게 안주하려는 유혹과 투쟁하는 기나긴 시련을 거치는 광야 생활을 거치면서 약속된 땅으로 전진합니다 자기 중심에서 떠나서 전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는 여행을 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 누구나가 그러기 쉬운 남을 생각해주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내 생각, 판단, 이익을 앞세워 남을 용서하지 않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해 사랑으로 나아가는 생활의 여행인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이웃을 마음으로 생각해 주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매이는 것이요, 자기 중심적인 닫혀진 상태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과 사랑으로 일치되어 계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예 상태와 해방된 상태의 경계선은 지도상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간 홍해였다면 사람의 생활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고... 좀더 구체적인 경우를 들어 좁혀서 말하면, 주의 기도에 나오 있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이 말은 형제를 용서하는 것, 즉 형제에게 사랑으로 다가감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는 길이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을 스스로 떠나지 않고 다시 그 분에게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랑을 이웃을 용서하는 일, 이웃의 허물을 참아주고 이웃의 고통을 같이 나누는 것은, 우리가 간단히 건널 수 있는 개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그 분의 위대한 사랑의 손길에 의해 인도됨으로서만 이스라엘처럼 건널 수 있는 홍해입니다. 우리 자신의 소견, 재주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홍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착하고 도량이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고, 그분의 크나큰 손길, 그분의 운동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용서와 사랑에 나아가도록 홍해를 건너게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운 이웃을 용서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은 어떤 사상과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 우리 가정, 직장, 사회, 이 세상의 현실 문제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와 같이 한시도 떠날 수 없는 일상 생활의 일이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귀찮은 짐처럼 여겨져 부모로서의 존경과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밤에 잠이 안 올 것입니다. 못살 지경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약자라고 해서 기본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는 인간으로 사는 게 아닐 것입니다. 권력있는 자라고 해서 이웃이야 천대받거나 말거나 고통을 겪건 말건 자기 편리만을 생각한다면 이 땅이 바로 살수 없는 노예 상태가 아닙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 몇 년 동안 오랜 세월 해마다 빠스카 축제를 지내면서 자기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하느님께 감사드렸고 새로운 해방자인 구세주가 오실 것을 기대해왔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을 실제로 이루어 주시며 복되게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알고 신뢰해왔습니다. 이 땅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하늘에만 계시는 하느님, 마음속에서만 찾는 하느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그 하느님은 사람이 되시어 그분이 여러 차례 약속해 주신대로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대로 그 분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불행과 죄와 죽음의 처지에서 해방되도록 이끌어 주시어 생명으로 건너가게 해 주신 분이요, 그 분이 자신이 우리들과 생활을 같이 하시며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건너가신 새로운 빠스카 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도록 인도해 주셨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결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이 땅에 가져오심으로써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만으로서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 땅에서, 우리들 가운데에서 그분이 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 분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앞을 가심으로써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처지의 사람을 절대적으로 소중히 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분은 말씀과 행동으로 명백히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모습을 지녔고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임을 뚜렷이 밝히셨고, 그러기에 재물, 출세, 지식, 똑똑함, 건강, 결점, 불치병, 죄가 사람 자신보다 더 먼저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약자, 천대받는 나병 환자, 창녀, 부정 축재자들을 멀리 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 언제나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급기야 그분은 죄 없는 자기를 반대하고 해치는 삶들의 악행의 결과를 사랑의 십자가로 짊어지시고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랑으로, 용서로 대하셨으니,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어떤 인간에게든지 사랑으로 그들과 일치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그렇게 실제로 우리 현실에서 우리 인간에게 자비와 용서의 행동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나요, 안심하시오.”(마르 6, 50)



이렇듯 인간을 절대적으로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서 일치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결국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심으로써 아버지와 사랑으로 일치되신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셨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영원히 일치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하신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의 일치에로 나아간 것이야말로 그분과 우리 모두가 생명으로 건너간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죽음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부활하신 분이 되심으로써 드러났습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로써, 그분이 가신 길이 인간의 모든 허약과 악과 죽음을 결정적으로 극복하고 사랑과 평화와 생명으로 건너가게 한 인류 구원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리스도야말로 그분과 우리 모두가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게 하신 새로운 빠스카의 어린양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해방으로 건너가는 이 새로운 빠스카를 그분은 유대 빠스카 축제날 만찬식상에서 미리 앞당겨 거행하고 기념하셨습니다. 빠스카 만찬 식사 중에 그분은 빵과 포도주 잔을 들어,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 생명을 바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내다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자신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몸이니라. 너희는 모두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



이 예수님의 명을 따라, 우리는 미사 때마다 빠스카 잔치를 거행하며 참여하는 바와 같이 그분이 가신 길, 실제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 생명과 해방으로 건너가는 빠스카에 함께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음을 믿는 것이지, 현실 생활에 부딪치면 무색해지고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어떤 이론만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함께 생명과 해방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그분과 함께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랑의 길을 끝까지 가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처럼 어떤 어려움의 십자가라도 사랑으로 지고 형제들과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갖가지 시련 중에서도 인내합시다. 형제들의 부족을 같이 짊어집시다. 서로간의 부족, 나약함, 가난, 허물을 같이 나눌 때, 내 마음이 다른 형제들이 마음에 가 있게 되고 형제들에게 일치될 수 있겠으며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생명과 해방으로 건너감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에로 우리 모두는 불리웠고, 그분에 의해 인도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 아멘 -











14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예수의 거룩한 변모

안충석 신부



오늘 우리는 40일 봉재 때인 사순절 교회전례를 통하여 걸어가는 도중 우리 앞을 가로막는 네 가지 산을 넘어야만 합니다. 즉 지난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높은 산꼭대기에서 유혹을 받으시던 파란치아 산과 오늘 복음에서 본 영광의 현성용을 하신 타볼산과 예수 고난 주일에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구하신 올리브 동산과 십자가의 승리인 갈바리아산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치 우리 인생살이의 축소판 같은 사순절 동안 이런 험난한 고통의 첩첩산중을 넘어야 할 우리 인생행로에 있어서 이렇듯이 영광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이상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현성용은 바로 그 수고 수난 때문에 그 고통을 준비하기 위하여 앞뒤로 고통의 험난한 산을 두고, 그 가운데 황홀하리 만큼 행복한 사랑을 잠깐 엿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기 자신은 장차 얼마만큼 큰 고통을 받게 되실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넘치는 그분의 마음은 지금까지 고생해 온 또 앞으로 당할 고통 때문에 제자들이 고통에 짓눌리고 침체 내지 울적하게 될까봐 천당의 행복인 지복직관을 미리 잠깐 앞당겨서 맛보며 엿보게 하신 것이 바로 오늘 예수의 현성용이올시다.



예수의 현성용을 본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 첫 치명자가 되었으며, 베드로는 용감무쌍하게도 바로 주의 십자가에 매달려서 치명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일생 동안 무수한 고통을 받으신 그야말로 산 증거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는 성총의 타볼산을 올라가 평화와 사랑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나날이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가지가지 온갖 고통을 거룩하게 하며 보람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구세주께서는 몸소 그 고통의 바다 속으로 뛰어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살이는 고통의 연속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만큼 고통을 받은 자가 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는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에게 나도 너처럼 고통을 받고도 이기었으니 너도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장 힘있게 체험자로서 말씀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세상 생활목표는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고통 중에 있는 이에게 극복하는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입니다.



요사이 사순절 매 금요일마다 우리는 성로신공을 바치며 제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주님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 교회는 저 십자가 사형틀에서 임종하신 주의 시체를 매장하고 굳게 봉인하는 저 14처로 완전히 아주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인 제15처까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15처는 여러분 나날의 일상생활이 달린 것이니 성당 벽에는 걸려 있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로 사도께서 외치셨듯이 주의 부활과 승천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 데도 쓸데가 없고 헛된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께서 나날이 당하는 일상생활의 고통들이 부활과 승천으로 가는 길인 십자가의 길이 아닐진대 이 무슨 엄청난 생지옥의 어처구니없는 삶입니까? 이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서 그 누가 고통을 좋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좋아서 일부러 고통을 얻어 가지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음성경을 보면 오히려 주께서는 무수한 질병을 낫게 하시고 온갖 인생고를 덜어 주시고 가볍게 해 주신면서 이 세상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시면서도 당신 자신은 그렇듯이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다니 도대체 이 어인 일입니까? 그 까닭은 우리가 이미 저지른 죄악의 벌을 누가 받아도 받아야만 하고 보속하며 기워 갚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보속할 고통을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보속할 고통을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혼자 도맡아서 지고 가시는 까닭입니다. 가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나는 왜 고통을 받나 하고 묻고 싶을 때가 생깁니다. 그럴 때 죄와 벌에 대한 보속으로 또는 내 죄악을 보속할 것이 없어도 깨끗한 나를 그리스도처럼 이용하시어 죄인들의 보속을 대신 시키시는 크나큰 사랑 속에서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누구에게나 다음과 같이 힘있게 반문하실 수 있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런 괴로움을 받고 그 후에 과연 그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주께서는 힘있게 반문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세상이 뒤바뀌어서 고생을 밥먹듯이 아무리 해도 생전 낙이 올 것 같지도 않는 세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무슨 힘으로 우리는 이 죽을 것만 같은 고생을 하며 대체 어떻게 견디어내란 말입니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사도를 데리고 가신 구세주께서는 고통 당하는 우리 모든 이를 데리고 가십니다. 마치 제자들처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 줄을 몰라도 좋습니다. 비로소 현성용을 보고 깨닫듯이 우리도 우리 삶의 목적지까지 도달할 때 이 세상 고통스러운 나그네살이를 전부 완전히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죄수의 곡괭이 질은 체념 가운데 있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금광에서 채광하는 광부의 곡괭이 질은 그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삶의 희망이나 일확천금의 기대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이 똑같이 내리치는 곡괭이 질이건만 이런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곡괭이 질, 즉 나는 왜 이런 일만 죽도록 해야만 하나? 나는 이다지도 따분한 직장에서 왜 어째서 도시 헤어날 길이 없단 말인가?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나날이 삶의 목적과 보람을 잃어갈 때 무의미한 고통 즉 노예가 당하는 고통처럼 하등의 효과와 끝이 없는 고통이며, 또한 가지는 끝이 있는 고통 즉 사랑하면서 또는 일하면서 당하는 보람있는 저 십자가의 고통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 깊이 생각해 볼 중대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가지 고통 중에 우리 교우들은 과연 어느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심각한 점이올시다.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태산 같은 근심걱정에 싸여서 고통에 짓눌려 죽을 것같이 눈물 속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주 대전에 애소하는 그 내용은 과연 저 십자가상에서 사랑하는 기쁨의 씨앗이란 말인가 아니면 또 다른 눈물과 끝없는 고통의 씨앗인가를 솔직히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비올 때 신는 장화 같은 나막신을 파는 큰아들과, 날 들 때 신는 짚신 장사를 하는 작은아들을 둔 한 노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파는 날이면 날마다 근심 걱정이 한시도 떠날 날이 없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신세 한탄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좋으면 나막신 장수인 큰아들 녀석 나막신이 안 팔릴 걱정, 날이 질면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 녀석의 짚신이 안 팔릴 걱정, 어느 한 날 편한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옆에서 이를 보다 못한 노파의 영감이 “아! 걱정도 팔자라더니, 그래 당신도 사서 걱정을 하고 계시우, 날이 좋으면 작은아들의 짚신 장사가 잘되니 좋고, 날이 궂으면 큰아들 나막신이 잘 팔리니 좋고, 그저 좋기만 한 것을 가지고 공연히 사서 걱정이우.” 하며 면박을 주더랍니다. 그 말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노파는 마음을 고쳐먹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았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교우들께서도 쓸 데 없는 걱정을 사서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주께서 일러주신 대로 합리적 낙관주의로 교우생활을 해야지 언제나 빽빽 울기만 하는 어린애들을 좋아할 부모네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런 교우를 좋아하실리 만무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사고방식 하나 생활태도 하나 잘못 알기 때문에 우리는 허구한 날 눈물 속에서 세상을 저주하며 비관하며 바라보아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버림받은 양이 아니라 목자한테 인도되어 외지고 높은 산으로 현성용을 보러 주를 따라 나선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이 세상사는 것에만 정신 없이 파묻혀 얽매여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를 찾아 성당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외지고 조용한 것입니다. 기실 이 세상이란 무대 위에는 행복으로 시작해서 행복으로 끝나는 것, 단지 이 두 가지만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바울로 사도께서는 기적으로 제 3천까지 천당을 갔다 오셔서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고통은 우리가 장차 받을 행복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며, 마치 없는 것과도 같다고 강조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눈 깜빡할 사이 나그네살이인 잠깐 동안 고생을 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끝나는 삶을 택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아무리 골백번 생각해 보아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순수한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상태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뜨겁게 미칠 듯이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가장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서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상태 즉, 순수한 사랑의 경지나 행복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잠깐 사이인 한 순간으로 밖에 선사되지 않는 사실이올시다. 우리의 고독도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순수한 사랑의 순간을 계속해서 지속할 수 없는 데서 생긴다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주의 현성용에 압도되어서 너무나도 황홀한 행복감에 도취해서 그가 곧잘 저지르는 잘못을 그만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는 구원과 행복이 아무런 고통을 당하지도 않고 손 쉬운 것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현성용처럼 그저 좋기만 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주여, 여기 있기가 좋으니 여기다 천막 셋을 칩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신덕이 있으면 이 세상이 살기가 좋은 것입니다.



주께서 항상 계신 한 십자가의 승리는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베드로의 잘못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즉 풀어 말씀드린다면 이는 고통받는 아들이니 그가 마땅히 고통받아야 한다고 말하거든 너희는 명령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 당한다는 이 말씀으로써 행복의 확실한 약속을 받은 셈입니다. 기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안은 채 그대로 살수 있다는 것은 도시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저 단지 죽지 못해서 이 세상을 산대서야 우리 일상생활은 이 무슨 엄청나고 귀찮기 만한 무거운 짐이란 말입니까? 물론 어떤 때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의 현성용 같은 행복한 때도 있을 것입니다. 첫 영성체 때나, 넘치는 사랑을 주고받는 흐뭇한 사랑의 기쁨을 맛 볼 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눈 깜빡할 사이인 한 순간으로 밖에는 우리에게 선사되지 않고 그 마음은 고통의 연속이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참을 수 있다는 것은 그와 같은 행복한 순간으로 얻은 힘과는 앞으로 그런 완벽하고 행복한 순간을 믿고 바라는데서 우리는 저 십자가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산모가 극심한 사고 끝에 한 인간을 세상에 낳았다는 한 순간의 기쁨과 행복 때문에 지금까지의 산고를수 없고, 평범한 생활로 들어가며 각박한 현실계로 내려와야 합니다.

기실, 이 미사 중 거양성체 때 떡의 형상으로 현성하신 주를 뵈옵고, 사제는 미사 끝에 미사가 끝났고 하지만 사실 본래의 뜻은 “이제부터 여러분의 일상생활이 미사입니다.”하는 뜻입니다.



주께서는 영광중에 부활하시기 전에 수고 수난과 죽음으로 가는 이 각박한 현실생활로 내려 오셔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나날의 고통을 통해서 주를 따라 가야지만 우리 자신이 부활하는 영광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성용으로 이 세상 살아가는데 당하는 온갖 고통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랑의 기쁨과 용기, 그리고 힘과 소망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합시다. 어떠한 고통 가운데서라도 명랑하고 밝은 교우 생활을 할 수 있는 그 까닭을 우리는 예수님의 현성용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바울로 사도처럼 저는 소리 높이 외칩니다. “주 안에서 항사 즐거워합시다. 거듭 말하노니 주 안에서 항상 즐거워합시다.” 아멘.











15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포도주를 맹물로 대신하는 시대

최영철 신부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의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미를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오늘 복음에서 뚜렷이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꾸준히 예고하고 있었던 메시아임을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엘리야와 모세의 등장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인물만큼이나 많이 알려진 인물을 세계 역사상 어디에서도 찾아 블 수 없을 정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미만큼 잘 모르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막상 그분의 존재의미를 현실적 차원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심오한 신학성이 요구되기도 한다. 마르코 사가의 의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적인 존재의미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엘리야와 모세의 등장은 그 의도에 적합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에서 위대한 인물들로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메시아의 등장을 준비하는 역사 속에서의 바로 그 장본인이라는 것을 깨우치고자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마르코사가는 예수님의 부활의 예고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예수님의 변모가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의 어두운 면, 그분의 수난이라든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해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현실적 불이익의 의미

 이것을 좀더 현실적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복음적 삶을 위해서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불이익에 대한 우리의 현실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회의스러운 우리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읽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미는 끊임없이 예고되었던 구세주이심을 부정할 수 없는 분으로서,

또한 온갖 고통을 받음으로써 죽지 않으면 안 되는 분, 그러나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그 모든 현실적인 것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그분의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변모사건에서 말하고 있으면서, 우리의 복음적 삶의 의미를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복음적 삶이란, 우리 하느님 백성이 살아야 하는 삶이라면, 그 삶을 살므로써 갖는 그 삶의 의미는 뚜렷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어떤 단편 문학작품을 놓고, 오늘을 사는 복음적 삶의 내용의 방향을 볼 수 있었다. 그 줄거리는 어느 조그마한 마을의 선생님이 학생들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가르치어 졸업시키게 된다. 학생들은 고마우신 선생님에게 그 은혜의 보답으로 자기들 집에서 경작하는 포도 중 가장 좋은 포도를 따서 직접 포도주를 만들어 졸업식 날 그 선생님에게 한잔씩 바치기로 했다. 졸업식 날 학생들은 약속대로 자기들이 만든 포도주를 한잔씩 항아리에 부으면서 떠나갔다.



텅 빈 졸업식장에서 홀로 남은, 선생님은 제자들이 바친 포도주 한잔을 항아리에서 떠서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마셨다. 그런데 그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그냥 물이었다. 조금도 포도주 맛이 없는 물맛이었다. 선생님은 놀랐다. 그리고 어떤 생각에 미치자, 잔을 떨어뜨리고 털컥 주저앉아 넋을 잃고 만다. 즉 학생들 하나 하나가 포도주 만들기가 귀찮아젔는데, 공교롭게도 모두가 나 하나만 그냥 물 한잔을 항아리에 부어도 표가 안나겠지라고 생각하고 그랬던 것이다. 참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활의 삶으로 비약

지금의 우리 사회 공동체의 내용이 이러한 생각으로 팽배해 있지 않나 한다. 복음적 삶, 그것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하나만은 진짜 좋은 포도주를 붓겠다는 삶의 태도가 그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삶으로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부활의 삶으로의 비약인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사건을 오늘 주일 복음적 메시지로 등장시킨 것은 현실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복음적 삶의 현주소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삶의 공동체에 있어서 나 하나의 삶의 내용은 결코 작은 것일 수 없다는 사명의식이 복음적 삶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16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주예수 우리의 희망

곽종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을 예고하신 후, 믿음이 약한 제자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보다 나 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우리는 삶 안에서 희망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다. 모두 다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인생이다. 그것은 수많은 장애물들이 우리의 앞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고통과 시련만큼 사람의 희망을 가로막는 것도 없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겪으셔야 되는 수난에 대 한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 분명 절망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늘의 사건을 통 하여 당신께서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임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의 모습은 그것을 잘 증명해준다. 믿음이 약한 제자들은 실제로 ꡐ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ꡑ(요한 20,19)고 전하고 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신앙인인 우리의 삶과도 같은 것이다. ꡒ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ꡓ(로마 8, 18)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신앙 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따르는 데 수반되는 고통은 영광이라는 바다에 이르는 가느다란 물줄기인 것이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시며, 모든 사람의 희망이다. 오늘 미사의 제 1독 서, 제 2독서, 그리고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심을 확신시켜주고 있다. 그분 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 다.



ꡐ주를 따르리라ꡑ라는 성가를 보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ꡐ주 예수 우리의 희망, 우리의 행복, 내 일생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리, 생명의 길 밝혀 주시니, 주님을 따르리, 십자가 길로 주님을 현양하리, 사랑의 길로 …ꡑ











17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봉헌은 영광의 축복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22,1-2.9a.10-13.15-18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제2독서 로마 8,31b-3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십니다)

복 음 마르 9,2-10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느님께선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하게 봉헌하셨습니다.

육화(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자체가 당신의 전 존재를 내놓으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써 '어린 양'처럼 우리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안 하셔도 될 분이 종이나 머슴처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으며 이것이 또 그분의 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선 우리도 당신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쳐 주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셨듯이 우리도 당신만을 선택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다 내주셨듯이 우리도 그분께 다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요 또 한 그분과 온전한 일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의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그분께 바치는 위대한 신앙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기 서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이사악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각을 떠서 제단 위에 태워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명령은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눈에서 피눈물이 나 는 참혹한 일이었지만 그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번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불어나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것이 또 하느님의 계산이었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론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제로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십만도 되고 백만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인간의 계산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산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복음에서는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시고 그리고 성부께로부터 영광의 은혜를 미리 체험하시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루가복음(9,28~36 참조)에 보면 그때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장차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셨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수난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에게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산에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미리 입을 수 있었던 것 은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용기있게 짊어지겠다는 그 결심과 각오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그 믿음은 그 자체가 축복이고 천당이며 영광이고 승리입니다. 영광은 실로 그 희생이 따른 봉헌에 있습니다.



어떤 집에 장가든 아들이 넷이나 있는데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 시는 일로 해서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서로 모실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딸 둘이 남았는데 큰딸도 자기는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시집 안 간 막내딸이 그랬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시집을 못 가더라도 어 머니를 모시고 살겠어요." 결국 막내딸이 어머니를 모셨으며 혼처가 나왔을 때도 어머니를 모시는 조건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아들이 넷이나 있지만 딸자식 하나만 못하다고. 그 말은 맞았습니다. 그리고 막내딸은 아주 복받았습니다. 효심에 감복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작은 가게를 하나 차려 줬는데 그 것이 나중엔 큰 수퍼마켓이 되어 남편의 사업만큼이나 커져서 가정의 화목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형제들 중에 가장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늘이 효녀를 돌봐 준다고.



사순절의 존재란 부활이라는 대축제를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시련이나 십자가 등도 바로 우리의 영광이나 축복을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신앙의 길에서 한참이나 멀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 희생과 축복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하느님께 기쁨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죽음을 봉헌하면 진정한 삶이 오고 슬픔이나 아픔을 봉헌하면 참된 기쁨이 돌아옵니다. 하나를 봉헌하면 열이나 백으로 되돌아오고 가진 것을 바치면 또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타산이 안 맞는 얘기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순 시기의 은혜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해서 봉헌하고 희생하여 바치느냐에 그 은혜가 달려 있습니다. 거 기에 부활로 이어지는 영광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18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민병섭 신부



  어떤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먹고 말썽만 부려 어머니의 속을 상하게 하였다. 어머니가 매일같이 하는 간곡한 부탁도 이제는 중의 공염불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을 올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어머니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한 방침을 생각해 내었다. 어머니는 못 한 근과 망치를 샀다. 그 못을 아들이 잘못할 때마다 방에서 잘 내다보이는 기둥에 박게 하였다.



  처음에 이것을 시작하는 것을 본 아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더 잘못을 하였다. 궂은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방에 벌러덩 누워 있던 아들이 못이 까맣게 박힌 기둥을 보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못! 이것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증거들이 아닌가? 그는 지난날을 더듬어 본다. 가지가지 잘못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난다. 그는 벌떡 일어나 옆방에서 바느질하고 있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죽을죄를 지은 불효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얼마나 기쁜 일인가! 평생 소원이던 아들의 회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를 얼싸 안았다. “착한 내 아들아. 어미는 이제 죽어도 원이 없겠다. 이제부터 너는 착한 일 하는 대로 저 못을 하나씩 빼어라."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못은 다 뽑혔다. 그러나 남아 있는 흔적을 본 그 아들은 앞으로의 선행으로 그 자리를 하나씩 메워 버리리라고 결심했다. 과연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아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위의 불효한 아들과 같은 우리를 위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거듭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가장 먼저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 만남으로 우리의 죄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며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 단절된 생활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성당에도 빠지게 되고 결국 스스로 자신을 구원받을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어 냉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죄 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 주셨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받게 될 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당신 아드님의 변모로써 미리 보여 주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인정하는 용기이다. 새로이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안일하게 지내온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새로운 도전으로서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사순 시기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수난하신 그리고 참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묵상하고 우리도 그런 삶을 선택하는 때이며, 미래의 아름다운 삶을 미리 바라보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 때이다.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시기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님께 박아 드린 못을 빼드리고, 그 흔적을 없애야 할 때이다. 그리고 새로운 용기로 그분의 손과 발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마르 9,2-10

  오늘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변모에 관한 이야기는 그분과 함께 매일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초대된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 예수님의 현재와 미래의 영광을 예시하여 주는 빛과도 같은 것이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부활의 영광과 미래에 실현될 최종적인 재림의 영광을 암시하고 있다. 당신께서 끔찍스런 죽음을 당하시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후에(8,31), 사랑받는 세 제자들은 고통 너머 있는 종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미래에 대한 체험이지만, 이 영광스러운 변모는 또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으로 예수님을 과거와 연결시켜 주고 있다.



  한때 시나이 산에서 주 하느님을 만났고, 그토록 주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했던 모세는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산 위에서 주님을 만났으나 신비스런 미풍 속에서 그분의 현존을 감지했을 뿐이었던 엘리야도 이제 예수님과 거리낌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제시되고 있는 구약성서의 위대한 두 인물을 통해 하느님 구원 계획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역사의 여러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께 이른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마지막 시간을 위해 결정적으로 보내신 분이시다.



  그분은 새로운 엘리야도, 새로운 모세도 아니시다. 그분은 그보다 더 위대하신 분으로, 모세나 엘리야는 그 선구자 역할을 했을 뿐이다. 동시에 유다인들에게서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며,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구약 전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그 구약 전체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마르코는 이어 베드로의 말과 구름 및 성부의 음성으로써 다시 우리를 현재로 데려오고 있다. 베드로는 이 영광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고난이 앞서 오지 않는 종말의 영광을 원하는 제자들의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님 안에서 느끼는 평화로움에 영원히 머물러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들려 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7절) 하는 소리는 우리 자신의 신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알아들으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갈바리아 산상에서 예수님께 일어날 일은 그의 신성을 거스르는 고발이나 반대가 아니라 그가 하느님에게서 나옴에 대한 더 명백한 증명이다. 동시에 주님의 변모는 주님의 고통, 기쁨, 능욕, 영광을 드러내는 신비일 뿐만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 인생의 신비를 드러내 주는 빛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슈나켄부르그는 마르코 복음에 대한 자신의 주석서에서 예수님의 변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변모된 예수님께 관심을 돌리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께 순종함으로써만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



   이제는 우리도 세상에 나아갈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천상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받을 미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그분과 같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만 얻어지는 영광이다. 우리가 안주하고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주님을 위한 모험과 고통의 길을 걸을 때만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으며 영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 바로 사순 시기의 참된 의미이다.



제1독서/창세 22,1-2.9ㄱ.10-13.15-18

  오늘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이사악의 희생은 생명을 바치라는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많은 자손을 가지게 되리라는 약속은 바로 이사악을 통해 실현될 약속이었기(15,1-6 참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그의 순종 정신과 그의 믿음을 시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또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자세를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이야기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어린이를 죽여 제물로 바쳤던 잔혹한 관습(열왕 하 16,3; 21,6 참조)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존중하시며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신이 아니라 살리시는 신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순종의 최고 전형을 보여 주기 위해 기술되었으며, 동시에 당시의 사람들에게 맏아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차지라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포기와 희생 자체에 의미를 주는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바로 사랑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동시에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의 독서는 사순 시기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곧 사순 시기는 우리에게 사순 시기 그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스카의 신비에 이끌어 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순 시기가 참으로 살아 있고 생기 있는 사순 시기가 되기 위해 필요한 사랑이다. 하느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생명까지도 포함하여,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참되게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제2독서/로마 8,31ㄴ-34

  오늘의 제2독서는 제1독서에서 이사악을 통하여 예표되었던 그 사건의 실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을 보여 준다면, 제2독서에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입증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시어 결정적으로 인간들과 결합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충실하신 분이 되셨다.



  이러한 사실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다."라는 외침으로 드러내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이 외침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라는 사실과 우리가 받은 부름에 대한 응답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 편이 되시는 하느님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고 불가능할 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다."라는 승리의 외침은 결코 이기적으로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인내 안에서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하느님 앞에 서기를 거역하는 악마에 대항하는 것에만 사용될 수 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34절에서 아주 놀라운 일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네 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곧 그분께서 돌아가셨다는 것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위해 중개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아마도 처음 세 가지는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문에 들어 있는 것일 것이며, 네 번째 것은 그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기쁨에 찬 외침을 하고 있다.











19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주님께서 모습을 바꾸시다

신은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어떤 산으로 가신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모습을 변화시키시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신다.

어떤 모습이었을까. 천상의 모습이었을까. 아무튼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모습, 하늘의 모습을 보고는 황홀경에 빠진다. 베드로는 감격에 겨워 이곳에 오래 있자고 제안한다.

옛날엔 이 사건을 현성용(顯聖容)이라 했다. 지금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선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그 놀람은 두려움의 놀람이 아니라 기적과 황홀감의 놀람이었다. 제자들은 천상의 환희를 느꼈던 것이다. 도대체 주님께

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오랫동안 사람들은 예수님의 변호된 모습을 근엄하고 화려한 모습, 천상의 빛으로 쌓인 모습, 그래서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모습으로 막연히 생각하여 왔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었겠는가. 편안한 모습, 아무나 바라볼 수있는 모습,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주시는 모습,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요구를 해도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모습, 창조주이시지만 연약한 사람으로 오신 모습, 그 모습

을 제자들은 처음으로 깨닫고 발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제자들은 확신을 갖고 산에서 내려온다. 그들은 평생동안 이 체험을 지을 수 없었다. 더구나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실 때, 그들은 이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이 초대교회의 박해와 유혹을 견디어내야 할 때, 실망과 의심 속에서도 신자들을 인도해야 할 때, 오늘의 사건이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변모이야기는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위로와 격려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겐 그분의 변모사건이 없는가. 신앙 안에서 실망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셨던 ‘나만이 알고 있는 어떤 사건'은 없는가. 오늘 우리는 묵상해 봐야 한다.

주님의 은총은 갑자기 온다, 생각지도 않은 때 온다. 그러므로 변모사건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은총이다.



복음의 제자들은 한 순간이지만 '영원한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그들은 그 체험으로 예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그들의 험난한 인생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우리도 우리에게 일어났던 ‘주님의 변모사건'을 통해 그분께 대한 확신을 굳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주님의 변모사건은 무엇인가. 내 인생에서 분명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분의 변모사건이다. 분명히 그분께서 개입하신 만남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분의 변모사건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변모 사건을 통해 간섭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애정을 갖고 계셨기에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어,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셨던 것과 같은 이치다. 주님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실 분이다. 그러니 이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가자.



복음의 제자들은 주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천상의 기쁨을 느꼈다. 우리는 그분을 보는 정도가 아니다. 영성체를 통해 일치하고 있다. 천상의 기쁨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자











20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배추를 거꾸로 심은 수도자

김영진 신부



 몇 해전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 나는 아버지가 위암 말기라서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자 귀국할 수 있도록, 교구의 주교께 청하였다. 아버지가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하고 같이, 한 일주일 정도 저 남쪽지방 여행을 한번 가면 어때. 난 대구나 부산, 광주나 목포 같은 데는 못 가봤어"라고 두 서너번 말씀하신 기억이 되살아났고, 신부가 된 후 장남이면서, 어린 동생들을 위하여 고생하신 아버지께 별 도움을 못 드리고 살았던 기억도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어 집에 계시던 어느 일요일, 미국에서 드린 전화를 한참 후에, 힘들고 고통스런 목소리로 받으시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성당 가셨다고 하시며 “신부, 너무 아파서 배 위에 얼음 주머니를 얹어 놓고 있어. 나 죽기 전에 신부를 볼 수 있을까?"라고 흐느끼실 때는, 후임 신부가 아직 도착하지 아니했더라도 “에라,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귀하지, 속 썩이는 교우들이 귀하냐"하면서 모든 것 내 팽개치고 귀국하고 싶었고, 하루종일 바닷가를 왔다갔다 하며 방황하기도 하였다.



후임을 청한 지 8개월이 지난 다음에 후임 신부가 왔다. 미국 교구의 주교님이 3개월만 합동 근무를 해달라고 하는 부탁은 힘들게 뿌리쳤으나, 10일 동안만이라도 해달라는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후임 신부와 함께 10일 동안 이곳저곳으로 인사를 다닌 후, 나는 즉시 비행기를 탔고,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아버지, 그리고 몇 개월간 병간호에 지친 어머니를 뵈올 수 있었다.

하룻밤을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다음날 아침 교구청에 갔더니, 교구청 신부들은 없고, 직원 한사람이 내일까지 정선본당 부임이라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겠지 하여, “공문 좀 보자"고 하니 보여 주었다. 나는 기쁘게 순명할 수가 없었다,



첫째로 미국에서 나오는 신부의 경우, 비행기표 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은데, 한국에서 이동하는 신부들과 같은 날짜에 이동하라는 공문을 보니 어처구니없었다.

둘째는 정선이, 아프신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며, 셋째는 나의 후임으로 온 신부와 나를 맞바꾼 인사는 그렇다 치고, 기왕에 그렇게 할 바엔 내가 그토록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길 원했는데 좀더 일찍 맞바꾸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원망에서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황당한 명령

신부가 된 후 순명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때 순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묵상하면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순명이 어려운 것이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순명과  믿음을 똑같이 거룩하고 숭고한 가치로 보셨나 보다.


그 유명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어느 날 당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여 찾아온 두명의 후보자들에게 제일 먼저, 믿음만큼 소중한 순명을 시험해 보셨다. 성인은 두 사람의 후보자들에게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을 터인데, 그 배추들을 가져다가 뿌리를 하늘 쪽으로 하여 옮겨 심으시오"하고 명령하셨다. 한사람은 말없이 그 배추를 들로 가지고 나가서 그대로 하였고, 한사람은 “하하하, 이 성자가 여기서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 정말 돌아버렸군"하며 비웃었다. 그리고 성인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교육도 좋지만, 그런 엉터리 원칙으로 교육을 시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명령에도 순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보고싶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새기고 배워야할 교훈은 순명이다. 완전한 믿음은 절대적인 순명을 요구한다, 또 절대적인 순명은 완전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순명은 항상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성서는 말해주고 있다. 때로는 어처구니없고, 납득할 수 없으며, 무모하기까지 한 순명을 하느님은 요구하신다.



완전한 믿음은 절대적 순명을 요구

 늙어서 겨우 하나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심정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져야 된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은 마리아의 마음은 얼마나 놀라웠고, 어처구니 없었을까? 밤새도록 허탕을 치고 돌아온 물 속에, 또 다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베드로에겐 얼마나 무모하게 느껴졌을까?

그러나 인간의 눈에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으며, 무모하게 비춰진 명령이지만, 그 명령에 순명함으로써 인간의 믿음은 검증되고, 열매 맺어진다. 믿음과 순명이란 언제나 커다란 시련과 아픔을 먹으면서 성숙하기 때문이다.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한마디 이유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순명은 얼마나 고뇌와 번민에 차 있었으며, 시련과 아픔을 겪었겠는가! 그와 반면 자식은 커녕 주어진 시간의 일부분과 지폐 몇 장을 봉헌하기도 힘들어하는 우리들의 마지못한 순명은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는가!

  하느님께 순명하기보다 돈에 순명하고, 사랑에 순명하기보다 분노에 순명하며, 정의에 순명하기보다 권력에 순명하고, 진실에 순명하기보다 부정과 거짓에 순명하는 것이 체질화된 듯한 우리 자신은 아닌가? 하느님도 나의 순명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나를 변화시키신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에 순명하고자, 끝까지 배추를 거꾸로 심었던 한 수도자의 순명 정신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음을 묵상해본다.











21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은 나에게 며칠 전에 어느 케이블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 다시 보게 된「포세이돈어드벤춰」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영화의 거의 끝 장면이었는데, 몇 명 되지도 않는 생존자들이 최후의 희망을 걸고 죽을 고비도 수 차례 넘기며, 그리고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 찾아간 곳은, 절망스럽게도 철판이 빈틈없이 덮여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 곳은 물이 아직 차 있지는 않았지만, 뒤집어진 배의 밑바닥으로서 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된 것이었다. 참으로 절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망연자실 절망하여 미친듯이 소리치며 천장의 철판을 두드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놀랍게도 가냘픈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으나 잠시 후에는 철판 밖에서 사람들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나에게는 이 순간, 그 누군가가 절망에 빠진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의 그들의 얼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갇혀있던 그 어두운 공간에 산소용접기로 절단되고 있는 철판 틈새로 날아 들어오는 산소용접의 튀는 불꽃과 그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살도 잊혀지지 않는다. 절망과 희망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장면이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장면도 사도들과 후기의 그리스도신자들에게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십자가를 지고 따르던」신앙의 길에서 절망적 상황에 빠지게 될 때, 그들에게 새롭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주던, 힘찬 한 줄기 빛살과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이 대목이 놓여 있는 문맥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오늘 복음의 대목은 그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와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장면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체험하기 전에,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神的인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높은 산」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알려져 왔는데, 오랜 성서적 전통에서 보아도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서, 계시와 기도의 장소이다(참조: 출애 24,1/ 2베드 1,17).

높은 산에서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고,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라는 마르코의 묘사는 출애 34,27-25에 나오는 모세의 빛나는 변모를 연상시킨다.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얼굴에 빛나는 그 “영광”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나타날 영광이 미리 빛난 것이었다. 이는 예수님이 비록 지금 고난과 치욕의 길을 가시지만, 그 길이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언서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엘리야가 율법서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모세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라는 말은 구약성서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을 뜻하며, 예수님이 앞으로 가시게 될 수난의 길이 구약성서의 계시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말해준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셨으면 합니다”라는 베드로의 요청에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광 속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행복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어했다.



그들의 마음에 드는 메시지는, 바로 그런 영광의 메시아에 관한 메시지이지, 많은 고통을 받고 죽어야하는 메시야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은총의 체험 후에 산 위에서 세상 아래로 내려와야 했다. 그들은 산 위에서 황홀한 체험에 취해 눌러 있어서는 안되었으며, 사람들이 수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뒤얽혀 살고 있는 세상 아래로 내려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스승 예수님을 뒤따라 가야했다.



산 아래의 외적 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과 마음은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짧은 순간(시간)이었지만,「예수님의 영광을 본」 눈과 마음을 갖고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오늘 복음의 말씀은 생의 여러 시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에 충실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한다. 정도의 차이가 크게 있겠지만,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신앙의 체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저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듯한 세상살이 한 가운데에서도 어느 순간, 어느 체험을 하면서 “아, 정말 주님께서 존재하시는구나! 그리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내 존재가 결국 영원한 주님의 사랑의 계획 속에 뿌리내리고 있구나!”하는 것을 깊이 확신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면, 이런 체험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체험은 어려운 세상살이 한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당신께 대한 믿음 속에 굳세게 살아가도록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큰 선물과 같다.











22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마르 9,2-10)을 일컬어 ‘변모사화’, ‘산꼭대기에서의 체험’이라 합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오르셨을 때, 예수의 모습이 변하고 옷은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습니다(3절). 그런데 어디선가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4절).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하여 하늘에 산다는 인물이며, 모세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 유다인에게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천상적 존재인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신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예수께 모세와 엘리야, 예수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합니다(5절). 바로 그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7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고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9절).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물어보았습니다(10절).



2. 우리의 이해

마르코 복음에 담겨 있는 독특한 사상은 ‘메시아 비밀사상’과 ‘제자들의 몰이해’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정체를 감추시고 활동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실 때에 비로소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러 번에 걸쳐 예수님께 교육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그분이 ‘메시아’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비로소 메시아가 되신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에도 이미 ‘메시아’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실 때까지 그것을 비밀로 간직하라는 예수님의 함구령 때문에 발설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9․10절). 또한 제자들은 몰이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6․10절). 제자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비록 실패한 인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그분의 메시아성은 이미 살아 생전에 드러난 적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십니다.  











23       사순 제2주일  마르 9,2-10 (나) 다시 듣고 싶은 그 종소리

유안진 클라라



『교회마을 십 리밖에 나는 살았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새벽이면 들려오는/ 댕그랑앙앙아아 댕그랑앙아아/ 문풍지소리만큼 여린 숨소리를/ 잠귀가 밝았을까 나는 들었다

일어나아아 일어나아아/ 귀에 익은 어린 음성/ 소년예수가 내 귓볼에다 그렇게 소근됐다

일어나도 잠에 취해 베개에 얼굴 묻고/ 무어라 기도했나 생각나지 않지만/ 아직도 생생한 40년 전 그 종소리/ 창호 문에 배어드는 새벽 물빛 같은/ 파르스름 열리는 소년의 숨결이여

십 리 길 멀다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까만 머리 덮고 자는 내 소라귀로/ 새벽마다 달려오던 그 맑은 숨소리여/

서울까지는 못 오는가/ 안동군 임동면 장터마을 중평교회/ 나의 첫 교회의/ 그리운 그 종소리는』



옛날에 쓴 졸업작품「그리운 종소리」대로 어릴 적 나는 소년예수와 함께 자랐습니다.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돕고, 어머니 마리아를 위해서 물을 길러 나르고, 동생들을 업어주는 집안의 잔 심부름하는 내 또래의 소년예수를. 소를 몰고 들로 나가고, 소꼴을 베어오는 우리 마을 머시마들과 다를 바 없을 소년예수를 아무 때나 만나곤 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십리 길을 걸어서 다니는 초등학교 등교길이, 유약한 내 체질에는 힘에 겨웠지만, 동무들이 아무도 안 다니는 교회를 주일날이 되면 나 혼자서 다시 십리 길을 걸어서 가곤 했습니다.

오고가는 그 심심한 혼자걸음에도 나는 내 또래의 소년예수를 그려보며, 그의 음성을 듣고 얘기를 나누는 착각으로 즐거웠습니다. 찬송가 한 권을 한 곡조로 부르는 촌 교회, 열두제자의 이름노래, 신구약 66권(개신교)을 순서대로 외우기, 노래하기 등은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려집니다. 양치기에 시인인 소년 다윗과 소년예수는 동일인물일거라는 착각도 들면서, 성서얘기를 외우며, 혼자서도 함께 같이 십리 길을 새 다리 같이 여린 두 다리로 걸어 다녔습니다.

아직도 가끔씩, 그때의 그 시골계집아이로 돌아가서 단발머리 속에 숨은 내 귀에다가 산과 언덕을 몇 개나 넘고, 크고 작은 냇물을 몇 번이나 건너서, 산모롱이 돌고 돌아서 그 섶 자락에 안긴 들녘도 가로질러 와주는, 숨가쁜 여린 새벽빛 종소리를 환청으로 듣기도 합니다.

그 종소리가 먼길을 달려와 준 소년예수의 숨결과 음성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기도 할 시간인데 왜 안 일어나느냐고, 얼른 일어나 기도하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뭐라고 기도하다 잠들고 마는 나를 다시 만나면서 그 때의 그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새벽녘에나, 눈오는 날이나, 저녁 퇴근길에서 그 때의 그 종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가끔은 온갖 소음은 다 참아내면서도 교회의 종소리를 못 참는 이 시대가 한심스럽습니다. 더 늙으면 시인이 교장으로 있는 시골 어느 분교에서 종을 치며 살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분교들이 없어지고 있다지만, 5분 늦거나 한 5분쯤 일찍 쳐도 아이들의 학업에 피해가 안 되는 종지기 할머니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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