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전체글 보기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07
분 류 연중2-7주일
ㆍ추천: 0  ㆍ조회: 3167      
IP: 218.xxx.180
http://missa.or.kr/cafe/?logos.978.
“ Re..다해 연중 제 5주일 ”
 

연중 제5주일



         19. 함세웅 신부(다)/ 30                  20. 이정우 신부(다)/ 31

         21. 강영구 신부(다)/ 33                  22. 양장욱 신부(다)/ 36

         23. 홍금표 신부(다)/ 39                  24. 강길웅 신부(다)/ 41

         25. 신은근 신부(다)/ 43                  26. 교구 주보(다)/ 44

         27. 김혜련 수녀(다)/ 46                  28. 교구 주보(다)/ 47

         29. 교구 주보(다)/ 49





19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저는 죄인입니다.

                                            함세웅 신부



우리는 ‘신앙’이라는 말마디를 수없이 들어왔고 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만일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망설여지게 되기도 합니다. 또는 “아, 그거야, 하느님을 믿는 것이지 뭐!”하고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올바른 대답입니다. 이 결론적 대답을 위해서 우리는 전제되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대답,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5,1-11)은 신앙의 과정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며,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탄생하면서부터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갑니다. 안간힘을 다하면서 ‘무엇’을 얻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 ‘무엇’은 흔히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인 베드로도 이 ‘무엇’ 때문에 노력하는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헛수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고는 가르치셨고 일러 주셨고 똑같은 반복을 명하셨습니다. 밤새껏 지칠대로 지친 베드로, 그리고 이미 그물을 다 씼은 후였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청에 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개입, 베드로의 용기 그리고 실천,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기적의 결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기적의 결실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한계점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초월한 제3자의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헛수고의 자신과 기적적 결실의 자신 사이에 있는 차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놀랐습니다.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였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솔직한 기도! 죄인이기에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그 예수님은 더욱 가까이 오시며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끄시고 일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혼연히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험의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신앙인 베드로가 걸어간 길, 그것은 정녕 내 신앙의 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지칠대로 지친 기진맥진한 처지입니다. 더 노력하기도 싫습니다. 흥미도 없습니다. 희망의 등대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지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그 예수님은 실의에 찬 내 마음에 자리잡고 계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나의 노력에 나의 생활에 나의 작업에 개입하시고 속삭이십니다. “이봐, 한번만 더 용기를!”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의 이 속삭임,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용기 자체이며,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대답할 용기를 찾은 인간, 부르심에 응하는 인간, 그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래서 겸손한, 가식 없는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하고, 이러한 고백은 새로 탄생된 나를 예수님께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모두 미사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기계적 고백이나 앵무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니라면 정녕 우리는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기도 Kyrie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바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잘못한 아담과 에와에게 구세주를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 그 하느님은 결국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셨고, 베드로를 부르신 그 예수님은 또한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이 부르심에 응할 수도 있고 불응할 수도 있습니다. 택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헛수고만을 하던 내가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섰다가는 또다시 허탕을 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응하고, 택하고, 그 길로 나서는 용기,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은 선택이며 결정이고 대답이며 실천, 삶 자체입니다. 그래서 순간만이라도 모든 것을 제쳐놓고 ‘신앙의 나’가 되어 베드로의 고백이 아닌 나의 고백을 읊조리는 것입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20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제자가 될 사람. 

                                                      이정우 신부



1. 제자가 될 사람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과 마을과 언덕, 호숫가에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신다.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들을 만나고 아버지의 뜻과 일을 차례로 알려주신다. 그만큼 새롭고 인상깊은 일은 이제까지 없었다.



오늘 복음대목에서 예수께서는 겐네사렛 호수를 두고, 이른바 지형지물을 이용한 시청각 교수법을 쓰신다. 그 장소에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과 사정을 통해 산체험을 하도록 배려하신다. 그분은 또 특이하게 가르치신다. 어부들이 알기로는 “깊은 데로 저어가서”는 그물에 고기가 안잡힐 게 뻔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시한 대로 한 결과, 그들은 큰 성공을 눈앞에 보게 되었다. 그들의 이전 사정과 어떤 지식은 이제 곧 그분의 가르침과 업적으로 바꾸어지고,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출발만이 있을 뿐이다. 그분께서는 “듣고, 보게 하시어”믿도록 하신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주실 수 있는 그분을(필립4,13 참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 부르심을 받은 시몬 베드로의 경우를 보자. 그는 우선 고기잡이의 기적을 보고 하느님께서 제 앞에 오신 것을 안다. “주님…”이라고 아뢴다. 그리고는 “떠나 가 달라”고 한다. 자기는 어려운 생업과 현실에라도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는 것인지? 그러나 이야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단순하고 성실한 인간성(태도)을 높이 사시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신다. 장차 하느님의 사람들을 얻고, 그 나라를 크게 완성하는 일꾼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먼저 다가와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을 따라 제자가 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여러 동료들과 함께 밤새도록 그물을 쳤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시몬은 지극히 우울한 기분으로 내일의 고기잡이를 위해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의 배에 올라서서 계속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군중을 향한 말씀을 마친 예수라는 분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시몬의 심정은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경험상으로 오늘 이 호수에서는 절대로 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을 일축해 버리지 않고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더구나 몸과 마음이 몹시 피곤하여 지쳐있는 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그물을 쳤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베드로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즉 베드로는 신앙의 정신으로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보상은 기적적인 어획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해서 온갖 인간적인 노력과 힘을 오랫동안 기울이지마, 이에 대한 결과는 우리에게 그렇게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점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미약한 인간적인 척도로는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지 않던 것에, 또는 보잘것없는 수확밖에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돌연 크나큰 성과를 허락해주신다는 사실도 우리는 가끔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는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시몬을 당신 제자로 삼으시기 전에 성공과 실패가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렸다는 점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 세상을 복음화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우리의 인간적인 눈에는 실패로 보이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위대함과 힘을 믿고 하느님께 충실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21              연중 제5주일   루가 5, 1-11 (다) 부르심과 응답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5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부르심과 제자들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가? 그리고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예수는 복음 선포의 초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예수께서는 좀더 효과적으로 말씀을 선포하시려고 시몬의 배를 이용하셨습니다. 마침 어부 시몬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거두어 씻고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호숫가에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여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배에서 열정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르침을 끝내고 나서 예수께서는 배를 빌려 준 어부 시몬에게 무엇인가 보답하시려는 듯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시몬은 악몽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시몬인지라 매일 밤 그물질을 하는 것이 일과였고, 그 날 걸려드는 고기만큼 그의 벌이는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밤에는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밤새도록 수고만 하였을 뿐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던 중에,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시몬은 예수가 나자렛에서 톱질, 대패질이나 하던 목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톱질, 망치질에는 전문가이지만, 고기잡이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겐네사렛 호수가 자신의 삶의 터전이고, 고기잡이에는 도가 튼 사람입니다. 고기잡이 전문가인 시몬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면,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인 예수라고 별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시몬은 목수 출신인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몬은 예수의 초대에 “예” 하고 응답한 것입니다. 시몬은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가 목수 출신이시기는 하지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시몬의 바로 이런 자세가 신앙인의 자세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예수의 초대에 “예” 하고 응답한 시몬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엄청난 기적을 목격하게 됩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걸려들지 않았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의 도움을 청해야 했습니다.



그러고도 두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배를 빌려 준 시몬에게 무엇인가 보답하시려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시몬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려고 그를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그 초대에 열린 가슴으로 응답했던 것이고, 그 응답에 예수께서는 놀라운 기적으로 보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에 가슴을 열고 겸손되이 응답하는 것이,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열려 있는 가슴에 하느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과 은총을 담아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늘 하느님의 부르심과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느님의 이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워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거기 길이 열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야 할 길이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우리 자신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을, 그리고 우리가 지닌 재주와 재능을 버리고 정말 터무니없어 보이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슴을 통하여 들려 오는 주님의 부르심을 자주 묵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워서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만든 길을 가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길이 아닌, 자신이 만든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시몬이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세우면서, 예수의 초대를 거부하고 자기 방식을 고집했더라면, 그는 예수의 큰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분의 제자로 불림받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며,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보면,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주님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한 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어부 시몬은 예수의 그 엄청난 능력 앞에 고기잡이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습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잡이에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던 자신의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저토록 엄청난 능력을 지니신 예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떠나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완전히 기가 꺾인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시몬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어부 시몬은 완전히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서,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어부 시몬은 무엇에 홀린 듯,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고기잡이 시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람 낚는 시몬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수의 제자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이제 시몬은 자신 만만해 하면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사람 낚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 그의 활동 무대는 겐네사렛 호수가 아니라, 전 세계가 될 것입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 그리고 겸허하고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주님께 온전히 귀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그런 사람을 당신의 제자요, 사도로 선택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 시몬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완전한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결코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닌 재산과 재물, 경험과 학식을 자랑하고 그런 것들을 지녔으므로, 자신 만만해 하는 사람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가 예언자로 불림받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스랍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거룩하고 엄위로운 하느님의 모습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죄 많음과 초라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이사야의 이런 두려움과는 달리, 하느님은 입술이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시어 말씀을 선포하게 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 자신의 죄 많음을 인정하는 사람, 하느님의 크신 권능 앞에서 인간의 초라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귀의하게 되고 주님의 사도로 불림받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하느님 앞에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우리의 부족함과 인간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재물과 재능, 그리고 경험과 지식이 하느님의 부요함과 권능 앞에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권능을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시기 위함이고, 또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더욱 철저히 우리 자신을 비우면서, 하느님께 귀의하는 생활을 합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22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회개의 은총

                                                          양장욱 신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 나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듣게 되는 베드로의 고백은, 연중 5주간의 독서와 복음을 일관되게 이어주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한 선택된 자들



제1독서의 이사야는 자신을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제2독서에서 바오로도 자신을 '팔삭동이, 사도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며, 교회를 박해한 자신의 과거를 들어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 중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이사야와, 그리스도 교회의 두 기둥이 되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이와 같은 고백은, 단순히 그들의 겸손을 드러내는 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예언자 이사야와 베드로, 바오로 두 사도의 고백은, 진정 그들이 자기의 내면을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솔직한 자기 고백이, 이들을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또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불리움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드러내기를, 몹시도 두려워하거나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까지도 자신을 미화하거나 감추려고 하기도 합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거나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라는 단어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들은 오늘 성서의 말씀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사야나 바오로나 베드로는, 자신들의 결점과 죄를 스스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한 것은, 죄를 뉘우치고 이를 제거하고 삶을 개선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말 않은 채 있을 제는, 끊임없는 한숨 속에 내 뼈들이 녹았사오니․․"라고 죄책감에 탄식하던 다윗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후회하고 고백한 다음 “당신은 내 피난처, 곤경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구원의 기쁨으로 나를 휘감아주시리이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모습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놀라운 하느님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느님을 거스른 행위입니다. 죄는 잘못한 행동이나 악한 행위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간시키는 인간 본성의 타락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죄로 하느님과 멀어진 죄인이, 자기 잘못을 올바르게 고백하고 나면, 죄를 짓기 전보다도 하느님께 가까워지며, 더 크게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한 랍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끈으로 하느님과 연결되어있다. 죄를 지으면 그 끈이 끊어진다. 하지만 자기 잘못을 뉘우치면, 하느님이 그 끈을 다시 매어주시는데, 그로써 그 끈은 길이가 더 짧아지게 된다. 즉 하느님께 더욱 가까워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의 잘못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 도우심을 청하는 자세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받은 은총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결코 뛰어나게 학식이 있거나 출중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을 뽑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평범하다 못해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자기들의 양심의 눈으로 살펴볼 때 자기들이 변변치 못한 자로 생각되자, 서슴지 않고 자기들이 그런 자임을 분명하게 밝혔던 이사야 예언자와 바오로, 베드로 사도는 자기들이 죄 많고 이기적인 자들임을 숨김없이 시인한 덕분에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자상한 보살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바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응답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정말로 보잘것없음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으시고 “보아라, 이제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라고 말씀하셨던 하느님께서, 바로 자신을 팔삭동이라고 고백하는 바오로 사도에게,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은총을 주셨으며, 엎드려 죄인임을 고백한 베드로 사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은총을 주시며, 당신의 사도로 부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 사도들처럼, 과거의 온갖 죄를 벗어 던지고 새롭게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생활하며, 그래서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 멀어진 것을 슬퍼할 뿐, 솔직하게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와 도움 청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함을 요구하시기보다, 죄를 지을지라도 그 죄를 뉘우치고 개선하기를 바라시며, 그 모습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우리에 있는 아혼 아홉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또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자들을 찾아서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부터 먼저 회개할 현실사회



진정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오늘 성서의 말씀에서 이사야나, 바오로나,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나가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고, 그 도우심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나약함을 자각하며,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갖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죄를 드러내고 용서 청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회가 점점 더 혼탁해지고, 죄가 죄로 인식되지 않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게 된 데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올바르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항상 죄인이며, 부족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백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도들처럼 죄로 얼룩지고, 부족한 나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나서야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는 이사야의 대답처럼 말입니다.

“주님을 부르던 날, 당신은 내게 응답하시고, 내 영혼의 힘을 북돋아주셨나이다."(시편 137)











23       연중 제5주일   루가 1,4-11; 4,14-21 (다) 고기잡이 전문가 시몬

                                                      홍금표 신부



죽었다는 사람을 메고 장지로 갔다. 관을 내려놓으려는데, 느닷없이 관속에 누웠던 사람이 뚜껑을 탕탕 치기 시작했다. 관이 열리고 죽었다던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 「대체 뭣들 하는 거요? 난 살아 있소. 죽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둘러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장례를 맡아 치르던 사람이 말했다 : 여보게, 의사들과 사제들이 자네가 죽었다는 걸 확인했다네. 전문가들이 잘못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 다시 뚜껑에 못질이 되었고, 예규대로 장례가 엄수되었다. 종교박람회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소위 전문가, 또는 전문 지식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성과, 소위 전문가들로 행세하고 있는 사람들의 독선을 잘 지적하고 있다.

  

오늘 복음 전반부에는 시몬과 동료들이 물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전하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기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치유 - 구마 이적사화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 이적사화가 그것이다. 오늘 복음은 물고기라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자연 이적사화에 속하는데, 이러한 자연 이적사화는 하나의 해설원칙을 가진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캐지 말고, 이야기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사건사에 얽매이지 말고 의미사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오늘 복음은, 배와 제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교회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배는 전통적으로 구원의 방주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몬과 그의 동료들이 밤새 노력해도 한 마리 고기도 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쳤더니 엄청난 고기를 잡았다는 사실은, 우리 교회의 선교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선교의 현장에서는 인간적인 노력이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교의 결과는 오롯이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에,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께 의지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몬에게「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권고의 말씀은,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교회(배))에 속한 우리가 해야할 가장 최우선의 과제가 바로 선교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선교를 위해 베드로와 그 동료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서 특별히 눈길이 머무는 곳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시몬 베드로의 모습이다.

  

이 대답의 의미는, 시몬과 호수의 관계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시몬은 한마디로 고기잡이의 전문가였다. 그리고 겐네사렛 호수는 굉장히 큰 호수이긴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그 호수는 눈감고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장소였다. 이런 시몬이 밤새 애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면 그 날은 공치는 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깊은 데로 가셔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그것도 일반적으로 밤에 비해 고기가 안 잡히는 한낮에 그물을 치라는 이 이야기는, 상식에도 벗어나는 이야기요, 막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쓰는 격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더 곤란한 것은 이들은 밤새 고기잡이로 피곤에 지쳐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그물을 다시 치기보다는 빨리 그물을 손질하고 내일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선택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몬과 동료들은 손질하던 그물을 다시 치고,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고통과 어려움을 뒤로하고 두말 없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흔히 남성들이 가지는 가장 큰 정서적 욕구가, 자신의 일에 대한 「타인의 신뢰와 인정의 욕구」라 한다. 특별히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그 무엇」에 대해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이 가지는 가장 근본적 욕구라 한다.

  

바로 어부 시몬에게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그 무엇이 바로 고기 잡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 적어도 고기잡이에 관해서 만은 문외한일 수 있는 예수님이, 이것에 이의를 제기 하며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쩌면 자존심도 상할 수 있는 요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위대한 모습은 바로 이것이리라.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요구요, 고기 잡는 분야에서만은 비전문가일 수 있는 예수님의 요구였지만, 그 요구를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보다 앞에 놓았다는 점, 그리고 결과를 예수님께 맡기고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자세, 자신이「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 무엇」조차도 다시 한번「예수님의 눈」으로 돌아보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은 베드로 사도의 이 자세가,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교훈인 것이다.

그리고 억측일 수 있지만, 특별히 점점 더 전문화되어 가는 오늘날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영성의 한 출발점도 이점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24              연중 제 5 주일   루가 5,1-11 (다) 죄인과 소명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6,1~2a.3~8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제2독서 Ⅰ고린 15,1~11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여러분은 믿었습니다)

복 음 루가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진실되게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죽여야 하는 큰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그 진실과 용기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너나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만일에 누구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또한 하느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가장 순수한 길입니다.



죄인들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첫째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죄를 쌓고 있으면 서도 겉으로는 의인으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자기 모순 이 가득 찬 인생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버젓이 죄를 지으면서도 죄 가 되는 줄을 모르니 어쩌면 구제불능의 사람들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합니다.



둘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감추고 있는 죄 인들입니다. 창피하니까 우선은 숨기며 두려우니까 선뜻 고백을 하 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심의 불안과 뉘우침 때문에 언제고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때는 뉘우침과 고백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양심을 감추면 혼자의 인생만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 리고 때를 놓치면 영원히 불행합니다.



셋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죄 인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자신의 죄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 리고 부끄러운 줄은 알지만 숨기지 않고 죄인으로 판단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탕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 독서에서 나온 이사야와 바오로, 그리고 베드로 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1독서에서는 이사야가 소명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자 기도 모르게 뜻밖에 하느님을 뵙자 이젠 꼼짝없이 죽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는 입이 더러운 사람이요 죄가 많기 때문에 하느님을 본 순간 너무도 황송해서 이젠 죽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천사의 도움으로 입이 깨끗하게 되자 하느님의 일꾼으로 용기있게 나서서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가리켜 '팔삭동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사도로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실 신자들을 박해한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도로 뽑힌 뒤에는 그 약점 때문에 더 강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왕이 교도소엘 방문했더니 만나는 죄수들마다 자기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왔다면서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누구 하나 자 기 잘못으로 교도소에 들어왔다고 인정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데 맨 마지막 방에 있던 자는 고개도 못 들고 훌쩍거리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왕이, “너는 왜 고개도 못 들고 울기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죄수가 자기는 너무 큰 죄를 지은 죄인이기 때문에 감 히 얼굴을 들어 임금님을 뵈올 수가 없으며 그리고 자기 같은 천한 죄인을 찾아 주신 임금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했다고 하더랍니다. 이 때 왕이 신하들에게 호령을 했답니다. “이 집은 죄 없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인데 웬 죄인이 저기 있느냐? 저 사람은 당장 이 집에서 나가게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수는 그 날짜로 석방 이 되었답니다.



성서의 내용도 이와 비슷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창녀도 나병환자도 세리도 모두가 용서받고 은혜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면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 했습니다. 자기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기있게 고백을 하면 어떤 죄도 다 용서가 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지만 그러나 감추면 추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 역시 너무도 부족한 인생이었습니다. 우선 배운 것이 없었고 성격도 거칠었으며 용기는 있었으나 무슨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지혜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솔직했으며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을 만나 뜻밖에도 고 기를 많이 잡게 되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그 못난 베드로 위에다가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죄인에다가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큰 죄를 지었고 또 누가 더 많은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 리 큰 죄라도 인정하고 뉘우쳐서 고백하면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죄라도 숨기고 감추면 치 사하고 비열한 인생이 됩니다.

따라서 솔직하게 삽시다. 아무리 불이익이 있다 해도 떳떳하게 삽시다. 그러면 또 다른 하느님의 소명이 여러분을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25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깊은 데로 그물을 치라 

                                                              신은근 신부



베드로는 지쳐있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가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입질도 없는 낚시질, 얼마나 지루하고 긴 인내를 요구하는지 해본 사람은 안다. 멍하니 새벽을 맞이한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곤 다시 그물을 치라고 하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베드로의 운명을 바꿀 선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별 저항없이 그물을 던졌다. 결과는 배 두 척으로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의 고기였다. 말씀을 따른 보답이었던 것이다. 그분 지시대로 한다면 상상을 넘는 결과가 온다는 가르침이 아닐는지.



이렇게 베드로는 선택되었다. 고기잡이에 지친 어부에서 예수님의 으뜸 제자로 바뀐 것이다. 변화의 주체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그분께서 선택하셨기에 베드로는 바뀔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계절이 바뀌듯 사람은 바뀐다. 반드시 바뀐다. 나무들이 성장하듯 사람도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선 어떤 형식으로든 주님의 부르심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따라야 한다.



깊은 대로 그물을 치시오. 베드로의 눈에는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밤새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물을 던진다.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면 던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사람의 눈에 허망한 듯이 보이더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라야 한다. 인간적 계산으로는 별 볼일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면 따라야 한다. 베드로가 던진 그물 속에는 이런 교훈이 담겨 있다. 그분의 부르심을 만나기 위해선 누구나 알아야 할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먼저 그분의 뜻은 사람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숙명적으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느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관계를 만들며 살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기에 성서 안에는 사랑과 용서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너무 쉽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실망한다. 남을 도와 주었으면 잊어버려야 하는데 보답하지 않는다고 섭섭해 한다. 도움을 받았을 때는 제대로 감사드리지 않고 당연한 듯이 살아간다. 어찌 좋은 관계를 만들겠는가.



깊은 대로 그물을 치시오. 주님의 말씀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쳐야겠다. 내 본능과 성격의 깊은 곳에, 지난날 내 삶 속의 깊은 곳에 다시 한번 그물을 쳐야겠다. 그리하여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야겠다. 좋은 것에는 감사를 드리고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삶의 교훈으로 되새겨야겠다. 주님 뜻에 맞는 것은 다시 가꾸고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은 버려야겠다. 새로운 삶은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베드로는 어부생활을 그만 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변신했을 뿐이다. 자신이 체험하고 만난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어부의 심정으로 사람들 앞에 나섰을 뿐이다. 그러니 새롭게 시작하려면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 중심으로 삶을 바꾸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다.











26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사람을 낚는 어부



1. 복음이야기(루가 5,1-11)

오늘 복음은 시몬과 그 동료들이 기적적으로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자연이적사화와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셨다는 소명사화로 짜여 있습니다. 루가는 자연 이적사화를 도입하여 예수께서 시몬과 그 일행을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와 연결시켰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의 배에 올라 군중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당신네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예수께 “스승님, 저희가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이나 엄청나게 많이 잡혔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안심시키면서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사람들을 낚을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이 장차 당신의 제자로서 사도로서 물고기를 낚는 것 대신 사람들을 낚는 일에 종사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시몬과 그 일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서 “따랐다”라는 말은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사화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적사화는 사람을 구제하신 치유-구마 이적사화와 자연을 상대로 하신 자연 이적사화로 대별됩니다.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았다는 이야기는 자연 이적사화에 속합니다. 자연 이적사화를 대할 때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느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적이야기가 주고자 하는 의미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시몬과 그 동료들은 고기 잡는 일에는 전문가였을 것입니다. 기술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 호숫가 어느 지점에 가면 고기가 많이 잡히는 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느날 시몬에게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보인 시몬의 반응이 큰 감동을 줍니다. 시몬은 자기가 고기 잡는 데는 전문가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지시를 무시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 다시 한번 그물을 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 시몬의 반응에 오늘 복음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결과가 안 보이는 때라도 낙심하지 말고 시몬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한번 일어서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활동하다 보면 낙심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시몬처럼 “당신이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하면서 다시 한번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이런 정신과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시몬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보물의 비유와 진주 비유(마태 13,44-46)의 교훈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값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투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해도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에 감읍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투신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27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할머니의 신바람

                                                      김혜련 수녀



“할머니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구 수녀님도 많이 받으세요!” “건강은 어떠세요?” “이만하면 감사하지요.” “할머니 바쁘세요?” “올해는 내가 아주 바빠요. 요새 본당에 노인대학이 생겨서 나가기 시작했는데요, 글쎄 재미가 쏠쏠하더라구요. 이것저것 배우느라고 많이 바빠졌어요.”

문밖 출입을 꺼리면서 노인들이 모여서 말나는 것도 싫고, 그래서 집안에서만 소일하던 73세 되신 발바라 할머니의 뜻밖의 소식에 깜짝 놀랐습니다. 더우기 생기를 띈 목소리는 춥고 얼어붙는 이 겨울에 활기를 주었고 뭔가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할머니 주변에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케 했습니다.

스스로가 바빠지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생각이 우선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 놀라웠습니다. 생각이 바뀌니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이 뒤따르더라고 말씀하면서 “할머니 행복하세요?” 라는 질문에 “아무렴요, 행복하다니까요! 내가 예전에 그런데 나다니는 늙은이들을 흉을 보았잖우. 그러던 내가 이제는 거꾸로 좋아서 다니니 미안한 마음도 들고… 내가 확실히 바람이 나긴 났네. 호호호.” 하며 밝게 웃기까지 하였습니다.

“우선은 할머니 자신이 중요하지요. 누가 뭐라해도 할머니가 행복하고 마음이 기쁘고 평화로우시면 된거예요.” “신바람이 나니까 밥맛도 좋지. 나를 불러내는 사람도 생기니까 사람 사는 것 같죠. 친구들 만나니 좋지요. 전화로 다 못해요.” “아이구야 할머니 정말 바람 나셨나봐요.” “수녀님, 바람도 제대로 불면 농사에 도움이 된다네요.”

밝은 음성을 통해서 할머니의 확실한 행복감이 전달되었고 종종걸음으로 이곳저곳을 바삐 다니실 모습을 상상만 해도 뿌듯함이 전해옵니다. 딱딱한, 그리고 낡은 껍데기를 훌훌 벗어버리고 새롭게 사는 그 모습은 여생이 길지 않은 노인이기에 더 가치있고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습관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 않기에 할머니의 변화는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21세기를 사는 낡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의 자기 복지가 시작된 것입니다.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노랫소리 ꡐ사랑은 아무나 하나, 미인은 아무나 되나…ꡑ 늦바람에 신바람이 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28              연중 제5주일   루가 5,1-11 (다) 기적을 보려면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베드로에게는 두 가지의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그는 이미 밤새 그물질을 하며 수고했기 때문에 몸이 지친데다가 “아무것도 잡지 못했기” 때문에 풀이 죽어서 다시 그물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깊은 데로 가라”고 하시니 깊은 데로 가야 했지만 이는 여간한 모험이 아니다. 깊은 데로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모면하기가 매우 곤란했을 것이기에 정말로 베드로는 그물질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물을 씻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했다. 이 조건없는 복종이 그로 하여금 동료들과 함께 기적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흔히 밤에만 잡히는 고기가 대낮에 그것도 배 두 척이 가라앉을 만큼 잡혔다는 사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확실히 수고를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이나 위험한 수고를 무릅쓰는 용기는-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기적을 보게 하고 이적을 낳게 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우리는 너무나 이해타산을 하는 것 같다.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낄 것이 없고 못할 일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는 왜 하느님을 위하는 일에 그토록 소극적인지 모르겠다.



돈을 벌기가 그렇게 힘이 들고 재산을 모으는 데도 장구한 시일이 걸려야 하며 더구나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 얼마인가? 이렇게 볼 때 구령(救靈)이란 절대한 가치를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은 또 얼마이겠는가? 더 많은 수고와 더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쉽게 되는 것은 가치가 없고 보람 또한 느낄 수가 없다. 자식들을 위한 일에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고통으로 안 느끼는 부모의 심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우리 자녀들을 위해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 계신다.



이런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따지며,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이런 아버지 하느님을 위해, 또 그분의 일을 위해 낸 돈이나 시간, 그리고 노력을 손해라고 보는 이는 없는지? 우리 조상들은 목숨까지 내놓지 않았던가? 아이들한테나 주는 10원짜리를 주님께 바치는 헌금으로 내고, 친구를 만나서 쓰고 남은 몇 백원을 교무금으로 내놓는 것으로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는가? 손이 떨리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백원을 부조로 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도하는데 우리는 과연 일 주일에 몇 시간이나 남을 위해 할애하고 있는가? 기적을 보고 싶으면 무리하는 정도의 용단이 있어야 한다. 돈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지 않고 떡이 저 혼자 입에 들어올리 없듯이, 구령(救靈) 역시 피땀을 흘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보다 적극적으로 용단있는 신앙의 자세를 갖춤으로써 봉사하는 데 흘리는 땀방울을 아끼지 말아야겠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오 11:28)하고 약속을 하셨다. 이 얼마나 고맙고 위안이 되는 말씀인가? 우리의 뼈저린 수고는 절대 헛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은 다 나를 배신해도 하느님만은 배신하지 못한다. 이 말을 아직도 믿지 못하겠는가?



어차피 하느님을 믿고 사는 우리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깊은 데로 가자. 예수님도 같이 깊은 데로 가셨으니 사도 토마 말같이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요한 11:16). 생사를 같이 하는 마당에 무엇인들 아끼겠는가? 동란으로 말미암아 집과 재산,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피난갔던 시절을 생각할 때 영생을 얻는 그 대가로 무엇인들 못버리며 무엇인들 못바치겠는가?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마태오 6:25).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우리에게 백 배의 용기와 위안을 준다.



자! 이제부터는 의식주에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고 천국에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하자. 그러면 베드로 같이 기적을 볼 뿐만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도 되고 영생의 보장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이득이 또 어디에 있는가? 현세의 시간으로 영원을 번다는 것은 확실히 기적이다. 상에는 그만한 노고가 있어야 하듯이 영원을 얻는 데도 이에 상응한 수고가 있어야겠다. 기적을 보고 싶거든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자. 이 길만이 사는 것이고 보람있고 가치있는 길이다.











29    연중 제5주일    루가 5, 1-71 (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묵상길잡이 :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만남과 부르심과 응답은 한편의 인생여정과 같다. 젊음을 바처 일구고 가꾸었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눈이 침침해질 때, 자녀들은 하나 둘 품을 떠난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집이 갑자기 빈둥지 같기만 하다. 언젠가는 이 빈둥지마저 떠나야 할 날이 오겠지!



1. 빈둥지 인생

산 중턱물 내려오다 말고 좀 쉴 겸 앉았다. 일행들은 어디쫌 오는지 보이질 않는다. 유난히 열심히 따라온다 싶던 신자가 갑자기 눈빛이 진지해지며 말문을 연다. “큰 놈은 군에 갔고, 둘째는 대학 3학년이고, 막내 딸애는 대학 1학년이에요. 요즘 둘째에게서 전화가 뜸하다 싶어서 삐삐를 쳤더니, 어떤 여학생 음성이 녹음되어 있어서, 아들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여자 친구라고 하잖아요. 어제 그 여자 친구를 소개받았어요. 이 놈이 벌써 그렇게 컸구나 싶어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데요. 요즘은 애들이 다들 떠나고 남편과 둘이만 덩그렇게 있으니, 집이 꼭 빈둥지 같아요.(말을 하는데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연방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 말은 계속된다). 주름살이 늘어가는 나 자신도 싫고 머리가 희꿋희꿋해지면서 신문이 잘 안보인다고 돋보기를 자주 찾는 남편도 불쌍해 보이고요.(눈물은 또 줄줄 흐른다). 신부님 요즘 제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는지 주책이 되었나봐요!- 창피해서 죽겠어요" (억지로 웃을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뒤쳐져 있던 일행이 왔다. “무슨 데이트를 그렇게 재미있겠---" 하며 농담을 하려다가 울어서 부은 눈을 보고는 흠칫하며 말끝을 흐린다.



2. 밤새도륵 애썻지만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입, 대입, 취직시험을 거치면서 시험 노이로제를 겪는다. 군에 일대해서 고된 훈련을 할 땐 남자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랑에 눈 뜨면서 열병을 앓아야 했고, 결혼을 하면서 평생동지요 동업자를 얻었다. 의기투합하여 사글세 쪽배도 마련했다. 첫 아이를 얻었을 땐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계 모임' '적금' ‘부금’ ‘융자' 아파트도 사고 파는 ‘아파트 굴리기'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가? 직장따라, 집값따라, 학군따라 이삿짐 싸고 풀기를 거듭하였다. 내집마련, 과외비, 등록금 메우기에 얼마나 숨가쁜 나날이었던가?



참으로 뒤돌아볼 겨를도 얼이 열심히 그물질을 해온 나날이었다. 이젠 한 숨 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막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개 웬일인가? 어느날 신문이 잘 보이질 않고 눈이 침침해진다. 억새꽃처럼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가는 횐머리카락은 또 뭔가?

이게 내 얼굴인가? 싶게 낮설어 보이는 푸석푸석한 얼굴, 내자신보다 더 애지중지했던 자녀들이 이젠 돈이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통 연락이 없다. 가속이 붙은 인생의 수레바퀴는 왜 이렇게도 빠른가? 갑자기 가슴이 시리고 만사가 서글프다. 이것이 내가 꿈꾸던 그 인생이란 말인가? 내 집이 왜 이렇게 빈둥지 같은가? 염치없이 눈물은 왜 이렇게 흐르는가? 지금까지 내가 그물질한 것들은 다 뭐란 말인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썻지만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



3.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애써 마련한 소중한 집이 왜 갑자기 빈둥지처럼 느껴지고, 나의 분신인 자녀들마저 왜 멀리만 느껴질까,? 값나가는 패물들 이 왜 이렇게 빛바랜 깃발처럼 초라해 보일까?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가진 것은 많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한가? 아마도 배는 부른데 가슴이 고프기 때문일게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니 어떻게하란 말인가? 많이 갖기보다는 베풀고, 나와 내 가족

만 생각하기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이익을 찾기보다는 보람과 의미를 찾는데 힘쓰고, 큰 소킬치며 나서기보다는 침묵 중에 귀를 기울이고, 활동보다는 기도하기에 더욱 힘쓰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사람이 음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기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에로,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 삶의 자세를 전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그러다보면 모든 공허함을 채우고도 남을 보람과 기쁨과 희망이라는 큰 고기가 그물이 터지도록 잡힐 것이다.



4.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이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늙어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세상이 고향집이 아니고 주막임을 인정해야 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 것은, 시간 속에 빛바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 너머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을 잡아 올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쪽배를 주시고, 밤새 그물질할 젊음을 주시고, 일생동안 동고동락할 둥지를 주시고, 분신같은 자녀들을 주셨던 그 분께서는 언젠가는 당신을 따라나서도록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우리는 그 때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버리고' 그 분을 따라 나서는 결정적인 순명을 해야 한다.



주님! 언젠가는 이 빈둥지 뿐만 아니라 ‘모든 것물 버리고' 기쁘게 당신의 부르심애 웅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깊은 곳의 그물질을 통해 영원한 것을 구하고, 이 세상 것을 버리는 연습을 매일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울수록 충만해지는 신비를 깨닫게 하소서. 죽음은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순명이다.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7    
연중8-13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말씀과 전례 2007-11-13 2207
  26    
연중8-13주일
   Re..삼위일체 대축일 주일강론 2008-08-09 1339
  25    
연중8-13주일
   Re..삼위일체 대축일 요한신부 2008-05-16 1883
  24    
연중8-13주일
   Re..삼위일체 대축일 김민규 안드레아 신부 2008-05-16 1391
  23    
연중8-13주일
   Re..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모음 2008-05-16 2962
  22    
부활시기
성령강림 대축일 말씀과 전례 2007-11-13 3409
  21    
부활시기
   Re..성령강림 대축일 주일강론모음4, 성령의상징 2008-05-08 4184
  20    
부활시기
   Re..성령강림 대축일 주일강론 모음3 2008-05-08 5060
  19    
부활시기
   Re..성령강림 대축일 주일강론 모음2 2008-05-08 3109
  18    
부활시기
   Re..성령강림 대축일 주일강론 모음1 2008-05-08 3087
  17    
부활시기
   Re..성령강림 대축일 강론모음 2008-03-14 1530
  16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7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2 3469
  15    
연중2-7주일
   Re..다해 연중 제 7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1-31 4080
  14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6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2 3321
  13    
연중2-7주일
   Re..다해 연중 제 6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1-31 3993
  12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5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2 3017
  11    
연중2-7주일
   Re..다해 연중 제 5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1-31 3167
  10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4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2 3146
  9    
연중2-7주일
   Re..다해 연중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1-31 3906
  8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3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2 3165
  7    
연중2-7주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말씀연구 2010-01-05 3704
  6    
연중2-7주일
   이방인의 갈릴래아, 갈릴래아 사람들이 멸시 받았던 이유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2010-01-05 2729
  5    
연중2-7주일
   Re..다해 연중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1-14 3887
  4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2 주일 말씀과 전례 2007-11-12 2740
  3    
연중2-7주일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 말씀연구 2010-01-05 3029
  2    
연중2-7주일
   카나의 혼인잔치의 의미 예수님의 첫 기적 2010-01-03 3011
  1    
연중2-7주일
   다해 연중 제 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1-08 4961
1,,,41424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