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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6월 29일 (일) 16:45
분 류 연중14-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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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4주일



        5. 조광호 신부(나)/12                 6. 김정진 신부(나)/14

        7. 성민호 신부(나)/16                 8. 강길웅 신부(나)/19

        9. 김영남 신부(나)/21                 10. 신은근 신부(나)/23

        11. 고향에서 배척(나)/24          






 

 

5        연중 제14주일  마르 6,1-6 (나) 절망처럼 보이는 것에서 희망이

                                                          조광호 신부



1. 얼마전 나는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서 소년기를 보냈던 고행에 잠시 들렀다. 내 고향은 맑고 푸르기로 이름난 영동의 오십천이 굽이도는 작은 강마을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산과 강은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산허리를 잘라내어 상길을 돌려놓았기에,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내가 선 위치를 분간할 수가 있었다. 황혼이 지던 강가, 어머니가 나를 부르던 그 옛날 강뚝에 섰다.

햇살 부신 옥수수 밭 사이길을 달려가 모래성을 쌓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놀던 그 강변에는 콘크리트 아파트가 줄지어 섰고, 이무기가 산다던 그 전설의 미륵소에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온갖 쓰레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30여년 전 과거를 거슬러 가는 내 기억의 초점이 명료해 질수록 언제나 내 마음속에 빛나던 추억의 강은 더욱 투명한 빛으로 나의 내면에 다가서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강은 그 때 그 강은 아니었다. 검은 폐류를 둥둥 띄우고 더운 열기 속에 번뜩이는 강은 마치 산짐승의 배를 갈라놓은 듯 섬뜩이는 빛으로 흐름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2. 나의 눈빛과 그 낯선 강의 원망어린 눈빛 사이에 마주치는 절벽 같은 침묵으로 매스꺼움이 목에까지 차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저 무자비하도록 파괴된 자연에 대한 감상어린 연민, 그 이상의 뜨거운 감정이 내 앞에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서서 바라보는 무상한 현실. 인간만이 갖는 꿈과 현실의 그 아득하고 막막한 거리감이야말로 이 지상에서 인간이 감내해야 할 숙명적인 슬픔인 것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나에게 고향이란 내 꿈과 현실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내 영혼의 휴식처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 품에서 최초로 찬란한 햇살을 쏘인 곳이요, 최초로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느낀 곳이요, 즐거움과 기쁨이 어울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의 관능은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내 일생을 두고 존재하는 ‘그리움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은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인들 예외가 있을까.



3. 나자렛 예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갈릴래아 가파르나움 회당의 설교로부터 시작된 예수의 전도여행에서 그의 제자들을 파견하기 전 예수는 자기의 고향 나자렛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 이 메시지는 새 세상이 시작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향인들은 그의 메시지를 배척하였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로서 평범한 인간 이상 아무 것도 더 될 수 없다는 선입견으로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4. 인간이 갖는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과 아집은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진리 앞에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모든 죄와 불신이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나자렛 사람들의 눈’은 바로 ‘이 세상의 눈’이라 할 수 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눈이요,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이웃을 경멸하는 눈이요,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헤어날 수 없는 폐쇄적 사고의 틀 속에 갇힌 눈으로 자기 안보와 안정을 위해서 잘 길들여진 눈이다. (그러기에 나자렛의 이 사건은 앞으로 올 예수의 일생을 미리 예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시대에 이러한 눈을 지닌 자들의 전형적인 부류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외면한 이들의 표리부동한 삶의 허구성을 예수는 신랄히 비난했다(참조: 마태 23,13-33). 그리고 예수를 향하여 “네가 무슨 권능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런 권능을 주었느냐”(마태 21,23) 고 예수의 합법적 권능 여부를 시비로 삼았던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또한 이런 자들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예수를 재판하고 예수를 처형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음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5. 예수를 배척한 나자렛의 사건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 세계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분단의 아픈 상체를 간직한 채 아직도 우리는 남과 북이 두터운 불신의 벽을 쌓고 살고 있다.

이 무서운 불신의 벽 아래 편견과 아집으로 응어리진 지역감정을 앞세운 ‘지역분열주의’라는 늪에서 민족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있지 않은가?



분단 속에 다시 분열을 부채질하는 ‘지역감정’이란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집단의 옹졸하고 비겁한 열등감에서부터 생기는 잘못된 우월의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러한 지역주의는 있지만 이번 광역선거를 두고볼 때 우리의 경우는 참으로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우리에게 민주화는 물론이고 민족의 통일은 하나의 허황된 꿈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본다.



철저한 지역주의의 고질적인 증오와 경멸을 일삼던 ‘사마리아’와 ‘유다’ 사이에 죽음으로써 그 벽을 허물고 그들 사이에 새로운 길을 놓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분단과 분열 속에 고통받는 민중 가운데로 걸어오고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는 영남지방에는 외로운 호남사람으로, 호남지방에는 홀로 남은 영남사람으로 와 계실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보다는 맹목적인 전통성을 고수함으로써 자신과 자기집단의 안보와 안정만을 위하는 제도교회 안에서의 잘못된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예수는 가난하고 쫓기는 자로서 와 계실 것이다.

잘못된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의 참된 회개없이는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예수는 그의 고향, 나자렛에서와 같이 울 교회 안에서도 기적을 행하실 구 없을 것이다.



오늘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우리의 눈을 어린이와 같이 갖도록 노력할 때만이 십자가 안에서 부활이 이루어졌듯이, 절망처럼 보이는 곳에서 희망이 자라고, 죽음처럼 보이는 것에서 생명은 탄생될 것이다.











6        연중 제14주일  마르 6,1-6 (나) 예언자들의 고향인의 불신앙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대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친척과 고향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시고 환영을 못받으신 놀라운 사실의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동향인이 어느 점에서는 반갑고 도움을 주리라고 하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데서는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기 고향이나 친척들한테서는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도대체 예언자라 함은 어떤 이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옛날 예레미아나 이사야와 같이 예언을 한 분을 말하기도 하겠습니다만 그것보다도 오늘의 예언자라 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이를 전파하는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에제키엘과 사도 바오로나 그리고 예수님은 대예언자로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분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고향인과 민족에게 곤욕과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도 고행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하고 개탄하셨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성행하는 세계에서 유독 인간의 정의와 사람을 절규하며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은 그분들을 알아보지 못하며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약한 자들이 억압당하고 가난한 자들이 배척당하고 무력한 자들이 인권유린을 당하는 세계에서 예언자들은 고독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갖은 박해와 역경 속에서 자기 사명을 다하다가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아벨이 거룩한 피를 흘린 후부터 많은 예언자들이 살해되었고 성 스테파노와 사도들이 모두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예언자 둥에서도 가장 높으신 대예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예언자의 입장에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셨을 적에 그 지방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히 나빴습니다.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내용은 다른 곳에서 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고행 사람들이나 친척들은 예수님의 설교 말씀을 귀여겨듣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예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누구의 아들이 아닌가? 누구와 형제가 아닌가?” 하고 비웃으며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예외없이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친척이나 고향인들한테 환영과 존경을 못 받았겠습니까? 동향인인 나자렛 사람들과 동족인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갈망하던 메시아 즉 구세주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구세주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 친척이나 동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하느님을 믿는 이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구원은 만민에게 있음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신앙이 없는 자들 앞에서는 예수님은 아무 기적도 행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한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있어서는 육친적 혈통 관계는 아무 뜻이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선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함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고 간파하였습니다(마태 4,9).



예수님은 12사도와 같이 충실한 이들과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따르는 사람들은 당신의 형제 자매이며 일 가 친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다. 둘러앉아 있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오’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자,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이고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마르 3,31-35)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시려는 의도가 역력합니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는 신자들은 서로 형제 자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 중에서 예수님은 더욱 친밀히 당신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고자 합니다. “나를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현세에서 그것의 복도 백 배나 누릴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마르 10,29-30)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외적인 면, 즉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자손이다” 라는 구실로써는 교회에 별로 도움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얻는데도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장애가 되는 친척이나 고향을 떠나 온갖 것을 버리고 신앙을 빼앗아 가려는 사람이나 물건을 멀리할 적에 비로소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하느님의 증인, 하느님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7        연중 제 14주일  마르 6,1-6 (나)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성민호 신부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났으며,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소꿉장난하던 고향, 보고 싶은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그 옛날 많은 추억이 담긴 고향을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기회가 있으면 그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도 전도활동을 시작하신 후 여러 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잠시 짬을 내어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모처럼 고향을 찾으신 예수님의 마음도 아마 감회가 깊으셨을 것입니다. 때마침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예배에 참석하셨고, 그 기회에 고향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혜로 가득 차 있었고 권위가 있었으며, 능력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탄복하였고 그분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한 것을 시기한 나머지 그분을 배척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분이 자기네들과 함께 자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훌륭한 교훈과 놀라운 능력에 감동하면서도 단지 그분이 요셉의 아들로서 목수라는 점, 그분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자기네들과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신분 때문에 그분을 거부하였고 그분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보여준 탄복과 배척의 연유를 좀더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 주님은 고향을 떠나 주로 다른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셨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문이나 성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분이 하신 진리의 말씀과 초자연적인 기적을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위대한 메시아로 확신하게 되었고 그분을 따라다녔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온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에 두루 퍼졌고 예수님의 고향에도 전달되었습니다.



고향사람들은 금의환향하시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였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그분의 말씀은 너무도 당당하고 권위가 있었으며 그분의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과 학벌을 의식하지 시작하였습니다. 뻔히 아는 것이지만 그분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분의 친척들 역시 자기네들에 비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가 출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성분을 앞세워 그분의 말씀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예를 들어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완고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을 내세워 당신의 뜻을 전달하시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신 과거의 역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30년 동안 함께 사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이 베푸시려던 은총의 선물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대변인을 선정하실 때 인간적인 기준이나 세속적인 지위를 중시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하찮은 사람들을 뽑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지식이나 학벌이나 어느 명문 출신이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가문이나 출신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인맥이나 혈연관계도 따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느님 앞에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분은 오로지 당신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따르려는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가 인간적인 편견으로 이웃을 판단합니다. 사람 됨됨이를 보지 않고 피상적인 용모나 드러난 성분만을 따집니다. 어떤 정치인들은 지역감정을 유발하여 특정지역 후보를 비방할 뿐 아니라 유능한 사람마저도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등용시키지 않고 도태시킵니다.

일부 기업체에서는 사람을 보지 않고 어느 학교 출신인지를 따져서 사원을 모집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결혼의 조건을 다 갖추었어도 어느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혼인을 거절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동향인들처럼 그들은 인간적인 기준이나 세속적인 가치관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바른말을 배척합니다. 우리도 가끔 그들 못지않게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 자체를 배척합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편견을 버리지 않고서는 우리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1고린 1,21)



이 세상에는 아직도 인간적인 지식이나 현세적인 학문을 앞세워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칭 똑똑하다고 자부하면서 하느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한다면서 말도 되지 않는 것을 가르친다고 코웃음을 칩니다. 그러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향인들처럼 구원의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구원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마태 11,25-26) 바오로 역시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7-28)



그러니 우리도 무엇을 좀 안다고 자부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신앙을 저울질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성경이나 교리고부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리지식이나 교회상식을 넓히는 것은 신앙을 키우기 위하여 매우 유익합니다.

다만 교리를 이론적으로만 따진다거나 자기 위주로만 신앙생활을 한다거나 앞뒤를 재면서 사도직 활동을 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진실하게 믿고 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 사람의 출신이나 신분이나 외모만을 앞세워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8          연중 제 14주일  마르 6,1-6 (나) 예언자들의 팔자 소관

                                                      강길웅 신부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대개가 그 인생길이 험악했습니다. 정치 권력으로부터는 혹독한 박해를 받았고 백성들로부터는 멸시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오늘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에제키엘과 사도 바오로, 그리고 주 예수님의 길이 모두 그랬습니다.



1독서에 나오는 에제키엘은 나라가 망하고 백성은 모두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는 비참한 처지에서 활동한 예언잡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끝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낯가죽이 두껍게 제 고집을 부렸던 결과는 실로 무서운 유배의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에제키엘의 길은 그만큼 힘들고 고달파야 했습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 뼈아픈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본래 유다교에 충실했을 때는 장애가 촉망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고 충분한 교육도 받았으며 그리고 특별한 재능고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는 그 모든 혜택을 저버리게 되었고 오히려 박해와 위험을 만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어떤 질병 때문에 평생을 고생했습니다.



도대체 왜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들이 이처럼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합니까.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뽑힌 특별한 선택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선택은 그 대사를 치러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향에서 멸시와 박해를 받았으며 같은 동족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특별한 소명을 받은 예언자들은 그 길이 험난한 길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과거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비롯하여 유신 정권, 그리고 군사 정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주 인사들이 험악한 인생길을 걸어갔는지 모릅니다. 눈만 한번 감고 입만 한번 다물고 있으면 세속의 온갖 혜택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텐데도 그들은 자신의 길을 포기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래서 우리와는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구는 눈치껏 편하게 살려고 하며 또 누구는 목에 칼이 들어가도 정의와 진리를 외칩니다. 사람은 진정 자기에게 아무리 불리하고 힘들어도 사람답게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살기에도 너무 짧습니다.



요즘에도 공해 추방 운동이니 또는 우리밀 심기 운동이니 하면서 남들은 잘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문제를 외롭게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선택을 받은 분들이며 시대의 예언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아나 장애자들을 위해 삶을 온전히 투신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들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은 은혜로써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집에 며느리가 여럿 있는데 시어머니가 늙어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모두 모시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런 때는 핑계들도 많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던 셋째 며느리가 자청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후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셋째는 인내와 사랑으로써 시어머니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옆에서는 웃었습니다.



다른 동서들이 셋째를 찾아와서 이렇게 모셔라 저렇게 모셔라 하면서 잔소리들을 했습니다.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으면서도 잘못 모시네 어쩌네 하면서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셋째는 정성껏 모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저 며느리는 하느님이 내린 여자”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하신 사람은 고달픈 길에서 참 보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오늘은 특히 교황주일입니다. 교황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어려운 십자가요 또 외로운 길입니다. 늘 거룩한 일들만 있는 것 같아도 각종 세속 사건에 휘말릴 때도 있으며 이단의 위협과 통치자들의 압력에 대처해야 하는 고민도 잇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그랬듯이 그분의 대리자인 교황님들의 삶도 고달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황님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정말 좋은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분은 바오로의 뜨거운 전도 열정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양들이 원하는 곳이면 세상 어느 곳이고 달려가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어떤 결정도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실로 우리 시대의 자랑이십니다.

세상은 예언자들에 의해 구원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의 길은 고달픕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세상에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9         연중 제14주일   마르 6,1-6 (나)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

                                                  김영남 신부



한국정치의 고질병이라는 ‘지방색’은 심히 유감스럽게도 지난번 16대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심지어 같은 선거구 안에서도 후보자가 어느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몰표가 엇갈리는 현상까지 있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왔다. 고향에서 오히려 배척받으셨으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다가 어느 날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지혜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행했다는 기적들에 대하여도 듣고 경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믿지는 않았다. -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이러하다.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완전히 다 알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신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마리아의 아들’인 ‘그 목수’에 불과하였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바로 이 선입관이 예수가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들의 ‘굳어진 마음’과 선입관이 그들을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앙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고, 단지 병자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이다.”(200주년 성서). 이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이 철저히 ‘믿음’을 향해 있고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믿음이 아예 없거나 믿을 마음 자세마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신앙은 없이 놀랄만한 기적만을 요구하는 요청은 늘 거절하셨다. 지난 주일 복음에 나왔던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혈하는 부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잘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구원행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뢰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박혀있는 “선입관” 및 “굳어진 마음”에 대하여 반성하게 된다. 두 가지 방향에서 반성을 하게 된다. 하나는 주님께 대한 태도와 관련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반성이다.



첫째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먼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믿을 수 있도록, 주님을 향하여 ‘굳어진 마음’을 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반성을 하게된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하여 이미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 관계가 건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상대의 새로움에 대하여 알려고 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께서 새로 베푸시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각오할 필요가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오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십자가와 같이 매우 약한 모습으로 오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편안한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정도로만 믿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복음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우리들이 평소에 그들에 관하여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혹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있다면, 그 선입견을 접어두고, 가능한 한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순수한 모습을 보도록 노력하고, 그들이 그 방향에서 주님을 향하여 성숙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



한 인간과 한 인간의 관계에서 위기는 바로 서로가 상대에 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상대에 대하여 더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많은 결혼생활의 위기는 바로 이런 관계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우정은 ‘所有적 사랑’이요, ‘소유적 우정’일 경우가 많다.

여기서 소유적 사랑이란, 상대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상대에게 조금도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가지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태도를 말한다. 상대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강요하는 이런 태도는 상대를 ‘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이는 참 사랑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물건처럼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고귀한 존재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도, 심지어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유’하려는 사랑은 위장된 사랑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그 상대가 “자기의 고유성”을 가지도록 존중해 주고, 상대방의 다른 점을 사랑으로 수용한다.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소유적 사랑’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들은 “예수가 우리 고향 사람이니 당연히 그는 누구보다도 우선 우리 나자렛 고향 사람들을 위하여 기적을 하겠지.”하고 기대하였던 것 같다. 예수님이 가신 참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들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이 ‘소유적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     







10     연중 제14주일  마르 6,1-6 (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수님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고향을 방문하신다. 그분에게 고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온다. 하늘나라 말고 또 고향이 있었던가. 여하튼 그 분의 고향이야기를 읽으면 인간 예수님을 또 한번 느끼게 된다. 예수님의 고향은 마리아의 고향이었던 나자렛이다. 그 분의 소년시절이 담긴 추억의 마을이다.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환대하지 않는다. 왜(?) 선입견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도 맨날 우리와 함께 지내던 사람이 아니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겉모습에 매달려 귀중한 순간을 놓치고 있다. 어쩌면 그분을 떠돌이 예언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침묵으로 넘기신다. 변명이나 섭섭함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고향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인내로서 사람을 대하시는 모습을 다시 읽을 수 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다. 그런데도 이 잘못은 계속되고 있다. 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기른단 말인가. 무엇보다 선입견을 뛰어넘어야 한다. 너무 쉽게 선입견 속으로 빠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에 대한 선입관도 자칫 고정관념으로 남아 성숙한 믿음을 방해할 수 있다.



믿음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많은 것을 청한다. 도와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청한다. 고통과 시련에서 힘이 되어주시길 기도한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만 기도하여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변화가 있어야 한다. 주시기를 청했던 기도에서 주셨기에 감사드리는 기도로 바뀌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삶을 밝히는 기쁨으로 바뀔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원했던 만큼 주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보면 어떤 형태로든 주셨다. 주신 것을 찾아내어 감사드리는 믿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을 바꾸지 않았기에 은총의 기회를 놓쳤듯이 변화 없이는 기적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동반자다. 고향을 찾으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믿음 안에서 우리를 방문하신다. 늘 주셔야만 하는 예수님. 늘 나의 아픈 부분을 들어주셔야만 하는 예수님이란 선입관. 이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으면 복음의 고향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분의 방문은 얼마나 맞이하기 힘든 기회인가. 고향 사람들에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놓친다. 선입견이 빚은 잘못이었다.

예수님은 원하신다. 사람들이 자기생활에 만족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어쩜 기적일 것이다. 우리는 그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다. 조용히 때로는 강하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이 기적은 언제라도 가능함을 믿는 사람들이다.

11                연중 제14주일  마르 6,1-6 (나)

고향에서 배척받으시는 예수 (진정한 사랑?)



  한국정치의 고질병이라는「지방색」은 심히 유감스럽게도 지난번 16대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심지어 같은 선거구 안에서도 후보가 어느 지역 출실이냐에 따라 몰표가 엇갈리는 현상까지 있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왔다. 고향에서 오히려 밴척받으셨으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갈릴레아에서 활동하시다가, 어느 날 당신의 과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지혜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행했다는 기적들에 대하여도 듣고 경탄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믿지는 않았다. - 직역하면「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 -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이러하다. 그들은 예수에 대하여 완전히 다 알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신들이 이미잘 알고 있는「마리아의 아들」인,「그 목수」에 불과하였다.「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바로 이 선입관이 예수가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들의「굳어진 마음」과 선입관이 그들을「신앙에 길에서」 넘어지게 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앙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

『예수께서는 거기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고, 단지 병자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이다」(200주년 성서). 이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이 철저히「믿음」을 향해 있고,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믿음이 아예 없거나, 믿을 마음 자세 마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신앙은 없이 놀랄만한 기적만을 요구하는 요청을 늘 거절하셨다. 지난 주일 복음에 나왔던「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혈하는 부인에게 하신 예수니미의 말씀에도 잘 드러낫드시, 예수님의 구원행위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뢰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나자렛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박혀있는 「선입견」 및 「굳어진 마음」에 대하여 반성하게 된다. 두 가지 방향에서 반성을 하게 된다. 하나는, 주님께 대한 태도와 관련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반성이다.



  첫째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먼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믿을 수 있도록, 주님을 향하여「굳어진 마음」을 풀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반성을 하게된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하여 이미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그 관계가 건전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상대의 새로움에 대하여 알려고 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께서 새로 베푸시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어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각오할 필요가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오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십자가와 같이 매무 약한 모습으로 오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주님을 우리의 편안한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정도로만 믿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복음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


  둘째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우리들이 평소에 그들에 관하여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혹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있다면, 그 선입견을 접어두고, 가능한 한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순수한 모습을 보도록 노력하고, 그들이 그 방향에서 주님을 향하여 성숙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



  한 인간과 한 인간의 관계에서 위기는, 바로 서로가 상대에 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 더 이상 상대에 대하여 더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많은 결혼생활의 위기는 바로 이런 관계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우정은「소유적 사랑」이요,「소유적 우정」일 경우가 많다.

여기서 소유적 사랑이란, 상대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상대에게 조금도 다른 생각과 태도를 가지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태도를 말한다. 상대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강요하는 이런 태도는, 상대를「소유」하려는 태도이다.

이는 참 사랑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물건처럼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해서도 안되는 고귀한 존재이다. 부모와 자녀 두 관계에 있어서도, 심지어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도,「소유」하려는 사랑은 위장된 사랑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그 상대가「자기의 고유성」을 가지도록 존중해 주고, 상대방의 다른 점을 사랑으로 수용한다.



  나자렛 사랄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소유적 사랑」을 하려고 한 것이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들은「예수가 우리 고향 사람이니, 당연히 그는 누구보다도 우선 우리 나자렛 사람들을 위하여기 적을 행하겠지」 하고 기대하였던 것 같다. 예수님이 가신 참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들 마음속 깊이 박혀있는 「소유적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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