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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14일 (월) 17:12
분 류 연중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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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다해 연중 제 3주일 ”
 

연중 제3주일

         28.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다)/ 45

         29.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다)/ 47    30. 최익철 신부(다)/ 48

         31. 김정진 신부(다)/ 49                  32. 김몽은 신부(다)/ 51

         33. 김창수 신부(다)/ 53                  34. 강길웅 신부(다)/ 55

         35. 김명섭 신부(다)/ 57                  36. 강영구 신부(다)/ 60

         37. 홍금표 신부(다)/ 63                  38. 신은근 신부(다)/ 65

         39. 허  근 신부(다)/ 67                  40.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다)/ 68

         41. 교구 주보(다)/ 69



28    연중 제 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있어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을 제승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리드」하는 시대에는 인간은 내적으로 깊이와 무게와 넓이를, 사회는 질서와 안정과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였으며 지성이 올바른 방향으로 넓혀져가고, 모든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율(律)하는데 있어 그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을 「리드」하는 지금에 있어서는 모든 과학적 기술이 인간을 기계화하고 부조리한 사고방식으로 자가당착에 빠지며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도덕적 감각은 마비되고, 부당한 요구가 힘으로 목적으로 달성하고, 모든 움직임이 그 바른 궤도에서 이탈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정신적 무지가 갖다주는 결과는 지성인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모독을 느끼게 하며 진리의 빛은 구름에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진리의 무지, 진리의 경시, 진리에 향배(向背)하려고 고의로 노력하는 것은 모든 해악(害惡)의 근원이며 그것은 일종의 독(毒)으로써 개개인과 국민들과 국가를 손상되게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현대과학 그 자체는 본래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악용하는 인간의 정신이 그릇된 것입니다. 현대에 있어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기술과 원자력의 이용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불안제거와 보다 나은 인간 생활 양식의 향상에 기여함보다는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전쟁공포로 인한 불안과 긴장, 그리고 국가간의 냉전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타락된 도덕관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으니, 나날이 늘어만 가는 사회의 파렴치한 죄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살인, 강도, 배신, 사기, 폭력, 실망 등의 사회상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이웃간의 사랑, 친절, 상호간의 양보와 봉사, 존경, 박애, 자선, 협조 등의 따뜻한 정은 이미 사람의 마음에서 떠난 지 오래입니다. 이기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 온갖 비루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패된 인심은 추악한 냄새로 감각있는 이들의 코를 찌르고 있습니다.



세계질서가 파괴될 우려가 있는 요즘, 정치나 사회생활에 있어 전세계가 교회를 주시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교회 내에서의 젊은이들이 완수해야할 세계적 책무(責務)가 행동화된다는 것은 하나의 섭리인 것입니다.



복음성서에 씌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그의 벗 <나자로>의 무덤 앞에 와서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 울음 이상의 일을 하시기 위해 그 무덤 가까이 다가와서 「나자로야, 나오너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나자로>는 무덤에서 부활하며 일어나 나왔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현대인 중 몇백 몇천만의 사람들은 아직도 죽음의 쇠사슬보다 더 악한 쇠사슬! 즉 가난과 오류와 도덕적 부패의 쇠사슬에 묶인 수인(囚人)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위해 다만 울어주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용감히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성복음의 반가운 소식, 즉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쌓아두신 「부활과 생명」의 말씀, 즉 「나의 형제여 진리로 오라. 빛으로 오라. 사랑으로 오라」는 말씀을 그들에게 소리높여 외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학창시절처럼 희망에 벅차고 포부가 풍부하고 상상력과 감수성이 예민하며, 장래를 크게 계획하고 억센 투쟁력이 용솟음치는 시절은 우리 일생을 통하여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시절에 있었던 일, 바라던 꿈, 느끼던 감정, 겪었던 영육간의 시련, 접한 모든 인물들, 모든 희비애락의 사사건건은 잊지 못할 추억 속에 잠겨 우리 일생을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창시대는 성장기에 있어서의 단순한 한 과정 이상의 크고 깊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그 개인 앞날의 승리와 패배, 영광과 치욕,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앞날의 사회를 보다 훌륭하게 건설함도 오늘의 학생이요, 보다 악하게 사회를 망쳐놓는 것도 역시 오늘의 학생인 것입니다. 미래의 역사를 찬란히 빛냄도 지금의 학생이며, 암흑으로 짓밟는 것도 또한 오늘의 학생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적으로나 사회적, 역사적으로나 학생에게는 귀하고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현대에 있어 학도들의 임무가 중하다면 여러분은 싸워야 합니다. 정신적 무기로 말입니다. 싸우기 위해 여러분은 배우고, 갈고, 닦고, 연마하여 필승의 날카로운 무기를 마련하고 있어야 합니다.



건설하려는 군사가 하나라도 늘어가면 그만큼 파괴는 줄고, 부패를 시정하려는 군사가 더 할수록 죄악은 줄고, 지식이 깊은 투사가 많을수록 과학은 선용되며, 평화를 이룩하려는 그들이 많을수록 공포는 감소될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그 날카로운 무기는 바로 여기에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현대인은 참된 정의의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사랑의 사도를 갈망하고 있으며 평화의 목자를 목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노획물로 갖다주는 용감한 투사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이 사랑의 사도가 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현대사회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현시점에서 여러분의 위치가 얼마나 귀한지 깨달아야 하며 내일의 세대를 위해 얼마나 큰 사명을 지닌 시절인가를 다시 한번 느껴야 합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인물이 역사를 선도할 수 있으며,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한 민족을 구할 수도 있으며, 한낱의 씨가 무수한 열매를 맺는 것인즉, 나 하나의 존재가치를 과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영웅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자아만족에서 탄생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 현대의 암흑에 빛이 되고 선의의 사람에게 갈등을 풀어주는 힘이 되고 진정 진리의 굳센 역군이 되라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리 인간의 감정이 이치와 진리를 벗어나게 하고 불의가 그 머리를 쳐들어도 나는 다시 나리라, 참을 쳐받들기 위해, 악을 소탕키 위해, 그를 가르치리라.” 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인도의 어느 성현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청소년학생들에게 이 말씀을 음미해 보도록 권고하는 바입니다.











29   연중 제 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오늘은 예수님이 당신 사명을 선포하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신다. 이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다. 그 예언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주님의 성령이 내리셨음은 세례 때 모두 보았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고,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겸하신 분이니 당연히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기름을 바른 분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분은 어느 예언자보다 높고 왕중의 왕이시다. 따라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이며 대사제이시다. 그분은 보냄을 받으신 분으로서 본질상 하늘의 대사(大使)시다. 사도란 낱말도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주고 특히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기쁨을 주신다.

노예의 신분으로 죄에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고 눈먼 사람에게 이성의 빛, 계시의 빛, 영광의 빛을 주어 주님과 그 업적을 보면서 살게 한다.

이 세가지 빛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빛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다. 이런 거룩한 빛으로 우리는 지금 은총의 해에 사는 것이다.











30    연중 제 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최익철 신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들은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비애를 느낍니다. 그것이 귀한 것일수록, 공을 많이 드린 물건일수록, 또한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 비애의 비중은 더 크게 마련입니다. 아담은 잃은 데서 오는 설움과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애통함, 그리고 후손들이 자기 탓으로 고생할 것 등을 생각하고 애통해 했을 것이며 예수님이 사랑하던 나자로가 죽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보시고 흘리신 눈물도 잃은 까닭이었습니다. 죽는다는 것, 멸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잃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 물건을 되찾고, 잃었던 사람이나 물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내하려 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러한데 정신적, 영적 손실이나 분실에 대해서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죄로 자신의 영혼을 잃거나 자녀들이 손해를 보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욕심과 이기심 때문인가요? 어떤 것이 정말 이기적입니까? 정말 잃어서는 안될 것에는 무심하고 잃어도 좋은 것에는 그토록 관심이 크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자 요한도, 예수님 자신도, 첫 강론에 <회개하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 13,3)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유로써 또 말씀하시길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 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 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루가 13,6-9)고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 즉 선행을 해야 할 사람, 다시 말씀드려서 회개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열매를 맺는 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미루지 맙시다. 죄인이 회개하면 천상의 성부와 그 천사들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우리는 복음에서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잃은 것을 찾은 기쁨을 알려 주셨고,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 등은 정말로 우리를 감동케 하는 신적 자비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읊은 예수님의 노래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말 안 듣고 언제나 속을 썩히는 자식이 밉다 밉다 하다가도 막상 그 자식이 병들었거나 집을 뛰쳐나가 몇 일이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불안과 괴로움으로 견딜 수 없어질 것입니다. 병든 자식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며 돌보게 될 것이고, 집 나간 자식을 찾기 위해선 온갖 방법을 다 하게 될 것입니다. 찾다 찾다 지쳐서 절망 상태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그 자식이 느닷없이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그 잘못을 나무랄까요? 아마 정신없이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퍼부으며 오히려 애비가 잘못했노라고 하겠지요? 이렇듯 우리에게 회개한 영혼에 대한 기쁨과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제 여러분.

죄인의 회개를 고대하시는 주께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러 주시고 그 기회를 몇 번이고 만들어 주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시며 혹 잃게 되면 악착같이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거나 찾을 수 없을 때 자기의 존재 의식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도 죽는 것입니다. 찾는 정도로 사랑을 측량할 수 있고 또 찾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 이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놔 두신 채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신 주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오늘 이 땅에서 가난하고 소외되며 고통받는 이웃형제들에 다름이 아닙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웃형제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라 하신 말씀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과 교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회개하는 길로 가는 일임을 다시금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이웃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자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좋으신 아버지께 우리도 사랑을 드립시다. 그리고 그분이 애타게 찾아 나서시는 잃은 양들을 찾는데 우리도 힘를 보탭시다. 그것은 그분께 기쁨이 되기 때문이며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31   연중 제 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김정진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대망의 새해 정사년을 맞이하면서 전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며 믿고 따르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일치주간을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뜻깊고도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벌써 오랫동안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일치에의 염원을 불태워 왔고 그에 따라 여러 차례 신․구교 합동으로 기도회를 갖기도 하면서 일치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성심 성의껏 바쳐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의 길은 우리에게 더욱 멀고도 험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치를 도모하려는 노력과 시도가 이렇게 어렵고도 요원한 숙제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으니 끝내는 모든 것이 다 오직 한 분의 주님이신 그분께로 일치되리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 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희망은 신앙을 더욱 견고케 하고 영구히 존속시키는 힘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벌써 일치운동이라는 어려운 과업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포기했을지도 모르고, 제자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시던 예수님의 기도(요한 17,21) 역시 무가치한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들은 희망을 갖고 특별히 기도와 희생으로써 일치 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의 정신에 입각한 우리가 취해야 할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배워 알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형제들 상호간의 이해를 촉진시키며 관용으로써 갈라진 형제들을 따뜻이 대해야 합니다. 사실 공의회 전가지만 해도 우리는 가톨릭 교회 외에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고 주장해 왔으며 오직 가톨릭 신자만이 하느님이 간택된 백성이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갈라진 형제들을 배척해 왔습니다. 그러나 갈라진 교회와 단체들은 비록 결합은 있으나 구원의 신비에 있어서 절대로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교령 3).



사도 성 바울로가 한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도 여러 파로 갈라져 싸우는 것을 가차없이 규탄한 것을(1고린 1,11) 볼 적에 오직 우리만이 구원된 사람들이라는 옹졸한 주장은 교회일치운동을 저해하는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진 형제들을 분열의 죄과로 몰아 세워서는 안되고 형제적 사랑과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는 마음 없이는 교회일치운동은 바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교회일치는 교회의 건물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회를 갖는 등 외적인 행사로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행사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내적인 회심에 의한 진정한 형제적 사랑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설교 내용을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1,15)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으며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회심이야말로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허위와 불신과 어두움 속에 있던 낡은 인간은 하느님께 회심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이 되고 새로운 인간이 된 표지는 바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사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 모두가 원수처럼 여겼던 사마리아인을 사랑하고 그들에게도 구원을 선포하셨던 것처럼(요한 4,1-42)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만이 갈라진 형제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일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회심과 사랑의 실천이 다대하면 다대할수록 크리스천들의 일치를 촉진하는 것이며 실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교령 7).



셋째, 갈라진 형제들과의 공동체적인 의식과 작업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 속에 살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생활에로 불리움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도들이 사회를 위하여 서로 협력할 적에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마태 18,20)고 약속하신 예수께서 함께 계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복지와 평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혹은 복음을 사회에 침투시키기 위하여 혹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학문과 기술을 진보시키기 위하여 모든 신도들의 협력은 절대로 필요하며 또 이런 공동 협력을 통하여 일치에의 길을 쉽게 배울 수도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교령 12).



신자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은 이미 우리가 전부터 관심을 갖고 실천해온 것들입니다.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치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중단하지 않고 끈기있게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노력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며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쇄신하여 나갈 적에 교회 일치라는 우리의 목표는 보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32   연중 제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김몽은 신부

“성서의 이 대목은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이사야서를 낭독하신 후에 드러내 보이신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했음을 전해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다시 갈릴래아로 되돌아 가셨다. 복음의 말씀은 먼저 순박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권세있는 자들, 부유한 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것으로 대치시키고, 천상의 것을 지상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라 생각하고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 이외에는 이와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약의 예언(이사야 58,6)이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되돌아 가신 것은 완전히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에서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간접적인 강조를 보인다. 성령이 작용하시는 곳에는 무엇인가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약동하는 힘이 있고 효과적인 행위가 있다. 성령이 인도하심에 내맡긴 사람에게는 그가 아무리 약한 자라 할지라도 크나큰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게 된다. 많은 성인들이 몸이 약하고, 혹은 병자일 경우도 있었는데도 그와 같이 크고도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완전히 자신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마음이 필요하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는 말씀 그대로이다. 참으로 가난한 이들이란, 내적으로 비참한 자, 물질적으로 빈곤한 자들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즉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인간의 비참함을 인식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하느님께 마음을 연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주님의 기쁜 소식은,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 주며,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준다.” 즉 인간의 눈을 열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하며, 고통과 질병에 억눌린 인간에게 다시 소생할 수 있도록 놓아주시며, 죄악에 묶인 자들을 은총 안에 살도록 해방시켜 주신다.



그러나 그분(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러한 온갖 하느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길은 막힌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자. 과연 나는 이 세상 것으로 만족으로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을 절대로 필요로 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열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복음에 대해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가? 아직도 세속의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대해 연연한 생각을 품고 있는가? 그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마찬가지다.



있는 돈에 집착하는 거나, 없는 돈을 얻고자 발버둥치는 거나, 돈에 집착하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나 명예, 권력, 쾌락 등에 집착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을 억제할 수 있지만, 육체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은 행복하다.











33   연중 제 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김창수 신부



여러분은 어느 봄철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자유로이 하늘을 날으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겠지요? 늘 복잡하고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시달리는 사람이 거침없이 창공을 날으는 보잘 것 없는 나비 한 마리에서도 참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꿈꿔 보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 안에 자유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는지 그 핵심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의 활동할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 활동 방침도 정하신 예수께서는 먼저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은총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라에는 자기의 힘, 자기의 권세를 믿고 하느님의 은총에 매이는 것을 업신여기는 부자와 교만한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은 늘 온전히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고 계시는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령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특별히 선택된 유일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언제나 임재하셔서 계속 구속사업을 하신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성령은 세례받기 직전에 혹은 직후에 내려 오십니다.



그래서 영세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보증으로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사람답게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얼, 하느님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바로 이 성령의 충만함에서 그의 말, 그의 행동, 그의 결심이 흘러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의 힘은 곧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솟아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작용하시는 곳에는 무엇인가 경탄할 만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 성인들을 볼 때에 그들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몸이 약한 사람, 병자인 수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사람들, 힘센 역도선수들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힘은 바로 하느님 성령의 힘입니다. 그런데 높은 기계문명을 이룩한 현대인들의 가슴 안에는 불행하게도 성령의 잠잠히 타이르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영”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내심의 태도를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정신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거룩하고 위대한 질서에 자기를 제대로 맞추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최고의 좋은 것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에서 찾지 않고, 세상과 물질의 탐욕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결국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좁은 세계 안에 묶인 죄수와 같은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높은 곳으로 마음을 여는 사람은 고독 속에서나, 사람들 가운데서나 주님의 거룩한 영의 인도를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곧 자신의 비참한 영적 가난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의 기쁜 소식에 마음을 열고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고통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소식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죄와 마귀로 인해 묶였던 인간의 영신적 노예상태에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진리는 해방과 자유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죄스런 현실의 생활태도를 개선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과 생활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치 어두운 지하감옥에서 밝은 빛의 세계로 이끌려 나오는 사람의 해방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영혼이 눈먼 사람들은 하느님의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광명이신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찾는 정신적 인간, 그리스도를 그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밝은 시력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장님을 손으로 만져 눈의 빛을 되돌려 주신 기적을 베푸신 것은 바로 예수님이 영적으로 눈 먼 이들에게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실 것을 나타내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약한 사람들, 보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편에 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권세에 강압을 당하고 협박을 당해 고뇌로 시달린 사람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강압을 하는 나라가 아니라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나라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의 참다운 해방과 자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단순하면서도 찬란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즐거운 축제를 통하여 다가올 위대한 때를 준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총의 해가 오면, 이 즐거움과 환희는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는 우리의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고, 그 당시 나자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께 시선을 집중했듯이, 이제부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로 쏟아야 하겠습니다.



그때에만 참된 자유와 해방의 삶을 위해, 성령의 불로 미지근한 자신을 불태우고, 이 믿음에 메마르고 냉냉한 이웃 사회 속에 우리도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삶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34        연중 제 3 주일   루가 1,1-4; 4,14-21 (다) 선포되는 말씀의 은혜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느헤 8,2~4a.5~6.8~10 (에즈라는 법전을 읽으며 백성들에게 풀이하여 주었다)

제2독서 Ⅰ고린 12,12~30 (여러분은 다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복 음 루가 1,1~4; 4,1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사람들은 감동했으며 그분 말씀의 위력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말씀'은 실로 말씀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말씀은 그냥 예사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 주의 생성과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집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나병환자가 그 즉시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벌떡 일어섰으며 온갖 종류의 병자들이 완쾌되었습니다. 말씀은 실로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해야 합니다. 한 집안에서도 어른의 말씀에 순응할 때 평화와 기쁨이 있듯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말씀에 따라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에 백성의 평화가 있고 열린 미래가 있으며 또한 소망의 성취가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백성은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그 역사의 과정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백성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의 흥망성쇠는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바빌론의 유배는 그에 대한 백성의 눈을 환하게 뜨게 해 줬습니다. 그들은 노예생활을 통해서 말씀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사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 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타락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에 끌려 가 종살이를 하는 동안 뉘우치고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배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주도로 성전 재건 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다시 짓고 성곽을 쌓는 데는 백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완공되고 보니 너무도 흐뭇하고 자랑스런 일이었습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 체 면이 좀 서는 듯했습니다. 그때는 마침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는데 사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법전을 꺼내어 읽자 백성들 이 너무도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말씀에 불충실했던 과거의 죄악 때문에 울었으며 그렇게 좋은 말씀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제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백성들은 그때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자고.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율법을 소중하게 간직하자고. 바로 그때부터 율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율법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에즈라는 바로 첫번째 율법학자인 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백성도 뭔가 실패해서 약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에 눈을 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약한 자 안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서로가 그 지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더 요긴하다고 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보기 흉한 부분을 보기좋게 꾸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화장을 할 때도 얼굴에서 가장 취약되는 부분을 더 신경써서 꾸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약한 것에 관심 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의사의 마음이 건강한 자보다도 병든 자에게 있는 것과 같으며 하느님의 사랑도 죄없는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 죄중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더 가까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신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죄많은 세상이 이제 구원을 만났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으로 집약이 됩니다. 거기서 완성이 되고 거기서 구원이 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 안에서 그분의 말씀이 힘을 줍니다. 하느님은 진정 실패한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존경해야 합니다. 세상에 말들도 많고 좋다는 말씀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말씀,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소중히 간직합시다. 그리고 말씀대로 실천합시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지혜요 힘입니다.











35  연중 제3주일   루가 1,1-4; 4,14-21 (다) 우리를 통해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사명

                                                김명섭 신부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로서 ‘하느님의 모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본성에 있어서도, 그리고 이웃과 맺는 사랑에 있어서도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사랑으로 결합되어 계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닮았기에, 인간은 공동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는 인간적 이익을 위해 편의적으로나 인위적으로 조직된 단체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하느님적인 모습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과 공동체를 생성, 유지, 발전시키고 내적으로 결속시켜주는 근원적인 힘인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결속되는 공동체



제1독서는 느혜미야서의 말씀입니다. 기원전 538년 고레스 황제가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칙령을 발표한 후, 많은 유다인들이 고향 땅을 밟았습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오랜 유배생활로 인해 흩어졌던 민족의식을 일깨워 일치시키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총독 느혜미야와 사제요 선비인 에즈라였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재건과 도덕적 쇄신에 투신한 인물이었습니다. 마침내 성전이 재건되고 성벽이 완성되자, 모든 백성이 모여 감격과 기쁨을 나누는 자리에서 에즈라는 모세의 법전으로 대표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앨 백성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수축하는 것만으로 이스라엘공동체를 재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성전 재건이나 성벽 수축 그 자체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에 충실할 때, 성전과 성벽이 의미를 지닐 수 있고, 바로 그때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발전시키는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열렬히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변모되는 공동체입니다. 외적인 조직이나 체계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공동체가 아니라,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모습이 드러날 때, 사랑과 나눔과 친교의 모습이 드러날 때, 진정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한의 눈물을 닦고, 기쁨의 환호성을 올리며, 친교와 나눔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고, 비로소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 백성은 그 가르침을 깨닫고, 마냥 기뻐하며 돌아가서, 크게 잔치를 벌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몫몫이 나누어주면서, 먹고 마시며 좋아하였다"(8,12).



공동체에 불가결한 개인적 헌신



제2독서인 고린토 전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사람의 인체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한 몸을 이루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누구나 그리스도와 이웃과 함께 공동운명체임을 상기시켜줍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웃에 대해서는 ‘나와 너'로 차갑게 갈라 버리는 무관심과 이기주의 대신에, ‘우리'라는 애정이 흐르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할 사명까지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의 능력과 자질은, 몸의 여러 지체들의 역할이 다르듯이, 다양성을 띠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공동체에 발전적으로 기여하거나, 아니면 일치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카리스마는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공동체의 발전은 개인의 헌신적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개인의 헌신적 희생이란 때로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능력을 자제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소중히 여기듯이, 타인의 능력과 자질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유기적 협력을 이루어나갈 때, 각 개인이 지닌 능력의 다양성은 공동체의 일치와 유대에 활력과 풍요로움을 제공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로서 나름대로의 사명과 역할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 고통, 소외 속에서 발견하는 ‘나'



  오늘 루가 복음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첫 부분은, 루가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설명하는 서문이고(1, 1-4), 둘째 부분은,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후 고향 나자렛에 돌아오신 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4,14-21).



예수께서는 안식일 날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한 부분을 읽으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심으로,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예언서의 구절을 선택하는 일은 낭독자의 소관이었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낭독할 권리와 해설을 덧붙이거나, 다른 훈계의 말을 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공적활동을 시작하시면서 의도적으로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선택해서 읽으신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은총의 해를 선포하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우리가 나자렛 예수의 말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한, 2천 년 전 바로 그 ‘오늘'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1, 2독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로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님의 성령이 내리시고, 주께서 그분에게 기름을 발라주셨듯이, 우리의 세례시에도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고,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발라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역사 안에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명이 우리를 통해 지속되어야 함을 깨달아야합니다. 가난한 이들, 묶인 이들, 눈먼 이들, 억눌린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이제 더 이상 ‘너의 모습'이 아니고, 나의 또 다른 모습,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느껴야 합니다.

  

오늘은 사회복지의 날이기도 합니다. 가난과 질병, 고통과 소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우리를 생각하고, 사랑과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과 투신으로 주께서 선포하신 은총의 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될 것입니다.











36  연중 제3주일-사회 복지 주일   루가 1,1-4; 4,14-21 (다) 누가 장애인인가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3 주일이자 사회 복지주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사회 복지 주일을 지내는 것은 국민 소득 5천 불이넘고 정부는 국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을 편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장애인들과 나병 환자들 그리고 결핵 환자들이 사회의 무관심과 그늘 속에서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회 복지 주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몇 푼의 돈으로 그들을 돕자는 뜻만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지는 장애인들이나 나병 환자, 결핵 환자들을 경제적으로만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면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한 주일이 오늘 사회 복지 주일입니다.

장애인들이나 나병 환자, 결핵 환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못 먹고 못 입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상인들로부터 따돌림과 외면을 당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정상인과 장애인의 구별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것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차별하시지 않고, 모두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는 정상인이나 장애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이지 정상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지가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의 그 건강을 은총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특권으로 생각하면서, 불구나 장애인들 혹은 나병 환자와 결핵 환자들을 외면하려 합니다.

  

한 가지 아주 가까운 예를 들자면, 우리 성당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성당에는 가끔 휠체어를 타고 주일 미사에 오시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 형제는 우리 성당에 오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 성당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성당이 이층에 있는 데다가, 높은 계단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승강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주일이 아닌 평일, 아무도 없을 때 이런 장애인이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장애인들은 정상인인 우리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하고 싶고, 더 간절히 성체조배를 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당이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성체조배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기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당이 정상인들만을 위한 성당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성당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성당이 이런 모습으로 지어졌습니까? 정상인들의 교만이 우리 성당을 이렇게 지어 놓은 것입니다.

성당에 드나드는 것이나 성체조배마저도 정상인들의 특권처럼 착각하고, 성당을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당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성당들이 장애인들이나 지체 부자유인들을 생각하지 않고 지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열려 있어야 할 성당마저 이런 형편이니, 우리 사회야 얼마나 장애인들과 나병 환자, 그리고 결핵 환자들을 푸대접하는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날 마산 가포에 있는 국립 병원에서 4년 반 동안 사목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가포 국립 병원은 결핵 환자들이 모여서 치료받고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은 병들어 있습니다. 결핵균이 그들의 가슴을 파먹어서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들의 가슴을 병들게 한 것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은 폐결핵에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사 부자들이 폐결핵에 걸렸다 하더라도 국립 병원에 오지도 않지만,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취할 수 있기에 쉽게 그 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한번 그 병에 걸리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그들이 그 병에 걸린 것은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고, 그들이 일하는 자리가 역시 먼지 많고 불결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폐병에 걸리게 되고, 돈이 없기에 국립 병원으로 오게 됩니다. 국립 병원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오직 먹고 자는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추어 약을 먹는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략 여섯 달 정도 치료를 하면 대부분 낫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치료 후에 가야 할 곳은, 옛날의 그 불결한 환경과 일자리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병에 걸리게 되고 또다시 국립 병원을 찾아오게 됩니다. 국립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폐결핵 3기 4기의 환자들은 이런 악순환 속에서 병이 깊어 간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난을 한처럼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슴은 결핵균에 의해서 병들어 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한 원망과 가난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요즘 우리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결핵 환자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수십만의 결핵 환자들이 이 땅에는 있고 그들은 사회의 그늘과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가슴앓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체 부자유인들이 아니고 겉으로는 멀쩡하기에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체 부자유 장애인, 결핵 환자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는 나병으로 버림받은 형제들도 많습니다. 우리 마산 교구 안에도 우리 교회와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나환자 정착촌이 세 곳이나 있습니다. 산청의 성심원, 하동의 영신원 그리고 거창의 가지리 공소가 바로 그곳입니다. 나병 환자들의 생활에 대해서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나병은 전염병이 아닙니다.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그리고 치료도 가능한 병입니다. 그러나 다른 병에 걸리면 가족들의 간호와 보호를 받으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나병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즉각 쫓겨나게 됩니다. 가족들의 품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쫓겨나서 산골의 집단 정착촌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환자들이 설움을 당하는 것은,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입이 비뚤어지거나, 눈썹이 빠져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냉대와 기피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외모와는 달리 마음은 비단결같이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회에서 쫓겨나 서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일그러진 외모가 이 세상을 더럽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들은 쫓겨나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일그러진 외모보다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의 비뚤어진 마음,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마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쫓겨나서 버림받은 생활을 해야 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활개치고 살고‥‥ 세상이 잘못되어도 대단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장애아들과 결핵 환자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정상인들의 잘못에 대한 보속일지도 모릅니다.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장애인들이 고통을 받기에 건강한 육신을 지닌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무사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들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닌 건강한 몸이, 얼마나 큰 은총이며 축복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총으로 받은 이 건강한 몸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들어 주고,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보다 밝고 건강한 사회, 아름다운 사회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건강한 육신은 결코 특권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도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위의 불우한 이웃들과 장애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회 복지란 단순히 불우한 장애인들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정상인인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 함께 어울려 지낼 수 있을 때, 그래서 장애인들이 정상인들과 똑같은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때 참된 사회 복지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이런 대목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이 대목을 펼쳐 읽으심으로써, 당신은 이 땅에 참된 구원자, 해방자로 오셨음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죽음과 암흑의 올가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눈이 열려 진리를 보았으며 자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주위의 고통받는 형제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에게 인간적인 새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사회의 그늘 속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정상인과 장애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평소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장애인들, 나병 환자들,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우리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37         연중 제3주일   루가 1,4-11; 4,14-21 (다) 아! 갈릴래아여!

                                                      홍금표 신부



지난 97년 IMF한파가 몰아치기 직전, 일단의 수녀님들과 성지순례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시작한 성지순례는 이스라엘을 거쳐 로마 불란서 4개국 순례로 마감되는 일정이었는데, 이 순례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던 진복팔단 성당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성서를 읽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 중 한 부분이 바로 진복팔단 부분이었다.「마음이 가난한‥‥」으로 시작하는 이 부분은, 어느 순간 이해되는 듯도 하다가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성지순례 중 진복팔단 성당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면서 가이드가 읽어주는 진복팔단의 내용을 들을 때, 뭔가 모르는 가슴 찡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런 느낌이었다.



그래 맞다. 여기라면 돈도, 풍요도, 명예도, 이런 자연 속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라는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똑같은 내용을 각박한 한국 땅이나, 예루살렘에서 들었다면 아마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갈릴래아 지역이었기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란 말로 시작되는 그 말의 의미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귀국해서 그때의 감동을 몇 번 떠올려 보려했지만, 좀처럼 그때의 느낌을 받을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까웠다.

  

때문에,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고 그분의 말씀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갈리래아 지역을 다시 한번 순례하고 싶고, 아마 다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닐게 된다면 「아 갈리래아여!」로 시작되는 한편의 시로 그 느낌을 전하고 싶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40일간의 광야에서의 단식 후 갈릴래아에서 첫 복음을 전한 활동의 요약과 나자렛 회당에서의 복음선포를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흔히 성서의 지명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물론 보편적인 교회를 지향하는 우리가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갈릴래아라는 이 지역만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삶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의 북부지역으로써 갈릴래아 호수 서부지역을 일컫는 지역이었는데, 예수님의 삶은 이곳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사셨고 이곳에서 성장하셨을 뿐 아니라, 복음 선포 활동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수행하셨다.

즉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 첫 복음이 선포된 곳도 이곳이고, 공생활의 대부분의 활동 무대도 이곳이고, 부활 후 발현의 장소도, 부활 후 40일간의 활동도 갈릴래아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도 바로 갈릴래아의 한 산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삶에서 갈릴래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릴래아는 과연 어떤 지역이었을까? 이 지역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과 비교해보면, 이 지역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은 파악할 수 있다. 이 지역은 먼저 종교적으로 차별을 받고 천시되던 지역이었다. 이 갈릴래아 지역은 예수님 시대에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로 불리고 있었다. 이 말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혹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무시와 천시의 뜻이 포함된 말이었다. 우리나라 말로 표현하자면, 옛날 함경도 사람, 또는 전라도 사람 등으로, 지역적 차별을 받고 무시되고 있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또한 정치 사회적으로도 매우 소외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상류층과 기득권 층은 주로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기에, 이 지역은 정치 사회적으로도 변방의 위치에 머물렀고, 교육적으로도 무지한 백성들이 사는 지역,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면서 권력으로부터 착취를 당하고, 노동의 결과에서 소외된 가난의 지역이 바로 갈릴래아 지역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소외되고 천시 받는 무지렁이 백성들이 사는 곳,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의 장소가 바로 갈릴래아 지역이었다. 그러기에 가난한 이들과 묶인 이들 그리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은총의 해를 선포해야할 사명을 가지신 그분이 복음 선포의 시작과 마지막 장소로 갈릴래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결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교회, 아니 예수님의 삶을 뒤따라야 할 우리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진지하게 질문해야 할 하나의 숙제가 있다면 바로 복음 선포의 현장이 되어야 할 오늘날의 갈릴래아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진정 내가 순례해야 할 나의 갈릴래아는 어디일까 자문해 보자!











38      연중 제3주일   루가 1,1-4; 4,14-21 (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신은근 신부



주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에겐 해방을 알리며 눈먼 사람은 보고 억눌린 이는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서다. 얼마나 확신에 찬 말씀인가. 하느님의 능력을 지닌 분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다. 예수님께서 그 능력을 지니셨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 능력을 전해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두 번째 가르침이다.

그러니 삶의 가난을 느낀다면 복음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의 삶이 물질에 묶여있다고 느낀다면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삶의 가난은 물질의 소유와는 별개의 것이다. 물질이 많아진다고 자동적으로 가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돈과 재물이 많은데도 삶의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수두룩하다. 진정한 부자는 물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소유가 많건 적건 자유로운 사람이다. 은총없이 어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예수님께 이 은총이 있음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자들이다. 실제로 그분은 내 인생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움직이시고 내 운명을 바꾸셨다. 그분의 능력을 본 적이 있는가. 그분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깨달은 적이 한번도 없는가. 하느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능력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겪었던 숱한 사건과 만남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던 장소다. 그러니 우연히 일어난 사건과 만남은 없다. 우연처럼 느껴졌을 뿐 실제로는 모두가 하느님의 개입이었다. 그런데도 그분의 능력을 모른다고 한다면 복음에 나오는 눈먼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눈을 떠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은 예언자가 아닌 매일의 사건과 만남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 사회는 복잡해졌다. 새해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적지않은 사건과 만남을 겪었다. 그 속에서 얼마만큼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었던가. 볼 수 없었다면 이제라도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청해야 한다. 성령은 하느님의 힘이시다. 그분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오랫동안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살지 않았는가.



오늘 또 다시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시길 청해야 한다. 특별히 가족 안에 힘든 부분이 있다면 오셔서 감싸주시길 청해야 한다. 내 영혼과 육체 안에 눈멀고 묶인 부분이 있다면 해방의 은총을 청해야 한다. 믿음은 영적 에너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신앙이 삶의 짐으로 남아있다면 어찌 힘으로 바뀌겠는가. 신앙생활을 삶의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길 청해야 한다.



사람은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듯이 말하고 행동한다. 영적세계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영적세계로 눈 돌리게 하실 수 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통해 빨리 영혼의 눈을 뜨라는 권고다. 하느님의 능력에 눈을 떠야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맡기며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금년에도 우리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39      연중 제3주일    루가 1,1-4; 4,14-21 (다) 중독에서 해방되는 오늘

   허 근 신부



전도(顚倒)된 가치관, 비 윤리적인 도덕관으로 퇴락해 가는 인간들의 모습 안타깝도록 처절하기만 합니다. 약물, 행위, 대상에 중독된 사람들도  모두가 구원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를 온갖 스트레스와 불안에서 건져 주어 편안하고 즐겁고 더 강하게 해 줄 것이라는 착각과 호기심에서, 또 재미로 시작한 약물과 행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달콤한 미끼와 무서운 덫입니다.    사람이 어떤 물질이나 대상에 중독이 되면, 지능과 정서, 의지는 바닥에 떨어지고 영혼마저 병들고 맙니다. 후회와 죄책감으로 다음에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결심은 하지만 어리석은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로마 7,19).

   

중독이란 병은 신분, 교육정도, 직업, 경제상태, 연령,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교우들과 관계를 돈독히 한답시고 술을 마셨고, 때로는 괴로움을 달랜다고, 잠시나마 편안한 마음을 가지겠다고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어버렸고, 마침내는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술이 저에게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구속하고 불안한 생활로 몰아갔습니다.

   

중독자들은 자기만의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신체나 정신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중독물질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타락했거나 의지가 박약해서가 아니라, 중독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직도 덜 맞아서 엇나가기만 하는가? 머리는 상처투성이이고 속은 온통 병이 들었으며 정수리까지 맞아 터졌는데 짜내고 싸매고 약을 발라주는 이도 없구나”(이사야 1,5-6). 중독자들은 자신에게 분명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중독 사실을 합리화하고 부정하며, 중독의 원인들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의지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중독으로부터 명백한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중독의 상태에서 진정으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중독으로 인해 와해된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의탁할 때 중독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

모든 중독에 빠져 있는 분들과 가족들이여! 오늘 주님의 말씀에 믿음과 희망을 가져 보십시오.

40        연중 3주일   루가 1,1-4; 4,14-27 (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


묵상 길잡이 : 교회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있는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다.

복음화란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바로 그 일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으로 여기셨던 이 일이 교회가 역사 안에서 이루어야 할 일이며, 신자인 나의 사명인 것이다.



1. 예수님의 정견발표(?)

예수님 시대에도, 제대로 남들 앞에서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율법교사 밑에서 율법에 관한 수업을 쌓고 인정을 받은 후에야 가능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수인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어느날 가출하여 떠돌이 생활을 하다 방랑 설교자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고향 사람들의 눈초리는 그리 곱지 않았다. 여느 안식일처럼 그들은 성서를 읽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예수가 읽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이들에겐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루가 4, 18-21)



예수께서 오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읽은 이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메시아(구세주)가 와서 이룰 사명을 명시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들이 바로 자신을 통해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바로 그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보듯이 나자렛 사람들은 “저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가 4,22)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루가 4, 29) “우리더러 믿음이 없다고! 우리가 제 놈 밑천을 다 아는데 자기가 메시아라니, 미꾸라지가 龍(용)이 되어도 그렇지,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들은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이루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시대를 열면서 정견발표(?)를 하신 것이나 다름 없다.



2. 그리스도의 사명은 곧 교회와 사명

어느 회사에나 창업이념이 있고, 학교엔 교훈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여학교에 갔더니, ‘앎, 맑, 밝’이라는 교훈이 있었다. 간단명료했지만 뜻은 충분히 통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한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사’라고 했다. ‘성사’라는 말은 쉽게 설명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의 보이는 표지’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하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표지였다.



마찬가지로 부활 승천하시고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표지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역사 안에서 바로 예수님이 이세상에서 이루시려고 하셨던 그 사명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다.



3. 교회의 사명은 곧 나의 사명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고 하였다.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분이 보내신 구세주로 믿어 고백하는 모든 이는 다 하느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다 그 믿음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다. 종탑이 높게 솟은 교회 건물이나 주교 신부, 수녀들이 교회가 아니다.

신학자 콩가르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 한사람 한사람이 최첨단 교회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교회'라는 신자 각자의 깨달음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엔 성당과 예배당의 숫자가 다방 숫자보다도 더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인신매매와 성폭력, 자녀를 마음 놓고 학교에 보낼 수 없게 된 도덕불감증과 온갖 비리가판을 치는 정의의 실종 등, 인간다움을 송두리째 상실한 정신적 파산상태를 맞은것은 왜인가?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으로 확인하셨고, 당신 교회의 사명으로 남겨 주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사명을, '교회인 내가' 소흩히 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개인적인 기복신앙에만 머물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하자.



우리는 “2천년 대희년”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바로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참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파견되었다는 사명감을 다시금 깨달아 새로 나야 할 것이다‥‥.











41         연중 제3주일   루가 1,1-4; 4,14-21 (다) 배우고 실천하는 삶



1. 복음 이야기(루가 1,1-4; 4,14-21)

신약성서 가운데 루가 복음서(1,1-4)와 사도행전(1,1-5)에만 서문이 있습니다. 루가는 당시 그리스 작가들의 관례에 따라서 서문을 썼던 것입니다. 이 서문은 루가가 예수 사건,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부터 예수 승천 때까지의 기록을 데오필로에게 바친 헌정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ꡑ이란 뜻을 지닌 데오필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가상 인물일 수도 있고 실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데오필로는 교회에 새로 입교한 교우였을 것입니다.  루가는 데오필로와 같은 입교자들에게ꡐ이미 배운 말씀들ꡑ이 예수 사건에 근거를 둔 확실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복음서를 집필했습니다. 사실 루가가 복음서를 집필할 당시 교우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로서 초보적인 교리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루가 4,14.15은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행하신 활동을 요약한 집약문입니다.

갈랠래아에서 활약하신 예수께서는 영의 능력을 지니시고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스승으로 칭찬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1-2절과 58장8절을 읽으시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 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고” 나자렛 출신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파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ꡐ가난한 이들ꡑ, ꡐ포로들ꡑ, ꡐ소경들ꡑ, ꡐ억눌린 이들ꡑ은 불행한 소외자들, 곧 땅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또 주님의 ꡐ은혜로운 해ꡑ는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모든 노예들을 풀어 주고 모든 토지를 원 소유자에게 되돌려주는 희년을 뜻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외친 이 구원 예언이 예수님의 오심으로ꡐ오늘ꡑ실현되었다는 것이 이 설교의 내용입니다.



2. 우리의 이해

히브리서 필자는 교우들이 시간적으로 볼 때 마땅히 선생이 될 만큼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서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교리를 떠나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자고 권면했습니다(히브 5,12 ; 6,1-2).



루가 복음서 필자 역시 초보적인 교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이 참되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복음서를 썼다고 말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여러 면에서 많은 성장을 가져왔음은 분명합니다. 특히 자선사업에 있어서는 어느 종파보다도 앞장서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과 문화 수준에서는 미숙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과 교리 그리고 성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성찰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교회는 교우들에게 신학과 교리 성서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우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배우고 실천할 때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신명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더 이상 추상적이고 막연한 초보적인 교리 수준에 머물러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령을 듬뿍 받아 예수님의 삶을 부지런히 익히면서 사회정의와 평등,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데 온 정성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희년이 되면 전국 각지의 언덕 꼭대기에서 요벨로 만든 나팔을 불어 희년이 온 것을 알렸듯이 올 한해도 한국 교회가 교우들에게 복음따라 신명나게 살아가도록 기쁨의 나팔을 많이 불어 주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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