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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7년 11월 25일 (일) 09:48
분 류 대림시기
ㆍ추천: 0  ㆍ조회: 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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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
 

대림 제2주일



10. 유재국 신부(나) / 18

11. 강길웅 신부(나) / 21        12. 김영진 신부(나) / 23

13. 김평겸 신부(나) / 25        14. 노영찬 신부(나) / 26

15. 정양현 신부(나) / 27        16. 창조가 제 모습을(나)/ 28

17. 교구주보 (나) / 30          18. 최인호 작가(나)/ 31



9.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

                                                          이정운 신부


 오신다던 분이 오시지 않을 때 기다림은 점점 높아만 갑니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시간이 지루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낭군을 맞을 준비를 하는 낭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알 일입니다. 낭자가 낭군을 그처럼 그립고 보고 싶어하는 까닭은 낭군은 낭자를 사랑해 주고 돌보아주며 온갖 힘을 다해서 낭자를 위하여 심려를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실 낭군을 기다리는 낭자의 마음이 이렇고 또한 “누가 나의 낭군이 될지?”를 모르는 그 어느 낭자들에게는 “당신이 바로(내게)오실 그분이십니까?(마태 11,3)”하고 입속말을 하며, 지나는 그 알 수 없는 낭군에게 물으며 멀리서 뒤를 따라가 보기도 합니다. 낭군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리니 낭군을 사모하던 그들은 저마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 낭군의 소식을 가진 분에게 가까이 하게 됩니다.



이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화려하게 옷을 입은 왕궁에 있는 사람’이 지나는 것을 구경하려고 뛰쳐나간 자들이 아니었고(마태 11,7-9) 더구나 하릴없이 서성대는 방랑객은 더구나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낭군의 소식만이 유일한 것이요, 그 소식만이 그 낭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낭군이 오시면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소식을 듣게 되어 귀가 즐겁게 되고,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되어 두 눈이 밝아져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터이고, 낭군을 맞으러 가지 못할 때에 무겁던 두 다리는 낭군을 맞을 때면 가벼워질 것이고, 입속으로만 부르던 입이 열려 「여보」의 고함소리로 지금까지 입다물고 말못하던 벙어리 신세를 면하게 되며, 기다리던 맘의 깊은 상처를 모두 깨끗이 낫게 하여 주실 것이니(이사 26,19;29,18이하;35,5이하; 말라 3,1; 마태 11,9; 요한 6,61 참조), 낭군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낭군이 오시는 실에 마중나아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마태 11,3)하고 인사를 전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인류는 이처럼 낭군을 기다렸고, 인류를 사랑하고 돌보아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인류를 사랑하시는 메시아는 당신의 소식을 미리 사신을 보내어 알려주셔야 했으니 그 까닭은 낭군을 맞이할 낭자를 미리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낭자의 모습이 더욱 낭군 앞에 기쁘게 드러나기 위해서 미리 세밀한 데까지 심려를 기울이는 그 사랑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인류의 낭군은 이미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해주셨고 우리의 무거운 다리를 가볍게 해주셨으며, 낭군의 소식을 밤새도록 들었습니다. 또 낭군을 본 기쁨을 말할 수 있게 우리는 벙어리 신세를 면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다시 떠나신 것은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한 꽃가마를 갖고 오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사도 1,11; 마태 24,29-30; 마르 13,24-27; 루가 21,25-28; 1데살 4,13 참조).주님이 언제 오시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르지 않으셨지만(마태 24,36-44; 마르 13,32-37; 루가 17,26-30.34-36; 마태 25,2-13; 1데살 5,1-3), 우릴 보고 가셨으니, 금방 오실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촛불을 밝히고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되더라도 깨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마태 24,42-44;25,6; 마르 13,35; 루가 11,2;21,36; 1데살 5,6-7; 마태 26,38.41).


우리는 그 옛날 주님을 뵈오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하고 기쁨의 인사를 드리던 추억을 더듬으며, 해마다 이때가 되면 옛날 즐거움을 되새기고 다시 오실 낭군의 때가 멀지 아니했음을 의식하며 바쁜 준비를 하는 가운데 예전 기억을 더듬어 입속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하는 인사말을 되풀이합니다. 그것은 낭군을 대할 기쁨이 설레이도록 우리를 못 견디게 하기 때문입니다.


낭군을 기다리는 만큼, 주님을 기다리는 만큼 알찬 준비로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해야 할 것이고, 아무런 차림 없고 단정한 몸매 없이 얼룩진 용모로 주님 앞에 나갈 것입니까? 우릴 보고 가신 님은 우릴 보러 다시 오실 것이니(사도 1,11), 금방 오실 것입니다. 형제여! 지난번에 가졌던 그 마음 되새겨 이젠 더 빛나는 준비를 갖춥시다.

형제는 주님이 오시는 길에 나아가 초라하고 얼룩진 꼬락서니를 하고서 “당신이 (내게) 오시기로 된 분이시나이까?”하는 감격의 인사를 드리겠습니까?  그때 주님은 형제를 맞는 기쁨이 크겠습니까? 작겠습니까? 작다면 형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가마에 형제의 용모가 더욱 아름다우려거든 곱게 곱게 차리고 어질고 바른 맘으로 다듬어 나가십시오. 형제의 요즈음의 생활은 금방 오실 주님을 맞는 준비로 분망합니까? 아니면 길거리 어느 주막에서 준비 없는 허송세월을 하고 있습니까? 형제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주님을 맞을 준비라는 것을 잊지는 아니했습니까?

그러고서도 주님이 오시는 길에 나아가 감히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하고 철면피한 어조로 인사하시렵니까?









10.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주님의 길.

                                                          유재국 신부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우리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길을 걷고 있지만, 많은 이들이 슬픔 속에서 길을 걷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며 이 죽음은 일생을 마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모든 인간들과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쁘게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길은 주님의 길이며 주님은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들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이 실제로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오늘 미사의 두 독서는 우리가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 독서는 위로의 책을 쓴 이사야 예언자의 둘째 부분의 책이다. 이 책은 하느님의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유배 갔을 때 기록한 책으로서,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도록 불충실한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선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용서해 주고, 복역기간을 끝내 주시는 은혜로운 책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사야는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라고 외친다.

 주님 당신이 당신 백성을 성지로 인도하기 위하여 유배자들의 선두에 서서 걸어가실 길이다. 이 성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당신 백성 가운데 하느님 현존의 표지가 될 것이다. 주님의 길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마치 당신 백성의 목자처럼 백성을 해방시키는 길인 것이다.


이 길에서 당신의 내림을 알리기 위해서 메신저들이 파견된 것이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이 기쁜 소식은 또 하나의 다른 기쁜 소식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기쁜소리”로서 가장 위대한 복음이며, 세례자 요한이 오늘 마르코 복음서 서두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과연 이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마르코는 이 질문에 답변한다. 교회가 금년 한해동안 묵상케 하는 마르코 복음서는 이 복음의 대상이며, 요한이 사막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사건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마르코에 의해서 소개된 요한의 설교는 그의 복음서의 첫 문장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요한은 어떻게 그의 사명을 수행하는가?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요한은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라고 외친다. 더욱이 요한은 인간의 마음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을 것을 제의한다. 달리 말하면 청중에게 결백의 예식으로 초대하며 세례를 통해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되리라고 선포한다. 회개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오실 것이며, 그들을 성화시켜 주실 것이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서에는 이사야서보다 새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기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의 메시지는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주의 길을 닦으라”라고 외치면서 요한은 그 어떤 예언자보다 훌륭한 능력을 띠고 사명을 완수할 신비로운 인물의 내림을 준비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회개하도록 인간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즉 그분이 보내주실 하느님의 성령의 성화로 그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신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권능은 하느님의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분의 내림을 요한은 선포했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주의 길을 닦으라”라는 새로운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 마르코는 복음의 내용까지도 요약하여 서두에 기록하였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사실 예수를 통해서 주님이 오신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그런 그리스도만은 아니다. 인간에 지나지 않는 메시아는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주님이시며,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성화시킬 권능을 가지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주님이시다.


주님의 길은 바로 예수께서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걸으신 길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고 당신의 부활로써 당신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신 예수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길을 홀로 걸으시지 않는다. 그분이 오심으로써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길을 바꾸게 하며, 당신 아버지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주님의 길은 예수께서 회개한 죄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셔서 걸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길이다. 이 길을 따른다는 것은 자유로와진다는 뜻이며, 그것은 예수에 의해 성취된 해방을 수락하는 것이다. 이 해방이란 보다 깊은 의미가 있는데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대인들이나 현대 가난한 이들이 물질적으로 해방된다는 뜻과는 다르다. 이 해방은 다른 모든 해방의 원천이 되는 영적 해방을 말하며, 죄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들이 억압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는 그곳에 모든 죄악의 원천을 정신이 정복한다. 지상의 물질과 쾌락이 지배하는 탐욕의 정신을 영적으로 해방시켜 준다.


예수는 이와 같은 노예적 욕망으로부터 당신 제자들을 해방시켜 자유의 길을 열어 주시며, 성령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유롭게 걸어나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 성령이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삶을 나누며 모든 인간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도록 우리 마음을 채워 주신다.   이 인생의 행로는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하느님은 참는 분이기에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하느님이 참으신다는 것은 하느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맡은바 직책에 충실하고, 인생체험을 하도록 내버려두신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우리 마음 안에서 듣게 될 것이며, 또 주님을 찾도록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신자인 우리에게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주님의 길인가? 우리의 삶이 희망과 사랑을 드러낸다면, 우리의 기쁨이 하느님 아버지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확신이 서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한다면 우리가 걷는 길은 분명히 주님의 길일 것이다. 이 길을 우리는 걸어야 하고, 다른 이들을 이 길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조자로서 모든 이를 이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시간을 선용했을 때 얼마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우리의 시간을 선용함으로써 영원한 나라로 향하여 참으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자.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는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길을 준비시키는 일에 기쁘게 나서자.











    



11.       대림 제2주일 (나해)   사막에 길을 내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0,1~5.9~11 (주의 길을 내어라) 

제2독서 Ⅱ베드 3,8~14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음 마르 1,1~8 (주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오늘 성서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우리는 대림절이라는 전례의 시기 안에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분이지만 그래도 교회에서는 특별한 시기를 정해 놓고 어떤 의식 안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과 가슴 안에 그분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모실 수 있는 최상의 준비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회개입니다. 세상 천지를 다 둘러봐도 주님을 찾아서 만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회개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개선할 때 주님은 비로소 그 인생 안에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이 말씀은 유대백성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며 고생할 때 이제 하느님께서 찾아 주시어 해방의 날을 맞게 되리니 그분이 오실 길을 닦아야 한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기쁨과 희망에 찬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길을 닦으라는 말씀은 다시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담겨서 오늘 복음에서도 울리고 있습니다.



회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술로 인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했습니다. 고해성사도 수없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술로 인해 짓는 죄, 술을 끊지 않고는 다른 죄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술을 끊기까지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었습니다. 어떤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필요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도 많이 합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남을 속이면서 허풍을 떨고 거짓말을 합니다. 여자가 그랬습니다. 아주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탄 면접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교무금 책정을 하는데 그 여자가 미리 죽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의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적게 내 보자는 심사였습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자매님은 왜 늘 거짓말 속에서만 살려고 하느냐, 교무금은 다 안 내도 좋으니 수입의 십분의 일이 도대체 얼마인지 정직하게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얼굴이 파래지더니 자기가 고집하던 금액을 열 배로 늘려서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필요없는 거짓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기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에 너무도 인색합니다. 벌벌 떱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십분의 일을 안내면 죽는 줄 아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거꾸로 십분의 일 을 내면 죽는 줄 압니다. 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불평은 도맡아서 하며 그러면서도 점잖게 영성체하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성서를 많이 알고 있고 교리에 상식이 아무리 밝다 해도 그가 진정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위선자요 죄인입니다. 그래서 열심하다는 자들과 성직자 또는 수도자들이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는 것은 똑똑합니다. 그러면서도 듣지를 못하고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인권주일입니다.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라는 오랜 표어는 진정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사람 밑에 사람이 있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밟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고 오히려 떳떳하고 양심 바른 체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없는지 각별히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 회개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오시는 길을 닦는 최고의 길은 자신의 삶을 개선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새벽 찬송은 분명히 회개한 영혼 안에 메아리칠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아기 예수님은 놀라운 은총으로 탄생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12.             대림 제2주일 <마르 1,1-8> (나) 무기수와 대통령의 갈림길

                                                             김영진 신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다니며 노름도 하고, 술집도 드나들고 하는 등 좋지 못한 짓들을 저지르곤 했다 한다. 어느 주일날 저녁,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여자들이 기다리는 술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교회 앞에 써놓은 강론 게시판에서 '죄의 값은 죽음 뿐'이라는 제목을 보게 되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라니, 지금 죄를 지으러 가는 길인데, 뭐 저런 제목이 붙어 있는가하는 생각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 친구는 망설이다가 한 친구는 계속 술집을 가자고 했고, 한 친구는 영 기분이 안 좋으니, 난 안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가자거니 말자거니 하다가 둘은 서로 갈라져서, 한 친구는 그대로 놀러가고, 한 친구는 돌아서서 가는 체 하다가 교회에 들어가, 맨 뒷좌석에서 강론을 듣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깊이 뉘우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살았다.

  

그리하여 열심히 공부도 하고 많은 것을 연구하였으며, 후일 미국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 신문에 그의 취임기사와 더불어 유년기, 청년기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때 미국의 유명한 교도소에서는 한 늙은 죄수가 눈물을 흘리며 그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는 왜 눈물을 흘리면서 신문을 읽느냐고 묻는 다른 죄수들에게, “이 사람은 30년 전에 내 친구였는데, 이제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이 교도소에서 내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종신형을 받았으니, 이런 원통하고 분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바로 클리블랜드 대통령이었다 한다.       



             회개의 시작은 발길 돌리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계획하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듯 하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회개는 발길을 돌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술집으로 가던 발길을 교회로 돌리는 것처럼, 세상으로만 향하던 발길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 그리하여 재물과 명예를 찾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남을 생각지 않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남을 나보다 먼저 배려하려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돌리는 것, 남에게 상처를 입히던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과 교만에서 부서져 남을 존경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된 자가 되도록 마음의 발길을 돌리는 것, 그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하지 않는가.

  

시골 유지들 여럿이 모여 있던 어느 자리에서, 성당에 다니던 한 형제가 신앙이 없는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이친구, 이제 세상살이하면서 죄도 지을 만큼 지었으니, 고집 부리지 말고 성당에 좀 나와 봐. 그러다가 그냥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친구 쫓아서 강남도 간다는데, 내 소원 좀 들어주게나.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나는 좀 부끄러웠다. 나도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났는데 한번도 성당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못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교우형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앙이 없는 그 친구는, “이 사람아, 자네나 잘 믿고 천당에 가게, 난 안믿고 내 멋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겠네, 나라도 지옥에 가야지, 다 예수 믿고 천당가면 지옥엔 누가 가겠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지역사회에서 유지 노릇을 하고 지도자입녜 하는 이들이 다 그런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잘못된 자신의 삶을 반성조차 할 줄 모르고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인사들이 하나 둘이 아님을 부정할 수 없다,


복음에서 세자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회개', 수없이 들어왔을 이 단어가, 지금 나의 마음에 얼마만큼 의미를 주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나 친척중의 누구이며, 사회 구성원중의 누구라고 생각해 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설령 자신에게서 회개할 잘못을 생각해 낸다 하여도 그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며, 지금 당장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가 없는 것으로 묻어두고 치부해 버리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세상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인간의 성숙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자신에게 요구하는데 있는 것이거늘, 지나온 일에 대한 반성은 커녕 현재의 그릇된 삶에 안주하거나 육(肉)적인 만족과 욕망을 채우는 데만 자신의 정열을 쏟고 있다면, 회개란 단어가 영영 남의 단어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 어서 일어나 보자. 게을렀던 마음에서, 믿지 못했던 불신앙의 마음에서 일어나 보자.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미움과 분열을 일으키던 마음에서 지난날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일어나 보자. 자신은 아무 죄도 지은 것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고집에서 일어나 보자. 죄를 짓기는 지었으되 ,그것은 어쩔 수 업었던 것이었다 고 말하고 싶은 편견에서 일어나 보자,

  

그리하여 세상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의 삶,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의 삶으로 변화해 보자, 청년 클리블랜드가 세상 중심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모습과, 그냥 세상 중심으로 죄짓고 살다가 “나라도 지옥에 가 야지"하며 당당하게 말하던 그 시골 유지의 말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도는 밤이다,

        











 13.             대림 제2주일(자선주일)     (나)   진정한 자선

                                                      김평겸  신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놓으신 그리스도의 나눔이야말로 진정한 자선의 표양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시기는 한편으로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재현하며 한편으로 세말에 오실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회개와 보속으로 주님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대림 3주는 이제 곧 다가올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주일로 희망과 기쁨으로 지내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대림 3주를 가우데떼(기쁨의 주일)이라 부르기도 하고, 희망과 기쁨의 상징인 장미색 제의를 입기에 장미 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다가올 성탄을 기다리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탄생을 함께 나누고자 이 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하였습니다.



자선이란 내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나눔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것을 타인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실지 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제가 아는 사람들에게 제가 가진 것을 쉬이 나누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간혹 제가 친절하고 욕심 없는 신부라고 하지만 실지 제 자신은 그들의 칭찬을 받을 만큼 착한 신부는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저는 상당히 위선적인 삶을 삽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줄 때 상당한 계산을 합니다.



ꡒ내가 저 사람에게 이것을 준다면 그는 나에게 무엇을 줄까? 나의 이 행위를 신자들이 안다면 나를 어떻게 평가해 줄까? 나의 도움을 받는 이 사람은 얼마나 나를 고마워하며 나에게 충성을 바칠까?ꡓ하는 위선적인 생각을 먼저 합니다. 혹은 가난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그 때에 대한 보상 심리로 할 때도 있고, 더러는 ꡒ너보다 내가 낫다.ꡓ는 나의 우월감을 과시함으로써 상대를 위축시키기 위해 자선을 베풀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지 자선을 베풀고 나는 우월감에 젖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내가 기대하는 만큼 부응하지 못할 때 나는 배신감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나의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자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선은 물질적 보상을 바라는 것도, 나를 인정 받는 것도, 나의 삶에 대한 보상심리도, 나의 과시도 아니라 사랑으로 거저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나눔이야말로 진정한 자선의 표양인 것입니다. 매일의 미사 성제를 통해 이 나눔을 재현하고 있지만 얼마나 깊이 체험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저 이제 곧 닥쳐올 성탄을 기다리며 다가올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자선주일이나마 반성하며 살고자 합니다.

 14.             대림 제2주일 (나)   사람 대접을 받고 싶은 주님?

                                                   노영찬  신부



공부하러 학교가지, 맞으러 학교가나.ꡑ 얼마 전 서울의 모 여자중학교에서 한 학생이 동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 사건이 생긴 후에 열린 학교 폭력 추방 구호 중에 나온 말입니다. 대낮에 동네 놀이터에서 장시간에 걸쳐 여러 명의 여중생들이 친구를 때리는 장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땅에서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에 대한 서글픈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고 강자의 횡포가 약자의 신음과 대비되는 현실은 어린 여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퇴출시대」라는 소설 제목이 등장할 만큼, 우리 사회는 개인들간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영역을 가릴 것 없이 살벌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싸움터가 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와 탄식, 분노를 감추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이 땅을 빛낸 자랑스런 업적으로 국가 훈장을 받은 어떤 체육인이 유치원 여름 캠프에 보냈던 어린 자식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겪고 그 훈장을 반납하고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이 땅을 버리고 이민을 갔겠습니까?



보통 사람이 정당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작지만 행복한 삶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겹겹이 존재하는 이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 죽으나 사나 어쩔 수 없이 이 나라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 모두가 깨어지고 부서지고 짓밟힌ꡐ하느님의 모상ꡑ들입니다. 하긴 돈과 자리, 학교와 지역의 배경과 연줄이 하느님보다 더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는 세상인데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람이 대접을 못 받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또 다시 불어닥친 경제위기의 엄혹한 칼바람은 우리의 인권을 더 움츠리게 만듭니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했던 이천 년 전 팔레스티나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도 오늘과 그 본질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던가 봅니다. 사람 대접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골짜기, 산, 언덕으로 표현됩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굽은 데는 바르게 하고 험한 데는 평탄한 길이 되지 않고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는 요한의 준열한 경고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경고를 외면하고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말투, 몸짓, 생각이 과연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대접받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올바른 실천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오시고 싶어도 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갖가지 형태의 폭력 때문에 인권에 깊은 상처를 입어 사람 대접을 못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나) 주님이 오시는데 …

                                                     정양현 신부



천년을 마감하는 달력 한 장이 마지막 잎새처럼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 한장이 우리의 삶으로 하나씩 지워져 나가면 우리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대희년을 맞게 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지 천년을 두 번씩이나 겪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또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데도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내 안에 이미 계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모순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과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의 복음 첫마디를 이사야 예언자의 글로서 시작합니다. ꡒ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ꡓ 주님을 따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앙적 사명을 선포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대림 첫 주간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두움과 오류의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허겁지겁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몸단장, 집안 정리와 함께 마음가짐을 가지런히 하였습니다.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주님을 맞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보니 대문 밖 먼길이 쓰레기와 자갈로 가득차 도저히 저 상태로는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인권의 침해로 도로 곳곳에서 악취가 나고 있습니다.



씨랜드와 인천 호프집의 화재사고로 수많은 우리의 청소년들이 죽어갔습니다. 고문 기술자가 자수하면서 그동안 쉽게 의심하고 있었던 고문, 간첩조작 사건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국가기관에 의해 도, 감청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상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옷로비의 거짓증언들이 속속들이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국민의 기본권을 최일선에서 보호해주고 지켜주어야 할 검찰과 경찰, 그것도 최고의 책임자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저질러 졌다는 사실에 온 몸이 굳어집니다. ꡒ자녀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에 살고 싶지 않아 남은 자녀 하나를 지키기 위해 훈장을 반납하고 이민을 간다ꡓ는 운동선수 출신 주부의 말이 현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을 정확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나라의 인권 부재 현상을 우리 정구사 신부님들은 분단의 죄악에 그 모든 원인이 있다고 보고 그를 상징하는 국가 보안법 철폐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가 보안법은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합법화 해가면서까지 침해하고 있습니다. 그런줄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채 자기만 편히 살아온 우리들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이기주의는 더욱더 주님의 오실길을 악취나게 만들고 더디 오시게 했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주님의 길을 닦고 주님이 오실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인권을 회복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려는 우리의 부단한 노력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눌려 사는 우리 이웃들과 함께 주님을 맞이하러 나갈때 우리의 대림은 구원의 기다림이 될 것입니다.

 16.         대림 제2주일  <마르 1, 1-8> (나)

                        창조가 제 모습을 지니게 되는 재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살다가 한 세상을 끝내고 마는가? 아니다. 아니라고 하느님이 보장하신다. 이렇게 살다가 한 세상이 끝날 수는 없다. 또 그렇게 끝나서도 안된다.



 대림 첫주를 보내며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을 얼마나 깊이 마음으로 깨달았느냐에 따라 대림 재2주 때 들려오는 하느님의 위로의 말씀이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그 말씀은 받아들이면 그 순간 결행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소년소녀들의 호소(1999. 11.23,MBC TV‘PD수철')와 지난 세기에 유랑의 길을 떠난 교포 3세들이, 6만원(50달러)이 없어서 러시아의 싸움터인 타지크에서 떠나지 못하고 극빈생활에 시달리며 전쟁 공포에 사로잡혀(1999. 11.21.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떠는 소리,

그리고 병고와 가난에 눌린 수많은 사람의 신음소리와 억울한 옥살이와 원인 모를 죽음 때문에 흐느끼는 울음에서 한이 묻어 나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방향 없는 믿음․사랑․정의 ․교회․화해 ․조국․민족 평화․일치 등의 깃발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외침을 외면하면,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교묘히 꾸며지고 엮어진 조직과 제도 때문에 인간 대접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거칠게 만들어 놓은 역사라는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울부짖음을 마음으로 듣지 못하면,

선의의 경쟁 때문에 짓밟히고 도태되는 청소년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면, 흑백논리로는 안된다는 흑백논리 때문에 생기는 인간성의 파괴에 무관심하면,

그래서 선과 악을 찾아 나서는 일을 포기하고 그 구별도 하기 전에 자비를 베푼다는 그릇된 하느님의 흉내를 떠는 데 지치고 실망한 마음을 거두어 들이지 못하면; 삶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는 절규는 우러나올 수 없다.



 대안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없다. 아니 가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고통을 보고 울부짖음을 들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하다. 인간의 위로로는 안된다. 삶의 틀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이 뒤바뀌어야한다.

 최초의 창조가 제 모습을 지니게 되는 재창조가 있어야 한다. 노아의 홍수와 구원이 그 좋은 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은 노예생활과 해방, 그들이 바빌론으로 간 귀양과 귀향은 불멸의 예증이다.

전체 주민 가운데 절반 가량이 죽어 나간 14새기 유럽의 흑사병과 거기에서 비롯된 인간성에 대한 관심의 발로는 점진이 시작되는 급진에로의 전환이다. 삶의 틀이 바뀐 본보기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이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급진적이고 결정적이며, 경이적인 삶의 틀의 뒤바뀜을 이룩한다. 그것은 야훼의 영광의 나타남(이사 40,5)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야훼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과 역사 속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현실을 뜻한다.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이 볼 수 있도록(이사 40,5) 오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국빈이 오는 것보다도, 아니 창조이래 딱 한번 지구에 어떤 큰 별이 부딪쳐서 생기는 이변보다, 더 큰 사건이다. 그러니 세상이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예수님의 오심은 상상에 불과하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일이다. 이것은 커다란 위로다. 모든 선전 매체를 통하여 외쳐도 부족한 큰 사건이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신음이 끝남을 말한다. 이것을 마음속 깊숙한 곳에 전하는 것(이사 40,2) 자체가 위로다. 그 예수님은 하느님같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사 40,17)의 모습으로 오시지만, 동시에 양들을 어질게 돌보는, 인자한 목자의 모습을 띠고(이사 40, 11) 오신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 자체, 그리고 또 오신다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는, 삶의 틀을 바꾸는 일이다.

  예수님의 오심이 결정적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오심을 뜻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재림이 오심을 완성하는 것이다. 급진적 변화를 일으킨 예수님의 오심이 점진적 발전을 통하여 어떻게 그 완전한 모습에 이르렀는가를 보게해주는 것이 그분의 재림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급진적 변화의 완성은 “갑자기 오고‥‥하늘이 사라지며 천체가 타서 녹아 버리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2베드 3,10-11) 현상을 수반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셨듯이 세상도 그때까지 숨겨졌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데 예수님 재림의 특성이 있다.

(2베드 3,17의 끝 구절은, 세상이 다 없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늘 천체가 다 없어지는데도 오히려 세상은 새로 발전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첫번째 오셨을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당신이 세사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셨으나, 재림시에는 세상이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는지가 가려진다.



  이대로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다. 문제는 그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오실 수밖에 없는데, 오시기만 하면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들이 강하게 저항할 것이다. 세상을 뒤바꾸는 위로가 그들에게는 저주가 되기 때문이다.

  매년 성탄은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던 것에 대한 기억과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이 현실화되는 기쁨을 누리는 축제다. 여기에 걸맞은 자세가 광야로 나가는 회개에 있다. (마르 1,4이하 참조)





17.        대림 제2주일 <마르 1,1-8>(나)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1. 세례자 요한의 활약

마르코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활약을 먼저 전한 것은 요한을 예수님의 선구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마르 1,1-8 참조). 세례는 인간이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도리를 드러내는 상징행위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상하여 백성을 회개시키려고 세례운동을 펼쳤습니다(마태 3,7-10).



마태오 복음서 3장 2절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이 외침은 유다인들에게는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스스로 의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구체적인 사례가 루가 복음서(3,10-14)에 나타나 있습니다.



『군중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속옷 두 벌 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 하였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러 주었다.』



         2. 회개의 생활을 실천한 고행자

요한은 사막의 유목민들처럼 낙타털옷을 입고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복장과 매우 비슷합니다

(2열왕 1,8 참조). 그리고 요한은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는데, 요한의 옷차림이나 음식은 당시 금욕적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것으로 이는 요한이 스스로 회개의 생활을 실천한 고행자임을 보여 줍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마르 1,7.8절). 여기에는 예수님이 위대하신 메시아라는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3. 우리의 실천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등지고 있다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되돌아서는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들려오는 말씀은 무겁게 느껴지지만 이는 위로와 희망, 기쁨과 평화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 예수님이 오신 때를 기억하고, 지금도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동시에 다시 이 세상에 오실 주님을 희망하면서 회개의 삶을 통하여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사무처 홍보실











18.       대림 제2주일 <마르 1,1-8>(나)         주님의 발



발은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하찮은 부분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런 의미의 비유였던 것입니다.

성서에 보면 ‘주님과 발’에 관한 구절이 두 군데에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조금 있으면 배반할 가리옷 유다의 발까지 씻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황송해서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말하자 주님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구절은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발에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아 드리는”(요한 12,3) 장면입니다. 요한조차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고 말한 주님의 발에 감히 창녀와 다름없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붓고 그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

아 드린 것입니다. 얼핏 보면 위선적이며 관능적인 태도 때문에 가리옷 유다가 배신을 결심했던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마르 15,24). 마리아가 향유로 닦아 드린 주님의 발에 못이 박히고 주님은 돌아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일을 자신의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마태 11,11)는 평가를 받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감히 신발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은 주님께서 직접 대야에 물을 떠서 우리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심으로써(요한 13,5) 우리는 온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못에 박히고 그 발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로 구원해 주셨으나, 그 발에 입을 맞추기는커녕 닦아 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마리아의 열정을 허락하소서.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듯이’ 우리도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온 세상이 주님의 향기로 넘쳐나게 하소서. 이제는 우리가 당신 발을 씻어 드릴 때가 되었나이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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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7주일
Re..가해 연중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1-14 4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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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다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14 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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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4-18주일
다해 연중 제 1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7-17 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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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시기
나해 부활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29 4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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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다해 연중 제 1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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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시기
가해 성가정 대축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7-12-28 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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