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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1월 31일 (목) 23:08
분 류 연중2-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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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연중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연중 제5주일

         10. 김영진 신부(나)/ 17

         11. 강길웅 신부(나)/ 19                  12. 이규철 신부(나)/ 21

         13. 안봉환 신부(나)/ 23                  14. 조순창 신부(나)/ 24

         15. 교구 주보(나)/ 26                    16. 교구 주보(나)/ 27

         17. 교구 주보(나)/ 28                    18. 민병숙 작가(나)/ 29



10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선교는 사랑이다      

                                                           김영진 신부



나는 6떤 전, 적도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에콰도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과야킬이라는 농촌 교구가 있었는데, 그 교구에는 한국의 마산교구에 소속되어 있는 친구 신부가 에콰도르 현지인 사목을 위해 파견되어 있었다. 나는 가난하고 무더운 나라에서 고생하는 친구에게 무엇을 가져갈까 궁리하던 끝에, 약간의 돈 몇 푼과 깡통에 들어있는 뉴욕곰탕, 마른반찬, 초콜릿, 비타민, 라면 등을 여행용 가방 두개 정도에, 가득 넣어 가져갔다.



마이애미에서 갈아탄 비행기가 에콰도르에 도착한 저녁 하늘의 석양이 나를 황홀하게 하여, 시를 쓴답시고 수첩에 낙서를 하였다. 흥분과 찬란함을 주는 아름다움도 잠간뿐, 비행기에서 내리니 끈적대는 무더위와 30여명이 덤벼들어 가방 수색을 한시간이나 해대는 경찰들을 대하며, 친구의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중 나온 친구 신부가 들여보냈다는 한 보안부대원의 도움으로 공항을 나온 나는, 시골길을 달리며 선교사의 삶을 정열적으로 살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에 한없는 존경심과 더불어 부끄러움도 가졌다,

  

다음날부터 나는 이곳저곳 방문도 하고, 신자들 가정방문도 해보았다. 뜻밖에도 나는 그곳에서 선교의 불꽃을 피우는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루는 평신도 여자 선교사와 함께 방문을 나서게 되었다.

그분은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통하여 번 돈을 저축하였고, 그 돈을 선교자금으로 쓰고 있다고 했으며, 헝겊으로 된 가방에 비타민과 초콜릿을 담아가지고 나갔다. 병든 노인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물파스도 발라주고 비타민과 초콜릿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포옹도 하고, 노래도 하고, 그들이 주는 음식을 불결하다는 의식 없이 집어먹곤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안에서 밥도 해먹고, 닭도 키우고 있었으며, 원두막처럼 생긴 집 밑에서는 돼지와 개들이 어울려서 살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더럽고 지저분한 이들을 자연스럽게 안아주고 웃어주는 여자 선교사의 행동은 마치 천사를 보는 모습과도 같았다.                

“에콰도르에서 만난 천사”



선교사들을 보기 위하여, 몇 푼의 돈과 음식과 약품만을 가져와서 의기양양해 했던 나 자신에 비하면,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는 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속 가득히 진실 된 사랑을 담고 다니는 선교사가 천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천사이겠는가?

선교사는 사랑을 살고, 사랑을 전하며,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친 자라는 것, 사랑이 없는 선교사는 시들어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 이는 적도의 땅 에콰도르에서 자신을 불사르는 여자 선교사가 내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중국에 선교의 문을 열었던 허드슨 테일러가, 어느 날 중국으로 선교를 희망하는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선교사로 중국에 가려고 합니까?" 이 말에 어떤 청년이 일어나더니, “중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 지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청년은 “선교만이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는 “저는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기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대답을 다 듣던 허드슨 테일러는 “여러분의 대답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대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한 대답들은 여러분들이 삶의 역경과 선교의 어려움에 크게 부딪히면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이 대답을 듣자 그 중에 한 지망생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선교사께서는 무슨 동기로 중국에 가셨습니까?" 이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중국에 선교사로 가게 된 동기는, 오직 하나 그들을 사랑해서 입니다"라고‥‥그렇다! 사랑만이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에콰도르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는, 그들을 사랑하기에 선교사로서 그곳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발길을 향하며,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열광적으로 부수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다.



사도바오로가 “하느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앙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열정적 선교 의지를 보이신 것도, 오직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선교 사명



한 사람의 영혼을, 온 우주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선교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자신도 정열적인 선교사이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모든 이를 내 제자로 삼으라"하시며, 모든 이가 선교사가 되기를 명하셨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선교의 사명을 그리스도에게서 받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타교파 신자들에 비해, 선교에 대한 열망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사실 나 자신이 신부이면서도 개신교 목사에 비해 선교 의지가 얼마나 더 뛰어난가 하는데는, 부끄럽게도 자신이 없다.



선교에 대한 열망이 약하고 소극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열망이 그만큼 약하고 소극적이라는 계산이 아닐까.

  

시골 사는 덕택에 대중 목욕탕을 가면 “신부님, 안녕하세요?"하며 인사하는 이들이 많아, 목욕탕엘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었는데, 요즘엔 생각을 적극적으로 바꾸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냉담자와 악수하며 회개를 권고하고, 신자에겐 쑥스럽지만 다정하게 인사하고, 외교인들에겐 나도 당신처럼 같은 인간임을 보여주며, 신앙에 대한 대화의 물꼬를 열어본다.



또 친절하게 지내는 기관장이나 지역 일꾼들에게 신앙을 권유하며, 초대의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사랑이 훈련이요, 습관이며 노력이듯이, 선교도 훈련이요 습관이며 ,노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선교에 대하여 나약하고 소극적이던 생각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만들려고 애를 써보는 것 또한 나의 의지이다.











11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병마를 쫓아 내시는 예수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욥 7,1~4.6~7 (나는 고통스러워 밤이 새도록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제2독서 Ⅰ고린 9,16~19.22~23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복 음 마르 1,29~39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부귀와 건강은 하느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질병은 하느님의 징벌이었습니다. 따라서 병에 걸린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그 자체의 고통보다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1독서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스런 허망한 현실에 대해 인생을 슬프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재산도 많았고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잃고는 알거지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욥 자신이 나병에 걸려 잿더미 위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욥에게 있어 인생은 실로 고역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도 병은 무섭습니다. 암이나 에이즈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감기에 이르기까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하는 분야는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일단 병에 걸렸다 하면 육체적인 고 통은 물론 정신적인 고통도 뒤따르게 되며 또한 사회적, 경제적, 그 리고 시간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옛말에 '우환이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환이 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당신을 찾아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한 마귀들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병이 낫고 마귀가 쫓겨난다는 것은 메시아가 보여 주는 하나의 징표로서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열 광을 하게 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 때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병이 들었다 하는 것은 마귀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훼방을 놓고 장난을 친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마귀 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단지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 면 마귀의 모든 세력이 꺾여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생의 새 지평선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육 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 혹은 자기 죄로 인해서 지옥에 갇혔던 인생들에 이르기까지도 예수님은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떤 형제가 간질병을 남모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병으로 인해서 그 인생이 점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우울증으로 비관하면 서 고통을 겪다가 나중엔 과격한 행동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어 주위의 사람들을 자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나 병에 마음이 묶여진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앙을 통해 서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새 인생을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형제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자신만이 몹쓸 병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고 세상이 저주스러웠으나 예수님의 고난과 성모님의 통고를 알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진실로 사랑해 주시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자 그는 실로 축복받는 인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현대에도 치유의 기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인생은 절대로 고역이 아닙니다. 불행의 대명사였던 고통은 이제 더 이상 불행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징검다리로 서 그 자체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그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고통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며 죽음의 세계에까지 들어가셨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도 새 세상을 여는 관문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의 부활로써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새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질병뿐만 이 아닙니다.



마음이 병들고 생활이 부패된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악습에서 여전히 뉘우칠 줄을 모르고 헛되게 살아가는 가련한 인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 모 든 것을 용서받고 치유받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들을 애정으로 항상 찾아 나서십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것이 그분 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병자나 죄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들입 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도 당신을 찾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으며 또한 치유되지 못할 병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은 그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께 나가도록 합시다. 슬프고 괴로울 때 그분 앞에 나아가 진실을 말씀드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놀라운 은총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12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신부님 이 본당에서 지내시기 어떻습니까?

                                                           이규철 신부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그때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다니다가 만나서,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근방다음 동네에로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1,35-38)



“신부님! 이 본당은 지내시기에 어떠십니까? 할 만 하십니까?” 새 본당으로 부임한 후 몇 년 전에 있었던 본당에서 인사차 찾아오는 교우들의 한결같은 인사에, 무슨 말로 어떤 대답을 해야하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 그때가 좋았었습니다. 정말 신부생활 보람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목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주님께서 다섯 분과 함께‥‥ ” 첫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1975년 4월 15일)다음날 새벽미사를 봉헌하기 위하여 고백소에서 나와 옷장에 걸려 있는 제의를 하나 하나 순서대로 꺼내 입고 제단에 나갔을 때,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사에 나오신 분은.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회장님과 어린이 한 명이고, 할아버지 회장님댁 강아지 한 마리‥‥순간 도시 본당에서 새벽미사를 봉헌하던 때, 수녀님을 비롯해서 오십여 교우들과 미사를 봉헌하던 내가, 지금은「주님께서 다섯 분과 함께」하고 있지를 않는가? 「사제생활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면서 첫 본당 주임신부로서의 사목생활을 시작하며,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부지런히 바쁘게 살았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공소 순회미사와 예비자 교리(1975년 당시 수녀님이나 전교사가 있는 농촌본당은 거의 없었음)를 하고, 농촌 본당이기에 매일 새벽미사를 「다섯 분과 함께! 열 분과 함께! 삼십 분과 함께!‥‥」 봉헌한 후 아침식사는 늘 사제관에서 하지 않고, 예비자나 냉담교우를 찾아가, 본의아니게「사발 농사」를 지으며 친분을 맺는 일부터 시작했었습니다.

  

농촌 본당의 열악한 살림을 보태기 위하여, 오전에는 성당마당 한구석에 (농촌 본당이기에 마당은 컸었음: 약 삼 천평) 느타리 버섯을 키우고, 오후에는 점심을 얻어먹을 겸, 교우들의 논과 밭을 찾아다니며 서투른 솜씨로 모내기, 피사리, 벼 베기, 고추밭, 배추밭 솎아주기와 풀 뽑기를 비롯하여 담배 잎, 뽕잎 따기를 하며, 교우들과 하루 해를 보내고, 저녁이면 또 공소에 나가 자정이 넘어서 구리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성당으로 돌아오는 첫 본당신부의 사목생활은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누가 시켰다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늘 피곤하고 졸립고 정신 없이 바쁜 생활이지만,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주시던 예수님을 본 받고자, 동분서주하시던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하여 찾아다니는 사목생활이, 바쁘고 피곤한가운데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낙으로 삼았었습니다.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입술은 부르트고, 첫 본당주임신부 일년 6개월을 마치고 다른 소임지로 떠날 때 몸무게는 8kg이상 줄었고, 순수한 마음이기도 했지만 본당을 떠나던 날은 눈물이 앞을 가려 퉁퉁 부은 눈으로 새 부임지에 도착하여「울보신부」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열정을 다 바쳤는데, 있는 정성을 다하였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근방 다음동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마르 1,38)하시며, 정 붙이고 일 할만한 때에 새 부임지로 옮겨 놓으셨습니다.「신부님! 이 본당은 지내시기에 어떠십니까?」 이 말속에는 전에 있던 본당 보다 생활하기에 낫다?‥‥ 아니면 여러 면으로 불편하다고? 어떤 대답이 나오기를 바라는 말인지 늘 조심스럽게 대답을 흐리곤 하였습니다. .

  

새로 부임한 본당생활이 더 낫다고 하면 서운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벌써 다 잊으셨습니까? 성심성의껏 도와 드렸는데‥‥여기까지 찾아 왔는데‥‥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지난날의 모든 기억은 가슴에 오래 남는 일이기에, 좋았던 일은 두 배로, 덜 좋았던 일은 반으로, 삼분의 일 만큼도 못 느끼는 일이기도 합니다만‥‥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그런 분위기에 취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밤새 찾아 다녔습니다. 무르익은 이곳에서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 동네에로 가자」하시며 당신은 갈릴래아와 모든 지방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할 사명이 최우선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선포! 예수님의 말구유 탄생으로부터 골고타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이 복음선포였음을 늘 마음에 새기며, 때로는 나를, 우리를 환영하고 최대한 협력하는 사람과 그런 여건에서 오래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본성을 극복하여 그분께서 원하시는 곳, 원하시는 일이라면 서슴치 말고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를 가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복음의 선포자」임을 인식하도록 원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이기에 지난날의 추억이 아름답고, 그 추억 속에 오래 머물렀으면 합니다만 주님께서는「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루가 9,62참조) 당신이 부르시는 곳, 원하시는 곳으로 미련 없이 떠날 것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나의 증인이 되라」(사도 17)고. 우리를 다음 동네로 보내시고 계십니다. 「뒤돌아보지 말라」고 어서 떠나라고 하시면서 ‥‥











13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빛과 소금의 삶

                                                안봉환 신부



사람의 혀는 여러 음식물에 다양하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음식 맛이 짜다. 달다. 시다. 맵다 등등. 작년 12월 초 익산 노동자의 집에서 일이다.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을 준비하기 위한 김장을 하였다.

현장에 서 목격한 사실은 소금물에 절인 배추에 준비된 여러 양념재료를 섞어 만든 김치를 겨우내 보관하기 위해 장독에 넣을 때 소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대중 음식점의 식탁 위에 소금은 그야말로 기본이다.



소금은 모든 음 식물의 맛을 내주며, 썩지 않게 해준다. 소금을 사용하지 않는 음식이 없다. 음식물에 맛을 내기 위해 화학 조 미료를 쓰는 세상이지만 소금은 사람들이 섭취해야 하는 모든 음식물에 배제될 수 없는 양념 재료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소금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고 결국은 밖에 내버려져 짓밟히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두 눈을 감고 있으면 어느 것도 볼 수 없다. 한 치도 앞을 분간하기 힘든 어둔 밤. 답답하고 빛이 그립다. 바라볼 때는 흔한 물인데도 수영할 때면 물 속에서 호흡이 그리운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모 든 사물은 태양의 빛과 열을 필요로 한다.

한 조각의 빛은 짙은 어둠을 몰아내고 멀리까지 그 빛을 전달하며, 모든 사물을 비추어 주고 빛을 그리워하는 사물을 빛나게 해 준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제자들의 소명과 역할을 소금과 빛의 표상을 통해 알려 주신 다. 제자들의 삶은 바로 소금과 빛의 삶이다. 그 삶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 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도록 세상을 비추는 착한 행실을 통해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말한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서도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눈에 교회가, 사람 사는 세 상이 답답하고 실망스러울 때가 있어도 됫박으로 빛을 덮지 않는 슬기로움과 인내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삶 을 살려고 노력했는지 잠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14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재산 많아도, 하느님 모르면 불행.

                                                           조순창 신부



하느님 은혜로 만난 교우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2월 첫주일인 오늘, 갖가지 사연과 걱정과 소망을 가지고, 여기 믿음으로써 나오신 여러분께, 온갖 시련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시고 하느님 은혜로 알찬 결심을 얻는 한 주일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하느님 말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한겨울에 봄을 기다리듯이, 죽음에서 새생명으로 부활하는 신비를 믿으며,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집념을 가지게 하는 희망이 주제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구약의 욥 성인이 애처로운 넋두리로 “해질 때까지 괴로움에 시달리고, 또 이어서 밤이 새도록 고통으로 뒤척거린다.”는 하소연 끝에, 우리는 우리를 고쳐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층계송에서 “야훼님 찬양하라. 부서진 마음들을 낫게 하시고, 그 상처 동여매어 주시는도다.”고 찬미하게 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우리가 받은 복음의 축복을 ‘모두 함께 누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자각으로, 복음을 전할 사도적 사명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낫게 하시고, 온갖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어,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게 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인간 고뇌’라면, 실패의 쓰라림이나 뼈저린 고통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린 경험을 가진 우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산넘어 산, 끊임없는 시련의 도전 앞에 고통하고 ‘고통으로 성장한다’면, 고통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구약에서 큰 시련을 이긴 대표적 인물로서 욥 성인이 겪은 시련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통으로 깨달은 경지에는 시련이 클수록 높은 경지의 은혜롭기까지한 한 ‘깨우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남 3녀 남매를 두고, 수천 마리의 가축을 기르는 부자 욥 성

인은 인품 또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모르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탓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웃 부족이 달려들어, 가축을 모두 박탈해 가고, 일꾼들을 쳐죽이고, 모진 바람에 집마저 무너져 자녀들이 모두 깔려 죽고, 끝내는 몸도 병들어, 성한 데 없이 헐어, 알거지 홀아비에 병도 깊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알몸으로 돌아갈 인생이요,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셨고, 이제 나쁜 것을 주시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잘도 참아 견디었지만, 오랜 시련 끝에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한탄하며, ‘나 이제 아무 의지 없이 살아갈 길이 아득하다’고 절망합니다.



이는 잠언의 교훈인 ‘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잘 되고 악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못된다’는 주장이나, ‘고생은 죄의 대가’라는 믿음에 대한 도전입니다. 욥 성인은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것’이라고 부르짖습니다만, 어느날 세 친구의 충고도 아랑곳 않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위안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주의 신비를 모르듯이 인간 고뇌의 의미도 모두 헤아릴 수 없으나, 하느님께서는 시련중에도 아주 버리시지 않고, ‘관심을 가지시고 계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뼈아픈 고통의 체험에서 “나의 구원과 살아 계신 주를 믿노라!”(욥:19/25)는 신념을 얻고, 원망․좌절에서 회개하여, 전보다 2배의 하느님 축복을 받게됩니다.



그 누가 인류의 적은 질병과 기근과 전쟁이라 하였는데, 건강이 복이로되, 건강해도 마음이 병들면 불행이요, 재산이 많아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잠시의 행운일 뿐이며, 하느님을 믿어도, 하느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기에, 시련 앞에서, 병고와 가난과 갈등 앞에서 꺾이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기도하고, 하느님 뜻대로 살아 나가는 가운데에, 건강과 풍요와 평화의 축복을 얻고, 영원 구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희망으로 성실히 살아서 복받는 한 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5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관심과 사랑이 아픔을 고침



1. 치유이적 사화(29-34절)

마르코 복음에는 몸의 병을 고쳐주신 치유이적 사화가 여덟 번 나옵니다.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치유이적 사화(29-31절)는 그리스인들의 치유이적 사화와 그 양식이 같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치유이적을 이야기할 때 상황묘사(29-30절), 기적적 치유(31ㄱ절), 치유 실증(31ㄴ절), 목격자들의 반응 순으로 엮었습니다. 29-31절에는 이 요소들 가운데서 단지 목격자들의 반응만 빠져 있습니다. 다만 복음서의 치유이적 사화는 그리스의 치유이적 사화와는 달리 치유자와 환자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지난주 구마이적(驅魔異蹟)처럼 예수님의 치유이적은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곧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생생하게 드러내신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병을 고쳐주신 것은 그 당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그런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열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은 더러운 귀신이나 하느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질병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전도여행(35-39절)

예수께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동안 일을 하시고(21-34절) 이른 새벽에는 바깥 외딴 곳으로 가셔서 홀로 기도하신 다음 가파르나움을 떠나 갈릴래아 여러 회당으로 두루 다니 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구원을 이룩하십니다(35-39절). 그러니까 낮에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밤에는 하느님과 만나는 나날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역시 낮에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밤에는 기도로써 홀로 하느님과 만나는 나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친히 찾아가서 고쳐줍니다. 병자의 치유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자신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병자는 누군 가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오늘 친히 시몬의 장모 곁으로 가셔서 그녀 의 손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침을 받습니다. 이것은 또 한 우리가 성할 때 성하지 못한 사람을 고쳐줄 의무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사실 다른 이들 의 병을 고쳐주는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치유는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고, 의료적인 행위에 앞서 병자에 대 한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치유의 출발점이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6                  연중 제5주일  마르코 1,29-39 (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예수님, 자신의 행적안에 머물기를 거부하시는 예수



묵상(黙想)Ⅰ :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하느님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부분을 통해서 나자렛의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고자 한다. 나자렛의 예수가 지금까지 소위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입으로서만 훌륭한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합당한 행동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로써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회당을 나가시면서 즉시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 하느님의 힘이 함께 임재한다는 이야기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무엇을 가르치셨던가? 그것은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눈먼 사람에게는 시력을,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선포하시는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가르침 직후에 따른 것이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행위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고 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의료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동작이라 해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제스츄어이다. 하느님은 하늘 높은곳에서 명령만 내리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당신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우는자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가장 단순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세계의 석학과 지식인을 먼저 가르치시고 이론으로서 인류를 회두시키려 하지 않으시고 위의 단순한 구원의 동장에서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도 자그마한 구원의 동작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묵상(黙想) Ⅱ : 자신의 행적안에 머물기를 거부하시는 예수

예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어 그들에게 한없는 기쁨과 건강을 주셨다. 삶에 지친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어 삶을 아끼게 하셨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예수께로 몰려들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흡족하셨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신을 높이 받들어 세상에 두각을 드러내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마을로 옮아가시곤 하였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업적에 도취되기를 거부하시고 매순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생(生)의 목표요 결론으로 아셨다.



예수님의 눈은 항상 사랑에 굶주린채로 버려진 수많은 형제 자매들에게로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과업(課業)을 돌아다보고 감상하며 만족해할 겨를이 없으셨다. 예수께서는 한가지 일이 끝나면 하느님께 나아가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 조용히 그 분의 뜻을 듣고 다음작업을 시작할 준비를 하셨다. 동이 트기 전부터 외딴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우리 범인(凡人)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자그마한 결과를 돌이켜 보고 만족해하며 이로서 자기존재의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겉에 나타난 우리 행동의 열매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존재(存在)가 세상에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확인(確認)방법은 자칫 잘못하면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자만심을 키워주거나 아니면 스스로를 절망의 골짜기에 파묻어 버리게 한다. 진실한 자아(自我)의 확인은 하느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자비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파악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흔들리지 않는 존재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17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봉사하는 마음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파견 인사를 듣고 성당을 떠나가는 요즈음 우리 교우들의 처지와 흡사했다.



예수님은 나가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등 많은 병자의 병을 고치는 일에 봉사하셨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코 10:45)고 말씀하신 그대로 봉사생활을 하시고 이 때문에 당신 목숨까지 내어 주셨다.



시몬의 장모도 열이 내리자 시중을 들었다(마르코1:31). 병을 낫게 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받았으면 줄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준다’는 것이 바로 봉사이다. 이 봉사도 받았다는 생각, 다시 말해서 감사하다는 마음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남에게서 받지 않은 그 무엇이 또 있는가.



나의 몸과 건강을, 체력과 능력을, 재능을, 기술을, 지위와 가족을, 재산을, 그리고 권력과 정신과 마음을, 내 존재 전체를 우리는 받았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Ⅰ고린토 4:7).


이렇게 받고도 주신 하느님께 무심할 것인가? 우리 교회 안에 선교활동이, 교회에 대한 봉사가 부진한 탓은 받았다는 생각, 받았으니 감사해야겠다는 생각, 즉 뭔가 남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이 없거나 부족한 탓임을 깨닫고 우리도 저 시몬의 장모처럼 남의 시중드는 신앙인이 되도록 다같이 노력하자.



18            연중 제5주일   마르 1,29-39 (나) 오, 복된 암이여!

민병숙 작가



따뜻한 방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노라니, 지금쯤 병원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남편에게 돌아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어디를 둘러보나 스타워즈의 외계인들 같은 환자들만 누워있는 병실, 환자들 보다 더 초췌한 보호자들, 끊임없이 피를 뽑아 가는 간호사들, 우르르 몰려왔다 우르르 몰려가는 문병객들… 중환자실이나 영안실로 넘어가기 직전에 비몽사몽간에 저승사자나 염라대왕을 본 듯 만 듯 생사의 갈림길에서 청량리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대합실에서, 삼 사십 년의 취생몽사(醉生夢死) 끝에 간암 말기에 다다른 남편의 일로 이십여 일을 지내면서 어설픈 보호자 노릇을 하노라니, 여느 보호자들은 제 남편을 밤이고 낮이고 애지중지 닦아주고 먹여주고 성모 마리아의 후예처럼 거룩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나는 틈만 있으면 잠만 자려 하고 한 시간마다 깨우는 남편을 못마땅해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호시탐탐 병실을 빠져나갈 기회만 노리는 내 속셈을 감지했는지 오늘은 자기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 집에 갔다 늦게 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어젯밤에 초연한 표정으로 내 손을 찾아 쥐던 남편에게서 드디어 이승을 떠날 준비가 돼있는 듯한 기미를 느끼고 시원섭섭한 감이 들면서 얼마 동안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남편이 단독회견을 하게끔 자리를 비켜주는 것도 괜찮으리라 싶었습니다.



아래위로 피를 쏟고 간성혼수에 들어간 남편이 두 차례 치료실로 옮겨졌을 때, 시동생과 시누이와 세 아이의 사랑과 연민과 격려의 집중사격을 받고 의식이 돌아오며 시누이 손을 잡고 배시시 웃기까지 하는 순간 ‘아! 과연 사랑은 기적을 낳는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났습니다.

제 아빠와 칠 년 동안 말을 않고 지내던 딸이 울며불며 달려오고, 제 딸에게 칠 년만에 직접 용돈을 건네준 남편이 신파조로 “지향아, 나는 너를 제일 좋아한다”는 사랑의 고백을 할 때, 바로 그 유명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던 말씀이 떠오르며, 남편이 죽을병에 걸린 것이 대희년을 기해서 썰렁한 우리 가족 공동체에 훈훈한 사랑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시려는 하느님의 무서운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며 경외감과 함께 기쁨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영광의 신비로 넘어간 고통의 신비를 목격한 감격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한없이 샘솟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 헤어지기 섭섭해하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 놓고, 지용이 할머니가 싸주신 닭곰탕을 들고 병원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남편과의 최후의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밤참을 같이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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