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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13
분 류 연중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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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 연중 제 6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6주일





         1. 정헌영 신부(가)/ 2                    2. 김현준 신부(가)/ 3

         3. 강길웅 신부(가)/ 4                    4. 김상규 신부(가)/ 6

         5. 김몽은 신부(가)/ 8                    6. 조순창 신부(가)/ 9

         7. 최인호 작가(가)/ 11                   8. 율법을 지키는 정신(가)/ 13



1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정헌영 신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기억 중 하나는 지키지 못하면서도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생활계획표를 짰던 일입니다. 특별히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데 열심히 그려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놓고서는, 그것 때문에 혼나기도 참 많이 혼났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방학이 되어도 아무도 계획표를 짜지 않기에 나도 슬며시 연필을 놓아버렸습니다. 그 이후 한 번도 그때처럼 열심히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여유가 있는 것이 좋다고 얼버무리며생활이 느슨해져갔습니다.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하루뿐 아니라 인생조차 계획없이 살아가는 자신이 보였습니다. 그때의 화끈거림은, 다른 친구들은 하지도 않는데 혼자서 열심히 생활계획표를 만들다가 문득 친구들을 바라보며 느낀 머쓱함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본 사람은 없어도 그 동안의 내 모습이 모두가 허영이요 위선이었다는 심한 자기 모멸감이었고, 또 누군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빈 허울뿐임을 알았을 때 예전과 같은 모습을 가질 수는 없었습니다. 나 자신을 지탱해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당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점점 초라해지고 작아졌습니다.

율법이 그랬습니다. 율법은 금지명령을 통해 사람    

들의 외적 생활을 틀에 박으려고 했던, 인간의 텅 빈 가슴에 호소하는 메아리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수히 그 틈새를 비집고 나가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더욱 촘촘히 철망을 짜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 율법의 완전한 틀을 만드십니다. 이 새로운 법은 이제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내면으로부터 하느님을 받아들여 새사람으로 태어나도록 이끌어줍니다.

살인까지 이르는 사람들의 행위들, 들키면 죄가 되고 들키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들, 가정생활의 문제들, 맹세를 시켜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회의 폭력성 등등. 이 모두가 외적인 규제로 없어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이미 사라졌어야 하는데,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만연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나라의 외적인 규모에만 만족하며 흥청대다가 오늘날의 어려움을 겪게 된 IMF의 교훈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과감히 나 자신이 껍데기뿐이었음을 고백하고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일훈일유, 십년상유유취’(一薰一蕕, 十年尙猶有臭: 향기로운 풀과 악취를 내는 풀을 같이 놓아두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악취만 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결심한 것을 내일 실천하려면 벌써 한걸음 처지고 맙니다.









2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큰바위 얼굴

                                                     김현준 신부 (nlEH 5, 17-37)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이 무엇일까? 지금 40~50대의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발음하기 어려운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뜰의 콩깍지 깐콩깍지일가 안 깐 콩깍지인가?" 이 말을 여러번 빠리빠리 해보자. 말이 되는가?

  

오늘 우리가 귀담아 듣는 복음말씀은 ‘예', ’아니오‘가 어려운 말이라고 알려준다.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이 일치하는 것이 어렵고, 말로써 거짓을 행치 않음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깨우쳐준다.



오늘 복음말씀도 지난 주일과 같이 ‘산상수훈'의 계속이다. 그리고 크게 두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 부분은 마태오 5,17-20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신다. “내가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뿐만 아니라 뒤따라오는 여섯 가지 계명의 결론을 내보이신다. “잘 들어라.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의로움에 있어 율벌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경우보다 더 여유가 없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즉 자기가 얼마만큼을 해야 남 앞에 허물없는 사람으로 보일지를 늘 헤아리고 계산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의로움에 있어 여유, 넘쳐흐름이 없다면 결코 하를 나라에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은 마태오 5,27-37로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새롭고 내면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신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거짓 맹세를 하지1 말라'는 계명을 가르침에 있어서 매번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반립(反立) -묵은 뜻을 새로운 뜻으로 대치하는 것- 의 형식을 취하면서, 이 모든 계명에 대한 외적 준수는 별 의미가 없으므로, 내면적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하신다. 말하자면 비록 외적으로 잘못하지 않았어도 내적으로 순수한 동기가 결여되었다면 그 자체가 문제라는, 내면화된 삶을 높이 평가하신다.        



말과 행동이 죈치된 삶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계명에서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겉과 속이, 말과 행동이 일치된 내면화된 삶을 강조하신다.

사람의 의사소통 가운데 가장 창조적이고 명시적인 것이 말이다. 그러나 말은 마치 칼과 같아서 잘 쓰면 이롭고 잘못 쓰면 해롭다, 우리 말에는 말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속담도 있고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속담도 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는 속담이 말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말이 씨 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것은 말을 잘못 쓰면 해로울 수 있기에 조심하라는 속담이다.

‘말은 꾸밀 탓으로 간다' ’말속에 말 들어 있다'는 속담은 말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보여주면서도, 사람이 말의 주인이라는 것과 말은 그 주인을 따른다는, 말하고 듣는 사람의 책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는 태고의 세상 이야기와 이스라엘 성조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그중 요셉 성조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쓰는 말이 어느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지의 예를 볼 수 있다. 요셉은 그의 형  르우벤의 ‘아니오' 덕분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거짓말 거부하는 세상



또한 요셉도 ‘아니오'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는 어려움도 겪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게 되고, 그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도 새롭게 시작된다. (창세 37-39)

그렇다. 사람이 쓰는 말 중 ‘예' ’아니오'가 가장 짧은 말이지만 제일 어려운 말이다.

러시아의 작가 솔제니친은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순박한 사람의 의용(義勇)은 거짓말을 거부하는 데 있다. 세상이 거짓말을 일삼고 거짓을 법으로 삼을망정, 나는 빼놓고 해라." 그는 그 연설문 마지막을 러시아의 한 격언으로 맺고 있다, “참말 한마디가 온 세상보다 무겁다. "

모든 사람이 원하고 또 동참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시대를 살찌울 수 있는 정신을 ‘시대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을 거부하는 것’을 오늘 우리 시대의 정신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큰바위 얼굴’ 이야기에서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가꾸고 다스리는 사람이 존경받는 우리 시대가되어야 한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여라.











3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집회 15,15~20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제2독서 Ⅰ고린 2,6~10 (천지창조 이전부터 지혜를 미리 마련하셨습니다)

복 음 마태 5,17~37 (옛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1독서의 저자는 기원 전 2세기의 '예수 벤 시락'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경험을 깊이 쌓았으며 또한 율법에 대한 연구와 묵상이 많았기 때문에 이 율법이야말로 당대의 최고 지혜인 희랍의 철학이나 다른 어느 사상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고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집회서를 썼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 이후로 계속해서 그리스 의 지배하에서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백성들은 실의에 빠졌으며 종교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활개치고 있었으며, 반대로 선하게 사는 자들은 기가 죽어 힘을 못 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벤 시락이 신앙을 통해서 용기와 힘을 백성들에게 불어넣어 줍니다. 즉, 유대인들이 고통받는 것은 하느님께 불충실했기 때문이니, 하느님께만 충실하면 기죽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존경하면 복과 은혜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벌받아 멸망할 것이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이요, 하느님의 법은 이 세상의 어떤 사상이 나 지혜보다도 월등하게 우수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 의 자부심은 대단하며 그들 나름대로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학자들은 율법을 더 연구하여 하느님 말씀의 내용 을 깊이 찾았으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로지 그 율법에 따라 충실하게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문제가 생깁니다.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수백 년 동안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며 실천하여 왔지만, 도대체 그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 줄을 몰랐습니다. 마치 내용물도 모르는 빈깡통만을 가지고 이것이 통조림이다 하는 것처럼 입만 요란하게 선전하여 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오히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판단했으며,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얹어 주고는 심지어는 하느님을 따라 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백 성들까지도 못 지키도록 얽어매 놓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순을 지적한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순과 위선을 신랄하게 공격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걸고넘어지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으며, 음식을 드시기 전에 손을 씻지도 않으셨고, 나병환자를 가까이 하셨으며, 그리고 율법에 저촉되는 여러 가 지 일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예수님의 그와 같은 행적은 율법을 무시하는 듯이 보였으며 또 율법을 없애러 온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나는 율법을 없애거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율법은 예수님 자신이시며, 또 모든 율법은 예수님 안에서만이 확실하게 밝혀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의 형식만 가지고 왈가왈부한 격이니, 말하자면 종교 자체도 요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했을 때, 꼭 칼로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남의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일진대, 중상과 비방으로써 이웃의 인격을 훼손할 수도 있으며, 욕설과 분노로써 이웃의 가슴에 칼을 꽂을 수도 있습니다. 비 단 말뿐으로 만이 아닙니다.



신자들 사이에도 보면, 누가 밉다고 서로 따돌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믿는 사람들인데, 좀 허물이 있어도 이해하면서 덮어 주고 도와 줘야 하는데 오히려 더 지독하게 외면하면서 배척합니다. 열심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 그럽니다. 그러니까 힘없는 상대방은 말라서 죽습니다 (?) 그처럼 남을 죽이고도 자기는 영성체를 떳떳하게 합니다.



오늘 여러 가지 비유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기 때문에 핵심을 외면하면 그 자체로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요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희생 제물로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며 율법의 핵심입니다.



우리도 율법을 위해서 죽읍시다. 율법을 빙자하여 남을 무시하거나 심판하지 말고, 율법을 넘어가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도록 합 시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4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김 상규 신부



율법의 핵심 사상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데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5,20)는 경고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에서 율법이라고 하면 구약 처음 다섯 권에 있는 모세의 법을 말합니다. 이 율법은 하느님의 뜻의 계시로서 과거에 주어진 유물로 본 것이 아니라, 현재 그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하느님의 지시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아무리 상세하여도 변화 불쌍한 삶을 전부 규정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율법을 구체적인 삶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그 율법의 해석이 필요하니, 그러한 일을 율법학자들이 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가령 안식일을 쉬라고 한 율법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쉬는 것이고, 어떤 것이 일에 속하는 지를 규명해야 했으며, 또는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배하라는 법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정결하며, 어떤 것이 부정한 지를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세칙이 날이 갈수록 얼마나 가중되었을 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칙들은 율법 자체와 똑같은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유대인은 다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엄격한 율법을 유대인 전체가 그 본 뜻대로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탈락자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저들을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소외해 버림으로써 이방인과 같이 취급해 버렸습니다. 저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스스로 민중에 대해서 구별된 자로 자처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켜 나갔습니다. 율법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며, 동시에 영원한 법칙이었습니다. 복음서 여기 저기에 예수님은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하는 날인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기적을 하시어 그들과의 논쟁하시는 장면(루가13,10-17),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서 음식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정결례 법을 무시하고 그냥 음식을 드시고는 시비를 걸어오는 그들에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힙니다”(마르 7,15)고 명쾌한 대답을 하신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소극적인 금령의 법입니다. 어떠한 것은 행할 수 있고, 어떠한 것은 행할 수 없다는 식의 법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복음을 외칩니다. 복음은 마음의 법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4)



복음은 적극적인 마음의 법입니다. 형식적인 거짓 평화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마음의 법인 것입니다. 이 평화는 자신을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된 자들에게만 복음입니다. 이젠 주님께서 외부적인 법 규정을 넘어서는 마음의 법을 주신 것입니다. “성내지 말라”(마태 5,21-26), “간음하지 말라”(마태 5,27-30), “이혼하지 말라”(마태 5,31-32), “맹세하지 말라”(마태 5,33-37)는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복음은 외부적인 법규정이 아닙니다.



외부적인 법규정을 넘어서는 마음의 법입니다. “간음하지 마라”(마태 5,27-30)는 정결의 법에서 예수님의 요구는 불순한 눈초리마저도 삼가야 된다는 마음의 법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서 가지신 태도는 율법의 파괴가 아닙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을 외면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율법에서의 해방이며 탈피입니다. 예수님은 경천애인을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을 공격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사상은 이젠 율법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말씀,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마태 5,18)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마르 12,33-34)에 요약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은 잊혀진 율법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5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옛 사람에게는 일러주었으나 나는 달리 말한다.

                                                              김 몽은 신부



오늘의 복음은 산상수훈의 계속으로서 구약의 율법에 비해 하느님 나라의 법의 완전성을 명시하신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신다. 율법은 영속(永續)되며,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더욱 탁월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에 대한 파괴자, 즉 폐하러 오신 것도 아니며, 또한 개혁하려는 혁명가도 아니다. 오직 그분의 사명은 구약율법의 불완전한 점을 완전케 하려는데 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맺으신 구약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파견하사 전인류와 맺으신 신약의 예비이며 그림자에 불과하다(로마 3,21; 10,4 참조). 실물이 나타나면 그림자를 쫓을 필요가 없다. 성숙한 어른은 어린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용품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확신에 찬 교훈으로써 전해진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18절)

그러나 크리스챤의 의덕(義德)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인들의 의덕보다 높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



즉 저들(율법학자 바리사이인)과 같은 자칭 의인들을 외부적인 행사나 예법을 준수함으로써 만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주로 내면적인 의로움에 중점을 두신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외모나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의해 판단하시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의 가치에 의해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옛 율법에 비해 새로운 법의 탁월성이 드러난다.

옛 율법은 불완전했다. 율법학자들은 그 불완전성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들은 율법정신을 강조한다는 명목으로, 쓸데없는 세밀한 규정까지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괴롭혔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힐난하셨다. “너희는 왜 너희의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는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 때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말만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는 바로 너희를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백성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양 가르친다.’”(마태 15,3-9)



예수께서 첫 번째 교훈으로서 살인과 분노에 대해 말씀하신다. 실제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증오와 악의를 가지고 부당하게 분노하는 자도, 하느님께서는 살인자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살인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간음에 대한 정확한 가르침이다. 여기에서도 실제적 간음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에 간음할 생각을 품었다면 이미 내적으로 간음한 것으로 판단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셋째로는 혼인의 불가해성을 역설하였고, 네 번째로는 헛맹서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진실된 인간에게는 “네”하고 말하면 그것으로서 천만금의 무게가 있는 것이지, 쓸데없이 맹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챤은 누구나 이와 같이 살아야 한다.











6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말씀과 봉사와 사회 참여로 교회가 탈바꿈

                                                             조 순창 신부



날씨가 풀려서 좋습니다. 여러 가지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환절기라서 질병도 많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사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수년간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의 대견해하는 마음과, 함께 배우고 뛰놀던 친구와 학교를 떠나는 서운함을 느끼는 때이면서, 뜻대로 다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있겠고, 또 보람과 추억과 더욱 큰 앞날의 꿈을 그려보는 때입니다.



현대는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중학교 의무 교육뿐만이 아니라, 조기 유아 교육과 평생 교육을 요구하고 있는 때입니다. 또 놀랍게 발전하는 현실에 편리한 것도 많습니다만, 위험도 따르고, 또 그 발전에 뒤지지 않고 누리기 위해서는,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배워야 하는 고달픈 인생이 됐으며, 늘 배워야 하는 만년 학생이란 말이 실감나게 합니다.



이런 일은 신앙 생활에도 변화를 주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조직과 권위와 성사와 계율 중시의 교회 생활에서, 말씀과 봉사와 사회 참여의 교회로 변모하면서, 편중되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교육과 연수, 기도회, 활동 등으로 더욱 바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에서 “유럽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권위 있게 가르치시면서, 율법에 구애되는 일 없이, 고통받는 이 편에서 진리와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때에 손을 씻지 않으시거나,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고, 끝내 법을 어긴 죄인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율법의 중심은 하느님의 뜻이며, 이것이 십계명과 예언과 구약 성경으로 계시 전승되었으나, 거기에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지나치게 토를 달아서, 인간생활을 필요 이상으로 규제해 왔고, 바리사이인과 율법학자들은, 이 규율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들의 생사와 운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빛으로서 태양과 같이 떠오르시면서, 새 시나이산의 가르침이신 ‘산상 설교’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헌장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약의 새 시대에는 “이제까지의 구 지도자의 말이나 생활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 중에서 네 가지만 추려 봅시다.

첫째,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고 신성한 것이어서, 천주 10계 중의 제5계와 같이 살인은 죄악이로되, 살인자는 모두 ‘그 피의 보복하라’는 창세기 21장 등의 살인에 대한 법령으로 사형이 남용되던 시대에,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에게 바보, 미친놈이라고 함이 중죄악이다.”고 단언하셨습니다.



분노와 모욕과 미움은 죄를 낳고, 살의를 품고 한이 맺히면 하느님과 형제 앞에 떳떳지 못하니,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참용서와 사랑에 행복이 있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정조를 지키고 존중하여야 하기에, 천주 10계 중의 제 6계에서 간음이 죄악이로되, 처녀를 범한 자에 대한 법령이 있었으나, 노복을 거느리던 시절에 일부다처(一夫多妻)가 묵인되던 때요, 여자를 재산으로 여기던 때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대에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마음의 간음이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악행의 뜻이 마음에 도사릴 때에 그것이 죄악이며, 눈을 빼거나 손을 끊을 만큼의 ‘결단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남녀 교제는 늘 예의와 존중과 절도가 있어야 하며, 그래야 몸과 마음이 평화와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남자에게만 말하였으나, 뒤집어서 여성들에게도 생각을 해 볼 만한 일입니다.



셋째, “이혼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태초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지만, 남자 우위시대(優位(時代)에 이혼을 하려면, 남편이 이혼 이유를 쓴 증서를 여인에게 줌으로써 이혼이 성립되었으나, 예수님은 “이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하느님 안배로 신앙을 가지고 혼인한 계약은 더욱 신성한 것이며, 진정한 가정을 토대로 사회가 안정되는 만큼,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사랑과 존경과 부부애로 좋은 가정을 이루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넷째,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너무나 거짓이 많고 속이기 일쑤였기 때문에, 가지 말을 곧이듣게 하려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맹세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맹세하지 말고 진실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말과 마음에 ‘진실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 약속이나 사회의 공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불신 사회가 되고, 앞날 없는 불행한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오고, 음심은 욕정의 격랑으로 무절제의 패가 망신을 불러옵니다. 기분대로 만나고 헤어지는 부부관은 가정과 사회의 파탄을 몰고 옵니다. 맹세는 거짓이 가득한 속에, 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가져오는 불신 사회가 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합시다.











7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예’와 ‘아니오’

최인호 작가



구약성서를 보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수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인 ‘요나’는 매우 특이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아니오” 하고 거절한 후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는 다르싯(스페인)으로 도망치려고 배까지 탔는데 바다 위에서 태풍을 만나 그 배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제물로 바쳐집니다. 그는 큰 물고기에게 삼켜져 사흘 밤낮을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후 ‘니느웨’라는 도시로 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주님은 이 요나의 기적을 의미 깊게 받아들이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여달라”고 얘기하자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마태 12,39)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시고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낸 것처럼 자신도 땅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게 될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주님은 요나의 기적 속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전조(前兆)를 발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요나가 “아니오” 하고 거절했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대답함으로써 전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가져온 또다른 한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인데도 천사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전갈을 받자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선뜻 “예”라는 대답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어느것도 우리가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요나처럼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든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톨릭사상 가장 뛰어난 영성가의 한 사람인 십자가의 성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날아오르는 유일한 길은 ‘예’와 ‘아니오’의 대답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아니오’라는 대답으로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자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응(應)하면서가 아니라 부정하면서 거룩한 잠심(潛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無)의 세계에 이르게 되며 그 정도에 따라 ‘예’라는 대답을 통해 하느님은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는 두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는 하느님의 목소리와 우리를 유혹하는 세속의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잠들어있는 베드로”(마태 26,41)처럼 세속의 유혹에는 본능적으로 ‘예’ 하면서 정작 ‘예’ 하고 대답해야 할 하느님에게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게으름에 빠져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께서 항상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고 말씀하셨듯 저에게 들을 귀를 열어주시어 ‘예’ 할 곳에 ‘예’ 하고 ‘아니오’ 할 곳에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는 그런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8           연중 제6주일   마태 5,17-37 (가) 율법을 지키는 정신



우리에겐 형식이 너무 많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이는 유교의 영향 매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혼상제의 세세한 규칙들을 다 지키자면, 먹고 그것만 연구해도 모자랄 뽄이다. 사실 제사 때 어떤 음식을 어디에, 왜 진설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냥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이름 아래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들어와서 불교의 오랜 전통을 밀어내는데는 이성계의 계획된 정치철학이 한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무력으로 전권을 잡은 그는 국민의정신마저도 철저히 사로잡는 게 소원이었다. 그래야 명실 상부한 대왕의 자리에서 만복을 오래 누릴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를 위해 국민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불교의 여러가지 행사들을 금지시키고, 대신 유교의 관혼상제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겉 같다. 국민들은 관혼상제의 세세한 부분을 숙지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나라에 대한 불평이나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이성계는 조선시대의 서막을 얄미울 정도로 약삭빠르게 혜쳐나갔다. 이렇게 해서 형식문화는 우리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지기 시작하몄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이나 체면을 많이 따지고,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형식 배제



근대에 와서 형식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뿌리가 깊기에 쉽지 않아 보인다. 교회내에서도 이런 움이임이 있다. 미국의 경우 사제가 수단을 입는다든지, 수도자가 수도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수단이나 수도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당연시한다. 어떤 분들은 수도복을 벗으면 수도자로서의 신원이 절단나는 것처럼 형식을 중요시하고 있다.



사랑만이 살 길이다

형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알맹이가 중요하다. 정신이 중요하다. 근본이 중요하다. 형식을 갖추었으나 그 내용이 빈약하면 아무짝에도 쏠모가 없다. 신자도 형식적으로는 세례받고, 견진받고, 레지오 활동을 하고‥‥이렇게 근사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인가?



하느님깨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다. 이것이 율벌의 근원이 되었다. 율법의 근본은 사랑이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십계명을 가지고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시키기가 어려워 그들 나름대로 613개의 세칙서을 만들었다,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켰으나, 이것만 가지고도 모자라서 탈무드를 만들었다. 이는 책으로 여러 권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민중은 감히 율벌의 세칙까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전문가들이나 아는 것, 그들의 일이었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가끔 유다인들의 율법 세칙을 위반하셨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일을 하지말아야 함에도 병자틀 낫게 하셨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옹호하신 말씀도 그러한 맥락이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에 분개하고 예수님을 율법반대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신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쏨하신다.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그것만이 아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벌을 잘 지킨다고 하는데, 그들보다 더 옳게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마는, 나는 인간을 말로 괴롭히는 것까지도 금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간음하지 말라고 강조하나, 나는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금한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은 상대방을 이미 괴롭히는 것이다. 자꾸 쳐다봄으로써, 혹은 나쁜 기를 보냄으로써 괴롭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흔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여자들은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자를 여러가지 이유를 달아서 내보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혼을 금하신다.



예수님의 생각은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도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성직자도 수도자도 신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신자들이 성직자나 수도자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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