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모음
강론을 위한 자료실
       
 
전체글 보기  
       
 logos
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2
작성일 2008년 9월 27일 (토) 10:48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4616      
IP: 211.xxx.31
http://missa.or.kr/cafe/?logos.1274.
“ Re..가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두 아들의 비유

가해 연중 제 26주일 강론 모음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하신 비유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교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대상으로 하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 시대 유대아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한 실세들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 사회가 인정하는 권위를 가졌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그 말씀을 가장 잘 따른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포도밭에 가서 일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만 해놓고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모두가 믿고 있는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그들을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의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알려진 세리와 창녀들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신앙의 핵심으로 간직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여기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삶으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그것이 현세든 혹은 내세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 실천은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탈출 33,19)이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루가 6,36) 그 자비를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죄인으로 판단된 사람들이 권위와 존경으로 치장한 지도자들보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혹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더 충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이라는 그 시대 지도자들은 누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권위와 존경을 계속 누리기 위해 처신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는 것에 집착해버린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잃으면서, 율법과 성전의 제물 봉헌을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게 하기 위해 법조항을 많이 만들고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였습니다. 제물봉헌에 충실하도록 엄격한 의례 준수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을 빌미로 백성들 안에 행세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라지고 지켜야 할 율법과 제물봉헌 의례만 남았고, 그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면서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자비를 배설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거나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자비’를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성찬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어떤 헌신과 희생을 각오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위해, 또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며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



신앙인의 실천은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얻는 길도 아니고, 입신출세하여 사람들 앞에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도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어리석음이지만...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위한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끝까지 긍정하면 그 말로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4)고 고백합니다. 이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사람이 죽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호화찬란하였어도, 어느 날 그것은 허무로 돌아갑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에 대한 비밀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행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조금 더 보는 사람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하느님을 위한 한 주간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마음다짐입니다. 성찬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우리의 협소한 시야를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넓어진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한 주일을 위해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 따라 포도밭에 일하러 가는 오늘 복음의 아들과 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예수님의 몸을 우리 안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실천할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정 일 신부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원 농장 일을 시켰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만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였지만 회개하고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습니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말만하고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창녀 같은 윤리적인 죄인들이나 세관원들과 목동 같은 직업상 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자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이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노상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했지만, 막상 예수께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회개를 촉구하자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의 여러 사도들을 보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은 이들을 번번이 배척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옛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맞갖은 믿음과 실천을 통해서 열매를 맺고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각에 그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만을 앞세우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공허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는 통합적이고도 전인격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참되고 성실한 실천이고 순종이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안으로는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고 교회 밖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야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새 천년기의 구체적 실천모델로 평가되고 제시되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을 제안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존의 성사를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과는 달리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성직자 위주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삶이 어느 특정 계층에 의해서만 주도되지 않고 모든 계층이 주체성을 가지고 참여할 때 창조적 능력이 살아 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를 작은 공동체로 나눈다는 물리적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지성적 사고 체계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고 삶 안에서 발생하고 해석되고 실천되기를 바라는 생활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새삼스럽게 소공동체 운동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생각과 말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혼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사도 배령해야 하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며, 말씀에 근거해서 활동해야 합니다.



스스로 복음화 되면서 복음화 하는 실천이 강조되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우리가 둘이나 셋이 모여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실천을 모색할 때 그곳에 은총이 발생합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삶의 현장이 교회가 됩니다. 성사를 배령해야만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똑 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실천도 중요합니다. 참된 회개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입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다(마태 21,28-32). 

  표창연 신부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2).



오늘 예수님 말씀의 청중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들을 빗대어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생각을 바꾼 맏아들, 반대로 아버지의 말씀에 ‘예’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행동하지 않은 둘째 아들. 재미난 것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가 ‘맏아들’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지만,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이들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더불어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이들인 ‘세리와 창녀’들도 회개와 돌아섬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입에 오른 신앙이 몸으로 도달하기 어려울까? 말로 한 신앙이 행동으로 옮기가 왜 이토록 어려울까? 그것은 예수님 말씀의 청중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이익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만 목적을 둔 이들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맞추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남용하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처럼 들린다.



좋은 말 많이 들리는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막힌 말들로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세상이다. 세상의 기술은 이들의 말을 더욱 현실감 있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되었다. 하지만 진정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이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던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삶의 지향이요, 목표로 삼고자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주제로 머물고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간디의 예리한 비판이겠다.

회개와 사랑은 입으로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오늘 예수님 말씀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봐야 하겠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제2독서)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조원행 신부 

교구장 주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서품역순으로 주일마다 향기를 내뿜던 이 말씀란에, 오늘 복음의 맏이가 나중에야 일하러 간 것처럼 이제야 맨 끝으로 간신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언뜻 루카 15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연상케 하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듯이 처음에는 본성에 따라 싫다고 했지만 회개하여 일하러 간 맏이, 반대로 말로는 너무나 자신 있게 “가겠습니다, 아버지”했지만 마음으로도 실제로도 전혀 가지 않은 다른 아들, 이들의 비유는 이어지는 비유 적용 말씀에서 처음에는 공적인 죄인이었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 반대로 비록 겉으로는 가장 지극한 종교인이었지만 생각을 바꾸어 믿지 못한 사제들과 원로들에 대한 폭로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포는 당시 종교적·사회적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직업상의 죄인인 세리, 윤리적인 죄인인 창녀, 그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반면 종교적인 삶을 위해 거친 서민과 거리를 두고 살 정도의 바리사이파,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은 그 누구도 범치 못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의 순서가 거꾸로 바뀔 것이라 선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역전은 우리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자기 욕심에 따라 살고 싶은 욕구, 우선 말로만이라도 현실을 모면해보고자 하는 짧은 술수,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삶의 진실을 탐구해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들입니다. 그러함에도 주님께서 항상 중요시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잘살았고, 못살았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악하고 공적인 죄인이라 하더라도 회개하여 지금 깨끗하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바로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고, 의욕이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이는 우리의 표본이 되고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물론 생각을 바꿔 회개한 나중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중은 언제든 되풀이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넓으신 자비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회개하며 하느님의 일터로 나아갑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랑 

  박윤배 신부 

혹시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짝사랑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서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 가슴 아픈 이별을 느껴보기도 한 그런 사랑이면 아래의 글에 공감이 더 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들이 이렇게 키가 작았었나, 여름날의 밤하늘에 이토록 별이 많았었나.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들이 이처럼 고운 빛깔이었나, 한겨울 가로등 불이 이렇게 따스한 주황빛이었나. 익숙했던 모든 풍경들에 새삼 감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지는지요?

어쩌면 사랑이란 잃었던 시력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별이 가혹한 이유도 세상이 다시 밋밋했던 옛날로 돌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연애소설’ 중에서-



사람을 정의하라고 하면 저는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특별하게 해주고 삶의 의미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랑이 큰 가치가 있다면,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랑은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정말정말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지요. 신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대해주는 것, 내가 지켜야 할 책임을 제대로 지키는 것,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 등등. 각자의 상황에따라 정말 다양하게 그 방법은 주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리지요.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먼저 맏아들은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뉘우치고서 일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기꺼이 간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 가지 않았지요. 이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보다 행동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지금 당장 행동의 실천을 하라고 주님께서는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 응답하고 있나요? 혹시 둘째 아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매주 성당에 나오면서, 그리고 자주 기도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들 자신의 변화는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사랑에 대한 지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실천은 나중에 시간 날 때 하는 것이라고 미루면서, 오히려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복음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이라는 포도원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 줍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실천이 상대방을 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켜 준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일하러 가실 준비...되셨나요?





참된 순종 

 백남국 신부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격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말씀을 듣고 곤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사제들과 원로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지... 그들에게는 세리나 창녀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굴욕적입니다. 그런데 세리나 창녀가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니 그만한 모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반박도 하기가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용의주도하게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미리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며 다그치시고, 늦게라도 일하러 나간 맏아들이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둘째보다는 낫다는 동의를 그들에게서 미리 받아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제대로 걸려 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들의 당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석사제와 원로들처럼 폼만 잡으면서 회개할 줄은 모르는 사람, 둘째 아들처럼 대답은 잘하면서 행동은 굼뜬 신앙인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제 이야기였습니다. 결국은 그들과 공범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차츰 제 마음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그래도 세리나 창녀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말씀 너무 심하신 것은 아닌지요... 그들도 처음부터 아버지 말씀을 어기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살다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못 지킨 것뿐이겠지요. 처음부터 싫다고 거절하면서 복장 터지게 하는 것 보다야 그래도 대답이라도 잘하는 것이 백번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되지도 않은 말로 옹호하고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아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동안 습관적으로 주님께 드렸던 뻔뻔스러운 대답들이 너무나 많이 떠오르는 것이 더 이상 우기기가 힘들어집니다.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너무나 쉽게 ‘예’라고 말하고는 아무런 갈등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제대로 ‘예’라고 응답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넓게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수석사제나 원로들처럼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전혀 변화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세리와 창녀들처럼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강한 질책을 떠올리며, 또 다시 공수표가 될지라도 한 번 더 큰 소리로 대답을 해 봅니다. ‘예, 주님. 이번에는 굳은 마음을 지니고 제대로 한번 순종해 보겠습니다.’



끝까지 가봐야 

  김광근 신부 



오늘은 제가 퀴즈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우리말에“길고 짧은 것은 끝까지 대어 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끝까지’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순간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실 인생은 전체를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부분 부분들에 집착 하다보면 오히려 전체적인 방향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십니까?”그렇다면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은 끝까지가봐야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말씀을 빌어서 표현하자면“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 18,26-27참조). 이 말씀은 결국 의인이라도 불의를 저지르면 죽을 수밖에 없고,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언제나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끝에서 어떤 결말이 나느냐에 따라 인생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인이라도 끝까지 의인으로 남아 있어야 가치가 있고, 지금은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고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복음에 나오는‘두 아들의 비유’도 결국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처음에는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으나“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마태 21,29 ). 그러나 작은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만 하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이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 그들이 대답합니다. “맏아들입니다.”우리 인생에서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과정이 좋았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과정이 반감되고,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다 좋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우리는 언제든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특히 회개라는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하는 바로 그 순간 새 사람이 되고 새 삶을 살 수 있으며, 결국에는 구원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잘 돌보아 주십시오”(필립 2,3-4). 결국 그는“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며”(필립 2,5)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생각을 바꾸어 새 삶을 살아갑시다.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1257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458
  1256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3140
  1255    
연중25-30주일
가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3716
  1254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연구 2008-09-27 3457
  1253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2 2008-09-27 4616
  1252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755
  1251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2479
  1250    
연중25-30주일
가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3334
  1249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257
  1248    
연중25-30주일
   Re..가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3533
  1247    
연중19-24주일
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3499
  1246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5019
  1245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안광훈 세자요한 신부님 2008-09-06 3114
  1244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3499
  1243    
연중19-24주일
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과 전례 2008-08-09 3784
  1242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4211
  1241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안광훈 세자요한 신부님 2008-09-06 2243
  1240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말씀연구 2008-09-06 2311
  1239    
연중19-24주일
   Re..가해 연중 제 2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2008-08-09 2739
  1238    
연중19-24주일
다해 연중 제 21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 강론 모음 2008-08-09 4586
  1237    
연중19-24주일
다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 강론 모음 2008-08-09 4114
  1236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1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8-09 5323
  1235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8-09 6927
  1234    
연중19-24주일
다해 연중 제 1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8-09 4434
  1233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1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8-09 4376
  1232    
대축일 강론
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말씀과 전례 2008-07-18 4039
  1231    
대축일 강론
   Re..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주일강론 2008-08-09 3833
  1230    
대축일 강론
   Re..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말씀과 전례1 2008-08-09 3116
  1229    
대축일 강론
   Re..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강론 모음 2008-08-09 7360
  1228    
대축일 강론
   Re..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김동진 사무엘 신부 2008-08-09 3221
1234567891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