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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17일 (목) 16:01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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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7주일

        11. 조순창 신부(나)/16                12. 김정진 신부(나)/17

        13. 김영진 신부(나)/19                14. 김영남 신부(나)/21

        15. 강길웅 신부(나)/23                16. 이계중 신부(나)/25

        17. 한병헌 신부(나)/25                18. 교구 주보(나)/26

        19. 빵을 많게 하신(나)/27             20. 물고기 두 마리와(나)/29

        21.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라(나)/30     22. 기적을 바란다면(나)/32





11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몸과 피를 깎고 쏟는 사랑과 희생을 주님의 성전 건립에 바치자’

                                                           조순창 신부



오늘은 우리 본당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성전 건립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모금도 시작하여, 정성스럽게 준비한 규모는 총건평이 930평이고, 성당은 지금의 배의 크기로 1000석이 되고, 주일학교 교실과 회의실․강당․영안실, 그리고 사제관․수녀원과 부속실을 새로 갖추게 됩니다. 공사는 우창 건설에서 8억 6천 6백만원에 맡아서 건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동안 많은 의론과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여 신중한 결정으로 오늘을 맞이한 만큼, 이제는 계획된 일을 추진하여 완성해가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빵을 많게 하여 5천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랑의 기적 사화를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레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에, 많은 군중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으나, 어떤 이유로라도 예수님을 따르던 그들에게 먹이시는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써 한 가족으로 묶어 주십니다.

  

그 때에 외딴 그곳에 그 많은 이들이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갑자기 구할 수가 없었는데, 웬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이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시어, 모두 풍족하게 먹고, 그분이 훌륭한 예언자임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토대로 성체성사를 우리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런 복음을 듣고 기공식을 거행하는 오늘, 교우 여러분은 이 성당에 늘 구름처럼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한 교우 뿐 아니라 8000명 교우 모두가 예수님 앞에 모일 때에, 은혜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 성전을 짓는 기회에 우리 모두의 믿음이 쇄신되고, 신앙을 새롭게 불길처럼 부흥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만, 어려울 때일수록 편리한 대로 흩어지지 말고, 한데 모일 때에 큰 일을 이루는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도 바울로의 일치의 호소를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감옥에 있는 교우들에게 권고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는 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성령도 하나,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만 진실한 신자의 표지요, 큰일을 이루어 갈 수 있고, 구원을 받습니다.

 끝으로, ‘주님의 새 성전을 우리 힘으로 지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과,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 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선조 순교자들은 목숨을 헐어서 신앙을 지키고 증거하였습니다. 성체성사의 신비처럼 몸과 피를 깎고 쏟는 사랑과 희생을 주님의 성전 건립에 바칩시다.











12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빵의 기적과 최후 만찬과 성찬례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목자이심을 지난 주일 복음을 통하여 고찰해 보았습니다만 그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 양들을 사랑하시며 굶주릴 때에는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시며까지 실컷 먹여 살리십니다. 예수님이 빵을 불리신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당대의 백성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필립보와 안드레아 사도와 같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처럼 많은 사람을 먹일 방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어 군중을 먹이신 기적에 관한 복음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야 이 기적이 단순히 유대인들의 식사범절을 연상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최후 만찬과 교회의 성찬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기적에서 예수님은 빵을 드시고 감사하신 다음, 자리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최후 만찬과 원시 교회의 성찬례를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빵, 살아 있는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35-51)이란 바로 예수님의 살을 암시하는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천 명을 먹이신 이 기적은 생명의 빵인 성체를 알아듣게 하시기 위한 하나의 표지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기해야 될 점은 예수님은 오늘 기적에서 빵을 드시고 감사하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합니다(요한 6,11). 또한 예수님은 최후만찬 때도 축복과 감사를 드리시고 빵도 떼어 나눠주시고 포도주도 돌려 마시게 하였습니다(마르코 14,22). 예수님 부활 후의 신자들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성찬의 상징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미사 성제 중 성찬 예절 때 사제들로 하여금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한 다음 성체를 분배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기적에서 아무 것도 버려지지 않도록 남은 조각들을 모으라고 하신 것은 성찬례 때 먹고 남은 빵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먹고 남은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것은 성찬례의 풍요함, 즉 미사의 은총과 축복이 푸짐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경향잡지」 1976. 7. 81페이지).

  

이처럼 미사성제의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영성체하기를 멀리한다면 우리는 큰 잔칫상을 앞에 놓고 굶주리고 허기져서 쓰러지게 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천상의 생활한 빵이신 당신의 살과 피로 우리를 먹여 주시고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자비심에서 하늘 나라에 관한 설교를 오랜 시간 청취하고 있던 군중을 그대로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고 배불리 먹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도래했음을 설명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과 같이 식탁에 앉아 이 상징적인 잔치에서 메시아 시대의 기쁨을 같이 나누며 맛들이려고 저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찬을 벌이는 경우, 가장은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한 다음 참석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듯이 예수님은 세말 종국의 대잔치를 예고하시며 여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모든 선량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었습니다.

  

신자 여러분! 하늘 나라에서 식사를 하며 하늘의 대향연에 참여하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매일 미사에 참여하며 하늘의 생명의 빵을 먹는 이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란 성체를 말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시키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사실 한 빵을 나누어 먹고 또 같은 잔을 나누어 마시는 우리는 서로 일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최후만찬 때 사랑의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나서 그들을 위하여 특별기도를 바치시기를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열렬하게 우리 서로의 일치와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를 열원하십니다. 미사 때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눔으로써 성체를 통하여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야 됨을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자주 성당을 찾아 가 성체 앞에서 기도해야 하고 일치와 협력의 정신을 배워야 하며 영성체의 정신이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져야 하겠습니다.  아멘.









13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나누면 남는다  

                                                 김영진 신부



 아침 6시 미사를 마치고 보니, 어젯밤까지 내리던 비가 멈춘 듯해서 메모지 하나들고 비봉산을 올랐다. 흐린 날씨에 안개마저 자욱하니, 이 또한 강원도 산처럼 묵직함을 주는 것 같아 괜찮아 보인다. 누군가 강원도 사람을 일컬어 암하노불(바위밑에 앉아있는 늙은 중)이라 했던가. 난 그 말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 보는데, 오늘 아침엔 날씨마저 그런 느낌을 준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동네란 소박하고 아름답다. 사람들 오가는 모습도 손가락만하게 보이고,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집들도 성냥갑처럼 보인다.

 

아침먹이를 찾는 새들일까. 동네 하늘 여기저기를 훨훨 나는 새들의 마음도, 여기 나처럼 느긋하고 평안하고 고요하겠지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난 사실 저 새들의 마음을 배우기에는 아직 멀리 있는 소인이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아름답기만 한 저 안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미워하고, 욕심부리고, 질투하고, 잘난척하며 산다고 말하면, 믿어지지가 않는다.



저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에 무슨 분란이 있겠는가. 오직 사랑하고, 이해하고, 웃어주고, 감싸주는 마음들만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내려오는 중턱에서 산을 오르는 동네 목사가 아내와 함께 오르다 인사를 한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혼자 하는 것보다 보기가 좋다. 사는 것도 노는 것도,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함께 할 때, 인간은 더 멋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함께 하는데 있어 한가지 덕목은 '나 중심'이라는 이기주의에서 '너 중심'이라는 이타주의로 변화되는 것인데, 이것이 어려워 함께 사는 삶이 잘 안 되는 듯 하다.



미국에 있을 때 함께 살던 미국신부가 이태리 사람과 한국 사람을 비유하며 해준 말 하나가 “한국사람은 함께 하는 삶을 못 배운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이 하는 생선가게가 잘되니 건너편에 생선가게를 차리고, 슈퍼마켓이 잘되니 건너편에 슈퍼마켓을 차린다는 것이다. 미국인이 우리 민족을 평가절하 하는 것 같아 속이 상했지만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충고였기에 마음 속에 새겼다.  



 함깨하는 삶의 아름다움



  일본의 유명한 작가 중에 '미우라 아야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작가로, 이름이 나기 전에는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봉급쟁이 남편의 봉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동네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나 차렸다. 그런데 어찌나 장사가 잘되는지, 마침내는 트럭으로 물건을 사들여 올만큼 가게도 커지고, 장사도 잘 되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일에 파묻혀 정신 없는 아내를 한참 쳐다보다가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되는 것은 좋지만, 이 주위가 다 어려운 사람들인데, 우리가 잘 됨으로써 다른 구멍가게들이 안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며칠 간 생각하다 부인 미우라 아야코는 자기 가게의 물건을 줄이고, 어떤 물건은 아예 받지도 않아 옆의 가게를 도왔다.



손님들이 찾으면 “그 물건은 저 가게에 가면 있습니다"하면서 손님을 나누어주며, 함께 하는 삶을 실천하였다. 가게를 줄이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부인 미우라 아야코,는 틈틈이 펜을 들어 작품을 썼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빙점'이라는 소설이었다.

함께 하는 삶, 너를 생각하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삶인가! 성서에서는 함께 하면 마음뿐만 아니라 먹을 음식도 흘러 넘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따르는 수천명의 군중들에게 줄 수 있는 음식이란, 한 아이가 갖고 있는 보리빵 다섯개와 작은 물고기 두마리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아이가 그 음식을 내놓아 나누어 주다보니, 모두가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한다.

함께 하면 풍부해지고, 나누면 남는 삶이 신앙이 주는 신비다. 자기 중심이라는 우상 숭배에 길들여 있는 이는, 움켜 쥔 조막손을 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일쑤이지만 함께 하는 삶, 나누는 삶, 너 중심의 삶을 사는 이는, 언제나 모든 것이 넉넉하다. 넉넉한 사람, 듣기만 해도 푸근하다.



참으로 넉넉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가끔 넉넉한 사람을 만나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될 수는 없을까, 가끔 넉넉한 사람을 만나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시원해진다. 언젠가   장익 주교와의 대화 중 “주교님은 스님들과 친분이 두터우신가 봐요"라고 말씀드리니, “그 양반들 중에 넉넉한 사람이 꽤 있어요"라고 하였다. 넉넉한 사람을 담고있는 사목자의 넉넉한 마음을 보는 듯했다.



보리빵을 내놓은 아이의 넉넉함



에릭프롬이란 사람이, ‘현대 사회가 갈등과 혼란에 빠진 단 한가지 이유는, 모든 현대인들이 자기중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자기 중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곳에는 함께 할 수도, 나눌 수도, 넉넉할 수도 없다.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어린아이의 넉넉함을 배우자. 함께하면 풍부해지고, 나누면 남는 삶이 신앙이 주는 넉넉함임을 배우자.



우리가 먹을 양식도 달랑달랑하는데, 어떻게 북한을 돕느냐. 6.25를 저지른 집단이요,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집단인데 하는 생각도 할 수는 있겠지만, 독식은 독약이 되나, 나누면 모든 것들이 넉넉하게 된다는 것을 보리빵을 내 놓는 아이에게서 배우자.                  





14                 연중 제 17주일   요한 6,1-15 (나)

                                                                 김영남 신부



오늘부터 앞으로 5주 동안 연이어 교회는 주일 미사 복음으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 관한 말씀인 요한 복음 6장을 듣는다. 오늘 주일 복음은 그 첫 단락이다.

예수께서 하셨던 빵의 기적은 목격자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겨 놓았던 것 같다.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마테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는 두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복음 6장 전체에 관해 잠깐 살펴보고 이어서 오늘 듣는 복음 말씀에 관해 묵상하고자 한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 복음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 이어 이 기적(‘표징’)의 의미에 대하여 말해주는 예수님의 긴 말씀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 복음 6장에는 그 첫 단락과 끝 단락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 두 질문은 이 요한 복음 6장 전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첫 질문은 필립보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사올 수 있겠느냐?”(5절).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열두 제자 전체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67절). 그리고 이 두 질문 사이에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마치 대답처럼 놓여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요한 복음서에 의한 ‘빵의 기적’의 초점은 바로 이 대답에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독자들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서 있게 하고자 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기적들’은 ‘예수가 진정 누구이신지’를 가리켜주는 ‘표징들’이다. 예컨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을 많게 하시어 수많은 사람의 배고품을 채워주신 ‘기적’은 그분이 ‘참 생명’이시라는 것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그러기에 이 기적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예수께서 그 많은 군중의 육체적인 배고품을 기적적으로 채워주실 만큼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과시하는데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도는 오늘 복음의 끝에 나오는 ‘군중을 피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체험하자 군중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 메시야-왕이 나타났다고 확신하여 예수님을 강제로라도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서 다시 산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외적인 권세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후반부가 잘 증거하듯이,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메시야’이시다. 그러나 군중은 그러한 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과 필립보 사이에 오가는 문답을 더 깊이 묵상하자.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사올 수 있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필립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필립보의 이 대답은 제자들은 그 많은 군중의 허기를 채울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안드레아도 말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작은 믿음을 환히 밝혀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란 어떤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다가 그것을 내어놓는 이야기이다. 그 어린이가 갖고 있던 것은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주님의 손에 내어놓자, 예수님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어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많게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무에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그 작은 것을 가지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깊은 의도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젼, 인터넷 등을 통하여 오늘날에도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심지어 굶주려 죽어 가는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통해 대변되는 제자들의 하소연은 세상의 엄청난 문제를 대면하며 “이 작은 것으로 무슨 일을 하겠어?”하며 용기를 잃고 있는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 아니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사실 그렇다. 만일 우리가 그 많은 세상의 고통과 악을 대면하면서 우리 자신의 능력(우리의 소유, 우리의 시간, 우리의 지식, 우리의 건강)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리의 부족함만을 탓하며 뒷걸음을 치게될 것이다. 눈을 들어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손에 봉헌하라고 초대한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위하여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제자들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는 전부였던 그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선물(봉헌물)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의 촉매역할을 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15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나누어 주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Ⅱ열왕 4,42~44 (먹고도 남을 것이다)

제2독서 에페 4,1~6 (주님도 한 분이시고, 몸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 뿐입니다) 

복 음 요한 6,1~15 (예수께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연중 제17주일부터 연중 제20주일까지는 미사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성체를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날로서 빵의 기적이 나왔습니다.



인간 생존의 최고의 필수 조건은 빵입니다.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 먹습니다. 얼마나 잘먹고 맛있게 먹어야 하느냐는 둘째 문제고 우선 배부터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유지되며 또한 생명에 힘이 있어야 문화도 발전시키고 역사를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먹는 것이 대단히 궁핍했습니다. 에집트를 탈출하여 사막에서 수십 년 동안 헤맬 때는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으나 약속된 땅에 정착하여 왕을 세우고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춘 후에 백성들은 자주 배가 고팠습니다. 왕들이 바뀌고 세월이 지나가도 배부른 세상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착취와 횡포로써 더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왕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자꾸 무너지자 옛날 다윗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그의 후손에게서 새 왕이 태어나 백성들을 배부르게 해 주리라는 메시아 사상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후대에 와서 백성들은 자기들이 기대한 메시아가 오면 빵을 배부르게 먹여 주리라는 기대와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먹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습니다.



 1독서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빵 스무 개를 가지고 백 명의 사람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백 명이 배부르게 먹으려면 2백 개는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어떻게 이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느님을 믿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나누어 주어라." 그러자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게 되었습니다.



나누면 풍부해집니다. 사랑을 나누면 사랑이 한없이 커지고 기쁨을 나누면 기쁨이 또 한없이 커집니다. 마음을 나누면 마음이 커지고 지혜를 나누면 지혜가 커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하느님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나누지 않으면 그 자체로 썩고 녹슬게 되어 세상은 악화됩니다. 성체의 의미가 바로 나눔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람들 앞에 내놓고 나눕니다. 그랬더니 남자만도 5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나누면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또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 이름으로 부동산이 등기되어 있고 내 이름으로 통장에 돈이 예치되어 있다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의 속성처럼 나눌 때 그 의미가 살아나면서 우리의 생을 밝혀 주게 됩니다.



어떤 부부가 너무도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억척같이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녀들 대에서는 절대로 고생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녀들보다도 자기 자녀들을 잘 먹이고 잘 입혔습니다.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면 액수를 가리지 않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기 자식들만 보였고 남의 자식의 어려운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부모가 와야 한다는 통보였습니다. 깜짝 놀라서 뛰어가 파출소장을 만났더니, 글쎄 그 집 아들이 강도짓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한 달 용돈이 30만원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강도짓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놈이 합세해서 가난한 수퍼를 털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땅을 치며 한탄을 했고 어머니가 까무러치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짓거리를 했느냐면서 자식을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서 돈들여서 자기를 빼내 달라는 소리만 했습니다. 파출소장도 직원들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억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나누지 않으면 썩습니다. 그리고 썩은 돈은 인간도 부패시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듯이 가난해도 나눌 수 있고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생이 됩니다. 재물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목마르게 되고 나누면 나눌수록 배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당신이야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표시입니다.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빵의 기적의 핵심은 성체성사의 나눔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메시아십니다. 우리도 나눕시다.







16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가장 잘 사는 길

                                                         이계중 신부





예수께서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이 먹고 남은 조각들을 버리지 말고 거두게 하셨는데 그 부스러기가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신 것은 오늘날 세상에서 생활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경제에 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살림살이를 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1. 누구나 유사시를 생각하여 한 가지 기술만이라도 익혀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 부모는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사치를 버리고 저축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3. 재산에 대하여 너무나 욕심이 많고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을 도와드리는 사람이요, 다시 갚음을 받으리라.’는 잠언 9장 17절의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적 덕행의 행위로 이를 전환하여야 하겠습니다.

5.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고, 주님을 믿는 맘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17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보물과 진주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

                                                  한병헌 신부



보물과 진주의 비유에 관한 복음 말씀은 간단히 말해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나 진주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나라임을, 하느님 나라를 찾아 얻은 사람들의 충만한 기쁨임을, 압도적인 기쁨 임을 말해 준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건 돈많은 상인이건 누구든 이 기쁨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나타날 하느님 나라,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그 나라를 찾아 얻는다는 것, 이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값지고 귀중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찾아 얻는 기쁨은 일생에 가졌던 모든 것들, 그것이 제 아무리 큰 부귀이거나 아무리 좋았던 영화일지라도 허무하게 보이게 하며,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일지라도 허무하게 보이게 하며 가장 귀하게 여겼던 그 어떤 것이라도 조건없이 버리는 것을 당연히 한다.



예수께서 이 두 비유 ꡐ밭에 묻혀있는 보물이나 어떤 장사꾼이 찾아다니는 좋은 진주ꡑ를 통해서 말씀하심은 우리에게 이미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 또 언젠가 완성되어 확연히 나타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생애에 있어 가질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도 더 귀중하고 더 가치있으며 더 큰 기쁨을 확실히 보장해 준다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제일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베푸셨던 수많은 기적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ꡒ맹인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마태오 복음 11장 5절)ꡓ



하느님 나라, 그것은 인간 생활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제거되며, 사람들에게 참 기쁨과 행복을 건네주며, 영원한 생명, 영원한 평화, 하느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악마와 죄의 세력이 영원히 제거될 것이다.











18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세상에 오시기 된 예언자

교구 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빵 이적사화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로 오는 것을 바라보시고 필립보에게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다가 이들이 먹도록 하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능력을 믿는지 떠보려고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을 먹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풀이 많은 초원에 앉게 하시고 빵을 들고 사례하신 다음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두들 배불리 먹고 나자 예수께서는 “버리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들이시오” 하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모아들였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바로 그 예언자이시다”(요한 6,14)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알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가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의 핵심은 14절에 담겨 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바로 그 예언자이시다.” 모세는 자기와 같은 한 분이 장차 나타나리라고 예언했습니다(신명 18,15.18).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된 바로 그 예언자”이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모세보다 더 위대한 종말 예언자, 신적 계시자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엘리사보다도 훨씬 위대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빵 스무 개로 겨우 백 명을 먹였지만(2열왕 4,42-44)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무려 오천 명을 먹이셨으니 예수님이야말로 엘리사보다 더 위대하신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또 오늘 복음에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성만찬례를 지내면서 “예수께서 빵을 들고 사례하신 다음 자리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요한 6,11)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초대교회의 성만찬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천 명을 먹이신 빵 이적사화는 성만찬례, 곧 미사의 풍요함을 밝히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미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눌 때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게 된다는 아름다운 교훈이 오늘 복음에는 담겨 있는 것입니다.                              











19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의 의미



오늘부터 앞으로 5주 동안 연이어, 교회는 주일 미사 복음으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 관한 말씀인 요한 복음 6장을 듣는다. 오늘 주일 복음은 그 첫 단락이다. 예수께서 하셨던 빵의 기적은 목격자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겨 놓았던 것 같다. 네 복음서가 모두 전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는 두 번씩이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복음 7장 전체에 관해 잠깐 살펴보고, 이어서 오늘 듣는 복음 말씀에 관해 묵상하고자 한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 복음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에 이어, 이 기적(「표징」)의 의미에 대하여 말해주는 예수님의 긴 말씀을 함께 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 복음 7장에는 그 첫 단락과 끝 단락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 두 질문은 이 요한 복음 6장 전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첫 질문은 필립보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사올 수 있겠느냐?」(5절).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열두 제자 전체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67절) .

그리고 이 두 질문 사이에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마치 대답처럼 놓여있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요한복음서에 의한「빵의 기적」의 초점은 바로 이 대답에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독자들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서 있게 하고자한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기적들” 예수가 진정 누구이신지를 가리켜 주는「표징들」이다. 예컨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을 많게 하시어 수많은 사람의 배고픔을 채워주신「기적」은, 그분이「참 생명」이시라는 것을 가리키는「표징」이다. 그러기에 이 기적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예수께서 그 많은 군중의 육체적인 배고픔을 기적적으로 채워주실 만큼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과시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도는 오늘 복음의 끝에 나오는「군중을 피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체험하자 군중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 메시아 왕이 나타났다고 확신하여, 예수님을 강제로라도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서 다시 산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외적인 권세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후반부가 잘 증거하듯이, 그분은「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메시아」이시다. 그러나 군중은 그러한 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과 필립보 사이에 오가는 문답을 더 깊이 묵상하자.

“이 사람들을 다 먹일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사올 수 있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필립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해도 모자라겠습니다” .필립보의 이 대답은 제자들은 그 많은 군중의 허기를 채울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안드레아도 말합니다 :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작은 믿음을 환히 밝혀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란 어떤 아이가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다가 그것을 내어놓는 이야기이다. 그 어린이가 갖고있던 것은,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주님의 손에 내어놓자, 예수님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어,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많게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무에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그 작은 것을 가지시고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깊은 의도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등을 통하여 오늘날에도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심지어 굶주려 죽어 가는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통해 대변되는 제자들의 하소연은 세상의 엄청난 문제를 대면하며, “이 작은 것으로 무슨 일을 하겠어?”하며 용기를 잃고 있는,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 아니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사실 그렇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그 많은 고통과 악을 대면하면서 우리 자신의 능력(우리의 소유, 우리의 시간. 우리의 지식, 우리의 건강)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리의 부족함만을 탓하며 뒷걸음을 치게될 것이다. 눈을 들어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손에 봉헌하라고 초대한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위하여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제자들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는 전부였던 그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선물(봉헌물)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의 촉매 역할을 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20        연중 17주일   요한 6,1-15 (나)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인 기적이야기.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믿는다.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음을. 사람들은 며칠동안 말씀을 들으면서 뒤따라왔다. 영혼은 풍요로웠지만 육신은 배가 고팠다. 무엇으로 그들을 먹게 할 것인가. 기적밖에 없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 배고픈 어른에겐 혼자 먹어도 시원찮은 양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5000명 이상을 먹게 했으니 대단한 기적이다. 별 볼일 없는 음식이 기적의 음식으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예수님의 손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냥 지니고 있었더라면 한 사람이 먹어도 시원찮은 음식인데 예수님의 손을 거쳤기에 기적의 음식으로 바뀐 것이다. 어찌 음식뿐이랴. 우리가 겪는 온갖 희로애락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예수님의 손을 거친다면 기적의 무엇으로 바뀔 수 있다.



예수님의 손을 거친다는 것은 그분께 봉헌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께 봉헌한다는 것은 그분이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만나는 온갖 희로애락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말이 쉽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예수님의 손을 거치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내 안에 남아있을 뿐이다. 어른 혼자 먹어도 시원찮은 음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손을 거치면 5000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의 음식으로 바뀔 수 있다.



청중을 앉게 하신 후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기도의 순간을 청중은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들도 예수님과 하나되어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기적의 음식은 이렇게 해서 그들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기도는 애원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였다. 꼭 들어주신다는 확신으로 바치는 감사의 기도였다. 감사하며 살아가야 기적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왕으로 섬기려 했다. 기적을 체험한 군중으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해결될 수 있음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신다. 사람들의 불손함을 꾸짖기보다 당신이 먼저 피하신 것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도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던가. 좋으면 어쩔 줄 몰라하고 시련이 오면 금세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앙생활의 본질은 감사의 생활에 있다. 역경이든 순경이든 감사드리는 데 있다.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많이 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주셨음을 깨달아야 감사하게 된다. 그분은 최소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 정도는 주셨지 않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그분께 봉헌한다면 그분의 손을 거쳐 다시 되돌아 올 것이다. 기적의 힘과 함께 되돌아 올 것이다.











21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라



그리스도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아지게 하신 기적이 유대인들의 눈에 뜨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충분한 빵, 충분한 물고기, 충분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피심이 얼마나 극진하신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를 채워 줄 빵을 많이 불릴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과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빵 즉 당신 자신을 많이 불리실 수 있다는 것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보여 주십니다 -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다”고

  

오늘날에는 하느님의 안배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다 차지갈 만큼 “충분한 돈이나 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경제적 및 영신적 굶주림에 관해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이루신 그 산허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몫이 있다. 물질적 빵도 충분하고 영신적 빵도 충분하다”고.

  

하느님의 낭비와 인간의 낭비를 대조해 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물질적 재보를 이 지상에 채워두셨습니다. 다만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정당하고 공평하게 분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이 불리신 오늘의 기적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또 1970년의 세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몫이 있다. 너희가 나처럼, 육신의 양식이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서로 공평하게 나누어 먹을 수만 있다면” -미사때 여러분은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람에게 충분합니다”라고.



오늘 미사에서 여러분은 제단 앞에 나아오는 모든 교우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건 받지 못한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혹은 그 중간의 사람이들이건 구별없이 똑같이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성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방대한 은혜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도 오늘 미사에서뿐만 아니라 몇 년이고 내내 그러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의 성사를 통해 항상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당장 오늘 미사에서부터, 영성체 때부터, 봉헌경 때부터 그리스도처럼 풍요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의 영신적 사랑과 물질적 재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영성체 때 주께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여, 주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도록 도와 주소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몫이 있나이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지면서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람에게 넉넉합니다”라고.

  우선 여러분의 친척들부터 보십시오. 조금이라도 그들과 나누어 가질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처럼 그들에게 주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여러분은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외로운 사람, 노인들을 방문할 시간을 낼 수 없습니까?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찾아보고, 그들에게 여러분의 시간 뿐 아니라 여러분 자신까지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부가 넘쳐흐르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시간이거나 돈이거나 사랑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모토를 여러분의 모토로 삼으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몫이 있다”고.











22            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나) 기적을 바란다면



  빵의 기적을 낳게 한 어린이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별 것 아닌 재료들이다.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는 예수님이 맨손으로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지만 그 보잘 것 없는 재료를 갖고, 어린이는 물론, 모든 이를 기쁘게 하셨다. 이와 같은 기적을 성서에서는 상징적 행동이라 한다. 사실 만나로 40년 동안이나 매일 유대인들을 먹여 살리신 하느님이 오늘날까지 40억이 넘는 우리 인류를 먹이시니 기적이 아닌가?

  

기어이 기적이 보고 싶다면 어린이의 빵에 비유되는 우리의 재산, 재능, 건강, 시간, 명예 등을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쓰시도록 내놓아야 한다. 움켜쥐고만 있으면 썩지 않은 밀알같이 한 알로 남게 되고, 보화 하나를 받은 사람의 경우와 같아진다. 투자 없는 이득이 있을 수 없듯이 받은 것을 내놓지 않고는 평화도, 사랑도, 행복도, 기적도 기대할 수 없다. 교회가 발전 못하고 사회가 정화되지 못하는 것도 받을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사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도 베드로에게 그분은 현세 복과 아울러 후세 영복도 덤으로 주셨다. 별 것 아닌 우리 것을 아낌없이 내놓으면, 주님은 그것으로 기적에 버금가는 인류 구원사업에 유용하게 쓰실 것이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어린이와 같은 기쁨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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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김민규 안드레아 신부 2008-07-04 3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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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4-18주일
다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9 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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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9 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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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다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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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5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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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나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연구 2009-06-22 3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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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1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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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말씀연구 2008-06-23 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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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성민호 신부 2008-09-06 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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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안드레아 신부 2008-08-12 2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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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교황님은 누구십니까? 2008-06-27 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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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임승욱 요한금구 2008-06-23 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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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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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남북통일 기원미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6월 25일 2008-06-20 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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