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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6월 23일 (월) 19:37
분 류 연중8-1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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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13주일



  8. 이수현 신부(나)/16

        9. 강길웅 신부(나)/17                 10. 김영남 신부(나)/19

        11. 이상섭 신부(나)/21                12. 안충석 신부(나)/23

        13. 김정진 신부(나)/25                14. 교구 주보(나)/27

        15. 윤 바실리아 수녀(나)/28           16. 믿음 안에서(나)/29



8               연중 제 13주일   마르 5,21-43 (나) 신앙의 눈

                                                     이수현 신부



열왕기 하권에 의한 1독서, 수넴 마을을 지나가는 엘리사를 ꡐ하느님의 사람ꡑ으로 알아보고, 지속적인 대접을 했던 한 여인, 그로 인하여 아들을 얻는 은총을 받게되었다는 내용이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 의한 2독서에서, ꡐ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는 새

생명으로 태어날 것이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ꡑ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ꡒ부모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ꡓ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부모나 처자는 세상적인 욕망과 집단적 혹은 개인적인 이기심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욕망이나 이기심을 버리고 ꡒ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ꡓ고 요구하고 계신다. 그리고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ꡒ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상을 받으리라.ꡓ고 하시는데, 여기에서 ꡐ내 제자ꡑ란 12사도나 특수한 계층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형제, 자매들을 의미한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ꡐ하느님의 사람ꡑ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간직한 여인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그러한 은총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우리는 수넴 여인과 같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ꡐ하느님을 위한 삶ꡑ을 살아야 하겠다.

즉, ꡒ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ꡓ하신 예수님의 본부대로,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모든 형제, 자매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을 위해 사는 길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 새생명을 얻는 길이 되리라.

























9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탈리다 쿰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1,13~15;2,23~24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다)

제2독서 Ⅱ고린 8,7.9.13~15 (넉넉하게 사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주십시오)

복 음 마르 5,21~43 (소녀야, 일어나거라)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신 장면은 아주 극적입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세상없는 '예수'라 해도 죽은 자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부정적인 견해는 못 들은 체 하시고 죽은 소녀의 아버지에게 그저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 한마디로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마귀에게 호령하시니 마귀가 도망치며 바다에게 명하시니까 바다가 잠잠해집니다. 12년 동안 하혈증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단지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뿐인데 병이 나았으며 죽은 자에게 명하시니 그녀가 일어섰습니다. 자연 법칙으로써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야말로 실로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본래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 속해 있으며 하느님 안에는 언제나 살아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세상에 죽음이 왔습니다. 따라서 생명이 하느님의 작품이라면 죽음은 인간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오늘 1독서에 보면 악마의 시기 때문에 세상에 죽음이 왔다고 전합니다.



죽음은 실로 악마의 시기의 결과요 또한 인간 범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한번 죄에 떨어진 인간은 영원히 구제불능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만들었지만 그러나 다시 소생 할 수 있는 문은 영원히 닫아 버렸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죽음이 얼마나 큰 절망인 줄도 모르면서 절망에 빠졌던 것입니다. 아주 끝장이었습니다.



세상은 이제 단 1%의 희망도 없었습니다. 악마의 승리는 아무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악마의 세력으로 인해 영원히 죽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실로 세상을 죄와 고통과 병과 그리고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세가 당당하던 죽음의 세력은 이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미래에 절망은 없습니다. 아무리 죄가 크고 또 그 죄가 아무리 많다 해도 예수님 앞에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도 마찬가지요 죽음 역시 마찬가집니다. 거기가 지옥만 아니라면 세상은 희망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항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걱정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사실, 믿음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며 가난한 마음을 풍요롭게 채워 줍니다. 병든 인생을 건강하게 해 주며 죽은 시체를 생생하게 살려 줍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무엇이나 가능하신 분인데 우리는 단지 믿음이라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만납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자존심과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요 또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사람이 예수라는 어정쩡한 시골 사람 앞에 와서 통사정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은 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딸이 이젠 죽었으니 다 틀렸다고 전했을 때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었습니다. 완전한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딸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하혈증을 가진 여자도 마찬가집니다. 병 자체도 어디다 드러내 놓고 말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병이었고 또 무려 12년 동안이나 앓으면서 가산만 탕진했던 여자였습니다. 세상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캄캄한 절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체면 불구하고 그에게 다가가 옷을 만집니다. 자기 분수에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는 어려우니까 염치 불구하고 옷이라도 만져 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신적인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렇게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치유받았습니다.



우리가 고통과 죄와 여러 가지 질곡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먼저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지는 않고 걱정만 많으며 매달리기도 전에 실망부터 합니다. 그러니까 삶 자체가 죽어 있습니다. 오늘 소녀처럼 죽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걱정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언제 어느 때고 벌떡 일어설 수 있습니다.



"탈리다 쿰."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10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거라!)

                                                      김영남 신부



성령강림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등, 연이어 있던 대축일들이 다 지나고 이제는 참으로 평범한 “연중 주일”이 다시 계속된다.

그리고 어느덧 7월이 되어 무더운 여름날이 계속되니, 우리는 자칫하면 일상생활의 ‘권태’에 빠지기 쉽다. 오늘 복음은 바로 권태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극심한 생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두 신앙인을 만난다.

한 사람은 어린 딸을 어떻게든지 살려보려고 예수님께 찾아와 겸손하게 발치에 엎드려 간청하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며 고생하던 한 여인이다.



본래, 두 가지 이야기인데, 하나로 잘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기적이야기를 통해 복음사가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참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두 이야기가 다 ‘믿음에서 나오는 용기’를 고무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개의치 않고 사랑하는 딸의 치유를 위해 용기있게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린다.



그 만큼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다. 병에서 낫기 위해 열두 해 동안이나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다 허사였던 여인도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있게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단을 만진다. 바로 이 ‘믿음의 용기’가 그들을 ‘구원한다’. 예수님은 하혈하는 여인에게는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안심하고 가거라!”고 말씀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질문으로 시작된 제자들과의 대화는 치유를 받은 여인의 두려움에 찬 고백을 준비해 준다. 끝으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직역하면 ‘구원하였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고 말씀하시는데 단지, “낫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혈하던 여인에게 선사된 치유가 단지 육체적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우리들의 체험에서도 많은 경우에 ‘육체적 치유’는 ‘마음의 치유’와 ‘영적 치유’에로 이어진다.



레위 15, 25-29에 의하면 하혈은 하혈하는 여인을 제례적으로 정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하혈하는 여인은 하혈하는 동안 공동예배에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그 여인은 병 자체가 주는 아픔도 아픔이었겠지만,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아픔도 크게 겪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안심하고[평안히] 가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작별 인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파견의 말씀’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삶에서 소외되었던 이 여인은 이제 공동체로 돌아가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가슴에 안고 살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킨 이야기’의 중간에 삽입된 ‘12년동안 하혈하던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의 효과를 배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죽어가던 야이로의 딸은, 하혈하는 여인의 일로 인해 예수님의 도착이 지체되는 동안 결국 죽게되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것이다. 사람들의 곡성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비웃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가 그 소녀의 부모와 함께,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이 사건의 특별한 증인으로 여기에 함께 언급되고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 가운데 이 세 제자만을 대동하시는 장면은 이 곳 외에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장면과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의 장면이다. 이 세 제자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신원이 드러나는 특별 계시 사건의 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오늘 주일 복음의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도 전해지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활기찬 문체로 되어 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사가와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킨 이 사건은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탈리타, 쿰”(마르 5,41)이라는 아람어로 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탈리타, 쿰”은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거라!”를 뜻한다. “탈리타 쿰”이라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경우에서처럼 아무런 출구도 보이지 않는 듯한 상황에서 이 말씀이 기억된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거라”)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죽음의 세력까지도 제압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 참으로 그분만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라고 초대한다. 주님은 먼 훗날, 종말 때에 죽음에서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매일 매일의 우리의 일상 삶에서, 때로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듯한 우리의 삶을 향해서도 “얘야, 일어나거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는 분이시다.











11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믿음과 은총

                                                         이상섭 신부



 굳센 믿음과 겸손된 믿음으로 성체를 모신다면 풍부한 은총을 우리는 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과 하혈증에 걸린 여인의 믿음에 대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회당장이라고 하면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회당을 잘 관리하는 책임을 가졌고 장로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 병이 들어 곧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뵙고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의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와 같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자기의 지위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겸손된 믿음을 보시고 죽었던 그의 딸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혈증에 걸린 여인은 이름난 의사를 찾아다니며 가산마저 탕진했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도리어 병세만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소문에만 듣던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 함께 모여 있는 군중 속에 들어갔습니다. 군중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였으나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예수님 뒤에 바짝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내가 저 분의 옷자락만 만지더라도 내 병이 나을 것이다.”하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인은 병이 완쾌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그 여인의 병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여인은 두려워 떨며 엎드려 “선생님, 제가 손을 대었습니다.”하고 사실대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바라보시며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평안히 가시오.”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군중들이 예수님 가까이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졌을텐데도 불구하고 왜 단 한사람에게만 은총과 기적이 일어났겠습니까? 오로지 그 여인만 확고한 믿음과 정성된 겸손으로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 여인은 완전히 병이 낫는 은총과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에게도 많은 친구가 있었을텐데도 회당장만이 겸손된 믿음을 가졌기에 그의 딸을 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도 우리가 그 여인과 같은 굳센 믿음과, 회당장과 같은 겸손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고, 또한 기적도 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두 사람의 항구한 믿음은 어떤 인간적인 행운이나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을 완전히 송두리째 내맡기는 믿음이었기에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진실된 믿음을 보시고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소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천년 전에 하혈증에 걸린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가 믿었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빵의 형상으로 있는 것뿐입니다.



이천년전에 예수님 둘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분이 적었듯이 오늘날에도 미사를 봉헌하는 제단 둘레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으나 은총을 받는 분은 적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시는 분이 적은 것은 회당장 야이로와 같은 겸손된 믿음과, 하혈증에 있는 여인이 가졌던 굳센 믿음을 가진 분이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또는 바리사이파들처럼 속은 텅 비어 있고 겉으로만 믿음을 가진다면 그 믿음은 진실된 믿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자신까지 버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와 항구한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성체를 모시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은 주어질 것이며 기적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굳센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과 같이 우리도 굳센 믿음과 겸손된 믿음으로 성체를 내 마음에 모신다면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풍부한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12     연중 제 13주일  마르 5,21-43 (나) 네 믿음이 이미 너를 구하였다.

                                                       안충석 신부





 어느날 저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울며 불면서 병자의 성사를 청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따라 서울대학병원 어느 병실 문을 막 들어서니 16살 가량된 소녀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소녀는 죽고 다만 오늘 복음에 나온 아버지처럼 방금 죽은 외동딸 앞에 선 침통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눈길만이 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울음소리만이 초겨울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가운데 소녀의 눈과 찬 손에 성유를 바르면서 공장에 다니며 성실한 삶을 살다 간 갓 피어난 한 송이 백합화 같은 평온한 얼굴 모습에 마치 천사를 대하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애통해하는 부모님께 그녀는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행복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라는 위로의 말을 뒤에 남기고 돌아섰습니다. 모시고 간 성체를 다시 성당 감실에 모시고 “주님, 저들에게 곧 다시 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깜깜한 성당 안에서 죽은 소녀의 마지막 눈빛 같은 성체등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일주일에 한번 병자성사를 주러 다닐 때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벌써 12년 간 중풍에 걸려 꼼짝도 못하는 할아버지 뒷바라지만 해 오시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납니다. 손에 물이 마를 사이도 없이 고생 고생하시면서 어서 빨리 돌아가시어 남 고생시키지 말라고 성화하셨는데 막상 운명하시고 나니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삶의 지주가 끊어지고 나니 죽은 남편의 뒷바라지로 기력이 없어지는 것보다도 의지할 데가 없어 삶의 기력이 더욱 없어 그 전보다도 더욱 자주 벽에 기대신다는 것입니다.



글쎄 오늘 복음 성서에서의 장면처럼 “이 소녀는 죽지 않고 자고 있습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비웃던 자들처럼 이 할머니의 말씀은 노망처럼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할머니가 몇 십년 동안 자기의 몸과 수족 하나 꼼짝 못하고 살아오는 영감의 몸까지 두 몫을 하기에 기력이 핍진하고 지칠대로 지친 할머니의 모습을 보아 왔기에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입니다.


역시 인간은 삶의 지주인 사랑의 대상자가 있어야 삶의 기력도 육신의 힘도 생긴다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 성서 장면에 나온 12년 동안 하혈로 고생하던 부인이 병에 시들고 경제적으로 쪼들린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누구에게 구원의 손을 벌렸습니까? 그는 “오직 나를 구할 수 있는 이는 당신뿐입니다.”하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 당시 오랫동안 불결한 병에 걸린 이 여자는 법률상으로 부정한 자로 판정되어 감히 인간들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었으나 특별한 용기로 성사를 의미하는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 주님의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사는 이 방법은 데레사께서 말씀한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어쩌면 이와 같이 하느님과의 접촉에 있어서 더 이상 많은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피나는 현실 고통이 바로 하고 있는 모양으로 어떻게 달리 말할 기력도 행동할 기력도 없이 병들고 피곤한 몸을 있는 그대로 내 보이는 길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볼 때도 우리의 죄를 사실 그대로 이 부인처럼 주님께 달려들어야 합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질책의 말씀이 들여오는 듯합니다. 그들의 종말은 멸망이요 그들의 배가 곧 하느님이요 그들은 부끄러워할 것을 자랑으로 삼으며 세상 것에 욕심을 두고 주님을 등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성서 전면에 나온 회당장처럼 “주님 내 따리 방금 죽었나이다.”라는 삶의 지주를 잃은 경황 중에도 주님께 달려들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의 지주를 얻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은 이런 신앙이 없기 때문에 우리 생활에서 무슨 변화를 찾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성서의 주인공처럼 직면한 현실의 절벽에 부닥쳐도 과연 우리의 손길을 누구에게 벌리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떠나 받는 고통은 끊임없는 고통이며 희생과 노력과 시련이 없이 받는 낙은 주님의 십자가를 등지고 영원히 저주받은 생명의 연장일 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성실한 노력과 귀한 경험으로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부활에 이르는 길목에 서서 비록 오늘 울고 피흘림을 당할지라도 내일에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미래는 우리 자신이 계획하고 있지만 참된 미래는 하느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우리의 진실된 미래는 우리 중에 그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삶의 지주가 끊어져 오늘 성서 장면에서처럼 죽은 딸을 둔 아버지의 경우나 12년 간 병든 몸을 이끌고도 주님께 달려들지 않는다면 또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주님과 함께 사는 생활의 변화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이 오면 우리 발아래 짓밟히던 잔디가 되살아납니다. 죽은 딸과 병든 부인이 되살아나듯이 말입니다. 이 미사집전 사제는 주님의 몸을 축성한 후 ‘신앙의 신비’라고 사랑을 외칠 때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굳게 믿나이다”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신앙의 신비로 비록 이 세상에서 육신 사정이 무수한 십자가를 안고 사랑하는 고통을 당할지라도 이 길만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계속 주님 안에 꿋꿋이 서 계십시오. “네 믿음이 이미 너를 구하였다.”는 주님은 이 영생의 말씀을 여러분 각자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아멘.



13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질병과 죽음에 있어서의 신앙

                                                              김정진 신부



 오늘은 인생의 근본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 즉, 병고와 죽음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병고와 죽음이란 대명제는 줄곧 인간을 괴롭혀 왔고 이 문제 해결에 고심에 거듭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은 왜 고통을 당하며 죽어야 하는가?”이 같은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난제들이 우리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신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인생의 고통과 죽음에 관하여 시원스럽게 해답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위대한 기적에 관하여 들려줍니다. 그 중 하나는 12년 동안 하혈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의 병이 나은 것이고 또 하나는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적에 어떤 영웅심이나 호기심에서 하시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예수님은 상대방의 신앙심과 신뢰심을 전제로 하였습니다. 신앙과 신뢰와 희망이 있는 곳에 커다란 기적이 따랐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열 두 해 동안이나 병고에 신음하던 한 여자는 혼자서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라는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다”하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부인,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병을 낫게 하였오”라는 고마운 말씀을 듣게 되고 병까지 완전히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당시의 회당장인 야이로의 신앙심이 놀라운 점입니다.



회당장이라 하면 당시의 백성의 지도자이며 원로급에 속한 고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야이로 회당장은 자신의 지위나 신분도 아랑곳없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예수님께 대한 커다란 신앙과 겸손의 발로입니까. 이러한 신앙심이 그에게 있었기에 죽었던 딸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기쁨과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간의 병을 완쾌해 주시고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 주신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인생의 병고나 죽음 에 있어 절대적인 주관자요 생사 대관의 행사자란 점을 명백히 하신 데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고통을 많이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병고와 죽음은 하느님의 섭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고와 죽음의 신비를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 자체이십니다(요한 11.25).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지 않는 불신자의 죽음은 죄의 벌이요, 죄의 값이요, 준엄한 심판이며 멸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의 주님으로 믿은 야이로 회당장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맞는 죽음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과 영광에로 옮아가는 한 절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천주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거쳐 하늘 나라의 행복과 영광을 누리셨기에 우리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고통도 많이 당하시고 누구보다도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알뜰히도 제일 철저하게 따른 분일수록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모 마리아와 같이 고통을 당하신 이가 없습니다. 성녀 대 데레사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주여, 저에게 고통을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또한 성녀 리드비나는 삼십팔 년이란 지루한 세월을 두고 끊임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영웅적 인내로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성녀는 처음 한동안은 천주 성의를 받들기란 참으로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의 혹심한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형편이 허락되는 대로 가끔 영성체를 함으로써 천주 성의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고통을 기쁨으로 여기고 잘 참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이 고통을 초인간적인 인내로 잘 참아 견디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임종을, 즉 영혼의 불멸을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에 충만 되어 밝고 명랑하게 이 세상을 떠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자의 특징이며 성실한 신앙생활을 한 이들의 아름다운 죽음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임종은 우리 신자들의 최고의 이상이며 희망입니다. 우리 본당 신자들 중에서도 아름다운 임종을 한 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우연한 선물이 아닙니다. 평소에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심으로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해 온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상금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희망을 바라보며 잠자듯이 고요히 눈을 감는 그런 성스러운 죽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충실한 신앙인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죽음에 대한 성 바오로 사도의 소신을 소개합니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내게는 이득이 됩니다.” 아멘.

















14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교구 주보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이적사화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신 소생 이적사화(21-24. 35-43절)입니다.

  어느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뵙고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의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중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에게 겁내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면서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이가 있는 곳에 가셔서 아이의 손을 붙잡고는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즉시 일어나서 걸어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을 보고 몹시 놀라 넋을 잃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치유 이적사화(25-43절)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을 해 고생하면서 의료비로 전 재산을 다 써도 아무런 효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세가 더욱 심해진 부인이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되리라고 믿고서 예수님 뒤에서 그분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곧 그 부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그 부인에게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습니다. 평안히 가시오. 그리고 병고에서 나아 건강해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신 소생 이적사화에서 우리는 단순히 기적적인 사건만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기적적인 사건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 소생 이적사화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이를 되살리셨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지만 예수님만이 홀로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시라는 의미가 이 소생 이적사화에는 담겨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이적사화에 담겨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믿음의 위대성입니다. 오늘 하혈하는 부인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것으로 믿고 그분의 옷을 만졌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자기 딸이 “구원받아 살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빌었습니다. 자기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회당장에게 예수께서는 “겁내지 말고 믿기만 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을 통해서 계시되시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기적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을 살리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15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

윤 바실리아 수녀



디지털 문명의 발달로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저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글도 쓰고, 자료도 찾고,  편지도 주고받고, 이렇게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제 마음 속에 맴도는 아쉬움이 하나 있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요? 왠지 감동하는 마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첫서원을 하고 몸이 많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후 퇴원하여 수녀원에 다시 돌아왔지만 계속 건강이 안 좋아져 일주일 이상 제대로 못 먹고 누워있었습니다. 이것저것 먹으려고 애를 써봤지만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순이 넘으신 주방 수녀님께서 하얀 쌀밥과 멸치 넣은 김치찌개를 보글보글 끓여오셨습니다. “수녀야, 이거 먹고 기운 차려 일어나야지.” 나이 어린 동생 수녀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오신 특식, 쌀밥과 김치찌개. 신기하게도 저는 그 특식을 먹고 힘이 생겨 정말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제가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수녀님으로, 지워지지 않는 느낌표로 제 마음 안에 각인되었습니다. 지금도 빛 바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듯, 그 일을 떠올리면 저 밑바닥에서부터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실감합니다.



 제가 가난하여 모든 것이 궁핍했을 때, 주님은 제 안에서 부요하셨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 주님은 제 안에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풍족하여 모든 것이 부요했을  때, 주님은 제 안에서 가난하셨습니다. 제가 무엇이 되었을 때, 주님은 제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셨습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너무나 많은 분별심이 우리를 지치고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항상 밝은 것만 찾는 사람,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 기쁨만을 반기는 사람, 그 사람의 내면에는 진정한 안정과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문득, 성가 한 소절에 눈물이 핑 돌고 성서 한 구절에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아니 콘크리트 담에 조금 붙어 있는 흙을 뚫고 눈꼽만한 파란 싹이 돋아난 것을 보고 감동하고, 하늘이 너무 파래서 감탄하기도 하고 또 너무 파래서 눈물짓기도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ꡐ작은 은총’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니었을 때만 알아차릴 수 있는 삶의 깊은 비결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당신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요하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고린 8,9).



16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나) 믿음 안에서 기적을 청하자



여인은 부끄러운 병에 걸려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병이었다. 자신의 몸을 내보일 때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육체의 치유보다 마음의 치유가 더 절실했을 것이다. -

그 여자는 의사에게 보이느라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 성서의 이 대목은 여인의 참담했던 상황을 짐작케 한다.

마침내 여인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 볼 수 있다면, 병 따위야 낳지 않아도 좋다. 내 인생의 황량함을 이해하여 주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


여인은 예수님께로 나아간다. '누가 내 옷자락을 만졌는가,'‘무슨 말씀입니까 주님, 사방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밀고 당기고 있지 않습니까.'‘아니다, 누군가 나에게서 기적의 힘을 빼내갔다.' 기적의 힘을 빼내가다. 이 부분이 복음의 핵심이다. 기적의 힘, 사실 그것은 누군가가 빼내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여인의 믿음을 감지하셨고 그녀에게 기적을 베풀었던 것이다.

여인의 우발적인 행동이 기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기적이 가능했다. 열두 해 동안 그녀는 좌절 속에 살았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야기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을 갖고 예수님께로 나아간다. 결과는 기적이었다. 그리고 기적은 전혀 새로운 인생을 선물했다. 여인이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갔는지 성서는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온 몸을 빛내며 되돌아갔을 여인을 상상할 수 있다. 기적은 그녀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이다.



 야이로의 이야기에도 같은 교훈이 있다. 야이로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공소회장이다.

딸이 죽게 되자 그는 예수님에 달려와 살려주기를 청한다. 망설이거나 따지지 않는다.

이 분이 정말 살려 줄 수 있는 분인가 의심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저돌적인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었기에 보답을 받았다. 야이로의 믿음은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힌 믿음이었을 것이다. 공소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여간한 믿음이 아니면 공소생활을 할 수 없다.

야이로는 그런 공소를 이끄는 회장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깨닫자 선뜻 죽은 딸을 살려주시길 청했던 것이다.



  우리도 믿음 안에서 기적을 청해야 한다. 어렵고 시련이 넘실거리는 현실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알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청해야 한다. 고통을 없애주시길 청하지 말고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청해야 한다. 시련은 삶의 에너지로 빠질 수 있다. 신앙을 가진 사람에 진 그것이 가능하다. 하혈하던 부인과 야이로의 이야기가 이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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