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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말씀과 전례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20:42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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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24주일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제1독서: 집회 27,30-28,7



제2독서: 로마 14,7-9



           복 음: 마태 18,21-25



  이미 지난 주일에 시작된 마태오 복음사가의ꡐ교회론적ꡑ담화는 교회의 혼(魂)과도 같은 사랑과 형제애에 관한 주제를 계속 발전시키면서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대한 의무로 요구되는 형제적ꡐ용서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인간들에게 그지없이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경우를 예로서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사실, 구약성서에서 자주 찬양되고 있는 하느님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분의ꡐ자비ꡑ이다.



ꡒ그분은 네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ꡓ



  오늘 전례는 하느님 자비의 특성을 찬양하는 대목들로 온통 가득차 있다. 응송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야훼의 자비와 신성을 노래하는 장엄한 시편 102(히 103)의 일부를 전해주고 있다:ꡒ야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야훼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말라.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니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 꾸짖으심이 오래 가지 않으시고,앙심을 끝끝내 아니 품으시도다.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악대로 갚지도 않으시니 저 하늘이 땅에서 높고 높은 것처럼, 경외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크신 그의 자비. 동녘이 서녘에서 사이가 먼 것처럼, 우리가 지은 죄를 멀리하여주시도다ꡓ(시편 102,1-4. 9-12).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이ꡒ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신다ꡓ는 것이다. 이 말은 그분의ꡐ정의ꡑ는 곧 사랑이며 그 무엇도, 심지어 죄까지도 주고받는 엄한 규범에 따라 행동하도록 그분을 묶어놓지는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진정 하느님은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죄악과 무감각하게 굳어버린 마음 앞에서도 그분은ꡐ자유로우시다ꡑ:그분은 인간을 사랑을 통하여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수 있으시며 인간의 한없는 불행을 이해하실 수 있는 무한하신 능력 외에는(ꡒ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는 탓이로다ꡓ:시편102,14) 어떤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영성체송도 주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ꡒ주여, 당신 은총이 어이 이리 귀하신지 인간의 자손들이 당신 날개 그늘로 숨어드나이다ꡓ(시편 35,8).

  본기도는 하느님의ꡐ창조적ꡑ능력과 그분의ꡐ자비ꡑ를 놀랍게 결합시킴으로써 그분의ꡐ자비ꡑ또한 인간의 마음에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사의 흐름에까지도 새로운 상황을ꡐ창조해주는ꡑ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다만 이 점을 생각해 보라:성아우구스티노와 같은ꡐ용서받은 사람ꡑ이 교회와 인간적 사상 자체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대변해주고 있는가?



ꡒ제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ꡓ



  이제, 형제적 용서에 대한 베드로와 예수와의 짤막한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자:ꡒꡐ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읍니까?ꡑ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ꡐ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ꡑꡓ(마태 18,21-22).

  유사한 내용의 문장을 루가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ꡒ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 했다고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ꡓ(루가 17,3-4).

  마태오의 편집 내용에 따르면 두 가지 점에서 수정되고 있다. 첫째는 용서의 포용력이 훨씬 넓어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즉 무한히 용서하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생각으로는 일곱 번 정도만 해도 아주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이 아직 너무 좁아서 그 마음을 무한히 넓힐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서ꡒ카인을 해친 사람이 일곱 갑절로 보복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치는 사람은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받으리라ꡓ(창세 4,24)고 라멕이 자기의 적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할 것을 위협하고 있는 창세기의 대목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시는 것이 분명하다.

  둘째로는 이 형제적 용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루가 복음사가에 의해서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베드로의 역할이 신중히 고려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앞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나름대로 교회론적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 구상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들 상호간에 형제애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용서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일에 있어서나, 또 그가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어쩌면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그가 우선 용서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다.

  즉시 이어서 나오고 있는ꡐ무자비한 종ꡑ의 비유는 무한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보다는 오히려 순수하게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점과 또한 복음의 표현대로 진심으로 용서해준다는 것(35절)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무한히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다.

  예수께서 생각해내신 장면은 연이어서 나오고 있는 대립적인 상황들을 통하여 극적 대조를 연출해내고 있는 세 가지 행위로 전개 되고 있다.



ꡒ하늘 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ꡓ 



  첫째 행위는 왕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종이 왕에게 셈을 바쳐야 하는데 왕이 관대하게도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준 것이다:ꡒ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ꡐ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ꡑ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ꡐ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ꡑ하고 애걸하였다.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냈다ꡓ(23-27절).

  성서 대목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정말로 어떤ꡐ왕ꡑ에 관한 일이라면 그 종들은 분명 그 나라의 지방관리들이거나 행정관들일 것이다. 어쨌든 사실인즉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무능력한 탓으로든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정말로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지었다.ꡐ일만 달란트ꡑ라는 액수는 대략 칠십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부자ꡐ상인ꡑ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종들은 아마도 그의 노예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사건의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 딱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재산 전부를 팔아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뜻하지 않게 왕은 관대함을 베풀어 그 종의 청을 받아들여 모든 빚을 탕감해준다:ꡒ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냈다ꡓ(27절).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splanchnisthéis(가엾게 여기다)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배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시게 하는 억제키 어려운 내적 힘을 뜻한다. 신약성서 특히 마태오복음에서는(9,36; 14,14; 15,32; 20,34참조) 예수께서 인간적 불행을 위로하시는 측은지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용어 자체가 문학적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 비유에 나오는ꡐ왕ꡑ의 지극히 관대한 모습을 이해토록 도와주고 있다.

  첫 번째 행위가 감동적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행위는 참으로 우울한 기분을 자아낸다: 그 종으로 하여금 주인과 똑같은 관대한 자비심을 가질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편협한 마음에 사로잡히게끔 하는 것 같다. 실제로,ꡒ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ꡐ내 빚을 갚아라ꡑ고 호통을 쳤다. 그 동료는 엎드려ꡐ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ꡑ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ꡓ(28-30절).

  왕의 태도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첫째, 그 종은 화를 내고 그가 주인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간청을 들음에도 불고하고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고 그의 동료를ꡒ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ꡓ(30절) 감옥에 처넣는다. 둘째, 이 두 번째 경우에는 그 빚을 탕감해주거나 연기해주기가 앞의 경우에 비해 쉬웠다. 왜냐하면ꡒ백 데나리온ꡓ이라는 돈은 칠천 원 정도에 해당하는 그다지 심각히 여길 만한 액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두 경우에 있어서 금액 차이가 아주 큰 점을 강조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마음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때 세 번째 행위가 극적으로 등장한다: 다른 종들이 그 광경을 보고ꡐ분개하여ꡑ모든 사실을 주인에게 알린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한다:ꡒꡐ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ꡓ(32-34절).

  주인의 이 마지막 엄한 태도는(ꡒ몹시 노하여ꡓ) 처음에 이해하고 용서해주었던(ꡒ가엾게 여겨ꡓ:27절) 그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는 단순히 사랑의 행위를 행한 것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정의의 규범을 넘어서 있는 새로운 법 즉 인간들 상호간에 용서를 베풀고 새로운 일치의 관계를 창조케 하는 사랑의 법을 새로이 세워놓았던 것이다. 반대로 그 무자비한 종은 여전히 낡아빠진 율법주의적 사고-―요구할 줄만 알고 베풀 줄은 모르는-―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항상 적개심과 분노와 의심과 복수심만이 인간관계를 얽어맬 것이다. 그는 사랑과 용서를ꡐ다시 나누어줌으로써ꡑꡐ성부ꡑ께서 매순간 새롭게 회복시켜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정을 항상 새롭게 살아가도록 서로 도와주고자 하는 믿는 이들의 새로운 형제애,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너무나도 관대해 보였던 그 왕의 태도가 끝에 가서는-- 무섭도록 돌변하여 그 종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준 선물을 되돌려받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가 사랑을 다시 나누어줄 줄 모른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분(성부)은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되거둬가실 것이다.



ꡒ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ꡓ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므로ꡒ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ꡓ(35절). 이 대목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들이 미래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이 대목은 우리 각자가 성부께 지은 무한한 빚을 전제한다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ꡐ감옥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느님의ꡐ심판ꡑ에 달려 있다: 그분은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즉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안에서 그 정체가 확인될 수 있는 인간들 상호간의 형제애의 실천 능력에 따라 우리를ꡐ심판ꡑ하신다.

  비유의 베일을 벗기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ꡐ기쁜소식ꡑ을 전해주는 참된 이야기가 들어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용서는 예수를 통하여 주어졌기 때문이다:ꡒ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ꡓ(골로 2,13-14).

  그래서 그분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을 용서하심으로써 당신의 전생애를 가장 위대하게 마치셨다:ꡒ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ꡓ(루가 23,34). 일부 그리스도교 필사본가들은 이 말씀을 못마땅히 여겨 자기들의 사본에서 빼버리기도 했다. 아마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너무 지나친 표현을 쓰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곱 번만이 아니라ꡒ일곱 번씩 일흔 번ꡓ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명하시는 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그분은 그보다 더 즉 무한히 우리를 용서하셨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모범에 충실히 따름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할 교회와 같은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야말로 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한 신자에 이르기까지 다같이 언제나 서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해야 할 바를 항상 성실히 완수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이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그리고 서로간에 겸손되이 또 진실되이 용서를 나눌 때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ꡒ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ꡓ(마태 6,12).

  존재하는 단 하나의 교회는ꡐ용서를 해주는 자들ꡑ이 될 수 있는ꡒ용서받은 자들ꡓ의 교회이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이미 교회 밖에 있는 자이다: 교회라는ꡐ그리스도의 몸ꡑ으로부터 내적 체제상으로 우리를 제외시켜버리는 유일한 죄가 바로 이 죄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볼 때, 화해의 성사 자체는 참으로 중요하며 절박히 요구된다: 화해성사는 성체성사와 더불어 교회를 항구히 새롭게 건설해 나간다. 즉 그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때때로 불행히도 서로간에 생겨날 수 있는 반목과 대립을 뛰어넘어 서로간에 이해와 존경과 사랑의 대화를 재개할 수 있도록 하게 함으로써 말이다.



ꡒ우리들 가운데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ꡓ



  용서와 형제적 화해의 필요성은 오늘 전례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집회서에 의한 제1독서의 의미심장한 대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는 이미 신약의 정신이 숨쉬고 있다:ꡒ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주겠는가?ꡓ(집회 28,2-5).

  쉽게 알아들을 수 있듯이 용서를 하라는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 가운데 다섯 번째 행복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ꡒ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ꡓ(마태 5,7).

  사도 바울로가 신앙에 있어서ꡐ나약한ꡑ형제들에 대해 사랑을 가지라고 로마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문맥에서 취해지고 있는 제2독서도 비록 감정과 느낌이 다를지라도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 또 다른 형제들에게 맺어져 있는 필연적인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 14,7-9).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용서해주심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모범이 다시 한번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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