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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14일 (금) 10:03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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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모음 ”
 

주님 수난 성지주일



        15. 백은기 신부(나)/24           16. 김몽은 신부(나)/28

        17. 장금구 신부(나)/29           18. 김기홍 신부(나)/30

        19. 김몽은 신부(나)/32           20. 최흥덕 신부(나)/33

        21. 김영진 신부(나)/35           22. 최영철 신부(나)/37

        23. 신원철 신부(나)/39           24. 김영남 신부(나)/40

        25. 강길웅 신부(나)/43           26. 신은근 신부(나)/45

        27. 주님의 기도/47                 28. 주님의 기도/48

        29. 주님의 기도/50                 30. 예수 수난기/52

        31. 서울교구 주보/56                     32. 서울교구 주보/57

        33. 박정미 수녀/58         









15.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백은기 신부



지금 주님께서는 내 마음이 죽도록 괴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 쓴잔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울부짖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피와 땀이 얼굴을 적신 가운데, 우리를 찾고 계신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골고타 산으로 죽음의 행렬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이 십자가의 수난에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모읍시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난은 우리 자신들이 만든 것이요, 그러기에 죽음의 결과가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은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가 하느님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데서 왔다고, 창세기 저자는 진술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결과는 곧 인간의 번뇌이며, 시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이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노여움만을 삿다기 보다, 반대로 많은 관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해 주신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시지 않으시려고,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서, 감히 생각지도 못할 하느님 성자께서 세상에 오시게 되었기 때문에, “오! 복된 아담의 죄”라고까지 말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와 고통이 설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사와 인간의 구원사도 서로 밀접한 함수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와 함께, 수난의 역사와도 같이 살아왔다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생명을 잃었지만 주님은 우리 인간이 지은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르시고 목숨을 건져내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과 같이 율법은 죄를 가져왔고, 죄는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고통은 영광으로 바뀌게 되고,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과 수난을 잘 참아 받기만 한다면, 전화위복의 은총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세상사에서도 영예와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따르는 모든 고통과 수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형제들은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향한 고통을 받으며, 인간적으로 받아야 할 수모와 죽음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만 주님을 실제로 따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기는 쉬울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아픔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에 참여한다는 일은, 바로 그분의 부활사건에 일치하는 것과 동일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수난과 고통을 강조하다 보면, 그 안에 진정 담겨져 있는 부활의 신비가 오히려 빛을 잃을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의 고난 사실이 결코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신앙은 주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생은 고난의 역사요, 죽으심에 이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들레헴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생 후 몇 달이 못되어 에집트로 쫓겨가시는 생활이었으며, 믿고 있던 12 제자들 몇 명에게서는 배신을 당하신 슬픔의 생활을 하셨고, 끝내는 지지 받던 군중들로부터 고발 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수치스런 최후를 맞으시던 비극적인 운명을 맞으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받으신 고통은 인간들이 받아야할 그런 고통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대속으로 받으신 것이었고, 우리는 우리 조상과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마땅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주의 수난에 동참하기만 한다면, 그 고통은 아름다운 속죄의 제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통의 신비를 이해할 줄만 안다면 그 누구도 고통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한 변화요, 순종에 따른 전환입니다.



경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수난에로의 행렬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는 가로목이 2m요, 세로목이 3m가 훨씬 넘으며, 그 무게는 보통 삶의 체중에 두 배인 100kg이나 되는 나무 십자가였습니다. 온갖 시련과 모욕과 갖은 태형을 받으신 예수는 이제 그 거룩한 얼굴에서는 괴로움마저도 느끼시지 못하는 극한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을 보라(요한 19,5). 그는 온 몸에 기력이 쇠진하였고, 허기가 지며 목은 타는 듯 기갈이 나고, 머리에는 가시관의 상처로 찢겨 터지고, 얼굴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셨습니다. 죄인으로 판단 받아 붉은 용포를 입으셨으며, 머리 팻말에는 모욕적이고도 수치스런 “자칭 유대인의 왕”(요한 19,21)이란 죄목이 붙여졌습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배고파 굶주렸을 때는 빵의 기적으로 배를 불려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는 치유의 기적을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잊어버리고 철면피하게도 못된 본성의 호기심 때문에 성자의 죽음을 시험해 보려는 서슬은 살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는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십니다. 누가 이 사람을 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증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까지도 내놓겠다고 장담하던 제자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자기 신분이 혹시라도 알려질까봐 군중들 틈바구니에 숨어 몸과 마음을 변장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편 찢어진 살에는 말라붙은 피가 엉겨 검붉은 구슬을 이루고 있으며, 기운이 다 빠지신 예수는 돌판에 발이 부딪혀 엎어지십니다.



허덕이는 숨소리는 쐐기를 박는 소리와도 같이 들리고, 눈에서는 푸른 별빛이 몽롱하게 스쳐가고 있습니다. 죽음의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버지 하느님은 정말 나를 져버리시고 계시는 것일까 하고 수심이 가득 찬 모습으로 시선을 보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죄 값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때문에 무죄하신 주님께서는 이처럼 고통과 갖은 시련을 받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으로 주님을 위로해 드리고 있습니까?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나무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로니카와 같이 피에 젖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릴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 얼마만큼이나 동참하고 있다고 봅니까?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고 살려낸 이 목숨을 무엇으로 갚아드릴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제 주께서는 인간으로서는 최후의 순간을 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 꺼져 가는 심지처럼 동공은 반쯤 열려 희미해져 가는 시선과 갈증에 시달려 말려 들어간 혀며, 핏발이 서 힘줄은 굴곡을 이루시고, 온 몸은 경련과 함께 창백해지시고 있습니다.



친애하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곁에 이런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그분을 참으로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로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또 이처럼 처참해지신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평생토록 믿고 바라고 사랑을 약속하겠다고 결심이 나올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누구나 그리스도를 알고는 있지만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좋아할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줄 압니다. 고통 자체는 싫어할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누구나 단정해서 거부할 수만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고통의 결과는 기쁨과 희망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화 데레사는 그의 마지막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고통스럽게라도 참아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해 질 수가 있을까?”하고... 수난은 하느님이 인간 구원과 영생을 향한 신앙의 선물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과 수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구원이 있으며, 신자들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한 번 들어 보기로 합시다. 그리스도의 수난사 속에는 우리 모든 교회와 전 인류의 슬픔과 아픔이 합치고 있는 보편적인 사건이며, 기쁨과 희망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는 모범적인 사건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자신을 한 사도로서 당하는 자기 수난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로의 연장이며(골로), 뿐만 아니라 그의 수난 자체가 그리스도 교회공동체 전반에 이르는 연결점이다(로마 8,17)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영적이고 생명적이며 초자연적인 운명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아픔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 유익하다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합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이며, 그리스도와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모든 신앙 형제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에로 나아가는 길은 구체적으로 세속권과 물욕권과 본능권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구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자제하고 뉘우쳐 개선하며, 이해함으로써 일치하고,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남을 향한 봉사생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진실로 용서해 주어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며, 자신을 정의에 의한 양보로서 서로 가진 것들을 현실적으로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우리는 신앙적이며 형제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고통과 수난을 참고 이겨 나가도록 하는 길은 신앙적인 지혜와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이 사순절에 고통을 참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인내하여 영원한 생명의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6.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김몽은 신부



모든 이들이 빨마 가지를 손에 들고, 크게 외치는 소리, <높은 데서 호산나, 큰 자비를 베푸시러 오신 이여, 찬미 받으소서...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영광의 임금이시다’ 높은 데서 호산나, 큰 자비를 베푸시러 오신 이여, 찬미 받으소서>(입당송).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임금님으로서 예루살렘성에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분의 치욕적인 십자가의 수난을 함께 묵상하는 날이다. 그래서 복음도 (B)해 마르꼬 14,1-15.17이나 혹은 동 15,1-39 중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된다.

우리는 2천년 전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주님의 영광과 수난, 그리고 궁극적인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는 자로서, 오늘의 복음을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서 받아들인다. 20세기의 현란한 문화는 인간을 더 없는 절대자로 착각케 하여, 스스로가 왕의 위치에 올라감으로써, 같은 동료 인간을 노예로 추락시키고도 모자라서 아예 예외적인 물건으로 소외시켜 버렸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데서 호산나!” 인간이 달나라를 정복했을 때, 인간은 만능자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두뇌를 자랑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가장 비천한 존재로 대우를 받고 있다. 전쟁, 살육, 기아, 질병 그리고 갖은 패륜적인 악들이 인간을 엄습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끼리 서로 불신하고 짓밟고 모욕한다.



예루살렘 입성 때에 그렇게도 환영하던 ‘호산나’의 소리는, 그 같은 군중의 입에서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하는 저주의 외침으로 변한다. 제왕의 자리에 올라앉은 같은 인간이 너무나도 처절한 살육과 굶주림의 모습으로 돌변하는 현세를 방불케 한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사회 안에서, 우리 인간의 권리를 회복시키고, 그 가치를 높이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리스도 예수는...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가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찬양하게 되었다”(오늘의 제 2독서).



지금은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 인류의 입에 오르고 있다. 특히 우리들 크리스천에 의해 주님은 만유 위에 공경 받는 분으로서 계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주님을 모독하고 있을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자성해야 한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은 바로 그러한 시간이다. 십자가를 위하는 마음에서 십자가를 모독하는 신심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미워하는 행위들이 그것이다. 이번 주간 동안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자로 변모하자.











17.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장금구 신부



오늘 전 세계가 각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손에 손에 파아란 나무가지를 높이 들어 흔들며 “다윗의 자손 예수께 호산나!”를 힘차게 부르면서 행진에 나가는 행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행렬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다니아를 떠나 많은 군중 속에 섞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그 모습을 회상케 하는 행렬입니다. 그때의 행렬이 규모로 보나 동원된 인원으로 보나 비록 초라하기는 했지만, 그 시대의 행렬로는 장엄한 행렬이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말은 안장도 없는 빌려온 새끼 나귀이기는 하나 보행자들 속에 예수님 모습이 홀로 뛰어났고 제자들은 그들이 입었던 겉옷을 벗어 나귀등에 깔아 보료로 대신했고 군중들은 저희들의 임금으로 오시는 줄 알고 목이 터지도록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군중들의 심리분석을 해보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베다니아에서 라자로를 부활시킨 것과 같은 무슨 큰 기적이나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며 뒤따랐고, 예수님의 교훈도 듣고 기적도 많이 보아온 군중은 즈가리야의 예언 중에 있는 한 구절 “시온의 딸들아 겁내지 말라. 네 임금이 가신다. 새끼나귀를 타고 가신다”하신 것이 예수님께 대한 말로 믿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다고 착각하고 정신 없이 날뛰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린아이들은 저들을 보호해 주시고 사랑으로 쓰다듬어 주시던 어른이 오신다고 기뻐 날뛰며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두려워하면서도 군중의 환영이 너무 열광적이어서 제지하지 못하고 경계만 할 뿐이었고, 예수님 자신의 모습은 수심에 쌓인 모습이었습니다.



성서에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니 밖에 드러나는 표시뿐 아니라 숨은 마음속까지 아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지금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저들에게서 며칠 후면 배신당하게 될 것을 내다보셨던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금은 묵묵히 따르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 죽일 궁리만 하고 있고, 군중들은 예수님을 알기를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의 지배에서 구해 줄 왕으로만 알고 뛰놀지만 저들의 희망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는 며칠 후에는 “십자가에 못아 죽이시오”라고 외칠 것도 보셨으니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광경을 회고해 볼 때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책망할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해마다 이 예식에 참여하여 푸른 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불러왔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만면에 미소를 띠신 얼굴입니까? 수심에 쌓인 비통한 얼굴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거든 우리의 태도를 반성해 보면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나서 며칠이 지나서야 반역의 행동을 취했지만 우리는 기도로써 “주님, 찬미하나이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등 많은 말로 주를 찬미하지만, 그 자리에서 돌아서면 하는 행동은 그 반대입니다.

주님의 뜻이야 이루어지든 말든 내 뜻만 성취하면 그만이라는 태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내게만 유익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생활해 나아가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질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은 몰라서나 그랬다고 핑계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배신은 알고도 역행하는 것이니 예루살렘에서 우신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고는 통곡하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지(聖枝)를 받아들고 행렬에 참여할 때, 한낱 예식이라고 생각지 말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가 부르는 노래와 찬미가를 실천하여 행동으로 옮길 결심을 굳게 다짐하면서 참여합시다.

“사랑하는 자녀들,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I요한 3,8)











18.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김기홍 신부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은 온 유대 백성들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백성들은 자기의 겉옷을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손에 들고 “호산나!”라고 부르짖으며 주님을 환영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으로 로마의 정권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다라는 환호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자신이 평화의 왕임을 드러내셨으나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자기들을 로마 정권에서 해방시키는 승리의 왕으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한국 속담에 “도끼 등에 칼날을 붙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서로 맞지 않는 것을 붙이려 하나, 그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인간들을 죄악의 압제에서 구출하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은 유대인들의 희망인 세계 정복자로서의 민족적, 역사적 염원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에 대한 실망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선고를 내리게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는 가지각색입니다.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그들보다 인기가 더 높아지니 그것이 두려워 몰래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음모를 꾸미었으며, 이스가리옷 유다는 어떤 여자가 예수님께 바르는 향유가 아까워서 그 향유를 낭비하기보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님께 죄가 없음을 확실히 알았으나 자기의 자리가 위태로워 주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주었던 것입니다(마르 15,6-15).

유대인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권세와 부귀, 시기와 부정부패 때문에 평화의 주님을, 구원의 주재자이신 예수님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도 유대인처럼 우리 손에 푸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윗의 자손이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 살고 있지만, 과연 나는 주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떠한 찬미를 드리는지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전에 나만을 생각하고, 내 뜻만 성취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요? 돈이면 언제든지 바리사이파에게 주님을 넘겨주는 유다처럼 우리의 신앙을 돈만 못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지요?



빌라도처럼 자기의 권력이 위태로울까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는지요?

베드로처럼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르  14,31)고 약속을 하지만, 세 번이 아니고 몇 수십 번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지요?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주님께 대한 희망을 결코 잃지 말고 베들처럼 진정한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예식을 한낱 지나가는 형식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일상 삶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찬미의 호산나!’를 부릅시다.

“사랑하는 자녀들,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만 주님을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I요한 3,8).











19.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김몽은 신부



오늘은 예수 수난을 기억하는 수난주일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이 빨마 가지를 흔들며 열광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성지주일이라고도 한다. 특히 금년에는 마르꼬가 전하는 수난의 기록을 복음으로써 들려준다.



우리는 오늘 미사에 성지를 받아들고, 주님의 입성을 환호하는 마음을 되새긴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예수님의 암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진정 그들은 자기들의 구세주가 오셨음을 알고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오산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지상적인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즉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전 세계를 지배하고, 모든 나라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왕, 즉 왕 중 왕으로서 임하시어, 모든 이스라엘인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지상적인 왕국을 건설하시지 않으시고 천상적 왕국을 건설하심으로써 전 세계의 인류를 하나로 모으시고자 하셨다. 그 왕국은 영원하며,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영원히 계속되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신다. 그것은 현세의 것에 눈이 어둔 당시의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그 당시의 지식인, 부유층, 정치가, 제관들은 더욱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심지어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인, 재벌가, 지도자층에 속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이, 이 지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정신적, 천상적,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그들 자신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불행 속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결과가 된다.



한편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왕으로 모시던 군중들은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갑자기 분노로 돌변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들의 그 얄팍한 이기심과 현세적, 쾌락적인 변덕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역시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활태도를 바꾸지 않고 여전히 이 세속적인 것을 주님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그러한 신자들 때문에 더욱 상처를 입으신다. 예수님은 그 당시 타민족에 의해 살해당하시지 않고, 완강한 현실주의자인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당신의 협력자인 제자의 한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팔아 넘기는 유다는 아닌지 살펴보자. 믿음의 자세가 확립되지 못했을 때, 아직도 세속적인 것에 가치관을 두고 있을 때, 우리는 신자이면서도 유다이다. 오히려 믿지 않는 자보다도 못하다는 결론이 된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바로잡자.



자기 중심적인 믿음, 이기적인 믿음, 즉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 구복이나, 자신만이 천국에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 등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태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도 무관심했던 사람들과 같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도, 신자들의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신앙태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자.











20.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최흥덕 신부



오늘은 부활주일을 한 주일 앞둔 성지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지상생활을 청산하고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마지막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인간의 악 중에 최악인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원수들의 면전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즉 분명히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성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 입성을 하십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성 교회는 의미심장하게 마르코의 수난사화를 봉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금 들은 수난사화를 상기하면서 한 가지 문제만 같이 묵상해 볼까 합니다. 즉 수난사화가 전해주는 의의 중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인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은퇴하신 신부님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저보다 먼저 그곳엔 명문대학교 학생이 와 있었습니다. “신부님, 진짜로 예수가 이 세상에 살다가 죽은 인물입니까? 혹시 바오로나 베드로의 상상에서 나온 가공의 인물이 아닙니까?” 그 대학생의 물음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여보게, 자네가 대답 좀 해주게, 자네와 이분은 대화가 통할테니까”하셨습니다. “아! 이제 서구사회의 그 고리타분한 관념론이 순박한 한 민족에게도 침입을 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 청년과 열변을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계산을 즐겨하는 서유럽인들은 벌써부터 예수는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순박한 우리 민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수가 신화적인 인물이라면, 방금 들은 마르코의 수난사화 역시 소설의 한 대목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신앙은 환상이나 허공에 뜬구름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물론 수난사화의 대목들이 글자 그대로 모두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다고는 단언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사건의 주제 즉 빌라도 치하에서 형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점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로마 역사서를 저술한 플라비우스 요셉푸스도 예수라는 인물이 국사범으로 처형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기 다른 자료를 수집하여, 독특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복음을 저술한 복음사가들, 즉 마르코, 마태오, 루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늘 수난사화는 그 좋은 예인 것입니다. 더욱 무게 있는 증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2000년 역사입니다. 가공의 인물이었다면, 이 기나긴 세월동안 그리스도교는 생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사실 역시 예수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그분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2000년 전에 생존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면 결코 그분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의 역사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 인간과 똑같은 조건으로 사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고 계신다고 확고하게 믿는 분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잘못 봐서인지는 모르지만 현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신자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믿지 않는데서 오는 갈등입니다.

그분은 분명히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지금 여기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믿어야만 합니다. 신앙의 눈을 떠야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아야만 그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마르코의 수난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죽으심은 부활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부장처럼 “그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해야겠습니다. 마태오 16, 16의 베드로와 같이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조를 말해주는 사도신경을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이번 성지주일을 맞이하여, 단 한 가지라도 뼈에 사무치게 명심합시다. 즉 취침 전에 사도신경을 한 번씩 묵상하면서 외우고 잠자리에 들기로 합시다.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아멘.











21.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두 얼굴의 사나이 

김영진 신부



며칠 전, 추적 60분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대구 연쇄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연쇄 살인사건의 두 얼굴'이었다. 내용은 살인사건의 주인공 이군에 대한 것이었는데, 살인을 저지른 이군이 평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직장에선 결근을 하거나 지각하는 법이 없었고, 부모님께는 월급 봉투를 있는 그대로 드리는 착실한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또 주변에 사는 어른들도 인사성 밝고 성실했던 이군이 그런 끔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타인의 눈에는 착하고 성실했던 사람, 그러나 자신을 약올렸다는 단순한 사건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 그리고 같은 상황이 온다면 또 다시 그런 죄악을 저지를 것이라고 말하는 무자비한 사람, 그러한 이군의 두가지 얼굴을 취재한 일종의 드라마로 끔찍했고 가슴 아팠으나, 솔직히 말해 나는 이군을 손가락질할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나는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가 지적해준 대로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모순된 삶이, 내 안에 존재하는 한, 나도 두 얼굴의 사나이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더니, 나뭇가지가 채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사용하였듯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얼굴이 내 안에 존재하는 한, 나도 두 얼굴의 사나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는 사라져 가는 얼굴이며, 하나는 남는 얼굴이다. 또 하나는 낡고 누추한 가면의 얼굴이요, 또 하나는 하느님을 닮은 얼굴이다.

이 두가지 얼굴 때문에, 인간은 좌절하고 절망하며 실의에 빠지기 일쑤다. 용서를 말하면서도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박애 정신을 말하면서도 희생하지는 않고, 나는 쏙 빠지면서도 다른 이는 싸움을 붙이고, 아내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좋은 크리스천인 척 가면을 쓰고 있다.

또 거룩하고 정결한 척하고, 인기전술을 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총으로 상대방을 무차별 공격하고, 앞에서는 이 말하고 돌아서서는 저 말하고,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는 등, 인간은 수없이 많은 두개의 얼굴을 만들며 살아간다.



사라져 가는 얼굴과 남는 얼굴

 배우지 못한 이들보다는 배운 것이 좀 있는 이들에게, 가지지 못한 이들보다는 가진 것이 있는 이들에게, 비천한 자리에 앉은 이들보다는 벼슬이 좀 있는 사람들에게, 두개의 얼굴은 더 숙달되어 있고, 상식화되어 있다고 말하면, 배운 이들, 가진 이들, 벼슬 있는 이들의 화살이 독하게 날아들테지만,  화살을 거두고 그대들의 손에 쥐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라! 지식이라는 나뭇가지로 또 재물과 권력이라는 나뭇가지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찌르고 때렸으며 휘둘렀던가!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엘리어트는 현대인을 박제 인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껍데기는 있으나 알맹이가 없는 박제인간, 즉 몸뚱이는 있으나 마음과 양심이 없고, 지식은 있으나 진실이 없으며, 재물은 있으나 자비가 없고, 권력은 있으나 봉사가 없는 인간을, 엘리어트는 박제인간이라 표현한 것이다.

   내가 아침마다 오르는 산자락, 그 자리에 언제나 서 있는 바위와 숲, 바람과 새 소리, 밟을 적마다 소리를 내는 가랑잎 부서지는 소리들 중 ,그 어느 것도 인간의 두 얼굴처럼 박제된 것이 없는데, 유독 사람만은 두 얼굴에 익숙해 있고 박제되어 가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인간의 두 얼굴이 바로 사랑을 죽이고, 진리를 파괴하며, 정의를 모욕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랑이고 진리이며 정의이신 예수를 환영하던 나뭇가지가 채찍으로 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은 것이다.

인간의 두 얼굴, 즉 가면과 위선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박제된 인간이 참 인간을 심판한 것이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간사한 인간의 언어가 세상의 구세주를 죽인 것이다.



“나의 두 얼굴이 예수를 죽였다”

  인간에게는 사라져 가는 얼굴과 남는 얼굴이 있다고 한다. 사라져 가는 얼굴이란 세속적인 이기심, 욕심, 위선, 교만, 가면의 얼굴이요, 남는 얼굴이란 사랑과 진리, 정의와 평화의 얼굴, 즉 하느님을 닮은 얼굴이다. 사라져 가는 얼굴을 만들지 말고, 남을 수 있는 얼굴을 만들자.

낡고 누추한 가면과 위선의 얼굴을 만들지 말고, 하느님을 닮은 본래의 얼굴을 만들자. 사라져 가는 얼굴이, 그리고 낡고 누추한 가면과 위선의 얼굴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였음을 기억하자.

  

우리 중에 누가 연쇄살인사건의 두 얼굴 이군에 대하여, 자신 있게 돌팔매를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두 얼굴, 나의 위선과 가면, 하느님이 주신 내 모습이 아닌 세상 것으로 박제되어 버린 내 모습이, 지금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내가 어디에다 돌팔매질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두 얼굴이 남편과 아내를, 가정과 사회를, 그리고 예수를 죽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얼굴, 하느님을 닮은 얼굴을 만들게 될 것이다,











22.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1-10 (나)  희생 실종시대

최영철 신부



“야훼의 종"에 대한 예언

오늘 주의 수난 성지주일을 시작으로 성주간이 시작된다. 2천년 전 예수님의 수난은 오늘 전례 예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듯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환영하는 군중과 함께 시작된다.

그렇게 환영하던 군중이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마르 15,14)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종에 대한 노래" (이사 57, 4-7)를 통해서 그 종의 사명, 즉 소명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수난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고, 제2독서에서는 그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수난과 죽음으로 끝장나는 허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미 예언된 종의 신분(필립 2,7)으로 낮추어서 죽기까지 순종(필립 2,8)하신 분이며, 하느님에 의해서 들어 높임 (필립 2,9)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으로서 수백년동안 예언되었던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창시자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되지는 않았다.

소위 계시종교와 자연종교의 차이를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말이기도 하다.



속죄의 제물이 되신 주님

어쨋든 오늘 주의 수난 성지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들어서는 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내놓으시기 위한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위한 속죄의 제물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이라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그것은 하느님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죄는 하느님에 의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서 속죄제물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그렇게도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의 수난 성지주일을 맞이해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현실적으로 더욱 깊게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있는 반면에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있어서 십자가의 의미는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지 않나 한다. 그것은 이 현실의 분위기와 가치관이 너무나도 자기 위주의 것으로 치닫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가치는 아주 없어진 지가 오랜 듯하다는 말이다. 헐벗고 배고팠던 시절이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닌 듯한데, 그 때 우리는 희생의 가치를 깊이 느끼면서, 너를 위해서 희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희생의 개념마저 상실한 시대에 우리는 서있는 듯하지 않은가.



십자가의 사건이 인간을 위한 하느님 자신의 희생이라면, 그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 삶 안에서 깊은 의미를 가지고 현실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신자이든 아니든 우리의 삶은 십자가의 의미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너를 위한 회생의 가치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희생이 배제될 때, 거기에는 인간성의 몰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능한 재능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졌다 하더라도 서로 희생할 줄 모르면, 그 모든 것은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


참으로 한 인생을 사는데 보람이 없다면, 그 인생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들 삶 안에서 십자가의 삶이 없는 한, 보람을 찾을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주의수난 성지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들의 삶의 내용을 십자가의 의미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날은 참으로 은총의 날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너 때문에 아픈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떤 희생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바보같은 생각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











23.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1-10 (나)  신앙의 힘

신원철 신부



신앙은 힘입니다. 기쁜 일은 더욱 기쁘게 해주고 고통스러운 일은 아주 작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ꡒ수고하고 짐 진 사람은 다 내게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편하다.ꡓ라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신앙이 ꡐ힘ꡑ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분은 부모님이십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저렇게 살아가실 수가 있을까? 저런 힘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품게 만들었던 어머님의 삶, 무척이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워주신 어머님의 삶은 신앙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수줍게 고백하시는 아버님의 변화된 삶은 신앙이 엄청난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ꡒ신부님 우리 큰아들 놈은 하늘나라로 유학 갔습니다. 그런데 그 놈이 참 효자예요. 그 놈의 빽이 아니었다면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고산 성당의 사목 회장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 놈이 하느님 곁에 있다고 확신해요. 먼저 간 아들놈이 좋은 곳에 있다는 확신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신부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ꡓ 라고 말씀하시는 사목회장님도 분명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ꡒ나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나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나 다른 사람이 느껴보지 못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네. 공평하신 하느님이…ꡓ라는 시를 어머니의 도움으로 힘겹게 읽어가던 젊은 자매님, 온 몸이 틀어져서 단 한 순간도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말도 제대로 못하던, 그래서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던 자매님의 하느님은 공평하다는,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는 신앙고백 또한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힘이 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오늘 수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 수난의 일생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처럼 행복한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이 세상 사람중에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되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20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하고 목숨까지도 바치고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확신에 찬 어조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의 십자가를 ꡐ기쁨은 더욱 크게 해 주고 고통은  아주 작게 만들어주는 신앙의 힘ꡑ으로 기꺼이 지고갑시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나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중한 가족들과 친척, 이웃들과 손에 손잡고 그 나라에 들어갑시다. 아멘











24.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1-10 (나)  예루살렘 입성

김영남 신부



성지주일이 되면 나에게는 어렸을 때, 좀 더 멋있는 나무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고 축성을 받기 위해서 예쁜 향나무 가지를 구하기 위해 애쓰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때의 어린 마음에도 성지주일 전례는 참으로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같은 주일 예절인데도 미사 전에는 길에 자기네 겉옷을 깔고 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호하는 군중에 관한 복음말씀을 듣다가, 반시간도 채 못되어 미사 동안에는 바로 그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무섭게 외치는 복음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올리브 산 쪽에서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분이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 제자들에게 그 입성을 준비하도록 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주는데, 이는 예수님의 수난이 우연히 발생한 불행한 일들의 결과가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시며 자원하여 받아들이신 결과라는 것을 미리 말해준다.



“예수께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나귀는 사실 “말(馬)”을 갖기에는 너무 가난하였던 사람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짐승이었다.

그러니 나귀타고 오는 모습, 더구나 새끼나귀 타고 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한 행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귀타고 오시는 그분을 군중들이 마치 왕의 행차라도 환영하는 듯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기까지 하면서 환호한다.



예수님을 앞서거나 뒤따르던 군중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며 환호하는데, “호산나”라는 말은 본디 “[제발] 구해주소서!”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는데, 큰 행렬이 있을 때 백성이 ‘환호’의 표시로 사용하곤 하였다.

우리 말의 ‘만세!’라는 환호의 어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는 시편 말씀은 본디, 대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예루살렘 시민들이 환영할 때 부르던 노래였는데, 여기 복음서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 말(馬)은 많은 경우에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어서 그런지 힘과 전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비하여, 나귀는 전쟁과 싸움을 거부하는 서민들의 평화와 겸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복음사가는 새끼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평화와 겸허의 메시야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부활의 빛 속에서(참조 요한 12,16) 이러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라는 즈가 9,9의 예언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참조: 마태 21,5; 요한 12,15).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곧 메시야”로서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세우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세우시는 평화와 정의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였던 대로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제압하는 방법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약하고, 낮은” 방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방법으로” 이룩된다는 것을 복음말씀은 말해준다.



이런 ‘메시야’의 모습은 오늘 제2독서(필립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비우시는”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오늘로서 일년 동안의 교회의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의 이중적인 모습은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자세는 어떤가?  자신들의 겉옷마저 길에 깔 정도로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다가 불과 며칠만에 돌변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던 그 군중은 바로 우리 자신의 반영일 수 있지 않은가? 



그 군중의 이중성(양면성)은 오늘의 우리들의 이중적 모습을 반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갈 때에는 봉사활동도 해가며 신나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는, 너무도 어이없게도, 언제 그렇게 열성적이었느냐 할 정도로 그렇게 쉽게 하느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냉담 중에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가!

또 성당 안에서는 참회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다가도, 생활 현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언제 성당에 다녀왔느냐는 듯이 불의한 욕심에 가득차서 이웃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런 삶이야말로 한편으로는 박수치며 환호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쳤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들의 언행에 쉽게 좌우되는 ‘인간-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괴로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참된 ‘하느님-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참조: 1고린 1,22-25; 필립 2,6이하).



보충: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 안에서 그 어떤 모순점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선악(善惡)의 양면성, 진위(眞僞)의 양면성이 그것이다. (이런 양면성은 예수와 관련된 성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우리, 주님을 믿겠다고 다짐하면서 결과적으로 주님을 배신하는 우리, 주님의 성체를 영하면서도 불의한 것을 욕심내는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성서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먼저 보여주었을 뿐이다.



다른 한편 나귀는 고집이 센, 잘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면에서 나귀는 우리 인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늘 하느님께 불충실하고 불순종하는 인간의 아집을 의미하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길들이시며 하느님께로 이끄신다.



(즈가 9,9). 즉 루가 복음서에 의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이 즈가리야 예언서의 말씀에 나오는 메시야의 행차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묘사에 의하면 예수님은 겸비한 메시야로 오시어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그를 앞서거나 뒤따르던 군중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며 환호한다. “호산나”라는 말은 “[제발] 구해주소서!”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큰 행렬이 있을 때 백성이 ‘환호’의 표시로 사용했던 말이다. 우리말의 ‘만세!’라는 환호의 어감을 갖고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는 시편 말씀은 본디, 대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예루살렘 시민들이 환영할 때 부르던 노래였는데, 여기 복음서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군중들로부터 ‘메시야 임금’으로 환호를 받는 예수님의 실제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매우 약하고, 겸허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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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께서 가지셨던 그 마음을 여러분도 가지십시오“(참조: 필립 2,5)

   예수님의 마음가짐이라면... 경쟁심, 우월감, 열등감은 ...없어져야 한다.

3)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아울러 생각해야...  ..

   이 점은 “다윗의 아드님, 호산나!”라는 군중의 ‘환호’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그의 복음서의 시작을 “아브라함의 아드님이요 다윗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아드님’이란 표현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 중에’ 태어나리라는 대망속에 있었던 군중들에게는 ‘메시야적인 칭호’ 중의 하나입니다.



영광과 기쁨, 한호받던 에수는 자취를 감추고, 어둠의 권력에의해 예수는 결박되고 매맞고 고문당하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처절한 장면 앞에 서게 된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도 이런 현상(양변성, 모순되는 점)이 있지 않은가?

주님께 환호하고 신나서 신앙생활하는 때도 있지만, 언제 그랬느냐 싶게... 하느님을 잊고 배신하는 삶이 있지 않은가?! 어떤 때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는 식으로 ...(기쁨의 신앙생활도 있지만, 고난으로 ,...괴로움.. , )

흔들리는 신앙... ...



... 이러저러한 불미스러운 일로 교회를 멀리하고 냉담상태에 있으면서 때로는 “교회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는 식으로 외치는 경우들도 있지 않은가>..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깊이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험담하는 것은 ... 예수님의 뜻대로 사랑을 가지고 하는... ... 반성해 볼 필요도 있다.











25.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1-10 (나)  십자가에 매달리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0,4~7 (나는 욕설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는다.) 

제2독서 필립 2,6~11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

복 음 마르 14,1~15,4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외치신 절규는 우리도 우리 생애에서 자주 반복하는 아픔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시련이 부딪칠 때마다, 눈물과 슬픔이 엄습해 올 때마다, 그리고 캄캄한 절망이 우리를 뒤덮을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빛나는 새벽을 만나게 됩니다. 사형수를 매다는 십자가 형틀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기록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수백 년 전부터 중동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의 절차는 이렇습니다. 먼저 죄인을 심하게 고문을 해서 초주검을 만듭니다.



피가 나올 때까지 때려서 미리 반쯤 죽여 놓는데 그래야 십자가 위에서 덜 고통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놀리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곤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앞에는 죄의 내용을 적은 패를 든 자가 서고 뒤에는 십자가를 짊어진 죄인이 따르는데 그 옆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면서 따라갑니다. 형장에 도착하면 죄인을 십자가에 누이고 좌우 손에 못박고 두 다리는 헐겁게 묶습니다.



(예수님께는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양 허벅지 사이에는 나무를 끼워서 매달릴 때 몸무게를 지탱케 해 줍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 한 말뚝에 십자가를 세우면 죄인은 매달린 채 주리고 목말라 미쳐서 죽습니다. 어떤 이는 일주일 이상 산다고도 하나 예수님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참으로 무력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고 사람들이 조롱을 했지만 주님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까지도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예수를 믿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분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으로 보아 그가 구름을 타고 천상의 군대를 이끌고 오실 줄 알았으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실망했으며 예수님이 힘없이 일찍 죽자 제자들까지도 도망쳤습니다. 도대체 자기들을 믿고 따랐던 주님이 나무에 매달렸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요 부끄러운 일이었을 뿐입니다.



성서(신명21,23)에 보면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 사람들은 넋을 잃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침묵만 지키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그냥 두셨으며 처참한 고통과 죽음 속에서 신음하는 아들을 그저 지켜보고만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힘도 세상 앞에 너무도 무기력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수를 죽음에서 건져 주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십자가의 길에서 그를 빼내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 허망하게 끝장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와 같은 허무와 절망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 밤이 걷히고 있을 때 주님은 이미 부활하시어 무덤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는 이미 빈 무덤이었으며 그리고 그들 생애에 결코 잊지 못할 새벽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자신의 몸을 온전히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에 주어졌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묵상해 보면 인간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받는 아픔 속에는 절망밖에 없으나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에 매달 때에 부활의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짊어져야지 그것을 피해서 도망간다면 인생은 굉장히 고달프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안 짊어지겠다고 하면 도둑이나 강도가 됩니다.



불구자는 불구의 병을 짊어져야 합니다. 짊어지면 생각보다 훨씬 가볍고 그리고 그 위에서 빛나는 은혜가 주어집니다. 만일에 그것을 계속 거부하여 불평만 한다면 그는 병이 아니라 자신의 못난 판단 때문에 평생 징징거리며 불행하게 됩니다.



세상은 묘합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저주하면 십자가도 나를 저주하고 세상도 나를 저주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십자가를 은혜로 바라보면 십자가도 나를 은혜로 바라보고 세상도 나를 은혜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실상 참된 축복은 십자가의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늘과 실처럼 십자가의 아픔과 부활의 기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하면서 주님의 참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아름답고 인간적인 위대한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온전히 매달리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부활이 한 주일 남았습니다. 부활의 새벽은 벌써 우리 안에서 밝아져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지고 믿음으로 매달리도록 합시다.











26.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수난 복음

신은근 신부



  오늘 우리는 수난복음을 읽는다. 가장 긴 주일 복음이다. 그러나 요약하면 간단하다. 죄 없는 분이 죄인으로 몰리어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누가 그분을 죄인으로 몰았던가.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우선은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선동된 그들은 십자가를 주장한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그들은 막무가내로 외친다.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보고 들었던 그들이었건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외면했다. 겟세마니에서 그분은 고뇌와 번민 속에 헤매지만 제자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꾸중이 아니라 안타까움 이였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정은 스승에 대한 포기가 아니었던가. 목숨을 걸었다던 베드로의 다짐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강도들도 모욕하며 조롱

로마 군인들, 구경나왔던 사람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도 그분을 모욕하고 조롱한다. 철저하게 극한 상황으로 몰린 예수님의 모습이다. 억울하고 불공평한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분은 말없이 죽음을 받아들이신다. 당신을 외면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

신 것이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누구에게나 억울한 일은 있다. 분하고 원망스러운 기억이 있다. 생각하고 심지 않은 한 맺힌 사건들이 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던가.-믿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던가,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던가. 누구면 어떠랴. 그들이 나에게 십자가를 준 사람들임을. 그들이 바로 내 인생에 십자가를 꽃은 사람들임을. 오늘 복음은 이 점을 묵상하게 한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부활은 오지 않는다. 무죄하신 분이셨지만 십자가를 지셨기에 부활하실 수 있었다. 부활은 하느님의 힘이다. 누구든 십자가를 지면 이 힘은 그의 운명을 바꾼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새 임금으로 환영

오늘 우리는 성지가지를 들고 행렬을 하였다. 이제는 그것을 십자가 뒤에 모셔둔다. 고통받고 죽으셨던 예수님 뒤에 나의 성지가지를 걸어두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 임금이 나타났을 때 가지를 들고 환영하였다. 성지가지는 그 의미의 연속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새 임금으로 환영하는 것이다.

성지가지만 걸어두면 무엇하랴. 그분처럼 십자가의 억울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가족 안에서, 직장 안에서, 자신의 성격과 습관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연습 없이 가능할까? 하고 싶은 말, 먹고 싶은 음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은총은 그 사함 안에서 힘을 발휘한다. 예기치 않았던 사건과 만남이 그를 지원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다.



주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도 말 없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불평과 불만은 나쁜 습관이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는 길은 좋은 습관을 몸에 지니는 것 밖에 없다. 침묵이 힘들어질 때 성지가지를 바라보며 호산나를 묵상하자. 우리는 복음의 청중이 아니고, 예수님

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7.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2-4 (나)  주님의 기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워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조건은 회개다. 주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다. 그것은 포기, 희생, 순교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건이 채워질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하느님의 통치하심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



낡고 병든 제도가 새로운 것으로 참신하게 변화될 때, 불의가 정의로, 죄인이 의인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시기․질투의 공동체가 친교가 넘치는 화기애애한 공동체로, 전쟁이 평화로, 질병이 건강으로 바뀌거나, 악령의 지배를 받아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치유될 때도 하느님의 통치하심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라고 진정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청하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양보

하고 희생해야한다. 우리 개개인뿐 아니라, 우리가 속해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하심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이 열매맺을 수 있도록 청해야 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관한 여러 가지 가르침에서 그 나라를 밭에 묻혀있는 보물, 진주, 가라지 그리고 그물 등으로 비유하셨다(마태 13장). 비유에 나오는 그 사나이는 보물이 묻혀있는 그 밭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치운다. 즉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셈이다.



그 희생의 대가는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 곧 성덕을 꽃피워 열매맺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나라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아 “해와 같이 빛나게 된다."

반대로 그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 예수님께서는 불구덩이에 떨어져 벌을 받아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이라고 무섭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누릴 영원한 거처

또 그 나라는, 의인들이 누릴 영원한 거처이다. 그 나라는 인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완성될 것이 기정 사실이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그 나라를 온전한 자유로써 통치하시도록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통치하심에서 우리가 은혜를 입도록 청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도 그 나라의 한 몫을 얻어 누리도록 비는 청원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가 그 나라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기 위한 청원인 것이다.

또 이 기도는 우리가 노력만으로는 그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므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겸손되이 청하는 기도이다. 마치 눈먼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없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소경의 상태에서 치유되어 뽑힌 이들 대열에 들 수 있도록 겸손되이 청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리고의 두 소경이 큰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그분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셨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우리는 이 기도문에서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히 하느님의 뜻의 성취는 인간의 계획과 사고방식과는 무관하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 우리가 하느님께 협조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함으로써 그분께 호의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기도 안에는 현재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해주시도록 청하는 염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도문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맡기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어주시도록 하느님께 무조건 청하는 데 있다. 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는 아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인지라 부족한 것이 많으므로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워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올리브 동산에서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앞세우셨다.











28.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2-4 (나)  주님의 기도



하느님 찬미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교회 안의 여러 신심운동 중에 성령쇄신운동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반대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신심운동이라, 여기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말해야할 경우도 없지 않다.

요즈음은 상당히 안정되고 있어 20여년 전과 비교해볼 때 별로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에는 우리 교회가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 준비로 ‘성령의 해'를 지내면서 사방에서 세미나가 개최되고, 기도모임이 일어나 성황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신심운동에서는 여러가지를 강조하지만, 그 중의 하나는 ‘하느님 찬미'다. 성가를 부르면 기도를 두배로 하는 것이라는 신심에 따라, 세미나나 기도 모임에서는 성가를 많이 부르는 편이다. 이 기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지루할 정도로 성가를 많이 부른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찬미가 너무 강하게 나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심령으로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마귀들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 구마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 사람들의 체험에 의하면 성가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오랫동안 찬미하면, 구마기도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악령이 나가는 경우들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나게 하는 찬미의 기도는 악한 영들을 추방하는 도구도 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 찬미는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 악한 영들이 찬미 소리에 놀라 도망간다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악한 생각도 정화되지 않겠는가?



'찬미기도'의 효과

하느님을 자주 찬미하는 신심 깊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맑고 순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적으로 내 마음도 맑아지는 듯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찬미의 기도 중에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신심 깊은 신자들이 하루에도 여러번 바치는 시간경 기도(성무일도)는 대부분 시편으로 되어 있다. 시편 중의 많은 부분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다.

  

시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공자도 시경 300수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할 때, 그것은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없다는 구절, 즉 사무사(思無邪)라고 하였다. 시경 300여편에는 여러가지 내용이 있으나 이 경전의 전체적 성격을 포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구절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나타낸 바로 그 구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그리스도교 경전에도 인간교화 내지는 윤리적 효율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내용이 있다면, 하물며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시편이야말로 그 의미가 얼마나 깊고 풍부하겠는가?

  

또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온갖 장애물을 우리에게서 멀리해 주시도록 청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이 기도문에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 또는 왕국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이나 통치를 말한다. 

주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하심이 우리가 사는 곳곳에 두루 미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는 확실히 온다고 가르쳤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가르침이 그 것이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에는, 늑대와 새끼양이 어울리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는 날이 올것이라는 아름다운 미래를 예언하였고,

예레미야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해치거나 싸우는 일이 없는 시대가 온다고 하였으며,

묵시록은 주리는 날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을 보자.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고 좋은 일들도 많이 일어나지만, 악한 일들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하느님의 주권이 세상 곳곳에 미쳐야 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온갖 불의․부정․착취․폭력․가난․굶주림․폭음․ 폭식․질병․미움 등은 하느님의 주권이 침해받는 현상들이며, 그분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영역은 분명히 우리의 현실 속에 드러나야 하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9.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2-4 (나)  주님의 기도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저 높은 하늘에만 계신 분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장소적인 개념은 아니다.



어느 날 본당에서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갔다 왔다고 하니까 “신부님은 하느님 계신 곳 가까이 가보셨네요"라고 아이들이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만일 하느님께서 하늘에만 계신다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문의 참 의미는 하느님께서 성인들과 의인들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치신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고린 3,17)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거나, 멀리 여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사람들도 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아우구스티노 같은 성인은 15,6년 간이나 방황하였으나,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회심한 후 자기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이런 고백을 하였다.

 “늦게야 임을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임이 계시기를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임을 찾았나이다‥‥임은 나와 함께 계시건만, 나는 임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고백록 X,27)



그러므로 하늘이란 하느님이 성전처럼 계시는 의인들의 마음이므로,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늘 모시도록 해야할 것이다.



“아빠, 아버지"

 이런 뜻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장애물이나, 하느님을 대신하는 우상들로부터 해방되어, 자기의 마음속 김은 곳에 하느님을 모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삼의 내주(內住) 현상으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마음 안에 모시는 상태이며,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을 맛볼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영성생활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사도 성 바오로와 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단순한 가족 구성원의 관계만이 아니라, 참 사랑의 관계일 때, 자녀들은 스스럼 없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다. 아이들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를 “아빠”

라고 부르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는 두려움이 없다. 비록 그분의 자녀답게 성실히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감싸주시는 그분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올해는 성부의 해다. 어느 때보다도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더 많이 찾는 해다. 아버지는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께 나아가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해 보자.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이 기도는 하느님이 거룩하시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이름을 받들어 모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참된 행복의 근원으로 깨닫도록 청하는 기도다.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을 볼 때, 하느님의 존엄한 이름은 바로 하느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자 인간의 생사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존엄한 분으로 가장 높게 찬양되기도 하지만,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고 불경스럽게 불려지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하느님을 넣어 욕을 한다든지, 악담을 하는 것들은 큰 죄악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모의 이름도 직접 부르지 않고, 한자씩 떼어서 부른다.

부모에 대한 경외심과 효성의 정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느님께 대해서야 어떠해야 하겠는가?



유다인들은 “야훼"를 감히 붓으로 쓰기를 두려워하였을 뿐만아니라 할 수 없이 그렇게 쓰면서도, 그대로 읽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읽지 않았던가? 예외가 있었다면, 단 1년에 한번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가 “야훼"를 부를 수 있었다, 그만큼 야훼 하느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불경스럽게 부르는 이들이 잘못하는 것들을 마음 아파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을 이 세상이 받아들이도록 청원하며, 하느님의 이름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거룩하게 드러나도록 마음을 모은다.











30.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오늘은 예수님의 치욕적인 수난을 묵상하는 ‘수난 주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던 군중이 빨마 가지를 흔들며 열광하는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성지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많은 군중들이 환호성을 울립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찬미 받으소서!”



온 도시가 환영 일색입니다. 멋모르고 있던 이들이 묻습니다. “이 분이 누구요?” 옆에 있던 군중이 대답합니다. “빵의 기적을 보이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낫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죽은 라자로까지 부활시킨 예수를 모르시오?” “이제 우리나라도 해방 시킬거요!” 정치 협잡꾼은 당황하였습니다. 음모를 꾸미던 기업가, 속임수에 능한 상인, 위선적인 지도자, 부패한 관료는 당황했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군중이 아우성치면 안정을 해칩니다. 민심이 소란해지고 국론이 분열되고 그러면 로마 군대가 쳐들어 올 것입니다”하며 만류합니다.



이러던 중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무장하고, 말을 타고, 지혜 있는 참모를 데리고 호화롭게 입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마 대신 어린 나귀를, 창검 대신 빨마 가지를, 나팔소리 대신 어린 아이들의 노래 소리로 입성하십니다. 겸손과 평화를 가지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안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관 대신 가시관을 쓰십니다.

경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수난에로의 행렬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는 가로 폭이 2미터요, 세로 폭이 3미터가 훨씬 넘으며, 그 무게는 보통 사람의 체중의 두 배인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나무 십자가였습니다. 온갖 시련과 모욕, 갖은 태형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그 거룩한 얼굴에서는, 괴로움마저도 느끼시지 못하는 극한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요한 복음 19장 5절의 말씀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그는 온 몸에 기력이 쇠진하였고, 허기가 지며 목이 타는 듯 기갈이 나고, 머리에는 가시관의 상처로 찢겨 터지고, 얼굴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볼 수도 없을 정도가 되셨습니다. 죄인으로 판단 받아, 붉은 용포를 입으셨으며, 머리 팻말에는 모욕적이고도 수치스런 ‘자칭 유대인의 왕’(요한 19,21)이란 죄목이 붙여졌습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배고파 굶주렸을 때는 빵의 기적으로 배를 불려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는 치유의 기적을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분의 죽음을 시험해 보려고 살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는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까지도 내놓겠다고 장담하던 제자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나는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무엇으로 주님을 위로해 드리고 있습니까?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나무 십자가를 함께 나누어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로니카와 같이 피에 젖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릴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 얼마만큼이나 동참하고 있다고 봅니까?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쳐대는 우매한 군중들 편에 서서야 되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적어도 이 성주간만은 그리스도를 다시 못 박는 일체의 행위를 삼갑시다. 죄로 유인할 수 있는 헛된 생각이나 세속적인 오락을 멀리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을 준비를 합시다. 일주일 간 만이라도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임을 십자가상에 매달리신 그분께 고백합시다.

가능하면 매일미사에, 아니면 적어도 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미사와 예절에 참여하여, 기쁜 부활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두움을 삶아 먹을 광명이여! 오라!” 아멘.











31.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1-10 (나)  예루살렘 입성



성지주일이 되면 나에게는 어렸을 때, 좀 더 멋있는 나무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고 축성을 받기 일해서 예쁜 향나무 가지를 구하기 위해 애쓰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때의 어린 마음에도 성지주일 전례는 참으로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같은 주일 예절인데도 미사 전에는 길에 자기네 겉옷을 깔고 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호하는 군중에 관한 복음말씀을 듣다가, 반시간도 채 못되어 미사 동안에는 바로 그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무섭게 외치는 복음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올리브 산 쪽에서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분이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 제자들에게 그 입성을 준비하도록 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주는데, 이는 예수님의 수난이 우연히 발생한 불행한 일들의 결과가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시며 자원하여 받아들이신 결과라는 것을 미리 말해준다.



「예수께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나귀는 사실 말(馬)을 갖기에는 너무 가난하였던 사람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짐승이었다. 그러니 나귀 타고 오는 모습, 더구나 새끼나귀 타고 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한 행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귀 타고 오시는 그분을 군중들이 마치 왕의 행차라도 환영하는 듯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기까지 하면서 환호한다. 예수님을 앞서거나 뒤따르던 군중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며 환호하는데, 「호산나」라는 말은 본디「제발, 구해주소서!」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는데, 큰 행렬이 있을 때 백성이「환호」의 표시로 사용하곤 하였다. 우리말의 「만세!」라는 환호의 어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 받으소서」라는 시편 말씀은, 본디, 대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예루살렘 시민들이 환영할 때 부르던 노래였는데, 여

기 복음서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 말(馬)은 많은 경우에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어서 그런지 힘과 전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비하여, 나귀는 전쟁과 싸움을 거부하는 서민들의 평화와 겸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복음사가는 새끼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평화와 겸허의 메시아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부활의 빛 속에서(참조 요한 12,16) 이러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라는 즈가 9,9의 예언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참조: 마태 21,5: 요한 12,15).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곧 메시아」로서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세우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세우시는 평화와 정의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였던 대로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제압하는 방법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약하고, 낮은」방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사랑의 방법으로」 이룩된다는 것을 복음말씀은 말해준다.



이런「메시아」의 모습은, 오늘 제2독서(필립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비우시는」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오늘로서 일년 동안의 교회의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의 이중적인 모습은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자세는 어떤가? 자신들의 겉옷마저 길에 깔 정도로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다가, 불과 며칠만에 돌변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던 그 군중은 바로 우리 자신의 반영일 수 있지 않은가?



그 군중의 이중성(양면성)은 오늘날 우리들의 이중적 모습의 반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갈 때에는 봉사활동도 해가며 신나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는, 너무도 어이없게도, 언제 그렇게 열성적이었느냐 할 정도로 그렇게 쉽게 하느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냉담 중에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가!



또 성당 안에서는 참회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다가도, 생활 현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언제 성당에 다녀왔느냐는 듯이, 불의한 욕심에 가득 차서 이웃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런 삶이야말로 한편으로는 박수치며 환호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쳤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들의 언행에 쉽게 좌우되는 “인간-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괴로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참된 「하느님-신앙」을 가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지를 깨달아야할 것이다(참조: 1고린 1,22~25; 필립 2,6이하).











32.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

서울대교구 홍보실



서기 70년경 복음사가 중 마르코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이야기를 모아 나름대로 정리하여 수록했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수난사”(마르 14,32-15,47)라고 부릅니다.



1. 예수님의 수난이야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올리브 산기슭에 있는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다가 최고의회에서 보낸 하인들에게 체포되어 대제관 가야파에게로 압송되어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부터 7일 금요일 새벽까지 최고의회로부터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유다교 최고의회는 사형언도 및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넘겼습니다. 당시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26년부터 36년까지 지중해변 항구도시 가이사리아에 상주했는데, 30년 4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서 헤로데의 궁전에서 일시적으로 정무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4월 7일 금요일 오전에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낮 12시경에 국사범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4월 7일 정오가 지나 총독 관저인 헤로데 궁전에서 400미터 떨어진 예루살렘 북쪽 골고타 형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경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에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4월 7일 금요일 저녁 안식일겸 과월절 축제가 시작되므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서둘러 예수님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역사적 예수의 삶은 끝났지만,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표면적으로 예수께서는 유다교 종교지도자들과 유다교 제도권 교회에 저항하다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진행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죄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거룩한 것(聖)과 속된 것(俗)이 마주치며, 영원과 시간이 융합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힘은 십자가에서 목숨 바쳐 이룩하신 예수님의 사랑임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용서와 사랑 그리고 나눔의 종착점은 십자가임을 오늘 예수께서는 극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로 들어간다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휘장을 통해, 곧 당신 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새로운 길을 터 주셨습니다”(히브 10,19-20).











33.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1,1-10 (나)

서울대교구 홍보실



서기 70년경 복음사가 중 마르코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이야기를 모아 나름대로 정리하여 수록했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수난사”(마르 14,32-15,47)라고 부릅니다.



1. 예수님의 수난이야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올리브 산기슭에 있는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다가 최고의회에서 보낸 하인들에게 체포되어 대제관 가야파에게로 압송되어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부터 7일 금요일 새벽까지 최고의회로부터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유다교 최고의회는 사형언도 및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넘겼습니다. 당시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26년부터 36년까지 지중해변 항구도시 가이사리아에 상주했는데, 30년 4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서 헤로데의 궁전에서 일시적으로 정무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4월 7일 금요일 오전에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낮 12시경에 국사범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4월 7일 정오가 지나 총독 관저인 헤로데 궁전에서 400미터 떨어진 예루살렘 북쪽 골고타 형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경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사박타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에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4월 7일 금요일 저녁 안식일겸 과월절 축제가 시작되므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서둘러 예수님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에 역사적 예수의 삶은 끝났지만,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표면적으로 예수께서는 유다교 종교지도자들과 유다교 제도권 교회에 저항하다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진행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죄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거룩한 것(聖)과 속된 것(俗)이 마주치며, 영원과 시간이 융합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힘은 십자가에서 목숨 바쳐 이룩하신 예수님의 사랑임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용서와 사랑 그리고 나눔의 종착점은 십자가임을 오늘 예수께서는 극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성소로 들어간다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휘장을 통해, 곧 당신 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새로운 길을 터 주셨습니다”(히브 10,19-20).











34.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마르 14,1-15,47 (나)  ‘축복’이 되십시오!

박정미 카타리나 수녀



“여러분들은 지금 떠나는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십시오.” 긴 피정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려는 피정자 일행을 불러놓고, 피정 지도자 아일랜드인 신부님이 하신 당부의 말씀이셨습니다. 겸손하고 섬세한 신부님의 현존자체가 힘있는 복음이었습니다.

그 이후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떤 사귐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이 당부의 말씀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신부님과의 만남은 저에게 있어 은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남은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이 세상의 잡다한 일들을 잠시 제쳐놓고 하느님께로 눈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순진한 어린이의 모습이 우리의 심금을 울릴 때도 있고, 심한 고통과 시련을 겪는 사람이 무심코 하는 한 마디 말과 행동에서도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됩니다.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젊은이의 진지한 모습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밀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서로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서로를 괴롭히거나 서로에게 절망을 주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힘든 인간 관계 때문에 축복이 되라는 말씀이 더욱 마음에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축복이 되라는 당부는 자신을 어느 정도 진실되게 알고 있는 사람, 자신이 죄인인 줄 알면서도 용서받았음을 믿고, 자신이 용서받은 것처럼 이웃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가르치시는 새로운 계명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말씀입니다. 받아 누리는 모든 은혜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임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축복이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축복을 갈구하는 사람들로서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축복을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여유와 넉넉함, 감사할 줄 아는 영적인 가난함은 우리가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런 마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십시오.” 이 말씀은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미사 때마다 파견을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초대의 말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참으로 각박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조금만 어긋나면 서로 다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그가 가족이든, 동료이든, 고객이든, 특히 못마땅한 이웃을 향하여, 좋은 하루 맞으라고 인사하는 것이 바로 축복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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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 강론
Re..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강론 모음 2008-08-09 7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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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
가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7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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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
다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7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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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강론
군인주일 강론 모음 군인주일 강론모음 2008-09-06 7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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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Re..가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14 7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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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6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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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7주일
나해 연중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1-31 7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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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8-09 7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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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5-30주일
다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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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추석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라고... 자녀들을 위하여 2008-09-14 7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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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강론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 강론모음 2008-09-06 6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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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
나해 대림 제 4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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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다해 사순 제 1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2-05 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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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31-34주일
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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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다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08 6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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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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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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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강론
주님 봉헌축일 성민호 신부 2008-09-06 6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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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5-24 6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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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 강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대축일 강론 모음 2008-07-04 6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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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나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08 6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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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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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시기
다해 부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29 6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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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8-13주일
나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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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나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14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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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시기
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모음 2007-11-25 6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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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
다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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