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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9월 6일 (토) 20:55
분 류 연중25-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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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7주일

        1. 함세웅 신부(가)/2                     2. 김정진 신부(가)/3

        3. 범영배 부제(가)/5                     4. 최기산 신부(가)/7

        5. 강길웅 신부(가)/8                     6. 교구주보(가)-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9

        7. 최인호 작가(가)/10                    8. 작가미상(가)/11-착각

        9. 작가미상 (가)/13-군인주일           



        1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가)  악한 소작인

                                                       함세웅 신부





 한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은 마냥 시원하기만 합니다. 가을이 되면 농부들은 추수에 일손이 바빠지게 마련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소작인들은 땅 주인과 결산을 하고 미리 계약된 얼마의 소작료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해괴한 소작인들의 소행을 읽게 되고 땅 주인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읽게 됩니다.


우선 오늘 복음(마태오 21, 33-43)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원인 당신의 백성들을 소작인으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권위를 외면한 채 주인이 보낸 많은 심부름꾼들을 냉대하고 때려 주고 나중에는 죽여 버림으로 정면으로 주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보내면 소작인들이 꼼짝 못하려니 했으나 외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진노한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모조리 살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소작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행동에 있어 그렇게 놀랄 건 없습니다. 당신 팔레스틴에는 심한 불경기로 노동자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반항적이었을 수 있고, 그렇다면 지주의 아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날 법도 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늘 선동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폭력 혁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사태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공이니 멸공이니 하지만 가장 좋은 반공의 방법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선 오늘 ‘특권’과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많은 특권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좋을 대로 일하도록 자유롭게 하여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공사장의 감독과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어떤 과제를 주실 때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잇도록 이간에게 맡겨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누구에게나 결산의 시간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결산의 시간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시간 안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 가요?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나에게 어떤 책임 추궁의 원인이 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분명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결산 보고의 자료입니다. 우리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특권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해야 할 특권, 하느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특권(사도행정 5,41)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러한 특권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계획적으로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는 명망뿐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보다 독특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에 상당하는 책임을 완수하고 있는가?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권리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가? 기업체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권리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과는 관계가 없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시에 교육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일까? 학자로서 하느님의 자녀 된 나의 권리와 의무, 학생으로서 하느님의 자녀 된 나의 권리와 의무, 상인으로서 나의 권리와 의무는 순조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두 번째로, 오늘 복음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인내, 심판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기시듯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과업을 맡기셨습니다. 이로부터 인간에게는 권리와 책임이 유래됩니다. 인간이 맡은 바 직책을 수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종종 반기를 들고 항거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꾸자꾸 자기의 파견자를 보내시고 파견자가 학대받고 살해를 당해도 당장에 복수하러 달려오지 않는 포도원 주인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회개하고 당신의 뜻을 따라오기를 기다리시며 말해 줍니다. 그 심판은 아주 엄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맡겨 주신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때 그 가치는 상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최후의 심판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명백히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의 계열 이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 앞에 온 자들을 하느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으나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희생을 오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닥쳐올는지 예수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죽을 수밖에 없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응시하면서 한 발 한 발 그 길을 걸어 나아간 것입니다.











2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가)  나쁜 소작인들

                                                        김정진 신부



중추절도 지난 요즈음 가을 날씨는 마냥 좋기만 하고 천고마비의 계절임을 피부로 한껏 느끼게 합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풍작을 안겨다 주고 들에는 황금 물결치는 나락들이 고개를 숙여 농부들의 마음을 한결 흥겹게 해 주며 기쁨과 흐뭇함을 만끽해 줍니다. 이런 계절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인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더욱 실감 있게 백성들을 교훈 하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한창 포도송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포도원을 보시고 곧 추수 시기가 올 것을 연상하십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잘 만들어 놓고는 급한 용무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되어 포도원을 가난한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내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포도 재배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첫 수확이 언제 있을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하인들 중의 하나를 소작인들에게 보내어 소작료를 받아 오게 하였습니다. 헌데 이들은 악한 소작인들인 지라 종들을 마구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는 등 세 번씩이나 시도해 보았으나 허사였으므로 생각다 못해 마지막으로 하나  밖에 없는 귀염둥이 아들까지 보내 봅니다. 여기에 극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악덕 스럽기 짝이 없는 소작인들은 급기야 주인의 외아들까지도 잡아 때려죽이고 그 시체를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에 관해서는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은 당장 그 소작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다른 이들에게 소작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이야기에 대한 청중의 반응에 보면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로 알고 예수를 잡으려 하였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이 비유의 대상은 당시의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또한 진실하지 못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네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외아들에 대해서도 악독한 소작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이 하느님이 보내신 구약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최후로 하느님은 포도원의 상속자인 당신 아들을 보냈으나 그도 역시 예언자와 다름없이 배척 당하여 살해되고 말았다고 간파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있어 특히 포도원 주인의 태도에 관해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느님은 한없이 인내롭고 관대하지만 언젠가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학살 사건으로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준엄한 벌이 내려졌습니다.

소작인들이 멸망되었듯이,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기원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인들에게 점령되어 숱한 사람이 학살되고 포로가 되고 가옥과 재산은 전화로 모조리 잿더미로 변한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포도원은 <다른 사람에게> 즉 예수님의 <종>인 사도들에게 내맡겼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셨을 적에 사도들을 마음에 두셨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신자 여러분! 심술궂고 나쁜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지 않은 거처럼 오늘의 세계에서도 하느님께 그 많고 많은 땅을 소작으로 해 먹으면서도 그 소출을 하나도 드리지 않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재능, 건강, 재물 그리고 생명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받고서도 안 받은 양 행동하느냐>(Ⅰ고린 4:7)고 신자들을 책망한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의 떠오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으니 만큼 하느님을 위하여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우리가 헌신하고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지력과 의지를 다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영원토록 찬양이 되도록 우리의 재물과 생명을 아낌없이 바쳐 드릴 각오의 결심이 서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방에서 악의 도전을 받고 있는 우리는 풍부한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소출을 많이 바쳐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너그러 우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바칠 것을 바치고 드릴 것을 드린다면 하느님은 몇 갑절로 풍성히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바쳐야 하겠습니다. 미사참례와 조과 만과 묵주신공 시간은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마음과 정신도 기꺼이 바쳐야 하겠습니다. 자주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위하는 일을 곰곰이 연구합시다. 그리고 물질도 정성껏 바쳐야 하겠습니다. 쓸 것을 다 쓰고 할 것을 다한 다음에 남는 것을 교회에 내 놓을 생각을 버리고 아깝고 정성어린 것을 먼저 바치는 습성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멘.











3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가)  살신자(殺神者)

                                                범영배 부제



자신이 맡은 바 일에 충실하여 세상의 빚과 소금이 되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나에게 도움을 받거나, 혹은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도움을 준 사람의 의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로써,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만일 열심히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쓴다면, 장학금을 준 단체나 사람에게 배신한 것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주인이 소작료를 지불하도록 하고 외국으로 떠난 주인을 배신하는 소작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포도원은 경영하는 주인을 하느님으로 표현한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하느님은 포도원 주인입니다. 소작인은 유대인입니다. 포도원은 온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어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아닌 신을 섬기며 살았고, 하느님의 심부름을 왔던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배신을 보시면서도 기회를 주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 마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다음 선발 때 탈락되어 장학금을 받지 못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시지만, 정의의 하느님이시기에 배신을 계속 보고 계시지만은 않으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 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은혜를 주신 분의 뜻을 어긴 일은 없었는지 반성해 봐야겠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는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공경하고, 당신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하느님보다는 황금을 더 숭상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최고이다”라는 풍조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온갖 범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매일 신문의 사회면 기사에는 살인, 강도, 불량식품, 사기, 밀수 등의 범죄 사실들이 차지합니다. 이러한 세대 속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 양반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못 하는 게 바보이다.’라는 풍조 속에 너, 나 할 것 없이 부정과 야합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혼탁해지면 더욱 빛과 소금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정말 우리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 혼탁해진 이 사회를 정화시켜야 합니다.

지금의 혼탁해진 사회는 남보다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과 자신의 안일만을 찾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좋습니다. 그러나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러한 사회는 정화시킨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준다면 봉사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봉사가 불우한 이웃이나 또는 활동하고 있는 직장, 학교, 가정 등의 곳에서 각자가 맡은 직무를 다함으로써 봉사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맡은 바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때 사랑은 점점 이웃에게 전파됩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안일만을 찾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배신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만 모인 사회는 가장 비참하고 추한 암흑의 세계일 것입니다.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우리들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가쁨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사회에 기쁨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느님만을 공경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조금만 보답을 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개탄하며 관망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사랑을 이웃에 베풀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죄악으로 더렵혀진 이 사회를 깨끗하게 하도록 살아갑시다.















4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 (가) "착각"

최기산 신부



 착각의 연속 꿩잡는다고 나간 사냥꾼이 산속을 헤매다가 ꡐ부스럭ꡑ 하는 소리를 듣고 꿩인줄 알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이렇게 가끔 착각하여 사람잡는 사냥꾼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선거철만 되면 많은 이가 착각에 빠진다. 알랑대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과 박수소리에 현혹되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승산 없는 게임에 말려들어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마는 한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신앙인 중에도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이웃을 원수처럼 미워하면서도 미사참례는 꼬박꼬박 하고, 이마에 십자가를 연신 긋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면서 ꡒ천국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천국엘 못 가면 누가 갈 수 있겠는가!ꡓ라고 허튼 소리를 외쳐댄다. 이들이야말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때로는 봉사하러 왔다는 것을 잊은 채 봉사받으러 왔다는 착각 속에 살아갈 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 중 근본적인 것은 ꡒ나는 죽지 않는다ꡓ는 것이다. 관을 잡고 울면서도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외에도 물질은 나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이들이 있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착각 포도원 주인은 상당히 넓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혼자 직접 관리하지 못하고 나누어서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었다.



추수때가 되면 도조를 받아오라고 일꾼들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작인들이 착각에 빠져 한푼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둑놈의 심보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세를 받으러 간 종들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참으로 막가파가 하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한 사람은 때려줬다고 했는데 아마 야수같이 달려들어서 뼈다귀가 성한 데가 하나도 없도록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들의 심보로 보아 종이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매를 맞았다는 그 사람도 목숨은 붙어있으되 얼마 있다가 죽을 사람이었다.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종들을 보냈다.



아마도 엄하게 경고하라고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ꡐ내 아들이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ꡑ 하며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마저 능지처참하였다. 당시 유대법으로는 포도원 주인이 아들 없이 죽으면 그 포도원은 소작인들에게 돌아간다고 돼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큰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부르르 떨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소작인들을 능지처참하였다. 착각의 결론은 비참한 죽음으로 돌아왔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 일부를 겨냥했다. 그들은 뽑힌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수없이 죽였고 급기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다. 그들의 말로는 뻔하였다.



이젠 도조를 잘내는 사람들에게 소작이 돌아갔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소작인들로 뽑힌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뽑혀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있다. 우리는 공기도, 물과 태양도 다받았음을 잊혀버리고 있다. 우리는 건강도 집도 재물도 가족도 다 받았다. 그 뿐인가! 우리는 아름다운 산하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더러 마음대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조를 내야한다. 도조를 내는 이유는 이것들이 우리가 주인이 아님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작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조를 내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도조로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시간을 원하신다. 그분께 드리는 시간 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시간! 또 우리는 재물도 능력껏 드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인 재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착각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선 사람은 바로 바오로다. 그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착각에서 깨어났다.



신앙인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선물이다. 은총이다.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그것만 완성하면 안전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느님께서 서로 언어소통을 못하게 하자 착각은 드러났다.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빗대어 공주병, 왕자병이라 한다. 우린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자, 소외된 자들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울타리를 굳게 치고 안에서 장구치고 북치며 나홀로 이대로 그냥, 마냥 기쁘게만 하소서! 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닌지!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데도 우린 공주․왕자병에서 허덕이는 것은 아닐까!













5                    연중 제 27 주일   마태21,33-43(가) 이제는 셈을 바칠 때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1~7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제2독서 필립 4,6~9 (나에게서 배운 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복 음 마태 21,33~43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습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계절적으로 수확의 철이면서 교회의 전례력으로 봤을 때는 지난 1년의 삶에 대해서 하느님께 셈을 바치는 때입니다.



오늘 성서의 주제는 포도밭입니다.

포도나무는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성서에 자주 등장되는 나무 중의 하나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포도밭이 널려 있기 때문에 성서에서는 포도원, 포도밭의 비유가 자주 등장합니다. 즉 포도밭은 이스라엘이요 그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포도밭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정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 열매를 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들포도가 열린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타락한 결과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고작 그런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정성이 담겼다면 좋은 열매가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신포도처럼 먹지 못하는 열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작품이요 또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셈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도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살아 왔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늘 풍성했건만 우리 삶의 결실은 늘 부실했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포도원의 시설을 잘 마련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도지를 주었건만 그들은 때가 되자 하느님께 도조를 바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이 보내신 종들과 그 아들을 죽이고 있다는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늘 베푸시고 인간은 늘 그 사랑을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길의 차이입니다.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던 어떤 냉담자가 자기 본당 신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저는 봄에는 일부러 주일에 씨뿌렸고 여름에는 주일에 들에 나가 있었으며 가을에는 또 주일에 곡식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열심히 성당에 나간 사람들보다 농사를 훨씬 잘 지었습니다."



신부님이 답장을 썼습니다.

“형제의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선 계산서를 꼭 가을에만 청산하시지는 않습니다." 냉담자는 신부님의 답장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냉담을 해도 열심한 신자들보다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안 믿고 안 나오면 무엇인가 고장나서 벌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상을 받는 듯이 더 잘되는 경우를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갈등도 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느님의 계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신앙은 역설적으로 진행될 때도 있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도 있듯이 열매는 없는 것이 꽃만 요란한 나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그가 세속적으로 돈을 많이 벌고 성공을 했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포도나 들포도 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돈 1원이라도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신 사랑이 담겨 있을 때 바로 거기에 참된 부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재산 공개와 금융 실명제 실시를 통해서 우리는 권력을 쥔 자들과 돈 있는 자들의 속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장된 가면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지 모릅니다. 권력이나 부 안에서 자신들은 누구 보다 많은 수확을 거뒀다고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테지만 하느님의 계산은 그렇게 우리 편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셈은 재산 공개 보다 열배, 백배 더 엄격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았던 이들에게는 그 날이 기쁨과 참된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연중 마지막 시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기에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의 죽음도 묵상하게 됩니다.



누가 과연 하느님께 칭찬받는 종이 될 것이냐는 그 날 가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감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세속 사정에 현혹되거나 방황하지 말고 신앙의 올바른 길을 진실되게 걸어갑시다.











6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가)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



사무처 홍보실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寓話)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예수께서 친히 발설하신 특례 비유인데 마태오(21,33-46)와 루가(20,9-19)는 마르코(12,1-12) 본문을 옮겨 쓰면서 우화적 요소를 더욱 강화했다.



1. 복음의 줄거리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도지(賭地)로 내어주고 멀리 떠났다. 수확 철이 되자 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도조(賭租)를 받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 자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그를 죽여버렸다. 그때까지 참던 주인은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자기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내어준다.



2. 복음의 메시지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 포도원은 이스라엘, 농부들은 지도자들, 종들은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선민(選民)으로 삼으시고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파견하여 회개의 삶을 촉구하셨지만 지도자들은 예언자들을 박해했다. 마침내 아들인 예수를 파견했더니 아예 죽여버렸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스라엘 선민과 그 지도자들을 없애버리고 이스라엘 백성 대신 그리스도 교회를 택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베푸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많은 결실을 맺도록 계속해서 기다리는 분이시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계속해서 거절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참아주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를 시험하면서 악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3. 우리의 이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제때에 내도록 요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그 뜻을 저버리고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고 마침내는 예수님마저 배척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런 지도자들에게 내리는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라 하겠다.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면하고 거부한다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처럼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끊임없이 인간 세상 안에 구현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과연 오늘날 교회는 이같은 사명을 잘 구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7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가)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최인호 베드로/작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에 ‘엄마’와 ‘아빠’란 두 가지 말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을 창조주 주님이라고만 불렀지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가 몇 번 나옵니다. 다윗은 하느님을 “당신께서는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내 구원의 바위이십니다”(시편 89,26)라고 노래했고 이사야는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이사 64,7)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래한 아버지는 하느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지 개인적으로 ‘아버지’란 직접적인 호칭으로 사용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첫번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아기가 아빠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아빠’(abba)란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게쎄마니에서 하느님에게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마르 14,36)라고 기도했을 때 그 중 ‘아버지, 나의 아버지’의 첫번째 호칭이 ‘abba’로 표현된 것을 보면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증거라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

신 결정적인 증거는 사도 바오로가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 4,6).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라고 했던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만든 다음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나갔다. 포도철이 되자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으나 소작인들이 이들을 죽였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는데 소작인들은 ‘저자는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고 우리가 포도원을 가로채자’ 하면서 그를 끌어내어 죽였다”(마태 21,33-39).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될 것인가를 암시함으로써 하느님과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복음을 통해서 170군데나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 첫머리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느님이 이제 우리에게 ‘아빠’가 되셨음을 정식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는 이제 하 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은 나의 아빠이 며, 나는 그분의 친자(親子)이며, 예수는 나의 형님인 것입니다.











8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가)   착각



   착각의 연속



  꿩 잡는다고 나간 사냥꾼이 산 속을 헤매다가 ‘부스럭' 하는 소리를 듣고 꿩인줄 알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이렇게 가끔 착각하여 사람잡는 사냥꾼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선거철만 되면 많은 이가 착각에 빠진다. 알랑대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과 박수소리에 현혹되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승산 없는 게임에 말려들어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마는 한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신앙인 중에도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이웃을 원수처럼 미워하면서도 미사참례는 꼬박꼬박 하고, 이마에 십자가를 연신 긋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면서 “천국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천국엘 못 가면 누가 갈 수 있겠는가!"라고 허튼 소리를 외쳐댄다. 이들이야말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때로는 봉사하러 왔다는 것을 잊은 채, 봉사 받으러 왔다는 착각 속에 살아갈 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 중 근본적인 것은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을 잡고 울면서도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외에도 물질은 나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이들이 있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착각



  포도원 주인은 상당히 넓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혼자 직접 관리하지 못하고 나누어서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었다. 추수 때가 되면 도조를 받아오라고 일꾼들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작인들이 착각에 빠져 한푼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둑놈의 심보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세를 받으러 간 종들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참으로 막가파가 하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한 사람은 때려줬다고 했는데 아마 야수같이 달려들어서 뼈다귀가 성한 데가 하나도 없도륵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들의 심보로 보아 종이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매를 맞았다는 그 사람도 목숨은 붙어있으되, 얼마 있다가 죽을 사람이었다.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종들을 보냈다. 아마도 엄하게 경고하라고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내 아들이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 하며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마저 능지처참하였다.



  당시 유대법으로는 포도원 주인이, 아들 없이 죽으면 그 포도원은 소작인들에게 돌아간다고 돼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큰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부르르 떨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소작인들을 능지처참하였다. 착각의 결론은 비참한 죽음으로 돌아왔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 일부를 겨냥했다. 그들은 뽑힌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수없이 죽였고, 급기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다. 그들의 말로는 뻔하였다.



  이젠 도조를 잘 내는 사람들에게 소작이 돌아갔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소작인들로 뽑힌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뽑혀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있다. 우리는 공기도, 물과 태양도, 다 받았음을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건강도 집도, 재물도 가족도 다 받았다. 그 뿐인가! 우리는 아름다운 산하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더러 마음대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조를 내야한다. 도조를 내는 이유는 이것들이 우리가 주인이 아님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작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조를 내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도조로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시간을 원하신다. 그분께 드리는 시간 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시간! 또 우리는 재물도 능력껏 드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인 재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착각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선 사람은 바로 바오로다. 그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착각에서 깨어났다. 신앙인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선물이다. 은총이다.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그것만 완성하면 안전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느님께서 서로 언어소통을 못하게 하자 착각은 드러났다.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빗대어 공주병, 왕자병이라 한다. 우린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울타리를 굳게 치고, 안에서 장구 치고 북 치며, 나 홀로 이대로 그냥, 마냥 기쁘게만 하소서! 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닌지!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데도 우린 공주 병, 왕자 병에서 허덕이는 것은 아닐까!











9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가)   군인주일을 보내며



 오래 전 피정 중 선배 신부님들과 담소를 하던 중, 들은 이야기이다. 그 신부님들이 보좌신부 시절이던 60년대 초에 휴가 때를 이용해서 군종신부로 나가있던 동창신부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신자에 의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안내되었다. 그 집은 사제관으로 쓰는 집이었다. 동창신부가 없어 마루에 앉아 기다렸는데, 가재도구도 별로 없어 보여 고생을 하며 지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저녁 무렵 돌아온 동창 군종신부는 반갑게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직접 부엌으로 들어가 쌀을 씻어 밥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반찬이 없어 미안하다” 하고는 겸연쩍게 씩 웃는 것이었다. 동창들은 밤새는지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새벽녁에 잠을 자는데, 이불도 변변치 못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다음날 아쉽게 버스 터미널 에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군종신부가 어딘가 갔다오더니 차 창문을 두드렸다.「가면서 심심할 때 먹어!」 하면서 음료수 몇 개와 삶은 달걀을 건네 주었다. 그 동창신부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때의 동창 군종신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전방시찰 중 교통사고로 그 신부님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선배 신부님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사정은 나아졌다고 해도 군종신부들의 고생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군인주일의 의미



  오늘은 군인주일이다. 군인주일이란 군대에 있는 군인 신자들과 군 사목을 하는 군종사제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군대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한다. 특히 젊은 시절,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군대는,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편안한 집을 떠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낯선 생활 속에서 보통은 정신과 육체가 지치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삶과 가족,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을 뜨게되는 시기이다.



  엄격한 규율과 절도 있는 생활 속에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종교이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은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군대에 있는 우리의 아들과 형제들을 위해 오늘만큼은 모든

신자들이 한 공동체로서, 과연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방황하기 쉬운 젊은 군인 신자들을 사목하는 군종사제들 역시 일반 본당과 비교하면 쉬운 조건이 아니다. 군종사제들은 혼자서 여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제이면서, 때로는 수도자, 사무장, 관리인의 역할도 해야될 때가 있다.



  군종사제는 홀로 모든 것을 준비하며, 군인 신자들을 직접 찾아가 미사와 여러 성사도 집전해야 한다. 군종사제에겐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특히 타종교에 비교한다면 더 그렇다. 여러 가지 역경과 어려움을 딛고 묵묵히 일하고 있는 군종사제들을 위해서 오늘만큼은 특별히 힘껏 격려하는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간접적이나마 군종사제들이 교회의 나눔과 일치의 기쁨을 누리며 일할 수 있도록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말자!



      인내하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의 포도원의 비유에서 보면, 세상의 죄인들은 주님의 말씀과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까지 박해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인내와 관용이 두드러진다. 인간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찾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기꺼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하느님이 보내신 일꾼들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 형태의 예언자를 통해서, 때로는 자연과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고약한 소작인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되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로서 주님의 인내를 닮도록 해야한다.



  또한 우리 자신이, 세상과 이웃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박해를 각오한 예언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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