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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17
분 류 연중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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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연중 제 7주일 ”
 

연중 제7주일



         15. 이계중 신부(다)/ 24                  16. 전주원 신부(다)/ 25

         17. 공곤라도 신부(다)/ 26                18. 나궁열 신부(다)/ 28

         19. 서경윤 신부(다)/ 31                  20. 김한석 신부(다)/ 33

         21. 강길웅 신부(다)/ 36                  22. 강영구 신부(다)/ 38

         23. 홍금표 신부(다)/ 42                  24. 신은근 신부(다)/ 44

         25.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다)/ 45



15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우리의 잘못과 하느님의 자비

                                         이계중 신부



우리는 잘못한 후, 고백의 성사를 보고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에 떨어질 때마다 몇 번이고 고해성사를 봅니다. 그러나 같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될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을 용서할 때 같은 잘못에 있어 두 세 번은 용서하지만 그 이상은 용서해 주는 것이 잘 안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나의 거듭 범하는 죄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실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좁은 자기 마음에 비추어서 하느님의 마음을 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모욕과 모독을 준 죄인이라도 한없는 자비로 그들의 회심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통회의 마음으로 주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죄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잊으시고 반겨 안아 주십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가까운 자들을 용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관대한 태도를 이상히 생각하여 “주님 저는 몇 번이나 제 형제가 제게 잘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시오(마태 18,22)”라고 하셨습니다.



일찍이 구약의 시인 다윗 성왕은 ‘주께서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를 늦추시고 또 은총이 많으시니라, 주께서는 만물에 대하여 선하시고 또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하여 자비로우시니라(시편 114, 8-9)’고 주님의 자비를 아름답게 읊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하나 하나의 피조물 위에 풍부하게 흐르고 있고, 그 마음의 부르짖음은 예언자의 입을 빌어 ‘여인이 자기 아기를 잊고 자기 뱃속에서 난 아들을 가엾게 아니 볼 수 있겠느뇨. 그 여인들이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노라(민수 39, 15)’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절대적이며 무조건인 것으로, 여하한 인간의 반역에 대해서도 분노와 증오를 품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위에 베푸시는 자비도 한층 더 풍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애정의 최고의 표현을 십자가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하느님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을 건 애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탕자의 비유 말씀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지상의 아들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탕자인 작은아들은 단조로운 집안살림에 지쳐서 잔소리를 퍼붓고 자기 책임을 회피했으며, 형을 시기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 가버렸습니다. 고향과 집을 등진 그는 이따금 그는 자기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 가버렸습니다. 고향과 집을 등진 그는 이따금 남이 집 대문을 두드리고 동냥을 청하거나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금전과 건강을 낭비했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돈이 떨어지고 자기 주위에 있던 여자들도 사라지고 음악도 끝났습니다.



어느 고요하고 추운 밤, 마지막 희미한 희망의 빛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즉, 속을 태우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고향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귀가는 큰아들의 시기와 분노로 인하여 난관에 부딪쳤으나, 아버지의 자비심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잘못을 용서해 주는 아버지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자비와 용서의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죄인인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화해의 성사 곧 고백의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피투성이고, 아프고, 쑤시고, 지친 인간의 마음은 이해와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그 마음은 죄의 고백과 화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어느 본당 신부가 “우리 본당에는 고백의 성사를 받기 위해 고해소로 가는 교우보다도 등산 가는 교우가 훨씬 더 많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집을 등지는 교우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더욱 새롭게 인식하고 특히 사순절에 우리 영혼에 풍성한 은총이 내리도록 고백의 성사를 받도록 노력하여,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례하여 함께 알렐루야를 부릅시다.











16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전 주원 신부



오늘 복음에서 증오와 남에게 대한 비평이나 단죄 같은 암흑의 세력에서 파생되는 그런 일들을 경계하시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선행을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특징적인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싫어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고 하는 계율은 다른 성현들도 했습니다 유대의 랍니 힐렐은 한 쪽 발로 서 있는 동안 모든 법률을 다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자기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다. 그  밖에 것은 거기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철학자 필로도 말하기를 “자기가 당하기 싫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고 했고,

희랍의 웅변가인 이소크라테스는 “타인의 손에 괴로움을 당하여 그대가 분개하게 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은 스토아 철학의 기본 원리중 하나입니다.



공자는 “한 생애를 걸어서 실천해야 할 규율에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하고 묻는 제자에게 “그러한 말이 있다면 호혜주의가 아닐까? 자기 자신에게 원치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상의 정신들은 소극적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보상을 후하게 안겨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복장은 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기 때문에 앞 섶이 주머니처럼 쓰입니다. 여기 가득히 넣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선행에 있습니다. 인간적 약점 때문에 저지른 죄들은 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버림받는 이유는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마태오 25장을 잘 읽어보십시오.











17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시오

                                 공곤라도 신부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루가 6,36)



친해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과연 바보일까요? “한 쪽 뺨을 치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대 주고, 겉옷을 빼앗는 사람이 있거든 속옷을 빼앗아도 막지 마시오. 달라는 사람이 있거든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돌려 달라고 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고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어찌 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이런 어리석은 요구를 하실 수가 있을까?



우리들은 항상 바보이어야 하며 항상 밑바닥만 걷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 신자들은 정의와 질서에 대한 권리 의무가 없으며 불의와 권력에 무조건 굴종하여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들 이웃끼리의 상호관계, 즉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인도주의 혹은 그리스도교 사상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으로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이 문제에 답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닙니까? 참다운 신자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정상적인 인간”처럼 행동할 수 없단 말입니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적인 이웃사랑이 일반적인 인간적 사랑을 초월하는 점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어리석음을 참으로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선한 이을 해주며, 갚을 길이 있는 사람에게 꾸어준다. 이 모든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상을 원하십니다. 불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며,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꾸어줍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항상 양보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 사랑의 특징 :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심으로써 인간적인 관계만으로는 모든 일을 다할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조건부 상호관계로만 행동한다면 악순환의 갈등 속에서 항상 새로운 보복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다툼과 전쟁, 갈등이 없는 관계를 원하십니다. 참다운 이웃사랑이란 인간적인 상호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동기, 즉 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앞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받았는가?”하고 생가가지 말고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성 바울로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시오. 원수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시오”(로마 12, 17-21)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남들에게서 바라는 그대로 여러분도 남들에게 해 주시오.” 이것은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즉 내게 부당한 일을 한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현실적인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궁핍에 허덕이는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의 원수라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자신을 반성해 봅시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적 이웃사랑, 즉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계명을 실천하고 있는가? 혹은 나도 아직 외교인들처럼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그들에게만 사랑을 베푸는가? 신자란 도의적 요구만 채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서까지 아버지께 기도하신 그러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18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원수를 사랑하라

                                       나궁열 신부



순철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순철이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는데 철수라는 같은 반 학생이 그를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순철이는 학교에서 놀림감이 되었고 밖에서는 맷집이 되고 항상 철수의 빵 값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에 순철이는 비관하였고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순철이의 누나가 보다 못해 선생님의 협력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순철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당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다른 이를 통해 풀기에는 너무나 상처가 커서 선생님의 도움을 뿌리치고 뛰쳐나왔습니다. 순철이는 몸에 칼을 품고 철수가 자주 가는 빵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엔 다른 친구들 밖에 없었습니다.



칼을 들고 분노에 찬 순철이 모습에 놀란 스들은 철수의 집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순철이는 칼을 품고 철수 집을 찾아갔습니다. 철수의 집은 대포집이었는데 철수 엄마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철수 어머니는 찾아온 아들 친구에게 철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생활을 다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철수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효성이 지극한 아이였는데 이 엄마가 자기를 난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 성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하였답니다.



어느 날 엄마의 꾸지람에 집을 뛰쳐나가 육 개월 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학교에나 잘 나가고 있느냐고 물으시며 순철이를 붙들고 눈물을 글썽대셨습니다. 순철이는 철수의 이런 가정 사정을 알고서 불타던 복수심이 사라지고 자기가 철수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했습니다 바로 복수심이 사랑으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온 순철이는 철수를 만났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어저께의 소식을 들은 철수는 순철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순철이는 “네가 나를 때려 너의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맞겠다”고 몸을 내맡겼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순철이는 대담해졌습니다. 그때 철수 엄마가 학교에 오셔서 철수를 찾자 철수는 도망쳤습니다.



철수 엄마는 그를 따라나서다가 계단에 굴러서 크게 다치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순철이는 철수의 거처를 찾아 헤매다 공사판에 있는 그를 발견하고 그의 엄마의 입원을 알렸습니다. 입원실에서 엄마는 잠들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철수는 자신의 가정 상황이며 지금까지 공사판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닌 사실, 순철이를 놀려댄 것은 자신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임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철수는 엄마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고 순철이와 깊은 우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먼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복수심은 자신을 해치고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지만 사랑은 자신을 변화시켜 줍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받아들여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에 균형을 잃고 영혼에 상처를 줍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격 전체가 일그러지게 됩니다. 만일 미움에 대하여 복수로 응수한다면 복수가 초래하는 결과란 상상할 수 없는 연쇄적인 죄악을 증가시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응수하면 자신의 생활이 안정되고 평화로우며 그의 영혼은 행복하고, 인격 전체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한 용기로 무장되고 상대방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순철이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복수심에 불타 있을 때 학업성적이 떨어지고 자신의 생활이 불안정하고 그의 영혼은 상처를 입었고 인격 전체가 불안과 공포에 쌓였습니다.

그러나 철수를 사랑한 다음부터는 무기력했던 자신이 용솟음치는 용기를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고 친구를 위해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빛났고 인격과 생활 전체가 의미를 가지는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복수심은 상대방의 악행을 증가시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정복합니다. 암흑을 암흑으로 몰아낼 수 없듯이 미움을 미움으로 몰아낼 수 없고, 폭행을 폭행으로 몰아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오직 죄악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것이 죄악의 연쇄반응입니다. 암흑은 빛으로밖에 몰아낼 수 없듯이 원수는 사랑으로밖에 정복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친구로 만들 때 비로소 원수를 참으로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특유한 정복 방법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느님의 이 정복 능력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 잠재적 능력은 원수를 사랑할 때 현실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함으로써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다를바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닮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의 삶의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수 없고 그분의 삶을 우리의 주위에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 사상의 실천이 하느님을 원수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 사랑으로 원수를 진정 정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먼저 원수를 새롭게 바라봐야 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이의 악행이 그 인간됨의 전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에게서도 참한 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측에서 보는 것은 그의 인격 일부에 지나지 않고 내 편견이 개재되어 그 악행을 과장하게 됩니다. 순철이가 철수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보기조차 무서워하였듯이 우리도 우리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선한 일면이 있으며 아무리 선한 이라도 악한 일면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 역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환경을 알아야만 자기에게 대하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주변과 그 인격을 이해할 때 그가 전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도 한 인간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되며, 그것이 사랑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집에서 벗어나 마음의 문을 엽시다. 원수를 탓하기 전에 먼저 나를 바라봅시다. 원수를 바라보기 전에 거울 앞에 서있는 나의 참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나서 원수를 보고 나와 닮은 점을 바라봅시다. 나와 그는 인간이기에 너무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사랑이란 동질의식을 느낄 때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이지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의 기술입니다. 이 기술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 기술은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힘을 키워야하고 몸에 베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힘이 없는 사람은 사랑할 힘도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원수를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시작할 수조차도 없습니다. 용서란 원수 사랑의 시작이며 촉진제입니다 용서란 화해를 뜻하고 다시 함께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해란 나와 동등한 인격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패배시키거나 모욕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원수의 인격의 재견합니다. 이 결함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주위에 심어주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순철이의 경우처럼 칼을 품고 갔다가 친구를 못만나고 그의 가정 환경을 알고나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복수의 의향이 없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인간적인 약점 투성이어서 복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 우리의 자존심을 극복하기란 무척이나 힘듭니다. 바로 이때에 하느님 은총의 힘이 작용해야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은총은 작용합니다. 그러나 이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감나게 느끼는 자만이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주께서 우리에게 무한히 베푸시는 사랑을 진실로 느끼는 자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권고도 아니라 지독하지 만큼 힘든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에 그리스도의 힘의 협력을 약속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임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증거하는 길이며 원수를 정복하는 첩경입니다.



우리 중에 서로 미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이는 안계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합시다. 그리고 찾아가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합시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하고 기도합시다. 우리의 노력은 주임의 은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이 길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닮은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











19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남을 판단할 자격이 있나?

                                                              서경윤 신부



내 방에는 사각형의 조그만 냉장고와 제법 큰 커피포트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 둘의 사이가 별로 좋기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시원한 물을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면, 냉장고는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겠지만, 포트는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 섭섭해 할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반대로 손님이 커피 맛을 칭찬하면, 포트는 우쭐해 하고 냉장고는 의기 소침 할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둘은 경쟁관계가 되었습니다. 한 방에 나란히 같이 지내지만, 둘 사이에 껄끄러운 감정은 쌓이고, 사이는 벌어졌습니다. 하루는 결정적인 사건이 생겨 서로를 비방하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이 이중인격자야!” 냉장고가 말했습니다. “너는 전기의 힘으로 물을 끓인다고 말하는데,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거짓말이야! 내 경험으로는 전기가 통하면 물을 차게 하고, 그래서 얼음을 만들었으면 만들었지 결코 물을 데우고 끓일 수는 없는 거야!” 포트가 응수를 했습니다. “너야말로 거짓말쟁이고 위선자 아니냐! 전기가 통하면 열이 나서 물이 끌게 되어있는 거야! 나는 진작 네가 사기꾼인 줄 알았지만, 여태 말은 하지 않아서, 이제 솔직히 인정하고 모두에게 사과해야할 때가 된 것 같다.”


둘의 싸움은 해결 될 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볼 때 둘 다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둘은 서로 말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를 피하고 방안의 커피잔이나 유리컵에게 서로 비방하기도 하고, 누가 옳은지 판단하게도 했지만, 전기의 힘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물건들은 대답해 줄 수 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한방에 같이 지내면서 제발 서로 화해하고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 뿐 이었습니다.

  

사실 주위의 다른 동료들은 누가 옳으냐 하는 것보다,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그들 당사자들도 조용히 생각해봤습니다. 상대편이 잘못은 했지만 화해의 필요성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고, 더구나 「잘못한 것이 없는 나」로서는 더욱 먼저 손을 내밀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면 내가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되고, 이것은 정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를 따른다는 측면에서도 그럴 수는 없으므로 좀더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상대편에서 화해를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응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만해도 나로서는 대단한 양보며 결단이라고 자위했습니다.

  

아직도 마음 속에는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주위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화해하기로 작정하고, 서로 말을 하기로 했습니다. 말을 해야만 자신의 진실도 전할 수 있고, 오해도 풀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빈말이지만 서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다시 옛날의 그 얘기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갔습니다. 서로「그때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다가, 이번에는 더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보다 더 심한 인격적인 모독과 욕을 하며 싸웠습니다. 냉장고가 말했습니다. “이 버러지 같은 자식, 나보다 값도 싸고 쬐끄만게 어디서 함부로 까불어, 내가 붙쳐주니까 제 친구로 아는 모양이지? 싸가지 없는 것!” “포트도 질 수는 없습니다. ”야, 버러지보다 못한 자식, 너는 땅바닥에 내려놓지만 난 네 위에 올라 앉아있어! 아랫것이 분수도 모르고 까불고 있어!” 이제 감정만 격해져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매일의 생활에서 얼굴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많이 해봤지만 별 위로가 되질 못하고, 괴롭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기도하는 동안에는 후회도 많이 하고 예수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1”도 생각나고 해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용기를 갖고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그런 마음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깊은 데서부터 치미는 미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참아 넘어가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이제는 누구의 잘 잘못이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 형식적으로는 서로 화해하고 지금은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인사는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하고, 언제라도 다시 터질 소지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 속 깊이 박힌 상처와 앙금은 쉽사리 해결될 것 갈지 않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자신의 한정된 경험에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전기의 힘이 다르게 작용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압니다. 전기의 힘이 서로 전연 다르게, 냉장고에게는 차게 하는 기능을, 전기포트에게는 뜨겁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는 상대방의 경험이 자신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자기 식견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옳음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려 고집함에 있었습니다. 내가 옳은 것도 사실이지만, 상대방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또 싸우더라도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욕은 삼가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주제 자체보다 이런 표현들 때문에, 받은 마음의 깊은 상처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훈계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 복음 말씀은『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단죄하지 말라』『용서하라』고 들려 주셨습니다. 사람은, 둘도 같은 사람이 없고, 따라서 경험도 다 다릅니다. 옳고 그른 것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으므로 주님께 맡겨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도 그렇고, 또 우리의 모든 형제들의 소망은 서로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평화롭고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단상을 끝내고, 목이 말라 냉수를 한잔 마실 양으로 찬장에서 유리잔을 꺼내면서, 포트를 훌낏 보고 커피 잔도 또 한 벌 꺼냈습니다.











20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세상의 빛이 될 어리석은 십자가 삶

                                                           김한석 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쯤은 들었을,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사실 신앙인으로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사랑과 용서'이고, 그러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 역시 ‘사랑과 용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 맡긴 원수에 대한 심판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아픔을 남겨준 사람의 모습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고통을 가져다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오늘날 같은 사회 현상 속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회의를 하게 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한계처럼 느껴집니다.

 

신앙인으로서 선하게 살려고 해도, 아니 인간으로서 선하게 살려고 해도, 사회 여건이 그렇지 못한 것이 이 시대라고 말들 합니다. 진정으로 나 하나 잘 산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아픔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달걀로 바위를 깨는 것처럼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진정으로 가장 말하기 쉬운 것이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사랑'을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끊임없이 남아 있는 숙제라고 하겠습니다. 그 해답을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관대한 자비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다윗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정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러 온 사울왕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그의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살기 등등한 그의 증오심에 대한 심판은 온전히 하느님께 맡깁니다.



다윗왕은 자신의 적대자의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여기서 바로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아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십자가 상 용서에 초대된 자들



복음에서는 사랑에는 제한이 없고, 혈육과 친구와 동족에 한정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자기를 싫어하고, 해치고,  경멸하는 원수까지도 감싸주는 사랑이라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내용을 전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실천 지침으로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다윗왕처럼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용서와 사랑을 베풀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탓만을 하고 있을 때,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며,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연관을 맺고 있는 것들에 집착한 나머지, 높은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그저 자신 앞에 주어진 것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에 대한 애착으로, 닭은 날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합니다. 갈매기는 땅에 머물러 있는 시간보다 하느님이 주신 날개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날아다니는 시간이 많습니다.



자신의 삶, 현세에 대한 집착보다는 더 높은 가치에 닭과 갈매기를 비교해 봅시다. 닭도 갈매기도 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과 우리의 생활이 차이가 있듯이, 닭과 갈매기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닭은 조류에 속하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날지 못합니다. 위급한 상황에 겨우 지붕 위로 피할 뿐입니다. 닭은 자신 앞에 주어진 먹이, 땅 속에 있는 벌레, 모래, 자신을 맡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닭과 같이 인생고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그 능력은 뒤로 한 채, 가시적인 결과와 자기 안주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생활 수단을 위한 의식주 해결에 따르는 어려움, 대인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부모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 대학 진학과 취직에 따른 어려움, 이런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앙인이건 비신앙인이건 누구나 겪는 어려움만을 생각하고 이것이 삶의 전부인 양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매기와 같은 삶,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이란 그런 인생고에서 한 차원 높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 놓은 사람들을 용서하신 그 십      자가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비신앙인과 신앙인을 구별하는 가장 큰 표징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십자가상의 용서를 우리도 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 시대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이들을 용서하고 하느님과 화해를 이끄는 삶이었듯이, 우리들도 그런 어리석게만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이런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인생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을 생활로 옮기는데 따르는 어려움인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그대로 살고, 그분의 말씀을 생활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듯이 이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아니 현실적인 고통까지도 가져온 사람을 사랑하도록, 그런 십자가를 지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물론 고통이 따르고 어떤 화려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가시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둡게만 보이는 이 세상에 빛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표시인 원수에 대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이 우리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었듯이, 사랑의 힘인 우리가 진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비록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뿌리깊은 나무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현세에 안주하는 닭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갈매기가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매일 매일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그 어려움에 집착하여, 즉각적인 결과만을 중시하는 삶을 살고싶습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만,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면서 이제는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그 사랑의 길, 화해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수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의 표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1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사무 26,2.7~9.12~13.22~23 (주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붙이셨지만 저는 손을 댈 마음이 없었습니다) 

제2독서 Ⅰ고린 15,45~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 

복 음 루가 6,27~3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싸움도 잘해서 이스라엘을 통일 국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인격이 출중해서 만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인간인지 라 죄를 지어 잘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진실 되게 뉘우치고 반성했기 때문에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남의 잘못에 대해 너그러웠습니다. 자기의 상전이었던 사울에 대해서는 그 충성과 존경이 가히 초인간적이었습니다. 사울 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으나 왕이 된 후 교만해져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밀려나게 됐으며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부하 다윗 에 대하여 항상 시기와 질투를 가졌습니다. 사울은 자기 생전에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에 대해서 조금도 적개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어 사울을 축성하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끝까지 그를 지켜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죽이자 면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으나 다윗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상전을 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인격이 다윗의 남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한번은 사울이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나갔다가 그만 다윗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떤 굴속에 들어가 용변을 보 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일행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그랬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처럼 잡아죽이시려 합니까? 저는 임금님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이에 사울이 울면서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너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사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병적으로 변덕이 심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다시 군사 수천을 이끌고 다윗을 잡아죽이려 출동했다가 오늘 그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Ⅰ사무 26,2~23참조).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다시 또 죽일 수 있었으나 끝까지 사울을 지켜 주며 절대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다윗의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이며 오늘 예수께 서 말씀하신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이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친 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실 안 좋은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신앙이나 상식을 저버린 사람들도 있으며 필요없는 이간질이나 욕설과 비난으로 공동체의 분위기를 해치는 자들도 있습니다. 심하게 얘기해서 우 리 공동체에 없었으면 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바로 그 이 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고 도와 줘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선가 먼 저 상처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애정으로 받아 줘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회사에서 자기 상급자에게 되지도 않는 이유 때문에 욕을 먹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상한 마음으로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분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그 상급자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은 것이 분명하니 바로 그분을 위해 기도해 주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형제는 맘에도 없는 기도를 부인과 함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후였습니다. 자기에게 모욕을 준 상급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낮에 있었던 일을 깊이 사과하면서 자기가 가정불화로 이혼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지금은 잘 해결이 됐다고 하면서 자신 의 비인격적인 행동에 대해 용서를 청하더랍니다. 여기서 그 형제는 아내의 현명함과 신앙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사고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개인적으로 또 는 가정적으로 문제가 복잡한 사람들입니다. 심하게 얘기하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돈을 떼어먹고,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도해 줘야 하며 그런 사람에게 잘 대해 줘야 합니다. 오늘 2독서에 보면 우리 모두에게 는 하느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말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며 사랑을 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는 또 되받을 생각을 말 고 좋은 일을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주면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우리에게 안겨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조건없이 못난이들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22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어리석은 삶의 길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7 주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이 세상의 악과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의 주제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은, 왕이 된 이후 6년 동안은 성공적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왕이자 용맹스러운 장군으로서 불레셋 사람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성공적인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처음 왕으로 뽑혔을 때와는 달리, 그는 차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는 그의 왕권이 견고해지자 하느님의 소리보다는 사람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에는 새로운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다윗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뽑았던 예언자 사무엘은, 일찍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이새라는 사람의 막내 아들인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바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동이었는데,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난 이후부터 줄곧 하느님의 영이 다윗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서 사무엘 상권 17장 12잘 이하에는, 소년 다윗이 돌팔매질로 불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때려잡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을 때,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불레셋에는 골리앗이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불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소년 다윗이 돌팔매 하나로 때려잡았던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다윗은 사울 왕의 총애를 얻게 되어 이스라엘의 군사령관에 올라앉게 됩니다. 다윗은 모든 전투마다 대승을 거두게 되고, 백성들의 민심은 조금씩 조금씩 다윗에게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끼게 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한증오심과 질투심으로 우울증에 시달릴 때 다윗은 가끔 수금을 타면서 그를 달래곤 했었는데, 사울은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여러 차례 창을 던져서 그를 벽에 박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해서 목숨을 건지곤 했습니다.

  

자기 손으로는 도저히 다윗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을 미끼삼아서 다윗에게 이렇게 제의합니다. “내 딸 미갈을 자네에게 주어 자네를 내 부마로 삼겠네. 그러나 조건이 있네. 내 딸 미갈에게 장가들고 싶으면 불레셋 사람들의 포경 백 개를 잘라다 주게......” 사울은 다윗을 불레셋 사람들의 손을 빌려 없애고자 했지만, 다윗은 즉시 전장에 나가서 불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포경을 모두 거두어다가 사울에게 바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공주 미갈과 결혼하여 사울의 부마가 됩니다.

  

번번이 다윗을 죽이려던 음모가 실패로 들아가자, 사울은 급기야는 정신이 돌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거의 광적으로 다윗을 뒤쫓으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너무나 집요하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자, 다윗은 사울의 손을 피하여 갓이라는 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미 질투의 화신이 되어서 다윗의 뒤를 쫓고 있던 사울은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엔게디 근방의 산 속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이 군사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뒤쫓아왔습니다. 다윗은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이 갑자기 뒤가 마려워서 그 동굴 속으로 들어와 뒤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던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장군님의 원수를 하느님께서 당신 손에 넘겨주실 때가 왔습니다. 한 칼에 없애버리시지요!”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살그머니 다가가서 뒤를 보고 있는 사울의 옷자락을 칼로 잘라냈습니다. 사울이 뒤를 보고 동굴 밖으로 나가자, 다윗은 한참만에 동굴에서 뒤따라 나와 저만큼 멀어진 사울에게 소리 쳤습니다. “임금님, 여기 당신의 옷자락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만 저는 임금님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제가 임금님을 해칠 것이라는 헛소문을 믿고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아서 하느님의 영으로 성별된 사울을 해칠 생각이 없었고,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 독서의 말씀도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불레셋 군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넘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불레셋에 참패하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선을 악으로, 호의를 배신으로 갚고자 했던 사울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않고 언제나 선으로, 그리고 미움과 증오를 사랑과 용서로 갚고자 했던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면 어떻게 될까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예수의 말씀대로 살았다가는 얼빠진 바보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얼빠진 바보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가 바로 얼빠진 바보였고, 그분의 가르침 역시 얼빠진 바보 같은 가르침만 펴시었습니다.

그러나 그 얼빠진 바보 같은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두 개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 세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의 세력입니다. 하나는 미움과 증오와 질투의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세력입니다.



악의 세력은 죽음과 어둠의 세력입니다. 악의 세력이 힘을 펼치면 모든 것은 파괴되고 죽게 됩니다. 미움과 증오, 복수하고자 앙심을 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되고, 급기야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죽게 합니다. 사울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기에 정신병자가 되었고, 나라를 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끝내는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광기 어린 증오에 비하면, 다윗은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그 증오가 다윗의 자비와 용서를 이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어떤 악도 선을 덮어 누를 수 없고, 그 어떤 미움과 증오도 사랑과 자비를 덮어 누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라도 작은 촛불 하나의 밝음을 덮어 누를 수 없듯이,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사랑과 자비를 덮어 누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만고 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한편 사랑과 자비와 용서는 서로를 감싸주고, 덮어 주고,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그리고 자비와 용서는 죽어 가는 것도 살려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증오를 증오로 맞서면 필시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은 모두 함께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와 용서는 복수와 증오의 악순환을 한순간에 멈추게 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감싸주는 힘이자 능력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랑과 자비는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7절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을 그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왕의 권세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어리석고 약해 보이는 다윗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자비와 용서로 하느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한 칼과 창이 하느님의 능력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정말 어리석고 얼빠진 삶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지만,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어리석은 가르침이 아니라, 가장 힘있는 가르침이고, 가장 확실하게 미음과 증오를 극복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악의 세력을 이기는 가르침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는 힘없는 사람들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함이고, 복수와 증오, 그리고 미움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수하고자 하는 유혹, 이웃과 형제들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앙심을 품고 복수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또다시 복수를 당하게 되고, 형제가 잘못되는 것을 고소히 여기는 사람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든지, 미움과 증오와 복수하고자 하는 앙심으로 악마의 편에서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23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홍금표 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 주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1독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사울왕을 다시 살려 주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원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누가 감히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께 손을 대고 죄를 받지 않겠는가?」 원수에 대한 복수는 하느님께 유보하라는 의미 아닐까 !

  

그리고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고,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그리고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그리고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말고,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엄청난 요구를 듣게 된다.

  

보복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아 악의 악순환을 차단하라는 것인데, 율법과는 달리 아주 충격적인 요구이다. 우리는 우선 이 구절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 구절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이러한 요구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절대 규범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도 아니셨고, 또한 대제관의 경비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을 때,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고, 오히려 항의하신 사실(요한 18,23)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둘째로, 이 구절은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대교의 복수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인간사회에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만이, 인간사회의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바로 오늘 말씀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이다. 인간사회에 악을 없애고 정의를 세우는 길은 「악에는 악」이란 복수법이 아니고 「악에는 선」이라는 사랑의 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사랑의 법만이 악의 악순환을 차단하는 길이요, 인간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의와 악을 없애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아무리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절과 실천이라는 문제를 함께 놓고 검토해 보면, 매우 답답한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오늘의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수를 사랑해야지 하고 의지적인 결심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과 용서는커녕 점점 더 미워지고, 원한만 쌓이는 것이 범인들인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도 그분의 사명 자체가「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우리의 죄와 부족함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러한 요구를 지키지 못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해야 한단 말인가 ! 예수님의 이 말씀이 비록 우리가 지킬 능력이 없다 하여 그냥 무시해도 되는 말씀도 아니고, 우리 삶 속에서 악의 악순환을 끊어야만 된다는 요구는 포기할 수 없는 절대 진리라면 우리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저는 이 문제의 해답을 조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제가 북평성당에서 사목할 때 어머니가 주방일을 도와주신 관계로, 조카 성욱이는 3살 때부터 길게는 한달, 짧게는 몇일씩 놀러오곤 하였다. 그런데 이놈은 컴퓨터를 하다 모르면 나에게 이것 좀 해 주세요! 하고, 무엇을 사고 싶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것 좀 사주세요, 또 놀다 심심하면 아빠는 심심할 때 잘 놀아 준다고 나에게도 같이 놀아 달란다. 어떤 때는 짜증도 났지만 그래도 사랑스럽기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기쁘게 해 준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 누구에게 청하고 맡기는 것」 여기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반복하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을 하시면서 그 누구보다 인간이 이 요구를 못 지킬 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 들으면서, 그래 원수를 사랑하자 하고 결심하는 것만이 첫 번째 자세는 아님. 오히려 그보다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먼저 하느님께 맡기고 청하는 용기가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가져야 될 첫 번째 자세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책망하거나 실망함 없이 비록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있기에 용기를 가지고 「악에 대한 선의 응답」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고, 원수 사랑의 실패 속에서 나의 무능과 하느님의 전능을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최고의 앎(知)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최고의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











24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사랑과 용서

                                                        신은근 신부



‘시누이가 미워 성당에 나오기 싫습니다. 시집와서 어려울 때 얼마나 모함했는지 모릅니다. 시부모님께 고자질하고 이간질로 갈라놓고 없는 말로 괴롭혔습니다. 기도하려면 시누이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산만해집니다. 성서를 펴고 묵주를 들어도 시누이 생각이 나면 그만 두게 됩니다. 이런 제가 성당에 다니면 뭘 합니까. 제 업보라 여기며 용서하려 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용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작 괴롭혔던 시누이는 멀쩡한데, 당사자는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용서는 무엇인가. 바로 덕(德)이다. 옛 사람들은 덕을 쌓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참았고 인내와 절제로써 기다렸다. 자신 안에 덕이 쌓일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버티어 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덕에 도달키 위해선 시간이 요구된다. 어떤 미움도 순간에 생기지 않는다. 미움이 형성되는 세월이 있다. 그 세월을 무시하고 순간에 용서하려 들기에 번번이 실패한다. 미움이 쌓였던 세월만큼은 아니더라도 용서를 위한 노력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를 무시한 채 순간적 결심만으론 누구도 참 용서를 체험할 수 없다.



우린 너무 쉽게 용서를 잊어버리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상처가 있는데 어찌 잊어지겠는가. 먼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미운 짓을 했기에 미운 것이며 미운 감정은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어떻게 감정을 무시하려 드는가. 더구나 이 감정을 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용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상처의 치유는 내 쪽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보복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의 첫 작업이며 용서의 첫 단추를 끼우는 행동이다. 그런 뒤라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은총이 끌어주기 때문이다. 미운 감정이 살아날 때 미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까지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라는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삶의 어느 순간 미움의 상처가 아물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라고.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이 현실 안에 있겠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대답은 쉽지 않다. 추측컨대 주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답을 알려주신 것 같다. 이웃 사랑에 있어 우리가 어디까지 해야 완벽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들려주신 것 같다. 원수를 사랑하고 타인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거절하지 않을 때, 이웃 사랑의 완벽한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사랑의 이상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렵다. 이런 행동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가족 안에서는 할 수 있다. 말씀의 실천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선 어렵더라도 부부와 자녀 사이에선 말씀대로 살 수 있다. 지난날 이렇게 살았지만 실패와 억울함을 체험했더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용서는 천사의 행위다. 자신을 미움 속에 가두며 살아왔다면 이제 벗어나기로 결심해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용서의 길을 결심할 때 그는 벌써 천사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25         연중 제7주일   루가 6,27-38 (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



묵상-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은 모든 율법의 근본이며, 만고불변의 진리다.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고 하시며 이를 더욱 강화하신다.

인류역사는 이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가는 과정의 역사라 할수 있다. 이는 내가 얼마나 ‘인간화'되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이다.



1. 인간은 털 없는 원숭이인가?

인간을 보는 관점에 따라, 인간은 양복을 입고 약간의 체면으로 위장을 했을 뿐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보는가 하면, ‘하느님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신(神)과 동물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양면성을 말하는 것이다.



신병훈련을' 받던 때다. 60년대만 해도 1병훈련에서 가장 힘든 일은 배고픔을 참는 일이었다. 위에서부터 줄줄이 다 떼어먹고 보니, 보급현황이 말이 아니었다. 식사하고서 몇번 기합을 받고 나면, 식당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벌써 배가 고프기 일쑤다. 잔반(殘飯)통에 버러진 음식을 집어먹고, 식중독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구매부(PX)에서 빵을 사먹으려 해도 판매부원이 빵을 건네줄 때 옆에서 가로채어 가버리기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너무 배가 고프니까 하루 종일 침이 마르고 입이 쓰다. 이런 상황에서 건빵 하나를 나누어 먹는데도 자신과의 싸움이 여간 필요한게 아니다. 거기서 사람이 동물적인 본능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2. 인간화를 위한 역사의 수레바퀴



예수님이 오셨던 로마제국 시대에는 ‘누가 빛을 갚지 못하면, 그 가족을 데려다 노예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법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던 때였다. 그런 시점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틀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어라"고 외치셨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입에 풀칠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우리들이 듣기에도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꿈같은 말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2천년 전에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랑의 정신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그것을 위해 동분서주하셨고, 그것을 살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셨다고 할 수 있다.



노예시장이나 공개처형이 사라지고, 사형제도 폐지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남녀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야생동물의 야만적인 사육이나 포획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지만, 불법이므로 지탄의 대상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너무나 답답하고, 느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간사회는 인간화의 과정을 밟으며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인류역사가 나아가야 할 목표점인 것이다.



3. 善(선)으로 惡(악)을 이기는자가 참 승리자



‘역사가 얼마나 발전했느냐 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얼마나 증가했느냐로 측정된다'고 할수 있다. 각 사람의 인간다움을 측정하는 기준도, 누가 참다운 신앙인인가를 가려내는 기준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누가 참된 그리스도와 제자인가는, 영세한 지 얼마나 되었는가?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가? 성직자인가 수도자인가 평신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전례 때 얼마나 경건한 몸가림을 하는가 등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

인도의 간디는 오늘 복음 말씀을 정책화한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를 통해 ‘신사의 나라'라고 자부하던 영국의 야만성을온 세계에 고발할 수 있었고, 참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4. 자신과의 싸움을 매일 해야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복음의 말씀을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만다. 이것이 문제다. 복음 말씀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어 세상을 비춰야 하는 말씀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자로 삼아서, 그 범인을 참으로 회개시킨 사람도 있다.

  

본능적인 복수심이 치솟을 때, “미움엔 사랑으로, 저주엔 축복으로, 박해엔 기도로 응답하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과의 싸움을 매일의 삶 속에서 열심히 해야 한다. 고부간,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이 싸움이, 바로 역사를 더욱 인간화시키는 원동력임을 깨닫자!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신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범은 우리에게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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