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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3
작성일 2008년 5월 8일 (목) 18:15
분 류 부활시기
ㆍ추천: 0  ㆍ조회: 4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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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령강림 대축일 ”
 

성령강림 대축일

        21. 서웅범 신부/38                 22. 강영구 신부/40

        23. 김영남 신부/44                 24. 이규철 신부/46

        25. 김신호 신부/48                 26. 허영업 신부/49

        27. 신은근 신부/56                 28. 함세웅 신부/57

        29. 생명의 숨/59                   30. 신앙의 원리/61



21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내가 왜 이럴까?”

서웅범 신부



요즘엔 별로 그럴 일이 없지만, 본당사목을 할 때에는 가끔 단체모임의 여흥시간에 노래를 불러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간 유행가 가운데, 가사가 제대로 다 기억나는 것을 하나 골라 불렀었는데, 그것이 그 이후 한동안 저의 단골 메뉴곡이 되었었습니다.

그 노래 제목은「장미 빛 스카프」, 그 가사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노래였습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묵상을 시작하며「내가 왜 이럴까?」라는 이 말이 화두(話頭)처럼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면, 그 안에, 「내가 왜 이럴까?」라는 자문을 했을만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역시, 사도들의 말이 자기네 말로 또렷하게 들림에 대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들을 했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 역시,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하던 자신이, 이제 그분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화가 된 그 현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그리고 복음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머릿 속에도 분명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숨어있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특히 그분께서 보내주신 협조자 성령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문득「변화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기쁨과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제게는 너무나 신기하기만 한, 그래서「정말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하는 한 작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담배에 관한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하여 근 13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사람체질에 따라 흡연의 해악 정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사실 제게 담배는 맞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피우면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피울 때의 그 기분과 습관 때문에, 그것을 끊지 못하고, 하루에 한 갑 이상을 족히 피우는 작은 골초였습니다.



그 사이 수없이 금연을 시도했지만, 또한 그 숫자만큼 결심은 여러 가지 이유로 쉽게 깨져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러기가 13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년 전 어느 날 문득, 「이제는 정말 끊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그날 시도된 금연은 신기하게도 오늘날까지 잘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분이 피우는 담배연기 냄새가 싫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피우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가 않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전에 수없이 끊고 다시 피고 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적어도 이 담배문제에 있어서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내 의지, 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신비」(?)가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자주, 그리고 더 깊이 체험되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의지, 내 힘은 부족하지만 겸손한 마음과 성실한 실천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영육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소박한 일상(日常) 가운데서 커다란 의미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채우시고 변화시키시고 완성시켜주실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사랑이요 감사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날이 쉬이 올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 온 누리가 새로워지리이다!











22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강영구 신부



오늘은 우리 교회 최대 축일의 하나인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월절을 지낸 후 50일이 되는 날 추수 때에 거둔 햇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큰 축제일입니다

추수 감사절과 비슷한 축제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던 수많은 유다인들이 이 축제일을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보내 주시겠노라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한 집에 모여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에서 불혀와 같은 형상의 성령이 모여 있던 제자들 위에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모여 있던 그 집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성령 곧 하느님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은 옛날의 제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 왔던 사람들이 바람 소리 나는 곳 곧 제자들이 모여 있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 사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예수 사건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지방말로 예수 사건을 증언했지만, 모여 온 사람들은 모두 자기네 나라말로 베드로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는 인류가 하나로 뭉쳐서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교만한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하늘 아래에서 뽐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말을 흩어 놓으셨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들 끼리끼리 모여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말이 통하지 않고 의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말이 통하고 의사가 통하는 사람들 끼리끼리 뭉쳐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도둑놈은 도둑놈끼리, 협잡꾼은 협잡꾼끼리, 제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들끼리, 부자는 가난뱅이들을 끼워 주지 않고 부자끼리, 가난뱅이들은 가난뱅이들끼리, 권력자들은 권력자들끼리, 뭐 이런 식으로 유유상종하면서 서로 벽을 쌓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이 다르니 의사 소통이 되지 않고 생각이 다르니 정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끼리끼리 모여 살다 보니 집단 이기주의와 패싸움이 일어나고 세상은 갈가리 찢겨진 채 불행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인하여 인간을 흩어지게 했던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벽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빈부 귀천의 장벽도 무너지면서 거기 새로운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민족인 하느님의 백성 안에는 언어와 민족의 장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이 강림하신 이 날을 대축일로 지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새로운 이스라엘이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날이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메시아의 오심을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구세주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분을 배척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12지파를 뿌리로 한, 옛 이스라엘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12지파 대신에 12사도를 뿌리로 한,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새 이스라엘 곧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태어나게 한 힘, 그 교회를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오늘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불혀의 형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에 이미 성령으로 성별(聖別)되고 축별(祝別)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우선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하느님의 능력인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듯이, 우리도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있는 구태(舊態)와 구습(舊習)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게으름과 안일, 안락과 나태 가운데 안주하면서 자기 자신의 틀을 깨뜨리려 하지 않는 사람들, 새로운 생활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영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을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들이며 새로움에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행전을 읽어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사도 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과 백성들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제나 변화하며 새롭게 됩니다. 그러나 죽어버린 생명은 변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썩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살아 있는 생명 안에는 혼이 머물러 있고, 죽은 생명에는 이미 혼이 떠나고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생명은 악취를 풍기면서 썩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비추심에 따라서 사는 신자들은 늘 열심히 기도하면서 나날이 거듭나는 생활을 할 뿐 아니라, 그 삶에 의욕과 활기가 흘러 넘칩니다.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서 기쁨과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면서 냉담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구태와 구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태와 안락 속에 머물면서 변화되기를 싫어합니다. 혼이 떠난 시체가 냄새를 풍기면서 썩어 가듯이, 이런 사람들의 삶은 썩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 걱정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지금 안주하고 있는 그 안일과 안락이 사라지거나 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오는 불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도전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그런 사람들의 삶도 썩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6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늘 거듭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들 위에 내리신 성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장벽들을 허물고, 모두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일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영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일치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치의 사도가 되어서 하나 되려면, 너와 나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너그럽게 참아 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서로를 용서해 주고 용서받음은 가장 확실한 일치의 방법입니다. 용서해 주고 용서받으면 너와 나 사이에 쌓여 있는 장벽을 허물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로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이웃과 이웃이 서로를 용서하면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치의 능력이요 힘이신 성령을 슬프게 해드리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받아 주는 생활을 함으로써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립시다.

  

그러나 서로를 갈라놓고 또 갈라지도록 이간질하고, 또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악령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하면 서로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면 갈라지게 됩니다. 나의 안일과 편함만을 찾으면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여기 지옥이 있고 지옥은 악령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악령이 활개 치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의 강림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이 새 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이 활기 차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읍시다. 그리고 성령의 비추심과 인도하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합시다. 여러분의 나날의 삶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빕니다.











23                성령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공통)

김영남 신부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동작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는 말에서 “숨을 내쉬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새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생명력이 없는 ‘죽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문을 닫아 걸고 있었을 만큼, 두려움에 ‘얼어붙어’ 있었다. 자기들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다가오시어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시자, 그들은 용기를 내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한 복음에 의한 “제자들의 성령 받음” 대목의 이런 역할은 성령강림 대축일인 오늘의 전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목에서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루가 복음서-사도행전을 보아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부동하게 믿게되고, 두려움 없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을 받게되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살아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출발점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앞으로 있을 증인으로서의 긴 여정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힘을 받게된 셈이다. 성령은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 뿐만 아니라, 그 성장 및 생활 안에서도 원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이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의미깊은 말을 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귄위는 권력이고, 선교는 선전이며, 예식은 의고(고풍)주의이고,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동이다.”

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뜻을 나 나름대로 새겨본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이 아닐 때,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말만 신앙인이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 역사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한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차지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성령의 차원이 없다면 교회는 복음증거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학교, 병원, 사회사업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을 운영하는 거대한 조직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권위’라는 것은, 능률을 올린다는 명목하에, 남을 누르기 위한 ‘권력’으로 변질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이며”: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선교는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되는지를 전하는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떤 회사의 광고 선전처럼 되거나, 자기 단체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진리와 사랑”을 떠나 사는 삶이다(참조: “진리의 성령”에 관한 요한 16,13).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떠나게 될 때,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의 창립일이요 생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임하심을 정성스럽게 기도로 청해야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런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특히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모하는 세상의 흐름 앞에 겁을 먹고 자기 속에 움츠려 들고 있는 공동체의 경우, 또는 공동체의 창립 초기의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해진 조직 속에 현실유지에 급급하며 경직되어 가는 공동체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가는 주범은 바로 ‘죄’이다.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죄’를 극복해야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길을 알려준다. 고해성사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생명의 숨결[영]”을 다시 받는 은총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오늘 화답송 시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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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인자하신 천주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라고 시작하는 고해성사의 사죄경의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부활의 선물(은총)이다 (참조: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아서 영이 [아직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9]).











24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15,26-27:16,12-15>(공통) 감사와 봉사의 불을 지펴주소서

이규철 신부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요한 15,26-27:16,13-14)

 요셉 신부님 !이 가방 주인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연락을 할만한 주소도 없고 본명은 적혀 있으나 성함을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수원교구 공원 묘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제의를 정리하고있는데, 한 할머님이 가방 하나를 가지고 오셔서 하는 말씀이었습니

다. 가방을 열어보니 미사 수건 하나, 프라스틱 성수병 한 개, 묵주가 들어있는 묵주 주머니 두 개, 기도서 한 권, 성교예규 두 권, 두툼한 비닐 봉투 하나, 그리고 손수건 하나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습니다.

  기도서를 뒤져보니 1960년 12월24일 영세, 1975년 6월 20일 견진성사, 1984년 10월 27일 혼인성사, 그 밑으로는 성모님의 충실한 딸이 되고 싶은 M..D‥‥ 본명은 마리아 도미칠리아? 마리아 도미니까? 마리아 데레사? 마리아 도로테아 ? 마리아 디모테아? 일 테지만 이름도, 주소도, 전화 번호도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면서 두툼한 비닐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십일조 교무금 카드와 새 성당신축 봉헌금 카드를 비롯하여 성소후원회, 제대회, 연령회, 군종후원회, 교도소후원회, 외방선교회, 우술라회(수원교구 신학생 후원회), 안나회(원주교구 자선단체 후원회), 주일학교 자모회, 양로원 후원협력자회, 보육원 (고아원)후원회, 꽃동네 후원회, 라자로 마을 후원회 등등 후원회 카드만 무려 열여섯개였습니다만 카드마다 주소와 이름은 없고 M.D.)로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면서도,「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4)고 하신 뜻을 조용히 따르고자 카드마다 M.D)로만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소속 교구와 본당 이름은 명시되어 있었으나, 연락할 방법이 없어 혹시나 하고 기도서를 다시 펴 보았습니다. 기도서 본문이 시작되는 앞 백지에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의 성령입니다」(필립 2,13)라고 하신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히 성령 은총 안에서 온전히 성령께 의탁하며 사시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으로 연락하여 가방 주인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나기 전에는 연세가 지긋이 든 분인줄로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만나고 보니 신부로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남 1녀를 둔 30대 후반, 큰 자녀가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요 막내가 아직 유치원에도 들어가지 못한4남매의 어머니였습니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기에 애기 키우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요즘 세상에 가족이 8명이나 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겠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온전히 믿음으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며 신앙적으로 고맙기도 하고, 성령기도회를 지도하는 신부 입장에서 대견(?)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요셉 신부님! 「어떻게 애기 4명이나 키우십니까? 요즘 세상에‥‥ ? 묻고 싶으시지요? 저도 결혼하기 전에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9남매의 막내로서 많다는 그 자체가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자라났기에, 애기는 하나만 낳고, 그 대신 열심히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 더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공무원 집안에서?‥‥

  두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성령세미나를 받았습니다. 성령 안수를 받을 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어머니로서 할 일이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내 마음대로 사는 세상인가? 내가 낳고 싶다고 낳고, 낳아 기른다고 안 낳을 수 있는 일인가? 내가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해 지고, 불행해 지기 싫다고 불행해 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가 창조주이신 하느님 노릇(?)을 대신 하겠다는 말인가?」 요즘 시세(時世) 말로 하느님과 야! 자! 놀이를 하겠다는 말입니까?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4~7참조).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을 모르오! 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여보시오,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루가 22,57~67)세 번이나 배반하던 베드로가,「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6)라고 소리쳐 외치자, 그 자리에서 3천여명이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들 술에 취했군!? (사도 2,13)하고 빈정거림을 받은 제자들을 본받아 우리도 성령에 취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 중에도 희망을, 슬픔 중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신앙증거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살아 움직이는 크리스천 활동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고 하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의 길일 것입니다.











25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 19-23> (공통)   신자들을 묶는 끈

김신호 신부



인간이 모여 구성된 사회 안에는 많은 행사들이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또 이러한 행사에 참석한다. 이렇게 볼 때 행사란, 인간의 모임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행사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 아는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서로 공통으로 갖고 있는 관심사나 이해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신자 한 분은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장소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즈음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들을 모이게 아는 촉매제 역할의 상품이나 기념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러한 기념품이나 상품을 받기 위해 그런 모임에 많이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참석은, 주최측에서 보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사람을 모으는 목적만을 주최측이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도 주최측이 목적을 이루는데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최측이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모이게 하므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도는 주최측의 의도를 만족시키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罪없는 상태가 平和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교회의 창립에 대한 의미출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읽었다.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모인 것이 아니고, 다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함께 있으면 좀 덜 무서울까 하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이유에서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한 자리에 모여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이들에게, 분명한 목적의식을 심어주고 계신다. 즉 그들에게 평화를 기원함으로써 평화를 실현하라는 삶의 방향과 성령을 주심으로써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고 계신다.

  

평화와 죄를 사하는 권한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죄가 없는 상태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러한 상태는 바로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기본 취지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이러한 죄 사함을 통하여 평화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사도들이 위임받은, 교회를 창립한 목적에 해당될 것이다.

  

교회는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모였지만, 모인 목적은 동일하게 나타나는,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비체에 속한다.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면 서로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강한 연대감을 가지는 단체는 구성시킬 수도 없고, 또 구성이 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한결같은 상태로 지속되고 발전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어떤 제국이나 또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성격상 세속에서 형성된 실제의 현상들은 교회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교회는 분명히 성령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성령이 늘 함께 하는 단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敎會는 성령의 작품 

교회에 속하는 모두는, 그러므로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나갈 수가 있게 되고, 이러한 성령의 작용은 신자 모두를 연대감으로 묶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바로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이 확증되고, 또한 우리들에게 교회의 특징을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교회는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설립된 단체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러한 화해와 일치에 역행하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하는 계기를 가져야 하겠다.











26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동) 죄를 사하는 권한

허영업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고 떨고 있는 제자들 사이로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신다. 예수님께서 건네신 평화의 인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자주 또는 전례시에 통용되던 관례적 인사였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의미 심장하다. 왜냐하면 '평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첫 선물이다.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자신의 고별사에서 그 선물을 약속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믿는 이는 모든 사물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해방된다.

    

  사실 평화는 전 인격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평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 곳곳에서 평화는 구원의 개념과 일치해서 사용되고 있다(마르 5,34; 루가 8,48).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평화에 관한 일'로 요약하고 있다(루가 19,42; 사도 10,36).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는 전 인격, 곧 몸과 영혼을 온전히 구원하시는 분이시며(1데살 5,23 참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분이시다(히브 13,20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에페 2,14-17 참조). 하느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결과이다(로마 5,1.10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를 믿는 이들에게 준 풍성한 구원 은혜이다. 따라서 평화는 구원을 이루는 믿음에 결부되어 있다.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신 것처럼(요한 20,19) 제자들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유혹을 견디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체험도 믿음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면서 파견하고 계신다. 곧 이제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도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도들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오늘날 성령의 도움으로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삶의 발자국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시어 영원 속에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감으로써 그분을 의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현존의 체험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오로지 의심하지 않고 믿는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활동하신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교회도, 신앙의 삶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시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내리시어 그렇게 하시기를 열심히 바라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요한 1,33) 분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으로 탄생한 우리는 마음과 정신의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온전히 회개해야 한다. 악의 사슬과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약속하고, 또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것을 다짐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새로운 삶에 인도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없애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촉구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새로워진 사람으로서, 그 새로워진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세상을 초월하는 깊은 가치를 확인시켜 주고 진리를 깨닫게 만들어 준다. 그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변화를 일으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높은 이상을 향하여 개인적인 만족을 미루고 늘 새로워지기를 요청하시며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기"(로마 12,2 참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삶 속에서 잘못된 기존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나를 포기함이 바로 참된 삶이고, 죽음은 생명이며, 버림으로써 얻게 된다(마태 17,25; 19,21.29; 마르 8,35; 요한 12,24-25 참조)는 것을 확신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새로 태어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이나 개념으로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서 새롭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고 오직 그 신자들인 우리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선택하신 사람들로서 '빛'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마태 5,14-16 참조)

    부족한 우리 자신을 일깨워 주시고 채워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        게 하소서."



    제1독서/사도 2,1-11



  초대 교회 탄생을 알리는 성령 강림 기사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 혀 모양을 하고 사도단을 중심으로 신자 공동체에 모인 집 안에 나타나신 사건과,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한 설교와, 초기 예루살렘의 신도의 삶을 전해 준다.

    

  ‘오순절'이라는 그리스어 단어, '펜테코스테스'는 '50'이라는 숫자를 뜻한다. 원래 오순절은 첫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가나안 농경민들의 맥추절에서 비롯되었다. 히브리인들은 과월절 첫날부터 시작하여 7주간을 보내고, 시반 달(음력 5월) 6일에 이 명절을 지냈다. 루가는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리신 사건을 초대 교회의 창립과 선교 활동에 연결시킨다. 이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 안되는 소수 유다인들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였고, 이를 본 어떤 사람들은 이 신비로운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어떤 이들은 "새 포도주에 흠뻑 빠졌군." 하고 부정적 판단을 내렸다.

    

  그러자 사도단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나서서 군중에게 설교했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은 삼천 명 가량이나 되었다. 이들은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와 정착해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나누며 빵을 떼고 기도하는 일들에 전념하였다." 선교 일선에 나서기 앞서 예루살렘 초기 공동체는 조용하고 거룩한 생활로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성령 강림의 역동적이고 압도적인 묘사와 대조를 이룬다.

    

  원래는 감사제였던 오순절이 후에 구원사적 의미가 더해져서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선사받은 사건(출애 19--24장 참조)을 경축하고 그 시나이 산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옛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거쳐 율법을 지키는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나이 계약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성취요 완성인 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결정적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루가는 강조하고 있다. “바람", “불"(2-3절)과 같은 표현도 구약성서의 하느님께서 계약을 발현하시는 장면(출애 19,14-19)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새로운 계약과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2사무 22,16; 욥기 37,10; 에제 37,9-14; 요한 3,8 참조), '불 같은 혀들'(출애 3,2; 19,18; 에제 1,13 참조)이라는 표현도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채우고', '불 같은 혀들이' 사람들에게 '내려 앉았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을 가득 채우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루가는 이 기사에서 신학적 사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초대 교회의 탄생과 시작은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성령의 놀라운 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종과 나라의 온갖 장벽과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이다.

   

  루가의 성령 강림 이야기는 두 가지 전승, 심령 기도 현상과 당대의 지리 학자들과 역사 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인종 목록을 수용했다. 심령 기도 현상을 간략히 소개하면, 1세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종종 무아지경에 빠져 기이한 말들로 지껄이곤 했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밑도 끝도없이 횡설수설하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를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여긴 나머지 이를 체험한 이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열등감을 갖기도 했는데 바오로는 이를 여러 은사들 가운데 가장 낮은 은사로 평가 절하하였다.

   

  모든 민족이 사도들의 설교를 자기네 모국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이 사도들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전파된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를 반영한다.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9-10절)에서 유의해서 보면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지경의 인종들을 나열해 놓았다.



  루가는 당대에 통용되던 인종 목록을 기록하면서, “유다"(9절),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11절) 등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체화된 평화의 복음이 교회의 성교 활동을 통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세상에 퍼져 나간다는 루가의 보편적 구원을 시사하고 있다.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은 9-10절에서 나열한 각 지역 출신 유다인들의 총칭이겠다. 곧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5절)을 가리키겠는데 이들 가운데는 인종상의 유다인들이 있고, 인종상으로는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다교를 택한 개종자들도 있다. 이 모든 표현은 복음이 유다인, 이방인, 개종자들, 이방인들로 확산되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 루가가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제2독서/1고린 12,3ㄴ-7.12-13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은 참된 영을 받았는지 여부를 가리게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4절)은 '은사들이 배분되어'라는 의미이다. '배분'의 의미로 번역된 희랍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차이, 다양성'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다."(7절)는 표현은 각자에게 '영을 드러내는 은사가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의 드러남"이라는 말은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선물은 내적인 것이 아니라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것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그런데 그 다른 은총의 선물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다(7절).

    

  여러 번역본들에서 바오로가 은사들의 교회적 유익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문은 다만 '유익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사실 모든 은사가 '공적인 유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영의 선물인 은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이에 비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앞세워 자기 자랑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가 은사의 공익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은사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몸과 그 지체들"(12절)의 비교는 바오로의 창작이 아니다. Titus Livius의 유명한 우화에는 이 비교가 기원전 490년 경에 Menenius Agrippa라는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바오로 시대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은 우주를 거대한 몸으로 생각하여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 관련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바오로의 독창성은 이 "몸과 지체들"의 비교를 놀랍게도 “그리스도"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도 그렇습니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12장 27절의 말을 보면 여기 12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은 단지 여러 지체의 집합으로가 아니라 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생명체일 수 있게 하는 중심 원리로 간주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당신 인격 안에서 당신을 믿는 수많은 신앙인들의 무리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묶어 하나의 살아 있는 공동체로 남아 있게 하는 중심 원리로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독특한 교회관을 본다.



  그에게 교회는 단지 개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집합체 정도가 아니라, 각 부분들이 긴밀히 통일 조직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유기체처럼, 개개의 신앙인들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이다.

   

  13절의 “한 성령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비록 그 예식이 물로 거행되지만 궁극적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에서 '으로'라는 전치사는 세례의 결과 영세자가 누군가와 인격적으로 결합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해 준다. 그런데 이 결합은 동등한 자격의 두 인격체의 결합이 아니라 사람이 물 속으로 들어가 잠기듯이 수세자가 자신의 전 삶을 예컨대 '그리스도 안으로'잠기게 하는 결합이다.



    복음/요한 20,19-23



  “유다인들이 무서워서"(19절)는 제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시사하는 데 역점이 있다. 곧 복음 사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상태에서 해방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돌무덤에서 나오시고 제자들을 향해 닫힌 문을 열며 다가가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닫힌 세상을 열린 세상으로 바꾸시려고 닫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시어 한가운데 서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적극적인 주도권이 시사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발현은 완전히 예수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20절)이라는 인사말은 유다인들이 나누는 평상시 인사말이다. 그러나 약속한 “평화"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기원하시면서 제자들이 공포와 불안을 이겨 내도록 격려하시는 의미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실제로 만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루가 복음서에는 “옆구리" 대신 “발"로 표현되고 있다.

    

  제자들의 파견이 아들의 파견에 참여한다는 의미보다는 파견된 실존의 권위에 더욱 중점을 두는 의미다(20절).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그리스도론적 파견 사상이 시사된 것이다.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22절)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



  “성령을 받아라."(23절)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성령은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실상 초대 교회에서는 믿는 이 모두가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고 또한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죄의 용서에 관한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지만(23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선물인 동시에 위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의 결실을 제자들의 권한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그 결실은 바로 구원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는 구원인 예수님의 보편적인 속죄로써 이루어지게 되고,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구원의 원천이 폐쇄된 채 그대로 머물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27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성령체험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체험이다

신은근 신부





성령께서 오시던 날 제자들은 무서워서 숨어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기적의 자리에 있었고, 기적의 음식을 먹었던 그들인데 숨어있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중풍병자가 일어났던 현장을 목격한 그들이다. 그런데 무서워서 숨어있다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은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걸어갔는데 사도들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지만 순교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던 것이다. 순교자들에겐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고,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과 용기가 있었다. 주님께서 주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이 개입을 우리는 성령의 활동이라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에겐 아직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없었다. 성령께서 공적활동을 드러내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이 어느 날 모습을 바꾸었다. 영적 힘과 에너지를 지닌 사람으로 돌변하였다. 죽음을 초월한 얼굴로 군중 앞에 나타났고, 당당하게 소신을 말했던 것이다.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넋을 빼앗기지 않고서 가능한 일일까. 실제 그들은 정신을 잃을 만큼의 체험을 했다. 전 존재를 흔들어버린 체험이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만났고 깨달았고 느꼈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감각 속에 당신 존재를 심어주셨던 것이다. 성령체험이었다.

성령체험은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체험이다.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체험이다.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망각하고 주님의 전능하심만을 보는 체험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용감하지 앓을 수 있으랴. 성령께서 오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자들만이 그런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누구든 변화한다. 용감한 사람으로 바뀐다. 그분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확신을 갖고 인생을 살게 한다. 얼마나 귀한 변화인가.



제자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뒤 평화를 체험한다. 일찍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평화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분은 발현하실 때마다 이 말씀을 하셨다. 평화만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음을 아셨던 것이다.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은 그 뒤 한번도 평화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아무리 말은 물이라도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상하기 쉽고 새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끝내 말라버림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제자들의 위대한 점은, 성령체험을 끊임없는 은층으로 만들었다는데 있다. 그들은 생활 속의 변화와 실천으로써 이 체험을 살아있게 했던 것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도 평화가 되어야 한다. 믿음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원인을 찾아야 한다.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에겐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체험을 한 제자들에게 가장 큰 은총은 기쁨의 생활이었을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 확실한 기쁨으로 바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이 변화와 체험을 우리도 청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신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8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깨달음과 진리의 성령

함세웅 신부



구원사의 단계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천주 성부의 창조 사업, 성자 예수의 강생 구속 사업, 천주 성령의 강림과 내적 쇄신 및 성화 사업, 오늘은 바로 이 세번째의 내용을 강조하는 축일, 즉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에 대한 개념이 사실 우리 신자들에게는 모호하고 애매합니다. 그것은 삼위 일체의 신비 자체가 오묘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의 예로써 천주 성삼의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아기가 어머님 품에서 태어나서, 보호받고 양육되며 자라납니다. 그리고는 일정한 연령이 되면 철이 들고, 모든 것을 깨닫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아기를 낳아 준 엄마, 기르고 양육한 엄마, 자라나면서 깨닫게 해 주는 엄마, 틀림없는 한 어머니의 모성애에 기반을 둔 기능에 의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분명 다른 과정과 단계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아기가 철이 드는 과정, 깨닫는 과정을 거치는 완성의 의미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창조된 인간은 구약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를 통하여 성장해 왔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건장한 모습을 지녔지만, 아직 진리를 터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다음에도 활동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결단력과 행동할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힘이 세차게 바람처럼 불어와서 온 땅을 채우고, 사도들의 마음에 불꽃을 일게 하셨습니다.

  

모든 묵은 것을 치우는 세찬 바람, 그 세찬 바람은 하느님의 기운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불꽃은 또한 모든 묵은 것, 모든 어두운 과거를 말끔히 태우시고 정화시켜, 그야말로 새 시대를 전개시키며, 인간을 은총의 사람으로 만들어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창조, 그것은 분명 양심의 인간을 재촉하는 것이며, 그 무리들의 모임에 활력을 줍니다. 그 활력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어두움의 나와 빛의 나를, 겁과 두려움과 망설임의 나와 용기와 신앙과 확신의 나를, 완전히 구별해 주며, 미래의 나에게 박차를 가하는 희망의 불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강림 축일을 교회의 창립일이라고 전례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서’라는 표현도 바로 이것을 의미해 주며, 또 다른 의미로 성령은 바로 ‘교회의 영혼'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신 없는 인간, 영혼 없는 육체,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성령 없는 교회, 그것은 그 표현 자체가 모순이고, 그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런 모임은 관광이 나 오락을 목적으로만, 하루 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모이는 그러한 것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력, 또는 영혼은 그 자체로서 인격 (Persona)을 이루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기능 하나 하나가 각기 다른 위격 (Persona)입니다. 이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똑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이 신비를 우리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동일성, 삼위 일체, 천주 성삼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모습대로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 그 인간 안에서 성 아우구띠노는 바로 성삼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인간 정신력의 위대함, 이성과 감정과 의지와의 미묘한 관계, 그것은 분명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의 기능과 작용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동일체에서 연유되듯이 성부, 성자, 성령의 구원사에서 인간과 맺는 관계가 다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에 의한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합리적인 관계에서 이해하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은 온 땅을 채우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힘을 주시며,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바로 교회의 절대권을 보장해 주시기도 합니다.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칩으로 죄를 사하고, 맺고 푸는 천상적 권리를 교회가 받았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계승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해 주신 성령은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앙인들인 우리를 위한 것이며,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기쁨을 느끼며, 새 시대에 새로운 신앙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내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 그들 자신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6-19)











29                  성령강림 대축일 <요한 20,19-23> (공통)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주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며 하시는 동작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는 말에서 「숨을 내쉬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7에 나오는 다음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새번역).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기 전에 아담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스승 예수님의 죽음 후에, 제자들의 공동체는 생명력이 없는「죽은 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 복음말씀의 시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을 만큼, 두려움에「얼어붙어」있었다. 자기들 속에 폐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스승 예수께서 그들 한 가운데로 다가오시어 「당신의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자, 그들은 용기를 내어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요한복음에 의한「제자들의 성령 받음」대목의 이런 역할은 성령강림 대축일인 오늘의 전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도행전 2장의「오순절 성령강림」의 대목에서 더 강조되어 나타난다.

루가복음서-사도행전을 보아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고부동하게 믿게되고, 두려움 없이 적대적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은 성령을 받게되면서부터이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어있던 것이나 다름없던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살아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전체의 구조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출발점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사도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앞으로 있을 증인으로서의 긴 여정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힘을 받게된 셈이다.



성령은 초대 교회의 탄생에서뿐만 아니라, 그 성장 및 생활 안에서도 원동력의 역할을 하였다. 성령이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는 다음과 같이 의미 깊은 말을 하였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고,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귄위는 권력이고, 선교는 선전이며, 예식은 의고(고풍)주의이고, 윤리적 행위는 노예적 행동이다」



참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기에, 한 문장 한 문장 그 뜻을 나 나름대로 새겨본다. 「성령이 없으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이 아닐 때 ,하느님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말만 신앙인이지,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과거에 머물며」 :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과거 역사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한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스도가우리의 삶에 이런 정도의 의미밖에 차지하지 못할 때, 자연스럽게「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게 된다」. 「성령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에 불과하며」 : 성령의 차원이 없다면 교회는 복음증거의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학교, 병원, 사회사업단체 등 수많은 단체들을 운영하는 거대한 조직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한 곳에서 「권위」라는 것은, 능률을 올린다는 명목하에, 남을 누르기 위한 「권력」으로 변질된다.



「성령이 없으면 선교는 선전이며」 ; 성령의 차원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선교는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기쁨이 되는지를 전하는 「복음전파」가 아니라, 어떤 회사의 광고 선전처럼 되거나, 자기 단체의 세를 불리기 위한 방편으로 변한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은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진리와 사랑」을 떠나 사는 삶이다. (참조: 「진리의 성령」관한 요한 16,13).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을 떠나게 될 때,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교회의 창립일이요, 생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성령」의 임하심을 정성스럽게 기도로 청해야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성령으로」새롭게 태어나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런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특히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섭게 변모하는 세상의 흐름 앞에 겁을 먹고 자기 속에 움츠려 들고있는 공동체의 경우, 또는 공동체의 창립 초기의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대해진 조직 속에 현실유지에 급급하며 경직되어 가는 공동체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빼앗아 가는 주범은 바로「죄」이다. 생기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죄」를 극복해야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길을 알려준다. 고해성사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생명의 숨결(靈)을 다시 받는 은총의 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의 지배하에 있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오늘 화답송 시편 중에서)











30              성령 강림 대축일 신앙생활의 살아 계신 원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께서 교회의 모든 내용을 만드신 분이며, 성령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립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호경을 통해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모든 일을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언어와 개념상으로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는 성부와 성자에 비해 성령께 대한 이해는 그리 높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성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삼위의 신비를 알게 되었으므로, 성령께 대한 이해도 성부와 성자를 분리해서는 불가능하다.

성령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장면이 예수 세례 장면이다.

  

예수의 세례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예수 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강림하여 하늘로부터의 말씀이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한다.



예수 세례 장면에서 나타난 비둘기는, 메시아 위에 강림하여 새 창조의 순간을 여는 영을!

그리고 이 영을 받아 새롭게 탄생되는 메시아의 백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하느님의 부성적 사랑을 나타내는 표지이기도하다.

    

또한 교회를 세상에 탄생시키고 초대교회가 열렬한 사명으로 복음선포에 나설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예수 부활체험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묻히신 예수께서「주님으로 부활하셨다」는 이 부활체험은 「주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부활체험은 다름 아닌 성령체험이다.

   

성령강림 보도에서 불로 표상되는 영(靈)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정화하고, 그 안에 열정을 불어 넣어주며, 변화시키는 심리적 힘이며, 불혀는 하느님이 하시는 큰 일들을 전하는 선포와 신적 훈계의 선포를 가르킨다. 영(靈)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을 새 공동체로 모으는 하느님일 효력 있는 행위이다.

성령강림 때 성령은 사도들을 변화시키고 정화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를 인도하는데 필요한 은사들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언어의 은사는 말씀의 선포능력과 일치를 드러내는 표지로, 이 은사를 통하여 바벨탑을 전복시키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사도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였지만, 한데 모인 사람은 각기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영은 구별되는 사람들을 일치시키시는 힘인 것이다.



이러한 성령강림은 교회 시작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성장을 위해 계속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은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의 근원일뿐 아니라, 교회가 복음 선포를 하는데 있어서 누리는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성령은 갖가지 은사를 통하여 교회를 건설하고 성장시키며,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은사들은 성령께서 자기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로서 상당히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성령 칠은(七恩)이지만, 이 칠은은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를 존중하여 만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일곱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은사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의 선물, 은혜의 선사로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신기하고 특수한 은사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이 영을 통해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을 총칭한다.



이 은사의 목적은, 첫째는 신자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여 하느님의 몸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데 있고, 둘째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해서다. 모든 믿는 이는 한 세례로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 몸의 성장을 통해 지체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인간 성숙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

  

결국 성령의 은사는 다르지만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건설과 한 분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2천년 전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지금 여기 우리 안에서 구체화시키고 실현시키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며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계승하고 성숙시키면서 활동하시는 분이다.

  

결국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살아있는 원리이다.

이러한 믿음 아래서 교회는 성령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한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살아 있듯이, 교회도 성령에 의하여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결국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믿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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