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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6월 25일
작성일 2008년 6월 20일 (금) 22:38
분 류 연중8-1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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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통일 기원미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7-7.    민족 화해와 일치 주일



        1. 김 추기경 메시지 / 2

        2. 단 두세 사람 / 5

        3. 이기헌 신부 / 7

        4. 최인호 작가 / 8

        5. 최인호 작가 / 9

        6. 안충석 신부 / 10

        7. 안충석 신부 / 14

1.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1995.8.15)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겨레가 식민지 생활의 괴로움에서 해방된 지 50

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은 50년 전 우리 민족에게 분단의 고통이 주어진 날이

기도 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본인이 평양교구장 서리의 직책을 맡은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

기도 합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사목에 대한 책임과 함께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는 본인은 특별한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그 감회의 일단을 정리해 보면서, 우리 겨레와 교회 앞에 전개될 미래의 발전을 기약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 승천은 구세주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우리 구원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이 날을 맞아서 죽음으로부터의 승리와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해 왔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구약 시대 이래 희년(禧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희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하는 겨레를 풀어주고 빛을 탕감해주며, 땅까지도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빌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해인 희년은 인간이 동참하라고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때이며, 인류에게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과 광복 50주년을 특별히 기념하는 오늘, 우리 교회는 그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하며, 희년의 축복과 은총이 우리 겨레와도 함께 하기를 특별히 기원하고자합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를 요구해 왔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을 얻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우리를 반성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체험하고 있는 분단은 사랑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 분단이 비록 우리 민족만의 책임은 아닐지라도 분단의 상황이 반세기에 걸쳐서 지속되어 온 것은 분명 우리 겨레가 하느님이 명하신 화해와 일치의 가르침을 거역하였거나 소홀히 한 결과입니다. 분단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는 남북의 겨레는 그 잘못을 겸허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겨레는 공동체적 죄악의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일치와 구원을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과 화해를 원하시고 인간에게 화해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2고린 5,18-20). 지

금 우리 겨레도 화해와 일치의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화해의 도정에서

우리는 먼저 북녘의 겨레에게 따뜻한 사랑과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특히 가톨릭 신앙을

같이 하는 북녁의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을 기원하면서,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

의 보살핌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모두가 화해와 일치와 사랑의 정신을 겨레에게 심어주는 사도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믿음을 같이 하는 남북의 형제들이 서로 만나 서로의 믿음과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의 정신을 나눌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합니다.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쓰라림을 공유하는 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를 거듭 기원합니다.



희년에 동참하도록 불림을 받은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서로의 연대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동족과 함께 가진 바를 나누며 살아가기를 명하고 있으며(레위 25,36-37), 우리의 역사 전통에서도 겨레끼리 서로 돕는 아름다운 풍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 교회에서는 성서의 가르침과 겨레의 미풍에 따라서 나눔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형제애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겨레와 누리의 평화를 위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희생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키워주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줄 것입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한 참회와 희생은 개인적 차원에서, 그리고 공동체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형제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추구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불화의 요소를 극복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 존엄성을 증진시키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데에, 위배되는 여러 일들이 일어난 바 있습니다. 무죄한 태아에 대한 낙태 행위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노사문제에 대한 구태의연한 대응,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무례와 무관심, 그리고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고 등에 대한 미흡한 수습책이나, 광주에서의

학살에 대한 불기소 처분과 같은 일련의 일들은, 인간 존엄성과 화해의 정신을 크게 위배하

는 일 입니다.



우리가 진정 형제들과 화해하고 일치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문제부터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태아의 생명이 보호받고, 노사 교섭에 있어서도 인간 존엄성이 관철되어 상호 존중과 대화의 문화가 성숙되어 나가며, 사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유족들을 보호하는 데에 국가적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광주의 학살은 인간성에 대한 범죄입니다. 따라서 그역사의 진상은 기필코 밝혀져야 합니다.

이로써 사회의 정의는 밝혀지고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우리 겨레와 광주의 민중들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복 5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 겨레 앞에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역사는 인간 존엄성을 기초로 한 사랑과 평화의 역사이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 사이에 인간성을 유린하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군비 경쟁, 또는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한 인간의 편의적 잣대로 인간을 처벌하여 수감하거나 사형에 처하는 반생명적 일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이에 우리 교회에서는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겨레의 평화를 더욱 크게 신장시켜주기를 요청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분단의 고통을 가장 크게 안고 있는 형제들은 남북의 이산가족입니다. 희년을 맞이하여 이들 이산가족의 상봉을 주선하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가능한 노력이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겨레는 상호 질시와 증오의 마음 때문에 50년 간의 분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 분단의 슬픈 유산은, 이제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에는 항구적 평화가 깃들이고, 화해와 일치를 구가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 겨레는, 이를 위해서 새로운 노력을 전개해야 합니다. 오늘의 해방 50주년은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조건 없이 자리를 마주하고, 겨레의 미래를 논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교회도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민족 자존의 입장에 서서 민족이 일치되는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새롭게 대화해주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그 생명의 가치가 신장되는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열망합니다.



2천년 전 갈릴레아에서 가난하고 겸손했던 한 처녀가 해방의 찬가를 불렀습니다(루가 1,46).

성모 마리아는 우리에게 참다운 구원을 깨닫고 승리의 마니피캇을 부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범을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희년의 해에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 스스로 마음을 비워 가난해지고, 오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갖추어, 진정한 해방과 구원의 찬가 를 부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 앞에는 눈물도 울부짖음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 1)이 열릴 것입니다.



남북한의 형제들에게 다시 한번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하며, 우리 모두의 화해와 일치와 구원

을 위해 우리 겨레의 주보이신 성모님께 특별한 전구를 부탁드립니다.



                                                 1995년 8월15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김 수 환





 2.             민족의 화해와 일치   마태 18,19-22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얼마 전 피정 미사 중 신자들의 기도에서 통일에 대한 기도를 바치고, 함께 손을 잡고「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 노래를 부르던 중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갑자기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6․25 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내려와 부모와 동생들과 헤어져 생사도 모른채

살고 계셨었다. 오래 전 텔레비젼에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탕일 때였다. 여름방학 때 외

할아버지댁에 놀러갔었다. 외할아버지는 며칠 낮 며칠 밤을 이산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에 눈을 떼지 않으셨다. 어느 날 한밤중에 잠이 개어 일어났는데 외할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쓰신 채 텔레비젼을 보고 계셨다. 나는 잠결에 외할아버지가 왜 더운 여름에 이불을 쓰고 계실까 생각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모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울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 날 밤 잘 느끼지 못했던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이북에 부모 형제를 두고 온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많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산가족들의 마음을 자주 기억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다.



       통일에 대한 희망의 근거



오늘 우리는 국토분단과 민족의 분열과 상처 속에서 통일을 성취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살고 있다. 냉전 속에 서로를 경계하고 민족적 고난을 당하고 있는 역사적 현실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까?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인간의 평화와 행복을 원하신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께서는「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복음을 선포하셨다. 하느님나라의 오심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정의와 생명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추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이미 시작되어야한다. 우리의 현실과 관계없는 것이라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최종적 희망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신앙은 무의미하다. 부활체험은 약한 사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부활은 새 하늘, 새 땅의 탄생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단을 통해 고통받는 우리 민족에게도 희망을 비추어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을 실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켜 진리가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과 보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의 통일은 부활의 믿음 속에서 희망을 지녀야 한다.



우리 교회의 역할



우리가 통일을 위해 해야 할 첫 걸음은 우리 복음에서처럼 마음을 모아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 모아 구하면 네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 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마태 18,19). 기도한다는 것은 갈망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 통일을 갈망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뜻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민족과 사회, 현실을 망각한다면 그 신앙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욱 열심히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최근 우리 교회는 기아에 허덕이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고, 또 계획 중이다.

믿는 이들이 한발 더 앞서 북한 동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고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민족의 일치와 화해에 이루는 길이다. 민족의 통일은 한국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교회는 이제 더 적극적으로 화해와 일치의 방법과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렵고 힘든 십자가의 길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다.



하루 빨리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고 북한에도 하느님의 복음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정성껏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3.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22>

                                                                    이기헌 신부



오늘은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드리는 날입니다. 지금도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불안하고, 북한은 식량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종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되는 북한의 참상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습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수백 명의 탈북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회와는 너무 다른 남쪽 생활에 적응하느라 너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정책적인 배려와 더불어 따뜻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나가는 해가 희년입니다. 묶인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빚을 탕감해주며,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음식을 나누는 등의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돌이켜볼 뿐만 아니라 회개하며 새로워지는 때입니다.

6․25의 아픈 한 때문에 북녁 형제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전쟁 준비에 도움을 주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배부르게 한다고 북한에 식량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타당한 이야기같이 들리기도 합니다만 그 말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마음 아프고 양심이 찔려옴을 느낍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마태 25,35) 하는 주님과 북녁의 형제들의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세월이 내년이면 50년이 됩니다. 50년이란 햇수는 희년의 햇수입니다. 2000년 대희년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고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빚을 탕감해주고 갈라진 마음들이 하나가 되고 친척, 같은 겨레들을 위해 큰 마음을 쓰는 해입니다. 희년은 우리가 분단 50년 동안 쌓아둔 미움과 분열의 감정들을 사그라뜨려야 할 해입니다. 분단의 세월은 바로 미움과 몰이해와 배척의 세월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희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은 축복을 받고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게 됩니다. 통일은 분명 우리 민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내리는 선물입니다.



우리 민족이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과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6․25의 상처가 가슴에 박혀있는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고 화해하는 변화가 있어야 하고 지역간의 골이 허물어져야 하고 특별히 나와 다르고 힘겨운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사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굶주림에 죽어가는 형제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며 한줌의 쌀, 한 그릇의 국수라도 나누는 일에 동참하는 실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 더 나가 통일을 실현해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전세계 모든 교회가 희년의 정신을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는 이때,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아멘.

                                     이기헌 신부/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본부장

4.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22> (가)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난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입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탐미주의를 주창 했고, 서른네 살에 동화집 「행복한 왕자」를 출판했으며 다음해에는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 의 초상」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마흔한 살이 되던 해 동성애를 한 죄로 2년 간의 중노동형을 받았고, 후에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이처럼 불행했던 그의 생애와는 달리 그의 작품에는 천재적 재능이 엿보입니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는 그의 문학적 향기가 나는 걸작입니다.

어느 도시의 광장에 ‘행복한 왕자’란 동상이 서있었습니다. 눈은 보석으로 빛나고 온몸은 황금으로 찬란한 동상이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남쪽으로 날아가던 철새 중 하나가 그만 부상을 입어 잠시 이 동상에 머물며 쉬었습니다. 그날 밤 동상 위에서 자던 새는 차가운 물방울에 잠에서 깨게 됩니다. 새는 그 물방울이 왕자가 흘리는 눈물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 이유를 묻습니다. 왕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도시에 살고 있는 불쌍한 병든 아이 때문에 울고 있단다.” 그리고 새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내 눈에 박힌 보석을 그 아이에게 날라다 주지 않겠니?” 

새는 왕자의 눈에 박힌 보석을 부리로 물어다가 그 가난한 아이에게 가져다줍니다. 눈먼 왕 자는 계속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황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원했으며 새는 왕자의 소원대로 황금을 뜯어내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새는 밤마다 눈먼 왕자 에게 자신이 한 행동을 낱낱이 얘기해주곤 했습니다. 그제서야 행복한 왕자의 이름을 가진 동상은 진정으로 행복한 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답던 왕자의 동상은 어느새 도시의 흉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보석이 떨어져나가고 황금으로 감싼 겉면이 사라지자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왕자는 시장에 의해서 마침내 헐려지고 철새는 추위 때문에 얼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왕자의 영혼과 새의 영혼은 나란히 천국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마태 10,29-31).

주님은 참새뿐 아니라 상한 갈대 하나도 함부로 잘라버리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서 등불조차 함부로 꺼버리지 않으십니다(이사 42,3).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는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은 도시 광장의 한복판에 서있는 행복한 왕자 그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는 왕자의 마음이야말로 주님의 성심(聖心)이며 주님의 사랑을 날라주다 죽은 철새의 희생이야말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지붕 위에서 외친’ 순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행복한 것은 왕자가 아니라 철새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천국으로 인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처럼 철새 한 마리의 영혼도 구원하시는 주님이 계신데 우리들이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최인호 베드로/작가

5.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22> (가) 평화와 칼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은 레바논에서 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부유한 목축업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감성은 지브란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2세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아랍어 교육을 위해 다시 레바논으로 돌아왔고, 미술공부를 위해 파리로 가서 조각가 로댕을 만나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명상함으로써 평화주의자로, 압제에 항거하는 자유주의자로 일컬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20세기의 성자’로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예언자」에는 그의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우리들의 아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단상이 실려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딸들이다 / 그들은 당신을 통해 왔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 그리고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을 주어도 좋지만 당신의 생각을 주어서는 안된다 /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은 그들의 육체를 만들 수 있으나 영혼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 당신은 심지어 꿈 속에서도 그들의 집을 방문할 수 없다 / 당신은 그들을 좋아하려 애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하지 말라 / 왜냐하면 인생은 뒤로 가는 것이 아니며 어제와 함께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다”(마태 10,34-36 참조). 또 이런 극단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

얼핏 보면 주님의 이 말씀은 모순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니요. 그러나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주님이 우리들의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부모님과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그 사랑은 칼릴 지브란의 노래처럼 참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라 애착(愛着)이며 내 남편, 내 아이, 내 어머니에 대한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 애욕(愛慾)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칼은 서로를 증오하는 살인검(殺人劍)이 아니라 그 애욕을 끊어버리는 활인검(活人劍)인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애착을 주님의 칼로 끊어버릴 때 우리들의 아이는 칼릴 지브란이 노래하였듯 우리들의 소유물에서 내일의 집에 머무는 고귀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칼로 가정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끊어버릴 수 있다면 우리들의 어머니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며, 우리들의 아이는 또 하나의 작은 예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모든 가정이 작은 성당이며 고귀한 영혼들이 머무는 성가정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최인호 베드로/작가

6.             침묵의 교회주일

                                                                     안충석 신부



열심히 아내와 어머니, 사랑하는 자녀들을 남겨 놓고,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과 큰 아들이 벌써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올 줄 모릅니다.

오늘도 어둠의 장막이 바다를 뒤덮었으나 뱃길을 인도해 주는 그 어느 한 가닥의 불빛마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부의 아내는 바닷가에 서서 자기 온 생의 지주인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구하며 기다렸으나, 그의 눈에는 어둠 속에서 마치 생명을 삼키려는 듯이 넘실거리는 파도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홍콩 북방 20㎞지점 산허리에 어린 자식을 등에 업은 것같은 망부석은 오늘도 북으로 접한 망망대해와 지평선 너머로 장막인 중국 대륙 본토를 바라보고 있답니다.

우리는 그것이 본토 회복을 갈망하는 수백만 피난민들의 온갖 염원을 대변하는 표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오늘 침묵의 교회주일을 맞아 남의 나라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말씀드리자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이와 같은 망부석의 피맺힌 영상을 안고, 허리 잘린 내 조국 내 고향을 안타까운 기다림 속에 무심한 세월만 흘러 보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망부석의 바램을 안고 안타까운 기대 속에 언제나 어디서나 힘차게 살아오기 수십개 성상이 흐른 것입니다. 어느 의미에 있어서는 인간은 누구나가 이와같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어디엔가 그 마음 한구석에 보다 나은 내일의 기대가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보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우리는 모두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여기 우리가 이 땅위에 살망정 이는 한때 피난살이로 누구나 천국본향으로 가는 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모든 허무한 인생고에도 눈하나 깜짝 안하고 견디어 나가고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솟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현실을 안겨 줌으로써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우리의 생사마저 혹사하여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일제 36년 간 식민지 사슬에서 해방된 너무나도 자유의 벅찬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8월 25일에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고 소련군이 8월 20일에 원산에 상륙했습니다. 그 후 비극의 운명인 38선으로 우리의 허리는 동강나고 무수한 인명은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죽어갔습니다.



급기야는 북한 형제 자매들이 공산 학정에 도무지 살 수가 없어서 내 고향 산천을 등지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유와 신앙을 찾아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공산주의와는 정반대인 북한 우리 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삽시간에 변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 후 엄청난 오산과 허황된 명산인 6․25사변으로 공산주의를 체험한지 어언간 20여년이 흘렀습니다.

바람결에 나는 총탄과 쏟아지는 폭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조차 주체할 길이 없는 이 비극 속에서 피눈물과 함께 받아낸 어린 생명이 이제는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약 25세 청년으로 의젓이 살아나서 바로 피맺힌 전쟁터를 지키는 용사가 된 것입니다.



한편 대견스러움과 보람을 느끼면서도 한편 걱정이 앞서는 점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을 체험한 부모의 기대인 통일의 염원이 그들 속에 얼마나 자라나고 있느냐는 점이올시다.

이들은 6․25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대로써 전국민의 60%이상이 넘습니다. 기성세대에 있어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듯했던 동족상쟁의 비참한 경험이었건만 그들에게는 한낱 남의 이야기같은 역사 교과서에나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무심한 세월이 흘러 버린 것입니다.



전쟁 당시에 생사기로에 여념이 없었던 기성세대마저 무심한 세월의 흐름따라 안이한 이기주의적 생활속에 망부석의 피맺힌 사연과 피난살이 감각도 점점 망각하여 가는 지경인데 더더군다나 전쟁이란 기억에도 없는 동란동이들에게는 그 부모의 피맺힌 바람에 얼마만큼 생심이나 하며 아니면 외면하고 있는 것이나 아닙니까?



과연 우리는 내 조국, 내 고향을 침묵의 교회로 버려둔 채 20여 개 성상을 어떻게 살아온 것이란 말입니까? 또 두고 온 내 조국, 내 고향, 내 침묵의 교회를 다시 찾기 위하여 끈질기게 추구하여 온 것은 대체 그 무엇이란 말입니까? 물론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생존 투쟁에 도무지 여념이 없었다면 이젠 살만큼 되었으니 이제부터라도 무엇인가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세대가 못하게 된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는 기필코 달성할만한 숙명적 민족 과제의 바톤을 우리는 얼마나 잘 넘겨주고 있느냐? 실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평소에 그것을 잘 의식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서울 자체가 황해도와 임진강 이북 경기도로 침묵의 교회를 안고 휴전선으로 분단된 교구입니다. 또한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도 북한에 부모, 형제, 자매들과 생이별하는 고통을 안고 오직 신앙 속에서만 살고 있는 교우들도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무관심 속에 극단의 이기주의로 자기 사는데만 급급하였습니까?



우리 서울 교구 자체가 분단되고, 그 큰 지체가 침묵의 교회로 순교의 피를 쏟고, 단말마적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관인 머리가 오직 하나이듯, 내 조국, 내 교회도 오직 하나인데, 그 지체인 허리 잘린 내 조국, 내 침묵의 교회가 피흘리며 당하는 고통을, 아니 같은 머리, 같은 생각을 갖고서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데서야 반신불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오로지 올바른 정신이 희박한 머리 즉 신앙도, 사랑도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의 이기주의로 한번도 올바른 이웃이나 침묵의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데서 빚어진 결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정부패를 보아도 또는 그 때문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형제들을 보아도 언제나 외면한 채 나만 사는 능력밖에 남에게 살 길을 베풀 수도 없는 극단의 이기주의로 침묵만을 일관해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오늘 이 순간에 진지하게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고 침묵의 교회에다 물어보셔야 합니다. 법 이론에 침묵은 긍정을 의미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민족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우리의 침묵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그 생명을 이 세상 잠깐 동안보다도 영원히 살리려는 투쟁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인류의 번영과 완성을 이룩합니다.



그 생명을 영원히 죽이려는 온갖 사회악에 대한 여러분의 침묵이 영원한 침묵인 영벌로 변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기실, 침묵의 교회는 어떤 의미로는 철의 장막 저편에 두고 온 산하, 내 고향에만 있지 않고 오늘날 우리 자신의 냉담함과 미지근한 신앙 속에 도사리고 있다고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순교자의 피는 우리 신앙의 씨앗’이란 교부의 말씀대로 오히려 침묵의 교회 교우들의 신앙이 우리보다 더욱 뜨거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노 신부님에게서 이런 체험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4후퇴 바로 직전에 한국 전쟁의 영웅 맥아더 원수의 지휘 아래 유엔군과 우리 국군이 이북탈환을 하고 잠시나마 통일의 맛을 본 정말 꿈만 같았던 그 감격을 그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 평양 원산에 갔을 때 깊은 산골 또는 어느 깊숙한 인가에서 숨어살던 침묵의 교회 교우들은 피골이 상접하고 창백한 얼굴로 수염이 텁수룩한 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와 구세주처럼 신부님을 매만지면서 울며불며 감격할 때 나는 정말 또하나의 그리스도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생명과 신앙을 언제든지 기꺼이 맞바꿀 마음 자세로 침묵의 교회에서 모든 순간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자기 영혼 하나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하는 생활관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한편 살길을 찾아 피난 온 우리들은 또는, 자유 대한에서의 우리 교우들은 어떤 신앙으로 살며, 보이지 안는 침묵의 교회의 몫까지도 우리가 하여야 할 처지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침묵의 교회의 몫으로, 눈에 보이는 웅장한 성당을 지어 놓았습니까? 아니면 구령사업에 전심하였습니까?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따져 봅시다. 우리들 자신의 신앙이야말로, 오히려 북한 침묵의 교회보다도 어떤 면에서 소극적이며 우리 사회에서 눈에 안 보이는 무기력한 교회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느냐고 망연자실하고 싶은 심사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들만이 북한에서 또는 6․25전을 통한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한 산 역사의 증인들이십니다. 여러분들만이 박해 중에 신음하는 침묵의 교회에 대한 단말마적인 신앙의 증인들이십니다. 바야흐로 역사적 심판대 앞에 서서 이 순간을 산 역사와 신앙의 증인답게 살아가지 않으실 때 시대와 역사적 사명의 대죄인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침묵의 교회에 대한 신 증인으로 사시는 길은 여러분들 자신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남보다 앞장서고, 이 민족의 비극이며 운명적 과제인 통일의 바톤을 다음 세대인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심어 자라나게 하여야만 합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참다운 싸움은 우리 가슴속에서부터 우러나오고,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저 구라파에서의 반공 교과서란 다른 책이 아니라 ‘가톨릭 교리서’입니다. 바로 공산주의의 냉담한 신앙과 미지근한 신앙심에 자리잡고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세계 대전의 교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독일 나치스나 이태리나 일본이 아무리 강하여도 인간의 본성과 양심과 진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구라파인은 이런 신앙과 확신 밑에서 무엇인가 계획적인 실천을 통해, 즉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으로 대적하여 십자가의 승리를 얻게 된 것이 아닙니까? 공산주의 혁명도 근본적으로 실패하여 그 밑바닥에 드러난 것도 시간문제뿐인 것입니다. 즉 인간의 영혼에다 증오를 남겨놓고, 영혼을 죽이니 진정한 혁명이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우리들의 신앙이다.”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과 사랑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때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와 같은 신앙을 우리 다음 세대에 심어주고 길러주지 않는다면 공산주의는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총과 폭탄으로 죽이면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또다시 총과 폭탄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들이 또 죽으면 또 그들의 후손들이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반공교육이 영혼 없는 육신에 대한 반공 교육일 때, 그것은 마치 영혼 없는 육신이 물질인 것처럼 너무나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공 이론과 무장이 시급히 요청되며, 공산주의를 체험한 자들에게는 이론보다 증오와 체험이 앞설 수도 있겠지만, 체험을 못한 자에게는 이론 대항이 없어서 일어나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반공교육은 우리의 신앙심을 심어주고, 길러주는 데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교리 속에 공산주의에 대한 온갖 대항할만한 가장 힘있는 이론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산주의란 자체가 또 하나의 기만된 신앙처럼 칼 마르크스 공산주의가 거짓 종교로써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즉시 이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집단적인 공산주의의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해 백성들의 봉사를 요구하고 백성들의 공산주의의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엄청난 신앙을 강요하면서 거짓된 또 하나의 신앙을 하느님 섬기듯이 하라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아닙니까?

가짜 별이 태양빛에 무색하게 되는 것처럼, 이런 헛된 신앙은 진실된 우리 신앙으로만 무색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침묵의 교회로 생이별 당한 내 형제 자매들과 같이 사는 길은 우리의 진실된 신앙생활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무심한 세월만 흐르고 세상이 여러번 바뀌어도 기다리는 통일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의 신앙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기대 속에 굳건히 살아갑니다. 기다리다 지쳐 죽는다 해도 우리 마음 속에 새겨진 망부석을 헐어버리고, 무너뜨리고, 이 기다림마저 포기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생애의 보람과 가치를 주고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고 많은 날 세찬 비바람과 세파에 깎기어도 우리의 망부석 사연은 오늘도 어느 인간, 또는 어느 시장 구석, 또는 어느 공장과 사무실 구석에서도 굳건히 서 있으며, 이 하늘 한쪽에서 저 하늘 한쪽 어디엔가 침묵의 교회를 지켜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망부석은 인간의 취약, 비극, 무능의 묘비라기보다는 힘과 용기 의지를 입증하는 우리의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공산 마수들과 싸우다 간 무수한 용사들의 비석처럼, 삶의 용사의 승리의 깃발이기도 합니다. 또한 6․25전쟁의 비참, 다시는 생이별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자녀들에게 이 민족적 과제를 넘겨줄 신앙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회개를 위하여 기구하라”하시던 루르드나 파티마 성모 마리아상이기도 합니다.



“성 마리아 어머니! 침묵의 교회를 당신 품안에 맡기오니 세상을 이기는 승리인 당신이 같이 한 신앙 안에 우리 자녀들인 교우와 우리들의 신앙으로 당신 품안에서 다시 만나게 하소서”하며 우리 손안에 묵주알에 매달리며 기구합시다. “구하라 얻을 것이오. 항구하게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리라.” 아멘.















7. 침묵의 교회주일     6․25수난과 참변을 되새기면서

                                                                          안충석 신부



8․15해방이후 이 나라나는 허리가 동강이 나고 두 가지 극단적인 사상의 대립을 가져왔습니다. 드디어 하나의 사상으로 흡수시켜보고자 발동된 것이 6․25의 참상이었으니 이는 우리민족의 수치인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우왕좌왕하는 어머니 품에 안겨 젖투정만 부리던 철부지들이 벌써 아기의 엄마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그 망각속에서도 가끔 잊혀지지 않는 그 당시의 일들, 강산이 변했으면 세 번식이나 변했을 이 세월을 두고 우리는 아직도 공산침략으로 인한 이 민족적 비극의 그날을 어찌 꿈속에서조차 잊을 수 있겠습니까?



피 흘리던 그 자리에 꽃잎은 지고 태양도 빛을 잃은 그 자리는 실로 가깝고도 먼 곳, 하나이어야 할 우리는 서로 살벌하게 마주서고 구름은 마음대로 오고 가건만 철의 장막으로 진을 친 세기의 대적 공산주의자들은 아직도 휴전선 너머에 엄연히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처럼 대규모의 동족상잔은 일찍이 없었고 이처럼 무모하고 허황한 침략행위도 없었습니다. 이 민족이 얼마나 무지하고 잔인하기에 그렇게도 비참한 동족의 유혈극을 도발하였는가 생각할 때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의 이 나라 산하(山河)도 고요하고 싱싱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순간에 산은 시산(屍山)으로 변하고, 내는 혈하(血河)로 바뀌고 고요는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화했습니다.



동족에 의한 동족의 살육(殺戮), 천추(千秋)의 원한인 북괴에 의한 6․25의 도발이 막을 연 것입니다. 이래 3년동안 북쪽은 압록강변에서, 남쪽은 낙동강변에 이르기까지 수십 수백만의 젊음들이 한치의 땅이라도 지키기 위해 살과 피와 뼈로써 성(城)을 쌓기 그 얼마이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쟁취하고, 국토의 마지막 일부분이라도 공산침략에서 막기 위해 그 귀한 목숨을 바쳤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탄되었으며 도시와 촌락이 파괴되었는지 회상치 않을 수 없습니다.



국군전사자만도 14만 4천여명, 전상자 71만 7천여명, 민간인 사망자 24만 4천여명, 부상자 23만여명, 행방불명자 36만 3천여명, 그 위에 피학자 12만 8천여명에 피납치자 8만여명을 냈습니다. 이에 또한 3만 6천여명의 유엔군전사자들이 어찌 우리가 잊겠습니까? 그러나 까닭없는 우리의 대상(代償)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6만여명에 이르는 전쟁고아를 냈고, 100만에 이르는 월남실향동포(越南失鄕同胞)를 맞아야 했고, 많은 재산피해를 헤아려야 했습니다.

도대체 「한국동란」이란 이름의 그렇게도 처절한 동족상잔의 역사가 일찍이 있었던가요? 한국민족이란 그렇게도 종족관념(種族觀念)이 없는 미개한 야만족이었던가요? 아닙니다. 형태는 동족상잔의 그것으로 나타났지만 바탕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의 광신(狂信)이었습니다. 「38이북」에서 해방을 맞이한 인간들이 어디 글안족(契丹族)이며, 여진족(女眞族)이며, 몽고족이었던가요? 조금도 다름없는 우리 형제여 자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강권으로 조직하고 억지로 동원하여 남의 형제자매들과의 도발전쟁에 몰아놓은 것은 다름아닌 조국과 동포의 감정을 저버린 소수 붉은 이데올로기 집단도배들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요? 이들은 아직도, 아니 더욱더 휴전선이북에서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 철쇄(銑鎖)로 우리의 형제자매를 강제동원하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그들이 조국이라고 받드는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국과 동포를 저버린 그들의 야욕이 다시금 제 2의 6․25를 기도(企圖)하여 간단없이 우리들에게 어떠한 행위를 감행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겪고 있습니다. 강산이 세 번씩이나 변하는 때가 흘렀음에도 우리는 6․25 그날을 감상(感傷)으로 회상할 수 없는 너무나도 냉혹하고 엄숙한 사태를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 6․25란 민족의 큰 상흔(傷痕)은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뼈를 쑤시고 살을 괴롭힙니다.



이는 잊혀지지 않는 35년전의 통관(痛憤)때문에서가 아니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현실의 냉엄(冷嚴)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6․25동란이란 전투」는 멈추어졌어도 북으로부터는 붉은 마수의 검은 흉계가 넘실거려, 아름다운 우리강산, 평화로운 우리 백성의 안전을 항상 위협하고 있는가 하면, 남북으로 허리가 잘린 우리국토는 지금도 형태를 달리하는 남북전쟁의 가열(苛烈)한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35년이란 세월도 결국 이 남북의 분단을 해결하지 못했고, 따라서 남북이 갈려 있는 한, 또 언제 어느 때 35년전의 악몽이 되살아나올지 예단(豫斷)할 수가 없는 오늘의 국제상황 아래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권리로써 3천리 4천만의 허리를 짜른 원한의 경계선이냐! 동서로 뻗은 155마일은 살인자의 비수가 지나간 핏자욱같이 남북을 갈라놓은 38선! 철조망 한겹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선을 그은 두 개의 세계! 자유와 노예, 광명과 암흑과……

1945년 8월, 그로부터 어언간 마흔번째의 해를 보내고 있건만 구름낀 저 북쪽에는 언제 새 아침의 서광이 비치려는고!



분명히 우리의 땅, 선조의 뼈가 묻혀있는 곳, 형제의 피땀으로 가꾸어진 내 고장, 피와 살을 나눈 우리형제가 있는 그곳, 가고파 가고파 꿈에 그리는 못 잊을 그 산천! 그러나 지금은 붉은 오랑캐의 놀이터로 변한 이방(異邦)같은 내 고향아! 님이여 살피소서 시랑이들 속에 목자 없이 버려둔 당신의 양떼를…. 구원을 부르짖는 애처로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이까!

보십시오! 반세기전 공산화된 소련이라 하지만 아직도 소련 가톨릭 신자의 수는 약 4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소련 가톨릭의 총본산지인 「리투아니아」의 2백만 신자들은 모국인 폴란드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그 모습을 TV방송 중계로나마 조금이라도 가까이 선명히 보기 위해 리투아니아 서부 폴란드와의 국경지역으로 모여들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모국 폴란드 국민의 환영객의 그 물결은 어떠하였던가요?



서기 34년에서 36년경, 즉 그리스도 죽으신 다음 4,5년쯤 최초의 순교자이신 성 스테파노 부제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참혹히 돌로 쳐 죽음을 받은 이후 줄곧 치명자들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후 한 때 초대교회의 사나운 박해자였던 바오로도 서기 57년경 포악한 네로황제에게 목을 잘리웠습니다. 로마의 3백년 박해시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는 곳마다 미움을 받았고 자라는 곳마다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복음의 씨가 뿌려지자 근 백년에 걸쳐 모진 박해가 계속되지 않았었습니까? 그러나 그 흘려진 치명자들의 피로 복음은 더욱 깊이 뿌리를 박았으니, 어린 천주교회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혈의 역사 속에서 자라난 교회요, 그 교회라는 맥박속에서 자라난 유구한 순교의 대가족은 그 용기와 신앙을 잃지 않고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그 옛날 로마시대의 네로 폭군의 박해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조시대 대원군의 신도학살사건이 그대로 이 땅 한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그것입니다. 같은 핏줄로 연결된 북한의 형제들은 이 순간에도 신앙 때문에 박해라는 피의 역사를 주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6․25 당시 많은 동포들이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와 신자들이 북한에 납치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소위 북한의 종교인 대숙청을 계기로 죽음 아니면 강제수용소에서 신음하게 되지 않았던가요?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사무치게 부르고픈 하느님의 성명, 입속에서만 외치는 그곳의 부모형제 친우, 목자없는 암흑속, 총검이 노리는 저 북녘 형제들…, 생각만 하여도 눈물이 앞섭니다.



한마디로 공산치하에 있는 가톨릭교회는 오늘날 주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혀 유혈이 낭자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문제 그대로 “침묵의 교회”입니다. 몇 사람의 목자가 남아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신자들의 현황이 어떠한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가혹할 만큼 “철의 장막”속에 갇혀 있는 곳이 이북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분단의 현실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이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형제애 정신이 아닐까요? 국토가 아무리 양단되어있다 할지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정신,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신앙생활 태도에 있어서까지 나라가 두 조각이 돼있고 민족이 분열되어 있을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있어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있어서는 나라도 민족도 여전히 하나이어야 하고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의식하고 살아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된 지 40년, 아직도 실의의 북한 땅에서는 악랄한 공산도배들의 철추에 억눌려 신앙의 자유는 고사하고 인간 기본권리마저 상실한 불쌍한 동포들, 고통과 시련중에 놓여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을 살아야 하는 북녘 땅의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숭고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철의 장막”속에서 생명을 신앙의 제물로 삼는 우리 교형자매와 선량한 모든 북한 동포들에게 인내와 용기를 북돋아 주시도록, 양단된 국토와 찢어진 신비체를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과 합일체로 이룩되도록 기도와 희생을 바칩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물을 우리의 눈물로 알고, 그들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알아야 합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할지라도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이 민족의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들은 비록 사상적으로 우리의 원수이고 우리교회의 박해자이나 역시 우리의 동포요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그리고 죄의 사함을 위해서 성부께 빌으셨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하여 비록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현재-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 할지라도 우리 민족의 합일과 남북통일이 하루 빨리 성취될 수 있게끔 사랑을 실천하고 간단없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만사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요 그의 권능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여 침묵의 교회를 위하여 빌으소서」

침묵의 교회주일 조국의 통일은 언제?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은 그 끔찍한 6․25동란을 겪은지 꼭 35년 째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조국의 통일은 요원한 것같습니다. 옛날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들이 주님께 간절히 질문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사도 1:6)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애절하게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 대한민국이 통일될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피맺힌 이 민족의 한은, 35번째 맞이하는 6․25의 이 날에 더욱 한층 몸부림쳐지는 아픔으로 나타납니다. 두고온 북녘의 부모 형제, 처자들을 생각할 때, 더욱 더 분단의 한은 짙어만 갑니다. 재작년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어느 한 사람 그 장면을 보고 피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혈육을 같이 하지 않은 외국인까지도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우리는 39선도, 휴전선도 원치 않습니다. 우리 조국을 갈라놓은 어떠한 경계선도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 조국의 땅을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 그러나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런 감상에만 젖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의 시기를 여쭈어 봤을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때와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7-9)



우리에게도 주님은 같은 대답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능력이신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그분으로부터 힘을 받아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의 방방곡곡, 너희 조국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여 나의 증인이 되리라.”



사실 통일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도 정치인에게만 의존하고 있었을 뿐 우리들 신앙인들은 방관상태에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국토의 통일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만 이룩되는 것으로 오인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면에서만 생각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평화통일”을 부르짖고 나서고 있습니다. 평화통일이란 무력통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결코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만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정신적인 통일이 선행조건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통일이란 단순히 감상적으로 민족이니, 혈통이니 하는 그것만으로서는 안됩니다. 특히 공산당을 상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금물입니다. 저들은 그러한 인간의 약점까지도 그들의 악랄한 전략으로 악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안에서의 통일만이 이상적인 통일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정치가나 경제인들은 통일이 절실한 문제라고는 하면서도 항상 정치문제나 경제적 조건들을 앞세우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해방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통일문제에 있어선 한 치의 진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서 북한에 있는 동포들을 공산주의에 마수에서 풀어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통일문제를 숙고하고 실천하고자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 무서운 박해시대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열성을 다했습니다. 전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먹혀들어갈 것같지 않던 이 땅에 순교자들의 피는 마침내 눈부신 신앙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선교 2백주년을 맞이한 작년에 103위라는, 동양 제일의 성인국이 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순교선열들의 믿음과 열성을 본받아 하느님의 사랑을 북한 땅에 전한다면, 그곳에 동포들의 호응을 얻어 통일의 기틀이 그 신앙안에서 싹트게 되리라 믿습니다.



모진 강제노동과 심한 박해로 인해서 지금은 지하에 숨어버린 침묵의 교회가 북녘땅에 그대로 명맥을 잇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웅적인 인내력을 가지고 우리의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숨은 교우들을, 우리들은 잊을 수 없습니다.

6․25의 회고는 결코 하나의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민족의 아픔을 앓는 숭고한 교훈이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이며, 지금도 두동강나서 피흘리고 있는 조국의 허리를 다시 잇겠다는 불타는 염원의 계속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조국의 통일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우리는 통일문제를 외세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민족통일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자세를 보이는 때, 국제적인 세력도 장애요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때는 적극적인 협력을 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적 자주적 주체세력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신앙인들이 되지 않으면 안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에게 사랑과 일치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는, 당연히 민족의 일치와 조국의 통일에 복음적 관심을 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평화의 길도 역시 험난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일을 가지고 이 평화와 통일의 길로 매진할 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힘차게 활동하사, 나약한 우리를 통해서 이 일을 꼭 이룩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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