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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4일 (금) 15:14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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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5주일

        

        22. 이기정 신부(다)/37

        23. 김몽은 신부(다)/40                24. 김병열 신부(다)/42

        25. 구요비 신부(다)/44                26. 함세웅 신부(다)/46

        27. 강길웅 신부(다)/48                28. 강영구 신부(다)/50

        29. 사랑은 사심없는 관심이다(다)/54







22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착한 신기료 아저씨

                                                        이기정 신부



저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1․4후퇴 당시에「부산일보」라는 신문을 한동안 팔았습니다. 그때 저는 신문을 배달하는 형들이 몹시 부러웠습니다. 형들은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이집 저집 대문 밑으로 “신문이오!" 외치고 넣기만 하면 됐는데, 저는 저녁 때 분배소에서 받은 신문을 어두워지기 전에 다 팔아야 일이 끝났습니다. 그때 일들이 지금 주마등처럼 줄줄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유난히 떠오르는 기분 좋은 일은 오늘의 성경과 어울리는 사건입니다.



신문팔이 소련 시절의 추억


그날따라 영 신문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다녀야 하는데, 그 전날 시장에서 너무 속상한 일을 당해서, 오늘은 마음도 달랠 겸 대청동 하꼬방(피난민들의 임시 집) 동네를 골목골목 누비며 오르내렸습니다. 창문마다 등불이 켜지는 사이로 골목은 점점 어두움이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내일 아침 부산일보!" 하며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웅답이 없었습니다. 팔기는 몇 부 팔았지만, 아직 20부 정도나 남았습니다. 이대로 들어가면 본전도 못하는데 하면서, 열심히 외쳐 보아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이젠 기운도 빠지고, 기분도 안나서 외치는 대신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신문! 이리 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려갔더니 어수선한 하꼬방 속에 신기료 아저씨가, 가빠 쪼가리를 무릎에 얹고, 구두를 잡은 채 저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몇 살이니?" “여섯살입니다." “고향이 어디니?" “저, 이북 강계입니다." 등등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습니다. 왕사탕 한 알도 주셔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저씨는 “몇 부 남았니?" “이만큼 남았습니다."



그때 아저씨가 저를 보던 그 미소진 얼굴은 지금도 그려내라면 그릴 수 있을 만큼, 제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여기다 놔, 내가 다 살께."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손해잖아요." 그러나 저는 그 아저씨가 나무라는 눈치를 채고 그대로 했습니다. 인사를 굽신하고 나온 저는, 기쁨의 눈물을 홀렸습니다. “참, 고마운 아저씨다. 세상에 저런 아저씨들만 있으면 전쟁같은 건 없었을 텐데"



어두운 골목길까지 갑자기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그 집 앞에 가서는 신문을 문 앞에 살짝 놓고 얼른 도망쳐 오곤 했습니다. 혹시 저를 보면, 하루종일 구두 지어 번 돈을 몽땅 주실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신문 파는 것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커다란 그림을 펴들고, 소나무 가지에 걸었을 때,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얼굴이 바로 그 아저씨의 얼굴과 똑 같았습니다.

둥실한 얼굴, 이마를 수건으로 맨 모습, 턱에 난 뭉실한 수염 등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또 한번 마음속으로 빙그레 웃었던 것은, 저로선 너무나 이해가 잘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에게 확실히 착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오늘 생각해 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참 필요한 소중한 말씀입니다.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는 사람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사람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무서운 눈초리로 둘레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이 사회를 생각케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위층일수록 밀집농도가 짙은 것 같습니다. 권력이 없는 평민들, 경제적으로 힘을 이미 잃은 충에도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부터 성숙과정 전채를 통해서 고된 시험경쟁을 치러온 오늘의 인물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권력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 동네를 볼 때에는, 특히나 이마가 찌푸려집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의 생각 속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자리하고 있나 봅니다. 오늘의 아파트 벽은 실제 30센치 내외이지만, 그 두께의 심적 거리는 백리, 천리 인듯 한 느낌도 사실입니다.

  

다시 신문 팔 때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 전날 받은 상처는, 한동안 어금니를 깨물게 했다고 기억합니다. 부산 국제시장에 막 접어드는 길가의 전봇대 앞이었습니다. 방금 지나간 소나기에 시장바닥은 온통 흙탕물로 질퍽했습니다.

한 젊은 신사 아저씨가 신문을 달라기에 드렸습니다. 아저씨는 돈 줄 생각은 않고 신문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돈 주세요." 그래도 아무 반응 없이 한 다리를 꺾고 전봇대에 기댄 채 신문만 봅니다. “아저씨, 돈을 주세요" 했더니 "쪼꼬만게 왜 시끄럽게 말이 많아!” 하면서 저의 가슴을 흙발로 걷어찼습니다. 저는 신문을 끌어안은 채 흙탕에 넘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쓰러진 채 한참 숨을 가누며 노려보았더니, 신문을 몽땅 빼앗아 던져 버렸습니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나같은 자식을 둔 아버지 어머니 같은 분들도 있었는데, 누구하나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아 남을 이웃 사랑의 힘

  

그런 다음날 착한 신기료 아저씨를 만난 것입니다. 시장의 아저씨는 저에게 절망을 주었고, 신기료 아저씨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시장의 주변 사람들은 저의 가련한 처지를 외면한 채 각박한 세상 인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신기료 아저씨는 참으로 저의 이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저씨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그대로 살았다면 지금쯤 시장의 아저씨는 어떤 모습의 인생 말로를 걷고 있을까요? 하지만, 신기료 아저씨는 행복하고, 편안한 노년을 지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어떤 조물에게나 신기료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신기료 아저씨는 저에게 베푼 그 인정 많은 버릇 때문에 돈을 많이 모으지는 못했겠지만, 좋은 이웃들과의 평화로운 주변을 구축했을 겁니다. 저도 제가 속한 주변을, 바로 저의 일부처럼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이웃에게 준 사랑으로 모아진 사람들의 정과 주변의 정리는, 죽은 다음에도 쓸 수 있는 참된 재산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죽음이 장애가 될 수 없는 고차원의 힘이라고 이해됩니다. 그 힘은 나만이 누리는 게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신비한 힘이 될 줄 압니다.

  

그리고 저는 어릴 때에, 제 이웃을 신기료 아저씨라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신부가 되면서 이웃의 의미가 넓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이 이웃이기도 하고, 한 단체가 이웃이기도한 것으로, 교회가 저의 이웃이고, 사회가 저의 이웃이며 자연이 이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연보호가 이웃이고, 쓰레기 재활용이 이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청의 직원들 역시, 청계천 포장 밑 하수도가 공직인으로서의 이웃이고 서울의 공해방지도 이웃입니다. 인간을 위한 근본적 문제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찾을 줄 알아야, 공직을 맡은 인간이 랄 수 있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이나, 고통받는 인간 개인의 존재만이 이웃일 뿐이라면, 성서는 너무나 국한된 세계의 예화일 뿐입니다.

  

한 사람인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그렇게 산다면, 우리의 직분상 당면하는 이웃적 존재를 찾을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찾은 모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새 하늘 새 땅으로 재창조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새 하늘, 새 땅 건설의 일꾼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23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하찮은 것 하나에도 손길을

                                                              김몽은 신부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사랑과 미움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마치 선과 악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철학에서 보는 악의 개념은 선의 결핍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움도 사랑의 결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움이란 사랑의 변질이지 결코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자기의 최대의 관심을 상대방에게 기울이고, 사랑하는 대상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미움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반대는 오히려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는 데 쏟고, 미움은 나의 관심을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 쏟습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전혀 관심 밖에 두고 남남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주어진 제목인 ‘사랑과 미움’을 말하자면 ‘사랑’만을 이야기하면 될 줄로 생각합니다. 미움은 그 관심의 초점이 사랑과 상반되는 것이므로, 그 관심의 초점을 바꾸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즉시 남녀간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도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그것이 자연질서와 사회질서 안에서 정당하게 이러우진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결코 그것만은 아닙니다. 에로스적 사랑도 다른 많은 사랑 중의 하나이지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이 있겠지만,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나 참 진리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것입니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에 죽고 상대방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살아하는 사람은 자기에 죽고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그 행위에 있어서 그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소중히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소유 전부를 바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누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떠한 것이든 그 사랑하는 대상을 괴롭히거나 또 자신의 사랑을 방해할 때는 생명을 걸고 그것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모습이 제일 잘 나타나는 것은 어버이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 있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하늘이 주신 본능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새끼를 품은 짐승은 포수의 총뿌리도 두려워하지 않고 새끼들을 지킵니다. 자녀들은 이러한 부모님들의 사랑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또 부모들은 자녀들의 순수한 사랑을 잘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사랑은 역시 연애감정에서 볼 수 있겠으며, 그것은 마침내 서로생명을 교환하는 부부애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류가 모두 한 아버지(하느님)의 자녀들이므로 한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기를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야기되고, 또 자녀들에 대한 사랑도 비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 진정한 자기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올바른 가치판단을 가지는데 있다고 봅니다. 고상한 것과 지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보다 높은 선에 이르기 위해, 보다 낮은 차원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참다운 자기애가 아닐까 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안락을 포기할 줄 아는 것, 즉 행복하고 건전하며 품위있는 미래를 위해 젊은 혈기를 억제하고 인격을 높이는 교양을 쌓는 일 등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으로 바꾸겠느냐?”(마태 16,26). 자유를 방종과 혼동하고, 동물과 다를 바 없이 관능적 쾌락에 몰두한다는 것은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얼마나 이런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벗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의 미담도 수없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인도의 마더 데레사의 경우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는 이 말씀은 인류의 정신사에 결정적인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실천될 때 인류사회에서는 미움이라는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미움보다 강합니다. 지금 세계는 평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무기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일입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전세계를 차지하셨습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내주고, 그 사랑하는 대상을 모두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조국을 사랑한다면 조국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조국은 비로소 그때 나의 것이 됩니다. 원수에 대해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원수는 마침내 우리와 한 형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미워한다면, 사랑의 경우와는 반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무엇인가 조금  얻어진 것 같이 여겨지거나 속이 좀 후련해진 것처럼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까지도 잃고 말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사랑은 미움을 몰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24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

                                                          김병열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루가 복음사가를 통하여 우리 모든 이에게 가장 좋고도 가치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우리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잠시 생각해 봐야만 하겠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 여기서 주님은 네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우리 모든 인간들의 의무를 집약시키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루가 10,27)

모든 사람이 자기 어버이를 마땅히 존경하고 효도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 모든 인간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을 존경하고 그분께 사랑을 드리며 그분을 흠숭하는 것은 더욱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한 분의 하느님을 서로의 주인으로 모시는 우리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 가르쳐 주시고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이겠습니까? 흔히들 얘기를 합니다. “사랑이 어떻더냐? 달더냐, 쓰더냐? 모가 나더냐, 둥글더냐? 주는 것이냐, 아니면 받는 것이냐?”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젊은 청춘들이 얘기하듯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은 모가 나지도 않고 보름달처럼 둥근 사랑입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하는 둥근 사랑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민을 사랑하사 외아들까지도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당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 뿐 만 아니라 죄인까지도 사랑하셨고, 더욱이 원수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참된 신자생활을 해나갑시다!



둘째로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고, 셋째로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명백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은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 ···· 그 사람에게 동정을 베푼 사람입니다”(루가 10,36-37) 이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의 이웃은 바로 작으나마 내게 도움을 원하는 사람 모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이웃이란 또한 내게 도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줄 아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서로가 다 이웃인 것입니다.



어느 누가 타인의 도움을 하나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환자는 의사를, 다친 사람은 치료해 줄 사람을, 궁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그 도움을 요구합니다. 더구나 현대와 같이 분업화된 사회에 있어서는 누구나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비록 나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오늘과 같이 분업화된 사회에서는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사람의 간접적인 도움을 입고 사는 일이 허다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내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의 모든 이웃에게 도움과 동정을 베풀 줄 아는 참된 이웃이 됩시다! 나의 도움을 원하는 이웃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넷째로 주님이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것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주님은 “당신도 가서 그렇게 행하시오”(루가 10,37)하셨습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인정이 있다면 강도에 맞아 다친 사람을 못 본 채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사람들만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비록 천사의 말까지 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사랑을 실천 할 줄 모른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도 바오로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는 신자 생활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신자로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못지 않는 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바로 신앙생활의 연속임을 잊지 맙시다.

성당에서 하느님께 흠숭을 드리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나의 도움을 원하는 모든 이웃에게 도움을 줄 줄 아는 사랑의 실천도 중요함을 명심합시다.











25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구요비 신부



안녕하십니까? 거룩한 주님의 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주님 앞에 가까이 나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께서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또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웃도 여러분 가까이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율법 교사가 우리를 대표해서 예수께 질문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대답이며, 공식적인 대답일 뿐입니다.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시면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영생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우리가 누려야 할 구원이고 완전한 행복에로의 길입니다. 이러한 영생은 하느님의 초대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가야할 길입니다. 그 자비로운 초대를 우리 마음에 심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행복을 찾기 마련이고, 지금은 숱한 걱정과 고민이 있지만, 그래도 보다 나은 삶이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문제와 갈등이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거짓과 타협해야 하는 우리들, 재물이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하면서도 돈의 위력에 매여 살아야 하는 우리들, 경건한 종교생활을 동경하면서도 타성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삶, 안전과 건강을 원하면서도 사고와 질병의 위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은 끊이지 않고 갈수록 태산이고 바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갖가지 갈등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오늘 기본적이면서도 분명한 영생의 길을 주님은 들려주십니다.

먼저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신명이 30장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법은 아주 우리와 가까이 있고 그래서 우리의 입에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법이 있다하시는 말씀과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할 때, 주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이신 주님을 흠숭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면서, 주님의 법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영생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또 골로사이 1장의 말씀으로서, 하느님께 회개하고 형제들과 불우한 일이 있으면 화해해서 평화를 이룩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제단 앞에 가까이 나오신 여러분, 주님께 향하여 계시면서 형제들의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용서 받으면서 오늘 화해하십시오.



오늘 또한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면서 있다 하는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서 예수님은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빼앗기고, 인륜이 파괴된 강도 맞은 사람의 깊은 상처로 죽어가는 모습, 그것은 바로 인류의 어제의 모습, 오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병들어 있는 상태, 헐벗고 굶주린 상태, 싸우고 상처 투성이의 상태, 이런 모습에서 우리를 살려 낼 길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아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와서 그를 살려주신 것처럼 바로 인류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오. 죽어가는 인류를 살려내는 길은 사랑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주어진 숙제는 억울한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여러분의 사랑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면, 우리 교우들 중에서 도움을 받을 불우한 이웃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여러분의 따뜻한 손길을 보내 주십시오. 그들의 삶에 새로운 길을 얻을 때 그도 살고 여러분도 살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앞에 참된 행복의 길이 열릴 것이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26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함세웅 신부



구약성서를 통하여 볼 때,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태인들과는 적대 관계에 있는 도시로서, 이교도들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고 설명 드린바 있습니다.

복음에는 율법 전문가 제관, 레위 사람 그리고 사마리아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율법 전문가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을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율법의 근본 사상이며, 그리스도의 핵심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재삼 강조, 확인하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는 또다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 모두 곰곰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이웃이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비유와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여행하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여행자는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기고, 복음 말씀대로 반쯤 죽은 상태였습니다. 형편없게 된 이 여행자의 모습은 시체와도 같았습니다.

  

첫번째로 제관 한 사람이 지나갔지만, 그는 피투성이의 여행자를 못 본 체 하고 지나쳤습니다. 공연히 아는 척, 또는 도와줬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도 모르고 또 뒷처리가 귀찮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습니다.(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죽은 이를 보았을 경우, 불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결 예식 등, 종교 예식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레위 사람으로, 레위 사람이란 구약에서 제관과 사제 가문의 계보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부제직 정도의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레위 사람도 역시 못 본 체 하고 지나쳤습니다. “불쌍한 사람, 다친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다니!" 우리 모두 언짢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세 생활의 우리와 비교하여 적용시켜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 약다는 사람,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사람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야외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버스 속에서 누가 들치기, 날치기, 소매치기 등의 억울한 경우를 당했을 때, 과연 선뜻 나서게 되는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관여했다가 봉변이나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못 본 체 외면하는 사람을, 우리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고, 그러한 처사를 잘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상식화된 부조리의 현실을 보고도 묵인하는 우리, 그 우리들이 바로 강도를 당한 여행자를 보고도 외면하며 지나친 제관과 레위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는 사람, 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 뜻을 알아듣지 못한 무의미한 신앙인입니다.

버스를 탔다가 또는 물건을 사고 팔면서 어떻게 하다가 거스름돈을 더 받고도 “야, 오늘

은 약간 재수가 좋구나!" 하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 그는 잔돈 몇 푼 때문에 양심에 먹칠을 하는 치사한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그냥 갖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현명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제 세번째로 유태인과는 원수, 종교적으로 볼 때에는 이교도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강도 당한 여행자를 보자, 곧장 달려가서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해 주고 여관에까지 데리고 가서, 자기 돈으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시간도 빼앗기면서까지 봉사를 하였습니다. 버림받고 외면당한 여행자의 참된 이웃은 사랑의 주인공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사랑은 종교, 이념, 종족을 초월하여 제한 없이 누구나를 사랑하고 봉사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나도 진정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지난 7월 5일에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목교서가 발표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 공경하고 올바른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이웃의 권리를 보장해 주며, 억울하게 빼앗긴 인권을 되찾아 줌이,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의 임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진리와 정의, 자유를 위해서 외쳐야 할, 그리고 가르쳐야 할 예언자적 사명을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년 기도의 실천으로 성직자, 수도자들의 철야 기도 끝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셨습니다. “성당, 기도드리는 성당 하나가 제 3자 그 누구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또는 기도드리기에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종교 박해입니다. 그리고 교우들은 누구나 분노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당 건물 하나가 침해되는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분노스러운 것은, 바로 나의 이웃, 가난하고 권력 없는 내 이웃의 인권이 유린당하는 그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마땅한 권리가 침해당하는 그것이, 성당 하나가 침해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신앙인은 의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의 참된 성전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권리가 침해되고 유린당하는 그것은 하느님의 성전이 침해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이 침해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버림받고 고통 당하는 사람을 구해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오늘의 사회가, 오늘의 교회가 그리고 바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이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람, 그는 그의 눈길을 자기 양심에 비추어 하느님께로 돌리면서, 이기적인 자아에서 탈피하여 이웃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이웃은 곧 또 다른 나이며, 그 이웃은 곧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27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30,10~14 (그 법이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하려고만 하면 )

제2독서 골로 1,15~20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복 음 루가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좋은 이웃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흐뭇하고 자랑스런 일 입니다. 인생은 결코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함께 걸어가며 같이 걸어갑니다. 따라서 이웃이 따뜻할 때 그는 인생이라는 세상의 길을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이웃'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외롭고 힘든 자들,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자들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복음의 내용을 다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는 것은 이웃을 잘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재산만 털린 것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제와 레위가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에겐 하느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본 체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본래는 강도를 만난 자의 원수였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유야 복잡하지만 유배시기에 사마리아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방인과 혼인을 하여 아브라함의 순수한 피를 오염시켰다 하여 유대인들이 그들을 무시하고 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무시했던 자를 살리기 위해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손수 간호를 하며 봉사도 했습니다. 피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데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 있다면 그분은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사실 자기 죄로 인해서 버려진 존재요 '강도를 만난 자'이며 또한 병들고 죽어가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직접 '사마리아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당신의 철천지  원수였는데 그분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이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밉고 속상하다 해도 우리가 받은 은총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누고 우리 자신이 직접 좋은 이웃이 되어 줄 때 하느님은 더 정다운 이웃으로 우리 안에 머물게 되십니다.



'위너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내용은 그랬습니다. 젊었을 때 철인 경기에서 우승을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가 이제는 자신의 큰아들을 통해서 그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는데 그런 과정에서 편애를 합니다. 작은 아들도 있지만 그 아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작은 아들이 바라보면서 아버지에게 어떤 앙심(?)을 품게 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러나 기대했던 우승은 하지 못합니다. 실망은 대단히 컸지만 그러나 다시 또 재도전을 하는데 이때 작은 아들이 남몰래 도전을 합니다. 아버지가 봤을 때 작은 아들은 '싹수가 노란' 아들이었습니다. 별볼일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그러한 수모를 오히려 강인한 훈련으로 대신합니다.



드디어 경기 날이었습니다. 많은 도전자가 있었고 수많은 관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때 마지막 모래판 달리기 경주에서 작은 아들이 일등으로 달리고 있었고 형이 이등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언덕만 올라가면 승리는 작은 아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아주 '따논 당상'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멋진 복수(?)를 하는 찰나였습니다.



작은 아들이 그때 슬쩍 아버지를 보고 또 봅니다. 아버지는 너무도 실망하여 다 틀렸다는 체념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작은 아들이 일부러 넘어집니다. 형이 앞서가게 살짝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넘어진 상태에서 아버지를 다시 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결국 작은 아들은 이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는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작은 아들은 먼 이웃이었지만 작은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가까운 이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멋진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사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이웃이 되어 주길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깁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모두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합시다.











28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7 (다) 사랑으로 가꾼 마음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15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구약 성서 신명기 6장5절과 레위기 19장18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시면서,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예수의 대답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모두 착한 사마리아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예수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만 우리가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의 모상(模像)을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존재이고, 가장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하느님을 가장 가깝게 닮았다는 것입니까?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은 가장 하느님을 가깝게 닳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있고 또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처음 하느님께서 남자를 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동물들도 흙으로 빚어 만드신 후에 아담 앞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아담이 어떻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다 지었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아주 시큰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동물들을 지배할 수는 있지만, 동물들과 어울려 살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동물들이란 인간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와라는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이 하와와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더불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그냥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이지, 머리를 굴려서 모사와 계략을 꾸미고 배불리 먹고 마시고, 집어먹고 집어삼키고 싸우고 죽이고 지배하는 능력을 받았다 해서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짐승들도 이런 짓은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들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7-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압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의 비유 말씀을 보면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은 사람을 두고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는데, 첫번째 사람은 사제이고 두번째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동족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서 정말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고, 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제와 레위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제는 왜 강도 만난 동족을 보고도 피해 가 버렸습니까? 사제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성직자 혹은 신부쯤 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그 사제도 저처럼 입으로는 사랑하라고 지껄이면서도 정작 행동으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사랑이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입으로 지껄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제는 성전에서 설교를 할 때는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정작 죽어 가는 동족을 못 본 체하고 지나쳤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 사제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참으로 역설적입니다만, 그 사제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처지인데 피 흘리는 사람을 만짐으로써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사제의 핑계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사랑이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핑계로 사랑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깨끗한 손을 지닌 그 사제의 제사를 즐겨 받으시겠습니까? 문제는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손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슴입니다. 아무리 손이 깨끗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은 그 사제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사제의 가슴 한구석에서는 강도 만나서 사경을 헤매는 동족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핑계로, 그 소리를 묵살하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만 것이지요. 아마 그 사제가 성전에서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바친다해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성전 안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웃 안에 계시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최후 심판 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인데,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유다인들 중에서 레위인들은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역시 사제와 비슷한 위치에 있으면서 성전에서 봉사하고 성전에서 녹을 받아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레위 사람 역시 강도 만난 동족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도 역시 사제처럼 하느님을 핑계삼아 죽어 가는 동족을 외면했습니다. 부정한 손으로 성전에서 봉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그 레위인이 성경을 모를 리 없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찮다는 생각, 괜한 걱정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이 발동하여 죽어 가는 동족을 도와 주라는 사랑의 목소리를 묵살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묵살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레위인이 아무리 깨끗한 손으로 성전에서 봉사한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사랑을 외면한 핑계들이 묘하게도 하느님을 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모두가 사랑을 외면했기에 하느님마저도 외면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유다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죽어가는 유다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자신의 돈을 들여 그를 치료하도록 부탁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유다인들로부터 경멸당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마리아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마리아 사람도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가슴속에는 하느님의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고 가꾸는 사람, 즉 예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느님을 닮게 되고 하느님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온갖 군더더기와 쓰레기로 덮어 빛나지 못하도록 더럽히는 사람은 차츰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잃고 짐승으로 변하게 됩니다. “내가사제인데 부정을 탈수는 없지. 내가 레위인인데 성전에서 봉사할 손으로 저 피 흘리는 자를 만질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신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사장인데 체통이 있지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 내가 전문가인데 그럴 수는 없지. 그래도 내가 이 사회에서는 명사인데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돈깨나 있는 부자인데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나?” 이런 식으로 온갖 구실을 대면서 사랑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합니다.

  

지위와 명예, 재물과 권력, 안일과 향락이 인간을 인간답게 곧 하느님의 모상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빛을 발하면서 밖으로 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답게 되는 것입니다.

  지모(智謀)와 계략(計略)에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고, 머리 회전이 빨라서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없어서 축재(蓄財)와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그가 따뜻한 가슴을 지니지 못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탐욕에 빠져서 안일과 향락을 누린다 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도 인간이 아닙니다.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 그리고 향락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이 차지하고 많이 누리는 것이 자기를 성취시키고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과 재물로, 권세와 명예로, 전문 지식과 학식으로, 안일과 향락으로 자신을 가꾸고 꾸미려고 애를 씁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꾸미는 동안 사랑의 마음은 더욱더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게 되고 빛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자신을 잃게 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사회에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하는 인간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지위와 명예를 내세우고 돈과 재물로 자신을 치장하고, 전문 지식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차디찬 가슴의 짐승들만 우글거리면서, 서로 잡아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비극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그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 앞에 내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이며,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래서 얼마나 사랑이신 하느님을 닳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 스스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죽어 가는 이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꾸고 키웁시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29         연중 제15주일  루가 10,25-30 (다) 사랑은 사심 없는 관심이다.





 묵상 : 구원을 얻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하는 77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심 없는 관심으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는 것이다.



   과잉인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빚에 쪼들려 집을 나가고, 동생하고 사는 소년가장(중3)은 사람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세상. ‘혼자 사는 노파, 죽은 지 2주만에 시신발견', 이러한 신문기사들은 하나같이 철저히 외롭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들이다.

  시내버스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시선은 밝고 반가운 표정보다는 “야!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는 또 뭐 한다고 세상에 나왔냐?"하는 눈초리들이다. 그뿐이랴? 입학시험장이나 취직시험장에 가보면,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밀어내고 내가 들어간담?"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만,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내 행복의 방해꾼'이 되어버린다. 경쟁사회인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따뜻한 관심으로 서로를 바랄 볼 수 없게 내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길거리에 쌓여있는 싸구려상품 같은 이른바 ‘과잉인간'이다. 이렇게 사람을 귀하게 느끼기 힘든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이러한 각박함은 한층 더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진정한 관심이 아쉬운 실정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반대 되는 것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잘 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래도 나에게 어떤 관심이 있지만,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미워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벽 하나가 천리(千里)'라는 말이 실감난다. 벽 하나를 두고 바로 옆집에 살지만 누가 죽는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이사온 이웃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다 보면 잘못하다가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출퇴근길에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실려 가는 시내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익명성(匿名性)'에서 때로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를 알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까지 다 알고 있던 고향에서는 행동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자유스러웠던가? 그러나 ‘익명성에서 오는 해방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도록 괴로워도 누구하나 찾아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모두가 철저하게 외롭고, 뭔가에 쫏기며, 두려움에 떨고 있음이 사실이다.

  모두가 마음 깊은 데서부터 기쁨과 어려움, 걱정과 희망을 나눌 진정한 관심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다, 그 사랑은 곧 관심임을 알아야한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묻는 율법교사에게,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혹시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 때문이었을까?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러나 이단자로 취급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에게 갖은 정성을 다 기울이며 관심을 쏟는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셨다. 지상 생애 동안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나병환자도 태생소경도 앉은뱅이도 중풍병자도 하혈하던 부인도 치유를 받았고, 율벌학자도 백인대장도 혁명당원도 어부도 강도도 세리도 창녀도 배척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겐 하나같이 큰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끝내는 당신을 십자가 위에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놓으셨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체성사로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마음 속 깊이 갈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주길, 밥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웃으로 다가갈 때, 모든 이는 내게 이웃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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