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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4, 성령의상징
작성일 2008년 5월 8일 (목) 18:17
분 류 부활시기
ㆍ추천: 0  ㆍ조회: 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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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령강림 대축일 ”
 



성령강림 대축일

        31. 성령은 누구신가/63           32 성령의 상징들/65

        33. 최인호 작가/67                 34. 성령의 열매/68



31               성령강림 대축일 :   성령은 누구이신가



성령은, 그리스도의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인간성을 성부의 오른편에 앉게 하시어 영광스럽게 하신 원동력이시므로,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된 모든 믿는 이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실 원동력이시다. 그래서 교회 전통은 성령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있듯,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있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교회의 魂이시라면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역시 성령이시다.

성령은 성화의 은층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시어 새사람이 될 힘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초자연적 덕성을 주시어, 사람이 구원진리를 올바로 믿게 하시고,그 믿음에 의지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영생을 바라며, 모든 피조물 위에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열정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은 신자 개인을 성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교회를 성화시키신다.



예수께서 교회의 모든 내용들을 만드신 분이시라면, 성령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분으로 교회 일치와 보편성의 근원일 뿐 아니라, 교회가 복음선포를 하는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성령강림



교회의 전례력은 부활시기가 성령강림 대축일로 마감된다. 이는 성령강림이 예수부활과 별도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강림과 함께 초대교회가 기쁘고 담대히 복음선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부활 체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부활 이후에도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태에 있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야 기쁘고 담대하게 이방인들과 유다인들에게 이 예수부활을 증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성령강림과 예수부활은 서로를 비추는 빛으로 성령강림은 부활신비의 절정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첫번째 증언(사도 2,14~36)을 통해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아 세례를 받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게되는데, 이들의 모임이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일을 교회의 창립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



성령강림은 교회의 시작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계속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성화은총으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은사를 베풀어주신다.

성령의 그 여러가지 도움을 흔히 성령칠은이라 하여 슬기, 지각, 의견, 지식, 용기, 효경, 경외심을 일컫는다.



슬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세속 사랑보다 귀하게 아는 지혜를 말하며, 지각은 구원진리를 인간 지력의 한계 내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의견은 선악에 대한 바른 판단력을 도우며, 지식은 믿을 것과 믿지말아야 할 것을 식별하는 은사이다.

용기의 은사는 신앙생할에 수반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며, 효경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더하게 하고, 경외심은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상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사이다.

  

그러나 이 칠은은 완전을 상징하는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일곱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은사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거저 주시는 선물을 총칭한다.

  

이 은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하느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데 그 첫번째 목적이 있고, 둘째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다. 아울러 셋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결국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건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성령이 거처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성령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며 그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3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공통)   성령의 상징들




  내 방에 약 15cm되는 쥐 한 마리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침에 응접실에 나가 보니 온통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끈끈이를 사다가 이 구석 저 구석에 놓았으나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가지 단서를 남겨놓았다. 난초를 뒤집어 놓고는 뿌리를 파먹은 것이었다. 목이 마르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놈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물로 유인하면 걸려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작은 물그릇을 땅 한 구석에 놓고는 그 주변을 끈끈이로 온통 막아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나가보니 그 놈이 끈끈이에 걸려서 찍찍거리고 있었다. 쥐는 약은 동물이다. 끈끈이가 해로운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말라죽을 것 같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달려들었다 걸린 것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에게 있어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성령을 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영혼에게 성령은 물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물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의미한다"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시들어간다.



바람(숨)

 성령은 숨(바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숨을 쉬지 않으면 인간은 죽은 것이다. 뚱뚱한 사람 하나가 장가를 가서 첫날밤을 지내는데 어찌나 코를 골아대는지, 그만 신부는 겁에 질렸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만 고는 것이 아닌 가끔씩 ‘무호흡증' 증세까지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코를 세게 골다가 잠시 아무 소리도 없으니, 남편이 죽였나 걱정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숨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혼도 숨같은 성령께서 함께 계셔야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께서는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셨다. 바람소리와 함께 임하신 성령을 받고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다. 새 사람이 되었다.

이 세상에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떤 과학자는 “신부님, 바람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라고 말한다. 바람은 무더위를 몰아낸다. 찜통 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머물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헉! 헉!" 대다가 죽을 것이다. 그뿐인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몰고 온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몇달 계속 머물면,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기를 계속 맡을 때에는 답답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쳐서 나무가 몇 개쯤 부러지는 상황이 지나고 나면 공기는 맑아진다. 바람이 더러운 공기를 몰아낸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우리에게 생기를 주신다.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지르면 나오지 않는 사람도, "불이야!"하면 나온단다. 불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인간이 어찌 살겠는가! 불이 없으면 어떻게 문명이 발전했겠는가? 불은 열을 낸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불이 있기 때문이다. 불꺼진 방,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방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불은 힘을 낸다, 불이 있기에 공장도 돌아가고 배도, 비행기도, 자동차도 움직인다.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높은 빌딩을 올라가겠는가! 30층, 40층 되는 빌딩을 걸어서 올라가면 등골이빠질 것이다.

  

불은 빛을 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아니 등잔도 촛불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불이 없으면 암흑의 세상이고 두려움이 몰려든다. 이외에도 불은 정화시킨다. 더러운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과 관계있는 불을 성령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런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려고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을 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3년간의 일을 마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자 당신께서 받으셨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오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다"(I고린 12, 3)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 9)라고 말한다.

세례와 견진성사는 성령을 받는 성사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는가? 그것을 체험으로 느끼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7가지(이사 11, 2-3)와 9가지( I고린 12, 8-17)가 있다. 성령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은사와 열매를 주신다. 이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9가지(갈라 5, 22)가 있다. 이는 개인을 위한 열매들이다. 요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성령은 공동체를 깨면서 활동하시지는 않는다. 사목자의 지도를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영광을 도모하는 사람, 돈을 요구하는 사람, 공동체를 깨는 사람, 종말을 얘기하면서 겁을 주고 희망을 꺾어 버리는 사람들은 요주의 인물이다.











33                성령 강림 대축일   거짓 평화를 주지 말라

최인호 베드로/작가



 ‘서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베네딕토(480-547)의 생애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기도하고 일하는’ 베네딕토 수도자들의 규칙서를 남김으로써 모든 수도자들의 기초를 완성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의 전기를 저술한 성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베네딕토가 저술한 단 하나의 규칙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토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서술하였다. 그분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려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몸소 생활하셨던 것과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숨겼지만 규칙서는 ‘분별력이야말로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부른 그의 말처럼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베네딕토규칙서」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아버지의 훈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있게 채움으로써 불순종의 나태로 물러갔던 그분께 순종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거라.”

이 규칙서의 제4장에는 74가지의 계율이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로 시작되는 계율은 5번째에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그 당시 수도자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서로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곤 했습니다. 베네딕토는 ‘손님을 받아들임에 대해서’란 항목에서 손님들을 진정 사랑의 친절로 받아들여야 하며 기도를 바치기 전에 하는 평화의 입맞춤은 ‘악마의 속임수’이니 위선적인 평화의 입맞춤은 하지 말라고 경계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시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두 번이나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리스도 평화의 상징인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두려움은 ‘어쩔 줄 모르는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주님은 붙잡히시기 직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4,27).

주님의 말씀처럼 이 세상이 주는 평화는 베네딕토 성인의 표현처럼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화에는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창자국이 없습니다. 그것은 억압된 평온과 강요된 침묵의 거짓 평화인 것입니다. 인간 존재로서의 해방과 평등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이 세상 권력자들이 외치는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평화를 빕니다” 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 평화의 인사 속에 그리스도의 참평화가 깃들어있는지, 아니면 성인이 경계하였던 악마의 속임수인 거짓 평화가 깃들어있는지 진심으로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34                         < 성령의 열매 >



 1.   축복된 삶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변화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새로운 인품을 묵상하였다.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아홉 가지의 열매이다.



하나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엣 사는 삶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 기도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기도했다고 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열심히 노력하는 삶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자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말은 모순되게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열어 놓고 받는 것을 배우라는 뜻이다.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선물이다. 그래서 자신의 습기찬 부분을 하느님의 따스한 빛에 열어 보이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은총의 햇빛에 나의 습기찬 곳을 뒤집는 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느님이 해 주신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거슬러 강제로 하시는 것이고, 이 부분만큼은 인간이 하기를 하느님은 원하신다.

아무리 강한 햇볕이라도 덮어씌운 항아리의 속을 비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이 하느님의 역사 하심을 막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아담과 에와가 과일을 따먹으면서 한 독립 선언인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하느님께 장독 뚜껑을 열어드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햇빛과 은총 그리고 성령이 우리 마음 안에 역사 하심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깨달음이고 체험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참된 행복을 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참된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평생을 따라 다니는 신념이 될 때에,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자기가 있는 장소와 맡겨진 일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만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때와 장소에 있기를 바란다면, 오늘의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없다. 하느님의 역사 하심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있는 이 곳에 있기를 바라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충실히 하기를 원할 때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배우는 유일한 장소는 우리의 일상 생활이다.



우리가 날마다 일하고 있는 소임지의 일상 생활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배우는 유일한 장소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장소에서 그 일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도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고 만남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다만 그분께 마음만 열어 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려야 한다.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성실하고 겸손하더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고정시키고서 그분의 생애를 본받는다면 점점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므로 실망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실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부활 성야 때 우리는 “오! 복된 탓이여!”라고 노래를 한다. 아담과 에와가 지은 죄 때문에, 하느님께서 삶이 되신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나 실수 때문에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과 겸손을 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게될 것이고, 그 사람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열매를 다 맺어 주시고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역사 하심을 보도록 허락 받게 될 것이다.

즉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부드럽게 인도하시고 인내롭게 우리의 실수를 참고 받아들이셨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얼마나 인내롭게 참아주셨는지는 하늘 나라에서 알게 될 것이며, 그 때 우리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 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주셨을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의 길을 주님께 감사드리고, 이제는 그 길을 주님께서 우리를 업고 가신다는 믿음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아홉 가지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되어 축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새로운 삶 






1) 완덕에의 부르심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을 매일 길을 걸어가는 것에 비유하여 生卽道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내가 가고 싶어했던 그 길을 가고 있는지, 또한 그 길이 올바른 길인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완전하심 같이 우리도 완전해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완전함”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느님으로부터 초 한 자루를 받았다. 그리고 이 초에 불을 붙이면, 그 초는 완전한 초가 된다. 비록 그 초가 태양처럼 온 천지를 밝힐 수는 없지만 초가 자기가 발산할 수 있는 빛을 발하면, 초 나름대로의 완전성을 이룬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한 송이의 꽃송이가 들국화나 장미 또는 백합일 수 있다. 그런데 할미꽃이 장미꽃은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 들국화가 자기의 위치에서 활짝 피어나면, 들국화의 완전성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들국화에게 너는 왜 장미가 되지못하느 냐고 나무라서는 안된다. 그 들국화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활짝 피어나 하느님 께 “제 몫을 다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박아들이 성가 부르는 것을 보면, 노래가 아니라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들으신다.

부모는 자식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결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꽃봉우리를 활짝 피우려는 노력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소질과 생명을 최선을 다해 살 때, 완덕에의 불안감이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물에 살면서도 물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 상류로 가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완덕에의 어려움이나 시련을 강한 의지로 물리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2) 그리스도의 향기와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골로사이 3,10)라고 하면서, “새 인간”이라는 말을 서너 번 썼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생활과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 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새로움과 변화를 나타내며 이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시는 능동적인 능력이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에 굉장히 집착을 한다. 아주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은사는 “인품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고린토 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는 모두 공동체를 위한 것이며,

더 큰 은총의 선물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변화”임을 강조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비범한 은사보다 눈에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품성과 인격이 변하는 것이 가장 주된 성령의 역사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변화된 인품의 참모습을 갈라디아 5장 22-23절에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그리스도인 전체의 덕목을 이야기 해 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 이 하나의 뿌리는 요한 복음 15장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

첫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기다리 면서 듣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둘째, 성령께서는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성취시켜 주시므로 그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는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도들이 이제 두려움을 무릅쓰고 전교하기 시작했다.

사랑(Ⅰ)       <성령의 열매>그분들은 말주변도, 지식도 변변치 않았다. 그러나 그 확신과 기쁨에 넘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분들을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 하시어 내가 나날이 변화되고 있음을 다른 사람이 보고, “저 사람은 예수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

       3.  사  랑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성령의 첫째 열매는 사랑이다.

성경에는 야곱의 라헬에 대한 사랑,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 등이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인간을 서로 가깝게 만드는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이다. 부부, 부모와 자녀 그리고 친구간의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적인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주는 아가페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랑은 감정이기 때문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없어지는 수가 있다. 반면 두 번째 사랑은 사랑을 주는 것으로써, 상대방에게서 매력의 감정이 생겨서 봉사하겠 다고 결심하기 전에, 즉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후에 이 매력의 감정이 생기는 것 이다.



중매결혼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 그러나 결혼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나는 남편 되는 사람을 사랑하고 말 거야.”라는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의 사랑은 의지의 문제로써 이것이 오래가고 진실한 것이다.



첫 번째/ 사랑을 가지고 있는 부부는 사랑이 오고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만 있고, 정작 사랑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현대 가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은 갈수록 커지지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랑을 하는 부부는 상대방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주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라는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나도록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그의 행복은 아내를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고, 남편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역시 똑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주고 받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사랑(Agape)이라는 말은 항상 자기 자신을 주는 것(Self-giving)에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사랑을 주고 또 받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도 사실은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먼저 받고서야 주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가정 공동체와 대인관계가 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해야할 일은 먼저 주는 것이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먼저 주면 저절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험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다.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이론이 아닌 체험 그 자체이다.

사람은 한 번 실천해서 자기 마음에 강렬하게 와 닿는 체험이 있을 때 삶이 바뀌기 시작한 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체험할 때 비로소 삶이 바뀌게 된다.

이런 큰 깨달음이 오지 않으면 단지 이론에만 머물러 삶의 일부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타인에게로 향하는 꾸준한 의지의 방향”이 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의지는 모든 사람의 선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착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 즉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에로 이끄시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가 우선하며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때때로 하느님은 우리를 고통과 슬픔의 어두운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련의 때가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 굉장한 도움과 이익 그리고 선의 원천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참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 배려하 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루가 복음 10장 29-37절에서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다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이웃”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서 도와주라고 맡긴 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순종”의 뜻이 들어있다.



사랑은 성령의 첫 열매로서, 이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요한 1서 4장 19절의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참 쉬운 것 같지만 아주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사랑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는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배운다. 아기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기 훨씬 전에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전혀 배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체험이 깊이 와서 닿았을 때야 비로소 자신 있게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자신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게 만들고, 자신감을 가지고 하느님께 사랑을 되돌려 드리고,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여유와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잘 어울린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사랑을 확실하게 체험하고 도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을 쳐다보고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한다. 아울러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

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하늘 공중에 떠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생각 하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공간의 개념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하늘 어디엔가 있을 하늘 나라나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천국에서 기대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느님과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깊은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늘 나라에 가서 할 것이 없다. 하늘 나라에서는 사랑밖에는 할 것이 없기 때문 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랑을 하면서 참된 사랑의 아름다움과 애절함 그리고 가슴 뿌듯함을 못 느껴 보는데, 그 완전한 사랑을 하느님과 영원히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비록 불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에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 사랑을 빼어 버리면 인간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닫지 못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무궁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아주 개별적인 사랑이다. 하느님은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목자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불러서 양우리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따로 불러서 구원해 주신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방을 쓸고 불을 켜고 애타하는 여인과 같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개별적이며 강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 은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능력이 없다.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햇볕이 높은 산꼭대기와 깊은 골짜기의 어떤 풀잎의 이슬방울에도 비쳐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각 개인의 영혼을 안아주시고, 개인적인 사랑으로 이끄신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깨닫느냐가 문제다. 이 체험은 조금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빨리 느낄수록 우리는 천국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선 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사랑의 이중 계명이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에서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느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다.

구약에는 십계명이 언급되기 직전에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에집트 땅 종살 이하던 곳에서 너희를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내가 이런 것을 너희에게 해 주었으니, 너희도 이런 것을 베풀라.”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모든 계명과 윤리의 근거는 하느님께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과 연관시킨다.

즉 하느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주님께서 주신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시켜서도 안되지만, 두 사랑이 하나로 동일시되어 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거부하 고 기도만 하겠다는 신심주의 또는 종교의식주의가 있을 수 있고,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핑계삼아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행동지상주의는 하느님 없는 휴머니즘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인 사랑의 두 가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어머니께 처음 배운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도 인간으로부터 먼저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랑을 인간으로부터 배우지 못했다면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두 사랑을 구별은 하되, 전혀 다른 두 개의 사랑으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인간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적 인 사랑이 많아질수록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커지고, 진해지고 넓어지고 깊어진다. 사랑이 주는 기쁨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사랑의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어하는가! 인간은 누구나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고 그리워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조금만 감안하여 먼저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굉장히 복음적일 수 있을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3).

믿음과 희망도 사랑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나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은 “내 마음을 준다.”에서 나온 말로 바로 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런 희망과 사랑과 믿음은 참된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면 하느님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치 않고, 영원히 하느님과 일치해서 사는 희망도 이루어졌으므로 오직 사랑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나에게 하느님의 이 사랑이 임했을 때, 즉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천국은 사랑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이다.





     4.  기   쁨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몇백 명의 사람들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전하여 세계를 정복하였다.



우리는 기쁨과 쾌락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육체적인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때에 생기는 만족감은 쾌감이다. 그러나 기쁨은 심리적인 만족감과 함께 삶의 의미를 체험했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사람의 몸을 해치는 것은 세균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느끼는 온갖 걱정과 불안 등이다. 기분이 좋으면 혈액순환도 잘되고 소화도 순조롭게 된다. 그러나 걱정이 쌓이면 치료가 잘 안되고, 어떨 때는 숨이 콱 막혀서 쓰러질 정도가 된다. 60% 이상의 질병이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즐거운 마음은 건강에도 좋고 일의 능률도 오르게 하며 사회를 명랑하게 한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에게 기쁜 마음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이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유다스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온 세계를 뛰어다닐 수 있었는 가?



그것은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이는 그런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온 그 이후부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요한 20장 20절에는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라고 쓰여있다.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장면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고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자 그들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에 대해 아주 기뻐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부활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사도들은 깨달은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가 다르게 와 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은 이 부활의 기쁨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 기쁨은 혼자서 붙잡아 매둘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기쁨은 도무지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마에 표시를 하고 다닐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굉장한 호기심과 부러움을 가지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에는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은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고 쓰여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남들이 우러러 볼 리가 없다.

내가 상을 찡그리고 선행을 한다면 무엇을 잘했다고 우러러보겠는가?

기쁜 마음으로 서로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나누어 마시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니까 우러러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뻤기 때문에 시련이 닥쳐와도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서도 기뻐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억지로 라면 좋은 일을 한두 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두 번으로 그치고 지속되는 힘이 없다. 그러나 기쁨이 우러나와서 할 때는 그 모든 어려움도 무마될 수 있다.



고린토 후서 6장 10절을 보면 “하느님의 봉사자는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뒷바라지를 기쁜 마음으로 한다. 사랑이 많아지면 그만큼 기쁨이 커진다.

사도 바오로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있을 수 없다.”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절망과 공포 그리고 불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은 죽은 후의 허무에 대해서 굉장한 절망과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야말로 참된 내적 기쁨을 주는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 사도시대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에 차서 기쁨 속에서 이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야 한다.



이 기쁨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지탱해 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 중에 과연 명 퍼센트나 자기 인생과 이웃의 인생을 기쁨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는 데살로니카 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 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는 말씀대로의 삶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에서도 복음의 희망과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기쁨은 굉장히 깊숙한 곳에 있으며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의 전 생애 에 흘러가야 할 기쁨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해서 왜 고통과 불목과 마찰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어려움, 불목, 마찰, 고통 등의 밑바닥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쁘게 살고 남에게 기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쁨은 사람들을 연결시켜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조그만 다리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지치고 무표정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와 밝은 빛을 전해주는 사람이 될 때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자발적으로 기쁨에 넘쳐서 행동하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야 우리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5.   平和 (평   화)






인간은 누구나 다 평화를 갈망한다. 그러나 인간은 평화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평화의 본질과 실체를 잘 모르고 있고, 또 이 평화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하느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미국의 종교 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로 따라 다니는 것이 새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불안감, 둘째는 공허감, 셋째는 고독감이라고 했다.

인간은 왜 불안하고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가?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 불안해진다. 안정이 되어 있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떠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마음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평화의 참 뜻은 완전하다. 충만하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하는데 성서에서 말하는 샬롬(평화)은 하느님과 화목하여 사는 상태로써 구원과 생명으로서의 참 행복을 뚯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참 평화는 현세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님을 얘기하면서, 평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 두 번째, 각자의 마음속의 평화. 세 번째, 형제들과의 화목. 네 번째,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이다.



성서의 주제는 이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먹음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깨트렸다.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행복해지겠다고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에와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악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인데, 하느님을 떠나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겠다는 것이다. 이 죄로 인해서 하느님과 인간이 불목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죄악으로 말미암은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하게 된다. 그래서 에페소서 2장 14절에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쓰여 있다. 온갖 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왕으로서, 평화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 희생의 결실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화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화는 화해이고 일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치는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에페소서 4장 3절에는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내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호소와 변명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보다 더 애쓰시는 분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 다.



처음에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중간에 가면 마음이 흔들리고 확신이 없다. 그래서 자기 삶의 핸들을 하느님께 넘겨드리기를 두려워한다.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가 없는 것은 많은 기도가 조바심과 안달, 조급함과 이기심 그리고 자기추구를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자기 자신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많은 부인들이 남편의 회개를 위한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정작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믿음과 평화는 공존한다. 확신에서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믿음이 자기 생애를 끌고 갈 만큼 든든하지 않고, 삶의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평화와 일치를 방해하는 마귀(Devil)는 비방․험담․중상모략 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의 질서정연한 관계를 어질러 놓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통회하는 정신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많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어, 형제가 산으로 가자고 하면 바다로 가고 싶어도 산으로 갈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 할 절대 가치는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도 서로 양보하며 살 수 있다.

사랑이나 평화가 일의 성취 자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인 것이 무엇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치와 평화로써, 우리가 자기 주장과 고집에서 벗어나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드리면 성령께서 나의 인품을 바꿔 주실 것이다. 우리의 영혼 안에 평화의 열매를 맺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 것보다 나물을 먹는 화목한 가정이 훨씬 낫다.”는 표현이 있다. 사랑과 일치와 화목 그리고 평화를 위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절대적인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치와 평화이다. 우리가 자기 주장과 고집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어드리면,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평화의 열매를 맺어 주시고 우리의 인품을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우리 사이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흐르도록 애써야겠다. 우리는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 이 되어야 한다. 남의 잘못을 덮어줌으로써 그 잘못이 더 이상 전파되지 않도록 자기가 들은 것으로 끝내야 한다. 서로를 떼어놓기보다는 가까이 하고 일치시켜야 한다. 우리의 이웃을 아프게 하고 모욕하는 것들을 대화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마음 착한 이들에게 약속하신 평화와 기쁨이 이 땅에 좀 더 많이 내리도록…….





    6. 忍耐 (인  내)






네 번째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인내이다. 인내는 고난, 고통, 어려움에 직면해서 낙심하지 않고 굳건하게 잘 참는 덕을 말한다.



성서에서는 인내를 그저 참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품성을 배운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언제라도 죄인인 우리를 벌하실 수 있고, 파멸시키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은 결코 서두르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정한 때가 올 때까지 참을 뿐만 아니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우리 인간도 어른이 되려면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라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린이에게 좀 더 빨리 자라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어린이들을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성취하고자 서두르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셨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세자 요한까지 이천 년을 필요로 하였고 하느님은 이천 년을 기다리셨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다”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추수 때에 가서야 비로소 곡식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그 종들은 서둘러서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 했으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혜롭게 명령하였다. 추수 때가 오면 좋은 곡식과 가라지를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은 오래 참고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몸이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시간이 걸린다.

베드로 후서 3장 18절에 “여러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또 그분을 앎으로써 계속 자라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계속 자라나야 할 사람들이다.



영성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법을 조용 히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실 수 있는 시간의 여유를 하느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서둘러서 성취시키려고 하니까 매일 실패하고 “나는 성장이 안 된다.”고 실망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도록 하느님께 시간을 드려야 한다.



시련은 글자 그대로 시험과 단련이다. 시련은 우리 믿음을 순결하게 한다.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다. 마치 금강석을 용광로의 도가니에 넣어 찌꺼기를 걸러내는 것과 같다. 이것이 시련의 목적으로 시련은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시련은 확실히 가혹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순결, 정화, 성화를 초래한다.

시련은 시험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다.

어느 세상에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하느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답게 자기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절대 나쁜 것을 주지 않으신다는 더 큰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강철과 같이 뜨거운 시련의 불에 달구면 달굴수록 더욱 강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신앙고백이지 않을 수 없다. 시련이 없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어야 할텐데 시련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 한 대 더 때리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절대 매를 들지 않는다. 사랑의 매를 때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될 때에 그것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된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것이 벌로 느껴지지 어떻게 사랑으로 느껴지겠는가?



인간은 고통이 주어져야 인내라는 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내는 편안한 곳에서는 얻지 못하는 덕이다. 고통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인내의 덕을 쌓을 수 있겠는가? 인내는 역경과 시련 중에서만 얻을 수 있는 덕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오고 실패와 역경이 와야 참된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는다. 숙련된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성난 파도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도 숙련되려면 거센 파도를 많이 이겨야 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나 시련 없이 열매를 따먹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 보람, 영광, 평화는 이 시련을 이겨낸 결과로 온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경이 크면 클수록 우리가 그것을 이겨낸 기쁨은 더욱 크다.

고통이 없으면 거기에 따른 보람과 기쁨이 없는데 우리는 고통과 시련이 없는 보람과 기쁨만을 얻고 싶어한다.



사랑은 여러 가지 시련을 이겨내고 십자가를 지고 난 후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사랑에는 꼭 십자가와 희생이 뒤따른다. 그러나 희생과 시련, 고통을 당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기쁨만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에게 마음 편한 곳에서만 살면, 그 사람은 절대 기쁨을 못 느낀다.

어려운 사람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서 잘 살 수 있는 체험이 없이는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겁내거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그 길을 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련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굉장히 적극적이며 긍정적이다.



옛날에 스위스에서 신부님 한 분이 산 비탈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는데 스위스 교통 법에 비탈길에서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면 벌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마침 순경이 보고서 벌금 10프랑을 내라고 하자 신부님은 “사실 내가 두 손을 다 놓고 왔지만 하느님께서 운전하셨다.”고 대답하자, 순경은 “그러면 20프랑을 내라.”고 했다. 자전거에 한 사람이 더 타면 벌금 10프랑을 내야하니까 20프랑을 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핸들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인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고 싶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고 아집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편안한 때는 하느님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걸어갔기 때문에 발자국이 4개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찬 폭풍우가 몰아치자 발자국이 두 개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보십시오. 저 때가 가장 어려웠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때 하느님께서는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발자국을 자세히 보아라. 그것이 너의 발자국인지?”라고 말씀하셔서 자세히 보았더니 그것은 자기의 발자국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묻자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를 업고 가지 않았느냐?”고 대답하셨다. 이와 같이 어려울 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가신다.

이것이 신앙인 인 우리가 하느님께 삶의 핸들을 맡길 수 있는 이유이다.



독일의 뮨헨 바이에른 지방에 가면 2차 대전의 폭격으로 다 허물어진 시골 성당이 있는데 조각난 예수님의 동상을 주어서 붙여보니까 양팔은 없고 다른 것은 다 있었으므로 그 조각들을 맞춰서 동상을 세운 다음에 “예수님께서 팔이 없으시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팔이 되어 드리자.”라는 팻말을 세웠다고 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이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당신의 복음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참고 기다리신다. 더디게 이루어지더라도 하느님은 결코 조바심 내지 않으시고 우리가 변화되는 시간을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또한 인내는 확신에 찬 삶에서 찾아온다.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를 간직한 사람은 인내할 수 있다.

인생을 아주 어둡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인생을 항상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굉장한 인생관의 차이지만 사실은 보는 마음의 시각 차이인 것이다.

근본적인 마음의 자세 즉 믿음에 따른 것이다.



객관적으로 술이 반 병 정도 남아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반밖에 남지 않았다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앞에 있는 장애물을 보고 “야, 한 번 싸워서 이겨보자!”고 하지 않고 “아이구, 장애물이 또 생겼구나!”라고 피하면 안 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숨어 계신 분이다. 그래서 숨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역사와 발걸음 하나하나를 다 알고 계신다.

그분이 허락지 않으면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은은한 사랑에서 비켜나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참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의 숨어있는 사랑을 볼 눈을 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

느님은 숨어 계신다. 그러므로 우연한 사건과 만남의 가장자리에서 숨어서 역사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여러 번 많은 만남이나 우연히 읽은 책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겪은 어려운 시련들 속에서 숨어 계셨던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익명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장이 다 끝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고 질책하려고 한다.

어느 철학자는 “삶이란 하나의 문장이다. 그 문장의 마지막까지 발음되어야 비로소 그 문장 전체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삶을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우연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숨은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그 생애의 뒷면에 하느님의 사랑 어린 손길이 있었음을 깨닫는 수가 많다. 한 삶이 마감되었을 때 비로소 “아! 하느님께서 바로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앞에 우리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언제나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어서 오십시오!”라고 반갑게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정하신 시간에 오시려고 떠나가 계심을 믿는다.



성서 전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이 정하신 때를 고집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시간을 결정짓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표시하시려고 결정한 그 날과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능과 충실하심에 대한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하느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리듬을 깨고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의 길과 같지 않다. ”(이사야 55, 8)는 것을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참아낼 수 있다. 그것은 그분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련을 이겨낸 다음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당신 방식대로 들어주셨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답게 당신의 방식과 시간대로 사랑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내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을 살아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인내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7.  親切 (친 절)




친절을 희랍어로는 “크레스토스”라고 해서 “인자”“용서”“자비”“호의”라는 뜻으로 쓰는데, 성서에 나오는 친절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언짢음에도 불구하고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정답고 고분고분하고 상냥한 인간의 자연적인 힘을 훨씬 뛰어넘는, 인간의 마음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덕행이다.



루가 복음 6장 27절에서 36절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35절의 “인자”라고 번역한 말이 희랍어의 “크레스토스”라는 단어이다. 우리가 친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친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 오히려 정반대의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나를 못살게 굴고 뒤에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45절 이하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선한 분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윤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인간에게 벌을 주어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자유를 강요해서 회개시킬 수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유의 신비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말을 물가로 끌어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게 강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솝우화에서 세찬 바람과 탱양이 내기를 했는데 나그네의 옷과 모자를 벗긴 것은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따스하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를 미워하며 해치고자 한 사람에게 네 가지 방법으로 보답할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받은 손해보다 더 무겁게 혼내주는 것이다. 창세기에는 카인을 해친 사람은 일곱 갑절로 보복 받고,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 받으리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보복이 성행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주변 국가들이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태복수법이다. 즉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복하는 것이다. 출애굽 21장 24절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범한 죄에 대해서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에는 그것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세 번째는 보복하지 않고 그냥 참아내는 것이다. 일단 손해난 것은 자신이 감수하겠다는 것으로 대단한 용기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네 번째는 악을 선으로 갚는 그리스도인다운 방법이다.

   미국 독립전쟁 때의 이야기다. 피터 밀러라는 사람에게는 원수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다툴 때 그 사람은 밀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밀러는 이 모욕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 사람은 영국군에 가담하여 간첩 노릇을 했는데, 영국군이 지고 미국의 독립군이 이겼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피터 밀러는 워싱톤 장군에게 그 사람을 살려달라는 탄원서를 썼다. 그러나 워싱톤 장군은 승전한 지 얼마 안 되는 이 때에 간첩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에 처함으로써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하면서 밀러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밀러는 “그 사람은 나의 친구가 아니라 나의 원수입니다.”라고 밝혔다. 이것을 본 워싱톤 장군은 원수를 살려달라고 하는 그 뜻에 감동하여 그의 원수를 석방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숨을 구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또한 친절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망각”이다.

잊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하느님의 은총이다.

우리 머리 속에서 스트레스와 잡념을 제거하면, 힘이 더욱 솟고 활기 찬 삶을 살 수 있다.



복음은 분명하게 자기가 당한 모욕을 용서하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매 번 바치는 주의 기도에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버지, 우리가 잊어버리듯이 우리 잘못을 잊어주세요.”라고 얘기하고 것이다. 우리는 대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크게 만족하지는 않지만, 스스로는 제법 완전한 것처럼 여기고 산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사이즘을 착한 사람에게 옮기는 페스트라고 경고한다.



우리보다 앞서 사신 모든 성인 성녀들이 자신이 당한 모욕을 남보다 잘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과 자신의 응답에는 상당한 불균형이 있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만”의 유혹이 생기지 않았다.

용서하려는 사람은 잊으려고 노력한다. 잊음으로써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용서는 인간을 옛날보다 더 아름다운 사발로 만들어 주지만, 인간의 용서는 깨진 사발을 조각조각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용서는 불완전하지만 최선을 다해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앞을 보고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먼저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불란서의 어떤 최고 사령관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장군 두 명이 누가 먼저 경례를 붙여야 하느냐는 문제로 항상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최고 사령관은 “두 사람 중에 더 예의 바른 사람이 먼저 경례를 하시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신이 모욕을 당한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누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하는가를 물어보아야 하고 두 사람 중에 더 그리스도교적인 사람이 먼저 화해의 첫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친절이다.





      8. 善行 (선 행)






선행(Agatos)은 양선함, 즉 “착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착하다고 보는데, 성서에서 말하는 “착함”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고 남이 곤경에 처했을 때 호의적으로 관여하고 기꺼이 도와주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미사 때에 “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또한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나이다.”라고 고백의 기도를 하는데,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고, “선”을 소홀히 했다고 해야 옳은 번역이다. 즉 남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행하지 못한 것을 주님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된 인물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루가 복음 23장 50절에 나오는 요셉 아리마태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나오는 바르나바 사도이다.



요셉 아리마태아는 의회 의원으로서 그는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성서는 이 사람을 가리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던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마태오 복음 27장 57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묻힐 무덤이 필요했을 때 자기의 새 무덤(마태 27, 59)을 기꺼이 제공했다.



사도 바르나바는 키프로스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레위 지파의 요셉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바르나바는 사도들이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해 있을 때,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활약을 도왔다. 그래서 사도 바르나바는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사도”로 불리웠으며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이 어려울 때 위로해 주는 것이 선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격려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과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착함”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인정이 많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줄 수 있는 것이고, 세 번째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롭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관대함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할 점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자캐오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선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예수님 외에 또 누가 있었는가? 예수님은 우리보다 더 깊이 그 사람들의 잘못과 악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분은 어떤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한 인간 안에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키워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물결과 스타일을 관대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질과 능력이 필요하다. 선각자의 대부분은 굉장한 박해와 함께 많은 고난을 겪었다.

물론 새로운 것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에는 복음의 요소가 들어가 있으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은 남을 조급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선함은 넓고 너그럽게 보는 관대함이기 때문이다.





        9. 眞實 (진 실)






진실은 신의를 지킨다. 충실하다. 약속을 꼭 지킨다는 충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믿음과 같이 “피스티스”(Fistis)라는 단어를 쓴다. 믿음을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덕행을 “진실”이라고 표현한다.

충실은 하느님의 가장 주된 속성 중의 하나이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나는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하느님은 바위”라는 상징적인 표현은 그분의 변함없는 충실성, 진실하신 약속, 흔들림이 없는 약속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에게 충실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에페소서 1장 1절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들은 믿음직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

고린토 전서 4장 2절에 “관리인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 대한 충성입니다.” 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 어떤 직책을 맡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방면에서 충실해야 한다. 첫째는 작은 일에 충실할 줄 알아야 한다.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위해한 일을 하도록 불리움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작은 일에 충실한 것을 하느님은 매우 위대하게 보신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면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진실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작은 일을 맡기신다.

그것은 경험을 쌓게 하고 그 사람의 성실도를 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시험해 보기 전에,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올려 보내지 않으신 다.”는 이스라엘 격언이 있다. 우리가 날마다하는 사소한 일이 하느님께는 결코 의미 없고 하찮은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천천히 오랜 시간을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생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생활이 곧 생애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두 번째로 충실성을 보아야 하는 것은 환경이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성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상에 관계없이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는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소명을 받든 지간에 거기서 깃든 하느님의 뜻을 알고 열심히 응답하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10. 溫柔 (온  유)  






온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나타낸다.

온유함은 힘과 권세와 교만 그리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것과 반대되는 덕이다.

성서에 나오는 온유함은 아나윔(Anawim) 즉,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온유함은 가난과 겸손이 포함되어 있는 덕행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뜻을 완전히 인정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자기 주장대로 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온유한 사람들이 지니는 특성이다.

하느님 앞에 무력한 존재임을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서 1장 27절에는 “주님을 두려워함이 곧 지혜이며 교양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신실과 온순이다.”라고 쓰여 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께 겸손한 자이다. 하느님께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며 견디어 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은 온유함의 찬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온유함에는 외유내강의 단호하고 굳은 의지가 들어가 있으며 자신감이 있다.

즉 해낼 수 있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물이 자기 안에서 큰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온유의 반대는 다른 사람에게 이기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논쟁에서는 이기지만,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논쟁에서는 지지만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성찰하여, 자기의 주장을 선교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온유함은 지혜의 표징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3절에는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라고 가르치신다.



신약성서는 지혜가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아는 것이고, 이 하느님의 관대하심에 기초한 온유함을 “지혜”로 보았다. 그러니까 지혜는 하느님을 전제로 한 온유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가 당한 모욕을 스스로 갚지 않고 심판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권리 주장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다만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2절에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겸손>



루가 복음 14장 7절에서 11절을 보면 손님들이 저마다 혼인 잔치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셨다.



필립비서 2장 5-8절을 보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겸손은 진실한 인간 존재의 중심이다.

곧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겸손이다.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스스로 애써서 얻고 가꾼 덕망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겸손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대단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위대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겸손은 절대성에 대한 체험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겸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겸손은 절대적인 한계의 체험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적으로 위대하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자가 존재할 때에만 타당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게 된다. 그러니까 겸손은 낮고 비열한 마음이 아니라, 고상하고 넓은 마음이다.

겸손은 자기 안에 내재해 있지만 자기 자신이 그 자체가 아닌 무한에 대한 존경심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존은 부서진 존재에게 나타난다.

겸손이란 자신의 노출되고 부서진 모습의 긴장감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무한한 진․선․미 자체이신 분 앞에 선, 때묻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견디어 내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하느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 고이게 되는 것처럼, 겸손한 마음에 하느님의 은혜가 고이는 법이다. 병이 비어 있어야 참기름을 넣을 수 있듯이, 겸손하게 비어 있는 마음에 하느님의 성령이 불어넣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교만한 자의 기도와 자기 자랑을 일삼는 바리사이파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죄를 뉘우치는 세리의 겸손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유명한 금구 요한은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우구스띠누스 성인도 “신앙 생활의 첫째도 마지막도 겸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겸손한 자는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자기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봉사하고자 하고, 항상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종이 자기 일을 다 마친 후에 고맙다는 인사를 듣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이웃에게 기쁘게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제 교만을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11. 節制 (절 제)






- 문에 거는 문고리를 옛날에는 라틴말로 “카르도”(Cardo)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의 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지․의․용․절덕(知․義․勇․節德)을 추기경(Cardinal)의 의미를 따서 사추덕(四樞德)이라고 한다.



- 모든 죄는 잘못된 집착과 애착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절제란 잘못된 집착이나 집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식욕․정욕․물욕․권세욕․허영심․분노․욕설 등을 다스리고 제어하는 것이다.



- 절제의 의미 안에는 “알맞게 조절한다.”(Modestia)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여러 가지 감정이나 욕망을 조절한다고 해서 절제를 자제(Self-Control)라고 한다.

베드로 후서 1장 5-6절을 보면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의 육신은 그저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기를 원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육신이 너무 편하게 되면 오히려 불편해지고, 육신에는 적당한 운동과 사용이 필요하다. 이것이 있어야 참된 편안함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맞게 조절할 줄 아는 절제의 능력이 필요하다.



- 모든 죄는 잘못된 집착과 애착에서 나온다. 우리가 재물에 너무 집착하면 재물의 노예가 된다. 인간이 재물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인간의 주인이 되었을 때, 인간은 결코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 잘못된 애착을 가진 사람은 절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현대는 물질 위주의 사고방식 속에서 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취미가 지나쳐서 내 생의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 때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이 된다.



- 희랍의 철학자들은 항상 젊은이들에게 “네 자신을 알아라!”고 가르쳤고 아울러 자신을 다스리라고 했다. 즉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말이 끄는 수레와 같다.”고 했다.

흰말은 인간의 이성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고, 검은 말은 욕망과 본능이라고 했다.

즉 이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식욕과 정욕이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이 두 가지를 절제하지 못해서 실패한다. 절제하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다.



- 아담과 에와가 범죄한 것도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제일 손쉽게 떨어질 수 있는 죄가 식욕에 떨어질 경우이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재를 지키시면서 준비하실 때, 마귀는 제일 먼저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했다. 식욕을 통한 유혹이다.



- 또 에사오가 야고보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의 장자권은 삶의 전체에 관계된 것으로 장자와 차남의 관계는 엄청난 재산의 차이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장자권을 에사오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것이다.



- 오늘도 팥죽 한 그릇이나 돈 몇 십만 원에 자기 인격과 양심을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의 입신 출세나 명예를 위해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식․절주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평소에 절제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단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잠언 25장 16절에 “꿀을 봐도 적당히 먹어라.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하리라.”는 얘기가 있다.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젊음, 건강, 아름다움 등이다. 이것은 텔레비전 등의 매스컴의 영향이 크다. 그래서 노년의 원숙함과 노련함의 가치는 사라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육체적인 젊음과 아름다움만을 가꾸려고 하는 것이다.



- 시편 34편에는 “혀를 다스리라.”는 내용이 나온다. 화를 참으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성체를 손으로 모시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손으로는 많은 죄를 짓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혀로는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실상 혀는 손보다 더 더럽다. 그래서 악한 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옷차림과 행동을 정당한 범위 안에서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 단정함(Modestia)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이 자기 보존 욕구를 너무 중요시해서 상대방과 타인을 보지 못할 때에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건전한 자기애와 보호 본능을 지녀야 한다.



- 그리고 이 자기애의 동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은, 정당한 자기 존중과 자기애의 동기요 전제 조건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사랑해 주심을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자기 사랑이 일치하고 융합할 때 건전한 삶을 누리게 된다.



- 절제는 자기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생명과 건강을 아끼고 보존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절대 자학하거나 자포자기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특히 불우하고 불구된 자가 이런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긍정과 존중을 건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우리는 먼저 작고 사소한 일에서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내가 변화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애착에서 벗어나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자유롭고 해방된 삶을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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