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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6월 23일 (월) 19:31
분 류 연중8-1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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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2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12주일



        7. 정주성 신부(나)/14                 8. 이상섭 신부(나)/15

        9. 이분은 누구이신고?(나)/17          10. 강길웅 신부(나)/19

        11. 김영진 신부(나)/21                12. 김영태 신부(나)/23



7        연중 제12주일  마르코 4,35-40 (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

                                                        정주성 신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가? 바람과 바다도 복종하다니!” 폭풍으로 사나워진 바다를 명하시어 안온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탄한 사도들의 외침입니다. 바로 이 사도들을 “믿음이 약한 사람들, 왜 그렇게 겁이 많소?”하고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 ‘겁이 많은 사람들’하시며 꾸지람을 하시고 폭풍으로부터 구해주신 그리스도를, 사도들은 만방에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파에 무서워하지 말고 당신을 믿고 사랑하고 증거함으로써 철저하고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온전하고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믿음이 굳세고 진리 앛에 겁이 없고 탁 트인 마음을 가지고 편견을 갖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편견이란 한 쪽으로만 치우치고 자기 의견만이 옳은 양 고집을 세우려는 편벽된 생각입니다. 둥글지 못하여 모가 나며, 원만치 못하고 뾰죽한 인간을 가리켜 또 남의 날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또 자기 의견이 그릇된 줄 알면서도 밀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 편벽된 인간이라고 합니다.



편견은 마치 바다의 푹풍우가 참된 그리스도의 능력을 잊게 하고 사도들의 눈을 흐리게 하였듯이 우리 정신의 눈을 가려서 우리로 하여금 사리를 옳게 판단할 수 없도록 합니다. 이런 자는 스스로 마음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갇힌 노예가 되고 소심한 사람이 되어 남과 탁 터놓고 진지한 대화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현대를 가리켜 ‘대화의 세대’라고 하지만 이런자들을 일컬어 “단절의 세대”라고도 합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마음의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입니까?


현대 사람들이 ‘슬로건’같이 내세우는 말이 자유입니다. 자유 자유하고 모두가 외치고 있지만 그를 실천하고 올바로 알아듣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와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이 가르쳐 주듯이 우리의 눈앞을 가리게 하는 편견과 교만심의 무서운 폭풍을 안온하게 가라않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안에도 편견과 교만심으로 우리를 안팎으로 둘러싸고 덮어놓는 사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거리마다 나가서 편견을 버리고 진리의 대화로써 참된 자유를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바람과 바다야 잔잔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편견을 없이 할 때 물욕과 이기심과 부정과 부패의 푹풍이 일고 있는 인생의 바다에는 다시 고요함과 안정이 올 것이며 먹구름은 사라지고 광명의 빛이 맑게 비추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안정시키는 주님의 힘이 우리 안에서 행사되는 그만큼 우리를 통해서 자라나는 그만큼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우리 환경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다운 마음씨와 흔적을 우리 환경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다운 마음씨를 우리 마음에 꽃피우게 하고 이웃에게 나루 때 우리의 자유는 최대한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구원사업이 아니겠습니까?



다 같이 우리가 하는 일에 주님을 일깨웁니다.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다 주님의 흔적이 스며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눈앞을 가리게 하는 폭풍같은 편견을 없애 버리고 노예근성, 사대주의, 의뢰심을 뿌리채 뽑아버리고 그 대신 하느님다운 마음씨, 자유와 자립정신을 꽃피우게 할 수는 없을까요! “믿음이 약한 사람들! 왜 그렇게 겁이 많소?”











8       연중 제12주일   마르코 4,35-40 (나) 하느님의 권능과 믿음

                                                      이상섭 신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바람과 바다를 명령하시고 복종시키신 분은 누구셨습니까? 그 분은 우주의 창조주 즉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의 광란적인 힘을 다스리고 억제하실 수 있는 분임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우리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복음에서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는지 잠깐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복음의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해 주시기 위해 때로는 보살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엄청난 시련과 유혹으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폭풍우를 만난 기회를 이용하여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또 제자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기 위해 당신 친히 대자연을 상대로 당신 능력을 발휘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교회를 상징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센 풍랑을 보고 겁이 나서 무서워 떨며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극도로 초조한 나머지 예수님께 호소를 합니다. 이것을 미리부터 다 아신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가라앉히시기 전에 제자들의 허약하고 나약한 작은 신앙을 지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때의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배를 탄 제자들은 이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열심한 사람도 있으며 예수님을 믿긴 하나 제자들처럼 믿음이 약하여, 외부에서 공격해 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도 있으며 예수님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모인 것 자체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라는 배 안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을 믿는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능력보다 세상의 세력이 더 크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이 더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불안과 번민에 싸여 이 세상을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입이다.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삼등 열차에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의 어린 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으나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가는 여행 같은데 연상 창 밖을 내다보며 기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마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소년에게 “아가야, 어디를 다녀오는데 그렇게도 기쁜 표정을 짓고 돌아오니?” 하고 묻자 그 소년은 자랑스럽게 “아빠한테 갔다오는 거예요”하고 대답하였다. “너희 아빠가 어디 계시는데?” 라고 다시 묻자 “우리 아빠는 제가 타고 가는 이 기차의 기관사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은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마다, 기차를 운전하시는 아빠의 늠름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 밖에 나갔던 것입니다. 그 소년의 생각엔 자기 아빠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빠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 소년에게는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소년이 아빠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있듯이,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즐겁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어린 소년이 아빠를 신뢰하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만 하면 안될 일이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하느님의 힘을 믿도록 합시다. 또한 이 믿음을 이웃에게 드러내도록 합시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간다면 어린 소년이 즐거움 속에서 여행했듯이 우리도 즐겁게 살 것입니다. 또한 이 기쁨의 생활은 우리 이웃에게도 기쁨을 주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9       연중 제12주일  마르코 4,35-40 (나해) 이분은 누구이신고?



갈릴래아 바다는 그리 큰 호수가 아닙니다. 넓이는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길이는 무척 긴 호수입니다. 바람이 좀 분다시프면, 파도가 대단합니다. 예수께서는 때마침 산상 성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이신데다가 그 동안 기적을 행하시느라고 오랫동안 쉬시지 못하셨기에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배에 오르시자마자, 즉시 잠이 드셨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배가 파도에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주님을 깨우면서 “주님, 우리가 죽어가니 살려 주십시오”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겁을 내느냐?”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믿는 마음이 부족한 것 때문에 상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비록 주무시더라도 배에 함께 타고 계시니 만큼 제자들이 주님께 의탁하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시어 바람과 바다를 보고 호령하신 즉 대단히 잔잔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이 분이 누구이시기에 바람도 바다도 이 분에게 순종하는가?” 이것은 좋은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이신 동시에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기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주 만물의 주님이신 사람이십니다. 바람과 바다도 그 분의 뜻을 순종하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성서는 지금 우리에 대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겁을 내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 계시는 여러분 중에,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 때문에 겁을 내지 않았거나 혹은 겁을 내고 있지 않는 이가 계십니까? 겁은 사랑의 짝이라고 합니다. 설마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겁을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겁을 내고 있게 마련입니다. 큰 겁도 있고 작은 겁도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또 낳을까봐 겁을 냅니다.



그리고 자녀가 태어나면, 그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겁을 냅니다. 우리는 폭풍이나 고통이나 지옥이나 전쟁이나 질병이라 시험이나 장래나 늙는거나 죽음 등에 대해서 겁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겁을 내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리손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내적 안정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내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더 심각한 불안정 상태에 빠지게 되는 방법을 너무나 흔히 이용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돈만이 능수하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신적으로 성장한 어른은 하느님 아래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라야 안정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이 이 인생의 그릇된 안정감을 간파하여 이를 배격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우리를 당신 손아귀 속에 잡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능동적인 신앙에 기초를 두는 데에만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손 신부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겁을 냅니까?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적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진실로 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있는 과거의 인물로서만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지금 주께서 우리를 위해 살고 계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살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적의 요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요,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것들을 보살피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어린것들에게 결국에 가서는 좋은 것이 될 것, 이 외에는 어떠한 악도 당신의 어린것들에게 닥쳐오기를 허락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해 주신 모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도해 주시는 것,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가지가지 은총, 가지가지 은총, 사랑, 우리 정신과 마음과 육체의 여러 가지 기능, 우리 배반을 수없이 용서해 주신 자비 - 이 모든 은혜를 생각합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떠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연후에도 하느님은 사람들 뒤를 쫓아오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덕과 가치를 창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어머니인들 자기 태에서 태어난 아기를 저버리고 보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자기 아기를 저버릴망정  나는 결코 여러분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과 보살피심의 결정적 증거는 오늘 우리 가운데 주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 미사에 그 분의 말씀에 또 그 분의 희생에 현존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고 나무라십니다. 우리는 “이 이분이 누구이시기에 바람도 바다도 이 분에게 순종하는가?”하고 묻습니다. 이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경탄합니다.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경탄합시다.



10     연중 제12주일   마르코 4,35-40 (나)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욥 38,1.8~11 (너의 도도한 물결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제2독서 Ⅱ고린 5,14~17 (보십시오. 새 것이 나타났습니다)

복 음 마르 4,35~41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오늘 예수께서는 거센 풍랑 앞에 두려움으로 떠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떠는 것은 비단 제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는 겁을 먹게 되며 특히 인간의 능력이 넘지 못하는 한계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재난 앞에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믿음보다 더 최고의 약도 없습니다.



인생을 흔히 바다에 떠 있는 배로 비유합니다. 세상은 바다며 바다는 항상 풍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배는 흔들리며 선장이 없고 뱃길을 모르면 인생은 덧없이 표류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래서 바다를 알고 선장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섬마을 선생으로 처음 발령받아 갈 때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갔습니다. 그때는 마침 역풍이어서 돛을 올리지 못하고 순전히 노만을 저어서 가는데 파도가 뱃머리로 크게 밀려올 때마다 배 안에 물이 사정없이 떨어지는데 여간 겁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널빤지 하나를 눈여겨보아 두었습니다. 여차하면 그걸 붙잡고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헤엄을 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태연했습니다. 마치 좋은 봄날에 강에 배 띄워 놓고 뱃놀이하는 것처럼 그렇게 술 한잔씩 하면서 즐겼습니다. 누구 하나 겁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다와 바람을 바라보는 눈들이 저하고는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다를 알았고 선장을 믿었으며 또 바람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느님 보시기에 그보다 더 경건하고 진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축복을 받았으며 풍요로운 삶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크나큰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게 되며 자신도 문둥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고 아내와 친구들은 욥을 멸시하게 됩니다. 가장 행복했던 사람이 사탄의 시기로 가장 비참하게 됩니다.



인생은 허무했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었고 진실되게 살아도 가치가 없었습니다. 욥은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하느님께 항변하며 따지게 됩니다. 사실 욥뿐만 아니라 우리도 일상생활 안에서 똑같은 질문을 하느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왜 선한 사람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착한 사람이 불행에 떨어야 하는가.

오늘 1독서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대답이며 그 대답은 욥에 대한 반문입니다. “바다를 누가 만들었느냐?" 고통 때문에 울부짖고 있는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고통에 대한 설명은 하시지 않고 새로운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바다를 누가 만들었느냐?" 이것은 또 시련 속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똑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세상은 누가 만들었느냐?"



욥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반문은 동문서답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보다 훌륭한 대답도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세상을 만들었으며 그리고 누가 그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은 하느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요 주인이며 완성자 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욥은 그래서 고난 뒤에 더 큰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귀의 시기와 질투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특히 선하고 경건하게 사는 자들을 미워하며 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땐 침묵 속에 계십니다. 도무지 아무 일도 안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선 한 사람들을 믿으십니다. 경건한 사람들을 신뢰하십니다. 마귀의 세력이 아무리 악랄하게 발광을 해도 선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이 배 안에 함께 계시다면 어떤 풍랑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바다도 주님을 삼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탄의 시기로 배가 흔들릴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배를 흔드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질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크니까 마귀까지 시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절대로 우리에게 필요 없는 고통은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믿음과 기대가 크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고 주 예수님을 더 굳게 믿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려울 때 감사드립시다. 사탄이 시기하고 질투할 정도로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립시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11       연중 제12주일  마르 4, 35-47 (나) 햇빛만 나면 사막이 된다

                                                           김영진 신부



나는 세상살이를 몇년하지는 않았지만 내 나름대로의 풍랑을 겪어왔다. 두 번씩이나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해야 했고, 학생 때는 결핵으로 2년간 약을 먹어야 했으며, 군종신부 시절엔 미사 시간에 맞추려고 기차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져 세 번씩이나 수술을 해야 했고, 탄광촌 사목 때는 노동자 편을 든다는 이유로 한밤중에 깡패들에게 끌려나가 유치원 놀이터에다 파놓은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으며, 돈도 없이 양로원을 짓다가 인부들에게 품값을 못 주어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이웃집 장사가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때 그때마다 이겨내기 힘든 풍랑이었다. 한평생을 살면서 풍랑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평온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 나름대로의 작고 큰 풍랑을 헤치며 살아왔을 것이다. 



풍랑 없는 인생은 황폐한 사막



복음에서 보면, 고기잡이하다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만난다, 길이 21km, 넓이 12km, 수심 42-48km가 될 뿐만 아니라, 지중해 수면보다 2백m나 낮은 이 호수는, 예기치 않았던 돌풍에 심한 파도를 일으키는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이 풍랑을 만난 것이다.

너무 심한 풍랑 때문에 제자들은 모두 죽을 것만 같았는데, 예수께서 그 풍랑을 잠재워 주셨다.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다와 풍랑까지 복종하는가 하고 놀란다. 예수님은 모든 풍랑을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본인 자신은 모든 풍랑을 감수하며 받아들이셨다.



뺨을 맞으시고, 미친 놈 소리를 들으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받으시고,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당하시고, 벌거벗긴 채 십자가를 끌고 가다 죽으시는 풍랑을 감수하며 받아들이셨다.



우리는 모든 풍랑이 멈추어지기를 기대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마땅히 건너야 할 바다를 육지로 바꾸어서, 고속도로를 놓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다만 우리가 풍랑을 겪을 때, 우리의 풍랑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옆에 머물러 계시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때때로 우리의 풍랑을 거들어 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 옆에서 당신도 풍랑을 지고 가시며, 나도 힘들지만 지고 가니 자네도 힘들지만 같이 지고 가자고 격려해 주시면서, 풍랑의 의미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아랍인들의 속담 중에는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을 이룬다'라는 말이 있다. 땅에는 가끔 비가 와야 되듯,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 되는 여러가지 풍랑들은, 종종 우리들에게 축복이 되기도 함을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절름발이를 만들어 보십시오, 거기 「월터 스코트경」이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보십시오, 거기 「존 번연」이 있습니다. 풀리 계곡의 눈 속에 파묻혀 보십시오, 거기 「조지 워싱턴」이 있습니다. 빈곤 가운데 양육하여 보십시오, 거기 「아브라함 링컨」이 있습니다, 소아마비가 되어 보십시오, 거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있습니다. 귀머거리가 되어보십시오, 거기 「베토벤」이 있습니다. 지진아 무학자라고 악평하여 보십시오, 거기 「아인슈타인」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게되는 풍랑들이 우리의 최대의 적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생이란 바다에 띄워진 조각배     



집회서에는 ‘황금은 불 속이라는 풍랑 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이라는 풍랑 속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는 말이 있다. 고린토 후서에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다고 나온다.

큰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라는 풍랑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기쁨과 사랑과 믿음의 삶이 커졌다는 것은 풍랑의 의미를 깨달은 까닭이다.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이 되고 만다’는 아랍 속담처럼, 비가 오지 않은 땅, 풍랑이 없는 인생은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인생이란 바다에 띄워진 조각배와 같은 것이요.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장애물을 피해가며 집을 찾는 눈먼 소경과 같은 것이다. 앞으로 어떤 풍랑이 닥쳐올지 모르는 조각배와 소경의 삶이 인생이라면,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말씀하신다. “왜, 그리도 믿음이 약하냐, 왜 그리도 두려워하느냐. 용기를 내어라, 힘을 내어라. 내가 옆에 있음이니라,"

  

세상살이하면서 그동안 겪었던 풍랑들이, 나를 이 정도나마 성장시켰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이나마 자라게 하였음을 본다.





12           연중 제 12주일   마르코 4,35-40 (나) 오늘 나의 기도

                                                         김영태 신부



  먹고 살기가 참  힘들어졌다. IMF인지 뭔지가 우리를 더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먹고살기가 힘든 사람은 다른 일을 생각할 수 가 없다. 우선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우선 내가 죽겠는데 다른 일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참 세상이 많이 삭막해졌다.

살면 살수록 사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하니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ꡐ이럴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 된다ꡑ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먹고 살만한 사람이다. 배고파 봐라. 다른데 눈길을 줄 겨를이 있나.

  

요즘 북한 군함이 우리 영해를 침범한다고 하는데, 그런 뉴스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ꡒ싸가지가 없다.ꡑ는 느낌이 든다고 답한다.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느냐고 물었더니 ꡐ남한도 어려운 때에 쌀도 대주고, 소도 보내주고, 어쨌든 도와주었더니 엉뚱한 짓만 한다.ꡑ라고 답한다.

그러면 통일은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3분의 2정도가 통일이 안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ꡐ통일이 되면 서로가 살기 힘들어지니까(솔직히 말하자면 남한사람들이 살기가 힘들어지니까)라고 답한다. 그러면 통일보다 우리가 잘 사는게 먼저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한다.



우리 아이들만 이런 생각을 할까? 언젠가 술자리에서 결식학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떤 분이 ꡐ북한보다도 우리 결식학생들의 문제, 실업자문제가 더 우선이다.ꡑ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대화는 남북문제로 자연스럽게 주제가 바뀌었는데,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북한을 도와주어야 하지만, 지금 당장 남한 문제가 발등의 불이니 그것부터 해결하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럼 결식학생을 어떻게 돕고 있느냐고 물으니 요즘 자신도 살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마음은 있지만 못하고 있단다. 얼마나 잘 살아야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우리가 다른 이들 사는 것도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될까?

  

오늘 교회는ꡐ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권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이렇게 기도하려고 한다. ꡐ주님! 우리 모두가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돈도 많이 주시고, 모든 것을 다 넉넉하게, 아니 엄청나게 많이 주셔서 자신만을 돌아볼 수 없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우리가 결식학생도, 통일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서 민족이고 통일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화해? 일치? 좋은 말이긴 하지만 그리고 언젠가는 해야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 할때가 아닙니다.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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