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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8일 (토) 00:48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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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다해 사순 제 5주일



25. 서경윤 신부(다)/50           26. 이용희 신부(다)/52

        27. 홍금표 신부(다)/54           28. 허영업 신부(다)/56

        29. 신은근 신부(다)/58           30. 전주원 신부(다)/59

        31. 함세웅 신부(다)/61           32. 윤석원 신부(다)/62

        33. 강영구 신부(다)/63           34. 유영봉 신부(다)/67

        35. 강길웅 신부(다)/69           36. 서울교구 주보/71

        37. 용서하시는 예수님/73





13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벌써 사순 제5주일입니다. 앞으로 부활절을 두 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특별히 묵상하는 사순절의 절정을 이루는 성주간은 앞으로 한 주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의 시각이 급박함을 느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의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제자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관하여 여러 모로 말씀하시며 미리 알려 주십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그레샤 사람들이 당신을 보러 온 점으로 보아 드디어 당신의 때가 온 것을 알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당신 한 분의 목숨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많은 낟알을 맺듯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죽으심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으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심은 기정사실이고 결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들리게 되어 돌아가심은 이제는 시간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내게로 오게 할 것입니다.”(요한 12,32) 라고 하시며,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많은 사람을 당신께로 인도하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씀 드린다면, 당신이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고 만민이 당신을 쳐다보며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십자가 밑으로 달려가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며 그 높으신 사랑을 깨달으며 그 지극한 사랑에 대하여 우리의 사랑으로 보답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실상 예수님은 만민의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높이 들리시어 참혹히 돌아가셨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중에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죽어갔습니다. 태양의 광채조차 무색케 하는 어느 금요일의 전율의 암흑 속에서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저버리신 거와 같은 하느님께 최후까지 충실하였고 당신을 배척하고 박해하고 십자가에까지 못박으며 희롱하고 조롱한 사람들마저 사랑에 넘친 기도를 바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원수들까지 용서하시며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한편 성모 마리아와 경건한 부인들, 요한 사도, 아리 마태아의 요셉, 니고데모, 동정자들과 통회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에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갈바리아에서부터 줄곧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마음의 허전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신앙도, 희망도 없는 자들의 눈물도 아니었으며 영원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눈물은 흘러내렸으나 어디까지나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눈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예수님의 부활의 희망으로 위로되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와 경건한 부인네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예언을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세 번이나 확실히 말씀하시며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내게로 오게 할 것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생생하여지고 실감나게 들려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상의 사랑의 인력은 20세기를 통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힘을 발휘하여 수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 밑으로 모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십자가상의 사랑을 깨닫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된 백성은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도 내일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을 찾게 되는 이는 부지기수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는 고통이란 십자가가 갖가지 모습과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에게 오해를 받는다든지 육신의 병고나 마음의 번민 등으로 괴로울 적에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이며 십자가상에 높이 들리신 사랑에 넘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당하는 온갖 고통의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합쳐 가며 감사의 정으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잘 견디어 나가도록 우리 다 같이 노력합시다. 아멘.











14.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최익철 신부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입니다. 죽음은 선조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벌이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갈림은 고통스럽게 여기고 그 단절을 무서워합니다. 죽음이 전적인 소멸이 아니라 생성의 조건임을 알아듣기엔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것없습니다.

그러기에 죽음과 먼 거리에서 죽음을 이해하기는 쉬워도 직면한 상태에서 죽음에 동의하기란 그리 수월한 일일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죽음이 소멸이 아닌 생성임을 확신하기 위해, 죽음을 기쁘게 받아 드릴 수 있기 위해, 죽음이 주께로의 귀의임을 알기 위해 밀알의 썩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드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안고 있는 완전한 사랑을 입으로가 아닌 행동으로 체험해 나가야 할 줄로 압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말씀하신 대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떨어져 썩어 질 한 알의 밀알 이기 위해 죽음 아닌 영속적인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잃어진 순간이 있기에 백 배로 얻은 영원한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밀알 하나의 역할로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떨어져 썩으셨기에 당신도 사셨고 모든 이들도 살리셨으며 계속 많은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유일한 방법이 죽는 것이니 우리 자신도 죽어서 선행과 덕행, 희생과 공로의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우리는 앞서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이미 죽었습니다. 죽으면 무능해지듯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무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생기가 더 있고 힘이 더 강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우리는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가끔 되살아납니다. 세속이 무능하다고 속삭이는 바람에, 죽었다고 아주 무시 박대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났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지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영세할 때 “끊어 버립니다” 하며 장렬하게 죽었었는데 그만 애석해지고 억울해졌습니다. 그 맹세가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낄 것이 없고 주님에게 관계되는 일을 위해서는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 옹졸해지고 왜 그다지도 인색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외면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피합니다.



봉사를 청하면 주저하고, 무슨 일을 시키면 핑계 대고, 협력을 요구하면 이유가 많습니다. 아직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겉꾸미고 남의 말이나 하고, 남의 일이나 잘못을 살핍니다. 걸핏하면 비평 비방하며 괴롭히고, 헐뜯고 모욕하고 학대하다가 드디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완전히 살아서 외인이나 다름없이 된 것입니다.

이제 특히 사순절 동안은 되살아난 우리를 영세 때처럼 죽게 하는 때요, 외인같이 된 우리를 주님 앞으로 되돌아오게 할 때이니 은총의 이 시기에 우리를 다시 죽임으로써 사십시오. 썩는 만큼 열매를 많이 맺고 죽는 만큼 되살기 때문입니다. 누에가 꼬치 속에 들어가야 번데기가 되어서 날을 수가 있듯 다시 살기 위해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나 그 죽음을 고대하며 사셨듯이 우리고 주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애써 지은 것,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인 작품이 무너지거나 허사가 되었을 때 죽음과 같은 어둠을 맛보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식이 길을 잃어버려 방황할 때 십자가의 길에 다시 서신 것이며, 당신의 전지와 전능으로 빚은 영혼이 죽어갈 때 십자가 위의 못 박히는 고통으로 신음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상태로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재현되는 것이니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으로 끊임없이 십자가의 고통에 머물러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 드려야만 될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재계를 지키며 고행을 하고 병고와 피로를 견디어 내며 잠을 적게 자는 등의 육체적 죽음을 시도해 봄직하며 박대와 천대, 오해와 곡해 등을 참아 견딤으로써 모욕과 능욕을 당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의욕상실과 갈등, 번뇌와 고통, 고독과 절망에 쌓여 꼼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린 상태임을 알고 잘 견디어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또 스스로가 모든 것 즉 나 자신과 속세를 포기함으로써 알몸으로 죽음을 원하십시오.

  

내게 주어진 육체적, 정신적 죽음을 감사로이 받아들여 죽는 만큼 부활이 다가오는 것이고 포기한 만큼 상이 풍부해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죽은 결과가 어떠한지를 알기에 우리는 다투어 죽으려 할 것이고, 보다 더 잘 죽고, 보다 더 많이 죽으려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승리의 월계관은 죽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죽음의 길로 함께 나아 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하도록 합시다.

  

인간이 그 생을 다하려 할 때 두려움으로 죽음을 맞는다면 그의 삶은 아마도 죽는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치명자의 후손인 우리는 주를 위하여 나를 버리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목숨을 버리고 치명 보다는 내 생활 속에서 이기심에 죽고, 무관심에 죽고, 교만에 죽는 그 치명이 더 어렵고 힘든 것임을 우리는 생활하면서 늘 깨달아 왔습니다. 내 가정 안에서, 내 이웃과의 사이에서, 수없이 자기를 죽이는 생활의 반복은 죽음이 두려움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죽는 것이 익숙한 삶으로써 기쁨으로 맞이할 그 날이게 합시다.











15.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라자로야, 일어나라!

김시몬 신부



ꡒ자매님, 이제 정말 예수님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ꡓ 얼마 전 병원에서 오랜 동안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임종을 맞으시는 한 자매님께 임종을 준비시키기 위해 해드렸던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모든 준비가 다 끝나시기라도 하셨다는 듯이 가늘게 뜬 눈으로 신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던 그 자매님을 기억해봅니다. 지금쯤 그 자매님은 정말 예수님을 만나셨을까요? 신부 말 만 믿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편안하게 눈 감으셨던 자매님, 정말 예수님 만나 행복하시죠?



장례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교우들에게 소리 높여서ꡒ믿는 이들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에로 나아가는 길입니다!ꡓ하고 외치지만,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한 생명의 죽음이야말로 그 언제나 슬픔이요, 고통일 뿐입니다. 사순 제5주일인 오늘 복음은 이 죽음의 슬픔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큰 일을 이루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나자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 내 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라자로에게 이루어주신 이 기적은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라자로처럼 죽음에서 삶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커다란 희망을 간직하게 해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이 엄청난 기적 사건은 예수님 당신이 바로 생명의 주인이시요, 부활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믿는 자들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는 증표인 것입니다.



ꡒ라자로는 죽었다. 이제 그 일로 인하여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그곳으로 가자… 많은 유다인 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 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ꡓꡒ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ꡓ(요한 11,14-27). 부활이 없다 면 한 생명의 죽음은 인생의 끝장이요, 허무요, 영원한 단절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인생의 최대의 비극이요, 모든 것의 종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소망도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죽음은 이승에 서 저승에로의 이별이기에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 정든 사람과 영 이별 을 할 때는 더욱 슬픈 것입니다. ꡒ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시자 죽었던 라자로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ꡓ(요한 11,40-44).



과연 믿음의 힘은 위대하며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려 면 각자 자신의 잘못과 열성이 부족함을 깊이 반성하고, 메마르고 허약한 영신을 거룩하고 풍요롭게 단장해야 합니다. 사순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신과 육체의 건강을 보살 펴주시고 당신과 사랑과 생명의 관계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때입니다.



라자로야 일어나라! 어두운 무덤을 여는 이 말씀, 생명을 살리시는 이 말씀,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 는 이 말씀을 듣고,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라자로처럼 죽음에서 깨어나 일어납시다. 우리 도 죄악과 죽음의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16.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무엇이 영광인가?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예레 31,31-34 (나는 새 계약을 맺고 잘못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제2독서 히브 5,7-9 (복종하는 것을 배우신 예수께서 영원한 구원의 주관자가 되셨습니다)

복 음 요한 12,20-33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어떻게 하나의 밀알이 죽어서 그 많은 열매를 맺는지를 인간의 지혜는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철학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수천 년 동안 파헤쳐 왔지만 왜 죽어 야만이 생명을 얻게 되는지를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그 의미를 알 턱이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밀알이 죽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 긴 밤을 지내야만 합니다. 그때는 희망도 보이지 않으며 어두운 절망만이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서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찢고 깨뜨리는 참혹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죽어야만이 참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은 좀 이색적입니다. 아마 그분에게서 세상의 어떤 진리나 영광을 구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는 것을 보았던 그들로서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속의 영광에는 아랑곳없이, 하 나의 밀알이 죽어야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 당신이 죽어야만이 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당신께는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기에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참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거꾸로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두 종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살기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언뜻 듣기에는 똑같은 삶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차원이 다르며 천당과 지옥만큼이나 거리가 멉니다. 우선은 잘 사는 것 같지만 죽는 경우가 허다하며, 지금은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참 평화 속에 미래를 약속받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옳게 걸어야 할 길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자매가 시집가서 고생고생만 하다가 불쌍하게 죽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복도 없었고 자식 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살림과 고약한 시어머니 밑에서 서럽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으며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섭리의 길처럼 착하게 믿고 소처럼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흔도 안돼서 죽었을 때 식구들이 모두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의 선물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것만큼 주위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며 또한 자기만을 살리려는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남을 죽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바보가 되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은 남을 살리게 되며 이것이 또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신앙 안에서는 높은 영광이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새 계약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옛 계약은 이제 무너졌습니다. 돌판에 새겨졌던 그 계약은 이제 무효가 되었습니다. 법은 아주 좋았지만 백성들이 법을 무시하고 파계했기 때문에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벌로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참혹한 신세를 만나게 됩니다. 예레야는 이때 새 계약을 전해 주며 마음에 새겨질 그 아름답고 위대한 계약을 약속해 줍니다. 그런데 그 새 계약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로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나 자신의 이기심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바로 삶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진정 자기의 부활로 만들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조금만 죽고 또한 가정을 위해서 한 번씩만 더 죽도록 합시다. 그러면 금년 부활의 새벽이 잊을 수 없는 빛나는 아침이 될 것입니다.











17.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민병섭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빛이며 구원자이심이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자신이 성대하게 입성했던 예루살렘에 와 계신다. 유다의 그 큰 명절에 거기에 와 있던 몇몇 그리스인들은 아마도 그들이 본 사실에 감동되어 필립보에게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21절) 하고 간청한다.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그리스인들의 원의는 내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에서 '보다' 동사는 단순히 사실과 사물의 외적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내적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 간직된 비밀, 곧 조금 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소리쳤던 그 많은 군중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한 그 비밀을 알고자 하는 원의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그리스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들의 갈망을 채워 주신다. 왜냐하면 분명히 자기 자신과 또 성부를 향한 독백처럼 보이는 그분의 말씀들은 실제로 그분의 신비들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23-26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혼란하고 황폐해진 이 세상에 마치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 알처럼 당신의 생명을 주실 것이다. 모든 것이, 환호에 찬 군중이 조금 전에 드러내 보인 영광과 찬양과는 정반대이다. 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비밀스레 간직된 구원의 풍요로움뿐 아니라, 우리 매일의 삶의 신비도 밝히 드러내 주시고 있다.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가 분명하게 선포되면서 요한 복음의 제1부인 표징의 책이 끝나 가고 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군중 앞에 나타나지 않으시고 오직 제자들만을 가르치시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23절)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는 “때가 오지 않았다."(2,4; 7,6; 8,20; 10,39)라고 반복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32절).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때가 그리스도께서는 최대의 영광의 순간이다. 이러한 사건이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더 큰 사랑을 표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실제로 이 모든 행위가 영혼들을 구원하고 이끌어 줄 능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마치 죽음의 정복자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을 드높일 승리의 전리품이 될 것이다.



  요한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주님의 부활이 이르기 전에 이미 들어 높여져야 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구원의 놀라운 기적을 확산시키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함을 뜻하는 것이다. 결코 무가치한 죽음으로 이해되는 자살과 같은 행위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다.



    제1독서/예레 31,31-34

  예레미야서 30장에서부터 33장까지는 희망의 예언을 담고 있는 부분으로서 '위로의 책'이라고도 불린다. 예언자는 이 부분에 구세사적인 예언을 담고 있다. 그는 백성과 왕실의 불길한 예언을 한 다음에 유다인들이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그들의 귀환에는 역사적 사건을 넘어 새 인류가 출현하고, 새 계약이 맺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처럼 오늘의 제1독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의 귀양살이에서 돌아옴을 예고하면서 그것을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시는 '새 계약'에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계약은 일반적으로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계약은 하느님의 권위와 주도로 맺게 될 계약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이 새 계약은 백성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 내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31,31-32). 그리고 이 새 계약은 모세의 계약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어졌던 계약은 쌍방의 계약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나약으로 깨어질 것이 언제나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롭게 맺어질 이 계약은 하느님의 주도권과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지는 첫 번째 계약과는 완전히 다르다. 세 번째로 이 계약은 주님께서 직접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 줄 계약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33절).



  네 번째로 새 계약은 새 공동체를 낳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이 새 계약을 맺을 때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용서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34절). 그렇지만 백성들이 먼저 하느님 대전에서 지나온 과거를 겸허하게 부끄러워하고, 주님께 대한 배신을 참회할 때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붙인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이 새 계약은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이 새로운 계약의 관계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사순 시기는 주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이 새로운 계약에 초대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반성하며 얼마나 주님 안에 우리 삶의 자리를 마련하느냐이다.



    제2독서/히브 5,7-9

  히브리서의 저자는 3장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성실한 대제관으로 소개하고 있으며(1-6절), 5장 1-10절에서는 그분께서 사람을 동정하는 자비로운 대제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저자는 1-4절에서 구약의 대제관이 갖추어야 할 자격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5-10절에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한 모든 자격을 갖추신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제관이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며, 동시에 사람의 모든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의 제관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춘 완전한 제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먼저 예수님이야말로 아론과 같이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합법적인 제관이요, 영원한 제관이심을 시편 2편 7절과 110편 4절을 들어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경험하셨으며,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강함과 약함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신 분임을 네 가지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게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연상시키는 7절에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눈물의 기도를 알고 계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경험에서 배우신 것은 복종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경험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고난 가운데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반항한다면, 우리 안에서 그 반항의 소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고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완전하게 되셨다고 하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기능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예수님께서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으로서의 일을 완전하게 이루셨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완전하다는 말이 '축성하다'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제로 축성하시어 거룩하게 하시고 완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최후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이 구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세상에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런 구원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이러한 구원을 얻으며, 동시에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배우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사순 시기의 의미이기도 하다.









18.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알의 교훈

신은근 신부



 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을 틔울 수 있다. 어찌 밀알뿐이겠는가.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같은 결과를 낸다. 씨앗 자체가 썩어 양분이 되고 그 양분을 딛고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이다.



평범한 이치지만 생각하면 무서운 자연의 신비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연약한 짐승들이 살아남는 것은 순전히 어미의 희생 때문이다.

그러기에 새끼를 둔 어미는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달아나지 않는다. 이 모성애가 종족 번식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하찮은 미물의 세계에서도 이렇듯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싹을 틔우고 새끼를 키운다. 자연의 이치와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 하지만 내용 자체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인간 사회는 어떤가.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 않는가.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밀알이 썩기는커녕 한 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대, 희생은 연약한 사람들의 행동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희생 없이는 누구도 썩는다는 행위를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썩지 않으면 하늘의 생명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불안과 허무, 삶의 무미건조함이 팽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밀알이 썩지 않는데 어찌 새싹이 돋아나겠는가.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삶의 기쁨이 주어지겠는가. 그러니 썩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썩는 행위를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생명력을 주는 행위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무와 풀들이 건강한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뿌리가 튼튼하면 줄기와 잎은 당연히 튼튼해진다. 화려한 꽃과 알찬 열매의 결실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 달려있다. 뿌리는 무엇인가. 희생과 사랑이 아닐는지. 밀알이 썩는 행위가 아닐는지. 그러니 우리는 씨앗으로 돌아가 싹을 틔우고 보이지 않는'흙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교훈이다.


사람에겐 자신의 고유한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흙으로 돌아가 흙이 되는 행위다. 어떤 집안에도 십자가는 있다. 어두운 부분이 있다. 누군가 그 십자가를 안고 있기에 생명력이 집안을 떠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해 썩는 행위가 아닐는지. 그러니 우리도 십자가를 인정하며 기꺼이 지고 가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

의 교훈을 실천하는 행위다.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는 십자가 짐을 연습한다. 지난 사순절 동안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면, 남은 기간에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사랑으로 한다면 가능하다. 성격이 강한 사람은 조금은 자기를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도, 질투심이 강한 사람도 그렇게 해야한다. 이런 행위가 예수님의 죽음

에 동참하는 길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순절은 지나가는 연례행사일 뿐이다. 사순절 동안 자신의 십자가를 느끼지 못하면 사순절의 전례 또한 무의미해진다. 부활절은 사순절의 결실이다.

어떻게 사순절을 보냈느냐에 따라 부활의 은총은 달라진다. 씨앗이 썩으면 새싹은 당연히 돋아난다. 금년 부활절엔 삶의 또 다른 싹을 만나도록 하자,











19.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김영남 신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1

이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 사람 몇이 당신을 뵙고 싶어한다는 말을 제자들로부터 전해 듣고 하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방인들인 이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백성들이 그분에게 보여준 환호(바로 앞 대목 요한 12,12~19)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직접 만나 주지 않으시면서, 제자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진정 따르려거든 그들도 당신처럼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결실을 맺는 밀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참조: 26절의 말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영광스럽게 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시간이 바로 당신의 구속사업을 완성하시는 시간이요(참조 19,30), 그렇기에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영광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 죽음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아무런 고뇌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요한 복음도 예수님이 임박한 죽음 앞에서 고뇌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하고 기원할까?”(12,27.

  

그러나 「고난의 시간을 면하게 해달라는 이 생각은, 성부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과 뜻을 생각하면서「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28절)라는 기도로 바뀐다(참조 마르 14,3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고뇌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참조: 이번 주일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5,7)라고까지 말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자」의 모습으로는 너무나 나약하다. 그런 모습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데 오히려 결정적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이「부활하여 살아계시다」는 것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과, 그들이 그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류

에 대한 하느님의 더없이 큰사랑을 본다. 인류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큰 위로를 받는다. 다른 한편 깊은 고뇌 가운데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시며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신자들에게- 특히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듯한 일을 앞두고, 극심한 고뇌에 휩싸이게 될 때에-큰 귀감이 된다.

  

벌써 사순 제5주일이다. 성주간이 이제 한 주간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동안의 사순시기를 어떻게 지내왔는지 점검해 볼 때이다. 점검의 기준으로, 마침 오늘 복음에 나오는 「썩을 줄 아는 밀알」의 정신이 꼭들어맞는다.

우리 각자는 가정에서, 본당에서, 각 공동체에서 과연 예수님의 정신대로「밀알이 썩듯」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랑으로 조금이라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사회의 전반적 풍조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심지어 가정에서마저) 조금도 양보하거나 손해보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자기 이익만을 챙기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자신이 남을 위해 「썩으려고」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땅 속에 묻혀 썩을 때에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렇게 하여 그 생명은 풍요롭게 계속된다. 그러나 썩지 않으려고 바등거리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야말로 「외톨이」가 되어 홀로 딩굴다가 결국에는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지나가는 수레바퀴에 밟혀 으깨져 버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눈앞의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희생은커녕 양보조차도 조금도 하지 않고 살려다보면(썩지 않으려고 발버등치다 보면, 결국 그런 인생에서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만 공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마저 그만큼 삭막하게 만든다.

  

마침 요즈음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마치 나라 전체가 사활을 건 경쟁에 휩싸인 듯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야말로 나라 전체를 위하여 “땅에 떨어져 썩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자기 자신과 자기 지역, 자기 정당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선거에서 국민이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다. 부디, 욕심장이들이 아니라, 식견이 넓고, 봉사정신이 투철하며 사랑이 가득한 분들이 많이 당선되기를 고대한다.











20.        사순 제5주일   요한 12, 20-33 (나)  태백산맥에 뿌린 신앙

김영진 신부



우리 교구에는 기인(奇人) 신부님 한 분이 계신다. 물론 내가 기인 신부님이라고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연세가 들어 은퇴했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60대 중반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식사도 잘하시고, 술도 잘 드시며 춤을 추는 곳에서는 어울려 흔드시기도 하였다.

  

한번은 신부님께 갔더니, 한 손에는 신부들이 기도하는 경본인 성무일도서를 들고 책장을 넘기며 기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장기를 두고 계셨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하여 여쭈어 보았다. “신부님, 지금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면 장기를 두고 계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신부님은 “보면 몰라? 두가지 다하고 있는거지"하시지 않는가.

의아하여 “어떻게 두가지를 다 하십니까?"하였더니, “하느님이 눈을 두개 만들어 주셨잖아. 그래서 하나는 기도하는데 쓰고, 하나는 장기 두는데 쓰는 게야"하면서 찾아온 나를 돌아다 보시지도 않고, 끝까지 당신의 일을 마치셨다.

방안에서 혼자서도 중럴거리시며 고스톱을 치는 신부님이시기에, 한번은 어떤 교우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갔다가, 신부님께서 누구하고 오랫동안 대화를 하시는 줄 알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 날 내가 “신부님, 어떻게 혼자서 고스톱을 하세요?"하고 여쭈었더니, “왜 혼자 해? 예수님하고 둘이 하는 건데"하시는 게 아닌가. “그럼, 누가 이기나요?"하였더니, “어떤 때는 내가 이기고, 어떤 때는 예수님이 이기고 해"라고 대답하였다.

일하는 주방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신부님은 예수님한테 돈도 꾸어드리면서, 마치 맞은 편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듯 대화를 하며 장기를 두고 화투를 친다고 한다. 신부님에게 있어 예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함께 놀아주시는 친근한 이웃이다. 

내가 신부님을 기인이라고 하는데는, 예수님하고 장기와 고스톱을 치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은 강원도 남부 지역의 영월과 정선 그리고 태백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뿌리시고자 한알의 썩는 밀알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장기두는 奇人 사제

1952년 대화성당 보좌로 계시다가 첫 발령을 받은 영월 땅에 엄 마리아가 있다는 소식 하나만 듣,고 미사 짐을 어깨에 메고, 산을 넘고 들을 건너 2백여리나 되는 곳을 걸어서 부임하신 후, 마땅하게 거

처하실 곳이 없어, 면장에게 부탁하여 면에서 창고 겸 쓰는 공회당의 한쪽 구석을 빌려 사제관으로 쓰며, 전교를 시작하였다는 신부님, 그곳에서 또다시 2백여리나 되는 상동성당을 개척하고, 다시 태백산맥줄기인 함백산을 넘으며, 장성성당을 개척하였던 분, 자동차는커녕 자전거 한대 없이 발바닥 하나만 믿고, 한국 최고의 오지인 이곳에 뿌린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를 거듭하여, 주변에 몇개의 성당이 생겼고, 결국 원주교구의 탯줄이 되는 밑거름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사제는 스스로 죽어 바쳐지는 완전한 봉헌물이 될 때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시대가 다르다 하더라도, 교우 숫자와 헌금 숫자를 헤아리며, 교회권력 주변의 맑은 물에서나 한알의 밀씨를 떨구려 하는 뭇 후배들에겐 잔잔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복음에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것을 끊고, 모든 것을 떠나고,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때, 얻어지는 구원과 사랑, 희망과 영광의 신비를 한알의 밀알을 보고서라도 깨우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뜻이다.



속을 썩으면서도 사랑한 것, 자존심이 상했으면서도 용서한 것, 무시를 당하면서도 순종하고 봉사한 것을 후회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내가 한알의 밀알로써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하여 썩어간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위하여 자신을 썩힐 수 있는 희생물로 내어놓는다고 하는 것은, 구원사적 의미로 볼 때는 은총이요, 인간이 봉헌할 수 있는 최고의 예물이며, 이처럼 썩을 때 완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교의 신비다. 우리 모두는 한알의 밀알로서 세상에 던져졌다. 수고하고 땀 흘림으로써, 싹이 트는 밀알, 모욕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함으로써 성장하는 밀알, 마침내 상처받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열매 맺는 밀알이 되기 위하여 세상에 던져졌다.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을 썩힐 수 있는 밭인 그리스도 안에 묻히는 것을 망설이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을것인가

인간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께서도 막상 희생물이 되기 위하여 잡혀가시기 직전,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시고자 하는 뜻에서 “아버지,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  을 내게서 멀리하소서"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는 삶, 완전히 죽고 남김없이 무시를 당하면서도 순종하고 봉사하는 삶이야말로 한알의 밀 알로써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하여 썩어가는 과정이다. 다시 썩어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어야겠다.



사제관 뜨락에 서 있는 목련이 봄기운을 머금고 봉오리를 키우는 걸 보니, 씨뿌리는 계절이 온 듯하다. 올해는 내가 사는 성당의 담장 밑으로 호박씨도 심고, 상추씨와 쑥갓씨도 심어야겠다. 보잘 것  없는 채소의 씨앗들이 죽어 자신의 의무를 다하듯, 나도 죽어 하느님이 바라시는 열 매를 맺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다.











21.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최흥덕 신부



죽음을 통하여 부활에 이른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우리도 시련과 어려움 후에 즐거움이 옴을 명심합시다.



요한 복음사가는 당시의 세속주의 내지는 쾌락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여 자신의 독특한 신학관에 의해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요한 복음서를 편집하였습니다. 1세기경에 복음을 저술한 그는 현세의 일시적인 쾌락과 권력과 명예만을 추구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저술한 목적과 의도에서 이점이 잘 드러납니다(요한 20,30-31 참고).

그 당시 상황이 오늘날과 같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 실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황금만능의 시대가 아닙니까? 쾌락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개의치 않는 현실이 아닙니까?

  

요한 복음은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2장이 제1부이고, 13장에서 20장이 제2부입니다. 오늘 복음 대목은 제1부의 결론이며 제2부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오늘 복음 내용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온갖 환난이나 어려움을 통해서 기쁨과 영광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세속주의와 쾌락주의가 범람하던 그 당시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메시아, 하느님의 종,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렇게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었는가?

왜 죽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안일과 쾌락만을 추구하던 그들에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으리라 추측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 말씀으로 위와 같은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요한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방인인 그레샤인들이 예수를 만납니다. 진실한 하느님을 찾아 헤매던 이방인들이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 복음사가는 이방인까지도 믿고 따르는 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만 했다고 주장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비유로 예수의 죽음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죽음은 수치와 어리석음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영광 받은 예수 그리스도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만백성의 주님이 되셨으며, 모든 이들, 유태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분을 믿고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의도는 역사상의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를 분리하려는 현대 지성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 형제가 된 우리들은 사순절을 마무리하는 오늘, 오늘 복음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왜 죽어서야만 했겠습니까? 만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주님은 죽으시고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오늘 복음 대목을 요한사가는 서술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의 괴로움과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의 와중에서 살아가야만 할까요? 사장의 하루저녁 술값보다 더 적은 노동자의 월급은 양심이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다.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과 정력을 소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은 이러한 악, 비극의 용광로인 것 같습니다. 정말 이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의 신비를 오늘 복음은 설명해 줍니다. 죽음은 악중의 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악중의 악인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오늘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 후에 영원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생 끝에 낙(樂)이 온다는 속담은 오늘 복음과 잘 어울립니다. 여러분은 고생 끝에 즐거움을 소유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고난과 어려움을 이긴 이들임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올 날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오늘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즐거움과 영광의 모태임을 기억합시다.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차지한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읍시다. 아멘.











22.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최영철 신부



 이방인도 주님따라

오늘 복음에서 밀알에 대한 말씀(요한 12,24)은 예수님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함축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제시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있어서 이방인인 그리스인의 방문 요청 (요한  12,22)이 있은 후에 이 말알의 말씀을 하신다. 이방인들인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간(요한 12,27) 즉, 수난의 때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고자하는 요한 복음사가의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존재 의미는 히브리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존재이심을 밝히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만 구원사업을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하나하나를 위해서 구원사업을 하신 예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밀알의 의미를 인류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에 의해서 진행되어간다.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 백성의 의미가 뚜렷해졌고, 모세와 맺은 계약을 통해서 하느님 백성이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 제시되어 현실적으로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구체화시켰다. 즉 인간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 온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었다.



자신을 먹이시는 사랑

하느님은 그 계약의 내용으로 인류 구원 역사를 이끌어오셨다. 그리고 그러한 계약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 최후만찬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과 맺은 계약에 있어서 완성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내놓으신다. 즉 당신을 먹도록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최후만찬과 십자가 사건은 동시적 차원에서 보아야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최후만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십자가 사건 안에 최후의 만찬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우리 인류 구원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 자신을 먹게 한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결정적이고 완성적인 계약의 사건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밀알의 존재 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류 구원사업을 위한 완성적 의미를 밀알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러한 결정적이고 완성적인 계약을 우리 인간과 맺으면서, 그 계약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빵과 포도주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내는 거룩한 미사성제인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존속될 계약의 증표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심으로써 우리 인류와 계약을 맺으셨다는 말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전하고자 하는 밀알의 의미 (요한 12,24)와 예수님의 수난의 때(요한 12,27)는 같은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즉 밀알의 의미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밀알로 표현하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또한 새로운 계명을 주는 것(요한 13,34)과 연결시킨다. 그 새로운 계명이란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35)는 것이다.



 구원의 현장 우리 안에

항상 그렇듯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룬 계약의 사건은, 그 내용을 갖고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계약의 결정이고 완성인 최후만찬과 십자가 사건을 통한 영원한 계약에도 그 내용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3장 34-35절의 새 계명의 내용인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완성된 계약의 현실이 미사성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미사성제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너와 나와의 만남의 자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서 또한 하느님과 나와 네가 하나로 맺어지는 사랑의 공동체의 결정적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밀알의 의미는 그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것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3.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씨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서울대교구 홍보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전례 개정 이전에는 오늘이 바로 수난 제1주일로 성주간을 앞두고 주의 수난을 묵상하는 도입주간이었습니다. 따라서 개정된 전례에서는 오늘은 사순 제5주일로 기념하고 있지만 옛 전례 때에 기억했던 수난의 강조점은 말씀의 부분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성서말씀의 주제는 예수의 수난, 곧 수난이 지닌 구원적 의미입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서 31장의 말씀으로 ‘위로의 책’(30-31장)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오랫동안 바빌론의 유배생활에서 신음하며 암담함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실망과 좌절 가운데서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로하며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우선 고통의 현실, 포로생활이 바로 백성들의 불충실, 특히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잘 지키지 못했던 잘못에 기인하고 있음을 상기시킨 다음, 시나이산에서 이루어진 그 계약보다 더 깊고 진한 새로운 계약체결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시작하자는 창조와 개척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무엇인가를 새롭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큰 희망입니다. 그것은 바로 무(無)에서 유(有)를, 폐허에서 희망의 미래를 창조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돌판에 새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돌판의 글을 잊고, 하느님과의 신의를 깨며 불충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새로운 계약을 제시합니다. 지워질 수 없는 계약, 깨칠 수 없는 계약, 그 계약은 이제 돌판에 새긴 문서가 아니라 마음에 새긴, 가슴에 새긴 내면적 문서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가슴은 바로 인간의 내면적 실존을 칭한 표현입니다. 아니 바로 인간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십계판에 새겨진 법을 따라 사는 수동적 인간이 아닌 양심의 법, 인간다운 삶을 살음으로써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에게 충실한 능동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요구를 예레미야는 피력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새긴 법, 가슴에 새긴 법,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십자가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구원을 가능케 한 하느님의 힘, 곧 성령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새겨주신 계약문서라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모두 철저하게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당신 성령의 불길로 사랑의 법을 새겨주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모든 잘못과 허물을 잊어주시고, 우리의 모든 빛을 탕감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은총의 주님이심을 예레미야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양심의 법, 하느님의 법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는 축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새로운 공동체,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된 곳으로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공동체, 우리의 가정이 바로 하느님 나라, 메시아 나라의 실현일 수 있도록 매사에 우리는 충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2독서인 히브리서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그리스도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큰소리로 기도 바치셨던 예수, 십자가의 수난, 고난의 쓴잔을 멀리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신 예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며 처절한 원망의 기도를 바치셨던 예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잔인한 사람들에 대해 용서를 간구하신 예수, 그 십자가상 예수의 마지막 동작, 마지막 몸부림을 우리는 진지하게 바라보며 특히 우리 하나 하나를 응시하신 예수의 마지막 눈길에 우리는 모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신 예수의 삶이었기에 그의 기도와 간청은 힘이 있었고 무한한 효력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는 참으로 우리의 모델, 구원의 원형입니다. 예수는 참으로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 자체입니다. 예수는 참으로 구원의 신비입니다. 예수는 참으로 대사제이며 봉헌물입니다. 사제는 모름지기 하느님께 선발되어야 하는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혈연에 의해 계승되는 직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다지파에서 나신 예수는 레위지파에 속한 분이 아니기에 구약의 의미로 보아 한 평신도일 뿐 사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혈연의 관계를 뛰어넘는 신앙의 차원을 예수는 몸소 보여주셨고 그것을 실현시키신 것입니다. 무릇 사제란 철저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봉헌물일 때에만 진정한 사제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함은 물론 인간과의 연대성을 지녀야 합니다. 연대성이란 바로 함께 하는 삶의 양식, 무리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연대적 인간이셨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기도, 그의 희생, 그의 죽음이 나와 연관된 보편적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봉헌,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 모두 사랑과 희생, 연대적 삶을 다짐해야 합니다.

  

오늘의 요한복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논리적으로는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필립보에게 예수를 뵙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이 청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고, 당신의 신원에 대하여 강론을 하십니다. 즉 예수를 뵙는 것은 예수가 누구이신 지를 알아야 하는 것인데, 예수는 바로 이웃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땅에 묻히는 과정을 통해서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밀알의 신비,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구원의 신비, 이것이 곧 생명의 신비, 영생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고난의 시간, 죽음의 시간을 앞에 두고 고뇌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소박한 인간적 면모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 괴로워하며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곳에서도 희망을 지니며 미래를 생각하고 하느님과 이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고통의 시간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바로 여기에 신앙인의 성숙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고통받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개인적, 사회적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고통에 담겨진 구원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아멘.











24.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나를 따르시오!

서울대교구 홍보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청중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보여달라는 데 대한 예수님의 답변(20-23절)과, 예수님이 땅에서 들어올려지신다(27-33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복음 이야기

그리스 사람들이 필립보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청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습니다. 진실히 진실히 말하거니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보존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고자 하면 나를 따르시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영예롭게 하실 것입니다”(23-26절).



예수께서는 수난의 시간을 앞에 두고 몹시 근심하시지만(27절),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깨달아 수난 당할 각오를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바치십니다(28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청중들을 향하여 당신의 죽음이 모든 만민을 살리는 길이고 영광을 받는 길임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32-33절).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20-36). 즉, 예수께서는 곧 죽게 될 터인데 그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이나 헛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죽음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밀알의 죽음에 비유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 속에 들어가서 죽습니다. 그런데 이 밀알은 땅 속에 떨어져 썩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싹을 내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의미와 효력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비유 끝에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보존할 것입니다”(2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는 길은 죽는 길이고, 죽는 길은 사는 길이라는 생명의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주간을 앞두고 나에게 있어서 사는 길은 무엇이고 죽는 길은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하도록 합시다.











25.          사순 제5주일   요한 12, 20-33 (나)  밀알의 교훈



밀알은 땅에 떨어져 썩어야 싹을 틔울 수 있다. 어찌 밀알뿐이겠는가.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같은 결과를 낸다. 씨앗 자체가 썩어 양분이 되고 그 양분을 딛고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이다. 평범한 이치지만 생각하면 무서운 자연의 신비다. 동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연약한 짐승들이 살아남는 것은 순전히 어미의 희생 때문이다. 그러기에 새끼를 둔 어미는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달아나지 않는다. 이 모성애가 종족 번식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하찮은 미물의 세계에서도 이렇듯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싹을 틔우고 새끼를 키운다. 자연의 이치와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고 하지만 내용 자체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인간 사회는 어떤가.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 않는가.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밀알이 썩기는커녕 한 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대, 희생은 연약한 사람들의 행동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희생없이는 누구도 썩는다는 행위를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썩지 않으면 하늘의 생명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불안과 허무, 삶의 무미건조함이 팽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밀알이 썩지 않는데 어찌 새싹이 돋아나겠는가. 희생하지 않는데 어찌 삶의 기쁨이 주어지겠는가. 그러니 썩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썩는 행위를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생명력을 주는 행위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무와 풀들이 건강한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뿌리가 튼튼하면 줄기와 잎은 당연히 튼튼해진다. 화려한 꽃과 알찬 열매의 결실은 보이지 않는 뿌리에 달려있다. 뿌리는 무엇인가. 희생과 사랑이 아닐는지. 밀알이 썩는 행위가 아닐는지. 그러니 우리는 씨앗으로 돌아가 싹을 틔우고 보이지 않는 흙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교훈이다.



사람에겐 자신의 고유한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흙으로 돌아가 흙이 되는 행위다. 어떤 집안에도 십자가는 있다. 어두운 부분이 있다. 누군가 그 십자가를 안고 있기에 생명력이 집안을 떠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해 썩는 행위가 아닐는지. 그러니 우리도 십자가를 인정하며 기꺼이 지고 가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을 실천하는 행위다.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는 십자가 짐을 연습한다. 지난 사순절 동안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면 남은 기간에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사랑으로 한다면 가능하다. 성격이 강한 사람은 조금은 자기를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도 질투심이 강한 사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행위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길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순절은 지나가는 연례행사일 뿐이다. 사순절 동안 자신의 십자가를 느끼지 못하면 사순절의 전례 또한 무의미해진다. 부활절은 사순절의 결실이다. 어떻게 사순절을 보냈느냐에 따라 부활의 은총은 달라진다. 씨앗이 썩으면 새싹은 당연히 돋아난다. 금년 부활절엔 삶의 또 다른 싹을 만나도록 하자











26.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예와 아니오

박정미 카타리나 수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여라”(마태 5,37).

2000년 대희년의 사순시기를 지내는 요즈음  국회의원 선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의 4․13 총선거는 정당들의 후보 공천이 있기 전부터 부적격 정치인의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으로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선 선거는 우리가 정치적인 존재임을 다시금 의식하게 합니다. 투표를 통한 의사 표시는 일반 국민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참여이며, 선거의 과정에 무관심하거나 기권하는 것도 정치적인 선택입니다. 침묵이나 방관도 바로 정치적인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행동이 됩니다.



최근 대희년을 맞이하여 교황청이 발표한「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과오들」이라는 문헌에서는 지난 천년기 동안 교회의 구성원들이 범한 역사적 과오에 대하여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에서의 이슬람교도들의 살육,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으로 원주민 학살 방조, 유다인 박해, 종교재판에서의 고문과 인권 유린으로서 서양 교회가 다른 종교 및 문화권과 접촉, 충돌하면서 범한 집단적 정치 행위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는 어떤 역사적 과오를 정화해야 하겠습니까? 일제치하 때,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교회로서 투신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는 지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



남북분단과 이념대립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왔습니까? 민주화 과정과 산업화 과정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인권이 유린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여성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가 자행되었을 때, 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주의로 치닫고 있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참 가치를 증거하는 소금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분단된 조국의 현실 앞에서 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어떤 건설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민족이 함께 범한 역사적 과오와 시련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회개와 결단을 요구하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며칠 후로 다가온 총선에서 대의(大義)와 진리에 대한 관심, 생명과 인권 존중, 공동선에 대한 열정, 부정부패 척결 의지 등이 후보들을 선별하는 기준으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결단의 시기가 온 것입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슬기로운 선택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어울려 살며 생명을 키우고 보존하도록 자연과 환경을 보살피는 사회로 만들어 가는 데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국민의 표의 심판이 정치인들을 각성시키고 우리의 정치풍토를 새롭게 하는 채찍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날 때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우리도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27.    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 ”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 사람 몇이 당신을 뵙고 싶어한다는 말을 제자들로부터 전해 듣고 하신 말씀 중의 하나이다. 이방인들인 이 사람들은 아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백성들이 그분에게 보여준 환호(바로 앞 대목 요한 12,12-19)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직접 만나 주지 않으시면서, 제자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진정 따르려거든 그들도 당신처럼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결실을 맺는 밀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참조: 26절의 말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영광스럽게 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시간이 바로 당신의 구속사업을 완성하시는 시간이요(참조 19,30), 그렇기에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영광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 죽음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아무런 고뇌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요한 복음도 예수님이 임박한 죽음 앞에서 고뇌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하고 기원할까?”(12,27). 그러나 “고난의 시간을 면하게 해달라”는 이 생각은 성부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과 뜻을 생각하면서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28절)라는 기도로 바뀐다(참조 마르 14,3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고뇌하시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조: 이번 주일의 제2독서인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5,7]라고까지 말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자’의 모습으로는 너무나 나약하다. 그런 모습은,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데 오히려 결정적으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분이 “부활하여 살아계시다”는 것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과, 그들의 그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더없이 큰 사랑을 본다. 인류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큰 위로를 받는다. 다른 한편 깊은 고뇌 가운데에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시며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신자들에게 -특히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듯한 일을 앞두고 극심한 고뇌에 휩싸이게 될 때에 - 큰 귀감이 된다.

벌써 사순 제5주일이다. 성주간이 이제 한 주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 동안의 사순시기를 어떻게 지내왔는지 점검해 볼 때이다. 점검의 기준으로는 마침 오늘 복음에 나오는 “썩을 줄 아는 밀알”의 정신이 꼭 들어맞는다. 우리 각자는 가정에서, 본당에서, 각 공동체에서 과연 예수님의 정신대로 “밀알이 썩듯”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랑으로 조금이라도 희생할 각오를 하고 살아 왔는가? 아니면 사회의 전반적 풍조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가정에서마저) 조금도 양보하거나 손해보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자기 이익만을 챙기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자신이 남을 위해 “썩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땅 속에 묻혀 썩을 때에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렇게 하여 그 생명은 풍요롭게 계속된다. 그러나 썩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야말로 “외톨이”가 되어 홀로 뒹굴다가 결국에는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지나가는 수레바퀴에 밟혀 으깨져 버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눈앞의 자기이익에만 매달리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희생은커녕 양보조차도 조금도 하지 않고 살려다보면 (썩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보면), 결국 그런 인생에서 남는 것은 ‘공허함’ 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만 공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마저 그만큼 삭막하게 만든다.

마침 요즈음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마치 나라 전체가 사활을 건 경쟁에 휩싸인 듯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야말로 나라 전체를 위하여 “땅에 떨어져 썩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자기 자신과 자기 지역, 자기 정당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이번 선거에서 국민이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다. 부디, 욕심장이들이 아니라, 식견이 넓고 봉사정신이 투철하며 사랑이 가득한 분들이 많이 당선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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