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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14
분 류 연중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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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연중 제 6주일 ”
 

연중 제6주일



 18. 함세웅 신부(다)/ 31

         19. 나승구 신부(다)/ 32                  20. 서경윤 신부(다)/ 35

         21. 홍금표 신부(다)/ 37                  22. 신은근 신부(다)/ 39

         23. 강영구 신부(다)/ 40                  24. 강영구 신부(다)/ 44

         25. 강길웅 신부(다)/ 47                  26. 유진선 신부(다)/ 50

         27. 김몽은 신부(다)/ 51                  28. 김정진 신부(다)/ 53

         29. 김몽은 신부(다)/ 55                  30. 교구 주보(다)/ 56

         31. 김혜련 수녀(다)/ 58                  32. 가난한 사람아, 너희는 행복(다)/ 59

         33.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다)/ 61





18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행복과 불행

                                                      함세웅 신부



오늘 루가 복음의 말씀은, 마태오 5장에 나오는 여덟 가지 행복(진복 8단)과 병행을 이루는 상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루가는 마태오의 그것을 재정돈하면서(즉 순서의 바뀜과 행복된 조건의 수가 줄고 간단해진 것) 메시아의 근본 사상인 종말론적 요소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루가는 네 가지의 행복된 조건과 네 가지의 불행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박해받는 이는 행복한 반면/ 부유하고, 배불리 먹고, 웃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 그들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교회의 지상적 과업을 늘 염두에 두고서 객관적인 표현(제 3인칭을 사용)과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는 교훈적, 교육적, 의미로 서술하고 있지만/ 루가는 메시아의 종말론적 사상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 ‘지금' 가난한 여러분'은 ‘지금' 우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는, 직설화법과 함께, 이에 대등하는 불행한 조건도 제시합니다.

  

메시아의 종말론적이란 뜻은, 구약에서 예언되고 기다렸던 메시아에 대한 특징이 바로 가난, 굶주림, 울음, 박해라는 뜻이며, 이것은 사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종말론적이란, 우리 현세의 생활이 미래의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바로 연결되는 것이며, 하나라는 것을 일깨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한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을 짙게 해 주는, 즉 미래의 현실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것이, 또한 신앙인의 긍지이며 특징이기 에 말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이제 루가는 네 가지 불행한 조건을 나열합니다.

“부유한 여러분, 배불리 먹고 지내는 여러분, 웃는 여러분, 칭찬받는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선포는, 장엄하고 ‘아니! 그렇다면?'하는 놀라움과 함께,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이 있음을, 또 다른 나라의 새로운 기준이 있음을, 이 세상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미래가 있음을, 상선벌악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복음 선포'는 ‘가난하다', ‘부자다'하는 것이 단순한 행복과 불행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은 바로 ‘고통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며, 부유한 이들에게는 남을 도와 줘야 한다는, 이웃 사랑과 애덕의 실천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을 떠나서, 신앙을 떠나서도, 우리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공무원 숙청'이라는 말마디와 함께 고관들이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밀려나는 것을 보면, “어휴, 저 친구 돈이 많군! 집이 매우 크고 좋군!"하는 부러운 감탄사는 아예 자취를 감추고, 가엾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자리에서 밀려나서가 아니라, 그 부유함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들의 처지가, 이웃을 모르고, 애덕 실천의 결핍, 그 자체가 결국은 가엾고 불행한 것입니다.

올바른 행복이 무엇이고, 올바른 불행이 무엇인 줄을 알았던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뜻하는지, 루가가 또 우리에게 전달한 그 진리가 무엇인 줄을 알았다면 부유와 가난의 순간적 놀음, 장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남에게 멸시를 당하고,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의 올바른 긍지 때문에, 강직 때문에, 신앙 때문에 그리고 예수가 걸어간 길이 바로 이러한 길이었기에 나는 기쁘게 웃으며, 무릎을 꿇고 하느님 앞에서, 제단 앞에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먹물에 깨끗한 물 한 방울이 섞여진다 해서 깨끗해질 리는 없지만 ‘깨끗한 물 한 방울이 섞인 그만큼 먹물은 희어졌다’라는 ‘확신과 신념'에서 우리 모두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 먹물은 검음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이루어질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노력, 실천에 따라서 그 이루어지는 시간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또는 “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이 중에,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반성하면서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19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나승구 신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논리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이 쌓아올린 왜곡된 가치관의 적용으로 ‘느낀다는 것'을 불합리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논리적으로 풀어지지 않는 많은 말씀과 진실된 가르침들이 그저 그런 것으로 지나쳐버리기도 합니다. 그 중에는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소중한 삶의 가르침들이 그득한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논리의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묻어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느님을 바라보고, 믿음에 있어서도 논리에 맞추어 보아야 한다는 수렁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과 독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간들의 닫힌 논리와는 다른 열려진 논리와 느낌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야훼께서는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아무리 가물고 햇볕이 따가워도 아무 걱정 없이 줄곧 무성하여 싱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람을 믿는 이들은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이, 자라지도 못하고 말라버릴 것이라 비유합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유배를 떠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왜 유배를 떠나는지에 대한 설명을 해 줄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유배를 떠난 그들은, 단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벌하셨다고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그들이 지금 받는 벌은, 그들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당연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바꿔 하느님과의 계약을 잘 이행하고,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지금은 비록 유배를 가는 형편에 놓여 있더라도,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도 같이 아무 걱정 없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처지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들의 힘이 야훼께 있는 까닭에 의인들을 싱싱하게 푸른 나무로 비유하는 사상은 지혜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훼를 믿고 의지하는 의인들과, 사람을 믿는 악인들의 대조 역시, 지혜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활태도를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의인으로 살 것인지, 악인으로 살 것인지 결정이 나는 선택의 순간에 놓인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있는 우리들에게 행복과 불행에 관한 기준을 잡아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은 우리의 논리와는 멀기만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고 우는 사람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다른 누구의 말씀도 아닌 우리가 주님이라고,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루가는 다른 복음의 그것이, 스승의 말씀을 기록하여, 예수님의 예언적 메시지를 마치 입법자가 말하는 것처럼 표현한 것에 비해(마태 5,3-12) 솔직하고 간결한 표현으로 역사상의 예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창 성장단계에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을 어지럽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 ‘축복(祝福)'과 네 가지 ‘화(禍)'가 담겨져 있는데, 이것들은 예언자로서의 제자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가지 축복은 참된 예언자인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네 가지 화(禍)는 거짓 예언자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자신들의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참된 예언자는 결코 세상의 쾌락이나 즐거움, 돈과 재물, 지위 등과 인간 삶의 행복을 바꾸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창조된 것임을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거짓 예언자들은, 세상의 쾌락이나 즐거움, 돈, 명예, 지위 등이 그들이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목적이며, 전부라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체험을 통하여 참된 예언자의 길이 진정 하느님 나라를 사는 효과적인 길이며, 거짓 예언자들의 길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비참하고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삶을 영원히 가로막고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우는 것은 결코 정신적인 가난이나, 굶주림, 또는 슬픔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용된 회랍어 단어들은 생활 필수품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프토코이’라는 낱말은, 착취당하고 모멸받으며, 노예가 되고, 비인간화된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은 실질적인 가난인 것입니다. 가난은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상재화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이탈과 전적인 포기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둘째는 불의와 억압과 착취 때문에 소수의 부자와 권력자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빈곤에 처하게 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형태입니다.

첫째가 자발적인 가난이며, 극소수의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두번째는 다수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강요된 가난입니다. 불의하고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억압의 희생자들로 여겨지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의미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합니다.



출애굽 이후의 가난한 사람들의 개념에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겸손하고 단순한 이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믿지 않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함으로써, 하느님께 보호와 구출을 기대합니다. 성서에서 ‘야훼의 가난한 이들'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은 지상재화와 인간권력을 포기하며,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활동에 매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 형태의 가난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에 근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런 의미 안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희망의 선택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련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손에 한 가지씩의 희망을 잡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인 가난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의 목표인 부귀와 명예와 권력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누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이제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믿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20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면

                                                             서경윤 신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의 아들이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후에 우리 반 학생들의 움직임이 전연 달라졌습니다. 반장․부반장은 매일 아침 학교에 올 때 선생님 집에 들려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오고, 부잣집 아이들은 맛있는 것 좋은 것이 있으면 그 아이의 손에 둘려주고, 모두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아이는 아버지를 잘 만나서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나도 우리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험을 처서 반장이나 부반장을 뽑지 않는 이상, 내가 임원이 되기도 되셨고, 그렇다면 우리 집이 부자가 되서 그 아이에게 환심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든가, 이것도 저것도 못 되니 언제나 선생님의 시야에서는 사각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답답해하고, 오히려 그 아이에 대하여 무관심하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장․부반장이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려 자기들끼리 놀고, 선생님의 아들에 대해서 신나게 얘기 할 때는 어린 가슴에 독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도 나중에 반드시 어떤 큰 자리에 앉든지, 아니면 큰부자가 되리라!』

그때부터 아마도 권력과 부에 대하여,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경험을 하게된 것 같습니다.

 

재산에 대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래도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가난한 이가 부자보다 행복합니까? 나는,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할 수만 있으면 부자이기를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굶주리기 보다 배부르기를 선택하겠습니다. 울면서 살기보다는 웃으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남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기보다 사랑 받고 칭찬을 들으며, 누명을 쓰기 보다 이해 받기를 원합니다.

이럴 때 나는 행복을 느낍니다. 나중에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란 예수님 말씀 때문에 지금 불행을 선택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또 나중에는 더 행복하고 싶습니다.

  

지금 배부른 자는 불행이라 하셨기에 먹을 것을 두고도 굶주려야 합니까? 지금 웃는 자는 불행하다고 하셨기에 즐거운 일이, 예를 들어 아들이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했는데 슬퍼하고 울어야 합니까? 말도 안됩니다!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확실히 행복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우선 가난해야하고 그 중에서도 굶주리며 매일 울고 슬퍼해야 하며, 아무에게도 칭찬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의 아들 때물에 미움받고 욕을 먹어야 하며, 누명을 써야만 한다면, 그럴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칭찬과 사랑을 받기도 하며 부자들이 슬퍼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참된 행복의 행방은 어떻게 됩니까? 생각할수록 혼란에 빠집니다.


처음부터 성경 말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구원자를 기다리던 시기에 예수님이 나타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가난하고 굶주리며, 세상으로부터 별로 시선을 끌지 못하던 버림받은 소외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장 성공할만한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오히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언젠가는 우리를 구원할 그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설교를 듣고, 바로 이 분이야말로 하느님이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노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에 침해를 받을까봐 예수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앉을 뿐 아니라 결국 그를 잡아죽이게 됩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던 사람들과 부자들은 오히려 현실에 만족하고, 가진 것에 대한 집착으로 예수께 자신을 개방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가진 권위와 재물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께 신뢰하기률 거부했습니다. 어쩌면 대다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키워 나가는데 이용하여 성공했기 때문에, 이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예수의 설교 듣기를 거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수많은 소외계층을 두둔하며, 오늘 성서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 예수님도 느닷없이『가난한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하실 게 아니라 분명하게 말씀하셨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가난한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을 열고 사람의 아들이 설교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고, 신뢰함으로 진정 행복합니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보니, 부자가 재산을 많이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재산이 그리스도께 신뢰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배부르게 먹는 것이나, 지금 웃고 지내고, 뭇 사람으로부터 칭찬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지키는데 급급하며,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이미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어느 정도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이나 부가 이기적으로 남용됨으로써, 우리자신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권위에 계시고, 가장 부유하신 분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있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아무도 부럽지 않고, 아무것도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신뢰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나기만 하면 우리 주변 세상 사람들의 움직임이 확 달라질 것입니다.











21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행복과 고통

                                                           홍금표 신부



새옹지마 (塞翁之馬)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변방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인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어느 날 변방에 사는 늙은이가 아끼던 말이 달아난다.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이를 재앙이라고 여겨 노인을 위로하지만,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슬퍼할 것 없다. 혹시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소?」 얼마 지나지 않아 달아났던 말이 다른 많은 야생마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웃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몰려와,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고 늙은이를 축하한다.



그러나 변방의 늙은이는 다시「기뻐 할 것 없다. 이 일이 혹시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 ?」라고 대답한다. 그 후 말타기를 좋아하던 그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낙상해 다리를 다친다. 이웃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러 찾아오자, 늙은이는 다시 같은 반응을 보인다.「슬퍼할 것 없다. 화는 복으로 바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변방 오랑캐가 침입을 해 크게 전쟁이 터진다. 마을의 많은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어갔지만, 노인의 아들은 불구자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말은 우리 삶에 화와 복이 공존함을 보여 주면서, 화와 복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만 판단할 것이 못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루가의 평지 설교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루가의 평지 설교는 마태오와는 달리 4가지 행복선언과 4가지 불행 선언이 나온다. 성서 주석가들은 이중 처음 3가지 행복선언만을 예수님께서 친히 이야기하신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평지설교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은 장차 다가올 하느님 나라가 있기에 행복하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관점에 의문부호를 던진다.

   

흔히 우리는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을 행복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행복과 예수님의 말씀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오늘 복음에서 불행하다라고 선언하는「부요한 사람들과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웃고 지내는 사람들」과「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사람」들이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은 이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역설적인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 두 가지 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진정한 행복은 미래를 향한 개방성으로 판단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새옹지마란 말처럼 인간에게 복과 화라는 것은 삶의 순간 순간에서 교차되는 일이기에, 지금 현재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지금 현재의 상태를 가지고 행과 불행을 따짐은 큰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의 척도는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주어질 미래의 어떤 상태가 행복의 척도다라는 것이 평지설교의 의미일 것이다. 때문에 행복의 척도가 현재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태도는 분명해진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되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절대 미래인 하느님 나라를 향한 완전한 개방성 이것이 행복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진정한 행복은 고통과 함께 고통 속에서 잉태됨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이 복되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인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 삶에서, 고통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삶에 고통이 없다면 아마도 그 삶은 밤이 없이 낮만 계속되는 세상과 비슷할 것이요, 나와 이웃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머리가 아플 때 머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팔이 아플 때 팔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고통은 부정적인 그 무엇만이 아닌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그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인들의 생을 읽다 보면 그들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이들을 한결 성숙하고 진정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마도 예수님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라고 이야기하신 것도 바로 행복이 고통 속에서만 싹트는 이러한 모습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 그리고 우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분명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행복한 사람일 수 있는 것은, 그 상태를 통해 가지는 미래를 향한 개방성 때문일 것이고, 고통의 체험을 통해 나와 이웃 그리고 인생과 세계를 성찰하고, 고통 안에서 싹트고 있는 참다운 행복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을 보면서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아픔 앞에 좀더 의연한 자세를 가져보자











22              연중 제6주일   루가 6,17.20-26 (다) 행복선언  

                                                              신은근 신부



누구든 조금씩 행복에 대해선 알고 있다. 행복이 무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표현은 안해도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나름대로 느낌을 갖고 산다. 그렇지만 확신에는 망설인다. 행복해 보이건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행복하다고 말하면 진정 날라가 버리는 것일까. 행복은 은총이다. 주님께서 주시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움보다 겸손으로 대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신앙인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본질은 주님의 선물이라 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행복은 불안으로 바뀐다. 그러니 참 행복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이 세상 기준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굶주리며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세상에선 아무도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원인이 하느님 때문이라면 다르다. 그런 삶을 산다면 반드시 함께 한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 함께 하시면 누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갈수록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지향한다. 물질이 없으면 죽는 줄 안다. 국가 전체가 경제대국을 지향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 말씀은 더 깊은 묵상을 요구한다. 진정 필요한 말씀이지만 잘못 이해하면 가난의 행복을 외치는 궤변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데 있다고 했다. 이것이 행복의 열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가. 우선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야만 채워주신다. 가난에 대칭되는 표현은 부유함이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소유는 언제나 또 다른 소유를 부른다. 부자가 자꾸만 부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든 재물을 소유하면 더 많은 재물을 갖고 싶어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나중엔 사람이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해 버린다.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은 이 끝없는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자세를 말한다. 소유의 욕망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자세를 말한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될 때 물질 앞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니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구별을 물질의 소유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진정한 부자는 소유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언제든지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분의 힘을 느낀다.



누구든 절제와 자유를 갖추면 행복해진다. 그런 자세로 삶을 살아간다면 어찌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어찌 세상이 그에게 아름다움을 주지 않겠는가. 삶이 어찌 그에게 무섭고 두렵겠는가. 그는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란 말이 어울린다. 하느님의 힘이, 하느님의 세력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부자는 물질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을 소유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깨닫도록 하자.











23         연중 제6주일   루가 6,17.20-26 (다) 우상 숭배자들의 최후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6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 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비극적인 최후를 지켜 본 사람입니다.

예레미야가 유다 왕국에서 예언자로 활동하고 있을 무렵, 유다 지방에는 온갖 종류의 우상 숭배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열왕기 하권 23장을 보면, 그 때 당시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나옵니다. 그 우상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바알 우상, 아세라 우상, 해와 달과 별, 몰렉 신, 아스다롯 여신, 그모스 신, 밀곰 신 등 우상의 숫자만 해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이런 우상들을 섬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의 숫자가 많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우상을 섬기는 방법이 참으로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었습니다. 곳곳에 우상을 섬기기 위한 신당과 제단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뜰에까지 우상들을 위한 제단을 쌓아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은 팔레스티나의 토착 신인데,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습니다. 신전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종사하는 여자 사제들이 있었는데, 모두 창녀들이었습니다.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산당에서 온갖 추잡하고 비도덕적인 일을 자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분노를 사고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흉측한 일은 벤힌놈 골짜기에서 몰렉 우상을 섬기는 일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골짜기에 쌓아 올린 제단 위에서 자기들의 어린 자식을 잡아다가 살라 바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재앙을 몰아내고 복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를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유다 백성들은 타락할 대로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의 타락은 물론이지만, 다윗의 정통 왕조를 이어받았다는 왕실조차도 우상 숭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실과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다 왕실과 온 백성은 그를 박해했고, 심지어는 그의 일가 친척들마저도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때로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실망하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소리 쳐도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박해와 고난만 돌아왔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 하느님께 하소연해 보았지만, 하느님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의 바빌론 왕국이 하느님의 칼이 되어, 우상 숭배에 빠져서 타락한 유다 왕국을 심판하러 쳐내려왔던 것입니다. 우상 숭배에 빠져서 윤리적,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고 온갖 향락과 퇴폐를 일삼으면서 국력이 분산되어 있던 유다 왕국은, 바빌론을 대적할 힘이 없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 때 유다의 왕은 여호야긴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귀족들과 함께 모두 바빌론으로 포로의 신세가 되어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키야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시드키야는 이미 한 차례 바빌론 왕국을 통해서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졌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시드키야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전적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만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시드키야는 야훼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인 약은 꾀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와 띠로와 암몬과 동맹을 맺고 바빌론과 대항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빌론 왕국은 하느님의 심판의 칼이 되어서 회개하지 않는 유다 왕국을 내리쳤습니다.

 

시드키야는 전쟁에 져서 동쪽 사막으로 도망 쳤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미 그의 아들들은 모두 사로잡혀 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자기 아들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 눈알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서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577년 유다 왕국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유다왕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상숭배를 버렸더라면,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더 믿었고,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들이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한 종말이었습니다. 회개를 외쳤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조국 유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아야 했고, 그마저도 동료들의 손에 끌려 이집트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에집트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언자 예레미야가 회개를 외치던 시대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온갖 우상이 난무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우상들을 섬기기에 정신을 빼앗긴 시대가 오늘 우리 시대입니다.

사치와 낭비, 향락과 퇴폐의 우상, 돈과 권력의 우상, 과학 만능의 우상이 지금 이 땅을 휩쓸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상들을 섬기느라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실상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하여 필요한 것일망정,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데 정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 옛날 유다 백성들이 몰렉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어린 아이들을 잡아서 살라 바치듯, 오늘 수없이 자행되는 태아 살해를 봅니다. 생명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망각하고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는 이유, 좀더 편해야겠다는 이유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부모의 손에 의해 살해되어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자기 아이들을 잡아 바치면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태아 살해는 일 년에 무려 백오십만 건 이상입니다. 이런 일이 자행되는 가운데 우리사회는 심각한 생명 경시 풍조에 물들게 되었고, 그 누구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온갖 추잡하고 부도덕한 일을 자행했듯이,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향락과 퇴폐, 사치와 낭비 풍조는 심각합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향락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벌어지고 있는 부녀자 납치와 인신 매매는 그 옛날 노예 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돈이라는 우상, 재물이라는 우상, 향락이라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자행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엉망이 되어 버리고, 생산 현장의 근로자들의 근로 의욕이 퇴조하고, 모두가 일하기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하는 현상도 우상 숭배에 빠진 우리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명 경시, 윤리 도덕의 타락, 사치와 향락 그리고 낭비 풍조, 근로 의욕의 상실 이 모든 것들이 물질 만능, 황금 만능, 향락 제일주의의 우상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재앙입니다. 우리가 이 재앙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쳐 먹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유다 왕국이 망했듯이, 우리도 그런 불행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집트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 주리라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벌판에 자라난 덤불과 같아, 좋은 일 하나 볼 수 없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24        연중 제6주일   루가 6,17.20-26 (다) 가난-무사, 무욕의 경지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6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긴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의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의 진복팔단을 산상 수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의 산상 수훈에는 복 받을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고, 화를 입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 복음의 말씀에는 복 받을 사람뿐 아니라, 화를 입게 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이 말씀은 루가 복음의 내용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지금 웃고 즐기는 사람,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은 불행하다.”



예수의 말씀이 이러하지만, 우리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과연 가난한사람이 행복합니까? 지금 끼니를 때우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지금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실제로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과 박해는 행복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피하고 싶은 불행입니다.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이 불행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도록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일을 합니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입고 웃고 즐기며 살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명예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의미는 무엇이며,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만일 예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일도 하지말고 돈도 벌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즐기기 위하여 게으름을 피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먹지도 말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가난이란, 경제적인 가난을 포함해서 인간의 한계와 부조리함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그래서 하느님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절실하게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적나라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가난입니다.

그래서 실상은 우리가 가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가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이란, 불교적인 용어를 빌려 쓰자면, 깨달음의 경지, 무사(無邪), 무욕(無慾)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말합니다.

복음서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벗이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들이야말로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어울릴 수 있었고 예수와 한 식탁에 앉아서 빵을 나눌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 때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죄인들 예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없었던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 숨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그들은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적나라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빈털터리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가난 그 자체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또 내세울 만한 것도 없기에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고, 그래서 자신의 무소유, 무능력과 한계를 깨닫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텅 빈 자신 속에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담고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는 물욕과,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일으키는 애욕에 자기를 얽어매어, 고뇌와 번민 속에 몸부림치기보다는, 차라리 물욕과 애욕을 벗어 던지고 자기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평화와 은총으로 충만코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은, 거지가 되어서 깡통 하나만 달랑 차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뇌(苦惱)와 번민(煩悶)의 근원인 애욕과 물욕을 벗어 던지고, 무사 무욕의 빈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해, 무한히 자유로운 삶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왜 집도 버리고, 고향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출가하여 떠돌이가 되셨습니까? 마태오 복음 8장 20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예수는 왜 이토록 철저한 가난뱅이가 되셨습니까? 그분은 무사 무욕의 경지에서 하느님으로 충만코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싯다르타라는 이름의 왕자였던 석가모니는 왜 왕궁을 떠나 출가하였습니까? 그에게는 왕의 자리가 보장되어 있었고, 예쁜 왕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갖 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애욕과 물욕을 끊고자 했고, 결국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가장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의 모습을 봅니까?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에게서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의 모습에서 자기의 목숨마저도 내어버릴 수 있는 무사 무욕의 극치에 도달하신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목숨마저도 버린 가난한 예수 안에 하느님의 구원이 충만함을 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부자들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들이 불행한 것은 돈이나 재물을 많이 지녔기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우선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그런 것들 때문에 진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눈먼 사람들이 부자들이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돈과 재물과 지위와 명예 때문에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발가벗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닌, 온갖 군더더기로 치장된 모습을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착각합니다. 고급 호화 아파트에 사는 자기 모습,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값비싼 외제 수입품만 사용하는 자기 모습,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머리 조아려 떠받들어 주는 자기의 모습, 그리고 칭찬과 박수 갈채를 받는 모습을 본래 자기의 모습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래의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온갖 군더더기로 치장된 자기 모습만 바라보기에,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구해야 할 절박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닌 것을 자랑삼고, 지닌 것으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하느님이 없어도 스스로 구원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예수의 초대에 “예” 하고 응답할 자세도 되어 있지 않고, 예수께서 초대하더라도 이런저런 핑계에 그 초대를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라는 분은 귀찮고 성가신 존재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닌,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그들은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재물과 돈, 권력과 향락에 희망을 걸고 있는 그들은 자유로을 수가 없습니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거미줄은 더 단단히 곤충의 몸을 휘감게 됩니다. 그와 같이 돈과 재물, 권력과 향락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는 물욕과 애욕 때문에 몸부림치게 되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물욕과 애욕의 사슬에 얽매인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날개를 펼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서 그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온갖 잡동사니로 자기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 군더더기로 치장된 자기를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착각하는 눈먼 사람들, 물욕과 애욕의 노예가 되어 번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불쌍한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멀리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수도자들과 수도승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드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고, 하느님과 대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무한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향해 훨훨 날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가난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겨운 일인지요.

  

여러분은 수도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닙니다. 세속에 묻혀서 살아야 할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에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면 그 무엇도 우리의 가슴을 채워 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5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행복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17,5~8 (사람을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지만 나를 믿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제2독서 Ⅰ고린 15,12.16~20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복 음 루가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희망을 가져 야 합니다. 처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간절하게 그분께 의탁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길이며 축복받는 길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일이 잘 안된다 해서 하느님보다는 세속의 지혜로 처신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을 저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행복은 누구나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마저도 그 행복을 세상의 기준으로만 판단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권력 이 있으면 행복하며 사는 것이 편하면 행복한 줄 압니다. 그래서 모 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행복을 잡기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 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참 행복은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부서지는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오직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을 믿는 것이 더 쉽게 보이며 또 안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속입니다. 세상도 우리를 속입니다. 하느님만이 진실하시며 하느님만이 안전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도시 본당에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시골 사람들보다 도 시 사람들이 점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혼인을 한다, 시험을 본다, 그리고 뭐가 잘 안된다 하면 우선 점쟁이한테 달려갑니다. 거기 가서 뭔 말을 들어 봐야 직성이 풀리 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믿는 하느님은 도대체 뭡니까.



사람이 무엇을 믿으려면 보다 완전하고 확실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우선은 자기 부모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순명하고 그분 뜻에 따르는 것이 결국은 행복입니다. 거기서 복이 옵니다. 그런데 자녀가 자기 부모는 신뢰하지 않고 어떤 건달이나 불량배들을 더 따르고 신뢰한다면 그럼 그 부모는 무엇입니까. 바로 거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습니다.



행복이 뭡니까. 오늘 복음에 보면 행복한 사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굶주린 사람이 행복하며 우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리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이게 도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부요한 사람이 불행하고 배부른 사람 이 불행하며 웃는 사람이 불행하고 그리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사연입니까.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며 지위가 높으면 행복하고 그리고 남에게 굽히지 않고 떵떵거리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세속의 사정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자기 재물, 자 기 지혜, 자기 권력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붙잡을 것이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이나 억울하게 당해서 우는 사람이나 그리고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여럿 있어도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항상 어린 아기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큰놈은 큰놈대로 제 일을 제가 처리하기 때문에 부모께 의존하는 것이 약합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는 전적으로 부모의 손에 의탁되어 있습니다. 붙잡을 것이라곤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기가 더 행복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환자 마을이 있는데 그들이 어려웠을 땐 붙잡고 매달릴 것이 오직 하느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따뜻한 방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하느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안 붙잡아도 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붙잡는 슬기가 있을 때 그는 행복하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지혜가 있을 때 그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복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가까이 있으면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하지만 그분과 멀리 있으면 아무리 잘살아도 실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지혜를 알아야 합니다. 참 행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재산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편하고 즐거운 것으로만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누가 더 하느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느냐에 행복의 기준이 그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믿지 말고 주님께 의지하도록 합시다. 힘들고 어려우면 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뜻에 따르도록 합시다. 그것이 바로 참 행복입니다.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예레17,7).





26      연중 제6주일   루가 6,27-38 (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유진선 신부



세상에서 행복을 싫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행복은 거의 본능적인 욕망으로 인간들이 당연히 구구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행복은 삶을 의미있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 날마다 애쓰며 노력합니다. 행복은 서로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소중한 것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인생의 필수조건이 되며, 너도 나도 다투어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나타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산상 수훈 제 1조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하신 선언은 행복을 물질과 다과 여하로 계산하는 상업주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라 하겠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의 가난을 예찬하신 것입니다.

탐욕과 이기심이 들끓고 권력과 명예가 난무하고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인 세상에선 온갖 불행과 슬픔이 뒤따를 뿐입니다. 사람은 다투고 싸우고 살인을 하면서까지 무엇을 수중에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요? 부귀, 명예, 지위, 이것들을 위해 탐욕스러워 지는 인간성 때문에 사회면은 점점 어두어질 뿐입니다.

부(富)를 얻기 위해 사람은 고심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근심을 하며, 그것을 씀에 있어서 유혹을 받고, 그것을 잃으면 비애에 빠집니다. 이런 갈등속에서 결국 자아에 집착하게 됩니다. 「나」아닌 우리로서 협동해서 살아가려는 지혜보다는 나만을 생각하는 아집에 말려들어 사리 판단이 둔화됩니다. 이웃의 이해는 상관하지 않고, 의로운 일을 부정하여 인정도 사정도 없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재물만을 취하려는 아집 때문에 남은 것은 인간소외, 인간상실, 인간기계화 뿐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성이 얼마나 저락하였는가를 신물의 사회면은 지겨웁도록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평화회의가 수없이 자주 열리고 있을지라도 아무도 세계의 평화가 박두해온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인류 총 불안시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과제입니다. 이 모두가 물질풍요에 맛을 들인 인간이 물질을 추구하는데만 탐익하고 그래서 사람은 점차 물질주의화 해가는데 그 원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몇 개의 화학원소로 분해될 수 있는 물질로만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좀더 중요시해야 할 마음(정신)이 있으며 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생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생명이 물질적인 공급에 전혀 영향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그것들은 풍요한 물질적인 공급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합니다. 사람이 물질을 얻으려는 노력 속에서 물질계에 익숙해지고 만성화해 가면서도 무엇인가 불안을 느끼고 미흡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요 이것은 인생이 이 지상에서의 생활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충족이나 만족이 불가결한 요소인 것처럼 정신적이고 영적인 요소 또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물질계의 지나친 추구나 탐욕으로 인간이 얻은 것은 불안과 불신과 투쟁이며 잃은 것은 인간성과 사랑과 경건 곧 신령한 사물에 대한 사유(思惟)-인간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손익의 현황은 잃은 것이 얻는 것에 비해 엄청납니다.

인간은 탄생하여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란 것을 추구하는 일에 내맡기고 있고 그러한 일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 파묻힌 인간들은 인생의 행복은 그가 가진 욕심충족에 정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의 축적의 다과로, 권력장악의 대소로, 향락 생활의 장단으로 인생을 풀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 도시 속에 사는 세속인간의 부푼 욕망은 얼마나 메꾸어졌을까요? 설혹 그러한 욕망이 달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란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정신적인, 영적인 그 무엇을 채우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면서 자기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고 절대자의 은총에 매달리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참된 행복은 외적인 복, 유형적인 복 보다 내적인 복, 무형적인 복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빌딩의 숲을 지나노라면, 호화판 주택을 보노라면, 일금 50원으로 승차 계약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다가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자가용을 보노라면 문득 자기 행색의 초라함이 사정없이 엄습하여 와도 그것에 말려들어 가지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엄동 속에서도 봄을 살아가는 희열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는 가난하여도 보이지 않는 것에는 부요함을 누리는 생활 철학이 서있기 때문입니다. 진시황도 부러워 할만한 주택에서 살면서 영양식을 즐기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기 속마음의 빈혈현상을 의식하고 있지 못한다고 그는 불행한 인간입니다. 보이는 것에는 부요하여도 보이지 않는 것에는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정시의 세계가 도외시된 물질 일변도 현대 문명은 다른 한편에서 그 무서운 결과를 거두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 세계와도 조용한 묵상과 기도의 호흡이 있어야 하고 생명의 말씀 양식이 공급되어야 하고 영적 운동이 있어야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없을 때 인간은 방황하고 마음에 평화가 없게 됩니다. 오늘의 문명구조에서 인간들이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맨 먼저 바로 이 가난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삶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재능, 재물, 능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였을 때 참 행복, 참 삶의 가치를 느끼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무아적인 희생 즉 사심과 이기심을 떠난 봉사를 함으로 마음의 행복, 참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27             연중 제6주일   루가 6,27-38 (다) 가난과 행복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전해줍니다.

“가난한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 그러나 부유한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여러분은 불행합니다. 여러분이 굶주릴 날이 올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을 영원한 세상이라 착각하고 세속적인 물질과 명예, 쾌락 등에 마음이 빼앗겨 그것들만 찾아헤매면 영원한 저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먹는 것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먹고 입는 데만 마음을 쓰고, 세속적인 일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즉 물질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의 영혼과 내세에 대한 생각을 잊고,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탐내는 행동은 곧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이 되기 때문에, 차라리 물질적인 가난보다도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에게 의지하며 육체를 제 원조자로 삼고 하느님께로부터 제 마음을 떼어버리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경고합니다. 그와 반대로, “복되다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사람, 그의 소원이 채워질 것”이라고 층계송에서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도 물질에 집착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우리 한번 조용히 반성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덧붙여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6, 31-33).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모든 인간은 각자가 타고난 재질과 특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이 세상을 보다 살기좋게 만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먹을 것만을 생각하고, 남의 일을 짓밟고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사회는 완전히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사회이며, 물질만능의 사회입니다. 상호부조라든가 타인을 위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인간이 무시되고 성실성과 믿음이 약해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의 복음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만이라도 현사회의 풍조에 물들지 말고 주님의 복음에 입각한 삶을 살아 갑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며, 보람있는 삶이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십시다. 세상이 혼탁하고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우리의 착한 행위는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외인들이 찾고 있는 썩어질 육신을 위한 일시적인 안일과 향락이 영혼에 얼마나 해가 되는가를 생각하고 우리는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와진 마음으로, 참으로 행복한 삶이 되도록 주님의 길을 따라갑시다.











28              연중 제6주일   루가 6,27-38 (다) 참된 행복

                                                  김정진 신부



오늘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참된 행복에 관하여 선언하심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설교는 세말론적 구원을 예고하며 세말에 가서 완성되는 행복을 가르칩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이 완성시켜 놓을 새로운 나라를 미리 연상시키십니다. 모든 인간은 새로운 계명을 받게 되는 길인 죽음을 통해서만 참된 행복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참된 행복이란 현세의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 주십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의 루가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이교도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마태오 복음의 여덟 가지 행복에(마태 5, 3-9) 비해 세 가지 행복에 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선두로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세상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더 좋은 것들을 갈망하며 희망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현세에서는 고통과 노고와 십자가를 달갑게 받아들이며 앞을 바라다보며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새로운 것을 새로운 나라인 천국에서 맞이할 것에 전적인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 반면에 예수님은 부유한 자들, 배부른 자들, 웃으며 즐거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불행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이 세상이 현실에서 만족을 찾으며 현재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찰나적인 현세 행복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생각지 않습니다. 이들은 또한 저 세상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장차 닥쳐올 죽음의 심판과 멸망에 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에 지극히 불행한 자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상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서로 정반대인 심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으며 타협이 없습니다. 현실을 직시해 보면 가난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 우는 이들은 저 부유한 이들, 배부른 이들, 즐거운 이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내쫓기며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혁명적이며 강력한 설교자인 예수님은 부유한 이들, 배부른 이들, 즐거운 이들의 편이 아니고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고통을 받는 이들의 편을 들어주고 격려하며 고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현재의 이 세상을 더욱 좋게 현세적 행복을 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밑바닥 인생들, 사회의 소외자들을 돌보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셨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 드린 바와같이 예수님은 단순한 윤리 교사가 아니라 세말론적 미래의 구원을 알리는 복음 선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말론적 저 세상의 영생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말론적 저 세상의 영생을 예고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선정(善政)을 드러내셨습니다. 즉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슬퍼하는 이들, 병자들, 어린이들, 목동들, 과부들과 같은 소외자들을 아끼시고 가까이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철저히 살아가신 <이웃 사랑>은 새로운 나라에의 구원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참된 행복한 자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참된 행복이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이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참된 행복의 향유자는 세상의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하느님을 위하여 비어 두게 됩니다. 온갖 욕정과 탐욕과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의 부귀와 공명과 명예에 물들지 않고 권력과 쾌락에 휩쓸리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게 됩니다. 이같은 마음이야말로 가난한 자세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하늘나라는 이러한 이들의 소유이며 약속된 선물입니다.



한편 가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가난을 단순한 물질적 사실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순수한 정신적 열망으로 만드는 것도 잘못이란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덕행이라면 가난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질적 가난은 경제적 조건이지 덕행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 중에는 물질과 금전의 애착심으로 한 평생을 불타는 탐욕으로 일관하여 부귀와 쾌락을 동경하며 이에 집념하는 자들은 결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아닙니다.



가난은 반드시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며, 참된 행복을 가져오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참사랑은 가난으로 인도하며 가난을 좋아하며 만족합니다. 부유한 자라도 사랑이 있다면 가난한 자의 편이 되고 가난을 동정하여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첫 번째 참된 행복은 가난이라고 예수님은 언명하셨습니다. 즉 현세적인 행복의 개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사도 1, 6). 이같이 현세적 출세와 명예로 가득 찼던 사도들의 마음에도 일대 전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마음은 세속적인 부요한 처지에서 가난한 상태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참된 행복의 승리를 축하하는 찬미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우리 생활을 하느님께 맡기며 가난한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그분은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게 하시고 보잘것 없는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참된 행복을 꼭 주실 것입니다. 아멘.











29                    연중 제6주일   루가 6,27-38 (다)

                                                            김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전해 준다. 이 지상적인 어떠한 행복(명예, 지위, 부귀, 권력, 쾌락)도 인간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인간은 원래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자이므로, 천상적인 것이 아니고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길이 없다.



루가는 네 번 되풀이해서 “행복합니다”라고 한 다음, 다시 네 번 반복해서 “불행합니다”라고 서술한다. 첫째는 “가난한 여러분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가난은 결코 행복한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기쁜소식은 세속적인 재부(財富)를 나누어주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재산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얻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주는 것들에 대한 허무함을 절감하고, 천상의 것, 영원한 것들에 굶주리고 갈망하는 가난한 자들은, 앞으로 차지하게 될 참된 행복에 대한 기대에 사는 것이다. 반대로 현세적인 것으로 부유해진 사람들은 천상의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없거니와 미래(내세)를 싫어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더욱 더 현세에만 집착한다. 그리고 그 집착에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는 행복을 찾으려니 더욱 초조해지고 탐욕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지금 굶주리는 여러분은 행복하다”는 둘째 구절은 하느님 나라의 또 하나 다른 면이다. 그들은 궁핍하여 굶주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알기 때문에, 미래에는 결코 그런 일이 없도록 내세에 대한 희망 안에서 산다. 배불리 먹고 흥청대며 마시고 향락하는 자들은, 그것이 결코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현세의 그것이 행복인 양 현세의 물질에 집착하는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의 배(腹)를 하느님으로 착각하고 있다.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우는 여러분은 행복하다”. 지금 이 세상에 대해서는 결코 만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세에서의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렇게 웃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세의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자들은 그대로 그것에서만 웃고 울고 야단이다. 지금의 이 세상은 미래의 영원한 삶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향을 그리는 사람은 그 그리움에 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웃고, 그 웃음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투고 시기하며 울고불고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찾던 웃음 대신에 미래에는 통곡이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미원하고 내쫓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 여러분은 행복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칭찬할 때 여러분은 불행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완전히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사람의 편에 선 자들은 하느님 편에 선 사람들을 박해하고 시기하며 욕한다. 그리고 세속적인 칭찬과 허례와 허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아는 사람은 현세의 그러한 것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현세를 보람있게 살아간다.

신앙의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세상에서 박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아첨이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를 망치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어느 것이 하늘나라를 위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이 세속적인 박해나 칭찬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의연히 걸어간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을 때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시다.”(Ⅱ고린 6, 8)











30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행복선언



1. 복음이야기(루가 6,17. 20-26)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일반 청중들에게 하신 설교입니다. 루가 복음서는 예수께서 평지에서 가르쳤다 하여(루가 6,17) 평지설교라 부르고,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께서 산에서 가르쳤다 해서(마태 5,1) 산상설교라고 부릅니다. 루가의 평지설교와 마태오의 산상설교는 모두 행복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루가에는 네 가지 행복선언이 들어있고 마태오에는 아홉 가지 행복선언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루가 복음서에는 마태오에 없는 불행선언 네 가지가 나옵니다.

아마도 복음서 작가 루가가 네 가지 행복선언과 짝을 맞추기 위해서 네 가지 불행선언을 만들어 덧붙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네 가지 행복선언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루가의 네 가지 행복선언과 마태오의 아홉가지 행복선언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을 두고 세 가지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50-60년 경에 씌어진 예수 어록에는 세 가지 행복선언과 유다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행복선언 한개가 추가되어 모두 네 가지의 행복선언이 실려 있습니다.



루가는 예수 어록에 실린 네 가지 행복선언을 충실히 옮긴 반면에 마태오는 네 가지 행복선언에다섯 가지 행복선언을 보태서 아홉 가지 행복선언을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마태오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윤리적으로 각색했습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이 복된 게 아니라 ꡐ영으로ꡑ 가난한 이들이 복되다, 그냥 굶주리는 이들이 복된 게 아니라ꡐ의로움에ꡑ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복되다는 식으로 고쳐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친히 선포하신 세 가지 행복 선언의 형태는 루가 6,20-21에 실려있다 하겠습니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 !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



2. 우리의 이해

루가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 들어있는 행복선언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예수님이 친히 발설하신 행복선언의 의미, 어록에 실린 행복선언의 의미, 그리고 마태오가 나름대로 윤리적으로 각색한 행복선언의 의미를 따로따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루가 6,20-21에 따라서 세 가지 행복선언의 의미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활약하실 당시의 갈릴래아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소외당한 한 맺힌 민초들, 곧 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늘 가난하고 배고프고 서러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상대로 삼중 행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굶주리고 서럽지만 닥쳐올 희망찬 미래가 있기에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두고 가난ꡑ에 대해서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찬 미래에 대한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 복을 듬뿍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복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익혀 그 가르침을 이루어 드림으로써 복음을 발생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손해도 보고 억울한 일도 겪게 됩니다. 그래서 현실은 언제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때가 오면 오늘의 답답한 현실이 크나큰 행복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믿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희망찬 미래의 약속을 우직하게 믿으며 오늘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31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언년이 할머니

                                                    김혜련 수녀



콧등이 시큰해지는 할머니의 이름과 모양새입니다. 언챙이로 태어나 버려졌다는 할머니. 고향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그래서 늘 대답은 ꡐ난 아무것도 몰러ꡑ입니다.

입술 사이로 말이 새는 할머니. 어느집 개굴창에 버려진 것을 주인댁이 기르며 붙여준 이름이 언년이였습니다. 이름이 희귀하고 재미있어 “할머니,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언년이가 뭐람, 그렇죠?” 하고 여쭐라치면 대뜸 하는 말씀이 “입이 째졌으니 언년이지ꡑ하시며 빙긋이 웃으십니다. “할머닌 이름 때문에 놀림 많이 당하셨겠어요.” 하자 “글쎄 말여, 언년이가 뭐여…” 하며 역시 빙긋이 웃으십니다. 그러나 말끝을 흐리는 할머니의 마른 가지처럼 바싹 여위신 얼굴위로 또르르 눈물이 흐릅니다. 가슴이 저려오고 시려옵니다.



할머니는 옛 이야기를 꺼내기를 꺼리십니다. 늘 그렇듯 좋은 꼴을 못보고 살아왔기에, 아니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 과거 이야기는 마음 속에 접고 사는 것이 편하다고 했습니다. 긴 한숨 속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숨소리는 살아온 고통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글로 써도 끝이 없는 이야기가 우리 인생의 이야기이며, 글이 짧은 인생은 말로 풀어내는데 할머니는 늘 말이 없으십니다. 넓직한 침묵의 그릇에 삶을 담고 할머니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를 않습니다. 당신의 팔자고 하늘이 준 운명일 것이라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면 산 사람 중에 죽을 사람이 많을꺼야…”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얻은 결론은 할머니의 신앙고백이요 부활에 대한 확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예수께서 부활하셔야만 했던 이유를 알 듯 싶었습니다. 할머니의 입을 빌어 하늘은 산상수훈의 실현을 보여 주고 들려 주고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가끔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주어진 삶에 외로움은 영원한 친구요, 가난은 떨어지지 않는 동반자요, 천대와 무시는 당신의 친숙한 이웃이기에 멀리 할 수 없는 것 이라고.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당신 주변에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고 어려운만큼에 비례하여 하느님께 매달린 것이 아니였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하십니다.

   

그 어느 지식인의 말씀보다도 언년이 할머니의 삶은 존재 자체가 말씀이요, 살아있는 역사요, 진실된 가르침이요, 오늘 내가 만난 예수님이었습니다.

언년이 할머니는 오늘도 굽은 허리, 야윈 몸으로 당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계십니다. 할머니의 삶의 몫을.











32    연중 제6주일   루가 6,17.20-20 (다) “가난한 사람아, 너희는 행복하다"



묵상길잘이 : 역사의 참 주역은 누구인가? 대통령이나 고관들, 소위 정책결정자들이 역사의 주역인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아, 너희는 행복하다"(루가 0,20)고 선언하셨다. 말없이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끈질기게 삶을 가꾸어가는 백성들, 가난한 민초들이 역사의 완성에 한몫을 톡톡히 하는 역사의 참 주인이며 참으로 행복한 자들이다.



1. 누가 역사의 주인공인가?



요즘 우리 국민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면서도 지난 몇년동안 소위 문민정부의 출현과 함깨 치솟았던 인기와 기대가 배신으로 되돌아오는 쓰라린 경험을 하였기에, 낡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지워버리지 못하는것도 사실이다. 이 시점애서 우리는 ‘역사를 이끌어가며 발전시키는 주역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같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정치가들이 아무리 이러쿵 저러궁 떠들더라도 역사는 일반 국민들, 즉 민중들이 살아주는 만큼 밖에 진전되지 못하는 법이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실질적으로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은 바로이 백성들, 民草(민초)들의 땀과 희생 위에서만 솟아나는 것이기에, 역사발전의 참주역은 바로 말없이 땀흘리며 사는 이 땅의 민중들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민중신학의 견해다.



2.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복옴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하늘나라 완성에 참여하며 그 나라의 가장 행복한 시민이 될수 있는 사람들을 열거하신다. 오늘 복음의 산상설교의 말씀은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하늘나라의 시민이다'고 하시면서, 하늘나라의 ‘시민자격 헌장'을 선포

하시는 것이 아닌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받는 사람들, 욕을 먹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옳은 일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나라를 완성시키며, 차지할 사람들이며, 구원될 사람들이라는 선언이다. 이들만이 참 행복에 참여할 사람들이다. 왜 이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며 구원받을 자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가?



3. 구원 역사 안에서 보는 '야훼의 가난한 자(anawim)'의 특권



늘 복음의 산상설교의 말씀은 거슬러 올라가면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이사야 이후에 등장한 스바니아 예언자는 ‘징벌의 날'에 살아남을 사람들을 열 거하면서 “내가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들을 네 안에 남기리니,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아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하리라. 그들은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칠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편히 쉬리니, 아무도 들볶지 못하리라'(스바 3,12-13)고 하셨다.



이 얼마나 민초들에게 선포된 희망적인 복음인가! ‘야훼의 가난한 자(anawim)'의 구원 소식은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 없는 이들을 높이신다"(루가 1,52)고 하신 성모님의 마니피캇에서 또한번 선언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로마의 식민통치하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희망없어 보이는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고 선언하셨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법대로사는 이 땅의 수많은 어진 민초들도 바로 야훼의 사랑받는 ‘가난한 자'들의 후예인을 선언하시는 것이라 하겠다.



4. 민초들의 하느님깨 영괄을!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굶주리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제1독서(예레 17,5-8)에서는 “사람을 믿는 자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돈이면, 권력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돈이 많으면서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알고, 그분의 법을 따라 살기는 쉽지 않다. 본당에서도 평수가 넓은 아파트 지역일수록 기초공동체 모임이 잘 되지 않는다.



오늘 복음은 가난하고 힘없고, 그래서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느님밖에 없는 백성, 항상 억눌림 받고, 이용당하지만 하느님을 믿기에 자기 양심을 속일 줄 모르고, 법없이도 살 겸손하고 어진 백성들, 그러면서도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는 이런 백성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선언인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수없이 짓밟혔으면서도 끈질기게 되살아나서, 자기 몫을 말없이 해내는 어린양 같은 민초들이야말로, 역사 발전의 주역이며 참 행복을 누려야 할 하늘나라의 시민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나의 삶은 어떤가 되돌아 보자.











33    연중 제6주일   루가 6,20-26 (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요즘 우리사회는 연말이면 볼 수 있는, 축제 성격의 흥청거림보다 내일의 경제상태에 대한 염려와 불안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다. 잘 산다는 소문나기가 엊그제 같은데, 어쩌다가 벌써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 답답한 일이지만, 이 시련이 주는 교훈을 되새기며 비싼 수험료를 내고 인생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사는 법밖에 다른 도릴가 없겠다,



가난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악으로서의 얼굴이다. 성서에서의 가난한 사람이란 궁핍한 사람, 비하된 사람, 약자, 가련한 사람, 비참한 사람들을 말하며, 이런 가난의 처지는 인간성을 비하시키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악으로 보기에 온갖 노력을 다해 추방해야 할 죄악으로 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가난으로 찌들린 비참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제안하는 이상은, 결코 가난이나 부를 칭송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사랑의 나눔에 의해 모두 평등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4장은, 신자들이 서로 형제적 사랑으로 가진 것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고 말할 정도로, 신자들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가난을 극복하고, 형제적 사랑을 증거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 복음에선,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6, 20)라고 말하고 있다. 즉, 가난이 주는 또 다른 면모로서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물질적 가난은 악임에 틀림이 없으나, 이것이 정신적 풍요의 모습도 될 수 있다.



우리 공동체 중에서는 제기동의 ‘프란치스로의 집'과 용산의 ‘베틀레헴의 집'이 있는데, 이 두 공동체는 가난한 행려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 공동체이다. 이 식당에는 가난한 이들의 형제인 프란치스코나, 가난한 모습으로 탄생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베들레헴처럼 수고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감동적인 일들이 많으나, 특히 요즘 불황이 되면서 새로운 감동을 느끼고 있다.



즉 사회가 불황이 되자, 이 식당에는 손님들이 더 많이 물려 오게 되고, 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형제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호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의 찌들린 불황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는기를 펴고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사랑의 잔치로 변한 것이다.



루가 복음 14장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연회에 초대받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는데, 우선 순위가 이 세상 판단과는 전혀 다른것이다. 즉 초대에 대해 되갚을 수 없는, 어떤 의미의 무능력자가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블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루가 14,12-14)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식당이고, 추위가 심해질수록 온기가 그리워지는 것처럼, 불황의 썰렁함이 심해질수록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따사로운 곳으로 변하고 있다. 본의아니게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이, 안타까운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에게 되갚을 힘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으로, 춥고 음산한 가난의 기억이 아닌, 따뜻하고 온화한 축제를 즐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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