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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6월 23일 (월) 19:38
분 류 연중8-1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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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3주일



         17. 이기정 신부(다)/30                18. 김정진 신부(다)/31

        19. 함세웅 신부(다)/33                20. 강길웅 신부(다)/35

        21. 유영봉 신부(다)/37                22. 강영구 신부(다)/38

        23. 나기정 신부(다)/42                24. 이제 비로서 제자가(다)/44

        25. 조건없는 믿음(다)/45

        



17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이기정 신부





신학생들이 방학해서 바깥에 나왔습니다. 신학생 때에 방학을 기다리던 옛날이 생각납니다. 겨울방학보다는 역시 여름방학이 더욱 신이 났습니다. 과중한 시험을 하루하루 치러나가면서 방학 전 9일기도가 시작됩니다. 이 9일기도의 특징적 맛을 내는 성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신학생으로서 세상사회에 나갈 때, 주님의 보호를 청하는 좋은 기도문들로 꾸며졌습니다.



그 가사 중에 바로 오늘 복음의 끝 구절이 나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 62). 그렇습니다. 밭을 가는 사람이 자기가 일구어 놓은 뒷골을 되돌아보면서 쟁기질을 하면 어떻게 되겟습니까. 골이 잘못 잡혀질 것입니다. 한눈을 팔지 말고 가러가야 할 앞길만을 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일꾼으로 자라가야 할 신학생들이, 세속 일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돈 버는 일, 애정관계, 가정문제, 대인관계 등에 신경을 쓰지 말고 조심하며, 집안에서 식구들이 사회적 사고방식으로 일들을 결정해도, 신학생으로서 너무 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방학은 신학교 생활의 연장으로서, 교회의 일과 주임신부님의 지시에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을 유지하기에 전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학을 지낸 후신학생들은 주임 신부님의 방학중의 생활평가서를 받아 가지고 신학교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신학생 방학의 분위기에서, 우리 신자들도 배울 만한 좋은 삶의 원칙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기로 신앙선서를 굳게 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영세받던 때를 생각하면, 과연 그 후 계속해서 쟁기를 제대로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 정신을 차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상에 계속해서 접근해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입니다.



정치상황이 인생의 전부인 양 지나치게 말려들지는 않았는지, 경제생활에 대해서는 또 어떠했는지, 세상의 명예와 인생재미 등에만 몰두한 적은 없는지, 어쩌면 그동안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시는 경고를 받았는데도 듣지 못한 건 아닌지, 혹시 우리 자신이 지금, 그 죽어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닌지까지 살펴봅시다.

신학생들에게 방학은 생활과목이라는 시간이듯 배움에 방학이 없고, 신앙생활에 휴식이 있을 리 없습니다.











18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길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를 뒤따라 나섰기에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길로 해서 어디로 가시든 우리 신자들은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우리도 두말 말고 그러한 발자취를 더듬는 것이 지당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졌다고 합니다. 그 길은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을 뒤따라 나선 사람들은 모름지기 고통과 시련과 박해와 형극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푸대접의 사건을 들어 제자들의 정신상태를 바로잡아 주시려는 점이 역력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예수님께 대한 냉대에 분격한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하고 여쭈웠으나 예수님은 저들을 못마땅히 생각하시며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을 뒤따라 나선 자들의 마음의 자세와 정신적 상태에 관하여 일대 교훈을 남기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활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도 가끔 야고보와 요한사도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갖가지 유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때로는 저 악랄한 공산주의자들을 원자탄을 싣고 와서 몽땅 부수어 버리고 싶은 충격에 사 잡히기도 하고 때로는 우호국이라 동맹이라 뇌까리면서 얄밉게 구는데 실망한 나머지 큰 지진이라도 나서 다 죽어 없어지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반한 활동하는 내외 인사들이나 조국을 배반하는 언동으로 나오면서도 조금도 수치로 여기지 않는 만족반역자들에게 대해서는 소리 없는 총이 있다면 쏴서 다 없애버리고 싶은 울분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에서 나온다기보다 민족적 정기에서 솟구쳐 오르는 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뒤따르려고 나선 우리 신자들은 오늘 복음의 정신을 음미하여 하느님의 뜻에 의합하도록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또 들려 옵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5,44-45)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길은 이같이 인내와 억제와 자제하는 생활이기에 우리는 일반인들과 같이 우리의 울분을 터뜨려 발산시키는 데도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 다 못하고, 하고 싶은 짓 삼가며 참아견디는 수가 많습니다. 이러기에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미신자들이나 타교파인들에 비하여 적극성이 없고 활기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일리 있는 말이나 수긍이 가는 점도 있습니다만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배경으로 하고 낙관적이고도 낙천적인 신앙교리의 정신을 따라 누구보다도 의욕적이고도 활동적이어야 하겠습니다. 저 바오로 사도가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의 발판으로 삼고 동분서주하던 대활약상은 우리 신자 생활의 모범과 지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분석하여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제 1 독서를 보면 엘리아 예언자가 후계자를 삼으려고 엘리사를 찾아갔을 적에 엘리사로 하여금 집에 가서 작별 인사하고 올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승낙하지 않으시고 만사를 제쳐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누구보다도 큰 것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 별로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더 많은 노력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티 없이 맑은 어린이들이 첫영성체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고 어린이들을 사랑하시지만 예수님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한 쌍의 젊은 남녀들이 제단 앞에 꿇어 하느님 앞에서 혼인성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고 그들이 일상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신자 각자에게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주일 미사를 궐하지 않기를 요구하시며 더 열렬한 가정의 기도생활과 깨끗한 양심적인 생활을 바라시며 사랑과 봉사적 희생생활을 갈망하고 계심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쟁기를 잡고 뒤를 자구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말씀하신 오늘의 복음을 우리 신앙생활의 좌우명으로 삼아 과거 잘못에 집착하지 말고 앞으로의 굳은 회개와 각오로 새 마음으로 출발하여 새 사람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19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쟁기를 잡고 할 일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은, 사마리아에 관한 예수님의 태도와 십자가를 진 신앙인이 걸어야 할 사명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중부 도시로서 구약사를 통해서 보면 유태인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교도를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 지방을 지나실 때 냉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 역사적, 종교적인 적대 관계에 개의하지 않으시고, 온정을 베푸시며 오히려 적대 감정을 가진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보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구세주이신 예수님도 의인보다는 죄인의 회개를 더 원하셨기에, 이교도의 지칭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두셨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대화 참조: 루가 복음 10장 25-37

절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참조)



예수님의 첫째 사명은, 유다인들의 구원이기는 했어도, 그의 구원 대상은 전 인류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신 말씀이기에, 여기서는 구원의 보편성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내용은, 예수를 따라야 할 신앙인은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십니다. 우선 ‘여우는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격언으로, 당신은 거짓이 없으신 분, 진실하신 분, 틀림없는 분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부르시고 초청하시며, 또 명령하십니다. 당신의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우리를 부르며 명령하십니다. “나를 따르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는 끊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속에 죽고, 죄에 죽은 신앙인은 영세로써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보장인 새 생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신앙인이 죄에 물들지 말아야 함은 물론입니다. 계명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

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그 요구는 조건 없는, 완전한 전적 봉헌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 그것은 틀림없이 인류에게 명하는 자연계명입니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가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오" 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인륜을 무시한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자연보다

는 초자연이, 육체보다는 영혼이, 인간적인 것보다는 하느님의 것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일깨워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결정, 행동에 있어서는 보류하거나 미루어서는 안된다는 것, ‘바로 이 순간'을 다 바치라는 뜻입니다. 그 행위는 불효의 행위가 아니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공경이 얼마나 급박하고 중대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그 신앙의 행위는 초연한 자세로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상에서 성모님과 제자에게 하신 그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의 아들', ‘이는 당신의 어머님'. 전적 봉헌은 사랑으로써 이어지고 완결되기에 말입니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일,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리고 의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망설임이나 주저, 아쉬움과 서글픔이 따를 그 행위마저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이와 같이 절대적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신앙은 인간적인 이 모든 섭섭함을 이겨내고 극복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길이 그러하였고, 사도들이 걸어간 길이 그러하였으며 순교자들의 행위가 그러하였고, 신앙인 무리들의 결정이 그러하였습니다.

  

쟁기를 잡은 농군은 밭을 갈아야 합니다. 쟁기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꼭 쥔 신앙인, 그 신앙인은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밭고랑에는 하느님의 씨앗(말씀)을 심고, 그 열매(성령)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노력한 그만큼 추수할 곡식을 비례적으로 얻게 마련입니다.

  

성세받았을 때의 그 기쁨, 영성체 때의 일치, 미사, 그리고 기도 중의 느낌, 결심, 이 모든 것이 성당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일터에서나, 언제든지 똑같이 반복될 때 우리는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이른 새벽, 또는 늦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또렷또렷이 들려오는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들을 부르신 그 메아리를 감지하여야 합니다. 조용한 밤, 또는 소음의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은은한 속삭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는 천둥치는 소리보다도 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  “나를 따르라!" 그 소리를 들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마시고 힘있게 한걸음 내딛으십시오. 당신의 한 걸음은 양심적인 생활, 남을 돕는 행위, 그리고 성실한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그 소리가 안 들린다면 좀더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마음의 귀를, 영혼의 귀를 하느님께로 말입니다. 

















20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부르심, 그 결단의 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열왕 19,16b.19~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나섰다)

제2독서 갈라 5,1.13~18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복 음 루가 9,51~62 (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 소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결단과 희생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결단, 자기를 죽여야 하는 희생, 그리고 땀흘리며 수고하며 걸어가는 기나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부르는 장면이 아주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때 겨릿소를 가지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곁을 지나면서 겉옷을 벗어 엘리사에게 걸쳐 주자 엘리사는 지체없이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 달려 갔습니다.



여기서 겉옷을 벗어 걸쳐 준다는 것은, 엘리야가 가지고 있는 예언자의 직분과 권한과 그 능력을 전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사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부모와 작별의 인사가 필요했습니다. 인사 없이 떠날 수는 없기 때문에 허락을 받아서 떠날 차비를 했습니다. 먼저 황소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굽습니다.



황소를 죽이고 쟁기를 부순 것은 다시는 그 일터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말하고 작별의 인사를 전하게 되니, 중도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본 인에게 커다란 수치요 죽음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이처럼 철저히 준비를 하고 스승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대단히 큰 영광이지만, 그러나 용기있게 따라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독서와는 대조적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이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첫번째 사람은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하고 간청했지만 그러나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 보면 적극적으로 따라가겠다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이처럼 부르심은 인간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 당신의 뜻에 의해서 불리워집니다. 여기서 부름을 받는 이의 자세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확실하고도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결단과 수락입니다.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또 어디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그 길이 사막일 수도 있고 가시밭이나 자갈밭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르시니까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 가는 우리의 자세요 응답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끊고 죽이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황소를 죽이고 쟁기를 부쉈듯이, 그리고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버렸듯이 자기 것을 포기하고 끊어 버리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어디에 자기가 묶여 있거나 매달려 있으면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무거우면 못 따라갑니다. 재물이 많아도 안되고 인정이 많아도 안됩니다.



셋째는, 뒤를 돌아다봐서는 안됩니다. 뒤를 돌아다보면 10년 동안 열심하게 걸었던 공로도 다 물거품이 됩니다. 아무리 앞을 보고 십 년이나 백 년을 걸어갔어도 뒤를 돌아다보면 바로 한 발짝 거리 에 파계가 있습니다. 십 년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래서 나흘 거리를 사십 년 걸려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로 큰 영광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길은 평탄한 것이 아닙니다. 또 아무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땀흘리며 고생하는 자만이 주님의 뜻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도구로서 올바르게 쓰여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참으로 훌륭하신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교회로서도 실로 새 시대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많은 기도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소명을 가지고 성실히 봉사함으로써 교회가 진정으로 세상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존경과 애정으로 교황님께 축복의 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21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하늘나라는 끊어버림에서 온다

                                             유영봉 신부  



묵상 :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시며,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제자 됨의 길은 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름에 있다,



철저히 버려야 얻을 수 있다.



“버림으로 얻고, 미워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극복하기 힘든 대표적인 욕심이 물욕, 성욕, 권세욕이라고 한다,

물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사심이 없기에 많은 돈을 관리하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성적인 욕구를 철저히 끊고 뛰어넘은 사람만이 모든 이성을 참으로 자유롭게 대할 수 있고, 소유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권위와 권력이 지배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만이 참으로 높은 지위f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해 그것을 ‘내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는 한,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소유하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없을 때, 참으로 사심 없이 대하고 위할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깨달음을 얻는 첫걸음은 끊어버림이다



  불교에서 특별한 전통과 맥을 이어온 종파는 선종(禪宗)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전부터 중국에는 이미 불교의 교리를 꽃피울 충분한 정신적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선(禪)불교가 중국에 소개되기 이전에 장자(莊子)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본질을 괘뚫어 봄(本質直觀․본질직관)'에 대하여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본질을 꿰뚫어 봄이란 바로 '깨달음' 즉 '득도(得道)를 말하는 것인데, 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하면서 심재(心齎), 좌망(坐忘), 조철(朝徹)을 이야기하고 있다.



  심재(心齎)란 마음의 재(齎)를 말함인데, 마음이 제 멋대로 오락가락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한곳으로 모으는 것을 뜻한다. 즉 심지(心志)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세상만사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깨달음을 얻는데 온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좌망(坐忘)이란, '모든 것에서 마음을 거두어 잊어버림'을 말한다, 이는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심지어 살겠다는 욕심이나,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끊어버리는 '완전한 자기 비움'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朝徹)이란, 이는 문자 그대로 '아침의 맑음'을 말함인데, 새벽에 여명(黎明)이 밝아올 때 어둠이 걷히면서 온 천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모든 애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완전히 비움으로 어떤 것에도 매임이 없는 고요와 평화와 맑음'이다,

  이런 세가지 과정을 거쳐야 본질직관 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장자의 가르침은 이미 선불교가 말하는 선(禪)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보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



‘하늘나라를 얻음'은 바로 '하느님을 뵈옴'이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추종의 자세를 역설하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모세와 많은 예언자들과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고"(창세 12,1),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겨야 했다.

성모 마리아도 일생동안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하는 자세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며 사셨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갈림 없는 마음'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34,'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려라"(마태 18,8)고 하셨다,











22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참 제자가 되는 길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자 교황의 날입니다. 전 세계 교회의 최고 목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교황, 교회의 최고 사목자를 일컫는 이 말은 이미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기에 무감각해지긴 했습니다만, 사실은 별로 어감이 좋지 않은 말입니다. 무슨 황제와 같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낱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교황은 황제가 아닙니다. 영어로는 Pope, 이태리어로는 Papa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아버지 혹은 아빠라는 아주 친근한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우리 동양권에서는 교황이라는 엄청난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최고 사목자이신 교황은 황제가 아닙니다. 그 어떤 세속적인 권리도 갖고 있지 않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세계의 평화를 걱정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분, 교회의 모든 양들의 구원과 안위를 걱정하시는 분, 교회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최고 사목자일 뿐입니다.



아마도 그분이 전 세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그분이 황제가 아니라, 아무런 권력도 지니지 못한 목자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교회의 모든 공식 문서에 서명을 하실 때는 언제나 이렇게 하십니다. “모든 종들 중의 종인 요한 바오로 2세.”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교황은 황제와 같은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니라, 종들 중의 종으로서 모든 인간들 중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무런 권력도 지니지 못했지만, 가장 무거운 짐을 지신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분을 비추시어 언제나 바른 판단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온 세상의 정신적인 인도자가 되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을 잠시 묵상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예수를 따름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그분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사람에게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두 번째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세 번째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저는 예수님의 이 세 마디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랍시고 살고 있는 저의 초라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첫번째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무소유(無所有)”라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당신처럼 철저히 모든 것을 포기하는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철저한 무소유, 그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첫번째 길입니다.

  “돈에 집착하고, 재물에 연연하고,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고, 향락을 추구하면 사람은 부자유스럽게 된다. 네가 정말 나의 제자가 되고 싶으면 모든 것을 버려라. 그러면 너는 하늘처럼,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와서 나의 제자가 되어라.”하신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지닌다는 것은 번뇌의 시작입니다. 무엇인가를 지닌다는 것은 자신을 옭아매는 올가미입니다. 새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려면 그 발목에 아무 것도 매달고 있지 알아야 합니다. 발목에 주렁주렁 사슬을 매고 있으면 새는 자유롭게 휠훨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돈에 얽매인 사람은 돈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재물에 얽매인 사람은 재물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권력과 명예를 얻고자하는 사람은, 밤낮 없이 그것 때문에 머리를 싸매게 됩니다. 향락과 안일에 빠지거나 그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마력에서 헤어 나오기가 어렵고 중독이 되게 마련입니다. 발목에 족쇄가 채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큰 향락을 누리며 그것도 오랫동안 누릴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면 어찌하나? 사고가 나면 어찌하나? 죽으면 어찌하나? 불이 나면 어찌하나? 강도나 도둑이 들면 어찌하나?” 불안, 초조, 근심, 걱정과 염려로 날을 지새게 됩니다. 탐욕과 온갖 번뇌의 사슬이 주렁주렁 발목에 달리게 됩니다.

  

쇠사슬에 묶인 새처럼 이런 사람은 날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저 높고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훨훨 날지 못하고 좁고 답답한 새장 속에 갇혀서 푸드득거리다 죽게 됩니다. 흐르지 못하고 웅덩이에 고인물은 썩게 됩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 향락의 둑에 갇힌 물은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고, 거기 온갖 벌레가 들끓으면서 썩게 됩니다.

  

무소유, 그것은 곧 자유입니다. 무소유, 그것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늘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철저히 모든 것을 버린 예수님은 참으로 하늘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분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으로 충만하고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소유(루가 6,20; 12,33).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두 번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자기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제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한마디로 “무인연(無因緣).”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인연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인간은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바탕으로 한 인간 관계, 애증(愛憎)을 바탕으로 한 인간 관계가 바로 그것인데, 우리 인간들의 발목을 묶는 또 다른 족쇄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인연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그 인연이 번민의 시작입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부모 때문에, 자식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 옳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혈연(血緣), 학연(學緣), 지연(地緣)에 묶여서 편을 들게 됩니다. 동업자는 동업자끼리, 동창은 동창끼리, 종씨는 종씨끼리, 호남 사람은 호남 사람끼리, TK는 TK끼리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족쇄를 채웁니다. 돈과 재물에 연연하고 권력과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 이 땅에서 잘 사는 비결이 되는 것처럼, 서로를 인연으로 묶어 초록은 동색(草綠同色)으로 한동아리가 되는 것이 이 땅에서 잘사는 비결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인연이 번뇌의 싹입니다. 바로 그 인연 때문에 사랑하고 증오하고 시기, 질투하고 싸우고 죽이게 됩니다. 지난 20일자 신문에는 경찰 간부가 내연의 여인을 죽이고 권총을 가지고 사라졌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다 인연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이지요.

단단히 잡힌 발목을 풀려다가 빛은 비극이지요.  얽히면 얽힐수록 풀 수 없는 난마(亂麻) 같은 끈이 인연의 끈입니다. 이해 관계로, 정실(情實)로, 애증으로 묶이면 묶일수록 부자유스럽게 되는 것이 인연입니다.

  

고향도 버리고, 부모 친척도 버리고 출가하여 떠돌이가 되신 예수님은 그 어떤 인연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인연의 끈을 끊는다는 것은 고립 무원(孤立無援)의 외톨이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연의 끈을 끊어야 비로소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무인연의 예수님은 그래서 하늘입니다. 하늘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은 모든 사람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하늘 같은 예수님은 그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을 우리는 주님이라 구세주라 부릅니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인연!(無因緣)(루가 14,25).

  

세 번째로 찾아온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지나간 시간과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차피 시간의 흐름과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미련은 미련으로 남아 있고, 상처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과거 때문에 오늘의 “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 과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받았던 상처투성이의 몸을 부등켜 안고 몸부림쳐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늘 거듭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시간들입니다. 쟁기를 잡고 밭을 갈면서 뒤를 돌아다보면 밭을 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라는 시간과 지나간 인연에 발목이 잡

혀서 오늘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내일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나간 시간과 지나간 인연이 아니라, 오늘 지금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연연하시지도 않았고, 내일을 염려하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비록 죄로 상처 난 과거라할지라도, 그 과거를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내일 역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강론을 하는 저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과 여러분 앞에서 참으로 초라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인연을 끊지 못해서, 과거의 삶에서 거듭나지 못해서 고뇌하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부끄럽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말고는 기댈 곳이 없군요.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23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나기정 신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고, 참으로 보람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된 진리를 알고 확고한 정신적 지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과 향락에 눈이 어두워지고 적당주의, 편의주의에 빠져버린 현대인은 몰려오는 사회풍조에 자신을 내어 맡긴 채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요, 법이나 사회규범을 적당히 지킴으로써 할 바를 다 한 것이라고 자신을 달래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풍토 가운데서는 참된 자기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고 존재보다 소유가 판을 치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인생의 가치기준을 확립하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 참으로 신자다운 태도요, 신앙에 뿌리박은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님과 함께라면 가시밭 천리 길도, 열 길 물속도 함께 하리라는 분연한 결의가 있을 때 나는 참으로 ‘나’일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결의가 공동체 속에 사랑을 실천하고 상호 형제애를 꽃피워주며 세상을 희망과 광명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따라야지 핑계를 찾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장례를 치른다음에”, 혹은 “작별인사를 한 후에”등등 하다보면 세속에 연연하여 갈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핑계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2)고 주님은 힐책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떨쳐버리고 어디든지 따라 갑시다.



 옛말에 “우물을 파려면, 한 우물만을 파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고 온 정신을 집중하고 정성을 다 들여서 초지일념으로 그 일에 임한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크리스찬이라 자처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진리라고 믿고 있기에,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있고, 거짓됨에의 속박과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이 진리의 자유에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순종하고 추종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 부르심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서, 나의 작은 일에 집착하거나, 주님 추종에 방해되는 것에 미련을 갖고 있지는 않는가 반성해 보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가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 제가 살면서, 세상일도 좀 신경를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사회 이목도 있고, 지위도 있으니, 조금은 봐주십시오”하고 청한다. 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 가정도 생각해보고, 예의를 갖출 것도 갖추고 체면도 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사”고 청한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 일은 세상에 맡겨두고, 당신을 따라 나서라고 하신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덧붙여서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데 장애되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미련을 버리고, 깨끗하게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생활 가운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께로 다가가는데 방해되는 것들은 없는가 돌이켜 보고, 당신께만 의지할 은혜를 간구하자.









24   연중 제13주일   루가 9,51-62 (다) 이제 비로소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사람 -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 평범한 일상 가운데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자기 삶의 터전과 도구들을 다 버리고 흔연히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제1독서).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제자 됨의 조건에 비하면 엘리사의 이 경우는 차라리 인간적이고 더 실현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엘리사에게는 부모님과 작볕 인사라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비정(非情)하리만큼 단호한 것이었습니다. 「제자의 길은 영육으로 머리를 둘 곳조차 없을 정도로 힘들고 험난한 길이다!. 아버지의 장례마저도 그것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당장 나를 따라나서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여라!.

길떠난다는 작별의 인사도 필요 없다. 쟁기를 잘고 뒤를 자꾸 돌아보지 말아라!」(복음).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는 이처럼 단호한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너무 어려워 웬만해서는 감히 응답하여 따를 수 없을 것 같은 이「제자의 길」!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가 지금 「하느님의 사람 -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있다니!. 사실 우리는 어느 모로 보나 저 큰 결단을 내리기에는 별로 선하지도

의롭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부르심의 길을 걷고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한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당신을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청년의 뒷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역시

옳으셨습니다. :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부르심에 대해 결단하고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부르시는 분」의 은총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 예수님의 「참」제자로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부르심을 받기에 너무나 부당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지금의 나의 모습 역시 아직도 그 제자에게 맞갖은 삶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제대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107?)께서는「나는 이제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 니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맹수에게 던져지는 형을 선고받고 로마로 압송되시면서, 그 기간 중에 여러 교회에 7통의 편지를 쓰셨는데, 이 편지들에서 성인께서는 「자신은 하느님의 밀알로서, 이제 맹수의 이에 갈려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자신을 위해 구명운동같은 것을 함으로써, 이 귀한 기회가 헛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간청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해 선택한 그 죽음을 통해「비로소 참 제자가 된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자신을 죽이는 일」,하느님 나라와 그 백성인 이웃들을 위해서「나의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 이것이 오늘을 사는 예수님의 제자

인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일입니다.



이미 부르심을 받고 결단을 내려 그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우리에게 「참 제자 됨 」을 위한 부르심과 결단은 매순간 계속되고 또 요구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결단의 응답 역시, 맨 처음에 그러했듯이 오늘 이 순간에도「부르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협조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 분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제2독서)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참 제자에로 의 부르심에 대한 이 끊임없는 결단의 삶은, 이 세상 에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결국 하느님의 나라에서 풍성한 결실로 완성될 것입니다.  









25            연중 제 13주일   루가 9,51-62 (다) 조건없는 믿음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이 따를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거나 아니면 머리를 둘 곳조차 없을 만큼 복음을 전하기에 동분서주하니까 따라올 수 없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겠다면서도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세운 예도 있다.

그 첫째는 죽은 아버지 장례를 치루게 해 준다면 주를 따르겠다는 예고, 또 하나는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준다면 역시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무조건 따르라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같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그분의 요구는 마찬가지로 절대적이다. 지체할 핑계도 이유도 구실도 주시지 않으신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가혹한 요구 같지만 우리가 구원되는 것을 빨리 보고싶어서, 한 마디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마태 19,27)하고 여쭌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 10,29-30)라고 대답하셨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조건없는 절대적 믿음 속에서 항구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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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교황님은 누구십니까? 2008-06-27 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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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임승욱 요한금구 2008-06-23 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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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주일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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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기원미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6월 25일 2008-06-20 4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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