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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대축일 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7월 4일 (금) 15:02
분 류 대축일 강론
ㆍ추천: 0  ㆍ조회: 5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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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1. 이기정 신부/ 2              2. 최기산 신부/ 4

        3. 유영봉 신부/ 6               4. 유영봉 신부/ 8

        5. 강영구 신부/ 10             6. 김영진 신부/ 14

        7. 성민호 신부/ 16             8. 김한기 신부/ 19

        9. 박종근 신부/ 20             10. 한종훈 신부/ 21

        11. 허영엽 신부/ 23            12. 박지환 신부/ 25

        13. 교구주보/ 27                14. 윤해영 수녀/ 28

        15. 최인호 작가/ 29            16. 믿음과 희망/ 30

        17. 믿음의 생활이/ 32          18. 너희는 나 때문에/ 34

        19. 흉상 복원/ 3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죽어서 이루어진 생명의 큰 강

                                                                이기정 신부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하면, 한마디로 “아깝다! 너무나 아까워 억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우리나라가 요모양이 된 것은 그때 김대건 신부님을 권력층 조상들이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한탄이 절로 나옵니다.

일본에게 36년간 나라를 짓밟혔던 치욕의 날들은 민족의 역사적인 비극입니다. 일제로부터 받은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이어서 6․25 같은 동족상잔의 고난도 함께 덤으로 받았습니다. 어쩜 이런 역사가, 김대건 신부님 같은 분을 처형한 벌의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신부님의 참수 역사

이 마을 저 마을 마실 다니던 시절에, 고작해야 과거보러 한양만 가도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던 시절이었습니다. 암담한 우물 속의 개구리들같이 바깥세상은 꿈에도 상상치 못하던 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약 1/3을 둘러본 젊은 김대건 신부님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산수 좋은 곳의 ‘정자에서 술상 차리고, 가야금을 뜯으며, 한시 몇 수를 읊으면 무척 유식한 양반으로 생각하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에 라틴어, 희랍어, 불어, 영어, 중국어를 할 줄 알고, 쓸 줄도 알던 유식한 청년이 김대건 신부님이었습니다.

우주와 세상의 크기를 알았고, 나라들과 조국을 알았고, 문화들과 우리의 생활을 알고, 깊은 배움에 흠뻑 젖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라들을 넘나들며 살았고, 문화들로 호흡을 이어가며 학문 익히기에 한 청춘을 바쳤으니, 누구보다도 더 큰 인물이었습니다.

  

잡신을 불러서 술을 대접하고, 허리를 굽혀가며 모시는가 하면, 도깨비에게는 두 손 비벼대며 흥정하고, 헛 꿈속에 몽롱하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에 김대건 신부님은 태초의 원인을 깨닫고, 삶과 죽음이 무엇이고,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영원한 진리에 입각하여 한 신념을 터득하였으니, 그보다 더 큰 위인이, 당시에 이 나라에 또 등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입국 후 만 일 년만에, 그를 처참히 죽여버리고 말았다니, 이야말로 천추의 통곡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1846년 10휠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바로 이 청년의 목을 내려치도록 한 패거리들을 천하에 고발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눈이 어두운 권력자들로서 사색당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주도세력에 아부 중상 모략을 일삼는 치졸한 인간들이었습니다.

  

16살 젊은 나이에 충청도에서부터 육로로 평양을 거쳐, 변문을 통과 중국대륙을 훑어 내려가, 남단의 섬 마카오까지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여행한 용감한 젊은이었습니다.

8년 후 부제품을 받고, 중국을 거쳐 8년 전의 길을 되돌아 걸었습니다. 허기와 지침 속에 녹아버릴 듯한 육신을 이끌며, 고국 땅에 도착한 후 쉬지도 못하고, 3달만에 다시 중국으로 목선을 타고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겁도 없이 항해하여 기적적으로 중국에 도달한, 장한 김대건이었습니다.



1845년 8월17일 서품을 받고, 14일 만에 중국을 떠나 이 땅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장하다는 말을 147년이 지난 오늘도 새삼 외치고 싶습니다.



권력자들, 정치인들을 고발함

권력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면서 판단을 하게 되니, 그 잘못된 판단으로 끼치는 손해가 전 민족에게 이토록 대대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뼈 속이 쓰리도록 아픈 상처로 흘러 내려오는 이 고통이, 그들이 저지른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당하는 이 비참한 고통에 대해, 책임을 질 자들은 뼈만 남아 지금 호화무덤에 누워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백골이 된 후, 그 잘못의 벌을 우리는 참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성서가 이미 수천년 전인데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즈가리아는 죽으면서 외쳤다. 야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5,22후반)는 말씀이, 우리의 역사에 적중한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개척해 놓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때 그들의 무식 한 정치형식으로부터 이제 겨우 15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아직 그 무지의 잘못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 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제대로 깨어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더 필요한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인간들의 판단능력은, 아예 진화를 안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어느 시대 어느 정치인들이나 모두가 변함 없이 무지스럽게 판단하고 살고 있는지 모 릅니다. 예수의 시대에도 어쨌든 그랬던 것을 보면,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인간들의 모습을 지난 주의 성서 말씀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라(루가 9,60)"는 내용을 보면, 정치인들을 ‘죽은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풀이를 해보고 싶습니다. 권력 앞에 죽고, 진리 앞에 눈이 멀었고, 정의 앞에 벙어리인 자들은, 사실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고귀한 인생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그 짧은 고귀한 인생은, 살아서도 죽어 있는 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류에게 빛을 발하는 성인이 받는 조명입니다. 바로 그 조명을 성서가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2독서 로마서 5장이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로마 5,1-2).

  

김대건 신부님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천상에서 이어가는 영원한 기쁨의 생명이야 우리가 느끼지 못하니 이는 생략하더라도, 그의 지상 생명력은 점점 넓고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영세를 받는 많은 남자들이, 김대건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생명을 조금씩 이어가는 것입니다. 단체나 집이나, 성상이나, 그림 등으로 김대건의 생명은 점차 커지고 넓어지고만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라는 작은 샘물이, 이제는 큰 강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저들 권력있는 박해자들은 죽어서 영 죽어버렸으나, 김대건 신부님은 죽어서 더욱 살아나신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는 바로 이렇게 우리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오늘의 의미

주님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자는, 최후 진화 상태로 도달할 수 있는 생명이겠고, 주님을 외면한 자들은, 진화 없는 답보상태에 있는 생명이랄 수 있습니다.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실력으로도, 힘으로도, 차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처럼 생명을 내걸기에,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천주교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치기에, 하자 없는 천주교입니다. 이러한 하자 없는 천주교를 다니고 있는 교우들도 자기 생명의 가치를 매일매일 드높이며 사는 이가 많습니다. 이제는 우리 한국 신자들이 치명 성인들인 선조들의 진리를 따르던 드높은 뜻을 되살리고 넓혀가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명석한 분이시고 용기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사회에서도 주님을 제대로 찾았으니 말입니다.











2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김대건 신부의 믿음과 희망                                                                  최기산 신부

 

희광이가 휘두른 칼날 아래로 선혈이 치솟더니 젊은이의 목이 떨어졌다. 한강 새남터 백사장은 어느새 피로 물들고 피를 본 희광이의 눈은 미친 사람처럼 광기가 가득한 채,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켰다. 목이 떨어진 젊은이의 이름은 김대건이었다. 그의 죄목은 국법을 어기고 국교인 유교가 아닌 서양종교를 신봉했다는 것이었다. 가여운 젊은이!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던들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을 잘못 만난 탓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는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ꡒ나는 하느님을 배반하오ꡓ 이 한마디를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생애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청도 내포지방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김진후였는데 그 지방의 관료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김진후는 50세에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고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14년 2월20일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미 할아버지부터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은 고 우술라와 결혼하여 솔뫼에서 살다가 1839년 9월26일 체포되어 순교했다.



할아버지가 순교하였으니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게 살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남편을 잃은 우술라는 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골배마실이라는 동네로 이사갔다. 이사라기보다는 친척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한 셈인데 천주학쟁이 과부를 누가 좋아했겠는가? 천덕꾸러기로 살아갔을 것이다. 골배마실을 방문한 모방 신부는 15세의 소년 김대건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그를 신학생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김대건 신부는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어린 학생들은 얼마나 고향생각을 했을까? 음식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해, 사랑하는 친구 최방제는 병마와 싸우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얼마나 친구를 얼싸안고 울었을까?



1844년 오랜 각고 끝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9년의 외국생활의 지친 삶을 잠시 접고 조선으로 돌아와 국내 상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기간동안 김대건 신부는 어머니를 만나고자 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거지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다음해인 1845년 8월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사제가 된 뒤 서둘러 조선에 들어와서 전도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박해가 너무 심했다. 그는 혼자 몸으로는 도저히 성무집행을 다할 수 없어 중국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청하러 가다가 1846년 6월5일 순위도 앞에서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여러 외국어와 지리에 대해서도 능통하여 감옥에 있으면서도 지도를 그려주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아까워한 정부는 좋은 집을 주겠다, 높은 지위를 주겠다, 예쁜 부인을 맞게 하겠다 등등의 회유를 해보았으나 도저히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처형하기로 결심하였다.



김 신부는 그해 9월16일 한강 백사장 지금의 새남터 상당터에서 군문효수라는 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군문효수란 목을 쳐서 장대 높이 달아놓는 것으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다시는 천주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위 본때를 보이는 형집행이었다.



그의 사상 그는 죽기 전에 ꡒ나의 영원한 생명을 이제 시작합니다ꡓ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ꡒ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ꡓ(필립비 1,21)라는 말씀이 언제나 가슴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 간 교훈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기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 우리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를 닮는 사제를 원한다.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제를 원한다. 그런 사제가 나오기 위해서는 가문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아버지도 순교하였고 자식을 위해서 거지처럼 살아갔지만 언제나 기도해주었을 어머니의 굳은 믿음이 김대건 신부를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죽어서 백사장에 아무렇게나 묻혀있었을 그를 신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비병에게 술을 사주고 잠이 든 뒤 시신을 파내어 미리내까지 메고 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그런 신도들이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같은 훌륭한 사제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신도들은 영적으로 꽉 찬 신부를 원하고 신부들은 그야말로 순종 잘하고 열심한 신자, 헌신적인 신자를 찾고 있다.



과연 내가 이 시대에 한강 백사장에 묻힌다면 그 누가 썩은 내 육체를 거두어 등에 메고 150리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 김대건 신부보다 곱절의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그가 깨달았던 심오한 신앙의 의미를 아직도 도반으로서 깨달아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ꡒ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ꡓ 김대건 신부는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린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뜨거운 사람인가?











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순교는 사랑의 증거이다.

                                                          유영봉 신부



묵상 :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신부님의 말씀이다. ‘순교'의 본 의미는 ’증거'이다. 성인은 하느님을 우리의 임자로, 주님으로 믿었기에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생명을 바쳐 증거하였다.



순교, 바보들의 행진인가?



어떤 본당에서 순교자 성월을 맞아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순교 성인들에 대한 특별강론이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김대건 성인의 생애를 설명해 갔다. '1821.8.21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출생, 1836 마카오로 유학, 1845.8.17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 선교사 입국의 길을 트려다 1846,6.5 순위도에서 체포, 서양학문을 익힌 최초의 한국인, 외국어(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 조정에서는 그 재주와 인품이 아까워 죽이지 않으려고 회유도 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킴, 1846.9.16 서품된 지 1년 1개월만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칼 아래 순교' 강론은 차츰 열기를 더해갔다.

  

그런데 갑자기 고1 학생이 손을 번쩍 돌고는, "신부님, 저는 솔직히 김대건 신부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속이 답답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사제가 되어가지고, 사목자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신부된 지 1년만에 꼭 그렇게 순교를 해야 했는지? 배교(背敎)하는 척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였다,

이러다 보니 '순교자 현양이 아니라, '순교자 규탄대회'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X(신)세대다운 약삭빠르고 영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의 순교자에 대한 생각이 이 학생들의 태도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은 ‘돈 많고 명(命) 짧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에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무리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믿음의 소유자였다.



신부님은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그를 알아보았으되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하였다, ‘임자'라는 신부님의 표현은,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라고 불렀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임자'란 '주님'과 같은 뜻으로,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만물의 주인이며, 아버지라는 신앙의 고백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임자요, 주인'임을 알았다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 김대건 신부님의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바로 25세의 젊은 사제 김대건을 순교의 길로 용감히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희망과 사랑의 소유자였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6월5일 체포된 후 6월21일 서울 포도청에 갇힌 후, 7월19일까지 40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참수되기 전, 8월29일 페레올 주교와 신자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死後)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인이 되십시오."



이 마지막 편지를 보면

김 신부님은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을 지닌 분이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가리야는 죽으면서 "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4,22)고 외친다. 김 신부님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에서 '임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한 모든 고통을 갚아주실 것을 확신하셨고,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꽉 차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과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신부님의 '임자'께 대한 믿음은 신자들에게 대한 완전한 헌신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1844떤 부제품을 받기 전 조선 입국의 길을 뚫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고 장백산을 넘으면서 2000리가 넘는 길을 혹한 속에서 헤매야 했다. 그리고 1845떤 항해 경험이 전혀 없는 11명의 신자와 함께 손수 만든 작은 배를 타고, 신부와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4월30일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하기까지 죽음과 맞선 항해를 하셨다. 김 신부님은 참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다,



16세에 부모를 떠나 10년만에 사제가 되셨고, 1년 남짓 사제로 살다가 25세의 젊은 생명을 산 제물로 바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꽃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모든 사제들의 주보인 김 신부님은 사제들을 끊임없이 회개에로 부르시는 은총의 샘이라 할 수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저희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유영봉 신부



묵상 : 선조들은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신앙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키우며 지켰다.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확신이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이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스스로 깨달은 진리

18세기 주자학(朱子學)에 젖어 있던 조선사회는 갖가지 병폐와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사조를 갈망하던 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의 서적들을 통해 신앙에 눈뜨게 되었고, 단순히 학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이레, 열 나흘, 스무-하루 등 날짜를 정해놓고, 그 날은 육신 일을 파(罷)하고. 상제(上帝)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나름대로 주일을 지키며 살았다, 그들은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전념하였다.



'하느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반상(班常)의 신분 차이가 뚜렷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슴 벅찬 깨달음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84떤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50여년을 중국인 사제 두분이 잠시 사목했을 뿐,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일으키고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켜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순교는 믿음의 증거다

'순교자(martyr)'는 원래 '증거자'란 뜻이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00여년 동안 1만여명의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신부의 부친 최영환(프란치스코)은 1839년 7월 아들을 유학시킨 사학죄인으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며, 100대가 넘는 곤장을 두번 이상 맞고, 고문을 당한 끝에 장독(丈毒)으로 9윌12일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최 신부의 동생들인 5명의 자녀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12세인 둘째 최희정(야고보), 셋째 최선정(안드레아), 넷째 최우정(바실리오), 다섯째 최신정(델네시포로)은 나이가 어려 석방되었고, 세 살짜리 젖먹이(최 스테파노)만 옥에 남았다. 그런데 굶주림과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유도(乳道)가 막혀 젖이 나지 않아, 젖먹이가 어머니 무릎에서 굶어죽기에 이르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기 자녀가 무릎 위에서 굶어죽자, 이 마리아는 한때 관

장에게 배교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감중인 여러 교우들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금 순교의 뜻을 굳힐 수 있었다,

옥에서 풀려 나온 둘째 ‘최 야고보'는 동생들과 함께 푼푼이 동냥한 돈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옥중의 어머니를 면회하고, 동생들을 잘 돌볼 것을 약속하며 격려하였다. 순교의 때가 가까이 오자, 어머니 목을 벨 희광이를 찾아가 구걸한 돈을 건네고, 어머니의 모습을 상세히 일러주면서 ’칼을 잘 갈아 어머니가 고통을 많이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한칼에 목을 베어주도록 부탁하였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취미생활인가? 신앙생활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놓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선조들에 비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차라리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 시대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자기 진리나 신념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권에 눈먼 철새 정치인,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를 찬양하기에 바쁜 매스컴, 실직한 남편과 자녀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자들이 보여주는 세태는, 신앙을 위해 칼 앞에 목을 내민 순교자들의 대열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비웃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자는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다'든가,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성당에 나올 신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와 순교선열들과의 근본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고,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세계, 즉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도 없다.

이 세상이 전부인 이들이 어떻게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는가? 구제금융 시기를 맞아 빈부격차가 점점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듯이, 실직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을, 내일처럼 지극 정성으로 함께 나누어보자. 그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체험토록 하자, 그리하여 죽음도 두렵지 않는 참 믿음을 가꾸도록 하자.











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교우들, 보아라

                                                                   강영구 신부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대축일입니다. 한국 최초의 신부였으며 25살의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제단에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가 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축일을 맞이하여, 그분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8월 21일에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김운조 때부터 천주교에 귀의한, 4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가문이었습니다. 가족들 중에서 누구보다 열심한 어머니 고 울술라의 신앙 교육을 받고 자라난 김대건은 15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의 남단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이었습니다. 1845년 8월 17일에 26살의 나이에 중국의 김가항에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기까지의 11년 세월은 그에게 형극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가 마카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 김재준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였고, 어머니는 떠돌이가 되는 비극이 벌어졌지만, 그는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을 때, 한국 교회는 처절한 박해 속에서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교회는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1846년 5월 12일 그가 강화도 앞 바다의 섬 순위도에서 체포당했을 당시, 그는 함께 유학 길에 올랐던 최양업 토마 부제와 프랑스인 메스트르 이 신부를 맞이할 준비에 한창 바빴을 때입니다.

  

그는 신부가 된 지 9개월, 삼엄한 국경을 뚫고 남 몰래 조선에 숨어 들어온 지 7개월 만에 체포당한 것입니다. 라틴어, 불어, 포르투갈어, 중국어를 구사하셨고 한국인 최초로 서양 학문을 공부한 김대건 신부를 조정에서는 큰 학자로 알았고 그를 배교시켜 활용할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 신부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26세의 꽃다운 젊음을 하느님의 제단에 바쳤던 것입니다.

  

이제 김대건 신부가 죽음을 앞두고,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본래는 고문체(古文體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만, 쉬운 요즘 말로 고쳤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 보시오! 우리 형제들이여, 생각하고 생각하시오! 한 처음, 천주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내셨습니다. 그 목적과 의향이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시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들이 많습니다. 이 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우리를 지어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태어나도 쓸데없습니다.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의 은총으로 세례를 받아서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 이름이 귀하기는 하나,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귀한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그리되면 입교한 보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은총을 배반하는 것이니, 주님의 은총만 입고 죄를 지으면, 태어나지 아니함만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때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를 무릅쓰고 밭을 가꿉니다. 추수 때가 되어 곡식이 잘 영글어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되면, 여름에 땀 흘린 수고를 잊고 기뻐하며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이 영글지 않고 빈 대와 껄질만 있으면, 여름에 땀 흘려 거름 주며, 공들여 수고한 것을 생각하며 그 밭을 박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이 세상을 밭으로 삼으시고, 우리 인간을 벼로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주시고, 당신의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서 열매 맺도록 하시니, 심판 날이 되어 은총을 받아 열매 맺는 자 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누릴 것이요,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녀답지 못하여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알아들으시오. 우리 주 예수 세상에 오시어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교회를 세우시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 풍속이 아무리 교회를 박해하여 쓰러뜨리려고 하나 능히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 시대 때부터 교회가 무수한 박해를 받았으나 자라나서 오늘에 이르니, 이제 조선에 교회가 들어온 지 50, 60년에 여러 차례 혹독한 박해를 받았으나 여전히 교회는 살아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극심한 박해가 일어나 여러 교우들과 나까지도 잡힌 몸이 되어 환난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애통한 마음이 없으며, 인간의 정으로 이별함이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천주께서 우리 인간들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모두 세어 두셨고, 그분의 허락이 없이는 빠져 떨어지는 일이 없다 하시니, 지금 당하고 있는 이 혹독한 박해도 주님의 뜻이 아니겠소? 그러니 주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온 마음으로 우리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세속과 악마를 싸워 이깁시다.

  

세상이 어지러우니 마음을 늦추지 말고, 오히려 온 힘과 노력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무기를 갖추고 전장에 나감같이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부디 서로 사랑하기를 잊지 말고 서로 돕고 의지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이 환난을 거두어 주실 때를 기다리시오. 혹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하시오.



여기 함께 잡혀 온20명의 교우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내고 있으니, 설혹 죽게 된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이 형제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 말고 돌보아 주시오.

할말이 참으로 많으나 도저히 지필로 다 쓸 수 없어, 이만 붓을 놓으려 합니다.

우리는 멀지 않아 사형장으로 끌려갈 터이니, 부디 착히 살아 천국에서 만납시다.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교우들이여, 이런 난세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려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대적하고, 박해를 참아 받아 주님께

영광을 드려 천국을 얻도록 하시오.



지금 당하고 있는 박해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이니, 세속과 마귀를 거슬러 싸워 공덕을 크게 쌓을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짓눌려 항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구원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시오. 오히려 지난날의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성교회에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이며 자녀임을 증거하시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 되어 서로 도와 주고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시오. 할말이 무수히 많지만 거처가 마땅치 못하여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모든 교우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한 행복을 함께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을 껴안고 사랑의 입맞춤을 보냅니다.

                                                             부감목   김 안드레아



추신 :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의 뜻하시는 바며, 모든 일들이 주님께서 상 주시며 벌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박해도 역시 천주께서 허락하신 바니, 끝까지 참아 받아 주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루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구하시오. 내가 죽는 것이 어찌 인간의 육정으로 가슴이 아프지 않으며, 여러분의 구원 대사에 거리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여러분에게 나보다 훨씬 훌륭한 목자를 보내 주실 것이니, 부디 슬퍼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여,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후에 하느님 대전에서 서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랍니다.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김 신부 사정 정표 (정음사, 김대건의 서한, 272-275쪽에서).”



김대건 신부님이 쓰신 편지들은 모두 22통입니다. 20통의 편지는 라틴어로 쓰셨고, 방금 여러분이 들으신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국문으로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통은 조선의 국경을 탐험하시면서 그 보고서를 쓰신 것인데,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와 교우들에 대한 김대건 신부님의 애정을 엿보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 남긴 업적은 이렇다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사목을 하실만한 시간 여유도 없이 체포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김대건 신부가 체포당하지 않고 사목활동을 하셨더라면 큰 위업을 남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살아서 큰일을 하신 분이 아니라, 죽어서 큰일을 하신 분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살아 생전에 큰일을 하였으나 죽은 후에 곧장 잊혀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살아 생전에는 별로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죽어서 큰일을 하여 그 이름이 대대로 남고, 또 만인의 공경을 받는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살아서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일은, 스물여섯의 청춘을 하느님 제단에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어찌 김대건 신부인들 삶에 대한 미련이 없었겠습니까? 더구나 그분이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 나왔을 때는 25살의 피끓는 청년이었습니다. 15살 소년시절에 고국을 떠나서 신부가 되기까지 11년간의 그 고난의 세월이 어찌 아깝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이 세상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으시고 한국 교회의 제단에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교회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피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세속적이고 악마적인 풍조가 교회를 위협하고 있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뿌리부터 썩게 하고 있습니다.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후예답게 오늘 우리도 순교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여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이 순교 성인 김대건 신부를 모범 삼아 훌륭한 사목자들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김영진 신부



시카고대학 총장이었던 하퍼 박사가 1903년 입학생들에게 행한 연설은, 가장 짧은 명연설로 유명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어른의 길로 출발합니다. 인간은 25세가 되면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하며, 30세에는 자기 자신의 인생철학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는 20대 초반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아,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철학대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짧은 연설이, 젊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퍼 박사의 말을 성 김대건 신부께서 들으셨다면 “인생은 한 순간이 소중한 것인데, 어찌 중요한 것을 깨닫는데 25년이나 걸려야 하고, 자기 인생철학에 대한 확립을 30세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하고 한 말씀 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대건 신부는 15세 나이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아 신학공부를 하러 만주와 중국 대륙을 거쳐 마카오, 필리핀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25세의 나이에 자기 인생철학의 결론을 순교라는 죽음으로써 맺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10대 후반 아니 20대까지만 해도 나이 사십을 넘고, 오십, 육십이 된 이들을 보면, ‘저분들은 저 나이가 들도록 무엇을 했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어찌 세월들을 마냥 흘려 보냈나!'하는 생각에,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잘못하면 나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저렇게 될지도 몰라'하며, 새 결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어디 가서 강론할 기회가 되면 ‘인생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링컨 대통령의 말을 되새기며, 잘난 척 떠들어대기도 수없이 했다. 그러나 이제 젊은 시절 내가 손가락질하던 나이에 들고 보니 ‘아! 이래서 인생이 어려운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배운다.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을 때

젊은 시절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웠고, 생각했고, 결심했으면서도 세파에 시달리며 생활하다보니, 그 옛날 생각했고 결심했던 고귀한 목적과 굵은 인생관은 차차 가늘어져, 이런저런 일에 빠져나가고, 그럴싸한 변명으로 현실과 타협하며, 어느덧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그럭저럭 적당히 살아가는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소신학교 시절, 손과 발은 물론 귀에까지 동상이 걸려 진물이 흐를 때도, 눈을 지그시 감고 성인 신부가 되어 보자고 마음먹었던 결심들이, 이제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추억의 멜로디로만 남아 있음을 발견하면서도 놀라워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 용감한 순교자의 삶을 살아 보겠다는 결심이 참으로 많이 무디어졌으며 , 찾아볼 수 얼을 만큼 가늘어져 있는데도, 느헤미야 예언자처럼 시시해지고 무뎌진 영혼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 고민이 촌구석에서 배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부족한 나 하나만의 고민일까?

신앙을 손가락에 끼우는 반지처럼, 눈에 붙이는 닭털이나 귓불에 매달은 굴렁쇠처럼, 액세서리 취급하여 마음대로 끼웠다 뺏다 해도 되는 듯 착각하는 신앙인이, 어찌 나 하나 뿐이겠느냐는 것이다. 우리 교구 사제연수회 때,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니,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례율이 전체 교우 숫자의 30% 전후이고, 냉담자 및 행방불명된 이들이 30전후이며, 교적은 성당에 두고 간신히 냉담자, 행불자 신세를 면하고 있는 이가 30% 전후라 한다.              



나의 신앙은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하는 것을 따져보는 소극적인 생각을 갖기 이전에, 가져야 될 자세가 하나 있다. 신앙은 무서운 파도에 자신을 내던지고 사나운 맹수의 이빨 앞에 자신의 몸뚱이를 내놓으며, 모진 박해의 칼날 아래 자신의 목을 들이대는 강인하고 끈질긴 결단을 요구하는 것인데, 지금 그대와 나의 신앙은 어디에서 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박해가 많았던 아프리카에서는, 교우들 사이에 사용되던 암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하는 것이었다 한다. 이 말은 교우들이 박해 때문에 숲 속에 숨어서 기도를 드리곤 하였는데 '당신은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숲 속에 숨어서 하는 기도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까? 하는 뜻이란다. 이 암호인사에서, 우리는 귀중한 신앙생활의 뜻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하는 질문을 매순간 자신에게 던지며 말이다,



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소중화(한국)의 공자

                                                             성민호 신부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다가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급기야는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사도시대의 상황을 방불케 한 한국의 초대교회도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많은 순교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자라온 한국 천주교회는 마침내 1984년,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신 가운데 감격스러운 103위 시성식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바로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대표자이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대축일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2000여 명의 한국인 성직자들이 있지만, 그 계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첫머리에 순교자 김대건 신부가 있습니다.

어렸을 땐 재복(再福)이라 불리었고,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가진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먼 외국에 가서 선진국의 문물을 수학한 정식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한국인 신부로서 투철한 신앙심과 탁월한 학식과 강인한 활동력으로 비록 생애는 짧았지만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죽음 또한 위대하고 장렬하였습니다

  

그는 정식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최초의 한국인이었으며, 6개국의 언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이자 통역관이었고, 서구 제국이 동양에 물밀 듯이 진출하는 대세를 파악한 선각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정부의 지리학자 대표로 남경조약에 참가한 외교관이었으며, 중국 대륙은 물론 만주, 필리핀, 몽고 등지를 두루 다녔던 여행가였을 뿐 아니라, 나침반 하나로 황해를 건너갔던 용감한 모험가였습니다.

나아가 어느 순국열사 못지 않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간직한 애국자로서 당시 쇄국정책, 사대사상 등으로 병들어있던 조국에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혁명가였으며, 순교자들의 자료수집을 위해 동분서주한 역사가였습니다.

  

학식과 교양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었기에, 조정에서는 “젊은이의 고생이 가엾고 재주가 아깝다."고 하면서 그를 ‘소중화의 공자'라고까지 불렀으며, 배교만 하면 중용하겠다는 약속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진리를 거역할 수 없어 사학괴수라는 죄목으로 젊은 일생을 하느님께 바쳤던것입니다.

  

그는 1821년 충청도 솔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후에 순교한 김제준이었고, 모친은 신앙심이 남달리 두터운 고(高) 우술라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눈여겨본 모방 신부는 그의 나이 15세 때 다른 두 소년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1836년 12월에 의주 변문을 돌파한 그들이 요동벌을 거치고, 중국 변문을 통과한 후 북경, 천진 제남, 남경, 항주, 복주, 하문, 광동을 경유하여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6월, 서울을 떠난지 7개월 만이었습니다.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만리가 넘는 기나긴 여행 끝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를 찾아가 그곳에서 약 5년간 수학하였습니다. 음식이나 기후도 맞지 않았지만, 공부하는 동안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두 번씩이나 마닐라로 피난하는 고생도 겪었고, 최 방지거와 사별하는 아픔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학업과 수덕에 몰두한 김대건은 해를 거듭할수록 야무지게 성장하였고, 학식과 교양 면에서 놀라운 진보를 보임으로써 장차 조국을 위하여 큰 업적을 남길 성웅으로서의 기질을 갖추었습니다. 그 무렵 동양 진출을 노리던 프랑스 함대의 통역관으로 추천된 그는, 정든 마카오를 떠나 꿈에도 잊지 못할 고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함대에 승선하였습니다. 마닐라, 대만, 상해를 거쳐 만주에 도착한 그는 여러 번 어려운 일을 당하였지만, 귀국해야 한다는 웅지를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면서, 신학공부를 계속 하였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박해가 치열하고 경계가 삼엄하였기 때문에 귀국한다는 것은 일대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굴의 투지를 가진 김대건은 단독으로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서울 잠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에 가서 전교신부들의 입국길을 모색하였으나 역시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몽고에 되돌아온 그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그후 1845년 1월 동지사 틈에 끼어있던 신자의 안내로 다시 변문을 거쳐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한 김 부제는 중병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신학생을 양성하고 순교록을 저술하는 한편, 해로를 통한 입국의 길을 탐지하기 위하여 항해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 해 4월, 사공 열한 명과 함께 어설픈 배에 오른 김 부제 일행은 심한 폭풍우를 만났지만, 구사일생으로 황해를 건너 1개월 만에 상해에 도착하여 페레을 주교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1845년 8월 17일, 김 부제는 상해 근교에 있는 교우 부락 금가항 성당에서 신품성사를 받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되었으니, 이는 한국교회 창설 60년 만에 겨레의 첫 사제가 영광스럽게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감개무량한 심정을 가눌 여유도 없이 김 신부는 페레올(고) 주교와 다블뤼(안) 신부를 모시고 비밀리에 배에 올라 다시 한국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심한 풍랑으로 제주도까지 표류하였지만, 낯설은 섬 사이로 항로를 찾아 천여 리를 항해한 후 강경포 나바위에 상륙하였습니다.

  

근처 교우집에 두 분을 숨게 하고, 먼저 서울로 올라온 김 신부는 두 분이 은거할 곳을 마련한 후, 10여 년 만에 어머니와 상봉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에 두 분을 서울로 모셔온 다음 김 신부는 은이마을을 비롯해서 텃골 은다리, 남문밖 석정리, 서빙고 미나리골, 양지지방 등을 두루 순회하면서 전교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그의 속 시원한 한국말 열변에 감동하여 신앙과 열성을 배가하였고. 착한 목자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편 페레올 주교는 더 많은 전교신부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들의 입국방법을 모색하던 중, 우선 황해도 연안까지 와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도록 김 신부를 그곳에 보냈습니다. 다행히 이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려 할 즈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져, 결국 김 신부는 금의환향한 지 7개월만에 관헌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김 신부는 등산진에서 해주감영으로 이송되었고, 다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40여 차례의 문초와 모진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3개월이 넘는 옥고를 받으면서도 임금에게 바칠 간단한 지리책을 편술하였고, 하직인사를 겸한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여 페레올 주교에게 보냈습니다. 그의 옥중 편지 중 “천국에 가서 만나자."고 끝을 맺은 편지는, 교우들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는 교훈이었으며 눈물겨운 유언이었습니다.

  

김 신부의 풍부한 학식과 영특한 지혜, 그리고 탁월한 언변과 늠름한 인품 때문에 어전회의까지 열어, 그를 국가의 동량지인물로 아끼자는 대신들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군문효수(목을 베어 달아매는 사형)라는 극형을 선고받고, 1846년 9월 16일에 26세라는 젊디젊은 청춘으로 새남터에서 치명하였습니다.

  

많은 나졸들과 구경꾼들이 운집한 가운데 사형집행 선언이 끝나자, 김 신부는 군중을 향하여 밝고 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천주교인이 되십시오."

말을 마치자 형리들은 그의 웃옷을 벗기고, 두 귀에 화살을 꽃은 다음, 얼굴에 회칠을 하였습니다. 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술에 취한 휘광이들은 칼로 목을 치기 시작하였고, 여덟번째에 목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집행 장소에 묻혀진 시신은 그후 미리내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처럼 장렬하게 순교한 김 신부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마침내 1984년 5월 6일 102위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온 교회의 추앙을 받는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의 생애와 흡사한 김 신부의 장한 생애를 돌이켜볼 때, 매사를 손쉽고 적당히 하려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만 천국에 가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조상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성직자를 모셔오고, 복음을 전파하며, 미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우리도 순교정신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한다면, 우리 자신도 구하고 우리 교회와 민족도 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생명보다 더 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가 물려받은 순교정신을 빛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를 반성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기도합시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 순교자인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핏물 튀며 번지는 조선의 하늘 밑을

김한기 신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일찍이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천주교 집안으로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는 해미에서 10년 간 옥고 끝에 1816년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조부와 부친은 가족과 함께 경기도 용인 골배마실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신학생으로 뽑혀 만주, 중국 대륙을 거쳐 마카오, 필리핀 등지에서 수학한 후 부제, 사제가 되어 몇 차례 국내에 잠입하기도 했으며, 만주의 흰눈 벌판에서 기아와 추위로 동사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황해 바다에서 파선의 위험을 당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던, 참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기적의 인물이었습니다.



선교 사제들을 한국에 모셔들이기 위하여 국내 사정과 비밀 통로를 파악할 겸 잠시 서울에 들렸을 때 많은 교우들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자신의 모친인 고 우술라가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의 순교 후 홀몸이 되어 문전걸식하는 신세로 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지만, 어머니를 만나 뵙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위험과 차질 때문에 그보다 우선하는 복음 선교의 사명을 위하여 인간적 자녀의 정을 억제하여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중국으로 되돌아간 결단의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8월 17일 만 24세의 나이로 중국 상해의 한 조그만 마을 ‘금가항’ 성당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로 서품 받으신 후 고 페레올 주교님과 안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역경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충남 나바위 교우촌에 도착, 교회에 활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여러 가지 성무 집행 등 모자라는 손을 다해 분주하게 일하였습니다.



이 때 선교사들을 맞아들일 길을 찾아보라는 주교의 명을 받아 1846년 5월 순위도에서 조기를 말리며 청국 배에 편지를 전하고 준비하고 있던 중에 배를 빌려달라는 관리들과 옥신각신하던 중 수상하게 여기던 관리들이 체포하는 바람에 해주 감옥에서 고문을 받자, 그 신분이 드러나게 되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하셨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만 25세였습니다.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휘광이들에게 더 세게 내리치라고 하면서 끝까지 죽음 앞에 의연했던 청년 사제, 김대건 신부님.



김대건 신부님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사제이며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의 주보이십니다. 이분의 영웅적 생애여말로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이며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게 사셨으나 굵게 사시고 영원을 사신 분, 이분은 진실로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보배이며 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단 앞에 한국 천주교회의 속죄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임의 고통과 쓰라린 괴로움이 있었기에 영광의 기쁨과 환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영광스런 내일을 위해 뿌려진 깨끗하고 고귀한 피, 이 피야말로 어린양의 순수한 피로서 만인의 구원을 가져온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야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4,22)는 말씀처럼 사제 즈가리야는 현세적인 고통과 육신의 괴로움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이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기쁨과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처럼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는다.”(로마 5,3-4)는 의미가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대 안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영웅적 사제직 수행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오늘 복음의 말씀,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는 예수님의 언약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살신성인하는 희생과 사랑과 봉사로써 주님의 길을 걷는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처하고 있는 시대적 난제 앞에서 결코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꿋꿋하게 정의와 사랑을 외치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인생은 산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박종근 신부



오늘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사제이시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순교자를 경축하는 날입니다.



먼저 저는 오늘의 한국 성직자들 모두에게 성직 수행에 필요한 은총을 전구해 주시도록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에게 기도하며 신자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성직자들도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심은 물론 귀감도 되십니다. ꡒ인생은 산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지혜 4, 8)ꡓ라는 말씀대로 25년간의 짧지만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신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로, 이국에서의 신학생 생활을 통한 모범입니다.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생활을 하는 사제가 되기 위해서 극기와 여러 가지 덕을 함양하는 신학생 생활은 쉬운 생활이 아닙니다. 신부님은 본국에서도 하기 어려운 신학생 생활을 약 160년 전에 기후와 음식과 풍습과 언어가 다르기에 고난이 가중되는 이국 마카오에서 그것도 약 9년간이나 하심으로써 편리와 안락만을 찾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사제와 신학생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로, 순교를 통해 귀감이 되셨습니다. 내것은 내것이요, 네것도 내것이라는 풍조가 만연한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 김대건 신부님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실상은 내것이 아니요 하느님 것이라는 정신을 가르치시고 몸소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충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소금이 들어가야 음식이 제 맛을 내는 것처럼 성김대건 신부님의 훌륭한 모범도 내면화하여 행동으로 드러낼 때 살아있는 모범이 될 것입니다.











1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한종훈 신부



한 나라의 역사나 한 사람의 역사를 오래도록 기린다는 것은 그 본질의 고귀함에서라기보다 그 순교한 정신과 행적의 빛남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를 터무니없이 예찬만 한다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거니와 지나간 역사 중에 값어치 있는 일을 쉽게 잊어버리거나 외면해 버린다거나 하는 것도 한탄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반성해 볼 때 우리의 영원한 자랑이신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어쩌면 한국의 백과사전이나 한국의 역사적인 명록 한구석에 조그맣게 기록돼 있는 역사적 인물로만 취급당하고 있는지 매우 걱정스러워집니다.



그분의 생애가 짧은 것이었고 그 이루신 업적이 국가적인 커다란 업적이 아니었다고 해서 단순한 종교적인 공적을 쌓다가 순절한 순교자로만 대우하려는 세속적인 판단에 한국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마저도 심리적으로 영합되어 가지나 않는지 의심스러워지기도 합니다.



복자 김대건 신부님이 마지막 고귀한 생명을 망나니들이 내리치는 칼날 아래 바치시기 직전 사형 집행관 앞에서 외치신 마지막 유언은 그리스도의 가장 충직한 종다운 열의에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인이 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아 공경하지 않는 자를 영원한 불로 벌하십니다.” 소박한 신앙의 표현이면서도 정곡으로 진리를 설파하신 장엄한 선언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단순한 진리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복잡한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위의 김대건 신부님의 최후 유언이 도리어 더욱 불가사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나 하는 느낌이 강한 것은 웬일이겠습니까? 경제적 중진국을 향한 국가 지도자들의 강력한 정책에 호흡을 맞추어 가고 있는 도시나 농촌은 온통 분주한 움직임들을 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다가올 내일의 번영이라는 희망 때문에 정신을 다 빼앗긴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제에 현실을 철저히 거부한 듯한 김대건 신부님의 유언이나 그로 인해 아까운 젊음을 새남터 모래 바닥 위에 어처구니없게 팽개쳐 버린 듯한 사건들이 소위 무궁한 현세적 번영을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옳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들을 잘 살게 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영원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라야만 참다운 값어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위해서 보화를 쌓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국문효수의 형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의 시체는 사흘 동안 장대에 매달려 군중들에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관례를 깨치고 관리들의 손에 의해서 잘려진 머리와 몸체가 합쳐지고 그 자리에 정중히 가매장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조처는 김대건 신부님이 나라 임금으로부터는 아주 소중한 인물로 인정을 받았고 국가의 아까운 일꾼으로 아낌을 받았던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의 현대인이라면 신앙문제, 종교문제는 잠시 다른 곳에 영치시켜 놓고 우선 임금님을 위해 나라를 위해 힘껏 일함으로써 충신도 될 수 있고 공훈도 남겨놓을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움을 느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적당한 시기에 말하자면 죽을 임시에 회두하고 성사를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로 본당의 많은 냉담 교우들은 대부분 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은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는 실정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에게 있어서 현세적인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더라면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춘을 새남터 형장에서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세에서의 어리석은 짓이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 데에 절대로 작용하는 것인 때문에 아니 그보다도 한 알의 밀씨가 괴어 땅에 떨어져 썩어야만 이 땅 위에 복음의 씨앗이 널리 번성되어 나가겠기에 흔연히 ‘한알의 밀씨’가 되어 순교자의 월계관을 획득하신 것입니다.



영원을 위해 잠정적인 현세의 공명이나 영화를 돌보지 않음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섭리에 순종함으로써 영원을 차지하는 것이요,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릴 현세적 입신출세와 부귀영화만이 인생의 최고 최종 목표가 될 때는 비록 그 이름이 잠시동안은 떠들썩할지언정 오래지 않아 숲 속에 퇴색되어 버리는 비석만이 흔적을 남겨주게 될 것입니다.



복자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민족에게 영원한 생명에로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분골쇄신하신 것입니다. 역사 안에 파묻어버릴 분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젊으신 혈기를 겨레를 위해 제물로 바치신 것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 겨레의 영혼 속에 생명의 빛을 전달해 주시고 생명의 빛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신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 우리 겨레를 생명의 빛으로 이끄시는 등대가 되어 주소서.











11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허영엽 신부



오늘은 최초의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경축하는 날이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건너가게 된다. 드디어 1845년 8월 17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그 이듬해 6월 귀국하여 사목 활동을 하다가 관가에 잡혀 1846년 10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는 짧은 인생 동안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봉헌으로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김대건 신부는 파견된 사목자 그리고 예언자였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스승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전생애를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인 선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마태 28,19)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파견되어야 한다.

마태오 복음의 이른바 선교적 담화문은 이렇듯 ‘말씀’과 ‘행위’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권위가 완성되는 것으로 소개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실재(實在)인 것이다. 여기서(마태오 복음에서) ‘기적’은 인간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役事)하시는 예수님과 모든 삶을 투신하는 신앙의 행위 속에서 주님을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인식하는 인간의 만남이다.



따라서 기적이 표명하고자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기술하듯,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디도 3,4 참조)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파견, 나아가 ‘선교’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신(마태 9,36 참조)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출발된다.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의 파견 이야기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제자들의 사명을 보여 주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우선 예수님의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코(6,12-13 참조)나 루가(9,6; 10,1 참조)와는 달리 마태오에서는 선교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선교를 위해 떠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선교를 위해 떠나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시다(11,1 참조).



세례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앙인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옛날 열두 제자에게 부여되었던 예언자적 사명은 현대의 신앙인인 우리에게도 똑같이 부여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언직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주위를 밝히며 증거자의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예언자적 임무가 바로 교회가 그 본질로 삼는 ‘선교’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복음적 생활의 증거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임무는 완성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증거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설명되고 납득되지 못하면 온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라고 하는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생활의 증거로써 선포된 ‘기쁜 소식’은 생명의 말씀이 주는 빛으로 그 의미가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말씀은 매순간 예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말씀의 선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선교를 위해서도 성서 말씀에 친숙해야 한다. 선교는 행동뿐 아니라 말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임무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시대의 징표를 분별하고 해석하며, 공동체의 참된 평화를 위해 모험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리게 한다. 예언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비겁하고 불의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스승 예수님과 같이 바로 오늘의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모든 불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예언자의 눈으로 오늘의 불의와 부정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공허하고 타협적인’ 현상 유지의 평화를 권유하고 확산시킨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일 것이다(예레 6,13-14 참조).



예언자의 메시지는 심판이고 고발인 동시에 희망이고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다.

김대건 신부의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의 예언자적 소명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예언자로서의 길을 충실히 가고 있는가?











12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참 신앙의 실천자 복자 김대건 신부

                                                                박지환 신부



우리 복자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는 사도 성 바울로와 같은 점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강물의 위험, 광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도시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따위의 온갖 위험을 다 겪으셨습니다(2고린 11,26).

김 신부님을 문초하던 그들도 김 신부님의 어려서부터 잡히실 때까지 걸어오신 경로를 다 듣고 “가엾은 젊은이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구나”하며 동정을 금치 못할 정도였습니다. 나무 뿌리가 얼마나 튼튼히 박혔는지는 폭풍우를 겪은 뒤에 알게 되고, 금은 불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참된 신앙은 시련 속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초지일관 죽을 때까지 위험과 고통을 등에 지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이 땅에 그리스도 왕국 건설을 위하여 멋있고 용감하게 일하신 우리들의 자랑 김 신부님! 천춘의 타는 정열, 끓는 피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아낌없이 그리스도의 제단 위에 바치신 우리의 성웅 김대건, 장하도다!



그의 일생 깊도다, 그의 신앙. 굳세도다, 그의 용기. 참으로 대한의 남아요, 하느님의 충신이요, 우리 겨레의 자랑이도다. 복되다 그의 일생, 찬란한 그 빛이 길이길이 남으리라.

김 신부님 순교 후의 페레올 주교의 편지를 보면 “그의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 ... 성직을 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바라던 것보다 더 나았었고 ... 그에게는 어떤 일이라도 맡길 수 있었으니 그의 성격과 태도와 지식은 그 성곡을 확실히 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교우가 지금 처하고 있는 처지로 보아서 그를 잃은 것은 엄청나고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분이 얼마나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었던가를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순교 직전 형장에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의 늠름한 체격, 고귀한 인품, 놀랄 만치 유창한 말씨, 어학의 뛰어난 재질, 옥중에서 세계지도를 그려 임금님께 바친 손재주, 탁월한 지혜 ...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하여 하나로 뭉쳐 몽땅 바치셨으니 즉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발전을 위하여 남김없이 바치셨습니다. “네 가진 재질과 배운 학식이 아까와서 죽이지 않고 높은 벼슬을 줄 터이니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하였을 정도였지만 한번 하느님께 바쳐진 일편단심이 어찌 변함이 있겠습니까!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게 단호히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김 신부님의 일생은 오로지 하느님께 향한 길 뿐 이었고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다보거나 가시다가 험난하다고 멈추시거나 주춤거리시거나 망설이시거나 하시는 일없이 오로지 하느님을 목표로 일직선으로 끝까지 힘차게 용기있게 뛰어가신 용사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헛되지 않았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신 분입니다.”(1고린 15,10)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2디모 4,7-8)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시오.”(순교직전 김신부의 말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마태 6,25-26)



우리 복자 김 신부님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육신적으로 손해가 있고 물질적으로 바치게 되고 하면, 내 배는 건드리지 말라는 식으로 나는 십자가를 안질 터이니 너희나 지라는 식으로, 힘드는 신자생활은 너희들이나 할 것이지 나는 약고 편하고 약삭빠르게 간편하고 수월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자기는 교회를 위하여 손하나 까딱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힘드는 일을 잔뜩 실리는 교활하기가 뱀같은 속다르고 겉다른 신자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님이시여, 당신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그 참된 신앙이 현대에 와서는 왜 이렇게 변질이 되었는지 실로 가슴 아픈 일이옵니다 비오니 당신이 피뿌려 심어 놓으신 참다운 신앙에 우리 모두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1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참고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교구주보



1. 복음 이야기

마태오는 다섯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아 집성문을 엮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번째 집성문인 파견설교(마태 10장)의 한 부분으로 박해를 각오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박해도 받겠지만(17-18절) 동시에 위로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19-22절). 그리스도인은 먼저 지방의회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채찍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 지방 의회는 회당의 유지 23명으로 구성된 지방법정을 뜻하는데 이 법정에서는 배교자에게 매를 39대나 때렸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로마 제국의 총독들과 로마 제국 앞잡이 지방 임금들에게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더라도 참고 견디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부의 영이 그 때 일러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가정이 파괴되는 박해를 받을 때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순교로 종말에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위로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 안드레아 성인은 한국의 첫 사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시어 순교의 월계관을 쓰시고 복음의 증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순교자의 피로 역사를 이어온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기 33년에 순교한 스테파노 부제나 86세의 고령으로 순교한 폴리카르푸스 주교,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로서 약관 25세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님 모두 하느님 사랑과 교회 사랑을 피로써 증거한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모진 박해와 심문을 받으면서도 “한 번 나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면하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도리어 나의 소원이니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역시 이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죽여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추호라도 양보나 타협 없이 하느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생명을 내걸고 순종했던 삶의 전형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지 개발이나 성인 기념 성당도 필요하지만 먼저 성인들이 사셨던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성인 공경이라 하겠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여, 한국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1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제 자리 지키기

윤해영 바실리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주변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힘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작년 가을, 꽤 친했던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통했고 같은 길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친구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주 놓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우리는 지난 20년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결혼 후 얼마 안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성실한 사람이 몸에 알콜만 들어가면 자신을 잃고 폭언, 폭력,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알콜을 거르는 적이 거의 없으니 사는 것 자체가 무서운 전쟁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은 물론 정신병원만도 세 번이나 다녀와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까봐 시댁에다 맡기고, 생활비를 벌어가며 남편과 아이들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버텨낸 것이 2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았어?” 저의 물음에 그녀는 작지만 힘있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만두면 다 무너지고 말잖아. 어차피 내 자리인데 내가 지켜야지.” 이렇게 말한 뒤, 요즈음 읽고 있는 중이라며 저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습니다. ‘新 사랑의 의미’ 그 책을 받아본 저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구절에는 녹색 형광펜 줄이 그어져 있었고 얼마나 읽었던지 책이 헤져있었습니다. 제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며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 저는 그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주 밝고 명랑한 음성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시 일을 하게 되었고, 함께 단주(斷酒)모임에도 나가고 있다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과거를 되씹고 오지 않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잘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가 존재하는 자리를 잘 지키는 것. 즉 현재를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살면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현재가 과거나 미래로 흩어지면 나의 삶은 결국 빈자리가 됩니다. 창 안에 앉아 있으면 나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창 밖에 서 있으면 나는 또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창 안에도 창 밖에도 다 계시지만 내가 동시에 다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제자리 지키기’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신부님께서는 눈물어린 옥중편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사랑을 잊지 마시오. 서로 참고 도와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시오. 나도 하늘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나는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1846. 8. 29). 제자리를 잘 지키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1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우리는 어느 나라 시민인가?

최인호 베드로/ 작가



부처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서 수도하던 아시타라는 예언자가 카필라성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어린 부처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왕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모든 중생을 구제할 부처님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이 아이가 도를 이루어 부처님이 되실 그때까지 살지 못할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모가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시므온은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합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5).

위대한 성자가 태어날 때에는 선지자가 등장하여 이들의 운명을 예언하는데, 실제로 부처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 되었으며, 예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들의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인생, 그 가운데서도 아주 짧은 3년의 공생활이야말로 전인류의 거짓생활과 숨은 생각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어버린 거대한 해일이었으며 폭풍이었습니다. 그분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심으로써 인류에게 ‘하늘나라의 시민권’의 첫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셨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로마 시민권’이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바오로도 자신을 결박하자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 있소”(사도 22,25) 하고 항의합니다. 이에 파견대장은 “나는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자랑하자 바오로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라며 기를 죽입니다. 이러한 장면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의 주민등록증을 얻는 것은 출세와 성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심으로써 그 출생부터 로마 시민권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악마로부터 물질과 명예, 권력을 보장받는 로마 시민권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직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황제로 비유되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예수를 아직도 법정에 넘기고, 매질하며, 고발하고, 재판하여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아직도 우리에게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고, 우리가 믿는 신앙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과연 두 개의 시민권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 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두 개의 시민권을 동시에 소유함으로써 “하느님과 재물 두 가지를 한꺼번에 소유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이중국적자(二重國籍者)가 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로마의 시민인가 아니면 하늘나라의 시민인가. 그것도 아니면 두 개의 시민권을 모두 가진 이중국적자인가.                         











1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김대건 신부의 믿음과 희망

                    

휘광이가 휘두른 칼날 아래로 선혈이 치솟더니 젊은이의 목이 떨어졌다, 한강 새남터 백사장은 어느새 피로 물들고 피를 본 휘광이의 눈은 미친 사람처럼 광기가 가득한 체,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켰다. 목이 떨어진 젊은이의 이름은 김대건이었다. 그의 죄목은 국법을 어기고 국교인 유교가 아닌 서양종교를 신봉했다는 것이었다.

가여운 젊은이!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던들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을 잘못 만난 탓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는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나는 하느님을 배반하오" 이 한마디를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생애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청도 내포지방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김진후였는데 그 지방의 관료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김진후는 50세에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고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14년 2월20일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미 할아버지부터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은 고 우술라와 결혼하여 솔뫼에서 살다가, 1839년 9월26일 체포되어 순교했다. 할아버지가 순교하였으니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게 살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남편을 잃은 우술라는 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골배마실이라는 동네로 이사갔다.



이사라기보다는 친척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한 셈인데 천주학쟁이 과부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천덕꾸러기로 살아갔을 것이다. 골배마실을 방문한 모방신부는 15세의 소년 김대건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그들 신학생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김대건 신부는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어린 학생들은 얼마나 고향생각을 했을까? 음식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해, 사랑하는 친구 최방제는 병마와 싸우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얼마나 친구를 얼싸안고 울었을까?



1744년 오랜 각고 끝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9년의 외국생활의 지친 삶을 잠시 접고 조선으로 돌아와 국내 상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기간동안 김대건 신부는 어머니를 만나고자 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거지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다음해인 1545년 8월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된 뒤 서둘러 조선에 들어와서 전도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박해가 너무 심했다, 그는 혼자 몸으로는 도저히 성무집행을 다할 수 없어 중국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청하러 가다가 1846년 6월5일 순위도 앞에서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김 신부는 그해 7월16일 한강 백사장 지금의 새남터 상당터에서 군문효수라는 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군문효수란 목을 쳐서 장대 높이 달아놓는 것으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다시는 천주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위 본때를 보이는 형 집행이었다.

  

그의 사상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이제 시작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라는 말씀이 언제나 가슴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 간 교훈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기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오늘 우리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를 닮는 사제를 원한다.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래서 목숨를 바치는 사제를 원한다. 그런 사제가 나오기 위해서는 가문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김대건신부의 증조부, 아버지도 순교하였고 자식을 위해서 거지처럼 살아갔지만 언제나 기도해주었을 어머니의 굳은 믿음이 김대건 신부를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죽어서 백사장에 아무렇게나 묻혀있었을 그를 신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비병에게 술을 사주고 잠이든 뒤 시신을 파내어 미리내까지 메고 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그런 신도들이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같은 훌륭한 사제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신도들은 영적으로 꽉찬 신부를 원하고 신부들은 그야말로 순종 잘하고 열심한 신자, 헌신적인 신자를 찾고있다.


과연 내가 이 시대에 한강 백사장에 묻힌다면 그 누가 썩은 내 육체를 거두어 등에 메고 150리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 김대건 신부보다 곱절의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그가 깨달았던 심오한 신앙의 의미를 아직도 도반으로서 깨달아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김대건 신부는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린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뜨거운 사람인가?











17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믿음의 생활이 순교정신의 계승



한국의 순교성인 중 14세로 가장 나이 어린 유대철(1826~1839)베드로 성인은 서울에서 유명한 통역을 맡는 관리인 역관(譯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신앙심이 열심한 아버지 유진길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와 누나는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도 체포되었다. 그러자 유대철도 순교하기로 결심하고 관가에 자수를 했다. 어린나이에 극심한 고문을 견디어 냈다. 한 번은 형리가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유대철은「저는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어요‥‥」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화가난 형리는 이번에는 화로에서 시뻘겋게 타고있는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유대철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태연하게 입을 크게 벌려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총14차례의 고문과 100여대의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결코 배교하지 않았다. 유대철 베드로는 드디어 1839년 10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순교 성인들의 투철한 신앙심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그분들의 영광을 찬미드리는 날이다.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은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의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기 위해 순교의 고통을 기꺼이 받으셨다. 갖은 고문과 형벌에 맞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쳤다.



1984년 5월 6일 103위의 복자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공경을 받는 성인품에 오르시게 됐다. 수만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우리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특별한 교회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공경을 드리는 103위 성인 뒤에 수만명의 순교자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선열들의 순교의 피로써 시작되고 발전된 교회이다. 우리는 오늘날 그분들의 은덕으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우리 현실은 그 옛날 순교자들의 상황과는 사뭇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신앙을 위협하는 모든 장애물과 싸워 신앙의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물질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순교시대만큼이나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성실한 신앙생활은 순교정신의 계승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가장 잘 계승하는 것은 신앙인들 각자가 신앙 생활을 성실히 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앙이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전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희생 없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 함은, 때로는 순교할 각오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또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즉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는데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때로는 부모 때문에, 주위환경으로 인해서 믿음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또한 자기 자신이 십자가일 수도 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이다. 더 나가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참다운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않은 고난의 길이다(루가14,27)

어쩌면 세속의 거센 유혹과 악의 힘을 거슬러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유혹에 거슬러 싸우는 자체가 바로 신앙의 길인 것이다.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달하는 길은 어렵고 험난하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힘을 북돋아 주신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4)











1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21~1846) 하느님을 「임자」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은 임자이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를 알고 난 후에 배신하면, 세상에 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다. 1836년에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1845년 사제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입국해서 사목활동을 벌이다 관가에 잡혀 1846년 10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신부는 26세의 짧은 인생을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모두 바쳤다.

그분의 순교적인 삶은, 우리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된다. 김대건 신부는 40여 차례의 혹독한 문초를 받고서야 사형이 집행됐다. 김신부는 사형 당일, 두 손이 묶인 채 군중사이를 헤치고 새남터로 끌려갔다. 사형 집행 전 큰 소리로 마지막 설교를 했다고 한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찾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설교가 끝난 뒤 관리들은 김신부의 웃옷을 벗기고,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뿌리고 훼를 발랐다. 무릎을 꿇리고, 밧줄로 머리칼을 동여 메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 때 김신부는 태연하게 「자 이렇게 하면 나의 목을 쉽게 자르겠느냐?」라고 했다. 12명의 휘광이가 칼을 내리쳐 여덟 번째 칼날에 김신부의 목이 떨어졌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던 기백과 용기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신앙은 순교의 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하시면서, 신앙인은 박해를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즉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 때로는 부모나 형제로부터 배척을 받고,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반대와 박해를 당할 수도 있다. 신앙생활이란 결코 쉽지 않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박해와 고통을 각오한 삶인 것이다.

  

왜 신앙인은 박해를 당하는가? 세속적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진리는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 따라서 죄와 어둠의 세력은 빛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왜냐하면 어둠의 행위가 빛 안에서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세상 속에서 신앙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 자체가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순교자는 본래 증인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길이며 동시에 순교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순교적인 삶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옛날처럼 순교를 당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세속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어쩌면 매일같이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삶 자체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일상적인 신앙생활이 순교의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나 자신의 욕심과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바로 훌륭한 순교이다. 순교의 생활은 철저히 십자가를 지l는 생활로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현대의 삶 속에서 충실하게 순교의 삶, 증거의 삶을 사는 것이 과거의 순교 못지않게 어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신 우리 선조들의 굳은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따라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고, 승리와 영원한 행복이 보장된 길이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우리 한국의 순교성인들을 모두 하느님과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켜 신앙을 증거하신 분들이다. 우리도 순교성인들의 후예답게, 이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신앙의 빛을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참신앙인이 되도록 더 한층 노력해야 하겠다.

  「순교자 김대건 사제와 한국의 순교성인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19.                聖 金大建  神父 흉상 복원            200. 11. 9

마승열 기자



성 김대건 신부 흉상이 복원됐다.

서을대교구 명동 주교좌본당(주임=백남용 신부)은 11월 9일 오후 2시 사목회의실에서 김대건신부 흉상 복원작업 결과보고회를 가졌다.



이번 결과보고회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온화한 형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반인들의 경우 광대뼈가 돌출한 반면, 김신부는 완만했고 이마는 곧게 서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해 9월 명동본당으로부터 의뢰를 받고 복원에 착수했던 가틀릭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팀은 김신부의 눈 주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 깊게 처져 있으며, 뒤통수는 상당히 돌출 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흥상 복원에는 가틀릭대해부학실을 주축으로 카이스트 기계학과, 연세대 치과대학, 건국대 의과대 등 5개대학 16명의 명실공히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이와 함께 사실감 있는 조각을 위해 문예진흥원으로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로 선정된 바 있는 인물조각 전문 구본주씨를 포함시켰다.



특히 가를릭대 해부학팀은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 접근을 위해 163명 한국인 얼굴의 데이터를 국내 최초로 이번 흉상 복원에 접목시켰다. 여기에 초음파 작업을 통해 피부 두께를 측정하고 얼굴 근육형태를 살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를릭대학교 해부학실 조교수 한승호 박사는 「이번 복원작업은 국내 전문가들이 합동으로 법의학적 토대하에 현재 시도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은 모두 펼쳤다」고 밝혔다.

명동본당의 이번 복원 작업은, 지난해 6월 선종한 고(故) 김수대(아우구스티노)씨가 김대건 신부 얼굴 복원 작업에 써달라며, 백남용 신부에게 2억원을 기탁하면서 이뤄졌다.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윤영길(바오로)씨를 위원장으로 한 김대건 신부 흉상 복원추진위를 구성했던 명동본당은, 금년말까지 최종 흉상이 복원되면, 이를 토대로 김신부 상본을 가틀릭미술가회에 의뢰할 계획이다.

이어 제작된 상본을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한편, 내년에 ‘김대건신부 전신상’을 조각해 명동성당 성전 안에 있는 예수성심상 자리에 배치할 복안이다.



백남용 주임신부는「한국 교회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 신부님」의 얼굴을 복원함으로써 신자들의 영적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번 흉상 복원의 의미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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