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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8월 9일 (토) 09:12
분 류 연중19-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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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19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 19 주일

10. 오성기 신부(나)/16

        11. 신은근 신부(나)/16         12. 김영남 신부(나)/17

        13. 강길웅 신부(나)/19         14. 임영숙 논설위원(나)/21

        15. 생명의 빵(나)/23           16.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나)/24

        17.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나)/25                 18.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나)/26

        19.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나)/27                 



10.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불신을 건너 주님 품속으로!

                                                           오성기 신부



많은 사람들은 먼저 기적을 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거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혹은 소경이 갑자기 볼 수 있다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기적이 먼저이다. 믿음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이런 기적들을 먼저 체험한 다음에 사람들이 하느님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ꡐ부자와 라자로ꡑ의 비유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ꡒ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ꡓ(루가 16,31).



복음은 믿음이 먼저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 ꡐ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ꡑ을 보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ꡒ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ꡓ(마태 14,16) 하고 말씀하셨다.

믿음에 의한 행동을 먼저 요구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믿음이 우선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대로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물론 우리의 부족한 능력과 재력 등을 과소평가하며 그렇게 행동하기를 주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ꡐ그 작은 것으로 시작하라. 하지만 믿으면서 행동하라. 그러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ꡑ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다.











11.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생명의 빵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생명의 빵을 말씀하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분께 삶의 이유와 활력이 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믿지않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는 열심히 찾고 있다.



빵은 음식이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음식이다. 영혼도 먹어야 한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균형은 무너진다. 삶이 불안해지고 허무감에 휩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혼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갈증을 느낀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모르기에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려 본능적인 삶에 탐닉한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 심해질 뿐이다.



방법은 하나다.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한다.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한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안에서 대답을 찾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 하셨다. 신앙인은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체험한다. 영성체를 통해 영적음식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강해진 영혼이 육체적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인가.



수없이 성체를 모셨건만 영적인 힘을 못느꼈다면 생각해 보자. 어떻게 성체를 모셔왔던가. 성체는 예수님의 몸이다. 성체 앞에 나선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최소한의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되었기에 구경하는 미사, 당연한 듯 받아먹는 영성체가 되지 않았던가. 하늘의 힘은 거저 오지 않는다.



옛날부터 성체신심은 정성에서 출발했다. 교회가 공심재를 규정한 것도 정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라는 의도다. 지금은 많이 후퇴하여 성체를 모시기 한 시간 전까지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불과 70년 전만 해도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였다. 물도 못먹게 하였고 입안에 침이 생기면 그것을 뱉어내도록 하였다. 서양 신부님들의 과장된 행동이 아니라 그만큼 정성을 드려 성체를 영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이 규정을 끔찍이도 지키셨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셔야 필요한 곳에서 영적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분의 힘이 영혼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생활 속의 불안과 허무를 극복할 줄 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아름다운 변화가 오는 것이다. 생명의 빵이 주는 위력이다. 지금이라도 성체를 정성껏 모시자. 성체께 대한 신심이 새로워질 것이다.











12.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1열왕 19,4-8 (나)

‘인생의 순례여정’과 ‘생명의 빵’

                                                             김영남 신부



(오늘은 예외적으로 제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의 이야기”와 연결지어 ‘복음생각’을 하고자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나라에는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하는 말들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걷는 길인데도, 이 ‘나그네 길’의 출발지와 출발시간 그리고 목적지와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사결정과는 상관없이 정해졌고 정해질 것이다.

엄연한 이 사실을 마치 없는 듯이 생각할 때 우리 인생 길에는 많은 혼란이 몰려온다.

그리고 인생여정의 처음과 끝만이 아니라, 길고도 짧은 그 중간과정에서도 우리 각자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 주일의 제1독서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의 이야기와 ‘생명의 빵’에 관한 복음서의 말씀은 이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여정’에서 우리가 방황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에 올바로 도착할 수 있는 길로 초대한다. 특히 어떤 인생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초대한다.


엘리야 예언자의 ‘피신’이자 ‘순례’였던 여정과 그 여정 중에 먹은 “천사의 빵”

엘리야와 같이 위대한 예언자도 처절한 좌절과 실패를 경험했다. 오늘 주일의 제1독서(1열왕 19장)는 이를 잘 말해 준다. 이 실패는 바알 예언자들을 대항하여 대대적 승리를 거둔 (바로 앞장인 1열왕 18장) 직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더 뼈아프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바알 예언자들을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세벨 왕후가 분노하여, 예언자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미친 듯이 그를 찾자, 갈멜산 위에서 그 자신만만하던 엘리야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초라한 모습만이 보인다. 그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려 급히 도망친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 브엘세바를 지나 어느 광야에 다다른다.

거기서 그는 얼마나 낙심하였던지 차라리 죽여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오, 주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든다.



이렇게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잠든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구워낸 과자[빵]과 물”을 주신다. 그러나 너무나 지쳐있던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난 후에 다시 쓰러져 잠이 든다.

그 때 주님의 천사가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하고 격려하신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먹고 마신 후 힘을 얻어 엘리야는 사십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산’(=‘시나이 산’의 다른 이름)에 이른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독서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다음 대목을 읽어보면, 이 ‘호렙산’에 가서 엘리야는 하느님을 다시 체험하고 용기를 얻고 다시 돌아와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다한다.

호렙산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 엘리야는 결과적으로 자기 조상들의 신앙의 원천으로 성지순례를 간 것이었다.



정리해 보자. 방금 우리가 살펴 본 이야기는 ‘엘리야 예언자의 소명위기와 그 극복’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대목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처한 ‘소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도망’을 통해서인가? 아니다! 그 ‘도망’은 엘리야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망’이 아니라 ‘순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엘리야가 처음부터 ‘순례’를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엘리야는 다만 ‘도망’을 하고 있었지만, 그 ‘도망’을 당신과 만나는 ‘순례’로 바꾸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었다. 엘리야는 의식하지 못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위기’에 처한 엘리야를 당신께로 “끌어 당기셨던” 것이다.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처음에 엘리야는 ‘도망 길’에서, 그 ‘위기’ 중에 자신이 ‘홀로’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를 예언자로 부르셨던 하느님께서는 늘 그와 함께 하고 계셨다. 심신이 다 핍진하여 쓰러져 있던 그에게 “천사의 빵”을 내려 주시면서 당신께로 끌어 당기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음식’으로 엘리야는 ‘순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고 그의 인생의 새로운 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하는 오늘 복음도, 인생을 여러 위험이 뒤따르는 ‘순례’라고 볼 때에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떠나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순례에도 갖가지 어려움이 있다. 이 순례의 여정 중에 우리도 때로는 엘리야처럼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청할 만큼 지쳐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로 다가오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오늘 복음의 끝 구절). 성체성사에 관하여는 다음 주일 ‘복음생각’ 때에 묵상하겠다.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13.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일어나서 먹어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열왕 19,4~8 (엘리야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하느님 산에 이르렀다) 

제2독서 에페 4,30~5,2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복 음 요한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에서 성공과 승리를 만나기도 하지만 또한 실패와 좌절의 아픔 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슬픔이 클 때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 1독서에 나왔던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홀로 남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의 힘으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대결하여 멋지게 승리로 이끌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일장춘몽이요 승리 뒤에는 바알의 광신자였던 왕비 이세벨에게 쫓겨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렙산으로 도망칩니다.



인생은 허무했습니다. 기쁨이나 영광이라는 것도 물거품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야도 권력 앞에는 어쩔 수 없어 죽어라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너무도 허기에 지쳐서 도망칠 힘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하느님께 매달려 죽여 달라는 간청을 합니다.



적의 손에 붙잡혀 죽느니 하느님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서 엘리야에게 힘을 줍니다.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지쳐서 쓰러진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도움을 줍니다. 엘리야는 천사가 주는 과자와 물을 먹고 마시고 또 먹고 마셨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까지 무사히 도망칠 수가 있었습니다. 절망에서 다시 극적으로 구출되는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 절망이란 없습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그래서 만사를 다 포기하고 죽고 싶을 때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길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음식을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길에 그분이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몸을 먹기를 진정 원하십니다.



교회는 오늘도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계속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빵은 모세와 그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도 있었고 오늘 엘리야가 먹은 과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이요 표상이었지 생명의 빵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재천명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며 생명의 빵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빵입니다. 그분이 빵으로 오셨다는 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합니다. 사람이 어째서 빵이고 사람이 또 어떻게 사람을 먹어야 하는지를 세상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빵인 성체의 의미를 더 깊이 새겨서 간직해야 합니다.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눠주시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이는 내 몸이니 너희는 받아먹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눠 먹은 빵이 예수님의 몸이요 그것이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사 때마다 그 의식을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 먹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히 자격도 없고 더구나 하느님을 모실 만한 주제도 못 됩니다. 오히려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하느님은 밥이요 빵으로서 인류의 음식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으며 삶의 교훈이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아무도 밥이나 빵이 될 수 없습니다.



빵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수고 깨뜨려서 반죽으로 죽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밥이 된다는 것도, 뜨거운 물에 펄펄 끓여서 뜸을 들여야 하는 죽음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빵이 될 수 없으며 또한 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죽임으로써 빵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자기를 죽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쪽은 언제나 선한 사람들 쪽입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와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나 행위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는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신자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그리고 처참한 마음으로 감실 앞에 나갔을 때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밥입니다. 원하시는 대로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고 그 형제에 대해 오히려 고마운 마음도 생겼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생명의 빵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길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슬프고 눈물 흘릴 때 그분의 음식으로 생기를 얻고 힘을 얻도록 합시다. 주님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오셨으며 또한 그러한 길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14.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어머니의 기도

임영숙 요안나/대한매일 논설위원 실장



시골 친정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후 느지막이 출발한 데다 장대비가 쏟아져서 고속도로가 막힌 탓에 시골길에 접어들었을 때는 자정이 넘었습니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두 아이는 잠이 들었고 운전하는 남편의 옆자리에서 저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 어…’ 하며 당황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자동차가 뒤집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 이렇게 우리 모두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습니다. 남편이 자동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서 저를 흔들었고 뒷좌석에서 아이들이 침착하게 ꡒ엄마, 괜찮아요?ꡓ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두 살았구나 하는 기쁨도 잠시, 자동차 안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시골길 옆으로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자동차 안에서 익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가 새삼 밀려 왔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아들아이가 자동차 뒷문을 열었다고 소리쳤습니다.

  

뒷문으로 내리고 보니 자동차는 강물에 잠긴 것이 아니라 물이 약간 차있는 부드러운 논에 밑바닥을 하늘로 하고 앞부분이 처박힌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남편은 다리에 약간의 찰과상만 입었고, 저는 무릎 근처를 세 바늘 꿰매는 정도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빗길을 과속으로 달리다가 커브길에서 미처 핸들을 꺽지 못하고 길 아래로 몇 바퀴 굴러 떨어진 사고가 그 정도로 끝난 것은 어머니의 기도가 하느님께 닿았던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친정 집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는 저희를 기다리면서 저녁내내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어머니의 기도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신앙은 할아버지가 고부간의 갈등을 줄이는 방법으로 아내와 며느리에게 성당에 함께 나가도록 권유하면서 시작됐지만 참으로 단단하십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활절 전야미사에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제대 위에서 한복을 입고 춤추는 작은 천사들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물론 그 모습을 보았으리라고 믿은 저는 미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천사들이 한복을 입고 있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고 자초지종을 들은 후 제가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런 말을 다시는 입밖에 내지 말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학교 교육을 별달리 받지 못하신 분이지만 신비체험에 빠지는 비지성적인 신앙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칠순이 넘은 지금도 매일 새벽미사에 참석하시고 매일 밤 묵주기도를 올리십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나누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춘기의 건방진 마음에서 비롯된 오랜 냉담에서 저를 다시 성당으로 이끈 것도 어머니의 기도였고, 제 부족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주님이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저도 아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15.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생명의 빵



1. 복음이야기

오늘 복음은 하늘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밝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요셉의 아들로서 평범한 나자렛 사람인 예수가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며 수근거립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서로 수군거리지들 마시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누가 내게로 오면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정체를 밝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9,12), “나는 선한 목자입니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6)처럼 예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알리시는 계시(啓示)로 요한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시라는 것은 한마디로 그분은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이 생명을 신앙인들에게 베푸십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받드는 것을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적인 양식을 취함으로써 지상 생명을 유지해 가듯이 무릇 신앙인들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은 결코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이는 누구나 내게로 옵니다”(44, 45절).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작용하셔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셔야 우리는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생명의 원천이신 성부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그이말고 또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이만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46절).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신적인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적인 생명을 우리들에게 베푸십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신적인 생명을 부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적인 생명을 부여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영원한 생명을 끊임없이 이웃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16.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해야 그 생존이 유지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지상의 곡식과 과실수를 먼저 창조하신 것도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번성하게 하시려는 섭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깊으신 뜻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여 꽂피우게 함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신 생명도 귀하여 여기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그 굶주림의 해결에 우선적이셨습니다. 육신의 굶주림이 없어야 제 정신이 드는 인간이므로 음식을 들고 생기를 차려 당신을 알아보고 그 고마움에 감격하기를 바라는 하느님이십니다.



실제 음식이란 인간이 활동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적당량을 섭취해야 하느님의 본래 취지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 때문에 지나치게 사용할 위험이 있으며, 포식과 남용으로 오히려 인간의 건강을 해치고 생명의 위험까지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음식이 하느님께서 내리신 은혜임을 망각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은 인간 행복에 큰 역할을 하고 인간들끼리 아웅다웅하며 산해 진미를 포식하는 것보다 약간 부족한 듯하면서 적은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공존하는 길이며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행위가 됩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먹거리로 육신 생명은 한정적으로 보장되나 인간의 육신 생명은 현실적인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양식이 되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중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은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하신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한 예비 단계적인 예수님의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진정한 빵이 세상에 참 생명을 준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아무도 몰랐으며 제자들도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리시려고 인간에게 영원한 참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 몸을 음식으로 제공하시겠다는 심오한 그 뜻을 그 어느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손에 의해 양육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의 손을 거두시는 순간이 인간의 파멸이 되는 시점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멘.











17.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



 오늘 제2독서인 에페서소의 말씀은 윤리권고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간은 이론과 실천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의 제 2독서는 실천편에 속한 것으로 구체적인 삶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시는 죄에 물들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온갖 독설, 격정, 분노, 고함소리, 욕설 따위를 떨쳐 버리라고 사도 바오로는 강조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구체적 길잡이를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반복되는 용서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용기는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가장 큰 결단이며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을 닮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일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원수를 용서하신 분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닮도록 재촉하신 길잡이, 스승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은 계속하여 하늘의 빵, 생명의 빵, 구원의 빵인 예수께서 자신의 신원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예수의 신비는 바로 생명의 신비, 음식의 신비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생애와 구원사업을 한조각에 빵에 압축하시어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며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몸이다!” 빵과 음식이 곧 예수 자신, 아니 하느님 자신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복음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 때에는 빵을 드시고 ‘이 빵이 곧 나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 성체성사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선언에 앞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 자신의 신원을 설명하십니다. 만나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빵이 있다는 사실, 먹음으로 죽지 않을 빵이 있다는 것, 먹음으로 영원히 살 빵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십니다. 바로 자신이 생명의 빵, 영원한 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예수의 이 선언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고 또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모름지기 무엇이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신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엘리야에게 주신 그 빵을, 예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빵을 우리 모두에게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힘과 생기를 회복하여 당신이 계신 곳을 향해 여정을 계속하게 하소서. 아멘.











18.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당신 몸을 우리의 영원한 양식으로 주십니다. 바로 성체성사가 그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엄청난 신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여러 차례 우리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체성사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체의 정신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세상의 신비는 바로 성체성사 안에 모두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신자들의 삶의 시작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참 뜻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 바로 성찬의 길이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체의 참 뜻을 바로 알기 위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한 번 좇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인하여 탄생하셨다는 점입니다. 성체는 바로 말씀의 결실입니다. 조그마한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그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참 의미는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성모님의 믿음으로 비롯됐듯이 우리의 믿음 없이는 성체의 참 의미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는 수난과 배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셨습니다. 우리도 성찬의 참 정신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단에 전부 봉헌하는 정신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뭇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당신이 가셔야 할 길을 묵묵히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따라 자신을 내던지는 희생 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는 떼어 나뉘어 새롭게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떼어 나뉘심으로 해서 부활하십니다. 바로 새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모시고 세상에 파견됩니다.



성체를 모신 우리들은 가서 복음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성체를 모심으로 바로 그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쪼개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정신 없이는 성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통하여 우리 공동체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성체는 이렇게 떼어 나뉘고 다시 하나로 엮어지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체의 참 뜻은 예수님처럼 하늘의 영광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성체를 영하고 하느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성체의 정신을 반밖에 구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체가 세상을 향해 쪼개지고 그 쪼개어 나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나듯이 우리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인류 공동체를 하느님 안에 하나로 묶는 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체의 참 정신으로 살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보고 배워 성체 안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19.     연중 제19주일   요한 6, 41-51 (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



어떤 신자가 친구 따라 용한 점쟁이를 찾아간 모양입니다.

그 점쟁이가 신자인 자기를 딱 쳐다보더니만 당신은 여기 왜 왔느냐고 묻더랍니다. 저는 점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그냥 따라 왔다고 하니까 그 점쟁이 하는 말이 "당신은 여기 올 사람이 아니야 어서 가! 당신은 밀떡을 먹고 자란 사람이야"라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밥을 먹고 자랐는데 밀떡을 먹고 자랐다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엔 몰랐지만 나중에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밀떡이 바로 자기가 미사 때 받아 모시는 성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과거를 볼 줄 아는 점쟁이가 성체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자체가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빵은 음식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먹어대지만 아무리 먹어도 결국 인간은 죽습니다. 먹은 양만큼 먹는 날 수 만큼 우리는 사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썩어 없어질 빵은 결국 우리를 썩어 없어질 존재로, 흙에서 난 빵은 결국 흙에서 난 인간을 한 줌 흙으로 다시 되돌릴 뿐입니다. 인간이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땅에서 난 빵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빵,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빵을 먹어야 영원히 살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명의 빵을 유태 백성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 백성들은 인간의 빵으로만 알아듣고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귀한 선물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빵이 되어 오시는 이 신비는 믿음을 가진 사람,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우리와 하나됩니다.(그렇습니다.) 하나 되지 못할 때 (오바이트) 토해 냅니다. 음식이 우리와 하나 될 때 그 음식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인 활동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성체의 빵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분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죠) 내가 주님과 하나되어 육의 삶이 아니라 영의 삶,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음식으로 내어 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 죽음을 전제하죠. 음식이 내 안에 들어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그 음식은 죽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내어 놓고 죽을 수 있는 사람 - 내가 매일 하느님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삶, 죽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성체가 요구하는 삶입니다.



어떤 자매가 결혼한 지 6년만에 남편이 술집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다 가지고 떠나버렸습니다. 두 아들, 어린 것을 데리고 너무도 힘겹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 두 아들을 키워 대학까지 보냈고 재혼까지 마다하고 두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2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다른 사람을 통해 남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패인이 되어 어느 부랑아 수용소에 있다는 겁니다.

함께 살았던 여자는 남자가 돈 없고 병을 얻자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를 한 번 찾아가 보라는 어머니 말씀에 자녀들은 우리를 배신한 아버지를 절대 볼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그 어머니는 성당엘 갔습니다. 성체 앞에 앉으니 왠지 눈물이 났습니다.(미움, 원망, 고통, 한스러움이 교차됩니다.) 그 때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더랍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렇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 주라고...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십자가에  메달린 나를 바라 보라고...... 결국 자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는 남편을 받아들였고 얼마 살지는 못했지만 남편을 잘 간호하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성체는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먹음으로써 일치하고 세상에 나가서 죽은 삶, 먹히는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겁니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생명의 빵을 모시는 우리는, 성체가 요구하는 초자연적인 삶, 사랑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항상 기도 안에서 노력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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