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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7년 11월 12일 (월) 10:43
분 류 연중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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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4주일 ”
 

연중 제 4 주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제 1 독서 : 예레 1,4-5. 17-19

제 2 독서 : 1고린 12,31-13,13

복     음 : 루가 4,21-30



해 설

루가복음은 에수께서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가신 이야기를, 사람들이 예수를 갈릴래아의 한 동네 밖 산벼랑에 밀어 떨어뜨려 살해하려는 장면으로 끝맺고 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본래는 서로 흩어져 잇었던 것들이 의도적으로 한데 모야져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예수께서 앞서 읽으신 이사야 예언(이사 61,1-2)이 자신을 통해 실현됐다고 선언하신 후(21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22절의 내용-“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과 그 뒤에 오는 다른 구절들(28절 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들의 적개심과의 사이에 어떤 심리적 대립이 있다는 점만을 생각해 보아도 알수 있다. 사람들의 감정이 이렇듯 갑작스레 백팔십도로 돌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룩가복음사가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던 예수와 그의 고향사람들과의 두 번의 만남을 묶어놓고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후자가 더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마태오복음(13,53-58)과 마르코복음(6,1-6)에서는 예수와 그의 고향사람들과의 만남이 계속적으로 ‘논쟁적’인 형태로 언급되고 있다.



모든 참된 예언자는 불편한 존재인가!



어쨌든 이와 같은 문제는 별 문제로 하고 볼 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루가복음사가가 처음부터 메시아의 미래 운명-성부께로부터 성령의 힘을 통해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고 구원할 사명을 수행하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4,18-19)파견되지만, 바로 파4견된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는-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며서 자신의 ‘예언적’ 사명을 천명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또한 모든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예언자라는 존재를 항상 자신들의 조용한 삶을 들쑤셔 피곤한 다른 삶을 제시하여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길로 방향전환을 시키러 오는 ‘불편스러운’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러야 하실 것이다.

참된 예언자는 항상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그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변모되아야 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히 우선적으로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다음에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즉 그 예언자를 제거하거나 침묵케 함으로써 그의 말을 통해 깨어나기 시작했거나 문제화되기 시작한 자신의 의식도 조용히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당신 자신의 절대적 의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의 역사-그중 한 좋은 예로 오늘 제 1독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내용(1,4-5. 17-19)을 들 수 있다-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예수의 이러한 입장은 그분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끝없는 먼 여정을 가고 계셨을 때, 헤로데가 그를 죽이려 하니까 피해야 한다고 간하였던 사람에게 하신 대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전하여라…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수 있겠느냐”(루가 13,32-33). 이것은 그가 예언자로서 장차 받게 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루가는 그 일을 요한이 말하듯이(요한 2,4 등 참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로서 이야기한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산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28-30). 그리스도께서는 필사적으로 날뛰는 반대자들 앞에서 참으로 태연하시다. 이것은 미움과 죽음의 세력 자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기 이전에 이미 ‘주님’이시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이 있기 전에 ‘죽음’을 지배하고 계신 예수님의 명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 예수를 반대하는 고향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그렇듯 심한 반감에 사로잡히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조금 전까지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던 한 사람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사실에 직면해서 어떤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을 것이다. 그들이 수군대는 이야기-“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는 이와 같은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두가지 현실, 즉 예수가 평범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주님의 신비로운 사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내용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조화될 수 없었다.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같은 이와 같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의 질투심 외에도 예수를 가까이하면서 예수 안에서 대립되고 있는 차원들, 즉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요셉의 아들-과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모든 사람들-지금은 예수의 고향사람들이지만, 내일은 사도들이며, 모레는 우리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일 것이다-이 예수께로부터 느끼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바로 예수 안에 들어 있는 이 신비가 항상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또한 앞으로도 혼란케 할 것이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모든 사실이 보다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 6,2-3).

사람들은 인간적인 이해의 척도를 넘어서 계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아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신다:“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마르 6,6).

루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께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는 동기가 더 미묘한 것 같다. 그것은 지방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편협한 요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너회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의 기적들을 나자렛 대신에 가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 기적이 무슨 선전 운동이나 관광안내와 같은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원하시는 곳에서 원하시는 대상자를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께서 신앙을 이미 갖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에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표징’으로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하나의 행위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적들을 팔레스니타 밖에서 이루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당신 백성들이 이와같은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이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가 심한 기근에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긋하게 고쳐주셨다.”(루가4,24-27). 우리가 이 이야기를 깊이 새겨본다면 그 두 위대한 예언자(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살았던 사렙다 마을의 그 과부(2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만큼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를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도록 묶어놓고자 했던 나자렛 마을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편주의적 계획과 대치되는 아둔한 편협 사상에 자신들을 가두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롭고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자라난(16절) 그 ‘예언자“가 선포한 보편적이고도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고, 그를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예언자를 항상 ‘불편한 존재’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항시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 앞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나 나중에 히브리 사람들이 예수께 행한 것처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방법은 그의 말을 듣지 않도록 귀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간ㅌ은 일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에게 있었던 일이다:“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 그런 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내 말을 전하여라.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에제 2,4-5 ;이사 6장 참조).

시대와 환경과 사회적 교육의 배경에 따라 거절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참된 예언자는 항상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나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참된 예언자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힘’을 필요로 한다. 이에 대한 예를 예레미야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힘겨운 소명을 받고 심리적으로 약화되고 불안에 차서 처음부터 줄곧 그 소명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도와주실 것을 엄숙히 선언하심으로써 그를 다그치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신다:“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하여라.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다가 그들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리라.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예레 1,17-19).

고관들이나 사제들과 같이 그에게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거슬러 싸워햐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예수께소 나자렛 고향사람들과 만나실 때,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십자ㅅ가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이에 대해 깊이 생가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는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부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특히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예언자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예언’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자렛 마을 사람들이 하고자 했듯이 폭력을 사용해 내쫓지는 않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들 즉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투쟁과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우리가 전달해야 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예레 1,18) 우리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된 놋담처럼’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바야흐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개인이건 교회 공동체건-가 믿고 사랑하는 소수만이 미래를 갖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해 외칠 수 있는 용기를 되찾아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다.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식속에서 비극적으로 은폐될 위기에 처해 있는 그 어떤 가치들을 현대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예언적’능력이 필요하다. 법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 등에 대해 생각해 보라!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말할 것도 없이 가장 강한 ‘예언적’ 증거는 성바울로가 사랑의 찬가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에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어떤 신자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은초인 ‘사랑’을 통한 증거다:“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2,13).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동일한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를 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도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에서).

“교회가 긴히 필요치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포기하고, 인류 안에서 오직 나눔과 친교의 종이 되고자 한다면 교회는 인류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당한 체제를 뒤흔들고, 비관주의의 물결을 밀어내고, 인간 신뢰의 현 위기에 출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1976. 12. 5. 떼제의 셋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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