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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모음
작성일 2006년 4월 22일 (토)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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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부활 제 2주일 강론모음 ”
 

부활 제 2주일


        14. 함세웅 신부(나)/25

        15. 김영국 신부(나)/27           16. 권이복 신부(나)/30

        17. 최종수 신부(나)/32           16. 김영진 신부(나)/33

        17. 강길웅 신부(나)/35           18. 최영철 신부(나)/37

        19. 과연 우리 하느님/38          20. 서울주보/38

        21. 박정미 수녀/40                 

14.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보지 않고 믿는 자’만이 참으로 사랑한다.

함세웅 신부


오늘은 부활 제 2주일로 70년대 전례 개정 전에는 부활 8부 주일, 또는 사백(卸白)주일이라 불렀습니다. 부활 8부 주일이란 오늘 복음에 실려 있는 바와 같이 주께서 안식일 다음날(주일) 부활하신 다음 여드레 뒤에 사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 다시 발현하신 것을 장엄하게 기념함을 뜻합니다. 즉 사도시대부터 이미 매주일 모여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기념한 전례 관습을 오늘 우리는 똑같이 매주일 미사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主日)이란 바로 주님의 날로 부활의 날, 주님을 체험한 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성체를 영하고, 그래서 만민 앞에 하느님을 기쁘게 증언하는 믿음의 날을 뜻합니다.


더 뜨거웠던 박해 때의 부활 감사제

유다인들과 관헌들이 위협하고 붙잡아갈 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모였던 초기교회 신앙인들의 열정, 300여 년간에 걸친 모진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신앙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도 지하묘소나 어느 한 곳에 모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했던 용기있는 감사제의 거행,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784년대부터 1880년대에 걸친 100년 이상의 군란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킨 선조들의 믿음, 오늘의 침묵의 교회에서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있다는 사실, 아니 오늘 이 땅 이 곳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이유로 핍박당하는 소외된 계층, 잊혀진 무리들의 외로운 모임은 모두 맥을 같이 하는 수난과 순교의 사건이며, 그것은 동시에 되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임을 우리는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꼭 보고야 믿겠다던 사도 토마스 앞에 예수께서 발현하셔서 그를 부끄럽게 하시며,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5장 첫머리에 열거된 산상수훈을 진복 8단, 곧 여덟 가지 행복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식은 바로 여덟을 모두 종합한 아홉 번째의 행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필연적으로 수난과 고난의 열매임을, 부활의 기쁨은 바로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메시지는 현실에 살고 있되, 현실을 초극하라는 메시지이자 초대이며 명령인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의 부활 메시지는 불신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서로의 사랑, 서로의 신의를 회복하고 약속에 충실하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부활이란 새로운 체험, 새로 태어난 그 기쁨을 현실의 삶 속에로 이행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이란 2000년이란 시간과 역사의 과정을 되올라가 사도들 중의 하나가 되어 구체적으로 예수를 체험하고, 예수의 말씀을 실제로 듣고, 예수를 만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영역을 무한히, 영원히 확장시킨 것입니다. 비록 예수 시대에 살지 않았어도, 예수와 함께 먹고 걷지 않았어도, 예수와 함께 살고 지낸 것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부활의 기쁜 소식,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은 고통과 죽음 속에서 꿈과 희망, 미래를 갖는 힘입니다.

오늘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면서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사도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박해 시대에 쫓겨 배반했던 무리가 또한 우리 자신이었음을, 한국 초기교회의 박해시에 주교와 사제와 신자들을 고발했던 그 무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실감하고 고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부활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70년대 유신시대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우리, 80년 광주의 형제 자매들이 무참히 살육되어 죽어갈 때 외면했던 우리, 아니 권력의 편에 서서 아부하고 부정과 불의를 국가안보, 사회안정이라는 허깨비 우상으로 정당화시켰던 그 불신과 배신을 청산하지 않는 한 부활은 결코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때문에 모이고 또 모이고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때 예수가 우리들 가운데, 역사 한가운데, 삶의 현장 한가운데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부활 신앙은 허구적이며 껍데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깨달아야 부활 신앙이 가능합니다.


예수는 그 시대의 가장 억울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조작된 여론에 의하여 국사범으로, 종교범으로, 정치범으로, 선동자로 몰린, 그래서 사형에 처해진 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약한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 그가 누구든 억울한 자, 굶주린 자, 약한 자, 쫓기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라면 그가 바로 또 다른 예수라는 사실, 여기에 바로 예수의 근본 교훈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나눔과 희생이 없는 믿음의 허구

오늘의 제 1독서는 사도 4,32-35의 말씀으로 사도 2,42-47의 말씀과 함께 초기교회 공동체를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표현 그대로 공동체, 공동 소유입니다. 기쁨과 슬픔도, 기도와 감사도, 사랑과 우정도, 재물과 음식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동체니, 부활이니, 믿음이니, 예수를 말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제 2독서인 요한 1서의 말씀은 예수의 생애를 고백을 통해 요약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믿음, 사랑, 계명 준수, 세례, 수난, 증언, 진리, 성령 등 그리스도교의 기본 명제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들입니다. 그것은 각기 독자적이면서도 언제나 확산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폐쇄적이며 안주적인 삶은 신앙의 삶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삶은 성장되며 부단히 변화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은 상승의 삶이며 이것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폐쇄적 안주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비복음적입니다. 개방적 신앙이 많아질 때 그 사회 공동체는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 복음은 예수의 두 발현 장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토마스의 불신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워하며 나는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토마스다’라고 고백하고 자인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눈에 보이는 것에,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 앞에서도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하며 수락할 수 있는 자세와 기도가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크리스찬은 죽음을 무릅쓴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에게 예수는 오늘, 더욱 가까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고 네가 세상을 함께 이긴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믿음과 신념, 부활의 의미 속에 용기 있게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소서. 아멘.






15.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예수님과 효주양

김영국 신부


“효주가 살아왔다.” 온 국민의 초조한 관심 속에 진행되던 한 어린이 유괴 사건이 극적으로 해결되었음을 알리는 어느 조간 신문의 기사 제목입니다.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부모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때문에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우리들의 얼굴에도 푸근한 미소를 가져다 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동안 신문에는 그 어린이 부모들의 눈물어린 호소가 기사화되어 실렸습니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그 유괴범들을 향해서 빨리 어린이를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냈습니다. 그 어린이의 친구들은 조회 시간에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대통령도 그 어린이를 살려서 돌려보내 주면 잘 보아주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제 사건이 극적으로 해결되고 어린이는 부모와 만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아이가 내 아이도 아니고 내 동생도 아닌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비극의 단면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는 죄악보다도 더 고약한 죄악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을 분열시키고, 생이별을 조장하는 그러한 죄악보다도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살인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별은 죽음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와 그 어머니의 생이별은 비록 며칠 동안이었기는 하지만 그 기간은 죽음의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어머니의 만남은 곧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것도 결국은 우리의 슬픈 삶의 과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소망을 마구 짓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이번 어린이 유괴 사건도 바로 그러한 예일 것입니다. 그 어린이의 마음은 아주 순박하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때묻지 않은 소망을 그대로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조그마한 자루 속에 갇혀 몇 날 몇 밤을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다른 어느 생각보다도 사랑하는 친구들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그 어린이는 부모 품에 안겼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또 다시 부모와 생이별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슬픈 것은 우리 모두 그러한 생이별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영원하기를 소망하는 우리 인간들의 사랑의 유대라는 것은 이처럼 너무나도 허술합니다. 같이 놀고 싶고 같이 살고 싶어하는 우리의 기대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고,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유대 속에 살고자 하는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을 배신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을 통해서 비극적인 이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소망을 배신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만남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근본적인 갈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영원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부활 이야기를 살펴보면 하나의 굵직한 선(線)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흩어졌던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갈 때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될 때에 제자들은 한 방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오늘 우리가 제 1독서에서 들었듯이 공동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문이 잠겨진 곳에 예수께서 들어오셨다고 하는 것은, 유령처럼 나타나셨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던 분이 눈으로 볼 수 있게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시던 예수께서 사라지셨다고 하는 것은 다시 보이지 않게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 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긴 시간을 같이 여행하면서도 그분이 예수이신지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했을 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도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지 못할 뿐입니다. 마태오 복음 마지막 구절은 복음서의 결론과도 같이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태 28,20)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함께 있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때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엠마누엘’이라는 별명을 붙여드리고 있습니다. 엠마누엘이란 풀어 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도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어서,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서울에는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도 계시고 서울에도 계십니다.


이천 년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이천 년 후에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열두 제자들을 한데 모으셨듯이 우리 모든 인간들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온 인류가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소망에 대해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고 싶어하는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는 채워 주십니다.


예수의 부활은 곧 우리 부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화를 조장하고 인간 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파괴하는 세상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오늘 둘째 독서의 말씀처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믿음뿐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뿐입니다(1요한 5,4-5).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 사랑으로 죄악을 쳐 이기고 보다 큰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못자국이 깊게 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내 두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그 사랑의 상처를 우리 마음에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창으로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남은 피와 물까지도 흘리신 그 사랑의 샘을 우리 마음에도 파야 할 것입니다.






16.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진정한 평화

권이복 신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내적 평화를 얻도록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구상에 직립 원인의 출현은 약 백만 년 전 신생대 제 4기 홍적세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인간 즉 Homo sapiens는 약 7만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인류의 역사는 너무도 다양했고 변화가 심했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언제나 서로 싸우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 시기는 한번도 없었으며, 고도의 지혜와 문화가 발달한 오늘날 역시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20세기의 오늘은 그 싸움은 극에 달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스스로 집단 무덤을 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현재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핵 폭탄을 동시에 터뜨린다면 이 지구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싸움뿐만 아니라, 민족과 민족, 인종과 인종, 당파와 당파 아니 더 나아가 개인과 개인의 싸움 역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 없어 민족끼리 분단된 채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민족은 망해도 나만은 잘 살아 보겠다고 17~18세의 가련한 소녀의 얼굴과 젖가슴 속에 똥물을 뿌리고 현 집정자들은 행여나 자기의 권력을 빼앗길까봐 양심적 인사들을 감옥에 집어 넣는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 그럼에도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우리, 도대체 인류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하여 그토록 바삐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발견하고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였으며, 음란한 주간지를 보급하려고 구텐베르그는 인쇄술을 발명하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론가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를 갈망하지만 실제로는 불안과 파괴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안락한 생활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더욱 더욱 헤어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과학자와 정치가들은 상실한 인간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무기를 자꾸만 생산하여 힘의 균형을 가져옴으로써 또 정치적 타협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몰살시킴으로써 평화로운 지상 낙원을 건설하려 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과연 힘의 균형과 풍요한 재산이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를 줄 수 있을런지요? 인간적인 이들의 조작이 평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레엄 그리인의 소설 「권력과 영광」의 끝 부분에 지상 낙원을 꿈꾸는 젊은 공산주의자와 죽음을 앞둔 젊은 사제와의 의미심장한 대화가 있습니다. 사제를 처형하기 위해 끌고 가는 도중 젊은 공산당원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제여 이제 머지 않아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모든 이가 공정하게 재산을 분배받아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지상 낙원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사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모든 이가 부자가 되어 물질의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게 됐다고 합시다. 그러나 못 생기고 인격이 형편없는 아내를 가진 남자가 미인이고 고상한 인격을 지닌 이웃집 부인을 취하고 싶은 욕망 마저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풍요한 물질과 거대한 힘의 균형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노력도 인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이기심과 당파심, 끝없는 욕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요한 20,20) 하며 평화를 주신 예수님은 원자폭탄이나 돈을 주시며 평화를 주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즉 평화는 무력과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룩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처럼 모든 의심을 버리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9) 하며 진정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칠 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 평화는 이상이 아닌 실제로 가능한 것이며 신앙인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무상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갈망합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걱정과 근심,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된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권력과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가능케 하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것으로 평화를 얻으려 함은 우리 자신을 더욱 더 불안과 공포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평화를 얻는 길은 단 한가지, 부활하신 예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17.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참다운 기적

최종수 신부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구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남자만 오 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 오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내면의 기적은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깨우쳐 주기에 충분합니다.

 성령 세미나 안수기도 시간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어떤 치유의 기적을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받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프랑스 루르드에는 매일 밤 수만 명이 참여하는 성모의 밤이 열립니다. 기적의 샘물에서 치유의 은사를 받기 위해 맨 앞줄에는 불치병에 걸린 수 백 명의 환자들이 침대에 누운 채 참여합니다. 그러나 불치병 환자 중 치유의 기적을 받은 사람은 1년 중에 몇 사람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기적이 있습니다.


치유의 기적을 받지 못했지만 신앙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의 확신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깨우쳐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토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 토마의 신앙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게 하는 신앙인지.......






18.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나)  토마 사도의 후예들 

김영진 신부


내가 사는 시골에도 많은 곳에 예배당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예배당에서 거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 봉고차다. 우리 성당에도 낡은 봉고차가 하나 있는데, 시골에선 이 봉고차가 하는 일이 여간 고맙지 않다. 주일학교 학생을 실어 나르는 일, 공소 사람들을 모으는 일, 단체 방문하는 일등, 본당의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에, 모든 교우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예배당 봉고차에는 많이 써 놓은 글씨가 하나 있다. 그것은 '믿음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을 믿는 자는 천국을 가나, 믿지 않는 이는 지옥을 간다는 뜻이다.


하필이면 저렇게 써 놓아야 되는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해 보았지만, 한편으론 ‘시골길 여기저기를 누비는 봉고차가, 바로 나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봉고차에 써 붙인 글씨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믿음이란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떠나,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단어다. 인간 대 인간, 부족 대 부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믿음만큼 영향을 끼친 단어는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도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인 믿음은 바로 희망이고 용기이며, 기쁨이고 생명이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절망감이 감돌고 열등의식 속에 사로잡히며 슬픔과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간 아버지가 “어휴, 시원해"하는 소리를 듣고, 첨벙 뛰어든 아들이 너무 뜨거워 튀어나오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듯, 믿는 놈이 바보라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믿음이 없는 개인과 가정, 회사와 집단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고통이 크고, 절망과 좌절 속에 묻혀 있겠는가. 믿음은, 삶을 생명력 있고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불신은 삶을 죽음과 파멸로 이끈다.


시골길 누비는 “봉고차 선교사"

톨스토이의 작품 '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는 두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쪽 집의 닭 한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다. 이쪽 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우리 집의 닭이 너의 집에 달걀을 낳았으니 가져오라"고 했고, 저쪽 집의 아이는 "찾아보아도 없다"고 했다.

결국 아이들끼리 “알이 있다, 없다"하고 싸우게 되었고, 이 싸움에 양쪽 집 엄마, 아빠도 자기 집 아이를 옹호하며 싸우게 되었다. 화가 난 이쪽 집의 아버지가 저쪽 집에 불을 지르니, 바람이 불어 이쪽 집도 타버렸다. 집을 날려 버린 두 가족은 잿더미에 올라앉아, 별을 보며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고 생각하고 반성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까? 달걀 하나 때문인가? 아니다. 달걀 하나 때문이 아니라, 양쪽 집 사이에 깊이 잠들어 있었던 불신이었다.


‘불신은 인간을 교만과 욕심, 그리고 파멸로 이끌 뿐이다'라는 것을 양쪽 집 가족들은 깨닫는다.

한때 서독의 수상이었던 콘라드 아데나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믿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세상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요, 예수가 아직도 무덤에 계신다면, 세상엔 가장 가냘픈 소망의 빛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빌리 그레함 목사에게 하였다 한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이며, 교육가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께 한번은 일본 신문기자가 찾아와 “선생님, 간디는 1백살을 살다 죽겠다고 하고, 또 누구는 몇 살까지 살다 죽을 것이라고 하는데, 선생께서는 몇 살을 살다 죽으실 것 같습니까?"하고 물으니 “이 사람아, 사람이 한번 나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라'고 대답했다 한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

아데나워 수상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희망이며 생명임을 믿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후에 취한 토마 사도의 불신앙적 태도는, 과학의 시대, 논리와 증거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눈으로 보아야 믿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야 믿겠다고 야무지게 말하던 토마 사도, 그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이 되고 있지는 않는가! 이에 대하여 “토마야,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있어 행복은 믿음으로 출발되는 것이며, 믿음이란 마음의 문제이지, 지식과 증거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신다.

  

복제인간을 들먹이며 쇠고기, 콩나물, 참기름, 양주 등 가짜가 판을 친지 오래된 세상에서, 토마의 이론을 거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만 보이는 믿음의 길을 한결같이 달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이는가? 그러나 마른 땅에서 샘이 솟고, 고목나무에서 햇순이 나오듯,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사건을 통하여 희망과 용기, 사랑과 생명을 주신다.

  

오늘도 시골길 구석구석을 열심히 달리는 선교사인 봉고차! '믿음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달고 쓰러진 영혼들을 찾아다니는 봉고차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주님, 보지 않고도 믿는 이가 되게 하소서"라고.






19.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믿음의 눈을 열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4,32-35 (한마음 한뜻) 

제2독서 Ⅰ요한 5,1-6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복 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 오셨다) 


세상에 믿음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다. 는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축복입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 사랑도 꽃피고 도덕도 열매를 맺는 것이지, 이 세상에 믿음 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아내를 늘 의심하며 삽니다. 아내는 아주 정숙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말할 때 자기는 의처증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별의별 것을 다 캐묻고 따지면서 아내를 달달 볶습니다. 신부가 중재를 해도 남편은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의심하는 사람이나 의심받는 사람이나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늘 교도소요 지옥입니다.


사람은 믿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믿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가 믿을 때 편안하며 믿지 못할 때 모든 것은 흔들리고 파괴됩니다. 더구나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속된 말로 하느님은 꼼짝을 못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실 때에도 믿음은 언제나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성서에 보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시는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믿음이 바로 최고의 약이며 그 자체로서 능력이었고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고 의심했을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엄한 심판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토마의 불신앙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하고 말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요 그런 말 자체가 허구요 기만이었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토마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토마의 불신앙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봐야만 이 믿음의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요 만져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그래야 한다면 신앙은 그 자리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한 순간에 다 무너집니다. 기도와 선행과 희생 등도 부활이 전제된 신앙 안에서만이 가능하지, 부활이 아니라면 믿음의 모든 것은 다 허사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지막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은 한마디로 새로운 삶입니다. 그 생명과 그 삶의 모습은 지금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금의 생명과 하나로 연결되면서도 존재의 모습은 다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요한 20,11~18 참조), 엠마오로 가던 길의 두 제자도(루가 24,13~35참조), 티베리아 호수에서의 일곱 제자들도(요한 21,1~14참조) 전혀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또 다른 모습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어제의 그들이지만 그러나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들입니다. 아주 지독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자주 성을 냈으며 어떤 때는 이해하기 힘든 상식 이하의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매사에 자기 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사람이 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살려 줬다며 늘 감사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토마가 믿지 못했을 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부활은 결코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안에서 믿음의 눈을 뜰 수만 있다면 그 세계가 부활입니다. 믿음은 우리 생애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따라서 믿으면 믿는 것만큼 행복하지만 믿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합니다.


그리고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을 새롭게 열어 부활의 삶을 은혜로이 살도록 합시다.






20.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삶의 변화로 부활을 살자

최영철 신부


토마사도와의 만남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온통 믿음으로 인한 기쁨과 그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모습과 그 믿음을 갖기 위한 믿음의 본질을 아주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특히 토마 사도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예수님의 극적인 발현과 믿음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말씀하시는 장면은 참으로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제2독서(1요한 5, 1-6)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세상을 이겨내는 힘이 됨을 말하면서, 그러한 믿음의 현실이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는, 서로가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제1독서(사도 4,32-35)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전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즉, 지난주일 부활대축일을 지내고 난 우리에게 그 부활의 현실적 모습은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의 변화이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에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그 부활은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은총일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가 믿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믿음으로써만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안으로 보아야만 하는 우리 인간의 생활방식에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것 요구하는 현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는 감각적인 차원 이상의 것임을 토마 사도와의 만남(요한 27, 27)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적인 방법만을 고집하는 물질주의적 생활양식에서 믿음이라는 정신적 생불양식으로 넘어 갈 수 있는 인간에게 전개되는 세계, 바로 그 세계가 예수님의 부활의 현실이고 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인간의 변화된 삶의 내용이 오늘 복음에서 제시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고 또한 얼마나 빠른 것을 요구하고 있는가, 오늘 내가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전개되고 있는 것이 온통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를 옭아매어 그것의 노예가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눈앞에 전개되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방식에 의한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대해 염려스럽게 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의 변화에 대해서 주저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지 않기 때문임을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다른 면에서 경고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그 분에 의해서만 우리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라는 메시지가 제2독서(I요한 5, 1-6)의 말씀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비판적인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내용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의 내용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안에 삶의 방식을 이제 우리는 물질적인 생활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믿음의 생활로의 방향전환이라면 우리는 조그마한 부분에서부터라도 시작해야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알아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한, 그래서 여태까지의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박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한 것임을 믿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21.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과연 우리 하느님


어떤 목사가 천국과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한참 하고 난 다음, 물었다. “이 다음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모두가 손을 들었다. 이어서 “오늘 저녁에 당장 가고 싶은 사람은?” 할 때 모두가 손을 내렸다 한다.


이것은 나이가 많아서 앓고 있는 할머니가 어서 하느님이 나를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뇌까리는데, 막상 죽으라고 하면 억울하다며 화를 내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오늘 당장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예수님은 힘도 능력도 있었지만, 더구나 한창 나이에 죽으신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우리 선조들도, 오래 살기보다는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오늘 당장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죽어갔다.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시다.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 빌라도 총독에게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요한 18,37) 하셨는데, 부활하리라는 말씀대로 부활하신 것이 거짓일까?

늘 하신 말씀이나 거동이 진리였고, 한번도 어기신 일이 없다면 부활은 왜 그렇지가 않다는 것일까?


사도 베드로는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1-42)라고 하였다.


부활이 확실했기에 제자들은 그 사실을 증언하였고, 그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사도 5,41), 목숨까지 내놓았던 것이다. 부활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가 아니라 바로 우리 “하느님”으로 알고 믿는 것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토마처럼 “의심을 버리고 믿어야 할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이 이 세상에 새 희망과 광명을, 삶의 의의를 주고, 우리에게는 재생과 영생의 보장을 갖다 주지 않는가? 한없이 기쁜 부활이여! 영원히 찬란한 부활이여!






22.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발현사화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다녀가신 후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동료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토마에게 알려주자, 그는 오히려 동료들을 비웃으며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한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여드레 뒤에 이번에는 토마까지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나타나셔서,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시오. 그리하여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야 토마는 예수님 앞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는 토마에게 “그대는 나를 보고야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요한 복음이 씌어진 당시 사람들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육으로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1세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께서 동정녀에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지도 않았다는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단사상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육적으로 부활하셨음을 토마 사도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의심 많은 토마” 이야기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무관심한 태도라는 가르침입니다. 흔히들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 덮어놓고 믿는 것, 따지지 말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토마처럼 따지고 또 따지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회의에 빠지고 또 빠지고 하면서 이룩된 신앙이야말로 더 값진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얻어진 결과보다 뼈를 깍는 아픔을 겪고서 얻어진 결과가 더 아름다운 것처럼, 신앙도 의심과 회의와 갈등을 겪고서 얻어질 때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태도라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이 주는 가장 귀중한 교훈은 부활이란 보는 사람들의 차지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차지요, 보고서 믿는 것도 좋지만 보지 않고서도 믿는 이들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23.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나)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박정미 카타리나 수녀


예수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히브 13,8).

금년 봄은 예년과 달리 애타게 비를 기다렸습니다. 황사 바람이 심했던 날, 태백선의 달리는 기차 밖은 바싹 마른 산야가 목말라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가문 날이 더해지는 동안 마당의 쑥이나 돗나물도 살이 오르지 않고, 잡초마저 더디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물 한번 흠뻑 마시지 못하였건만 차례차례 꽃망울을 터뜨리는 개나리, 진달래꽃들이 안쓰러웠습니다. 텃밭에 채소 씨를 뿌리고 이레 남짓 물을 주었더니 싹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수돗물로 밭을 적시기에는 산야의 목마름이 못내 안타깝습니다. 도시의 버려지는 물줄기는 흙에 스며들지도 못하고 하수도로 흘러가 버리는데, 가려져서 눈으로 보지도 못합니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하는 날 아침, 함흥과 삼척지방에서 타오르는 산불 줄기가 두 가닥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한반도의 위성 사진을 조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산불이 할퀴며 깎아버린 민둥산을 배경으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폐허가 된 집터를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에 절망의 눈물이 흘렀고, 타버린 볍씨를 걱정하는 아낙네의 호소가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 군부대 화약고에 불똥이 튈라, 원자력 발전소에 불길이 덮칠라 염려하는 신문 보도를 보며, ‘정치를 개혁하자 바꾸어보자 외치는 동안에, 우리는 또 안일한 자세로 깨어있지 못하였구나’ 하는 자괴심(自愧心)이 들었습니다.


유월에 남북 정상 회담이 있다는 보도가 있은 후로 기대와 쟁점에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위성으로 본 한반도의 모습은 손바닥만한데, 철들면서부터 숙명처럼 익혀온 갈라진 민족의 이야기와 분단의 현실을 우리는 반세기 넘게 십자가처럼 걸머져 왔습니다. 그 무게에 눌려 신음하다 쓰러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또 그 무게를 더 무겁게 한 이기적, 파당(派黨)적 다툼은 또 얼마나 허다했습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오늘, 묵은 상처와 옛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마음 자세로 새 걸음을 내딛으라고 초대하시는 듯합니다.

물, 불, 바람, 흙, 그 어느 것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소중히 아끼고 돌보라고 하십니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 산불 이재민이든,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이든, 북녘 동포이든 - 서로 부추기며 함께 걸으라고 하십니까. 총선거가 끝난 시점, 백성이 맡기는 정치의 힘을 겸허하게 씀으로써, 이기심을 극복하고 반목을 헐고 민족이 하나되는 새 역사를 엮으라고 하십니까.

세상을 이기신 주님,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한결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고, 사람이 사람임을 아는 지혜를 배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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