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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5월 24일 (토)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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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강론 모음 ”
 

다해 성체와 성혈 대축일

        

      23. 오경환 신부(다)/44           24. 조순창 신부(다)/45

        25. 함세웅 신부(다)/47           26. 강덕창 신부(다)/49

        27. 최경환 신부(다)/51           28. 강영구 신부(다)/53

        29. 강길웅 신부(다)/57           30. 김신호 신부(다)/59

        31. 유영봉 신부(다)/60           32. 서웅범 신부(다)/62

        33. 신은근 신부/65                 34. 변갑선 신부/66

        35. 정연혁 신부/69                 36. 성체성사 신비/70

        37. 예수님의 몸/71                 38. 성체는 그리스도의/72

        39. 성체를 자주 모시면/75               40. 김 상옥 수녀/76





23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b-17 (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성체와 사회>

오경환 신부





수백년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가지 조건하에서 성체를 축성하였고 나누어 먹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성체의 의미에 관하여 한결같이 생각하고 성체의 의미를 착실하게 묵상하고 실천한 것은 아니었다. 성체성사의 본래의 의미는 다양한 조건하에서 제대로 음미되지 못하고, 사회적인 압력 때문에 변경되기도 하였으며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하였다. 성체성사가 언제나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되어 있었지만, 그 의미는 각 시대의 지배층의 요구에 맞도록 변경되고 왜곡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성체의 두 가지 중요한 의미는 일치와 현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체를 세우는 자리에서 신자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 하셨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1) 많은 밀알이 모여서 빵을 이루고 많은 포도알이 모여서 포도주가 되듯이, 하느님의 신자들은 모여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가 빵을 나누어 먹는 그 자체가 신자들의 일치를 상징한다.



성체는 그것을 받아먹는 사람들이 일치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노력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일치가 없는데도 성체를 받아먹는다든지 나아가서는 일치에 해로운 행동을 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은 성체에 모독을 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을 마음으로 미워하고 또는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는 것은 일치를 해치는 것이다.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는 것 중에는 남을 착취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 가장 일치를 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 중에서는 일치의 필요성과 아울러 일치의 정신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받아 모시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일치를 하는 행위인지에 대한 묵상과 반성을 함으로써 일치를 실현하기 위한 결심을 할 뿐 아니라 일치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를 기르고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일치에 대한 가치관의 함양이나 일치를 해치는 행위에 대한 반성은 미사 동안에 이루어지는 독서, 강론,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체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고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은 성체의, 앞서 말한 두 가지 의미를 살리는 것이고, 성체의 의미를 왜곡하고 변경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의미 중에서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것을 도외시하거나 묵살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초기의 교회 신자들은 성체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잘 이해하였고 그것을 잘 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였으며, 그들의 문제를 논의하고, 성체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였다.

성체성사는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기회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인 생활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사도행전은 초대의 신자들이 어떻게 성체를 나누어 먹었는지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사도 2,42-45).



성체가 사회 안에서 나누는 행동을 가져오지 않고, 진정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이기심과 착취적 행동이 억압적 행동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성체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성체는 일치의 성사로서, 나눔의 성사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일상생활에서 욕심만 차리고 가진 것을 나누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성체를 받아먹기에 부당한 사람이라고 보았고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였다.



“갈라진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나누는 음식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음식을 먹을 때에 각각 자기가 가져온 것을 먼저 먹어치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겠습니다”(1고린토 11,20-22). 초기의 교회에서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 재산과 생활의 걱정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성찬 예식 안에서 역할과 임무도 나누어 가며 행동하였다.



남녀 평신도들도 사도들이나 성직자와 함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성체는 모든 면에서 분열보다는 일치를 가져오고, 참된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기여하는 성사였다.











24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b-17 (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성체나누기는 사랑과 은혜 나누기>

조순창 신부



6월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 아래 무성하게 녹음이 짙어져 가는 계절에,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기리는 ‘예수 성심 성월’입니다. 6월의 첫주일인 오늘은 예수님 사랑의 표징인 성체 현의(玄義)를 나누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일주일 동안 무더운 날씨에 시간에 쫓기고, 일이나 숙제에 몰리면서도, 일한 흔적은 적고, 수익이 부족해서 더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인 듯합니다. 시간이나 돈의 여유 없는 삶, 사람과 자동차와 공해, 그리고 세금과 폭력이 넘치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이 말씀과 성찬의 잔치에 초대받은 만큼, 피로와 스트레스를 푸시고, 몸과 마음의 병의 치유를 받으시고, 재물과 풍요와, 지식과 지혜를 얻으시고, 새로운 활력과 축복을 받을 좋은 자리입니다.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우주와 사회와 인간은 질서에 따라 순환하고, 공정하게 분배되고, 선악에 따라서 보상이 되어야 합니다. 돌고 도는 돈이 유통이 잘 되어야 경제가 활기 있고, 지식을 나누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찾음으로써 학문의 발전과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권력도 순리대로 교류해야 정치 안정이 되며, 법이 공정하여야 사회가 평화롭습니다. 이 사회는 그렇지 못한 면이 많아서, 돈은 들어가면 안나오고, 사이비 학자 시비가 있고, 권력도 잡으면 안 놓을 때에, 괸 물이 썩듯이 사회의 부조리와 악순환이 계속 되어서,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사고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현세적이며 인간적인 욕심으로 꺾이고 시들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원리는, 사랑으로 나누는 성체의 원리뿐입니다. 성체주의의 원리는 생명(예수님의 몸)을 나누는 원리입니다. 한 생명을 나눈 형제는 생사 고락을 같이 해야 합니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인권 유린과 살인과 전쟁과 폭력은 사라질 것입니다.



성체주의의 원리는 아낌없이 가진 것을 나누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밤낮으로 사람들을 만나시고 은혜 주시며, 집도 없이 죽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히시고, 십자가상의 죽음의 경각에서도 강도와 악의 앞잡이들을 사하여 주셨고, 목숨마저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체주의의 원리는 사랑을 나누는 원리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여 구원 얻도록 하셨는데,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듯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성체 안에 오늘도 현존하여 계신 만큼,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축복과 사랑의 표지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립되고 불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하고, 아낌없이 가진 바를 사랑으로 나눌 때에, 그 가진 바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5000여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광주리나 될 만큼, 큰 기적을 오늘도 우리 손을 통하여 성체의 은혜로 이루어 주십니다.



생명을 나누어주는 잔치, 가진 것을 나누는 잔치, 사랑을 나누어주는 성찬, 이 모두를 모으고 챙기면 모두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누어주고 베풀면, 모두에게 풍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는 우리는, 차고 넘치게 은혜 받는 시간입니다. 성체께 흠숭과 감사를 드립시다. 잘 모시고 참사랑으로 나누며, 모두에게 차고 넘치는 기쁨을 함께 누립시다.











25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b-17 (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사랑과 나눔의 성사인 성체>

함세웅 신부



오늘은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매주일 성체를 받아 영하는 우리에게는 사실, 어떤 의미로는 매일, 그리고 매 주일이 성체 축일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 전례는 일정한 축일을 정하여 더욱 깊이 성체의 신비를 묵상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목요일에 우리는 성체성사 설정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미 그 뜻을 장엄하게 기념했습니다. 성체와 성혈은 빵과 포도주로 표시된 예수의 몸과 피, 곧 예수의 현존을 체험케 하는 실재적 징표(實在的 徵標, Signum reale)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지인 것입니다. 최근 신학자들은 성사의 의미를 보다 쉽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성사가 하나의 표지, 또는 상징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상징은 언제나 의미와 내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위적 관계가 종교적 관점으로 연결될 때 그 상징은 보다 깊은 뜻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는 부부들의 결혼 반지와 또는 선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혼 반지는 절대로 물량적인 값으로만 측정될 수 없습니다. 그 반지에는 부부의 신의, 사랑, 인격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선물에 담긴 정성도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음식입니다. 그리고 성체성사의 설정은 사실 식탁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 식탁, 결별의 식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심각하고 의미 있는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 식탁에서 일상용의 빵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셨습니다.



즉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기념을 이 빵과 포도주에 짙게 남기신 것입니다.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예수의 이 말씀은 유언이며 동시에 재회의 다짐과 확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초기교회 신자들은 이 예식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미사인 것입니다.



중세 신학자들은 성체 안의 예수의 현존을 그리스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에 성체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현존을 ‘실체적’, 또는 ‘본체적 변화’(Transsubstantiatio)라고 설명했고 고백했습니다. 즉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강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신학자들은 본체적 변화란 뜻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 관계를 ‘의미전환 ’(Trans -significatio) 또는 ‘목적 변화’(Transfinalizatio)란 표현으로 설명하고 신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한동안 후자의 표현에 대하여 염려하는 견해가 있었지만 성체 안의 예수의 실재적 현존(Praesentia realis)을 고백하는 한 그 신학적 표현은 변할 수 있다는 데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변화 후의 성체와 성혈은 똑같은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 식용으로서의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키 위한 표지로서,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빵은 빵이로되 보통 빵이 아니며, 포도주는 포도주로되 일상용의 포도주가 아니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목적이 전혀 새롭게 전환되었다는 뜻입니다.



반지와 선물에 담기 사랑의 뜻을 생각하면 성체의 신비를 우리는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는 단순한 표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전능을 통해 표지 이상의 의미 곧, 성체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 위격적 관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체는 참으로 교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 음식을 먹고 자랍니다. 음식은 참으로 거룩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콩 한 톨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선조들의 말씀도 이러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사랑, 그 현존성을 다시 고백하며 동시에 매일 먹는 음식에 대하여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특히 매일 식사 때, 미사와 연결되는 의미를 찾으며 식탁이 곧 미사의 연장, 영성체의 연속일 수 있도록 실천적인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창세기 14장의 말씀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람에게 멜기세덱이 복을 빌어주며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 하느님께 찬미 드린 내용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환대의 뜻이며 교부들은 그것을 성체 성혈의 전표로 이해하였습니다. 사실 멜기세덱(나의 왕은 정의〔正義〕)은 족보도 없이 단 한번 나타나며,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람을 축복한 사실로 보아 아브람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이해되었고, 혈연에 의한 레위 사제 지파를 뛰어넘는 메시아적 사제의 전표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시편 110,4; 히브 7장).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제직을 멜기세덱의 제도를 따른 사제직이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2독서는 고린토 전서 11장의 말씀으로 성체성사 설정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언 내용입니다. 고린토 전서는 사도 바울로에 의해 57년 봄에 씌어졌고 바울로의 회개는 36-37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바울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聖傳〕을 다시 신자들에게 전해주며 가르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훌륭한 교사이며 사도였던 바울로도 물려받은 것을 다만 전달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이 결코 그 어떤 새로운 것을 설정하거나 만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체성사의 기원이 주님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증언한 내용입니다. 이 성체에는 일회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이 기억의 예식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거행했던 그 심각한 의미, 유언의 의미를 담고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똑같이 미사 중에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루가 복음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기적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4복음의 공통 내용이기에 더욱 권위 있으며, 이 기적은 성체가 지닌 풍요로움 곧, 하느님 은총의 무한함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그것이 바로 기적임을 이 일화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체를 사랑과 나눔의 성사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성체 안의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철저하게 당신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 우리 모두 당신과 같이 우리 자신이 이웃에게 음식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도 당신과 같이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내어놓을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소서. 아멘.











26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b-17 (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강덕창 신부



어제 저녁 신문을 펼쳐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첫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유령”이라는 글자였습니다. 요즘 세상에 유령이 왠 말이냐 하고 눈을 부비고 자세히 살펴보니 유령회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몇몇 나쁜 사람들이 명의만 있는 가짜 회사를 차려 놓고 많은 사람들의 돈을 횡령한 뒤에 정말 유령과 같이 바람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가짜가 수없이 많습니다. 물건을 살 때나 결혼을 할 때에도, 가짜를 사거나 유사품을 사기도 하고 사기 결혼을 당했다고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가짜에게 속임을 당한 경우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속은 사실을 알고서 그 분한 마음을 억제하기 힘든 경험도 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속임 당한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각자의 생명입니다. 가짜나 엉터리 같은 생명을 산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탓입니다. 이제 속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알차고 진지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속아 살지는 않고 있습니까? 우리는 엉터리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깨어진 얼음 조각을 잘못 딛고 빠져버린 사람처럼 단 한번 주어진 내 인생의 제비를 잘못 짚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빵의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능력을 가지셨음을 드러내 보이셨으며 지상적 음식뿐만 아니라 천상의 음식으로 인간에게 참된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던 오천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줌으로써 육체적 만족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육체적인 배를 불리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육체적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기록하신 루가는 이 대목을 쓸 때 성체성사를 설정하시던 날을 생각하면서 빵의 기적이야기를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통해서, 그분이 빵을 들고 “이는 내 몸이다” 하시며 빵을 그분의 몸으로 변화시키신 것이 참된 사실임을 알게 해 주려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주시는 빵과 포도주는 그분의 참된 몸과 피입니다. 제단의 빵과 포도주를 먹는 우리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룹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한 몸을 이루고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살고자 합니다. 살기 위해서 온갖 정력과 시간과 노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려고 하는 생명은 과연 진짜 생명입니까? 또는 가짜입니까? 육체만을 배불리고 안일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죽는 순간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내가 살리기 위해서 힘써왔던 이 육체는 무력하고 쓸모 없는 것이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죽어져 없어지고 마는 것을 위해 왜 이다지도 시간을 낭비했단 말인가. 결국 헛된 인생을 살았으며 내가 누리려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구나”하며 슬퍼할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적인 생명을 위해서 먹고 자고 입는 데만 신경을 쓰는 자들은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이 참된 것, 영원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합니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성부께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분에게서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물을 실컷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돈을 벌어서 집을 장만하고 공부하여 출세를 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일에만 노력해서는 우리가 바라는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라져 버릴 육체 뿐 아니라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감사스럽게도 예수께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의 몸과 피를 지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제대상의 빵과 포도주의 모양으로 성체성사를 세워주셨습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신비 속에서 우리가 성체와 성혈을 영함으로써 영원하신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룹니다.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아무런 외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이 신비를 묵상하면 놀랄만한 일이 내 안에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룬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굉장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가 참된 생명에 참여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신비는 성체성사 안에서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세상사에 얽매여서 참되고 영원한 것을 가짜 아닌 진짜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제1목표이어야 합니다. 만일 세상사를 제1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죽는 날 후회하고 자신의 우매함을 한탄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방해물이 되는 온갖 부정한 죄악과 불순함을 내 마음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순수한 상태를 만들 때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이 있으며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영생을 약속 받는 보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 참된 생명이며 진짜 인생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길은 사는 동안이나 죽은 다음에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이러한 일치의 생활은 참된 생활이며 속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짜 생명을 가르쳐주시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세워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의 마음을 바치고 성체를 영하는 데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고 성체의 신비가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되며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합시다.



“나는 생명의 빵이며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몸과 피이니라.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한 6,25).











27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b-17 (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고

<우리와 만민의 죄 사함을 위하여 바치신 거룩한 몸과 피의 신비여!>

최경환 신부



얼마 전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어느 버스 정류소에서 두 젊은이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어깨 너머로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서로 야외에 놀러 가기로 굳게 약소한 친구가 시간에 늦자 기다리던 친구가 투덜대며 성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렇게 늦으면 어떻게 해! 벌써 차가 몇 대나 간 줄 알아! 뭐 사람이 그래!” 하며 성을 발끈 냈습니다.



그때 시간에 늦은 청년이 못내 죄송해 하면서 이렇게 사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미안하다. 오늘이 주일이라서 성당에 가 미사에 참례하고 오느라 늦었다. 용서해라. 어제는 깜빡 잊고 그 시간에 약속했는데 주일이니 어떻게 하니! 그래서 성당에 갔다 왔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 청년이 평소에 갖고 있던 교회에 대한 비평이 하나 하나 꼬집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야! 성당인지 만당인지 다 그만두고 집어쳐라. 그거 무슨 소용 있니? 그리고 또 하얀 떡 조각을 받아 먹던데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게 뭐니? 도대체 그 하얀 떡이 뭐라는 거냐?”하고 비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이라는 것이다. 성체라고 하는데 우리 영혼의 음식으로서 그것을 받아 먹으면 우리 영혼이 살찌고 건강하게 되는 거야”하고 대답하자, “야야! 그 도깨비 하늘 메고 가는 소리 하지도 마라. 그런 새빨간 거짓말이 또 어디에 있니?”하며 힐난의 비평을 늘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듯한 화살이었고, 타협하기 힘든 대화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인간은 소위 과학에 살고 현실에 살며, 이론에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보다 과학적이요, 현실적이며 물리학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현대 인간들이기에, “야! 그 장난 같고 우스꽝스러운 짓은 집어쳐라”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던지게 마련이요, 더욱이 신비의 극치인 성체와 성혈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의 화살을 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우리가 성대하게 찬미, 찬송하며 기념하는 이 성체와 성혈의 참 뜻이 무엇이며, 그 진실됨을 증명할 만한 근거는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이 과학적이요 실증적인 것을 원한다면, 성체와 성혈에 대한 진리는 그 어느 진리보다도 과학적이요 실증적인 진리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한된 시간인지라 여기 그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왕으로서 속을 수도, 속이지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그러기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이 2천년 전, 아니 오늘도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생하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요한 복음 6장 53절에 보면 “정말 잘 들어 두시오. 만일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똑똑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고 급기야는 60절에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가르침이 순전히 상징적인 것, 기념하기 위한 것뿐이었다면 일단 양보하시며, 오직 상징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터인데,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의 그 무서운 도전에도 조금도 양보함이나 굴복함이 없이 62절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당신들이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나 당신들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고 명백히 말씀 하시면서 믿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역사적이며 과학적이요 실증적인 진리입니까?



그리스도의 존재의 역사성과 그 진실하심의 참됨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이 말씀을 믿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께 최대의 존경과 사랑을 바치며 찬미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이 영광된 날을 다 같이 진심으로 축하하며 우리 영혼의 양식이요, 성약인 예수님의 몸인 성체와 성혈께 무한한 찬미와 사랑을 바치도록 합시다.











28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11-17> (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강영구 신부





오늘은 당신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쌍둥이 딸을 해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한 천사를 보내어 그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고 명령하지만, 천사는 여인이 너무나 가련해서 감히 그 영혼을 거두어 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 그 천사는 지상으로 쫓겨납니다. 하느님은 그 천사를 지상으로 쫓아내면서 세 가지 문제를 줍니다.



그 문제의 해답을 찾게 되면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문제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문제는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

가?" 셋째 문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6년 세월을 셰몬이라는 신기료 장수 밑에서 일하는 동안 천사는 그 문제의 해답을 찾게 됩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온갖 탐욕과 이기심과 분노하는 마음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하늘에서 내쫓긴 천사가 길거리에서 떨고 있을 때, 셰몬이라는 신기료 장수와 그의 아내가 그를 구해 줍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온갖 탐욕과 욕설과 분노와 시기 질투가 들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구해 준 것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하는 마음이 발동되어 그를 구해 줍니다. 탐욕과 미움과 증오는 사람을 죽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는가?" 그가 셰몬과 함께 구두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 도시의 제일가는 갑부가 새 부츠를 맞추러 왔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목이 긴 부츠 대신에, 시체에 신길 샌들을 꿰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갑부의 등뒤에 서 있는 죽음의 천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갑부가 새 부츠를 맞추고 돌아간 한 시간 뒤에, 그의 하인이 다시 와서 시체에 신길 샌들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금방 그 갑부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지만,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인간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는 어느 날 세몬의 신기료 가게에 두 계집아이를 데리고 와서 새 신발을 맞추려는 마음씨 착한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주머니가 데리고 온 그 두 계집아이는 6년 전 자신이 영혼을 거두어 가려 했던, 가련한 여인의 쌍둥이 딸들이었습니다. 불쌍한 여인은 쌍둥이 딸을 낳은 후에 죽고 말았지만, 그 쌍둥이 딸들은 살아 남았습니다. 그 쌍둥이 딸을 이웃의 착한 아주머니가 거두어서 젖을 먹여 길렀는데, 벌써 여섯 살이나 되었고, 쌍둥이 딸은 어미가 없어도 이웃집 여인의 따뜻한 사랑을 먹고살았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밥으로 삽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밥도 사랑의 밥으로 삽니다. 모든 생명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인가를 먹어야 삽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식물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햇빛과 공기와 물을 먹고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식물들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탐욕으로 내뿜는 공해만 아니라면, 식물들은 더욱더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식물이나 또 다른 동물들을 먹고 삽니다. 그것을 먹이 사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느님께서 동물이 살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동물들을 죽이거나, 혹은 공해로 그 먹이 사슬들을 끊어 놓지 않는다면, 이 땅의 모든 동물들은 조화롭게 번창할 것입니다.

  

농사도 짓지 않고 창고나 곳간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온갖 동물들과 새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삽니다. 길쌈하거나 베를 짜지 않지만, 들의 꽃들은 솔로몬 왕이 입었던 옷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들꽃들도 입히시기 때문입니다(마태 6,25-34). 이렇게 온갖 동식물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입으면서 삽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랑을 먹어야 삽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먹고삽니까?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젖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우유만 먹고 자란 아이가 성격이 비뚤어지고, 사회성이 약하고, 병에 약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생명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젖을 빨고 자란 아이는, 어머니의 생명과 사랑을 먹었기에 건강하고 밝습니다.

  

어른인 우리는 밥을 먹고삽니다. 밥은 단순히 쌀로 지은 음식물이 아닙니다. 거기 농부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여 있고, 벼가 자라도록 햇볕을 비추시고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 쌀을 매만지며 깨끗이 씻고 솥에 앉힌 주부들의 사랑과 정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한 그릇의 밥으로 나날이 생명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그릇의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사랑과 정성입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사랑을 먹지 않으면 한순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째 편지 4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죄로 죽어 가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는, 사람들의 밥이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분 역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요한 복음 6장 53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성체 성사의 신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 조각의 밀떡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한 잔의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사랑을 먹고살듯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그리스도를 먹어야 삽니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자주 미사에 나와서 주님의 성찬에 참례하는 신앙인들이, 분명히 생명에 넘치는 신앙 생환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먹고 주님의 생명을 그 안에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사는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인간을 살리시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극명(克明)하게 나타남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성찬에 초대하셨습니다. 함께 주님의 몸과 피, 주님의 생명,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먹읍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우리의 삶은 또한 어떠해야 합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스스로를 밥으로 내어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이웃은 이웃에게, 형제는 형제에게 자신들을 먹도록 밥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를 밥으로 내어 주어 먹을 때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어떻습니까?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애를 쓰기만 했지 먹히려고 애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살벌한 싸움판으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려 하지는 않고, 아내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부모 자식이 그렇고 이웃과 이웃이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 맹수로 변해서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대기만 합니다. 서로 먹으라고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기만 하면, 모두 함께 살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먹고 사는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신 주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서로를 먹고 모두 살아날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일 우리 본당이 너무나 큰 하느님의 축복 속에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풍요로운 우리 본당과 풍요로운 형제자매 여러분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큰 덩치의 新安 본당 신부님은 한푼이라도 더 얻어 가기 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댔지만, 여러분이 못 들은 체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성체 성사의 신비를 몸소 실천하셨기에, 기쁨을 거두어서 돌아갔습니다. 사실은 여러분의 사랑을 거두어 간 것이지요. 거금 삼천칠백만 원‥‥ 그 돈으로 성당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의 그 나눔과 베풂이 성당 없는 신안 본당 교우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 것이 모이면 성당도 건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움과 넉넉한 마음가짐에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되는 여분이 남았음을 들었습니다.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누어주고 베풀어 주면 모두가 풍요롭게 되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나눔의 신비, 자신을 내어 줌의 신비입니다. 곧 성체 성사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주님의 식탁에서 더욱 풍성한 생명의 양식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29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해) 몸과 피를 주신 하느님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창세 14,18~20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제2독서 Ⅰ고린 11,23~26 (여러분은 먹고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십시오) 

복 음 루가 9,11b~17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혈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인간 구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그것은 구약의 계약 의식과 긴밀한 연관이 되며 또한 신약 역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 본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구약(구계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말합니다. 이때 백성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피의 예절로 했습니다. 즉 송아지를 잡아서 하느님을 표상하는 제단에 피의 반을 뿌리고 나머지 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겠다는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여기서 한 쪽이 계약을 어기면 막말로 피를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앞에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수없이 많은 죄를 졌습니다. 배반하고 또 배반했습니다. 백성은 그래서 당연히 목숨을 바쳐 피를 흘려야 하지만 그러나 목숨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 대신 수송아지나 염소 혹은 양이나 비둘기 두 마리로 속죄의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죄는 너무도 극에 달해서 이제 동물의 피만 가지고는 하느님의 의노를 풀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속이고 또 속여서 하느님을 수없이 속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짐승의 피는 억만 마리를 바쳐도 소용이 없게 됐습니다. 아니, 세상에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제물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구제 불능이었습니다. 여기서 새 계약이 필요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계약은 시나이의 계약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예레 31,31~34참조). 에제키엘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고 하면서 새 계약을 통하여 성령을 부여하신다는 의미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에제 31,26~27참조).



그럼 새 계약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바로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새 계약을 체결하시는데 그 말씀이 최후만찬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고 하셨고 루가와 바오로도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루가 22,20.Ⅰ고린 11,25)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인간을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백성은 감히 바라지도 못했는데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너희는 나의 백성이며,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다"라는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그 계약을 백성이 어기자 예언자를 파견하시어 백성들이 계약에 충실하도록 종용하셨고 그래도 백성이 고집을 피우자 새 계약을 말씀하시면서 끝내는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낸다는 것은 그 아들을 제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 아들을 잡아죽일 줄을 뻔히 아시면서도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셨고 그리고 그 피를 통해서 새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봉헌해서 얻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를테면 맞바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빵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는 그렇게 풍성합니다. 째째하거나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빵의 기적은 메시아의 풍요로운 징표로 보여 준 것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계약의 식사를 보여 준 것입니다.



미사는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새 계약의 예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봉헌되시는 계약의 체결을 미사 안에서 새롭게 거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뜻으로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Ⅰ고린 11,25참조)고 하셨던 것입니다. 미사는 일종의 하느님의 사랑의 잔치요 제사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맛좋은 술로 오셨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그와 함께 머물고 그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인간을 찾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먹히러 오셨고 먹힌 상태에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구원을 주십니다. 당신의 전 생명을 오늘도 그분은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그것도 무료로.



우리는 그래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우리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구해진 백성이요 목숨인데 이 은혜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원하신다면 무슨 사랑을 못하겠습니까? 우리도 먹히는 삶을 삽시다.











30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17>  (다) 성체와 성혈은 영혼의

김신호 신부



음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에 속한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재주는 아직까지는 발견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음식을 먹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은 먹어야만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말 중에 ‘배고픈 서러움이 가장 크다’느니, 또는 ‘사흘 굶고 남의 집 담을 뛰어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느니, 하는 표현들이 있는데, 이러한 표현들은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적인 삶의 습관에 따른 체면이 중시되고 있는 생활관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면 체면보다는 실제적인 삶이 중요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 중에서 적어도 나이가 50세 정도가 된 사람이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배고픈 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있다.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은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끼니 때를 기다리는 시간은 매우 지루하고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던 경험을, 이들은 갖고 있다,



배고픈 고통과 서러움



춘궁기라는 말은 ‘보릿고개’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인데, 배가 고픈 상태에서 맞이하는 봄은 유난히 넘기기 힘든 긴 기간이었던 것 같다.

요즈음은 봄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물론 사철의 주기가 옛날과 달라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배고픈 상태를 면하고, 기온이 쾌적한 시기에 놀러 다니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배고픈 군중에게 빵을 많게 한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계신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이 왜 성체성사의 전형에 해당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으로 밝혀질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육신이나 영혼이나 배고픈 고통을 겪는 것은 좋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사랑의 극치로 풀이될 수 있다. 예수님을 음식으로 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신자들은 이러한 공동의 음식을 통하여 서로간의 일치를 확인받게 되는 것이다, 음식을 함에 나눈다는 사실은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이, 이러한 음식을 통하여 확증된다



一致의 확인 聖體聖事



 성체성사에 얽힌 이야기들은 알려진 것들이 많다. 어떤 것은 성체성사를 이루는 도중에 빵이 예수님의 살로 변하여, 변한 살에서 피가 흘러 제단보를 적셨다는 내용으로 되어있고, 어떤 것은 도둑들이 감실에서 성합을 훔쳐가면서 성체를 쏟아서 버렸는데,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발견이 되어 무사히 다시 감실로 모셔지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성체를 영하고 나서 영한 밀떡이 정말로 예수님의 몸인지 의심이 나서 얼른 밖으로 나와 방금 영한 성체를 입 속에서 꺼내어보는 순간 벌을 받아 땅 속으로 꺼져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내용들로 되어있다.


사시사철 영혼 춘궁기



사실 성체께 대한 존경심이나 성체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옛날에 훨씬 엄한 규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 너무나 흐트러진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외적인 태도가 모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존경심을 드러내는 행위는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 육신의 배고픔을 극복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어느 면에서 보면 음식으로서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의 고마움을 망각해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의 배고픔에 무감각해질 때, 우리 영혼의 상태는 균형을 잃게 된다,











31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17> (다)

‘발을 씻어줌'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봉사다.

유영봉 신부



 묵상 :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이다. 지켜야 할 계명의 핵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자답게 살기 위한 은총을 얻는 방범은?- 그것은 ’기도와 성사'다. 성체성사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극적인 표현이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게 드러난 구원사건이 몇가지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심에 있다, 사도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 생명을 얻게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1요한 4,9)고 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크게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원사건은 주님의 수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다. "(1요한 4,17)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구원 사건은 성체성사다. 예수님은 왜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가? 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보자. -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내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5-57)



우리가 당하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자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주님의 사랑은, 성체성사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 손 위에 놓인 성체에 “당신은 왜 이런 모습으로, 이런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하고 한번 여쭈어 보자- 예수님은 이미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내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 56-57)라고 하셨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는 이 말씀은 인격적인 일치를 뜻하는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우리와 함께 사심으로써 우리와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미사 때마다 기계적으로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는, 성당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자 성체성사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삶을 살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사람도 내 힘으로 산다"하셨다. 참으로 주님은 항상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루가 22,42)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하셨으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7)라고 하셨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산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과 일치하여 살아야 한다. 신앙(종교)의 궁극목표가 신과 인간의 만남(일치)에 있다면, 영성체하고 그분과 의논하며 사는 삶에, 그 길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일치할 때 참으로 형제들과도 하나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축성하는 엄숙한 순간에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는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성찬 예식을 기념식처럼 되풀이하라는 뜻인가? 한때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을 쓰던 때도 있었다. 옛날 미사 통상문에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고 되어 있었다,



요한복음에는 성체성사를 세우는 장면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발씻김 예식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요한 13, 14)고 말씀하신다.

사도 요한은 최후의 만찬 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를 행하라"하신 말씀의 뜻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하신 그 뜻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발을 씻어줌'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봉사다. 그렇다. “이를 행하라"는 명령은 내가 너희를 위해 제물이 되어주고, 밥이 되어주듯이 너희도 “서로 종이 되어 주라", “서로 밥이 되어 주라"는 말씀이 아닌가?


 IMF 구제금융시대에 실직과 굶주림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섬기고 밥이 되어주는' 자세로 이기적인 껍질을 벗고, 가진바를 나누고, 걱정을 나누고, 희망을 나누는 삶을 살 때, 오늘 복음의 빵의 기적은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32         성체성혈 대축일 (루가 9, 11ㄴ-17)(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서웅범 신부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마저도 우리에게 다 내어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영적항해(航海)를 하는 당신 자녀들에게「희망의 보증」과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오늘 「빵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말씀과 이적(異蹟)으로, 군중을 영적으로 배부르게 하신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허기진 그들을 위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기적을 오늘날에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성체성사때 사제의 손에 의해 성변화되는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영적으로 배불리시고 생기있게 해 주십니다.



또한 육신적 배고픔을 이 세상에서 없애시는 구체적인 빵의 기적도 계속해서 행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인구가 많고 또 홍수․가뭄․한파 등 이상기후 현상의 영향으로 농작물의 작황이 나쁘고, 가축들이 피해를 입는다하더라도, 이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온갖 종류의 먹거리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로 풍족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허다한 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풍족하게 허락하신 세상의 재화를 인간이 올바르게 함께 나누어 사용하지를 않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 살집을 얻게되는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 우리들의 정성과 손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하와이의 「몰로카이」라는 섬에서 나환우들을 위해 일생을 봉헌하신 분이십니다. 불과 100년전의 일입니다. 그 섬의 나환우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이었고,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인지라, 그 섬은 온갖 타락과 폭력이 횡행하는 무법천지였습니다. 육지에서 오는 구호품들은 힘있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 다루어졌고, 가난한 사람들은 헐벗음과 배고픔에 2중의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다미안 신부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세워가기 시작했고, 신부님의 사랑과 노력으로 몰로카이섬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빵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녁, 마을 사람들의 식사배급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 많은 새 식구들이 몰로카이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해 새로 음식을 장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신부님께서 묵묵히,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빈 광주리를 하나 돌리셨습니다.

잠시후, 참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빈 광주리가 빵이 가득 담긴 광주리로 변해, 다미안 신부님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자기의 정량에서 얼마씩을 새 식구를 위해 떼어 광주리에 넣었던 것입니다. 새 나환우들은 그 빵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나눔이라는 것을 아예 몰랐던 사람들이 이렇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도구 삼아 빵의 기적을 이루시려고 하십니다. 다섯개의 빵과 두마리의 물고기라는 「작은 것」을 가지고, 남자만도 5,000명 이상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그 남은 것이 12광주리나 되는 큰 기적을 이루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정성이 담긴 우리들의 「사랑의 나눔」을 이용하셔서 큰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고통받는 형제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촉구하시며 우리들의 너그러운 손을 기대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 성체와 성혈의 그 사랑의 신비가 환히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33             성체성혈 대축일 :  두려움 없이 성체를 모시자

신은근 신부



성체와 성혈은 직역하면 거룩한 몸과 거룩한 피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말한다. 역사 안에 살아 계셨던 예수님, 이제는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정신과 얼을 말한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고 있다. 작은 빵을 먹음으로써 이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 정말 예수님을 모셔오고 있었던가.

첫 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을 보노라면 그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게 산만하던 아이들이 너무나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 어린아이들이 온 몸으로 성체 앞에 나설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서 하나의 답을 발견하게 된다. 선입견 없이 성체께 나아가는 자세다. 두려움 없이 성체께 다가서는 모습이다.



ꡒ영성체가 무엇이지요ꡓ 하고 물으면 ꡒ서슴없이 예수님을 모시는 겁니다ꡓ 하고 답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아무런 의심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이 정답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도 살아서 그들에게 오신다. 그들의 당당한 모습 안에는 분명 성체성사의 힘이 실려있다.

너무 자주 우리는 성체성사와 죄를 연결시킨다. 성체 앞에 완벽한 모습으로 나설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죄를 느낀다면 더욱 성체께 나아가야 한다. 성체는 일부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죄 없는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다. 성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 앞에 나서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한가.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죄와 연관된 성체신심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를 먼저 생각하는 신심을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배우게 된다.



성체는 근본적으로 음식이다. 영적 힘을 주는 하늘의 음식이다. 어린이들이 거리낌없이 성체를 모시듯 우리도 두려움 없이 이 음식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또한 아무 주저함 없이 주님이 주시는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며 ꡒ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ꡓ 하고 말씀하신다. 최후 만찬의 모습이다. 우리도 미사 때마다 이 말씀을 되풀이해서 듣는다. ꡒ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ꡓ 무엇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인가.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건과 나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관계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아닌가.



사건이 빵이고 사람이 빵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빵이다. 받아먹어라 하고 주시는 빵이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분처럼 누군가에게 빵의 모습으로 가야 한다. 가는데 힘이 부친다면 힘을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만화영화에 뽀빠이라는 것이 있다. 악한들과 싸우다 힘이 빠지면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다시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악의 세력을 이긴다. 성체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영적 에너지를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지난날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셨다면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도록 하자.











34               성체성혈 대축일 <성체성사와 복음화>

변갑선 신부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며(교회헌장 11항),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사제직무 5항). 그처럼 중요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몇 까지 요점을 관찰하여 본다.



 1. 자연(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제2위 성자께서 그 안에 강생하여 오시고, 세상 사물로써 성세와 견진과 성체와 같은 성사를 세우신 것으로 보아, 거룩하게 되고, 성사가 되었다. 성체성사의 경우, 밀과 포도 그리고 잔치(식사)가 거룩하게 된다. 즉 성체와 성탄이 된다.

사물은 성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물과 곡식과 같은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는가?

  

곡물이 먹는 데 가치가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사물엔 고유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 부가가치라고 할 수 있는 증표의 가치도 추가될 수도 있다. 후자의 가치를 정신적 가치라고 할 수 있으니, 이를 증표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저녁에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주는 부인은, 자기남편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하는 물질적가치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으니, 이는 곧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표를 말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남편은 그 음식을 마련한 아내의 깊은 사랑의 증표를 볼 것이다. 성사에 사용되는 물질들은 그들의 고유한 가치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증표의 가치를 발효하는 것이다.

  

성체성사의 경우, 밀과 포도는 풍부한 의미를 깨우쳐 준다. 주님께서 당신을 하나의 밀알이라고 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 땅 속과 밀알이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나, 그대로 있으면 새 것을 낼 수 없다고 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죽고 묻힘으로써 많은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

  

식사의 의미도 너무나 풍부하다. 한 가정의 식구들이 아빠가 땀을 흘려 벌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한 상의 주위에 앉아먹을 때, 화목과 일치의 감정도 또한 풍부한 것이다. 인간에게 먹히는 음식 또한, 자신이 완전히 부서지고 없어짐으로써, 보다 높은차원의 생명체로 승화되는 것도, 또한 신기한 자연 현상인 것이다.

떡과 술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신자들이 서로 일치한다는 뜻을, 곡식과 잔치상에서 깨우치고, 실제로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굳게 믿고, 받아 영하는 성사를 성체성사라고 한다.



2. 참된 현존

  초기 교회는 성체성사에서 사귐과 나눔을 강조하였으나, 중세기부터는 개혁자들이 성체의 현존을 반대하고, 제사적 성격을 부정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현존과 제사의 뜻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근자에 와서는 성체성사의 친교와 나눔에 대하여 다시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성체성사 안에 주님께서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뜻을 부정하는 측도 있다. 실체 변화에 의한 현존을 목적변화나 의미 변화로 바꾸어 설명하려 드는 것이다. 이는 큰 오류이다. 왜냐하면 목적이나 의미 변화는, 실제적 변화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 변화의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목적이나 의미 변화로 설명을 대행시킬 수는 없다. 다만 실체변화를 인정하는 조건하에 보충 설명조로, 목적과 의미 변화를 인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3. 형식(의식 전례)과 삶

   우리 교회의 예절과 의식과 전례를 형식이란 범주 안에 포괄하여 말할 때, 부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형식과 삶을 비교하여 관찰함으로써, 형식과 삶의 조화를 이루는 데 실효를 거두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이고 구약 시대와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한 신자들은, 형식을 통하여 주님을 대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위로를 받고, 신앙심을 고취시킨다. 반면에 진보적이고 신약 시대와 같은 새 시대의 신자들은 실천과 삶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위로를 받는다. 화려한 대성당과 성대한 대미사와 같은 전례 거행에서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기쁨을 나누는 것도 종교의 중요한 행위인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네어 주는 행위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천임은 확실하다.



성세와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성사들을 거행하는 장식과 꾸밈과 같은 형식면에 있어서는 과장이 있을 수 있으며, 실천면에까지 연결되지 않을 때 허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면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자주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서구의 대성당들과 장엄미사에 참여하는 것도 좋으나, 주님을 생활로써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인도의 마더 데레사를 찾아가거나 돕는 것은 얼마나 더 크리스천다운가? 쇄신적이고 진보적이며, 선진하는 교회는 초기 교회로 하루 빨리 되돌아가는 교회이다. 성령께서 하루 빨리 새로 강림하시어 쇄신의 불을 우리 마음 속에 놓아주셔야만 하겠다.



4. 무엇이 더 중요한가? (우선 순위의 문제)

  위에서 암시했거니와, 우리 생활 전체가 그러하거니와 신앙 생활과 성사배령에 있어서도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혼돈하거나, 첫째와 둘째의 서열을 어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체축성을 하여 아버지께 바치고, 신자들이 받아 영하는 성사를 미사라고 한다. 이 미사에서 우리는 불가견적인 신비를 바치고 모신다. 즉 주님의 죽으심과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기쁨과 슬픔이, 다 볼 수 없는 제물이 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가견적인 것도 바친다. 면주와 여러 까지 장식과 헌금과 같은 행위가 이 요소에 해당된다. 가견적인 것, 즉 보이는 것들은 안 보이는 것들의 증표가 되며, 지참자가 된다. 성체 거행에서 우리는 감각으로 느껴야 할 것이 있고, 믿음으로 포용해야 할 신비가 있음을 식별할 수 있다. 믿음도 없고 감각도 없을 때, 미사는 허무한 것이 됨으로 “개”와 같은 짐승에게는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보이는 것 중에도 면주와 다른 장식에는 큰 차이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사랑의 실천과 다른 장식과 형식들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집고 넘어 가려고 한다.

이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교회의 미사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9장과 12장에서, 주님께서는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보다는 불우한 이웃들을 도와주는 자선을 몇 배 이상 좋아하신다고 역역히 말씀하셨다.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형식이나 전례로 이해하고, 봉헌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자선이라고 한다면, 미사는 장식과 형식보다는 이웃들을 돕는 자선 미사로 쇄신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교회가 신자 자신들은 물론 이웃들에게 감화를 준 것은, 놀라운 일을 자주 보여준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란, 기적들보다도 서로 사랑하고 돕는 형제애였음이 확실하다. 그 시대의 신자들이 서로 도와준 결과, 어느 지역에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로 사랑하고 돕는 행위가 빵의 나눔, 즉 미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오늘의 시대의 징표는, 이기주의와 빈부의 격차에 대한 사명감이다. 정치인들이나 일반인들이 힘겨워 하는 과업을, 교회가 성체를 중심으로 차츰 차츰 해낸다면, 복음화가 이 땅에 이룩될 것이며, 주님의 영광은 날로 빛나게 될 것이다. 이기주의와 사리사욕에 휩쓸려 어두워만 가는 사회는, 확실히 밝은 내일을 갈망하고 있다. 이때에 하나의 밀알이 되고, 밥이 되고, 희생물이 되신 주님을 성체성사를 통하여 바라다보고, 마음 속에 모시자는 것이다. 자기 중심의 물결에 휩쓸리다보면, 교회도 나눔의 미사에서까지 나만 알고, 내 본당과 내 교구만 아는 이기적인 형식에 휩쓸려, 축복을 외면하는 행사만을 거듭하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사를 초기 교회와 같이, 주님의 뜻에 따라서 자선 미사로 봉헌할 때, 복음화가 생생하게 성취될 것이며, 미사는 내세를 약속하면서도 현세에서 평화롭고 다정다감한 인간 사회를 이룩하는 데, 머릿돌과 같은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몸과 피와 모두를 주시는 주님을 모시는 신자들이, 이웃들에게 가진 것을 주는 것을 적극적으로 할 때, 축복이 충만한 미사로 쇄신될 것이다.











35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성사와 교회 인과관계

정연혁 신부



성체성사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할 때 많은 학자들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교회는 성체성사를 이루고, 성체성사는 교회를 이룬다」 이런 표현은 인과론적으로 이 두 실제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많이 쓰이는 것으로「교회가 성체를 이루리라」는 말은,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는 존재로서 해야 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고, 「성체가 교회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성체성사로 거룩하게 되는 하느님 백성의 수동적인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데, 그 성체성사의 의미는 용서의 구원, 화해의 d일치, 사랑과 나눔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화해의 이치를 제자들이 계속하도록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이 성체성사를 이룹니다. 즉, 희생제사인 성체를 제단에서 사제들이 이루고, 새로운 계약을 상기하며,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체를 받아 모신 이들이 교회에 머물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비를 실천하면서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체성사와 교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먼저여서 다음에 무엇이 생겼다는 시간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영성의 차원에서 서로가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실제의 관계에는 하나의 또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체성사가 교회에 대해서 보다 원천적이고 근간이 되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즉, 성체성사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신비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체성사로 표현이 되었고,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의 표시와 상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면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런 이유로 완전히 하느님을 표현하는 신비입니다. 반면에 교회는 이 신비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기에, 성체성사가 갖는 의미는 교회가 공동체로 갖는 의미보다 더욱 심오한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교회에서 드러나고, 교회는 성체로 살아갑니다.











36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성사 신비는 신앙의 핵심





 2000년 대희년, 새 천년의 첫 해를 여는 올해 첫 부활절을 앞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세계 사제들에게 보내는 성목요일 서한을 발표해, 사제직의 한가운데에 성체성사의 신비가 자리잡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신비는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스스로의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 다시금 부활해 인류 구원의 위업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매일매일 전세계에서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이 성사를 통해 우리 곁에 실제 현존하신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사제직에 있어서, 성체성사의 신비는 그 핵심이다. 교황은 서한에서 모든 사제들은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자신의 거룩한 고독을 이겨내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위안과 힘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제의 거룩한 삶과 성덕이 평신도들의 참된 믿음을 굳게 해주고, 성화를 돕는다는 것은 물론이다. 교황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은 성체성사의 빛 안에서 우리들의 사제직을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매일 미사에서, 그리고 특히 주일미사에서 이 보화를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성체의 신비스런 변화가 바로 희생제사로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의 거룩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겸손을 본받아, 자신을 끝없이 희생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자 하는 사제들의 성덕은 모든 신자들을 감화시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이끌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성체성사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다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매일, 매주일 미사를 그저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참례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황은 서한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성체성사 안의 현존은 초월적입니다. 과거를 상징적으로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존이 이뤄집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상징이나 표징이 아니라 실제의 살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됨을 교회는 가르친다.

  

우리는 성체성사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고, 매번 참례하는 미사를 통해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신앙생활의 중심에 모시고자 하는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이다.











37        성체성혈 대축일 :   예수님의 몸인 성체야말로 진정한 양식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크나큰 물의를 빚고 있는 큼직한 사건들이 대개 재산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나 돈에서 시작된 것임을 보더라도, 물욕은 인간의 큰 본능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어느 변호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부님, 소송의 200%는 돈 문제입니다." 그분은 소송의 대부분이 돈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적인 인격형성과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하여 수행에 힘쓴 이들은, 과도한 재물의 위험성과 유혹을 경계해 왔다. 전도서의 저자는 재산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우환과 불행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재산 때문에 우환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불운이 닥쳐 재산이 달아나, 제 몸에서 난 아들에게도 물려줄 것 하나 없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처럼 알몸으로 돌아가더라"(5, 9-14). 동양의 성현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비숫한 가르침을 펴왔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잠언집으로 되돌아가서, 신앙심 깊은 그 사람은 부유하게 살면서 악한 생활을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살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선비와 같이 물질에 초연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원했다고나 할까? 잠언집의 그 부분을 현대판으로 바꾸어 “자비하신 주님,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자녀들 교육시킬 정도만 주십시오"라고 청하면,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교육비가 많이 드는 신자들의 생활을 볼 때 안쓰러워서 이런 생각을 해본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청원에는 육체의 삶을 지탱하는 청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의 해결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청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것은 우선 주 예수님의 몸인 성체다. 성체는 천사들의 음식이자 우리 영혼의 음식이다. 매일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은 은총 지위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이다, 잘 준비하여 미사에 참례해 성체를 모시면 주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를 깨닫는 신자라면 결코 등한시할 수 없을 것이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려 할 것이다.

  

레오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서에서 활동하신 예수님, 권위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행하신 바로 그분이 교회의 성사 안에 그대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생활에서 드러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제는 전례의 신비 안에서 만나게 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세상의 구원자․생명의 빵․하느님의 어린 양․선한 목자 그리고 주님이시다. 우리는 미사중에 성사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현존해오는 구원적 행위를 신앙과 사랑으로 받아 누린다, 미사는 신앙의 큰 신비다. 바로 신앙의 신비인 것이다.



사제가 신자들이 모인 자리, 특히 주일미사 때 설교 중에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복음의 내용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옛적에 하신 말씀과 행적으로서, 바로 오늘 이 제단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그분이, 성사적으로 오늘 이 자리에 현존하시어 영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행위를 그대로 재현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본성에 참여함



 전례 중에 빵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온전히 내주시고,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받아 모심으로써 사랑이신 그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는 그분과 온전히 합일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미사의 정점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성화 은총의 선물로 하느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 위격이 거하시는 장소 곧 성삼의 궁전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영성체는 수용자의 영혼에 성화 은총을 증가시켜 성령의 새로운 사명과 성삼의 내주(來住)를 더 풍부하게 한다, 그러므로 미사 중에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으면 미사에 완전히 참례했다고 볼 수 없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는 그분과 온전히 하나될 뿐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성찬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성찬이 거행되는 미사 전례에 더 충실히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세상 안에 투신하여 사람들에게 참다운 이웃 사랑을 전하며, 특별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변두리 인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시는 이들이 모두 그분처럼 살려고 노력할 때 될 것이다,











38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는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인간 사랑을 드러낸다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안하는 겁니다.」 스스로 성체 신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라면 최근 공익광고에 나오는 이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성체 신심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께 다가가려는 마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깊은 의미로 와 닿는다. 반대로 성체에 대한 공경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신비에 대한 묵상은 불가능해진다,



삼위일체대축일 바로 다음 주일에 지내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은 성체성사의 제정과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삼위일체대축일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라면, 성체성혈대축일은 가톨릭 교회의 존재 방식과 근거, 이유, 그리고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신자들은 성찬례를 통해 우리 몸 안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깊이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88년 전국의 신자들이 한마음이 되어 준비하고 성공적으로 치러낸 세계성체대회의, 그때 그 열성을 다시 한번 되살려본다.



◇ 인간적인 의문들



 사실 빵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한다는 것을 이성으로 완전히 납득하고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과연 이 작은 빵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인가." 최근에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러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신자들 중에서는 성체를 평가 절하하고 잘못 해석해,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성찬례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공동 식사로 바라보는 위험스런 시각도 있다, 이런 의문들은 오늘을 사는 신자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1세기의 제렌가리우스(?~1088)는 성체 안에 예수가 실존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징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이후에도 이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성체성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의문들은 중세로 넘어오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강하게 제기됐다. 

  

이런 논란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트리엔트 공의회에 와서 11개의 교리로 정립됐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상징 내지는 비유, 효력면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재적(實在的)으로 존재하며 ▲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1년에 적어도 부활절에는 성체를영해야 하며 ▲ 대죄중에 있는 자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교리를 발표했다. 이는 신앙고백으로 정리돼 교황 비오 4세에 의해 발표됐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 성체, 성체성사의 의미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 서문에서 “영성체 때 영혼이 하느님과 친밀하게 일치되고, 그분의 진리를 깊이 파악했기 때문에, 물고기가 바닷물 속에 있고, 바닷물이 물고기 속에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은 내 영혼 안에 있다"며 성체성사에서 오는 은총을 찬미했다.

  

성체 ․성혈의 사전적 의미는 빵과 포도주라는 외적인 형상 속에 실재로, 본질적으로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다. 이 성체는 세상 끝 날까지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실재적인 현존이다. 그리고 미사성제(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계속됨으로써, 모든 인류는 구원된다.

 또 이 성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몸이 현존하는 성체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하게 하고 성부께로 이르게 한다. 성체는 우리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 신앙인에 있어 성체에 대한 신심은 매우 중요하다.



◇ 실천적인 문제들



  이처럼 성체의 의미가 더없이 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신자들의 성체 신심은 미약한 것처럼 보인다. 주일미사를 통해 예수의 성체변화에 감동받지 못하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신자들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20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실재적으로 매일 미사 안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또 성체와 관련된 성시간, 성체강복 등의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성체조배는 진리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뜨거움을 맛보게 한다. 성체조배에 임하다 보면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참된 평화를 느낄 수있다.



 ◇ 공동체와 성체성사



   성체성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공동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를 수 있으며, 같은 잔치에 참여하는 형제들과도 일치를 이를 수 있다. 이처럼 성체성사는 성사 그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같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신자들은 한 공동체로서 서로 일치되어야한다. 사실 성체를 함께 모시는 신자들은 참된 공동체의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성체 안에는 한 그리스도가 있고, 함께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초자연적인 생명의 나눔, 생명의 빵을 나누는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는 단순히 하느님과 신자 개인과의 교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신자들은 공동체의 성장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 공동체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성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과 피를 직접 내주신 그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점에서 성체는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인간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평화를 오늘도 모 든 이와 나누려고 하신다.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는 우리는, 이러한 ‘평환 확산'의 최선봉에 서야 한다.











39         성체성혈 대축일 : 성체를 자주 모시면, 정신과 영혼에 건강



●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강해질 것입니다. 성체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영광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도록 깨끗한 양심을 밝혀줄 것입니다. (성 예루살렘의 치릴로)



●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신다면 여러분 안에 생명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몸을 먹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생명을 간직한다면 역시 그분과 한몸이  됩니다. 이 성사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주어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 그리스도는 두가지 방식, 즉 피(음료)와 살(음식)로 우리에게 온전하고 완전하게 존재하십니다. 그분을 받아 모시는 사람은 그분 곁에 머무르며, 그분을 깨어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게 완전하게 가집니다, 한번 받아 모시든 수천번 받아 모시든 간에 항상 매 한가지로 오시며, 언제나 그분은 그대로 계십니다. (성 아퀴노의 토마스)



● 영성체는 내적, 외적 두가지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가지 모두 거룩한 성실과 헌신적인 갈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열렬한 갈망은 영성체를 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영혼이 은총생활을 누리기 위해 먹는 거룩한 음식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지녀야 합니다.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



● 영성체 후 시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의 스승께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에 감사의 표시로 입맞추고, 우리에게서 떠나시지 않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



● 세속적인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자주 영성체를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불완전함을 정화하고, 곤궁에서 벗어나고, 근심에서 위안을 찾고, 나약함에서 원조를 얻기 때문이라고 하십시오. 영성체를 자주하는 사람은 악에 더럽혀질 수 없을 정도로 생명과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이 생명을 주는 살을 먹으면 죽음을 가져오는 성향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 내가 방황하지 않을 때는 영성체를 한 후뿐입니다. 그때 내 주님께서 당신이 가장 힘있고 완전하며 완성된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여기에 인간을 사랑랬고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자신을 내어 주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태운 가슴이 있다.(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 영성체 없이는 현세에서 참된 행복도 없고, 삶은 견딜 수 없게될 것이다. 우리는 영성체로 기쁨과행복을 얻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성사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려고 했고 당신만이 채울수 있는 크고 널은 가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많은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자주 방문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에게 은총을 조금만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가끔 방문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성체 안에 계신 구세주를 방문하는 것은, 악마를 이기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성체성사 없이는 즉 청소년들을 제단과 감실과 영성체대로 인도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성공리으로 할 수 없습니다.(성 요한보스코)











40                 미사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며 감사

구약시대 일곱 절기 그리스도 구속과 영광의 예표

김 상옥 수녀



오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 드리는 정기적인 제사와 제물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그 중요성을 말해준다. 정한 때에 바치는 공식 제물의 양과 내용에 대하여는 목록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에제키엘 예언서 45, 18~46, 15절 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설명된 제사의 가르침은 시나이산에서 이미 받은 것이다( 출애. 23, 14~19). 레위기 23장 전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축절에 대하여 이미 상세히 나열한 바 있어서 민수기 28~29장은 이 레위기 23장을 더욱 확실하게 보안한 해석으로 보인다. 제사의 예물의 이름에 대해서는 레위기 1~7장; 민수기 15, 1~12 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의 규정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제사의 중요성과 그 실천에 있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게 형식적인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참 제사의 의미를 깨달아 알고 하느님께 서원한 규정을 잘 지킬 것을 바라는 뜻에서 다시 한번 제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제사의 목적은 '불에 살라 향내를 피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곡물을 삼가 정한 때에 어김없이 바치는데 있다' (28, 2~3). 여기서 야훼께 드리는 제사는 8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날마다 바치는 번제,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 매월 초하루에 드리는 제사, 무교절에 드리는 제사, 추수절에 드리는 제사, 신년제에 드리는 제사,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 초막절에 드리는 제사 이다.



날마다 바치는 번제물 (28, 3~8)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9장 38절~46절에 더욱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유다 종교행사의 중심이 되었다. 오직 유배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폐지 당하고 성소의 터까지 파헤쳐 졌으며, 날마다 드리는 제단 위에 부정한 것을 올려놓았다는 환상을 다니엘이 보았다(다니엘 8, 11~12 ). 같은 다니엘 11장 31절과 12장 11절에서는 정기 제사의 파괴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을 보여준다.



불살라 향내를 피우는 제사는 번제라고 하는데 번제단은 우리 죄를 전가 받은 짐승 (제물)이 희생되는 곳이다. 죄인이 제물을 가지고 왔을 때 제사장은 그 제물에 대하여 흠이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한다. 하느님 앞에 드려질 제물은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한 제물이어야 한다.



그 제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도 티도 없는 온전한 제물로 우리 죄인을 위하여 희생되셨다. 여기에 대하여 제1대 교황이신 사도 베드로의 말씀은 너무나 확실하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1, 18~19).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받아서 제물에 안수하여 죄인의 죄를 전가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값은 죽음 밖에 없다. 그 죄인은 죽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번제단에 속죄하는 길을 만드신 것이다. 죄를 뒤집어쓴 양은 희생시켜 피를 쏟게 하여 죽게 한다.



그리고 그 피는 제단 뿔에 바르고, 제물은 태워서 하느님께 드린다. 제단의 뿔은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고 구원의 상징 이기도 하다. 열왕기 1장 25절에 아도니야가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의 뿔을 잡았다고 했다. 죽을 죄인이라도 성전에 와서 제단의 뿔을 잡으면 용서를 받았다. 이 제단의 뿔은 죽을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구원의 신비에 비유 할 수도 있다. 뿔은 능력과 구원을 상징한다.



구약시대의 많은 절기들이 신약시대에 와서 '단 하나' 로 모아졌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구약시대의 일곱 절기 모두는 그리스도를 가르쳤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영광의 예표였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만찬' (미사) 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요, 그 분의 다시 오심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미사는 구약의 모든 절기의 제사들의 통합이다!' 무엇 보담 미사는 가장 완전한 감사( Eucaristo)이고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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