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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4일 (금) 15:14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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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5주일

        11. 신은근 신부(나)/20                12. 김경식 신부(나)/21

        13. 하재별 신부(나)/22                14. 김영남 신부(나)/24

        15. 김영진 신부(나)/26                16. 박대덕 신부(나)/28

        17. 강길웅 신부(나)/29                18. 이상복 부제(나)/31

        19. 윤 바실리아 수녀(나)/33           20. 교구 주보(나)/34

        21. 선교와 청빈(나)/35               




11             연중 15주일   마르 6,7-13 (나) 열 두 제자의 파견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아무 준비도 하지말라고 하신다. 상식과는 다른 말씀이다. 준비없이 떠났다가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더구나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머물라고 하시는데 떠돌이 광신자로 몰린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제자들은 긴장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누구든 일을 앞두면 준비하게 되어있다. 준비하는 과정에 따라 일의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생략하라 하시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교회 안에도 많은 행사가 있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 왔던가. 귀한 시간을 희생하며 하는 일들이다. 그러나 준비의 목적은 언제나 주님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힘을 모셔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분의 도움은 생각치 않고 인간적 계산만으로 준비하고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주님께서 계실 자리는 소홀히 하면서 외부 장식과 광고에만 치우치고 있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교회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분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 올바른 준비는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주문하셨던 것이다.

그 분은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족하면 청하고 없으면 매달리라는 말씀이 아닐까. 스승은 인간의 본질을 알고 계셨다. 부족해야만 하느님께 눈 돌릴 줄 아는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서투른 준비보다는 조용한 포기를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것이다. 철저한 포기가 완벽한 도움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제자들은 파견되면서 악령을 제어하는 힘을 받는다. 주님께서 주셨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능력이다. 얼마나 놀라운 힘인가.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던 주님께서 주셨으니 그들 또한 놀랐을 것이다. 제자들은 혼신의 노력으로 악의 세력을 몰아내며 하느님을 전파했다. 이것이 선교 활동이다. 그러니 선교엔 힘이 있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악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다. 어떻게 그 힘을 받을 것인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서 주실 때까지 포기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소유가 힘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가질수록 힘이 강해진다고 판단한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선 다르다. 얼마나 많은 소유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물질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찌 그를 힘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악의 세력이 덮치면 그는 무엇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던 사도들이지만 힘이 있었다. 주님께서 버팀목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살아야 한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로 살아야 한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오직 하느님에게만 매인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다.

12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우리의 희망

                                                   김경식 신부



하느님!

당신은 제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당신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중에 지구라는 것을 택하셔서 산과 들과 바다를 만드시고 무생물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로 나누어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두시고 모든 생명체는 제 환경에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물고기는 뭍이나 하늘이 그리워 물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새들은 하늘에서 물 속에 빠지기를 싫어하는데, 사람은 나르기를 말하면 참새만도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도 못하고, 힘은 소보다 못하고, 냄새맡기는 개만도 못하고, 싸움은 사자만도 못하고, 재주는 거미만도 못하며, 부지런하기는 개미만도 못한 주제에 영원히 살기를 원하고 하늘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하늘 나라에서 당신의 아드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엉뚱한 희망에 부채질을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 하시면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고, 그분 자신도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졌습니다.



주 하느님!

제가 무엇인데 이렇게까지 대접하십니까? 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지옥에 빠진들 당신께 손해 될 것 있겠습니까? 지금 살아 있는 사람만도 45억이 넘는다 하는데 아담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태어났다 죽었겠습니까? 이 많은 사람 하나 하나에 당신은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해 주시고 끌어모아 주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만 당신은 사랑이라 하시니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렇기로서니 이 못난 인간들을 데리고 당신의 왕국(그리스도의 몸)을 만들려 하십니까? 이를 위해서 인간의 온갖 수모를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까? 갈대보다 더 허약하게 바람결에 잠깐 당신을 믿은 보상으로 영원한 나라를 허락하십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에페 1,4)하신 것이요, 또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에페 1,10)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하시려고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당신은 이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온갖 성사로 우리를 성숙시키려고 성령까지 보내주셨습니다. 특히 성체성사로 우리를 먹이심은 우리를 당신과 완전히 일치시키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계획이 치밀하여 추호도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에페 1,12)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주신 영광스러운 은총”(에페 1,6)에 감사드릴 뿐이고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에페 1,4) 애쓸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막중한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 세상의 온갖 유혹에 이끌리는 우리를 힘차게 끌어당기시어 날로 발전케 하소서.











13          연중 제 15주일   마르 6,7-13 (나) 조용히 마음의 혁명을

                                                  하재별 신부



우리는 지금 다소곳이 주님의 제단 앞에 앉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수없이 속삭이셨습니다. 때로는 소리도 치시고 때로는 채찍질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반항자인 양 아무런 응답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십시오. 이 거룩한 제단 앞에 나왔을 때에는 그래도 우리의 마음을 열었었지만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는 주님을 외면해 왔음을 느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에페 1,3-5)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으며,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거저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어야 했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무리들과는 다른 처지에 있는 성도였어야 했습니다. 성도 거룩한 백성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 우리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자부합니까?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의 육신생활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묻어버린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리어 그분의 은총을 받고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제단 앞에서 자신들의 마음에 소금을 뿌리겠지만 그러나 사회에 돌아간 그 생활은 또 다시 육신생활의 소용들이 속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옹졸과 이기심 모함 물욕과 쾌락 속에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맡겨 버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생활들이 원만히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도우심마저 구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진심으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고 영원히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십시오. 여러분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어두움 속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데리러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일어나기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빛을 비춰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용기를 갖고 조용히 마음속에 혁명을 일으키십시오. 이제는 여러분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진리에 의해 진리에 맞춰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좋은 것이 나옵니다. 주님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주님을 얻는다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 사람 안에서도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돕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고 구원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



새로운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들을 성화시켜 조용한 혁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하기를 빕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 거룩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14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열두 제자의 파견 - 선교와 청빈

                                                             김영남 신부



지난 달에 있었던 감동적 남북정상회담 이후 현재 ‘북한선교'에 대한 관심은 우리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무척 고조되어 있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침,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어떤 자세를 근본적으로 가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준다.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에 있던 열두 제자가 파견되었느냐는 점이다. 열두 제자는 파견되기 전에 충분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거쳐야 할 준비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참조: 마르 3,14).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어 떠나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놀라운 행적들도 목격하면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배워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의 마음’을 배워야 했다. 즉, ‘예수님께 머물러 있음’은 ‘파견되어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이렇게 당신과 함께 머물러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주시며 파견하신다. 실제로 제자들이 파견되어 가서 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다.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파견된 제자들도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준다”. 제자들이 할 일은 그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 파견하시는 분이 하시던 일이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파견하신” 이유는 우선 서로 돕고 격려할 수 있도록 한다는 실천적 이유도 있겠지만, 신명 19,25에 나오는 것처럼 합법적인 “증언의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이 파견에서 ‘복음선포’가 어느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 더 더구나 ‘독불장군식의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훈화의 말씀을 하시는데, 여행을 하는데 당장 꼭 필요한 지팡이와 신고 있는 신발과 입고 있는 속옷 한 벌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직 ‘주님’과 ‘주님의 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습니다”(마태 8,2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그분으로부터 파견되는 제자들도 물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삶을 각오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신구약성서 전체를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는 파견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이러 저러한 구체적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시는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곧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신의 평안을 위해 이 집 저 집 더 좋은 집을 찾아다니지 말고, 한 집에 겸손하게 머물러 있으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배척받을 경우도 미리 예상하시며 말씀하시는데, “발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는 제자들을 배척하는 그 고을에 속한 것이라면 먼지까지도 떨어버림으로써 그 고을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도 13,51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와 발라바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그들을 배척하는 그 도시를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난다.”



여행에 당장 꼭 필요한 것 외의 다른 것들은 포기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는데서 나온 지침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사람들은 파견하시는 주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 속에 살기 위해서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그런데 청빈의 삶은 파견된 사람들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겸손하게 투신하며 살기 위하여도 필요하다. 청빈의 삶은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불필요한 욕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자유가 앗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같은 분들이 살았던 자유가 아니었던가. 몸이 비대해지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처럼, 너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대하여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져, 남을 위하여 움직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빨리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도 파견된 사람들은 청빈과 나눔의 정신 속에 살 필요가 있다. 이러한 청빈과 나눔의 정신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러 기회에 강조하셨다.



교회의 초창기 역사는 가난과 박해로 점철된 역사였다. 우리 한국교회의 초창기는 더욱 더 그러했다. 가난과 박해 속에서도 의연하게 하느님을 고백하며 살았던 순교자들의 고귀한 피를 밑거름으로 삼아 오늘의 한국교회가 성장했고 그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욕심은 만악(萬惡) 뿌리다.

그러기에 교회가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열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청빈의 정신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한다.





15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소화는 잘 되십니까? 

                                                              김영진 신부



본당의 수녀들이 이동할 때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나는 걸 보면 괜스레 부끄럽다. 몇 번 이동하지는 않았으나 이동할 때마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짐을 나르는 나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또 가끔씩, 나보다 젊은 수녀들이 수도복이 낡아서 짜깁기를 해 입고 있으면서도, 맑고 청순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옷장 속에 옷 전시라도 하는 듯 죽 걸어 놓은 나의 옷들이 나를 한심한 친구라고 비웃는 듯하여 옷장 문을 닫곤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가지려 하고, 더 채우려 하는 나의 욕망은, 나누고 버리지 못하는 덕 없음에서 오는 이유를 알면서도, 현실적인 궤변에 능통한 까닭인지 좀더 수행하고 다시 시작하려 하지 않는다.

껍데기가 너무 두껍게 쌓여 달팽이의 생명이 죽어 가듯이 쌓여 오는 것들 때문에, 내가 죽어 가는데 나는 그것을 의식하려 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으로 창 밖을 본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있더니 연 이틀 계속비가 내리고 있다. 정원을 밝게 해주던 꽃들 중에서 특히 장미꽃들이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음을 본다. 왜 그럴까 생각했지만, 내리는 빗물을 너무 많이 먹은 까닭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남이 가진 것을 다 갖고 싶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필요한 것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을, 일그러진 장미꽃을 보며 배운다. 텅 빈 항아리에서 메아리가 나오듯, 텅 빈 마음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법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을 외치고 다닐 사람이, 어찌하여 가르치고 인도할 지팡이 외에는 두벌 옷도 배낭도 돈도 신발도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장미꽃이 일그러진 까닭은



가진 것 때문에 또, 갖고 싶어하는 것 때문에 밝고 청순함을 잊고 사는 이가 어찌 나 하나 뿐일까. 공룡에 대한 재미있는 학설 하나는, 공룡이 멸망한 것은 소화를 못시켜 멸망했다는 것이다. 공룡은 덩치가 큰 것만큼 소화 기관도 길었기에,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소화기관이 길어 한없이 먹어도 한없이 배고파 먹고, 또 먹고하여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결국 소화불량으로 멸종되어졌다는 것이다. 공룡의 머리는 적은데 몸집이 거대한 것을 보면, 이 학설도 꽤 신빙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현대인을 공룡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머니 속에 한없는 욕망만을 채우려고 하는 이들,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자들을 현대판공룡에 비유해서, 그들의 종말을 점치기도 한다.

그대는 행여 소화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음식 때문에 공룡이 죽어 가듯, 소화할 수 없는 재물과 명예 등으로 죄악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가.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 새벽엔 아예 일찌감치 성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언제나 이 새벽 시간은 나의 소중한 재산이다. 한참만에 내가 꿇고 있는 장궤틀 앞에 차곡이 쌓여 있는 만화 딱지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제 저녁미사에 첫영성체 할 어린이들이 왔다 갔는데, 그 녀석들 중에 어느 한 녀석이 가지고 놀던 딱지를 그냥 두고 간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딱지를 두고 간 아이에 대한 생각과, 내 어릴 때의 모습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도 딱지치기를 왜 많이 했었다. 종이로 만든 딱지를 친구에게서 따다가 닭장 뒤에 쌓아 놓고 스스로 부자임을 느끼며 흐뭇해했다. 어디 그 뿐이랴, 구슬치기는 얼마를 했으며 제기차기, 팽이치기, 땅뺏기 등은 얼마나 많이 했던가. 딱지 한장 더 따먹으려고, 구슬 한 개 더 주머니에 넣으려고, 욕도 하고 우기기도하고, 계략을 쓰기도 했는데, 모양은 다르지만 지금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첫 영성체 할 주일학교 아이가 두고 간 딱지를 보며, 그 녀석도 그랬을 텐데, 두고 간 것을 포기하고 찾으러 오지 않은 걸 보면, 어른이 된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룡을 닮아가는 현대인들



포기하는 연습을 더 충실히 해야겠다, 양떼를 몰고 다니며 무화과를 가꾸던 아모스가 야훼께 잡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야훼의 메아리가 되었듯, 또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도 바오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야훼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나팔수가 되었듯, 나도 털어버릴 것은 과감하게 털어버려, 주님의 말씀이 메아리치게 빈 항아리가 되어야 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소유물이 꽤나 쌓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끼가 많이 긴 것을 보면서도 아무 반성도 아니했던 배부른 선교사의 잠을 깨워야겠다.

























16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양반타령은 내세울 것이 없는 자의 탄식일 뿐이다

                                                       박대덕 신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었던 초세기에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을 옹호했던 교회의 학자중에 유스띠노라는 분은 그의 저서 [제2호교론]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ꡒ사람은 누구나가 ꡐ말씀의 씨앗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성조들이나 예언자들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철학자들도 말씀을 받아들여 결실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지녔다ꡓ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장에서 비그리스도교인도 보편적 구원가능성이 있다는 가히 충격적인 부분 때문에 거의 가려지다시피한 말씀의 씨앗을 잘 가꾸어야 할 각 개인의 책임성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말끔이 씻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구원에 대한 안도감에 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자만적 신원의식의 이면에는 꼭 경계해야 할 점이 있으니,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이라는 특수관계를 가짐으로써 만남의 목적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가야 할 목적실현의 새로운 전기 내지 출발일 뿐이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특수한 관계성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비판을 받고 급기야 예수님으로부터도 심한 질책을 받은 것도 그들이 ꡐ하느님의 백성ꡑ이라는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자의식만 강했지 그 우월적인 지위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책임있는 노력이 더해질 때 비로소 약속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ꡐ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ꡑ를 통해 뿌려진 씨앗은 똑같은 배태능력을 가지지만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사람)의 수용태세에 따라 그 결실은 얼마든지 달라짐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종교적 자존심만 지닌채 양반타령이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지만, 오히려 한알의 결실이라도 더 얻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농부처럼 최선을 다 할 때에는 엄청난 구원약속의 성취가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우월적 지위와 최고의 진리인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그에 걸맞는 노력을 다하여 혹시라도 (교회밖의) 열심한 일꾼들이 추수할 때 정작 한숨이나 내쉬며 구경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말씀의 수혜자로서 최선을 다하자.



17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성직자는 진실하고 가난해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아모 7,12~15 (나의 백성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

제2독서 에페 1,3~14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뽑아 주셨다)

복 음 마르 6,7~13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타락한 종교인, 현실에 편하게 안주하고 있는 종교인은 개혁이나 변화를 싫어하며 또한 시대의 예언자들을 강하게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편안함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권에서나 그에 아부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생기게 마련이며 또한 썩은 정치가들은 그러한 종교인들의 아첨에 함께 편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1독서에서 북쪽의 사제인 아마지야와 남쪽의 예언자인 아모스와의 대결이 나옵니다. 종교인이 종교인과 강하게 부딪치는 것입니다. 아마지야는 북쪽 이스라엘의 사제로서 아마도 베델의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락된 왕의 체제하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도 아닌 남쪽 유다의 이름 없는 촌놈이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모스가 전한 내용은 그렇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망한다. 왕은 칼에 맞아 죽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서 고생한다.' 그러니 아마지야가 가만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쪽 지역은 아마지야 몫인데 남쪽 나라 놈이 자기 국경을 넘어 월권 행위를 하고 있으니 비위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모스가 전하는 내용이 또한 듣기 거북했기 때문에 아마지야가 아모스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종교인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지야가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현세적인 이익과 편리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아모스는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 같지만 그러나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모스의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뜻의 성취를 위해 하느님의 모든 것을 이용하려는 속셈이 있습니다. 권력에 굽신거리고 재물에 타협하며 그리고 물질적인 이익만 가능하다면 가차없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세상에서 기세를 올리고 큰소리치며 떵떵거리게 됩니다. 마치 아마지야처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길은 결코 쉬운 직책이 아닙니다. 아모스도 본래는 자기가 원해서 예언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 직책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아모스뿐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이 그랬습니다. 아무도 그 고달픈 박해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붙들리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가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용기있게 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은 사제와 신자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돈도 지니지 말고 신발도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 다시 말해 물건과 재물에 탐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세속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사목자가 가진 것이 많으면 사목직 자체가 무겁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굉장한 분심거리요 방해가 됩니다. 신부가 결혼을 안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며, 청빈을 강조하는 것도 그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사실 재물은 바닷물과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마르고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스스로의 감옥에 갇혀 불행하게 됩니다.



언젠가 카메라를 하나 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물건 하나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누가 그 카메라를 훔치러 오는 것 같아 불안했으며 미사를 드릴 때도 누가 사제관에 들어가지 않나 해서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도무지 자나깨나 그 카메라 때문에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카메라를 누군가에게 주고 나자 인생이 개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참으로 무소유의 자유를 실감나게 체험했습니다.



사제는 가난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또 그래야 삶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며 또한 삶이 깨끗할 때 진정한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예언자는 자기 이익이나 편리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만일에 그렇게 묶인다면 그는 예언자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이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지금 진실한 예언자요 사제인 성직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들은 바로 그들의 올바른 목소리와 가난한 삶입니다. 세상은 지금 물질적으로 너무 풍요로워졌으나 정신적인 가난에 허덕이고 있으며 사회의 혼탁한 현실에 대한 진실한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 중요한 임무가 성직자들의 몫입니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고 가난하게 사는 성직자들이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18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열 두 제자의 파견 

                                                        이상복 부제



모대학의 졸업식에서 학장이 졸업생들에게 마지막으로 조용하게 그러나 엄숙하게 말하기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나의 친자식처럼 나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수년동안 가르쳐 왔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회에 나가서 그 동안 열심히 연마한 학문과 정열을 사회를 위해서 바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떠나는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희망을 가득 안고 나가는 사회가 여러분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부모님의 품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항상 사랑과 인내로써 무장을 하고 여러분의 인생, 희망이 가득찬 삶을 계획하시기를 당부합니다.”라고 졸업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은 언제나 어떤 졸업식 같은 곳에서 자주 듣는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이 평범한 말 속에 우리는 깊은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신의 제자들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당신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기시면서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실 때 주님은 그들이 해야할 일들과 준비해야 할 일들을 소상하게 알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는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상한 마음씨는 모학장의 졸업생에게 당부한 진정한 교육자의 마음과 같이, 세상에서 활동할 제자들에게 구원활동을 함에 있어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 둘씩 짝을 지어 그들을 파견하신 것은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이 복음의 일치된 진실성을 들어내게 하시고 간편하게 그리고 가벼운 몸가짐으로 오로지 맡은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현실의 물질적 차원을 넘어선 영원의 세계에 계시는 주님을 증언하도록 그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들의 목적이 오직 세상의 구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증거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은 세례로써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들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우리 자신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우리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처럼 직접 교회에 몸을 두고 하는 것 뿐 아니라, 평신도로써 자기가 소속된 지역 안에서 신자다운 생활로 그리스도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자기가 속한 곳에서 행동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자의 행동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뜻으로 행함을 말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하는 것도 우정이나 단순한 이웃이라는 이유로써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의미인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 생활에서 신자들이 사회생활을 하기에도 벅찬 형편으로 자기를 봉사하는 생활이란 무척 어렵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에 아주 어려움을 느낍니다. 더구나 복잡하고 자기만을 찾는 현실 세상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어떤 때에는 불가능하게 느껴지고 또 그리스도의 말씀에 외면하고 조소하며 심지어는 박해까지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모범으로 모든 것을 참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를 거부하는 자에게 우리가 무기력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힘차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로마인들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십자가의 정사가 비참하게 보였고 무기력한 것으로 보였을지라도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악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희망을 안고 우리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도록 우리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걱정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랑하겠다는 신앙의 맹세로 노력할 때,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복음선포의 사명을 다할 것을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주 예수께 약속 드리며 이 제사를 정성을 다하여 바칩시다. 아멘.

























19         연중 제 15주일   마르 6,7-13 (나) 내가 갖고 있는 지팡이

윤 바실리아 수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될까요? 음식, 옷, 집, 사랑, 일, 건강 그리고 잠…. 생각해보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1년에 한 번 제가 갖고 있는 물건을 다 꺼내놓고 정리해 봅니다. 저희들은 공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공동 물건을 제외한 개인 물건만 갖고 있는데도 이것저것 종류가 제법 많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늘어난 짐도 있지만 제 욕심 때문에 불어난 짐들을 보고 있노라면 혼자 있어도 부끄러워집니다.

제게 꼭 필요한 물건 목록을 만들어서 그 목록대로 가방에 넣어보기도 합니다. 가방 하나를 넘기지 않으려고 옷가지는 돌돌 말고, 다른 것들은 꼭꼭 눌러서 차곡차곡 넣어봅니다.

욕심 많고 절제가 부족한 제 자신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이렇게나마 의지적으로 자신을 극복해 보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해마다 이 작업을 하는 것은 좀더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갖고 있는 물건의 주변정리, 만나는 사람들과의 주변정리, 이렇게 자신에 대한 주변정리가 깨끗하게 될 때, 비로소 하느님과의 만남도 시작되고 투명하게 그분을 제 마음 안에 모실 수 있을 겁니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정말 그리스도의 향기를 자아낼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마르 6,7-13)을 보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먹을 것, 입을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굳이 지팡이를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성서에서 잊을 수 없는 지팡이는 바로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그가 가진 것이라곤 지팡이 밖에 없었습니다(출애 4,3). 양치기에게 있어선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도구로 삼아 당신 사랑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또 그 지팡이가 잘못 쓰여졌을 땐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민수 20,12).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을 때 선교의 사명도 함께 받았습니다. 평범한 말과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명을 완수하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굉장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을 귀하게 보아주시고 또 귀하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건강, 지식, 재능, 소유 등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내가 갖고 있는 지팡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기꺼이 도구로 쓰실 나의 지팡이는 무엇일까요? 그 지팡이를 선용하면 사랑의 역사가 펼쳐지고 그 지팡이를 남용하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지팡이 아닌 것을 지팡이인 양 착각하고 그것을 앞세우며 살아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20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

교구 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교육시키신 다음 파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선포와 구원행위에 그들을 동참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십니다(마르 3,13-19).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를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시고 구원을 이룩하시겠다는 뜻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은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함으로써 그들이 전하는 복음선포가 참되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신명 19,15).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면서 전도여행에 대한 훈시를 하십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지팡이와 신발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속옷도 두 벌을 끼어 입지 말라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부유한 가정을 찾아 이집저집 옮겨다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00-110년경에 씌어진 디다케 11,3-6에도 떠돌이 전도사들에 관한 훈시가 나옵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관해서는 복음의 지침에 따라 이렇게들 하시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거짓 예언자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일차적으로 성직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는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떨쳐버리고 오직 순수한 마음 바른 몸가짐으로 전도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소유의 자세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활양식에 담겨 있는 그 정신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직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양식을 목표로 삼고 힘닿는 데까지 지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자세와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의 내용일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히 성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교우들이 복음을 따라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21              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나) 선교와 청빈



지난달에 있었던 감동적 남북정상회담 이후 현재 「북한선교」에 대한 관심은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무척 고조되어 있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침,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어떤 자세를 근본적으로 가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준다.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상태에 있던 열두 제자가 파견되었느냐는  점이다. 열두 제자는 파견되기 전에 충분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거쳐야 할 준비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참조: 마르 3,17.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어 떠나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놀라운 행적들도 목격하면서, 그분이 누구 신지를 배워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사랑의 마음」을 배워야 했다. 즉,「예수님께 머물러 있음」은 「파견되어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이렇게 당신과 함께 머물러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주시며 파견하신다. 실제로 제자들이 파견되어 가서 하는 일은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다.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파견된 제자들도 「회개하라」고 가르치며, 「마귀들을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준다」.제자들이 할 일은 그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 파견하시는 분이 하시던 일이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파견하실 이유는, 우선 서로 돕고 격려할 수 있도록 한다는 실천적 이유도 있겠지만, 신명 19,25에 나오는 것처럼 합법적인「증언의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이 파견에서「복음선포」가 어느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 더 더구나 「독불장군식의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훈화의 말씀을 하시는데, 여행을 하는데 당장 꼭 필요한 지팡이와 신고 있는 신발과 입고 있는 속옷 한 벌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오직「주님」과「주님의 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습니다」(마태 8,2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그분으로부터 파견되는 제자들도 물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삶을 각오하라는 말씀이다. 사실, 신구약성서 전체를 일관하여 흐르고있는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는, 파견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할 점은, 이러 저러한 구체적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시는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곧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어디서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고장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신의 평안을 위해, 이 집 저 집 더 좋은 집을 찾아다니지 말고, 한집에 겸손하게 머물러 있으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배척받을 경우도 미리 예상하시며 말씀하시는데, 「발에서 먼지를 털어 내는 행위」는 제자들을 배척하는 그 고을에 속한 것이라면, 먼지까지도 떨어버림으로써 그 고을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도 13,51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와 발라바는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그들을 배척하는 그 도시를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난다.」 여행에 당장 꼭 필요한 것 외의 다른 것들은 포기하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는데서 나온 지침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사람들은, 파견하시는 주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 속에 살기 위해서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그런데 청빈의 삶은 파견된 사람들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겸손하게 투신하며 살기 위하여도 필요하다. 청빈의 삶은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고. 불필요한 욕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자유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들이 살았던 자유가 아니었던가. 몸이 비대해지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처럼, 너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대하여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져, 남을 위하여 움직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빨리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도 파견된 사람들은 청빈과 나눔의 정신 속에 살 필요가 있다. 이러한 청빈과 나눔의 정신에 대하여 예수님은 여러 기회에 강조하셨다.



  교회의 초창기 역사는 가난과 박해로 점철된 역사였다. 우리 한국교회의 초창기는 더욱 더 그러했다. 가난과 박해 속에서도 의연하게 하느님을 고백하며 살았던 순교자들의 고귀한 피를 밑거름으로 삼아 오늘의 한국교회가 성장했고 그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욕심은 만악(萬惡)의 뿌리다. 그러기에 교회가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고 열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청빈의 정신을 결코 잃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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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1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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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1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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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말씀연구 2008-06-23 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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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성민호 신부 2008-09-06 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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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안드레아 신부 2008-08-12 2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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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교황님은 누구십니까? 2008-06-27 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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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임승욱 요한금구 2008-06-23 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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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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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기원미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6월 25일 2008-06-20 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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