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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 강론
작성일 2003년 5월 2일 (금) 15:20
ㆍ추천: 0  ㆍ조회: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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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부활 3주일 강론 모음 ”
 

부활 3주일



        9. 최영철 신부(나)/13                 10. 김영진 신부(나)/17

        11. 김영남 신부(나)/19               12. 강길웅 신부(나)/21

        13. 오정선 신부(나)/23               14. 하한주 신부(나)/24

        15. 표창준 신부(나)/26               16. 이계중 신부(나)/28

        17. 절망의 길, 희망의 길/30         18. 부활의 확신/32

        19. 예수 부활의 증인/33             20. 서울교구 주보/35

        21. 서울교구 주보/36                 22. 노순자 젬마/37

        


9.       부활 제3주일   루가 24, 35-48 (나)  너도 나와 똑같은 인간 

최영철 신부


오늘 우리는 부활 제3주일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주일에는 복음적 분위기가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쁨이 실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제1독서를 비롯해서 복음의 내용 전부가 그 기쁨과 부활의 사건을 현실화시키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가 예수님의 부활의 현실로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고있다. 제1독서에서 우리의 무지로 해서 예수님을 못박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고(사도 3, 17-19), 제2독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1요한 2, 1-5)이라는 것을 전하면서, 그것의 현실은 회개의 삶으로서 하느님의 계명, 즉 사랑의 삶으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더구나 복음에서는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례적 차원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셔서 당신의 못 자국과 피흘리신 자국을 보여주면서 모든 이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님이심을 보여준다(루가 24,36-48).


'나'로 인한 해방의 역사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성찬전례에서 재현시킴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현실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전례에서 그분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현실을 체험케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복음의 핵심적 메시지는 회개의 삶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비로소 우리 인간은 새 삶, 즉 부활의 삶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주일의 복음적 메시지가 부활의 참 기쁨과 희망의 현실이 회개의 삶으로의 변화임을 말하고 있다면, 그 회개의 삶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겨 봄으로써, 오늘의 복음적 메시지의 의미를 현실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특히 부활을 맞이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두운 것에서부터의 해방이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이 세상을 또한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여야 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 세상의 거대한 어두움 앞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일지는 몰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의해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희망의 외침인 것이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역사는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회개의 삶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회개의 삶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랑의 삶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계명으로의 변화된 삶의  내용을 의미한다. 즉 나눔의 삶, 용서와 화해의 삶, 인간 존엄성의 삶이 그것이다. 나눔이 있는 우리 인간공동체는 모자람과 갈등이 없다. 우리. 공동체 안에 배고프고 헐벗고 아픈 사람이 있는 것은 나눔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결코 모자람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버려지는 음식찌꺼기가 8조원어치나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음식이 버려지면서 이 사회에는 배고픈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나눔이 없기 때문이다.


모자람이 없는 세상  

용서와 화해가 있는 인류공동체에는 평화가 있다. 하지만 한 민족끼리도 원수 같은 갈등으로 몸부림치는 이유는, 그래서 가장 큰마음의 아픔인 단절의 아픔으로 서로를 괴롭히는 이유는 용서와 화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의 삶이란,  너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인간관을 말한다.

왜 가장 사랑해야 하고 위해 주어야 할 사람과 갈등으로 미워해야 하는가. 그래서 커다란 마음의 상처로 서로가 아파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결핍 때문이다. 나눔의 삶, 용서와 화해의 삶, 인간 존엄성의 삶이 참으로 회개의 삶, 사랑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명이라면 이것은 분명 부활 사건에 의해 새로 태어난 삶의 모습인 것이다.






10.       부활 제3주일   루가 24, 35-48 (나)  무엇을 구하러 오셨소?

김영진 신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글을 쓰는 시간은 주로 새벽 시간이다. 4시경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목욕탕을 다녀온 후 책상에 앉는다. 찾는 사람도 없고, 울리는 전화도 없는 나만의 시간이라, 정신을 칼처럼 세우고, 한자 한자 써내려 가기엔 안성맞춤의 시간이다.

가끔씩 새들이 찾아와 아침인사를 하는지, 먹이를 찾는지, 지저귀는 소리들이 들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요하고 평화로운 나의 마음에 윤활유가 되어준다. 고요한 새벽시간에 평화가 가져다주는 고귀한 느낌들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새벽에 글을 쓰는 이유는 나만의 시간, 즉 모두를 이해하고, 안아주고 싶을 만큼 기쁘고 평화로운 시간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는 곳에 머물기를 바라면서도, 그러한 기회와 시간을 만드는데는 게으르다. 나는 하루를 지내고 저녁 잠자리에 들 때, 어느 시간이 가장 값진 시간이었던가를 돌이켜 보면, 역시 고요함과 평화로움의 시간인 새벽시간이었음을 발견하곤 한다. 그 시간이야말로 미움을 사랑으로, 불신이 믿음으로, 다툼이 용서로, 분열이 일치로, 승화된 아침이슬 같은 맑고 깨끗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요한 새벽은 평화의 시간

자신의 마음에 미움과 갈등,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요소들은 평화를 해치는 요소들이다. 평화를 해치는 요소들을 쫓아 버릴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신곡'을 쓴 단테의 일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을 보면, 그가 평화를 찾아 얼마나 애썼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단테는 근심과 걱정, 미움과 고통, 슬픔과 실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파리로 가서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어떤 해결을 주지 못하자, 그는 폭풍우가 사납게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산타 크로체에 있는 어느 수도원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자 마침 저녁기도를 드리고 있던 힐라리오 수사가 나와서 불쾌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무엇을 구하러 오셨소?"하고 묻는다. 이 물음에 단테는 문득 “평화요"라고 답한다.


단테가 찾는 평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갖고 싶어하는 평화는 또 무엇일까?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것, 싸움과 불화가 없고 고통과 슬픔이 없으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예수님이 스스로 누리셨고 또 나누어주고자 하셨던 평화는, 그렇듯이 단순한 평화가 아니다. 그 평화는 고통과 슬픔, 근심과 걱정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용서로 인내로 이겨낼 것이며, 세상에 살되 하늘에 믿음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열매 맺는 것이다,


10여 년 전 어느 분이 상담을 해왔다. 내용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의 한 부분을 이런저런 부당한 이유로 빼앗으려는 무리들에게 당하는 괴로움이었다.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됐지만, 가진 자와 빼앗으려는 자와의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상담을 청하러 온 이에게, 재물이 평화를 해친다면 재물을 버리고, 그로 인하여 미움이 평화를 해친다면 미움을 버리라고 말했다. 평화란 버림으로써, 죽음으로써 얻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을 버리지 못 할 때, 고통과 슬픔, 미움과 증오로부터 죽어가지 못할 때, 평화란 열매는 이름만 나부낄 따름이다.


평화는 버림과 죽음의 열매

버리고 죽는 것이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요,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을 떠난 아담과 하와가 두려움에 떨었고, 자기 방법대로 살겠다고 아버지의 재산을 갈라 떠났던 작은 아들이 불안에 떨며 살았듯이, 하느님을 떠나서는 평화란 열매를 얻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를 떠나서는 평화가 없으니 의혹과 불신, 두려움과 갈등을 버리고 의심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부탁하시는 말씀이다.


남북전쟁 당시, 부상당한 아들을 보고싶어 달려온 어머니는, 면회가 허용되지 않아 막사 주변을 서성이다가, 안에서 신음소리를 내는 자신의 아들 음성을 알아듣고는 뚫어진 막사 구멍으로 손을 넣어 아들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음 소리에 마음이 쓰리도록 아팠지만, 아들은 자신의 이마에 어머니의 손이 올려지자 신음 소리를 그치면서 “아, 이 손은 꼭 우리 어머니의 손 같구나"하고 중얼거리며 마음 속에 고요와 평화로움을 가졌다.


고통과 좌절,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분의 손길을 느끼는 이는, 지극한 평화로움을 열매로 받을 것이다,


내가 새벽 시간을 사랑하는 까닭은 비천한 나에게까지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고요와 평화 그리고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11.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

김영남 신부


지난 주일에는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번 주일에는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발현 이야기’를 듣는다. 두 이야기 사이에 공통점이 많이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내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복음서의 이야기가 다같이 예수 부활의 증인들인 제자들도 처음부터 순진하게 무턱대고 다 믿었던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들도 처음에는 많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이라는 관점에서 묵상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엠마오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 곳에 있던 제자들의 공동체에 다시 합류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전해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끝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런 시작과 끝 사이에 나오는 중간 이야기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믿게되었고’, 더 나아가 ‘어떻게 증인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 관해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엠마오의 제자 이야기에 이미 나왔던  몇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십자가의 충격과 아픔에 그들은 빈무덤의 “표징”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토록 희망을 걸었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시자, 절망하다시피 되어, 그 동안 자신들이 걸어왔던 “제자의 길”을 다 청산하고, 그들 삶의 옛 터전이었던 엠마오로 힘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깊은 슬픔 속에 있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몸소 다가가시어 그들과 함께 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이 두 제자는 그분으로부터 성서 전반에 대한 해설을 듣고, 특히 그분과 함께 “빵을 나누면서” 비로소 그분이 부활하신 스승이시라는 것을 알아 뵙고 믿게 되었다.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에 나타난 기본 구조는 오늘 주일 복음의 중심 대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온다. 열 한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는데도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37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 손발을 보여 주시면서 만져보라고 하시는데도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었다”(41절). 결정적으로 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끈 것은, 예수님을 “만져 본 것”이 아니라, 엠마오의 제자 이야기에서처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해주신 성서 말씀에 대한 해설이었다.


이렇게 살펴본 엠마오의 두 제자의 이야기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한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게 될 때, 어떻게 하면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다시 믿게 될 수 있는지 그 중요한 방법 세 가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 첫째 방법은 「성서말씀을 ‘예수님의 정신으로’ 듣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게 된다. 둘째 방법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이며, 셋째 방법은,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의 끝에 잘 나타나 있듯이,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와 일치해 있는 것」이다.

이 세 방법 중에서 “빵을 뗀다”는 말로 표현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되는 다른 방법들을 종합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성서말씀을 듣게도” 되고,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와 함께 머물게도”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체성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부활하신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대로 안주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그분의 증언자가 된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전하는 데 있지 않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회개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은’ 거룩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께서 가셨던 “삶의 여정”, 곧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삶을 구체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부활’의 신빙성은 어떤 ‘물적 증거’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던 일부 ‘사람들’의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과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라는 ‘증거’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증거의 삶’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안되며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분명히 증거하듯이 “성령의 힘”을 받아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12.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행복한 사람의 속옷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3,13~15.17~19 (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제2독서 Ⅰ요한 2,1~5a (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속죄물이 되셨습니다)

복 음 루가 24,35~48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유령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직접 잡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만은 아닙니다. 분명히 영과 육의 부활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성서의 내용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엄연히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 부활 신앙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있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본래 베드로는 무식했고 아무 능력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베드로는 부활 신앙에 확신을 가졌으며 자기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앉은뱅이를 고쳐 주기까지 했습니다(사도3,1~10참조). 이에 사람들이 놀라 구름같이 몰려들자 베드로가 성령 충만한 설교를 했는데 그때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으면 그 이상의 능력도 나옵니다. 그러나 죽은 예수님만을 믿으면 그 믿음은 주저앉게 됩니다. 믿음 자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냉담자를 만났는데 이 사람이 날 보고, "한 달에 두 번은 성당에 나가겠습니다."하며 무슨 선심쓰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뭔 말인고 하니 한 달에 주일 네 번 중에 두 번은 성당에 나오고 두 번은 놀기 위해 못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교환조건으로 봐 준다는 투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 모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하시면서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믿지 못하고 불신을 가지고 있으면 매사에 자신이 없이 당황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치 유령 보듯 하기 때문에 믿음을 허깨비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축으로 하는 우리의 믿음은 그 자체가 삶의 진정한 에너지입니다.


부활은 그래서 놀라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에 도 구속받지 않으며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한 기쁨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만족할 줄 아는 기쁨이요, 아무리 병들어도 마음만은 건강할 줄 아는 기쁨이 됩니다. 부활은 그 자체로 놀라운 생명이며 환희입니다.


옛날에 어느 임금이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인데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병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소년이 찾아와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입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행복의 기쁨이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병만 더 커졌습니다.


나중엔 왕자가 직접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오두막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 집에서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성가와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순간, 왕자는 이 집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집이라 여겨 들어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속옷을 벗어 달라고 했으나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통하지 않자 칼로 위협하고 겉옷들을 벗겨 보니 속옷들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속옷을 입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자는 거기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행복은 돈으로도 못 사고 권력이나 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행복은 오르지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좌우간 임금은 믿음을 갖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살면 겨울에 속옷을 입지 않아도 춥지 않으며 입에 풀칠을 못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최후가 그처럼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삶의 큰 힘이요 축복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부활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부활이며 우리의 인간 삶의 목적도 부활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놀라운 감격과 축복으로 열려지게 됩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주님의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뇌며 부활의 삶을 기쁘게 살도록 합시다.






13.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신앙 여정

오정선 신부


ꡒ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ꡓ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고, 우리네 삶은 어떠한가? 대답은 하나! 인간은 하느님에게 와서 하느님께 돌아간다.


등산을 하노라면 인생은 산을 오르는 여정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등산이라는 것은 산 정상에서 느끼는 기쁨도 있지만 산에 오르는 과정이 더 가치가 있고 맛이 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은 다양한 나무와 꽃들로 이루어지는 변화에 화창하기만 하다. 그러나 오르면 오를수록 출발할 때와는 다른 것들을 체험한다. 피곤과 목마름 같은 고통들 말이다. 그러다가 목표인 정상에 도달하면 모든 어려움을 잊고 평화와 기쁨을 갖는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도 이와 같은 여정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리라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그 길도 산에 오르는 과정만큼이나 순조롭지만은 않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무척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신앙에서의 기폭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삶의 희망이었던 예수님이 돌아가시므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 곁에서 함께 걷고 계셨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야 비로소 주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다시 용기가 생겨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려움이 생기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잊고 자주 실망하며 주저앉을 때가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과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것을 잊지 않고 살아 갈 때 꼬불꼬불하고 험한 인생 여정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점에서 그분을 만나 뵈옵고 지나온 우리 믿음의 길을 돌아보며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4.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영생을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

하한주 신부


“조금 있으면 당신들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당신들도 근심에 싸여있지만 내가 다시 당신들을 보게 될 때에는 …그 기쁨을 아무도 당신들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 16,16-22). 그러기에 우리 가톨릭은 예수님의 이 말씀 뜻 그대로 오늘도 영원한 삶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다리는 마음이 진실 될 때 우리 가톨릭의 신학용어로 망덕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우리 가톨릭 신앙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또 하나의 거룩한 덕입니다. 지금의 속된 말로 한다면 그 영원한 삶의 꿈이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요, 때문에 그 믿는 자들에게 이런 따위 위대한 꿈을 줄 수 없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나는 감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또 우리들의 이 꿈을 더욱 간절하게 가꾸어주시기 위하여 “너희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몸과 피의 제사를 바치노라” 말씀하시면서 그 무서운 십자가의 제사를 감수하시었습니다. 때문에 구세주 예수님의 생애의 전부는 그야말로 “위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셨고, 우리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2천년 전의 그때나 2천년 후의 오늘이나 예수님의 이 ‘위하는’생활의 정신만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의 영원한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이 세우신 우리 가톨릭 교회는 물론 한 사람도 예외 없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시대는 ‘위한다’는 이 말이 ‘봉사’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으며 ‘봉사’라는 이 말이 한동안 무척 유행하다가 이제는 그 유행이 지나쳐서 ‘위하는 봉사’와 ‘통하는 봉사’등 체질이 다른 두개의 봉사로 분파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라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위하는 봉사’보다 ‘통하는 봉사’가 더 구미를 돋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통하는 봉사자이냐?’ ‘위하는 봉사자이냐?’ 할 수 있는 이 말은 시험관 노릇을 하는 것인 만큼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를! 목자와 품파는 자를 골라내는 하느님의 밝은 눈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의 행위를 보면 여러분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태오 7,15-21).


해방 후 특히 6.25와 9.28 수복 후로 한동안 우리나라 가톨릭 사회에는 불행하게도 ‘밀가루 교우’ ‘구호물자 신자’라는 말이 숱하게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던 만큼 이들이 바로 ‘통하는 교우’ 들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구차한 삶을 찾는 가여운 자들이었습니다.

5.16 후에는 정치교우라는 말과 함께 우리 교회 안에는 정치교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아직 있는 듯합니다.


브로커 신자라는 말도 유해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을 파는 통하는 신자일 뿐,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데 그칠 뿐 아니라 그 교회마저도 아끼고 위하고 빛내기 위해 그 자신의 목숨과 대결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하느님의 자녀들다운 진실한 교우는 아닙니다. 왜 다만 교우들 사회만 이러한 곱지 못한 말이 적용되며 하느님의 눈과 같은 시험관을 드러내고 살펴야 한답니까? 성직계에도! 수도자 사회에도 “통하느냐? 위하느냐?”는 이 시험관에 비추어 보면 그 진짜 가짜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이 시험관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가짜가 숨어 있을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누구를 위한 전교냐” “또 누구를 위한 교회의 사업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가끔 날 때가 있는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의 고백입니다. 교회의 일! 하느님을 위한 진정한 의미의 교회 사업일진대 어떤 한 사람의 인기 사업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이때까지 살아온 사람의 하나인 자가 나 자신인 까닭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것이 우리 가톨릭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아 모신 천래의 사명이었을 뿐 딴 사명을 받은 적이 없었으며 “너희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가톨릭이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우신 분이 역시 우리가 받들어 모시고 그 뒤를 따라 골고타에로의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니 모름지기 우리 모두 “위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통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으며 또 돼서는 절대로 아니 되겠다는 것이 나 한 사람의 신조만이 아닐 것입니다.






15.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표창준 신부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방금 들은 오늘 성경말씀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1. 예수께서 죽으신 직후에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 시키셨다는 것.

2.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으신 그 분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몸소 보여주셨다는 것.

3. 그 분은 제자들을 보내어 온 세상에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전해져 오는 내용들이 실은 제자들에게조차도 처음부터 믿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처음에 쉽게 믿기는 커녕 비웃기도 하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숨김없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생생하게 와 닿지를 않는 실정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며칠 전 이 근처 라이온스 호텔에 불난 화재사건 만큼도 나와 상관없는 느낌이고, 그 분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는 것도 내가 필요한 물건을 싸게 잘 산 만큼도 내게 상관 있게 보이질 않는 게 솔직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완고하게 믿지 않으려던 제자들이 급기야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즉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은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것이 목숨을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만큼 모든 사람에게 관련 있는 중요한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둘째 독서(요한1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요한1서 1.3-4) 다시 말하면, 선포의 목적은 부활하여 살아 계신 그 분과 우리 모두가 친교를 나눔으로써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사는 기쁨은 서로 사귀고, 함께 하는 친교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활에서 익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의 한 가지 경험을 보겠습니다.

성당 뒤편 보일러실 뒤에 베드로씨 계시는 곳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습니다. 산책하느냐고 제가 자주 갑니다. 멍하니 기운 없이 앉아 있던 강아지는 저를 보면 신이 납니다. 강중강중 뛰고 흥흥거리며 저의 발을 무는 시늉을 하기도 하며 마냥 좋아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강아지에게 살맛이 나는 순간입니다. 강아지는 혼자 있을 때와 달리 제가 감으로써 말하자면, 저와 만남이 있고 함께 하는 사귐과 친교가 이루어짐으로써 강아지에게는 기쁘고 신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사람이 아닌 강아지 사이에 마음이 통하는 친교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의 친교는 강아지를 아주 생기 있고 신나게 합니다.


제가 강아지에게 빵 한 조각도 줘 본 일이 없습니다. 저를 만나는 일, 작은 친교뿐인데 그것이 강아지를 그렇게 즐겁게 합니다. 저에게는 동창 신부들이 여럿 있는데, 동창 신부들이 특히 군종 신부로 고생하는 친한 동창들이 오면 강아지처럼 뛰지는 않지만 반갑고 기뻐집니다. 이렇게 사는 기쁨은 바로 서로 간의 친교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활에서 익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 모두가 서로 함께 관계를 맺는 가운데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친교가 잘 되는 생활에서 평화와 기쁨과 행복이 옵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오늘 둘째 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과 사랑으로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충만한 기쁨을 얻는 생활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깨진 불행한 상태가 곧 죄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제각각 따로 멀리 있어도 좋은 것이 결코 아니고, 사랑으로 친교를 나눔으로써 기쁨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원천이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고만 표현되지 않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며 모든 것을 나누시며 우리와 친교를 맺으시면서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 어리석음과 잘못 때문에 상처입고 죽기까지 하신 우리와 공동 운명의 길을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마음을 지니시고 우리 사정을 알고 같이 기쁨과 고통을 나누시고 죽으신 분, 그렇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다시 받아들이시고 사랑으로 친교를 나누시고 우리들 서로 간에도 새로운 친교가 확대되어 나감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새 세상이 되도록 역사 하시는 분입니다. 친교 없이 우리는 기쁨과 살맛을 느낄 수 없고, 나아가서 인간답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죽으면 그 사람 세상 떠났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진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태어나기 전의 상태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일단 출생하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어 이 세상과 관련을 갖는 상태가 됩니다. 곧, 살아있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 사회와 친교를 나누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해치고 아랑곳하지 않거나 남에게 무관심하며 멀리한다면 그 때에는 우리 각자가 세상에 머물러 있지만 세상과 사람들을 떠나가 있는 셈이겠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죽은 사람처럼 세상 떠난 상태가 되고 살맛과 기쁨이 사라진 처지가 됩니다. 어느 노부모가 자식들로부터 부모로서의 대접을 못 받고 짐처럼 여겨진다면 그 노부모는 밤잠을 못 자는 못 살 지경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친교가 깨질 때 이 세상을 떠나 있는, 죽은 상태와 다름없는 못살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선포한 소식은, 우리와 끝까지 진실한 친교를 맺으시면서 우리의 어리석음과 약함과 잘못을 같이 감당하시느라고 죽기까지 하신 그 분은 그 강한 사랑의 힘으로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여전히 살아 계시며 우리 모두와 새롭고 강하고 폭넓은 친교의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미사 중에 그 분이 자신의 살과 피를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와 새롭고 영원한 친교를 계속함으로써 우리에게 힘과 기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는 자주 약하고 어리석고 불성실하더라도 그 분이 다시 새로운 친교의 힘을 불어넣어 주시기 때문에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분과 일치되어 다른 사람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친교의 생활을 해감으로써 참된 기쁨을 얻도록 할 것입니다. 아멘






16.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화해

이계중 신부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가까이 오기 전에 우리 이웃과 평화를 이룩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성년기도는 우리 모두에게 의무를 지워줍니다. 국가 간의 용서와 평화, 교회간에 그리고 우리 가톨릭 신도간에 경제적 평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간에 조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부조리 제거를 요구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가정으로 돌아가서 우리 하나하나가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들 형제와 자매들 그리고 친척들간에 화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성년이 우리에게 무의미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관습이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성전이나 회당에 올 때에 그들이 만일 자기 이웃과 화해할 일이 있으면 예물을 놓아두고 먼저 반대자들과 화해한 다음 다시 와서 예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이 현존하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성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미사에 참례하는 우리들에게는 더욱 더 화해가 요청됩니다., 만일 우리의 영혼을 살펴봐서 우리 마음 속에 남을 미워하는 증오심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면 우리는 사랑과 평화의 인간인 체 하는 위선자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년의 주제는 용서와 화해이며 이것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공손하고 친절하게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이 없고 상대편에 잘못이 있어 우리가 희생당했을 경우에도 공손하고 우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며 무엇보다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슬픈 일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을 상실하는 일입니다. 법적인 이혼까지는 안 간다해도 정신적인 이혼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혼인 성사 때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돌보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을 극복할 은총을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슬픈 일은 부모와 자녀들간에 사랑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화해와 사랑의 회복으로 젊은이들이 나쁜 친구들과, 나쁜 습성을 버리고 가족의 일치를 위해 한층 더 충실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있고, 또 젊은 자녀가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을 부모가 깨달아 자녀를 이해하고 친절히 지도하여 신념과 확신을 발전시켜 부모와 자녀간에 화해를 이루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화해라는 것은 우리 주께서 뜻하신 가정의 유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께서는 “자기가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이는 아직도 어두움 속에서 사는 자입니다.(요한I서 2:9).”하셨습니다. 예물을 바치러 오기 전에 형제들과 화해하기를 요구하시는 주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둘째로 우리 이웃을 우리와 같이 사랑하는 이웃 사랑을 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들은 주장이 아니라 명령인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우리가 증오해야 할 악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미워한다!”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며 핑계를 대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물론 기분이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기분이 나쁜 것을 싫어하는 것을 없이 하기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 손에 그 구제책을 맡기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과 이 사회에 평화를 가져오는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제단에 나오는 대신 사람들과 화해하고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단에 가까이 나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평화를 요구하고 계신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

“나는 당신들에게 새 생명을 하나 주겠습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13:34).”






17.        부활 제3주일   루가 24,13-35 (나)  절망의 길, 희망의 길(엠마오)


아침에 일어나서 2km를 억지로 달리라고 하면 그 길은 지겹고 힘든 길이다. 땀방울에서 악취가 날 정도로 진이 빠질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달리면 문제는 다르다. 같은 길이건만 힘이 솟고 땀나는 것도 행복할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땀이 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더 땀이 나기를 바라면서 더 빨리 달릴 것이다. 진땀이 아니라서 냄새도 고약스럽지 않을 것이다.


같은 길이라도 그 길로 경찰서 유치장에 가거나 재판장에 가면 발걸음이 철근만근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로 애인을 만나러 가면, 혹은 포상금을 받으러 가면, 발걸음은 가벼울 것이다. 길은 같으나 걷는 자의 내적인 상태가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축 사망'이라고 기뻐했겠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메시아로 생각하고 그분께 걸었던 기대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절망적이었다. 소문으로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였으나,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오는 길,

예수님의 72제자들 중 두 사람이 실망한 처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11km쫌 떨어진 한 촌락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힘없이 터벅터벅 걸으면서,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를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 곁에 다가와서 함께 걸었다. 그들은 곁에 누가 온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자신들의 이야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말들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며 가느냐고 물었다. 그들 중 글레오파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에서 오는 사람 치고,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며 자신들의 실망의 이유를 자세하게 이야기해줬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상세하게 구약성서를 예로 들어가며 부활신앙을 가지라고 가르쳐주셨다. 그들은 동반자의 설명에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아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그들은 동반자에게(예수님) 함께 묵어가자고 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었다. 예수께서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나누어주셨다. 그 순간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여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그들은 흥분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곧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땅은 어둠에 덮이고 간간이 울리는 맹수의 울음소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밤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기뻤기 때문이었다.


복음의 메시지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갈 때는 맥빠지고 절망스러운 길을 가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그 길은, 같은 길이건만 날아갈 것만 같았을 것이다. 같은 길이건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만나지 못했을 때와는 천양지차다.

크리스천은 두 길을 갈 수 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엠아오로 가는 길이다. 힘겨운 절망의 길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또 하나 있다. 이 길은 예수님을 만난 길이다. 믿음의 길이다. 희망과 사랑의 길이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기쁨에 넘친다.


엠마오로 가는 길을 걸을 때에 두 제자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십자가였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실망에 차있었다. 십자가 앞에 인간은 약하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걸림돌이다.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절망한 채 엠마오의 길을 간다. 어떤 이들은 점보러 가고,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없애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가산을 탕진하거나 가정을 풍비박산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 앞에서 그만 엠마오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본 때는 빵을 나눌 때였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신 다음에, 나누어 주셨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도 미사 때마다 빵을 축성한 다음, 나누어주면 받아 모신다. 그 순간은 장엄하고 은총의 순간이다, 그 순간에 예수님을 알아 뵈야 한다.


우린 예수님을 미사 때에 알아 뵙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은총 지위에 있기 위해서 죄 많은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 시간을 좀더 할애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제일 늦게 성당에 왔다가 제일 먼저 나간다. 미사 시간에 항상 늦게 도착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다. 미리 미사에 와서 기도도 드고 한 주간의 죄를 반성하고, 성서를 읽으면서 영적인 양식을 가득히 채운 다음 미사에 임해야 한다.


미사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제자들처럼 기뻐서 나를 듯이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욱 행복하고 기쁨에 넘치게 될 것이다. 그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것이다.






18.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부활의 확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만 유령으로 착각한다. 답답해진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며, 무딘 마음을 열어주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토록 오래 같이 있었고 수 차례 부활의 말씀을 들었건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말이 그렇지, 죽었다고 확신했던 분이 다시 살아나 말을 걸어오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제자들은 혼비백산한 나머지 모든 사고능력이 정지했을 것이다. 죽음은 이론이 아니다. 죽는데 무슨 이론이 필요한가. 그냥 죽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지식이 아니다. 그냥 부활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막상 스승이 나타나니까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자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자신에 관한 성서말씀을 깨닫도록 하신다. 부활의 은총을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이다. 생전에 함께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스승의 말씀을 이제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다. 그러니 은총 없이는 아무도 부활신비에 근접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냥 성서의 내용으로 무심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서에 나오는 기적 가운데 하나로 여기며 별 생각 없이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했던 제자들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핵심파악이 안되어 있으면 언젠가는 흔들리게 된다. 부활사건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신앙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복음의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을 긴가민가했다. 그런데도 주님은 꾸짖기는커녕 안타까워하셨다. 오히려 당신 상처를 보여주시며 음식을 잡수셨고, 성서해석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다독거려주셨다. 스승의 애정과 따뜻함이 먼저였던 것이다. 스승의 이 모습은 어떤 이론적인 해석보다 더 확실하게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어떤 과학적인 논증보다 더 힘있게 당신 부활을 증명하셨던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행위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스승의 사랑을 먼저 느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은 이 애정을 확인받고서 용기를 얻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머리보다 마음을 먼저 열어주셨던 것이다. 깨달음에는 애정이 이론보다 앞선다. 사랑 없는 이론은 힘이 될 수 없다.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을 마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오셨다. 오셔서 우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성서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기쁨으로 부활시기를 살아야 한다. 그분의 부활을 이론적으로만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자. 이론적으로 무장한다고 자동적으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믿음의 안내자일 뿐 본질이 아니다.


부활은 당연한 귀결이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누구나 부활한다. 봄이 되면 피어나는 꽃들처럼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이의 희망이다. 제자들에게 사랑으로 발현하신 예수님이 아니든가,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도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이 부활의 시기에.






19.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


지난 주일에는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 주일에는 루가복음에서 나오는 “발현 이야기”를 듣는다.

두 이야기 사이에 공통점이 많이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내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복음서의 이야기가 다같이 예수 부활의 증인들인 제자들도 처음부터 순진하게 무턱대고 다 믿었던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으며, 그들도 처음에는 많은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이라는 관점에서 묵상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이 그와 관련되어 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엠마오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 곳에 있던 제자들의 공동체에 다시 합류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을 전해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오늘복음의 끝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런 시작과 끝 사이에 나오는 중간 이야기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던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믿게 되었고, 더 나아가 어떻게 증인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 관해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엠마오의 제자 이야기에 이미 나왔던 몇 가지 요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걸러 넘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십자가의 충격과 아픔에 그들은 빈 무덤의「표징」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토록 희망을 걸었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시자, 절망하다시피 되어, 그 동안 자신들이 걸어왔던 제자의 길을 다 청산하고, 그들 삶의 옛 터전이었던 엠마오로 힘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오신「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깊은 슬픔 속에 있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몸소 다가가시어 그들과 함께 해 주심으로써,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이 두 제자는 그분으로부터 성서 전반에 대한 해설을 듣고, 특히 그분과 함께「빵을 나누면서」비로소 그분이 부활하신 스승이시라는 것을 알아 뵙고 믿게 되었다.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에 나타난 기본구조는, 오늘 주일 복음의 중심 대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나온다. 열 한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는데도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37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 손발을 보여 주시면서 만져보라고 하시는데도「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많아서 어리둥절해 있었다」(41절).


결정적으로 그들을 부활신앙으로 이끈 것은, 예수님을「만져 본 것」이 아니라, 엠마오의 제자 이야기에서처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해주신 성서 말씀에 대한 해설이었다.


이렇게 살펴본 엠마오의 두 제자의 이야기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한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십자가」앞에서 흔들리게 될 때, 어떻게 하면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다시 믿게 될 수 있는지, 그 중요한 방법 세 가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 첫째 방법은, 「성서말씀을」예수님의 정신으로「듣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게 된다. 둘째방법은,「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이며, 셋째 방법은, 엠마오의 두 제자이야기의 끝에 잘 나타나 있듯이,「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와 일치해 있는 것」이다.


이 세 방법 중에서 「빵을 뗀다」는 말로 표현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부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되는, 다른 방법들을 종합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신자들은,「예수님의 정신으로」 성서말씀을 듣게도」되고, 「사도적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와 함께 머물게도」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성체성사는 신자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부활하신 그분의 층인」이 되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대로 안주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그분의 증언자가 된다. 그런데 부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의 사실을 전하는 데 있지 않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회개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은」거룩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께서 가셨던 “삶의 여정”, 곧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삶을 구체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부활」의 신빙성은, 어떤 「물적 증거」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던 일부「사람들」의 예수 부활에 대한 증언과「예수님을 본받는 삶」이라는「증거」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러한「증거의 삶」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안되며,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분명히 증거 하듯이 「성령의 힘」을 받아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20.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여러분은 부활의 증인이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는 인지 발현사화(36-43절)와, 제자들을 교육하여 고난과 부활의 증인들로 삼으시는 사명 발현사화(44-49절)로 짜여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중요한 교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부활을 두 번씩이나 증명해보이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십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마침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세상 끝까지 알려져야 하며, 제자들이 바로 그 일을 담당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결코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 일을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도시에 머물러 있는 동안 높은 곳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능력, 곧 성령이 그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제자들 모두는 장차 복음을 선포할 증인이 될 텐데, 이는 바로 예수 사건의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북돋워주시며 격려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의 충격과 슬픔, 좌절과 실망감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부활을 두  번씩이나 증명해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능력(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마음에 확신과 용기가 생겨나면서 제자들은 중단했던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한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이 다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능력을 받아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 공동체가 진실로 복음을 따라 기쁘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신명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부활일 것입니다.






21.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서울대교구 홍보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는 ‘인지 발현사화’(36-43절)와, 제자들을 교육하여 고난과 부활의 증인들로 삼으시는 ‘사명 발현사화’(44-49절)로 짜여 있습니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의 중요한 교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부활을 두 번씩이나 증명해보이셨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십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마침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세상 끝까지 알려져야 하며, 제자들이 바로 그 일을 담당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결코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 일을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도시에 머물러 있는 동안 높은 곳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능력, 곧 성령이 그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제자들 모두는 장차 복음을 선포할 증인이 될 텐데, 이는 바로 예수 사건의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2. 우리의 이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북돋워주시며 격려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의 충격과 슬픔, 좌절과 실망감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부활을 두  번씩이나 증명해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능력(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마음에 확신과 용기가 생겨나면서 제자들은 중단했던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한 것입니다. 이로써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이 다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능력을 받아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 공동체가 진실로 복음을 따라 기쁘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신명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부활일 것입니다.






22.            부활 제3주일   루가 24,35-48 (나)  한라 기슭에서

노순자 젬마/소설가

황사 속의 한라는 시름없어 보이고 맥없어 보였습니다. 그 여성적인 완만한 능선도 희미해보였습니다. 그러나 팔순 넘은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를 찾은 우리에게 황사의 심술 따위는 대수로울 수 없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올해로 52년이로구나. 반세기가 더 갔어.”

아버지의 감회 어린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한라산은 누런 먼지 속에서 의연하게 우리를 품에 안고 내려다보는 듯 했습니다.

“정말로 백록담에 산방산을 거꾸로 얹으면 맞을까? 한라산이 너무 완벽해서 신이 정상을 한 움큼 떼어 던진 게 산방굴사라잖아”

그런 말을 들으며 우리는 하염없이 펼쳐진 옥색 바다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한라산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서귀포에서 보는 한라산은 여자가 누워있는 옆얼굴 같지 않아? 가만히 봐.”누군가의 맹랑한 발상에 우리는 저마다 고개를 빼고 한라산을 가만히 바라봤습니다.

“비슷하네, 풀어서 뒤로 내린 긴 머리․이마․눈․코․입․턱․속눈썹도 보여.”

서귀포의 효돈마을 감귤농장에서 바라보는 한라는 과연 젊음을 떠나보낸 한 여인이 어머니 에겐 여성성이 얼마나 남아있는가를 생각하는 듯한 옆모습이었습니다. 

유채꽃이 제주의 검은 땅과 검은 돌들을 노랗고 향기롭게 뒤덮은 계절에 부모님을 모시고 한라를 찾은 기쁨은 표현이 불가능한, 다시 이런 시간이 있을까 싶은, 엄마 아버지를 이렇게 가까이 모실 축복이 또 허락될까 싶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묵묵했으나 어머니는 바다빛깔에도, 유채꽃 무리에도, 싱싱해서 비늘이 보석처럼 빛나는 너무 예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생선에도 감탄했습니다.

걷는 걸 힘들어하셔서 움직이기보다는 주로 바라보고 호흡한 여행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외할머니 생각이 나는구나. 노인네 고집 때문에 비행기 한 번 못타보고 돌아가시지 않았니. 너희들도 나이 먹으니까 하는 얘긴데, 자식들 하고 싶어하는 거 들어주어라. 사람이 나이 먹을수록 어릴 적 생각, 부모 생각이 간절해지는 건데 자식들이 나중에 한스러워하게는 말아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라산의 속눈썹을 발견할 때의 느낌과 비슷한 설레는 감동, 당신의 기쁨보다 자식의 기쁨을 먼저 헤아리는 어머니 마음이 뭉클하고 뻐근했습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했던가요.

어머니와 함께 본 한라는 민족의 어머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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