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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 강론
작성일 2003년 3월 22일 (토)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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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사순제 3주일 강론 모음 ”
 

15.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성전의 정화

김정진 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치 않으시고 성전으로 들어가시어 성전뜰로부터 환전상들을 내쫓으셨고 또한 성전 제사에서 사용되는 동물들을 파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쫓아 버렸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성정을 정화하신 데는 여러 가지 뜻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목적하신 바는 바로 돌로 화려하게 지은 구약의 성전은 헐리고 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약의 새 성전이 된다는 점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하느님 야훼와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게 되어 모세가 중재를 서고 하느님의 법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 화려한 성전이 세워지고 야훼께 예배와 제사가 올려졌습니다.


메사아 구세주의 시대가 이르자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로 모든 인류와 새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유다인들이 헐었으나 사흘 안으로 다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신약의 새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구약의 성전은 완전히 헐리게 되고 유다인의 빠스카 축제도 없어질 것이고 짐승과 곡물을 바치는 제사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에 대신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또한 죽음에서 영광으로 건너가신 주님의 부활이 새 빠스카 축제가 될 것입니다. 짐승과 곡식을 바치며 예배하던 것 대신,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때가 옵니다. 이렇게 새로운 세대가 온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봅시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장사꾼들과 동물들을 가차없이 축출하시고 나니 유다인들이 나서서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예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성전을 허물어 보시오. 사흘 안으로 내가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당신의 몸을 뜻하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전 뜰에 있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건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한 것임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님께 닥쳐올 일을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관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거짓 증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마태 26,61) 하고 증언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당신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성전의 파괴와 비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올라가셔서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당신 아버지의 집은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적인 권세가 아니라 이 백성과 인류와 세상의 성화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기름바름을 받으신 분이시므로 주님의 명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실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과 통치를 맡은 나라, 영신이 지배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혁신과 재건과 정화의 사상은 크리스천 생활의 중심 사상이며 지배적인 사상입니다. 우리는 혁신과 재건과 정화의 사상을 거닐음으로써 주님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은 우리 생활을 정화하는 시기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을 풍성히 받을 때이며 구원을 얻을 때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생활을 정화하는데 사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간택하신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목말라하며 끝내는 성경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2)고 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여러 가지 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정화시킴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참회하고 속죄하는 고백성사로 우리를 회개케하고 성체성사로 특별히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케 합니다. 셋째로 예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이용하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우리의 승리와 실패를 통하여 우리를 각성시키십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서 정화하도록 천주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을 성스럽게 보내기 위하여 금육과 단식재를 지키고 십자가의 길과 같은 공식 신공에 참여하고 흡연, 음주를 절제하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가족과 화목하고 나쁜 버릇이나 결점을 고치고 매일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고 공식적인 피정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등 착한 일과 고행에 힘씀으로써 우리 영혼이 크게 정화되어 하느님의 은총 하에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통과 수고가 따라오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만족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웃으며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아멘.






16.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철희 신부


겨울이 가고 봄이 된 듯 했는데, 다시 꽃샘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는 우리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비록 우리의 귀에 와 닿는 소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들려오고 들어야하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분명 우리가 져야 할 몫이 될 것입니다. 그 소리를 제대로 잘 듣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건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의 부조화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전혀 다른 결실을 맺는 삶이 시작되는 것은 출발선에서 이루어지는 아주 작은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주님의 날입니다. 고양동의 신자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하신 분, 하느님을 가리켜 욕심을 많이 가진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된 표현입니다. 인사 다음에 드리는 첫 마디의 말을 이렇게 하기는 해도 하느님이 욕심 많은 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당신만을 생각하고 마음을 모을 것을 요구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 2 주일에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입고 계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여주실 영광이 놀라운 것이고, 그 영광을 사람의 눈으로 함부로 표현할 수 없듯이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삶의 법칙들, 우리가 성심 성의껏 지키고 함께 하기를 바라는 법칙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법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구속이요 제약입니다. 법(法)이라는 한자(漢字)의 의미는 물이 흘러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기에 아무런 구속이나 제약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할수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법에 대한 감정은 그저 우리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첫 번째 독서 출애굽기의 말씀은 모세를 통해서 내려주신 ‘십계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열 가지의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 십계명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10가지의 계명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행하기를 바라는 긍정의 명령’이 2개, ‘행동하면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에 하지 말라는 부정의 명령’은 8가지에 9개가 있습니다. 부정의 명령이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삶의 자세가 성숙하지 않은 탓이라는 소리입니다. ‘실천하라’는 부탁은 아주 자세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오히려 피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만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자율권을 주는 것이므로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분노하는 모습을 전하는 것은 성서에 몇 번 나오지 않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성전, 사람으로 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인 성전을 소홀히 대하는 자세에 대한 분노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돈을 하느님의 성전에 봉헌할 수 있는 거룩한 돈으로 바꾸어주면서 폭리를 취하는 환전상들의 비리,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룩한 성전 구내에서 취급돼서는 안될 비둘기들을 다루는 왜곡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자신들에게 대들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자신들의 삶을 위협할 수 있는 권리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그것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말(本末)이 바뀐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할 수 없을 마지막 ‘아킬레스 건’을 건드립니다. 너희들 가운데 이미 형편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성전을 허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새로운 성전을 만들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유다인들은 또 한번의 큰 소리로 그들의 대답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부였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현명하게 삽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고 맘에 들면 상대방을 자신의 뜻에 맞는 대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은 ‘자신의 마음’일텐데, 그것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 나 말고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복음을 통하여 어리석게 보는 일들을 이제 그만하고 새로운 정신을 가지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그 사물을 대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말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항상 그렇게 돼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실 삶의 방법은 말을 앞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방법, 당장은 빛나지 않고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진정한 실천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또한 여러분의 기억 속에 실천보다 말을 많이 하고 사는 사람으로 인식될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과 더불어서 행동에도 성실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오늘 사순 3 주일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7.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하느님의 성전

최익철 신부


집은 우리의 가족이 모이는 곳이고 담화하는 곳이며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 해 보는 자리이고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곳입니다. 응어리진 마음들을 풀 수 있는 자리이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지리이며 상처 난 마음들을 어루만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잡은 내일을 위해 힘을 공급받는 곳입니다. 우리라는 덩어리를 만들어 주는 이 집이 어느 기둥 하나의 몫을 감당하지 못 한다면 그 집 전체의 흔들림을 모면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집안 의 각 개인은 개인이 아닌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각 구성원 하나 하나가 지탱해야 할 무게는 이처럼 그 개인에 한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기에 나 하나를 감당하는 일이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만남의 장소이며 나눔의 집입니다. 여기서 그 자녀들이 세례로 탄생되고, 병든 이들이 치료받는 병원이며, 주렸을 때 배불리는 식당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거쳐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집에서 하느님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하소연도 하며 투정도 부리고 감사도 드리면서 은혜를 빌고 또 받는 우리의 보금자리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집이요, 우리들의 집, 그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저 유다인들처럼 소음과 잡념으로 더럽혀서는 안되겠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사시는 소 천국이기에 거룩한 곳이며 깨끗해져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런 가시적인 성전보다는 당신 속성따라, 우리 마음마다, 가정마다 곳곳에 다 계시면서 당신 거처로 삼으시고 계십니다. 나 하나만 보이던 거울이 깨졌을 때, 그 조각마다 내가 따로 따로 비추이듯, 조각 거울같은 각 성전을 깨끗이 단장하십시오.

그래서 주께서 그 조각 거울같은 각 성전을 다시 모아 드리실 제, 분류된 자신의 성전을 찾아 헤매이지  않게 하십시오. 사도 바오로께서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삶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Ⅰ고린 3,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우리의 몸인 성전을 장사꾼들로써 상징되는 속세의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로 시끄럽게 만들지도 말아야 겠고 더구나 더럽히는 일은 없어야 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Ⅰ고린 6,19-20) 우리의 몸인 성전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잘 명심하십시오.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기에 우리는 밖에 나갔다가도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몸인 성전 안에 들어오면 자연 성령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정신 집중 혹은 정신 통일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만나서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는 성령의 기도가 되어 하느님께서 잘 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럴 때의 기도는 소와 양, 비둘기와 돈 같은 잡념이나 유혹이 찾아 들지 못하게 되어 휘두르는 채찍 노릇을 할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거룩한 집이 되게 하십시오.


하느님 자신이 성전이시니 필요한 자리를 우리는 그 안에 잡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전, 마음의 성전, 가정의 성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성전이 결국 하느님 자신의 성전 안에 융합되어 하나의 큰 성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지요, 이런 성전 안에서 어떻게 감히 잡된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어수선함이 우리 안에 머물면 주께선 가차없이 채찍질로 우리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감실에 주님을 자 모시면서 소리 높여 찬미의 노래를 부릅시다.

“당신 집에 사는 사람 복되오니 길이 길이 당신을 찬미하옵니다”(시편 84,4)






18.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정화

전종복 신부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면서 내 자신을 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내용을 생각하며 예루살렘 성전의 분위기를 그려봅시다.

13세 이상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해방절의 성전은 각지에서 몰려온 유다인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성전 마당에서는 약싹 빠른 유다 장삿꾼들이 대목장을 보고 있습니다. 상품인 소, 양, 비둘기 등이 우는 소리, 장삿꾼들과 흥정하는 손님들, 몸짓 발짓해가며 데나리온을 내놓은 유다계 로마인들로 시장터를 방불케 했을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등장하셨고, 장삿꾼들의 폭리와 부정을 목격하셨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기도해야할 장소를 장삿꾼들에게 빼앗기고 서성거림을 보셨습니다. 성전을 어지럽히는 장삿꾼들에게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에서 불같이 화를 내시며, 장삿꾼들을 내쫓으시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예수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미쳤다고 욕하는 유다인도 보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전은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발현하는 장소입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임을 우리에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느님을 뵙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겁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이 곧 하느님과의 상봉이 됩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을 뵈올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세례받은 우리 자신도 성전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Ⅰ고린 6,9)하고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Ⅰ고린 6,11)졌었던 우리 자신이 온갖 탐욕과 이기심으로 더럽혀지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중이 염불에는 정신이 없고, 젯밥에만 정신을 쏟는다”는 속담과 같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몸은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딴 곳으로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해야 하는 때입니다. 또한 눈물과 극기를 통해 우리자신을 정화해야 할 시기입니다. 저는 어릴 때 추수한 고구마를 저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상처나 썩은 부분이 있는 것은 모두 가려내도군요. 같이 저장해 두면 몽땅 썩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자동차왕 포드는 “불결한 공장은 자연 불량한 직공을 모아들일 수밖에 없고, 선량한 직공까지도 유혹하여 타락케 하며, 그 품성을 저하케 하고 드디어 파멸을 초래케 한다”고 말했습니다.


죄는 방심하는 틈을 타서 우리 내부에 서식을 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점점 자라서 걷잡을 수 없이 되고 맙니다. 더 큰 죄도 예사로 범하고 맙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죄는 죄만을 낳습니다. 검은 옷에는 때가 끼어도 모르고 지나칩니다. 하얀 옷에는 조그마한 먼지만 묻어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Ⅰ데살 4,7).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선행을 함으로써 정화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자 되도록 우리의 노력을 아끼지 맙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마태 5,8) 아멘.       






19.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그리스도의 제사

표창준 신부


사람들을 사랑해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 분이 폭력을 쓰신 일이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잘못을 책망하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고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해방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 가셨는데 그 성전 뜰 안에서 당시 그 누구도 상상 못할 놀라운 일을 벌이셨습니다. 그분은 밧줄로 만든 채찍으로 양과 소를 모두 거기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답지 않게 그런 뜻밖의 행동으로 뜰 안을 온통 뒤집어엎어 쓸어버리셨습니다.


죄인들도 따뜻하게 대하신 그분이 어떻게 이럴 수도 있는가? 그것도 성전 뜰 안에서 말입니다. 성전 뜰에서 장사꾼이 들끓고 사고 파는 일로 법석대면서 자신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성전 뜰이 시장처럼 되어가는 광경을 예수님은 그대로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시오. 이제부터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시오.” 불순한 것들을 치워버리고 거룩한 성전의 모습을 되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강력하게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갑자기 당한 일에 사람들은 놀라고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야 사람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예수께 대들었습니다.


대체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감히 이런 일을 하느냐면서 그럴만한 이유를 기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따졌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기세 등등 대드는 질문에 대해 더 엄청난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 보시오. 사흘 안으로 내가 다시 세우겠소.” 이 말은 유다인들에게는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모독하는 말이었고 나아가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46년간 공들여 지은 것이며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전체 생활의 중심이며,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목숨을 걸고 지켜온 것입니다.


해마다 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3번 순례하였고 이 성전은 타국에 나가 살고 있는 유다인들의 마음  속에도 살아 있었던 모든 이의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성전, 그리고 그 거룩한 곳에서 바쳐지는 희생제사의 전통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신앙의 바탕이었고 중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과 제사에 관한 오랜 종교전통을 예수는 채찍을 휘두르는 행동과 성전을 허물어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송두리째 뒤엎으시는 것이 아니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의미심장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을 뒤흔들어 놓고야 만 예수의 행동과 말씀은 시장같이 속화된 성전 뜰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려는 목적만은 아니었습니다. “사흘 안에 내가 다시 세우겠소”라는 말씀이 암시해주듯이 바로 예수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새로운 때, 신기원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지금 바로 이 새로운 때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만으로가 아닌 의미가 담긴 상징적인 강력한 행동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 제사와 성전 유대 전통, 이 모든 것을 다 폐지시키는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메시아 구세주 예수 자신이 오신 이제는, 과거의 모든 종교행위, 제사, 성전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중 것을 세우시기 위해서 먼젓 것을 폐기하신 것입니다.”(히브 10,9)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세계의 어느 종교에나 죄스런 인간이 신에게 나아가 용서와 화해를 비는 속죄행위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신에게 바치는 속죄행위로써 죄를 씻고 신과 화해하고 그의 호의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정반대로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나아가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로 와서 인간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이 찾아와 화해를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그들을 마중 나가 화해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물으시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Ⅱ고린 5,19) 이것이야말로 고금에 없었던 새로운 말이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신기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 것이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 분께 바친 참 제사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다른 제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침으로써 인류의 참 제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은 사건이 실제에 있어서는 세계사에 처음 있는 유일한 제사인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가 아니라 온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봉헌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황소나 염소를 원치 않으시고 인간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조건 없는 승복만이 참된 숭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이 응답은 황소나 염소의 피로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종교의 완전한 실패를 서슴없이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피같은 물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 곧 참된 제물을 하느님께 바친 사제가 되신 것이고, 한갓 세속적 사건처럼 보였지만 참 제사가 된 화해의 제사가 세워진 시각이고 신기원이 이룩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의 허물을 십자가로써 짊어지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과 인간의 비참을 연결지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인간들과 하느님을 연결지어주는 참 성전이십니다. 옛 제사는 폐기되고 옛 성전은 헐릴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나 뵙고 예배드릴 새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유다인들이 헐었으나 사흘만에 다시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참 성전이 되신 그분 자신이 바로 그분이 가져오신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이 참 제사요 바로 인간들의 허물을 자신이 짊어지면서 인간들에게 다가가심이요, 그것은 곧 만민을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기에 하느님 아버지께 다가가신 것입니다.


사순절은 회개와 보속, 기도와 절제, 사랑의 희생을 하는 때요 곧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께 다가가고 형제들에게 다가가는 때입니다. 형제들에게 다가가서 허물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기도 중에나 일상생활 중에 될수록 자주 형제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다가가는 일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아멘-






20.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박성욱 신부


3월의 마지막 주입니다. 희망의 21세기 첫봄이라며 들뜬 기분으로 3월을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가 되었습니다. 3월도 마지막 주가 되었고, 이미 우리 가운데 봄의 기운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과 한숨으로 이 봄을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습, 즉 신문과 TV에서 알려주고 있는 우리 세상의 모습이 전혀 희망적이지 못하고 여전히 절망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즈음 신문이나 TV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사는,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된 기사입니다. 곧 다가올 4월 중순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예정이니 당연한 것이라도 볼 수 있겠지만..., 그 기사의 내용들이 내용이다 보니 신문이나 뉴스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21세기의 첫 선거’이기에, 또 맑고 밝고 깨끗한 세상을 이루기 위한 사람들을 뽑는 것이기에 설레임과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겐 왠지 짜증스러움과 서글픔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이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뽑아줄 정치인들은 20세기의 낡은 행태만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뽑아준 국민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려 애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부를 계속 유지하려고 갖은 난동을 다 부려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헐뜯어대는 이러한 정치권의 모습은 물론 언제나 우리가 보아왔던 모습이지만, 이러한 모습이 새 천년, 21세기의 첫 선거에도 계속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고 짜증나고, 서글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거 때만 되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정당들을 보면서..., 남과 북이 통일을 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애써야 할 판에 지역감정으로 서로를 가르고 분열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정당한 법 집행인지 정치탄압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각자 그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우리는 암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할 것인가?’ 정말 힘들고도 어렵고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이러한 암울함이 닥치지 않기 위해서, 한두 달 전 시민단체들은 ‘총선시민연대’라는 것을 만들었고, 얼마 지나서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될 부적격자들을 발표했었는데, 지금 그 부적격자들이 아무런 해명 없이 다시 권력과 명예와 부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그 때 그 부적격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런 발표를 함부로 하는데, 너희가 그렇게 할 자격이 있느냐? 너희의 기준이 정당한 것이냐? 우리는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정치인인데, 너희가 뭐라고 함부로 우리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냐?” 그러고는 곧 지들끼리 선거법을 개정해서 그들을 괴롭혔는데, 어쩌면 이런 그들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 유다인들이 했던 말과 너무도 흡사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또, 어떤 분들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시사성 강한 문제를 교회에서 사제가 강론시간에 거론한다고, “당신이 정치가도 아니면서, 왜 그런 얘기를 강론시간에 하는 거냐고..., 미사시간은 정말 거룩하고 경건한 시간인데, 하느님의 말을 전해야하지 않느냐고..., 당신이 하면 뭐 좀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런 분들의 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일련의 소동을 벌이셨을 때,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나서서 한 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느님은 거룩하고 경건하고 완벽한 선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미사성제는 거룩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현실과 관련이 없다면,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아프고 힘들고 답답한데, 교회에 모여와서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비스런 딴 세계의 말만 지껄여 여러분을 일시적인 위안만 얻게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우리 현실의 역사 속에 함께 하심을 믿는 그리스도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는 ‘마약’일 뿐입니다.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 말씀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다가 성전 뜰에서 하느님께 바칠 제물과 돈을 바꾸어주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을 채찍으로 내리쳐서 쫓아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인간의 사랑인 찬미와 감사의 제사가 바쳐져야할 거룩한 성전이, 인간의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장삿속과 맞물리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본래의 의미의 성전이 아니라, 단지 뜻없는 겉보기의 형식만으로, 때가 되면 으레 참배하고 제물과 헌금을 바쳐야 하는 하나의 관습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주일 내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도 주일이 되면 성당에 와서 미사 한 번 드리고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은 오늘 ‘사랑의 매’를 때리시며, 제정신 차리게 정화시키고 계십니다.


‘사랑의 매’'를 들고 성전을 원래의 뜻과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깨끗이 정화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사실 성전이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따라서, 성전이란 말의 뜻을 그대로 새겨본다면, 이 세상 전체가, 또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시고, 한 순간도 빠짐없이 당신의 사랑을 베풀고 계시니,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 전체가 바로 당신의 성전이 아니겠습니까.


또 당신이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더더욱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며, 미사 때마다 성자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내 안에 모시니, 우리 인간자체가 하나의 성전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성전인 이 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인 모든 인간이 몇몇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인간에 의해 더럽혀지고 유린당하며, 하느님의 성전인 이 세상과 모든 인간들의 목적과 그 의미를 잃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랑의 매’, ‘정화의 매’를 들고 그들을 제정신 차리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인간을 차별을 두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현실, 이 세상을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가꾸어 내지 못하고, 온갖 이기심과 욕심, 불의와 비겁한 타협으로 더럽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는 ‘하느님,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하신 성서 말씀의 열정을 가지고 정화의 매,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따져 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성전인 이 세상이 더럽혀 졌으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깨끗이 정화시키고, 부활로써 새로 세우시겠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생애가 집약된 참된 기적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이 세상과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사랑하시는 당신의 위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국민들을 무시하고, 돈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 편에 서서,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기는커녕, 장사꾼과 환금상같은 약삭빠른 이기심으로 자기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정치가들에게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기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더럽고 지저분하고 이기심과 욕심 가득한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바로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기적인 것입니다.


이 기적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외형적인 신기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하여 묵상하는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위해서,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과 죽음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그러하지 못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신비한 것으로만 생각할 때, 이 세상을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사랑을 베풀기는커녕, 현실의 문제를 도피하려고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외형으로만 받아들이고 그 뜻은 외면하는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21.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중단 없는 나그네 삶

최영철 신부


성전 정화하시는 예수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나이다"라는 시편(69, 9)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그 의도는 성서의 말씀이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고 실현되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복음의 말씀으로부터 두 가지의 본질적인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현실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완수하시는 일 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점 (요한 13~21 참조)에서, 예수님의 삶은 구약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성취시키는 삶 자체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이심을 복음사가는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그 생명을 갖게됨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성전과 예수님의 몸을 동일시(요한 2,19)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주제를 통해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 안에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나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복음사가가 깨우치고자 하는 핵심이라면, 우리 신앙의 정체는 아주 분명해진다.


인간적인 주님의 고통

다시 말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현실적인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과는 별개의 것과 같은 이질감 속에서, 내가 살고자 하는 나의 신앙과 이 현실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되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갈등에서 허덕이었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어야만 했던 한 인간이었음을 우리는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그분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증명해 주셨음을 또한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차원에서 신앙의 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회의스러움으로 가득 차서 우리를 갈등스럽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현실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미는 그런 현실 안에서 그 의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을 위해서 존재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런 현실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I 바로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시고, 하느님이 거룩하게 현존하시는 성전 자체이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요한 사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앙의 현실적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주일의 제1독서와 제2독서를 또한 이해해야 한다. 이두 독서의 공통적 내용은 가치관의 변화, 즉 삶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 뛰어넘는 부활로 그것은

"하느님의 어리석음" (1고린 1, 23)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인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 눈으로 볼 때는 실패이지만, 바로 그 어리석음이 새로이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리석음은 실패로 끝장나는 현실이 아니라 인간지성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신비스런 현실인 것이다.

그것을 믿고 오늘 여기에서 모든 현실적인 아픔을 뛰어넘는 삶이 바로 이러한 현실 앞에서 나의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동참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은 안주가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여행하는 나그네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22.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참아주는 사랑

강 호 신부


요즘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빨리 빨리 병 에 걸려 무엇이나 서둘러 해 치우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여의치 않으면 금방 포기하고 맙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좋은 표양을 보여 주십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을 청하시면서 말씀을 풀어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여인에게 진리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면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한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지극한 정성을 들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합니까? 내가 아쉬워서 무엇을 부탁하거나 사정을 할 때는 끈질기게 대화에 나서지만 누구와 이야기 할 때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면 그 사람을 무시하고 그와 함께 하기를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신 좋은 것을 전해 주시기 위 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 여인과의 대화를 인내롭게 이끌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말씀을 전할 때 눈에 보이는 결과가 빨리 나타나지 않는 다고 해서 쉽게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자기를 찾아왔지만 당장 세상의 일로 눈이 가리워져서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도 쉽게 눈에 보이는 이익과 편안함에 빠져 여러 가지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이제 사순절도 반이나 지났습니다.


이제라도 눈을 들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알아 뵈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또 그렇게 만 난 예수님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므로써 남은 사순절 기간을 보다 더 은혜롭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23.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우리의 몸이 성전이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20,1-17 (우리는 모세에게 율법을 받았다) 

제2독서 Ⅰ고린 1,22-25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가 십 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지혜입니다)

복 음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과월절은 유대인들이 에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해방축제로서 대개 4월 중순경에 거행되었는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반경 30km 안에 있는 성년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습니다.


이 축제는 그들에게 가장 큰 명절로서 타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도 이 날만은 가급적 고국에 돌아와 참여했기 때문에 신학자들 의 추정에 의하면 그 날에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모였고 또한 그때 잡혀 죽은 양만 해도 30만 마리 가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장사꾼들은 대목을 보느라고 동물의 값을 턱도없이 올려받아 폭리를 취했으며 성전에 바쳐야 하는 세금도 외국돈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환전상들의 횡포도 아주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의 부조리를 타파하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 보면 본래 '성전 정화' 사건은 주님의 수난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당신이 잡히시기 전에 먼저 성전의 부패와 부조리를 척결하시고 그리고 당신 자신을 깨끗한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어 세상과 인류의 죄를 정화시키십니다. 하느님의 집은 깨끗해야 합니다. 결코 세상의 악으로 오염되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정화된 우리도 거룩하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더럽혀져 있다면 정화시켜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 십계명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종교와 도덕, 신앙과 윤리의 표준이 되는 일종의 헌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삶의 가치 기준을 정하는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즉 십계명 에 충실했으면 그는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게 산 것이며 십계명의 가르침에 충실치 못했으면 그는 잘못 산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엔 죄를 지으면 속죄제를 드려서 죄사함을 받았고 오늘에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대체로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장소로서의 건물을 말하며 둘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서 암시하셨듯이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며, 셋째는 바오로 사도가 강조했듯이 세례를 받은 우리 각 사람은 바로 성령을 모시는 성전인 것입니다(Ⅰ고린6,19참조).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의 성전 정화는 교회 공동체의 쇄신을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의 회개를 통한 깨끗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종교의 마모니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모니즘이란 배금주의로서 종교가 돈과 재물을 우상시하여 자신의 절대자보다 더 높은 가치에 두는 모순과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에서 돈을 더 중요시하고 돈과 재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은밀하게 거역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허물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들은 얘깁니다만, 종교가 기업화되고 있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헌금한 것을 가지고 사채놀이와 아파트 투기를 했으며 빌딩 지어 세받고 증권에 투자하는 등 아주 장삿길에 들어서서 본래의 종교적인 사명을 망각한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대에 주님이 오신다면 허물어야 할 교회와 절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런 식으로 종교가 타락해서는 안됩니다.


타락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마귀라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이 정도야 어떠랴, 이게 다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하고 변칙을 하게 되면 거기에 묶이고 옭아져서 나중엔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마귀라는 것은 천사가 타락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훨씬 영특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잘라 버려야 지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어떤 자매가 수퍼마켓에서 일했는데 일하다 보면 상한 물건들이 많이 나와서 이런 물건이야 자기가 갖다 쓴다 한들 뭔 죄가 되랴 싶어서 조금씩 물건을 날라다 쓴 것이 나중엔 본격적으로 남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가져오는 도둑질을 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는 뉘우쳐서 고백이라도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고질적인 죄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사실 여러 가지 면의 문제로 해서 영혼이 더럽혀져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다면 이 성전은 허물어야 한다고 우리의 육신을 크게 꾸짖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자신을 진실되게 살펴봐야 합니다. 사순 시기는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부활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월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허물기 전에 우리가 먼저 뉘우쳐서 스스로 성전을 정화시키도록 합시다. 이것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24.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환전 장사들을 내쫓으심

민병섭 신부


  신앙이 없는 어느 비누 생산업자가 하루는 복음을 전하는 열심한 신자 한 사람과 길을 걷고 있었다. 비누 생산업자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여보, 당신이 전하는 그 복음이 아직까지 한 일이 뭐요? 자, 세상을 한 번 보시오. 아직도 죄악이 많고 악한 사람들 천지가 아니오?" 이에 그 신자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길을 가다가 도랑에서 더러운 흙장난을 하며 노는 흙투성이 꼬마 아이를 발견하였다.


  이 때다 싶어 그는 “여보시오, 비누도 뭐 한 일이 별로 없군요. 내가 보기엔 아직도 세상에 더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과 더러운 곳이 너무 많으니 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아이참, 그러니까." 하고 비누업자는 말을 잇는다. “비누란 사용될 때만 효과가 있는 법이 아니겠소?" “바로 그것이오." 하고 그 신자는 대답하였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마찬가지라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외아드님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어 우리에게 그 사랑을 실제로 증명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 성장하기를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옛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뱀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것으로 착각하여 우상 숭배에 빠졌던 잘못을 오늘도 반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구원은 바로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사랑에 의한 십자가의 길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 만나게 되는 십자가는 자기 훈련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일 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희생만이 그분의 현존을 알리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또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사순 시기는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는 시기이다. 바로 우리를 위한 그분 사랑의 희생을 묵상하며 동시에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이웃들에게 전하여지는 시기이다. 사랑에 의한 희생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으로 우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기며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복음/요한 2,13-25

  요한 복음 사가는 7개의 표징 중 첫 번째 표징인 가나의 기적(2,1-11)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제 새로운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복음 사가는 메시아 시대의 성전과 새로운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해방절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활 중에 세 번 해방절을 맞이하시고(2,13; 6,3; 11,5), 그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공관 복음에서는 성전 정화 기사를 복음서의 맨 마지막 부분에 게재하고 있으며, 바로 이 성전 정화 사건이 그분을 죽음으로 이끄는 핵심 사건이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 활동의 그 시초에 이 성전 정화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가나의 혼인에서 보여 준 표징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을 위한 의도적인 구조라고 볼 수 있다. 혼인은 가정의 최대 경사인 반면, 해방절은 유다인의 최대 경사이다. 이 때에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시는 것은 단순히 유다인의 예배가 부패되었음을 항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짐승의 희생이 아닌 바로 당신께서 몸소 제물이 되심을 증거하시기 위함이며, 하느님과 만남의 장소인 성전이 이제는 바로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을 정화하시며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천명하신다(16절).


  그러나 진정한 집,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진정한 장소는 지상의 성전이 아니라 바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몸임을 그들에게 새롭게 인식시켜 주시고 계신다. 예루살렘의 옛 성전은 이제 부활하신 그분 안에서 그 목적이 완전히 성취됨을 알려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22절).


  이제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고 그분과 만나는 곳이었던 옛 성전은 그리스도인 새로운 성전으로 대치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든 사람이 기도하는 집이 되시는 것이다. 나중에 이 모든 것은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신 대화(4,1-42)에서 더욱 확대되어 성령으로 기도하는 시대로 바뀌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어느 주석가의 말대로, 요한 복음 사가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 자체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성전의 찢어진 휘장 너머에 그리고 마지막 숨을 몰아 쉬시는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의 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개입하심이 없이 신적 영광으로 가득 찬 실제적인 인간의 몸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구약성서의 '꿈'인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바로 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히 실현된다.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은 우리도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새롭고도 깊은 현존의 신비로 우리의 삶을 감싸기 위해서다. 사순 시기는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시기다. 바로 우리 자신을 그분의 현존으로 채우며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시기인 것이다.


    제1독서/출애 20,1-17

    오늘의 제1독서는 모세의 율법, 곧 십계명이라고 불리는 "계약의 말씀인 열 마디 말씀"(출애 34,28) 또는 신명기의 표현에 따라 "열 마디 말씀"(4,13; 10,4)의 선포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중에 광야에서 오랫동안 유랑 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다. 그 중에 기본적인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재판에 적용되는 일반 법률이 아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율법의 출발점이자 근거점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 십계명은 옛날 문답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상 삼계는 하느님께 관한 것이고 하 칠계는 사람들에 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곧 위의 세 가지 계명은 우리가 더욱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아래의 일곱 가지 계명은 사랑과 존경으로써 형제들을 더욱 가까이 하며, 좀더 편안한 생활을 추구함으로써 순간순간마다 떨어지게 되는 거짓된 모든 우상에게서 자신을 해방시키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십계명은 '자유'의 표현이며 또한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오랜 동안의 비참한 노예 상태로 매어 있었던 '종살이의 상태'를 벗어남에 대한 보증이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공동체에 자유와 생명을 주셨고, 이제 그것을 구체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르침인 십계명을 일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올가미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그 원천에서 나오는 자유와 생명을 체험할 수 있게 보장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이다.


  그러나 점차 그 근본 정신이 잊혀지고 왜곡되어 형식적인 준수만이 강조되면서, 십계명 등은 자유가 아닌 억압의 도구로 쓰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형식주의를 깨뜨리고 그 근본 바탕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분명히 밝히셨던 것이다(마태 22,34-40; 마르 12,28-31).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며 고해성사로 새롭게 주님께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고해성사에서 십계명은 양심 성찰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십계명의 근본 정신인 자유와 생명, 사랑 등을 고려하지 않고 형식적인 준수 여부에만 몰두한다면, 십계명은 역동적인 해방의 힘을 잃어버리고 한낱 짐스런 족쇄로 변할 것이다.


    제2독서/1고린 1,22-25

    오늘의 제2독서에서는 비록 짧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는다."라는 말을 통하여, 이스라엘 정신과 그리스의 정신, 곧 예언자들의 종교와 철인들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 위대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이 때로는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 곧 신앙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이다. 유다인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이 하느님께 선택된 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을 내세웠다.


  “이렇게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니, 그 시체를 나무에 단 채 밤을 보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그렇게 두어서 너희 하느님 주님께 유산으로 받은 너희 땅을 더럽히면 안 된다"(신명 21,23). 또한 그들은 기적을 요구했다. 그들은 메시아의 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오로가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쓸 때도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이고 이상한 일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자신을 메시아로 믿으라고 하였다. 기원 54년에는 이집트에서부터 예언자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예루살렘에서 3만 명을 설득하여 올리브 산으로 이끌고 가서 자기가 명령을 하면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기적적인 사건을 요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만 한 일은 하시지 않았다.


  반면 그리스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러기에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을 속죄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를 요구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을 소피스트라고 하는데 당시 이 말은 생각이 영리하고 말이 교묘하여 나쁜 것도 좋게 보이도록 하는 재변을 잘 쓰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다. 그러기에 무뚝뚝하게 말하는 선교자들을 교양이 없고 단순한 사람들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끈질기게 집착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있어도 그것을 거절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순 시기는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는 때이다. 우리도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우리 자신을 매여 놓고 있지는 않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참다운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기를 스스로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며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는 주님을 뵐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5.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

신은근 신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몰아내신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런 사람들이 정말 있었을까. 있었다면 무엇을 사고 팔았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 소나 양, 비둘기 같은 짐승을 제물로 삼았다. 그들은 이러한 짐승을 잡아 홈 없는 것만 골라 제물로 사용했다. 병들었거나 몸에 상처가 있는 동물은 제물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전에는 제물을 살펴보는 검사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까다롭게 동물들을 살폈다. 일단 부적격으로 판정되면 제물로 사용하지 못함은 물론 처리하는 데도 골치가 아팠다. 이러다 보니 성전 안에는 미리 검사관을 통해 예비 합격한 동물들을 파는 장사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돈을 주고 제물을 사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한편 유다인들은 성전에 바치는 돈은 반드시 이스라엘 화폐를 사용토록 했다. 이 규정 때문에 해외 거주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야 했는데, 그들을 위해 환전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몰아내신다. 참배객들의 편리를 도모해준 그들이건만 성전을 더럽혔다고 꾸짖으신다. 어떤 이유로든 하느님을 향한 예배를 돈 버는 수단으로 삼지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전에서 할 일은 기도가 전부다.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기도한 후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기도는 감사드리는 것이다. 한 주일을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것을 찾아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을 찾아내어 기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먼저 이 일을 한 뒤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신다.


눈에 보이는 건물만이 성전은 아니다. 예수님도 당신 몸을 성전으로 비유하신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 몸 또한 성전이 된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를 몰아내어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장사꾼들을 몰아내셨듯이 우리도 만사를 돈과 연관시키려는 생각을 몰아내야 한다. 적어도 하느님의 성전에서는 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당 안에서까지 세상 걱정하며 미사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성전 안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은 돈과 물질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돈과 물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다.


화산에는 활화산과 사화산이 있다고 한다. 활화산은 언제 터질지 몰라 위험하지만 양질

의 온천수를 주변에 두고 있다. 그러나 사화산은 위험하진 않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신앙은 살아있는 활화산이지 죽은 사화산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을 사화산으로 만들고 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에 유익한 온천수를 마다하고 신앙을 삶의 장식품으로 만들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환전상과 다를 바가 없다.


걱정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 없는 사람도 이 세상 안에는 없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필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다.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런 은총들이 주어질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


이제 주일이 되면 기도를 목적으로 성당에 가도록 하자,






26.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환전장사를 내쫓음

김영남 신부


예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쫓아내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라는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자못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사실, 성전 경내에 있던 환전상이나 장사하던 사람들은 제사 바치는데 필요한 것들(예컨대, 헌금이나 성전세로 바칠 돈; 제물로 바칠 동물들)을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특히 멀리 외국에서 온 순례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긍정적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에서 바치는 돈(헌금이나 성전세)으로는 옛 화폐만을 받았었기 때문에, 성전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화폐를 성전 뜰에 있던 환전상들로부터 환전'을 해야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성전정화」 행위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성전 경내에서의「상행위의 남용」을 질타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제사를 바치는 식의 예배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보는 해석이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성전정화를 상행위의 남용을 질타하는 행위로 보는 해석이 무난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형식적 경신례」를 질타하던 예언자들의 모습, 다시 말해 정의와 자비를 요청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도, 습관적으로 희생제물만 거창하게 봉헌하면, 하느님께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으로 생각하며 안주하던 당대의 신앙인들(특히 지도자들)을 매섭게 질타하던 예언자들의 모습(예컨대 예레 7장;이사 1장)을 또렷하게 연상시킨다.


그리고 요한 복음서 안에서 「성전정화」의 행위는 깊은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성전정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서와는 달리 공생활 초기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바로 앞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와, 뒤에 나올「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나오는「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라는 주제(4,20-24)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혼인잔치를 통해「하느님의 나라」가 예수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요한 복음사가는「성전정화」이야기를 통해「참다운 예배」는 이제「새로운 성전」인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며, 그래서 그곳을 인간이「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요,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그 곳에서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 뵙고,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새로운 성전」이라고 표현하는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존과 계시의 장소요(참조: 1,14; 10,30: 14,6-11),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인 새로운 성전(참조: 7,37~39; 19,34)이시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 한 가지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요한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는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지(기원후 70년) 이미 20여년이 지난 후였다. 유다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전은, 유다인들의 왕으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헤로데가

신앙도 없으면서 유다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19년경부터 희랍-로마 양식으로 화려하고 거창하게 개축을 하도록 지시한 결과였다.


예수님 당대에는 성전 본체의 개축은 완성이 되었지만, 부속 건물들의 개축 공사까지 포함하여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기원후 63년이나 가서였다. 피폐하였던 유다 백성의 그 많은 땀과 혈세를 들여 화려하게 개축하였던 성전이 불과 7년만에 로마인들에 의하며 무너지고만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던 사람들을 무섭게 질타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인지 곰곰히 반성하게 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4,23)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 예배는 이미 예언자들이 보여주었고,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참된 길(14,6)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사람들이 벽돌로 쌓아올린 외적인 성전 테두리에 갇혀있는 예배가 아니라, 그러한 성전이 무너지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지속될 수 있는 예배일 것이다.

 

정화의 시기인 사순절에 다시 듣게되는 예수님의「성전정화」에 관한 이번 주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려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오늘의 시대에「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란 어떠한 것일까?


오늘의 시대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면 채찍을 만들어 깨끗이 쫓아내 정화하고 싶으실 성전은 과연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혹시라도 「성전」이라고 하는 곳이,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말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갖은 이해관계로 뒤얽혀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암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장소가 되어 버린곳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마땅히 「정화되어야할 곳」이 아니겠는가!






27.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나)  마음의 성전을 헐어버려라 

김영진 신부


지난 가을 강원도 강릉지역에 나타난 무장공비 소탕 작전으로 피해를 본 것은 남북한 모든 국민이었겠으나, 특히 강원도 영서 지역에 준 피해는 직접적이었고, 매우 심각하였으며 지금까지도 당시에 입은 타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 지역에서 고랭지 감자 농사를 지은 농부들이다.


어느 날 공소에서 미사를 끝내고 막걸리 한잔을 하는데, 잔칫집에 갔다가 늦었다며 허겁지겁 달려온 신자 한분이, 술에 얼큰하게 취해 대뜸 나한테 소리를 지른다. “신부님, 이렇게 농사꾼이라고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감자 한평 농사에 1천5백원 들었는데, 5백원에 사겠답니다. 농사지은 대가로 한평에 1천원씩 손해를 보니, 1만평 농사지은 사람은 1천만원 손해보게 됐어요. 차라리 피땀 흘려 농사일 안했다면 1천만원 손해라도 안보지요,"

물론 오랜만에 신부를 보니, 감자 때문에 속이 상하여 한마디한 것이지만, 나도 속으로 “원 별사람 다 보겠네. 내가 당신 보고 감자 농사지으라 했나. 이득 볼 때는 가만히 혼자서 먹고, 손해를 보니까 엉뚱하게 나한테 소릴 지르고 야단이야"하면서 좀 언짢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일하지 않았으면 손해라도 안 볼텐데, 열심히 일한 대가로 오히려 손해만 보았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내가 나서 봐야겠다. 감자 한개라도 팔 곳을 찾아서 팔도록 해주어야겠다"하고 생각을 하면서, 사제관 도착 즉시, 주소록을 뒤져 여기저기 편지를 보냈다. 그런 결과로 요새는 영락없는 감자장사가 됐다. 여기저기 강론을 다니면서도, 감자를 싣고 다니며, 할 만한 사람이면누구에게나 감자 좀 팔아 달라고 말한다.       


감자․배추를 파는 장돌뱅이 신부

촌에 사는 신부는, 사과가 많이 나는 동네에서는 사과장사, 인삼이 많이 나는 곳에는 인삼장사, 배가 많은 곳에서는 배장사, 배추 나는 동네에서는 배추장사, 엿이 많이 나는 곳에 살면 엿장사라도 해야 한다. 장사도 처음 할 때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말도 더듬거리게 되는데, 좀 하다 보면 얼굴도 두꺼워지고, 말솜씨도 뱃심도 강해져, 기생오라비 뺨치듯은 못해도 그럭저럭 익숙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많이는 못해 봤지만 연탄장사, 고추장사, 나물장사, 새우젓장사, 배추장사, 감자장사 등을 하면서, 어떤 때는 내가 사람들 영혼을 일깨워 하느님께 데려가는 신부인지, 장사에 나서서 교우들 물건 팔아주고 성전 짓는데 쓰기도 하는 장돌뱅이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도 있긴 하다.


나 같은 장사꾼들의 성화에 못이겨 ,성당 마당마다 쭉 물건을 늘어놓고 성전을 장사하는 집인 듯 착각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하니, 장사꾼들을 예수님이 야단치실만도 하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동전을 바꾸어 주는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화가 나시어, 채찍으로 짐승들을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셨다고 나온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시며 말이다. 성전을 장사하는 터로 만드는 것도 문제요. 교우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 보겠다는 생각도 문제이지만, 더욱 큰 문제는 자신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존재하는 성전이 때가 끼고 먼지에 파묻혀 있으며, 온갖 교만과 이기심, 시기와 질투, 불신과 미움으로 인해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져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밖엔 손잡이 없는 마음의 문

예수님이 채찍으로 짐승들을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상을 둘러엎으신 것은, 바로 썩어 부패되어 있는 우리들 마음을 정화시키고자 하심이 아니겠는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지으리

라"하신 것은, 물론 예수님 자신을 또 하나의 새로운 성전으로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었지만, 썩어 부패된 우리들 마음의 성전을 헐어버리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새 성전을 지어야 됨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유명한 예술가 혼맨헌티는 성서를 기초로 하여,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성화를 그렸다. 그 성화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성전 문 밖에서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폭력과 증오, 편견과 탐욕, 시기와 질투 및 온갖 냉소주의에 오염된 우리들 마음의 성전에 예수님의 빛, 즉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두드리시는 모습이요, 인간이 자기 내면의 문을 열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부패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보시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신다. 어떤 때는 양심이나 이성을 통하여, 어떤 때는 경험이나 친구의 권면을 통하여, 또 책이나 방송을 통하여 우리들 마음의 문을 열고자 두드리신다.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 성전 문의 바깥에는 손잡이가 없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인간 마음의 문 바깥에는 손잡이가 없으니,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열지 않을 때, 다른 이가 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의 성전을 다시 세워야 한다. 똘똘 뭉쳐진 교만과 이기심의 덩어리, 편견과 미움, 시기와 질투의 덩어리를 깨부수고, 새로운 마음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이 46년간이나 지은 낡은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새 성전을 지으셨듯, 살아온 인생의 햇수만큼 수십년간 부패되고 썩은 우리들 마음의 성전을 헐고, 새로운 마음의 성전을 세워야 한다.






28.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성전정화 사건’

서울대교구 홍보실


1. 성전정화 이야기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파는 상인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들을 둘러 엎으셨습니다(요한 2,13-15). 그리고 예수께서는 상인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 2,16)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예수께 무슨 권리로 성전정화 행동을 하느냐고 따지면서 무슨 표징이라도 보여 줄 수 있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이 성전을 사십육 년이나 걸려서 지었는데, 당신이 그것을 사흘 안에 세우겠단 말이오?”라고 대꾸했다. 예수께서 성전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느님이 그분 안에 계시고 그분을 통해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을 둘러싸고 많은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장사꾼들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장사할 자리를 얻는다든지, 환전업무를 독점한다는 등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성전 관리인들은 로마 점령군들과 결탁하여 엄청난 이득을 취하였고, 사제들마저도 순례자들이 가져오는 제물을 불합격으로 판정함으로써, 성전 구내의 장사꾼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으로 팔아도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행위로 인해서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나 예배하는 곳이기보다는 오히려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이 모든 부정과 불의를 단호하게 배격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물음에 대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이 산이다’ ‘예루살렘이다’ 하고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요한 4,1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용 없이 형식적인 제사와 의식만을 강조하는 예배방식은 사라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제도와 형식 그리고 예배 장소를 상대화하시고 당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9.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나)  눈과 눈의 차이

유안진 클라라


톨스토이 작「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입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격렬한 전투에서 러시아군대는 크게 패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이 황량한 전쟁터에 함부로 널브러져, 무자비한 전투의 참혹한 참상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러시아의 안드레이 공작도 큰 부상으로 신음하는 수많은 부상자들 틈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심한 부상에도 왠지 그의 의식만은 아주 또렷했습니다. 안드레이 공작은 상처의 통증 때문에 벌판에 누운 채로 겨우 눈만 뜨고 있었는데, 그 순간 하늘이 보였습니다. 죽음밖엔 아무 것도 없는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사방은 깊은 고요에 잠겨, 하늘은 깊고 푸르기만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자신과 세계가 합일된 무아에 잠겼습니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는 황홀함과 그윽한 평화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이런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데 다시 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의 영웅 나폴레옹이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전투에 이긴 나폴레옹은 승전의 기쁨을 음미하고 확인하러 전쟁터로 나와 둘러보는 중에 부상당한 안드레이 공작에게 이르른 것입니다.


비록 원수요, 목숨걸고 사살하고 싶은 적장이긴 했으나, 안드레이 공작이 평소 존경해온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내려다보는 그가 그토록 존경하여 만나보고 싶었던 영웅 나폴레옹이란 것을 단박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이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발 좀 비켜주십시요. 하늘이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토록 존경해온 천하의 영웅 나폴레옹도, 하늘 아래서는 너무도 보잘것없는 한 점 그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깊고도 푸르른 황홀한 평화와, 그 품안에 안긴 무아지경의 황홀감을 체험한 안드레이 공작에게서 영웅이란 어쩜 ‘버러지’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안드레이 공작의 눈에는 하늘의 신비와 황홀한 평화가, 나폴레옹의 눈에는 자기 영광을 위해 승전을 확인하려 했기에 적군의 전사자들의 시신뿐이었겠지요.

청년 시절 크림전쟁에도 참가했던 톨스토이는 그의 경험으로 이런 장면을 구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도주의 문학은 이렇게 독실한 기독교적 체험에서 성숙했던 것 같습니다.

옛 소련의 우주비행사는 첫 우주비행 후에 돌아와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하늘에는 하느님이 아니 계시더라’라고 했으나, 미국의 우주비행사는 ‘하느님의 세계는 너무도 아름답더라’라고 말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의 성서말씀은 이런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매연 자욱한 서울의 하늘인데도, 성모상의 머리 위에는 주먹만한 별들이 뜰 때도 있습니다. 자주자주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으로 평화로워지고 싶습니다.






30.        사순 제3주일   요한 2, 13-25 (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몰아내신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라니, 그런 사람들이 정말 있었을까. 있었다면 무엇을 사고 팔았을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 소나 양, 비둘기 같은 짐승을 제물로 삼았다. 그들은 이러한 짐승을 잡아 흠 없는 것만 골라 제물로 사용했다. 병들었거나 몸에 상처가 있는 동물은 제물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전에는 제물을 살펴보는 검사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까다롭게 동물들을 살폈다. 일단 부적격으로 판정되면 제물로 사용하지 못함은 물론 처리하는 데도 골치가 아팠다. 이러다 보니 성전 안에는 미리 검사관을 통해 예비 합격한 동물들을 파는 장사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돈을 주고 제물을 사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한편 유다인들은 성전에 바치는 돈은 반드시 이스라엘 화폐를 사용토록 했다. 이 규정 때문에 해외 거주 유다인들은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야 했는데 그들을 위해 환전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몰아내신다. 참배객들의 편리를 도모해준 그들이건만 성전을 더럽혔다고 꾸짖으신다. 어떤 이유로든 하느님을 향한 예배를 돈 버는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전에서 할 일은 기도가 전부다. 성당에 들어오면 먼저 기도한 후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기도는 감사드리는 것이다. 한 주일을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것을 찾아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을 찾아내어 기도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먼저 이 일을 한 뒤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신다.


눈에 보이는 건물만이 성전은 아니다. 예수님도 당신 몸을 성전으로 비유하신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 몸 또한 성전이 된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를 몰아내어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장사꾼들을 몰아내셨듯이 우리도 만사를 돈과 연관시키려는 생각을 몰아내야 한다. 적어도 하느님의 성전에서는 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당 안에서까지 세상 걱정하며 미사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성전 안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은 돈과 물질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돈과 물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다.


화산에는 활화산과 사화산이 있다고 한다. 활화산은 언제 터질지 몰라 위험하지만 양질의 온천수를 주변에 두고 있다. 그러나 사화산은 위험하진 않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신앙은 살아있는 활화산이지 죽은 사화산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을 사화산으로 만들고 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에 유익한 온천수를 마다하고 신앙을 삶의 장식품으로 만들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환전상과 다를 바가 없다.

걱정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 없는 사람도 이 세상 안에는 없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필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다.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런 은총들이 주어질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 이제 주일이 되면 기도를 목적으로 성당에 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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