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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3
분 류 연중25-30주일
ㆍ추천: 0  ㆍ조회: 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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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2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25 주일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제1독서: 이사 55,6-9



제2독서: 필립 1,20-24.27a



복 음: 마태 20,1-16



  주님과 거래를 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그분의 신비나 그분의 태도를 파악했다고 여기는 그 순간 그분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또다시 알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던지신다:그분은 항상 저편에 계시며 우리가 그분에 대해 할 수 있는 상상을 훨씬 초월해 계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제 2 이사야서 작가가, 곧 귀양살이에서 돌아가게 될 행복감에 젖어 정치적 재건과 명예 회복은 물론 바빌론의 원수들에 대한 복수 까지도 계획하고 있었던 자기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계산과 감정을 고쳐먹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오늘의 제 1 독서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간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 55,8-9). 하느님의 ‘길’과 ‘생각’은 마치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근시안적인 인간들의 계획을 무한히 초월하는 그분의 구원적 태도와 계획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히브리인들이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의 표지가 드러나기를 바라시면서 그들에게 마음의 ‘회개’를 요구하셨다: 고향에 돌아옴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귀향은 정치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즉 그들은 고달프지만 항구하게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추구함’에서 구체적인 그분의 모습을 만나야 했다: “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리라”(이사 55,6-7).

 ‘회개’는 여기서 두 가지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적극적으로는 ‘주님을 찾는 일’이요(호세 5,6; 아모 5,4 참조) 소극적으로는 죄를 ‘떠나는 일’이다(7절 참조).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사건의 ‘영신적’ 차원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귀양살이의 체험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의 마음’에 그대로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 야훼께서는 예언자를 시켜 그들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완전히 바꾸라고 권고하신다:“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8절).





“하늘 나라는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가는 것에 비길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반적인  판단과 가치평가와 행동의 형태까지도 완전히 뒤엎어놓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해주고 있는 각기 다른 시간에 포도원에 불리운 포도원 일꾼들의 아주 생생한 비유에 의해 상당히 회화적인 형태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은 잠시 후에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사가의 신학적 관점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는 명백한 표지이다. 더 많이 일한 일꾼들의 기대는 물론, 그 당시의 ‘정의’의 규범에도 어긋나게 그 주인은 모든 일꾼들에게 똑같은 품삯을 지불함으로써 먼저 와서 더 오랫동안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일한 사람들 사이에 불쾌감과 불평을 야기시킨다.

  이 비유의 전반부는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각기 다른 시간에 불러들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마태 20,1-5).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5-7절) 즉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여기까지는 일과가 끝날 무렵에 사람을 불러들였다는 것 외에는 주인의 행동에 별다른 이상한 점은 없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 사람을 부른 것도 일이 급해서(포도 수확기라고 생각해 본다면) 동원 가능한 모든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리라는 의미에서 설명이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비유의 의도 자체는 일꾼들의 고용시간이 현저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막판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12절) 사람도 있다.

  이처럼 비유의 전반부는 후반부에서 서술될 ‘주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길 수 있는 준비를 아주 능숙하게 갖추어놓고 있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8-16절).

  문학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마지막 온 사람들로부터 품삯을 지불하도록 하는 의식적 배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먼저 온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한 것보다 더 받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 때 실망감과 아울러 공개적으로 불평을 털어놓게 하는 준비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그 주인의 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13절.15절). 그러므로, 한편으로 볼 때 그 계약조건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주인이 자신의 선하고 관대한 마음에 연유하여 어떤 사람에게 더 베풀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의 규범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그 주인의 ‘선한 마음’은 더 많이 일한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야기 시키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수고한 자기들에게도 그러한 선한 배려를 해주지 않은 데 대한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선성’이 차별적이라면 어떻게 보면 그것도 ‘불의’의 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비록 어떤 사람들에게 특별한 자비를 베풀기는 했어도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한 일은 없다고 하는 그 주인의 찬양받아 마땅한 ‘의로움’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예수의 자서전적 단편



  분명히 이 비유는 만일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먼저 말씀하셨을 때 부여하신 의미와 그 뒤에 복음사가가 자기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면서 부여한 의미 등 여러 가지 차원에서의 의미를 제쳐놓고 경직된 형태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정도로 적용되고 있지 않은 듯 여겨질 수 있는 ‘정의’와 또한 ‘선성’의 엄격한 도식적 체계를 넘어서 들여다 보게 되면 그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행위는 예측할 수 없으며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완전히 무상적이며, 요구하기보다는 항상 무엇인가를 베풀어준다는 근본적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먼저 온 일꾼들과의 관계도 오직 그 주인의 주도적 초대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이 더 많이 일했다면 그 자체가 그분의 은총이요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원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한 자서전적 단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 사회상을 반대하시며 당시 사회에서 배척받고 소외당했던 모든 사람들―마태오와 자캐오와 같은 세리들, 죄인들, 환자들, 나환자들, 중풍병자들, 비천한 사람들 등―을 받아들이셨다. 엄격한 율법준수로 특별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히려 제쳐놓으신 듯 싶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그분께 반발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이 어떻게 자신을 통해 드러나는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변호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 즉 맨 꼴찌에 해당되는 사람들도 받아들이신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대우하시기를 원치 않으시며 진정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시간에라도 모든 사람이 당신의 포도원에 들어오도록 하신다.

  하지만, 끝에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먼저 온 사람들을 제외시키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분 앞에서 내세우는 특별한 공로 내지는 특권의식을 배제시키고자 하셨을 뿐이다.

  한가지 특권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보다 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정확히 말해 멀리서 와서 고통을 당했거나 또는 보다 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처럼―에게 유보되어야 할 가장 위대한 사랑의 특권이다. 아버지는 탕자인 작은 아들에게 지극한 배려를 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큰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은 그 아버지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루가 15,31-32).

  만일 하느님의 사랑이 모두에게 고루 베풀어진다면 어째서 언짢게 여기거나 시샘을 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특권이나 이익을 감소시킬지라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고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의 권리에 대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만 생각하라고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나중에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을 저술했을 당시 초기 교회내에서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일고 있었다: 엄격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반드시 유다교의 종교의식을 거쳐야 하느냐, 아니면 사도 바울로가 팔레스티나 지방 밖에 세운 공동체에서 실천적으로 가르쳤던 것처럼 세례를 통해 표현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사도행전 15장은 교회내에 발생한 이런 심각한 문제가 유다교적 율법으로부터의‘해방’이라는 관점에서 해결되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라 6,15).

  오늘의 비유는 이러한 논쟁의 핵심에 위치하게 되면서, 더 이상 예수를 반대해온 자들을 겨냥하기보다는 신자들을 겨냥함으로써 특별히 ‘교회론적’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스승 예수의 태도보다는 오히려 이교도들의 세계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태도를 옹호하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시간’에 온 일꾼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을 말하며, 반면에 무엇인가 더 보상받고자 하는(즉 특권을 내세우는) 먼저 온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말한다.

  복음사가는 그들의 헛된 주장들은 무시해버리고 오히려 하느님과 인간들의 관계가 보다 근본적으로 뒤바뀌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방인과 유다인들을 구별하거나 차별대우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처럼 그분 앞에서 자기의 특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마지막 자리에 두실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를 끝맺는 마지막 문장이 지니고 있는 극적인 의미이다:“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16절).

  순전히 자신들의 공로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는 구원에서 제외되리라는 위협이 담겨있다(로마 9,30-33 참조). 루가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다음 문맥에는 적어도 그러한 의미가 들어 있다:“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루가 13,29-30).

  또한 교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상이다: 성녀 루치아나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순수한 동정성, 베드로나 바울로의 치명을 통한 증거, 성아우구스티노나 샤를르 드 후꼬 신부의 회개, 성토마스 아퀴나스나 안토니오 로스미니의 신학적 자식 등 모든 것이 무상적 선물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것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나 공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시다: 중요한 것은 일이나 봉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존재의 매순간에 우리 각자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랑과 신뢰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무상적 사랑을 투자한다면 최고의 소득도 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되이 신뢰심을 가지고 오직 그분의 심판과 판단에 그 결과를 맡겨야 한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수고에 대한 어떤 보상을 요구하는 그 정도의 입장에 있다면 우리는‘고용된 일꾼’의 신분으로 바뀌어‘자녀’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은총인 복음을 등지고 인간을 자만심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께서 비난하신 율법의 멍에를 다시 짊어지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제 2 독서는 사도 바울로의 영신적 특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도 주님의 포도밭에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로마 9,16)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온전히 자신을 바쳤고 어떤 예표(감옥살이, 심한 육체적 고통 등)에 의해 거의 확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던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서도 주님의 뜻을―그것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행할 마음자세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만약 계속 살게 된다면 복음선포와 자신의 생활체험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널리 알릴 것이고, 죽게 된다면 더 이득이 될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더욱더 충만히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사도로 불러주신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될 때만이 즉 주님의 지극히 풍성한 사랑에 완전히 젖어들 때만이 자기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첫째가 되느냐 꼴찌가 되느냐 또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의미가 있는 것은 어떤 장벽이나 심지어 죽음의 장벽에 의해서도 막히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에게 한 가지 원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형제들에게 보다 유익한 존재가 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나는 살아 남아서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주고 기쁨을 더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필립 1,20-27).

  그리스도의 무상적 사랑이 사도 바울로로 하여금 형제들을 위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강력히 부추기고 있다. 바울로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1고린 15,10 참조)특별한 상급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오직 하느님만이 주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이미 상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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