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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평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9년 7월 29일 (수) 08:58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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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8주간 평일 강론 모음 ”
 

8월 3일(월):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

마태14,13-21 

찬미예수님!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군중들이 몰려 옵니다. 특히 병자들은 예수님께 치유를 받으려고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하시듯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길 잃은 양을 발견한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돌보십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해서 외면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군중들과 예수님께서 만나신 곳은 외딴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치유를 얻은 군중들에게 이제 배고픔이 밀려옵니다.

 동료들과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소리를 듣게 되고,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식사 준비를 해서 따라 왔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어쩌면 그들은 일을 못한 대신 하루 종일 굶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들의 배고픔을 달랠 수가 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 손쉬운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실까요?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유혹을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하죠.”,“없던 걸로 하죠.”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요.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을 열심히 하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이라도 한잔, 밥이라도 한 그릇 먹여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손쉬운 방법은 그냥 보내는 것입니다.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나는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내가 사서 그들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움직일 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출발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당신의 양떼로 보고 계시고, 제자들은 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과 기쁨의 거리는 너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으로 형제자매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기쁨이고, 기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일과 기쁨은 다릅니다. 행위도 다르고 결과도 다릅니다. 봉사를 하면서 일로 하는 사람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나는 기쁘게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독거노인을 찾아서 방문하고, 돌보아 드리고, 신앙을 이야기 해 주는 것. 이것을 일로 생각하면 하기 싫습니다. 하고서 생색을 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고, 하느님께서도 나의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욱 열심히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모습도 그렇게 변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은 예수님께서 계시니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할 때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고,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는 든든한 후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하고 자신들의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이 고백 안에는 “주님! 지금 저희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돕는단 말씀입니까?”라는 불평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렇게 풍족하게 먹으면서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부족한 능력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을 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이제 주님께 맡겨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중들이 자신들의 빵과 물고기를 내 놓아서 모두 배불리 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많게 하셨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이 기적을 내가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처럼 많게는 하지 못하지만 내 것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나눌 때 조그마한 기적들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실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 너무도 관대하셔서 백성들을 풍족하게 먹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은 것을 모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꺼내도 꺼내도 부족하지 않는 12광주리, 그리고 남을 것을 모아도 넘치지 않는 열두 광주리. 제자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자들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해 봅시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일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해 봅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지,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8월 4일(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14,22-36: 물 위를 걸으시다

찬미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으십니다. 배고픈 군중을 빵을 많게 하여 배불리 먹이시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 다음에 내려가셨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고요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뤄야겠다는 다짐을 해야겠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니 무척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고 생각을 했고,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군중들의 생각에 동요되지 않기 위해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즉 군중들과 떼어 놓기 위해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기도란 무엇인가? 언제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을 마치신 다음에는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늘 아버지와 함께 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기도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룬 다음에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처럼 일을 하기 전에, 일을 마친 다음에 기도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스타디온은 185미터이니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서 얼마 가지도 못하고 고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베푸신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이야기 하면서 배에 올랐지만 좀 있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는 모든 것을 잊어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예수님께서 이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까요? 분명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산 위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곧장 달려가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빵의 기적으로 인해 들떴던 그 마음들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바다마저 복종할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새벽 네 시 쯤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새벽 네 시에 호수를 건널 배가 있을 리가 없고, 또 역풍이 부니 배를 운행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공! 건너갑시다!”

“예수님! 심야할증에 역풍까지 부니 따따불입니다요!”

“나 돈 없는디!”

“저도 흙 퍼서 장사하는 것은 아닌디유! 무지 어려운 것 아시쥬?”

“어쩔 수 없군....그냥 걸어 가야쥐...”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계획을 잡으면 비가 오다가도 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소가 여의치 않으면 다른 장소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밀고 나가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또 폭우가 내리던 새벽, 새벽미사에 변함없이 참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오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오시는 분들..., 예수님께 물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처럼,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께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놀랄 만도 합니다. 호수 한 가운데서 사람을 만났으니. 그것도 배를 타고 온 사람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만났으니. 그렇게 놀란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어두운 밤길에 두려움에 떨면서 걸어갈 때, 저 앞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무척 당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나타난 사람이 귀신이 아니라,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요한아! 나다!”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제자들은 그렇게 기뻤을 것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역풍을 만나 고생하고 있을 때,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기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비록 물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를 가로 막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물 위를 걸어오신 전능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 또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표현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걸어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고서 물 위로 걸어갑니다.

예수님께 가는데 장애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부르시면 나는 달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무엇이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인간인지라 갑자기 두려움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믿음이 사라지자 그는 물 속으로 빠져 들고 맙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한 순간도 의심 없이 오롯이 주님께 믿음을 둔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평상시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게 물 위를 걷는 중에 별의 별 생각 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을 알았으니 내 안에 조금이라도 불신이 남아있지 않도록 몰아내고 믿음으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누가 있어 바다 한 가운데서 오롯한 믿음으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의심을 안 품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의심이 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성뿐만 아니라 신성까지도 가지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과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요? 이렇듯 크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그리고 주님께로 가는데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두려워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됨을 꼭 명심합시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8월 5일(수):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마태 15,21-28: 가나안 여자의 믿음

찬미예수님!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기 딸을 구해달라고 합니다. 그녀의 딸은 지금 마귀가 들려서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압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이라고 예수님께 고백을 합니다. 바로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이 여인을 향해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잘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이방인 여인을 외면하시자 제자들은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기에 돌려보내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입장도 모르고,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라 하여 예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 때문에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하게 매달리는 그녀를 향하여 또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유다인들로부터라는 원칙을 예수님께서 따르고 계신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삶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예수님의 계속되는 거절에도 끊임없이 매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어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자녀들은 “하느님의 자녀, 또는 아브라함의 자녀로 자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빵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강아지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실상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또는 돼지로 취급하며 멸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보내졌으며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우선권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멸시 속에서 쫓겨 다니는 들개가 아니라, 사람 옆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강아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사람과 개로 표현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우선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여인을 비하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 이방인 여인은 구원을 유다인들에게 베푸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작은 조각이라도 청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낮추고 끝까지 믿음을 보이는 여인은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 여인이 그 믿음을 끝까지 갖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어림없었을 것입니다. “싫으면 관둬유.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유? 하느님의 아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만 보고 있데유? 난 그런 하느님 안 믿어유!”



이렇게 큰 믿음을 보이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인의 딸이 나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고, 대단한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는 그녀의 믿음 때문에 딸아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확고하고 인내롭게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는 이 여인. 하느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이 여인. 이방인 여인을 바라보면서 기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믿음과 겸손과 신뢰를 가지고 끈기 있게 그분을 향하는 것입니다. 안 들어주실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들어주시면 엄청 감사하고, 안 들어주시면 들어 주실 때까지 청하는 자세. 그것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나의 어머니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해서 외면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어머니는 그것을 알았고, 그렇게 자신의 딸을 구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시는데,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8월 6일(목):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마르9,2-10

찬미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결코 고통 받는 메시아를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을 겪게 되면 당연히 실망과 좌절에 빠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잠시라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에게 신뢰와 확신을 심어주고,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세 명 뿐입니다. 교회의 으뜸인 베드로, 열 두 사람 중 최초로 예수님을 위하여 피를 흘리게 될(44년) 야고보,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이 세 사도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마전은 피륙을 삶거나 빨아서 하얗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눈부심은 어떤 인간도 흉내 낼 수 없고, 만들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하얗게 빛났다.”는 표현을 통하여 얼마나 황홀했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남으로써 율법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예언서가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고, 옛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세와 엘리야가 눈앞에 나타났고,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시자 지금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에 푹 빠져 있습니다. 너무도 꿈같은 것이 현실로 일어나니까 사도들은 모두 흥분하고,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현실로 펼쳐질 때는 겁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행복해서 자신들은 노숙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이곳에 머물기를 청합니다.



 가끔은 신앙인들도 맛을 찾아서 헤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 가니까 좋더라 하면 우르르 몰려가고, 저기 가니까 기도가 효험이 있더라 하면 그쪽으로 몰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가 주는 맛에만 중점을 두면 안 됩니다. 그 맛을 통해서 그분께서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 기쁨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난과 죽음 앞에서 힘을 내라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도할 때 어떤 맛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손과 발이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납니다.

구름은 하느님께의 신비로운 현존을 드러냅니다. 율법을 주셨을 때 구름이 시나이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 갈 때 구름이 내려와 머물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지도자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볼산에서 구름을 통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도 세례자요한의 귀에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 힘을 내고, 믿음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제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실 차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황홀한 순간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원하시는 것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함께 있어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님께 찾지 말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 또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긴 말해도 안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날아나시면” 분명히 믿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마음 깊이 이것을 간직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메시아께서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을 아직 그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아하! 그 말씀이었는데 내가 못 알아들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또한 거룩하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합시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8월 7일(금):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태16,24-28

찬미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십자가는 무엇이고, 내가 짊어지고 가고 있는지, 버리려고 하고 있는 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마음까지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참다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 나만을 위해서 하려고 하는 것 등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자신의 욕심을 접어 둔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의미해서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유로운 결단과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내 것을, 내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던 것과 같이 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나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들을 말합니다.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로마군인들이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을 위한 계획, 자신의 목표등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각, 주님께서 원하시는 계획, 그리고 단호한 결심과 함께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 보존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순교자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세상에 자신들의 목숨을 잃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목숨을 얻었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시고, 제자들에게 따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관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면(영원한 생명) 그것을 무엇으로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합덕성당에서는 신자들이 신부님께 피난을 가시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백 비리버 신부님께서는 “내가 순교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왜 버리겠습니까? 저는 고향을 떠나오면서 부모님께 천국에서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 제가 왜 이 기회를 놓치겠습니까?”하며 거절하였고, 결국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가셔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때 회장님과 복사님이 자원하여 신부님과 함께 가겠다고 하여 신부님을 모시고 죽음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합덕성당의 신자들은 신부님을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또한 회장님과 복사님의 죽음도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졌고, 합덕성당의 형제자매들은 그분들의 모범을 따라 목자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려고 합니다.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시겠지만, 지금도 신자들의 가슴에는 살아 계신 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목자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행실대로 갚을 것이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심판 때 “넌 안돼!”라는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기회를 좀 더 주십시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더 잘 하겠습니다.”하고 애원하겠지만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오늘부터 내 행실을 주님 보시기 좋도록 바꿔 봅시다. 적어도 천국에는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종교는 건강종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목숨을 걸고, 건강을 위해 안하는 것 빼고는 다 합니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썩어 없어질 그 육신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많은 것을 투자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왜 그리도 인색할까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만일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 후회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후회가 생기지 않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노력하는 신앙인 됩시다. 좋은 하루 되세요.



8월 8일(토):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내쫓으시다

 마태17,14-20

찬미예수님

다볼산에서 거룩한 변모가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하였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을 애처롭게 지켜봤을 것이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들을 보여 주었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자 예수님께로 몰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예수님의 대답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분은 불행한 처지에 있는 이의 청을 한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는데 갑자기 불평을 털어 놓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고, 거룩한 변모를 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돌아온 상태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 앞에서 제자들이 당황해 하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고통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으며 제자들까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에 대한 배은망덕에서 오는 것입니다. 병자를 치유해 줘도 감사하다고 하기는커녕 이런 저런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 학자들,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온전히 믿음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수고에 감사를 하게 되면 한 사람들은 더욱 힘이 납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수고를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이 “이건 이래야 했고, 저건 저래야 했는데”하면서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왜 했나..., 다음부터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믿음이 없고 삐뚤어진 세대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병자의 아버지는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제자들을 조롱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또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의 말에 동조하며 제자들을 몰아 붙였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하는 것이 있어도 부담을 주면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흔들린 제자들이 아이에게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아이를 고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었으나 아직 견고하지 못했으니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신앙이 견고해지면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본당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체 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교회 안에 존경받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긴 역사를 간직한 교회 공동체에는 존경받는 신앙인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열심한 신앙인들이 존경받는 곳이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지, 있는 사람들, 말 많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변화될 때 성당은 가보고 싶은 곳, 훌륭한 신앙인들이 모여 있는 곳,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비신자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이 귀찮아서 물리치기 위해서 호통을 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고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치유를 부탁했던 군중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지 않고, 그 믿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제자들과 부모 외에는 아무도 데리고 들어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나 또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잘 것 없는 믿음을 가졌다면 내 신앙생활 또한 보잘 것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아이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자 마귀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그 아이에게서 썩 나가거라!” 하셨겠지요. 그러자 마귀는 그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나았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처럼 한 마디 명령으로 아이를 치유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예수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해 주십니다.“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기적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저 사람에게 신앙을 권유할 수 있을까? 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신앙을 권유할 수 있을까? 남들이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안 되게 만듭니다.



내가 믿음으로 산을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믿음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주님께 청해서 외면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도 변화시킬 수 있고, 형제자매들도 내 모습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가 믿음의 힘으로 행한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께 기도할 때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좋은 하루 되시고, 기쁜 주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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