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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김민규 안드레아 신부
작성일 2008년 5월 16일 (금) 23:21
분 류 연중8-13주일
ㆍ추천: 0  ㆍ조회: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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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issa.or.kr/cafe/?logos.1084.
“ Re..삼위일체 대축일 ”
 

 

1.1. 삼위일체 대축일(가해)



<제 1독서: 출애 34,4b-6. 8-9>

신학적 핵심과 초점: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 뵈러 시나이산에 오른다. 그 때 야훼께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분이시라고 알려 주신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본성은 반드시 삼위일체이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선 둘 이상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에게도 가능하다. 하지만 셋 사이의 관계 안에서의 사랑과 일치는 오직 신적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사랑 자체이시며 사랑 중에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삼위일체적 본성을 가지실 수밖에 없다는 설명에 초점을 둔다.



<제 2독서: 2고린 13,11-13>

신학적 핵심과 초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13,13).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계시면서 온전한 일치와 친교의 상태로 계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는 대목이며, 이러한 삼위일체의 모상인 우리 인간들, 특히 신앙의 자녀들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이 삼위일체적인 일치와 친교의 삶을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중의 상태인데, 궁극적인 완성의 목표는 바로 삼위일체적인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적인 사랑은 곧 완전한 사랑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복음: 요한 3,16-18 >

신학적 핵심과 초점: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3,16-17). 인간이 그토록 배은망덕하고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받아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신적 사랑이 잘 드러난다. 이것은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차원으로는 불가능한 마인드이다. 셋 사이에서 완전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신적 사랑, 즉 완전한 사랑의 차원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희망과 위로를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인간에게 이로운 것, 유익한 것만을 주려고 하는 하느님의 흘러넘치는 사랑을 삼위일체라는 신비스러운 차원 안에서 설명하고 나아가 삼위일체적 본성은 타인에게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역동적인 사랑이기에 마땅히 선교에로 방향지워져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둔다.





<강론>



  찬미 예수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요. 그런데 삼위일체로써 한 분이시라는 신비스러운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단 한 분이시라면서 삼위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그냥 한 분이면 한 분이지 왜 굳이 삼위로 한 분이라는 표현을 써서 헷갈리게 하는가? 그리고는 교회의 믿을 교리이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니까 그냥 막무가내로 믿으라고 합니다. 이 삼위일체 교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교리입니다. 다만 초대 교회의 주교와 사제, 그리고 신학자들이 성경 말씀을 알아듣는 과정에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교회의 교리로 확정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성령의 영감으로 깨닫게 된 진리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렇게 성령께서는 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만으로 다 알아 듣기 어려운 진리들도 주교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통해 배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교도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지도와 지시에 잘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는 200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다 말씀하시지 못한 진리들을 성령께서는 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닫게 해 주시고 되새기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들은 바로 성령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해설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냥 한 분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일까요?

  요한 1서 4장 16절에 보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인데요, 바로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상이 있어야 하지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든, 또는 하느님이든, 무언가 대상이 있어야만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대상이 없이 그냥 혼자서만 있다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 본질상 다른 대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상이 없다면 도무지 사랑이 성립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이기심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단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사랑의 속성상 당연히 하나 이상의 대상이 있어야 하겠지요. 삼위일체 하느님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대상들이 셋 있다는 뜻이고, 이 셋의 관계가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대상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은 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셋의 관계라는 점과 이 셋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둘 사이의 일치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가 더 끼어들어 셋이 되면, 셋이 일치를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해지지요. 아무래도 더 나은 한쪽에 기울어져 자꾸만 둘이 일치를 이루려 하기 때문에 셋의 일치는 쉽게 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셋이 일치가 안 되고 둘 만 일치하려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삼각관계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셋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을 때,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는 얘기는 사랑의 최고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완전한 사랑, 곧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사랑, 곧 삼위일체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둘이 서로 마음이 맞아서 사랑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랑이긴 하지만 조금 부족한 사랑이라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정도 내 만족을 채워주는 부분이 있고, 내 기준과 입맛에 맞기 때문에, 그리고 내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욕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 안에 다른 제 3자가 들어오려 할 때, 대부분 거리감을 두거나 소외시켜버리게 됩니다. 셋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셋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자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마음이 맞는 둘 사이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아직 소유욕이 제거되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셋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위한 보다 성숙한 사랑의 모습이 됩니다. 셋이 일치할 수 있는 상태만 된다면, 그 이상부터는 쉽게 일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셋이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서로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는다는 것을 뜻하며, 이 상태라면 아무리 수가 많아진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염려하게 되어 일치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고유의 영역을 그대로 존중해 주면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는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가장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며, 삼위일체란 곧 사랑인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사랑을 본 것은 삼위일체를 본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창세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를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본성에는 삼위일체를 향한 강한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삼위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이기심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 사이의 일치와 셋 사이의 일치는 그 차원이 다르지요. 둘 사이의 일치는 인간적인 사랑(에로스나 필리아)의 차원이고, 셋 사이의 일치는 신적 사랑(아가페), 곧 하느님 사랑의 차원입니다. 신학교에서도 보면 한 공동체 안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정신에는 맞지 않는 것이지요. 둘 사이의 일치만 추구한다는 것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셋 이상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벌써 신적 사랑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입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셋 이상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물론 둘 사이의 관계에서 처음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곧 부모님과의 사랑, 형제자매들을 비롯한 가족과의 사랑, 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의 사랑 등이 되겠죠. 하지만 성경에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 해 준다면 칭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씀처럼, 이러한 사랑은 사실 불완전한 사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다만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랑의 체험인 것이지요. 둘 사이의 관계에서부터 배우게 되는 사랑의 체험으로 셋 이상의 관계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의 소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 역시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중국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베트남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언제나 서로 내어주려는 삼위일체의 불타는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문제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가 안고 있는 모든 고민들과 문제들, 그리고 고통들은 내 안에서 빨리 해결 되어서 없어져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나를 더욱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여 완성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들입니다. 완성의 길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의 길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셋 이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잘 극복해 내고, 더욱 성장하며 성숙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웃을 위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의 문제가 빨리 다 해결되고 안 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안의 문제들에만 집착한다는 얘기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 자신이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기적인 불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죠. 우리가 완성을 향해 나아가려면 반드시 다른 이웃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는 사랑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즉, 셋 이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삼위일체적 사랑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청주교구 사명 선언문의 표어가 ‘이웃으로, 세계로’인데요,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적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를 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삼위일체의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오직 사랑을 주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줄 수만은 없으며,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것만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교황님의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우리는 바로 관상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관상은 고독과 내적 침묵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영적 친교를 말합니다. 즉, 고독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고 위로와 힘과 사랑의 샘물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르지요. 외로움은 소모적인 것이지만, 고독은 창조적인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회칙「교회의 선교 사명」에서도 말하기를 선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관상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의 기운으로 역시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 안에 선교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아직도 이기적인 사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선교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선교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결국 선교야말로 우리 구원의 길이고, 완전한 사랑의 길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는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끊임없이 다른 이웃에게로 다가가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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