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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전례
작성자 주일강론 모음
작성일 2008년 3월 8일 (토) 00:47
분 류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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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
 



다해 사순 제 5주일



25. 서경윤 신부(다)/50           26. 이용희 신부(다)/52

        27. 홍금표 신부(다)/54           28. 허영업 신부(다)/56

        29. 신은근 신부(다)/58           30. 전주원 신부(다)/59

        31. 함세웅 신부(다)/61           32. 윤석원 신부(다)/62

        33. 강영구 신부(다)/63           34. 유영봉 신부(다)/67

        35. 강길웅 신부(다)/69           36. 서울교구 주보/71

        37. 용서하시는 예수님/73



28.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누가 돌 던질 자격이 있나?

서경윤 신부



판공성사 때 고백실에 앉아 있는데, 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잇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때가 언제였던지는 영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오래 전이긴 해도 성사 줄 때는 아니었고, 그러면 언제 어느 땐가‥‥아무리 생각해도, 새 고백자는 자꾸 들어오고 생각은 나지 않았습니다. 성사를 주면서도 틈틈이 분심을 하며 그때를 기억 속에서 찾으려 했지만 헛일이었습니다.

  사방은 벽으로 둘러 싸여 있어 답답하고 새 고백자는 끝도 없이 들어오고, 나는 갇혀서 꼼짝도 못하고, 이런 경험이 성사줄 때 말고 언제더라? 계속 여기까지 밖에는 생각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내가 답답한 것은 꼼짝못하고 앉아서 성사 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지 않는 과거 어떤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며칠 전 머리를 식히느라 창문을 열고 앞을 보니, 도로에 차들이 꽉 차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저 차들이 마치 판공성사 때 고백자 행렬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그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성사 주다 생각은 났지만, 알아내지 못했던 사건은 바로 옛날에 (적어도 15년 전)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났을 때였습니다. 그 날도 운전병을 데리고 장거리를 가는 도중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길옆으로 지프차를 밀어 세워 놓고는 지나가는 차들에게 구원을 요청해봐도 곱지 않은 눈으로 흘깃 보기만 했지, 그냥 다 지나 갔습니다. 미리 옆 눈으로 봤는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차들도 있었습니다.

  약이 오른 나는 지나가는 차들에게 돌멩이라도 던지고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차 뒤에다 대고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속도위반이니까 가다가 교통순경한테 잡혀라! 시간도 뺏기고 벌금도 내고, 아 고소하다! 그 봐 나를 도와 줬으면 괜찮았지. 너는 처다 보지도 않고 그냥 가냐? 가다가 펑크나 나버려라. 그리고 공구가 없어서 나 같은 고생을 해봐라? 너는 화물차 운전수구나! 평생 남의 화물차나 운전해서 먹고살아라!


한참 동안 직결 재판관 노릇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분은 좀 풀렸고 새로운 처벌을 생각하느라 약간 재미도 있었지만, 무심한 차들은 끝없이 지나가고, 나도 지치고 시들해 졌습니다. 내 발등의 불이 더욱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마침 경찰 순찰차가 와서 내 운전병을 시내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싣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그냥 혼자 차안에 앉아서, 운전병이 자동차 부속품을 사올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판관 노릇을 계속해봤지만 그 따분함이란 말 할 수 없었는데, 바로 그 때의 느낌이 고백실에서의 그 날 느낀 그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성서에서는, 간음하다 들킨 한 여인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와서 모세의 법대로 돌로 처 죽일까 하고 물었습니다?

  모세법에는 : “이웃집 아내와 간통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레위 20,10) 또 “어떤 자가 남의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다가 붙잡혔을 경우에는 같이 자던 그 남자와 여자를 함께 죽여야 한다. 약혼한 남자가 있는 처녀를 다른 사람의 성읍 안에서 만나 같이 잤을 경우에는, 둘 다 성읍 성문 있는 데로 끌어내다가 돌로 처 죽여야 한다“(신명 22,22~24) 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법의 문맥을 보면, 간통을 저지른 남자를 중심으로 한 처벌 규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남자는 어디 가고 여자만 붙들려와서 곤욕을 치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남자 혼자 재빨리 도망을 쳤든지, 동네 사람들이 남자는 봐주어서 풀어줬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법대로  한다면, 남자도 잡아와서 함께 처형을 하든지, 아니면 여자도 풀어줬어야 했습니다. 여자만 데리고 온 걸 보면 「남자를 풀어준 것」이 거의 확실할성십습니다. 그렇다면 왜 난자는 풀어주었을까?‥‥



아마도 여자들 붙들어 온 자들도 경중의 차이가 있을망정 비슷한 전과가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혹시 그 중에는 도망간 남자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빚(?)을 갚은 셈이겠지요! 아무튼 성서에서도 예수님이 『죄 지은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고 말하셨지만,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한사람씩 그래서 모두 그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결국모두가 죄인이란 말입니다.

  사실 고백소에 앉아 있어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세상사람들이 나를 포함해서 똑같은 죄를 짓고 사는지 감탄스럽습니다. 어떤 때에는 나를 대신해신 고백하는 것 같아 섬찟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같은 죄를 짓고사는 줄 아는데, 반드시 들어가야 할 죄목이 빠진다 싶을 때도 있고, 분명히 뭔가를 꼬불친다는 느낌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단, 그래도 말 않고 님어가곤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그 죄를 짓고 사는지 알고 고백하기를 주저하고 부끄러워 하지만, 오늘 성서에서도 들려주다시피 사실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꼭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왕 고백소에 들어왔으니까 감추지 말고 속 시원히 털어놓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날도 남자보다 여자 고백자가 많은 이유도 짐작이 갑니다.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또는 이런 저런 핑계로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사방은 막히고 비좁은 고백소에서 이렇게 매번 같은 소리를 듣자니, 끝도 없이 서있는 고백자의 행렬은 막힌 도로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자동차 행렬 같아 답답합니다만, 말문이 막혀버린 고백자를 만나는 것은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기발한 보속을 생각해 가며 직결 재판관 노릇하는 것도, 처음 얼마간이지 즉시 시들해지고, 부속품 사러간 운전병을 기다리듯, 차 마시고 쉬었다 계속하라는 전갈 오기만 기다리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지나가던 차에다 대고 욕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 후에 나도 고장난 차들 흘깃 보며 그냥 지나친 적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 시간부터 내가 한 그 모든 욕들은 너무 늦었지만 다 취소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습니다?











29.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용서받음으로써 얻게 된 새로운 미래

이용희 신부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어느덧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사순절의 막바지에 다가와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사순 제5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함께 걷는 여정에서, 지난 주의 말씀과 오늘 말씀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 연속성은 독서들의 내용이 다 같이 빠스카의 복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전체적 흐름 이외도, 특히 하느님께서 용서와 자비를 통해 당신 백성을 위해 만들어 내시는 ‘새로움’에 관한 주제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스스로 죄인임을 확인

지난 주 우리는 탕자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의 비참함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의 권리만을 주장하였고, 욕심을 채우려고 그분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배신을 당신의 자비로 용서해주셨고, 당신의 아들로 다시 받아주셨습니다. 이제 기쁨에 넘쳐 우리는 외칠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제 당신을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오늘은, 또 다른 새로움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간음한 여인,’ 그녀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모세법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요청하기도 전에 자비와 사랑으로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 30일 피정을 할 때였습니다. 10일 동안 죽음과 죄에 대해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 때 ‘간음한 여인’에 대해 묵상을 하면서, 저는 제 자신의 내면 깊숙이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나는 간음한 여인입니다.” “나는 돌을 들어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려는 하나의 바리사이파 사람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죄 없는 사람, 돌을 들어 죄지은 이를 돌로 칠 수 있는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저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돌을 들어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죄인입니다. 사제가 된 지금, 신자들의 목자로서 그들의 모범으로 살기보다는, 나의 명예를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교만한 마음, 시기심, 이기심, 나태, 제가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아도 저는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나를 용서해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생명을 취하신 인간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분은 측은한 마음으로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왜 죄를 지었느냐. 그렇게도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우냐? 그러나 너보다 더 악한 이들은 너를 단죄하려고 끌고 온 백성의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다시는 죄짓지 말라. 네가 용서받았으니, 이제 너도 용서하며 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네 마음 안에 있다. "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주님,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험난한 골고타의 산길을 오르신 분입니다. 사랑을 주시기 위해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며, 고난과 가난의 삶이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나의 몸과 마음을 내어주는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죄를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일을 묻지 않는 선하신 분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내가 사막에 큰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사막에 물을 대어주고,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들이리니,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내가 친히 손으로 빛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우리의 주님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지나간 일에 마음을 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모두 잊으시고 용서해주시는 선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새롭게 시작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 온전한 믿음을 두고, 그분의 삶과 정신을 나의 삶과 정신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가난과 멸시와 고통을 받으셨던 그분의 삶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나의 입과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오는 부활의 영광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새롭게 시작하시오. 이제 과거는 지나간 일에 불과하오. 앞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나는 부활하여 영광을 얻었습니다. 당신도 지금은 험난한 길을 걷고있다고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허상에 불과할 뿐이오. 고난을 참고 견디시오. 그러면 나와 함께 영광의 길에 들어설 것이오. 나를 믿고 모든 것을 버리시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이 눈간, 우리가 처한 현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은 모두 잊읍시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처럼,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그분이 나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며, 우리가 받게 될 영광된 삶만을 바라보며, 막바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분을 위해서 내가 어떤 결심을 하느냐, 그분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합시다. 일의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요시 할 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임을 깨달읍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은 부활의 영광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선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몸바쳐 일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30.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에 물들지 않기

홍금표 신부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 가면, 사람들은 먼저 크고 웅장한 성당의 모습과 뛰어난 조각품들에 늘라지 알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97년 성지순례 후 베드로 대성당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당의 모습이나 뛰어난 예술작품들이 아니라, 하나의 성수대였다. 이 성수대는 천사 두 명이 성수를 받쳐들고 있는 모습인데, 특이하게 이 천사들의 얼굴은 모두 성수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네 죄를 보지 않겠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이 작품이, 성수가 가지는 의미를 가장 잘 절명하고 있고, 아울러 사랑과 자비의 종교인 우리 그리스도교를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복음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시험적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시고,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시다가,「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말함으로써, 율벌학자들의 책략에서 벗어나고, 그 여인에게「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 짓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리사이과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의 의미와 예수님이 보이신 말과 행동, 즉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다」라는 것의 의미와, 마지막 부분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알겠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 자리에서는 율사들의 질문의 의미와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다」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같이 묵상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에서 간음죄를 범한 여인은 기혼녀는 사형으로, 약혼녀는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의 여인이 약혼녀일 경우, 당연히 돌로 쳐죽이면 되는데,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인들이 사형권을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 빼앗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음녀를 돌로 쳐죽이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해결에만 머물 수밖에 없는 문제였지만, 그러나 이 문제 뒤에 놓여 있는 배경은, 예수를 어려운 처지에 몰아 널기에 충분한 함정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의 규정대로 돌로 치라고 한다면, 자비에 대하여 지금까지 해온 가르침을 부인하게 될 위험이 있었고, 더 고약한 것은 사형선고의 권리를 가진 로마 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은, 그 여인에게 동정을 느끼고 불쌍히 여겨 용서하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자로 낙인찍힐 뿐만 아니라, 그러한 범죄를 사형으로 처벌하지 않았던 원수인 로마의 지지자로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미묘한 문제였다. 바로 이 미묘한 문제 앞에서 보이신 그분의 행동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론 쓰고 계신 행동」이었다‥‥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발자들의 죄를 나열했다는 성 예로니모의 설, 흑은 다니엘서에 하느님의 손가락이 쓴 글을 썼다는 설(다니 5,24), 아니면 예레미야서 17장 13절이었다는 설, 또는 예수께서 침착성을 찾고 생각하기 위하여 그저 뜰에 낙서형식의 글이었다는 설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확실한 것은 없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서에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용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던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몇 년 전 누가 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부분에 대해 묵상한 글을 읽은 적이 있기에, 그 뜻만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분은 「땅에 무엇인가를 쓴 그 행동」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미가 없다면, 두 번이나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는 행동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분은「땅」과「손가락」에 주의하면서, 어린 시절 뾰족한 못으로  글자놀이를 한 후, 그 다음날 그 자리에 가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글자들을 잘 알아볼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땅에 쓴 글씨의 의미를 찾는다.  



이분의 결론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는 행동은, 첫째로「잘 기록되지 않는다」는 점과 둘째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로 본다. 땅에 무엇인가를 쓰는 행동의 의미는,「나는 당신의 죄를 마음 속에 각인시키지도 않을 것이요, 오래도록 기억하지도 않겠노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해석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성서학자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잘못, 특별히 자신을 향한 잘못에 대해서는 가슴 깊이 되새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의미 있는 묵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라고 결론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웃음으로만 흘려 버릴 수 있는 묵상은 아니리라 생각해 본다.











31.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허영엽 신부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장터에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보려고 몰려들었고, 제자들은 군중을 통제하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나라에 관한 소식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 그 여자의 머리칼은 헝클어진 상태였고, 입에는 피가 흐르고, 옷은 찢어져 있었다. 예수님 앞에 내동댕이쳐진 여인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이 여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하는데,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당시에 간음은 공개처형을 할 정도로 중죄에 해당되었다.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다해도 변명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사실 교활한 바리사이파인들과 율법하자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의도에서 여인을 끌고 온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신 듯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들의 올가미는 아주 간악한 것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그녀를 용서해주라고 하면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고발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한다면, 평소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동을 스스로 하는 것이 된다. 진퇴양난이었다.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다. 시간을 끌면서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바리사이파인들은 의기양양하게 예수님의 답을 재촉하며, 보란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선생님,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나요. 말씀을 해보시지요!” 그때 예수님은 입을 여셨다.

“여러분 중에서 과거에 죄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저 여인을 돌로 쳐죽이시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오자,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하나 둘씩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이윽고 예수님 앞에는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여인은 여전히 겁에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이여, 너의 죄를 고발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느냐?" “모두 사라졌습니다. 선생님!” 여인은 눈치를 보면서 개미 만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예수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젠 다시 죄짓지 높도록 하여라."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여인은 옷매무시를 고치고, 눈물을 훔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 여인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께 고마움을 갖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갔을까. 아니면, 다시 늘 반복되는 잘못에 빠져, 어두운 삶을 지속했을까, 예수님을 만난 것을 계기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의 사랑이었다. 모든 율법과 관습, 그리고 가치관을 초월한 사랑이었다.간음한 여인 이야기는, 죄지은 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처형을 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을 거스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죄를 묻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나는 죄 없는 양, 나는 다른 이를 처벌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양, 착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이를 심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죄를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죄를 피해갈 수 없다.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그건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다. 


예수님은 무작정 간음한 여인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과 죄인의 자각을 일깨우시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실상 다를 바가 없다는 고발은 아니었을까. 한가지 그녀와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드러나지 않았고, 그녀는 드러났을 뿐이다. .



예수님은 죄를 경시하거나 죄를 묵인하고자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의 철저한 자각,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각을 통해, 다른 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자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











32.          사순 제5주일   요한 5,1-11 (다)  용서하시는 예수님

신은근 신부



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알고 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감동적인 내용이 아니면 알려질리 없다. 어떤 부분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겠는가. 용서에 얽힌 감동이다. 예나 지금이나 간음은 여자의 잘못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기에 남성중심의 사회에선 가혹한 벌로 다스렸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우리나라가 그랬다. 그러나 어찌 여자만의 잘못이겠는가. 예수님은 모두를 용서하신다. 간음한 여인 뿐 아니라 그녀를 고발했던 위선에 찬 남자들도 용서하신다.



다만 한마디,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씀뿐이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그 행위가 십계명을 어겼기에 하느님의 진노가 내린다고 생각하여 돌을 던져 죽게 했다. 공동체에서 죄인을 제거시킴으로 하느님의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모든 것을 끝내셨으니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두려워했을 것이다. 죽음을 뛰어넘는 힘과 권위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의 능력이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죽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죽음을 반대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묵인하면 사랑과 용서를 부르짖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된다. 당신들 중에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고발자뿐 아니라 구경꾼들까지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아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까지 서늘한 가슴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무엇인가 땅에다 쓰셨다고 한다. 악의에 찬 질문 앞에서 그분이 보여주시는 배려가 아닐는지. 마침내 질문자들은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다.



모두 가버리고 여인과 주님만이 남았을 때 예수님은 말한다.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소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마시오.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그 말이 되돌아 와서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감쌀 수 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어떤 모습으로 돌아갔겠는가. 환희와 감동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용서를 체험함으로 행복한 여인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쁨을 갖고 살기를 원하신다. 죄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두운 마음으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 사회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은 밝은 인간관계를 맺고 산다. 그러니 누구나 하느님에 대해선 밝은 관계를 지녀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가. 하느님에 대해 밝은 생각을 지녀야 신앙생활이 밝아진다. 간음한 여인보다 그녀를 고발했던 사람들이 더 어두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벌주고 재앙을 내리는 하느님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갔다. 용서는 사랑을 깨닫게 하는 행위다. 복음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용서의 사순절을 묵상하자.











33.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 없는 자 돌로 치시오.

전주원 신부





유대의 율법에는 3대 죄악이라고 규정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 둘째는 살인, 셋째는 간음입니다. 율법상의 어려운 문제가 야기되면 이것은 랍비에게 가지고 가서 해결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입니다.

  

물론 율법대로 하면 간음한 경우, 간부와 음부 둘 다 사형을 시키라고 되어있습니다. (레위 20,10; 신명 22,13-24).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와서 어떻게 판결할 것인지를 물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유대 법대로 사형시키라고 말한다면 그 당시 사법권이 로마 정부에만 있었으므로 예수님 자신이 월권 행사를 하게 되어, 직접적으로 로마와 부딪치게 되고 또 그 여자를 처벌함으로써, 죄인들의 벗이라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지게 됩니다. 만일 그 여자를 놓아주라고 예수님이 말씀한다면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파괴자가 되어 버리는 상황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에게 대한 연민과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시고 각자,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저런 짓을 해볼 생각조차 평생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 저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권위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새롭게 해주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그 당시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율법 문제를 해석하는 권위를 그들만이 가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권위라는 것도 비판적이고 검열 적이며 단죄 적인 것이었습니다. 권위라는 것은 본시 범죄를 교정하고 예방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가 조금이라도 율법을 위반하면 가차없이 잔인한 형벌로 다스리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권위 의식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위는 형벌이나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자기집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달려들어 갈기갈기 물어 찢는 훈련된 도사견처럼 말입니다.

  

권위란 원래 공감에 기초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위를 쥔 사람은, 범죄자가 있을 때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일이 첫째 의무이며, 범죄의 길로 빠지기 쉬운 환경도 고려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죄지은 사람이 개심 하도록 최선의 힘을 써야 하는 것도 가진 자의 의무입니다.

  

범죄자를 단죄하고 사회에서 추방하고 없애버리라는 권위가 아니라, 죄인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권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 안에 있는 권위는 마치 현명한 의사와 같은 존재여야 함을 예수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한편 바리사이들의 행위는 몰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음한 여자를 인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들 목적에 이용하는 물건처럼 보았습니다. 즉 예수님을 때려잡기 위해서 이용한 단순한 인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인간 대우는 해줘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입니다. 아무리 죄인의 몸이라도, 본인의 동의 없이 의학표본으로 쓴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죄도 없는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와서 생체실험을 하는 그런 일은 하느님 대전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과거 10년 군부에서 그런 못된 짓들을 했기 때문에 패망했을 것입니다.











34.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 없는 자 돌로 치시오.

함세웅 신부



  ‘주의기도’ 후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것은 우리 모두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중에 “하느님 앞에서 나만큼은 죄가 없는 성인이야!”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솔직한 기도이며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요한 8,1-11)은 간음한 여인, 즉 법률에 의한 죄녀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골탕먹일 목적으로 죄녀를 잡아 왔습니다. 법률에 의하면 이러한 여인은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으니, 만일 예수님이 ‘법대로, 죽여라’하면 잔인하다고 할 것이고, ‘죽이지 말라’하면 법을 무시하는 위법자라고 올가미를 씌우는 작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치한 작전을 너무나도 빤히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심각하게 다른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있다면 저 여인을 돌로 쳐라!” 각자의 양심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남의 잘못을 언급하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깨우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감히 누구도 자신 있게 나서서 그 여인을 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살아 있기에 말입니다. 가엾은 죄녀, 그녀는 갖은 모욕을 당하며 머리만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괴로울 뿐입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누가 이 여인을 죄녀라고 단죄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 역시 똑같은 인간, 똑같은 죄인, 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어쨌든 죄녀만이 예수님 앞에 남았습니다. 다른 모든 이는 다 떠나갔습니다. 죄녀라고 판단할 자격이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이 죄녀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죄 짓지 마시오”하는 당부의 말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죄를 짓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죄가 크고 많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감싸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나 큰 죄인이야! 나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어!” 하면서 절망의 상태에서 뉘우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겸손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셈하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과 미래입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무리 커도 우리의 실수가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그 하느님은 ‘뉘우치는 지금의 나’를 보고, ‘죄 짓지 않겠다고 노력할 나’를 보고 모두 용서해 주십니다.

  자비의 하느님을 믿는 우리이기에 매일매일 새로운 출발과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35.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 없는 자 돌로 치시오.

윤석원 신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목적으로 “모세 법에 의하면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당신들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버렸습니다. 인자하신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당신을 단죄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겠으니 돌아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요한 8,1-11)하셨습니다. 이 복음의 내용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군중의 양심에 호소하여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중에 양심이 무딘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돌로 그 여자를 죽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맑은 양심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주신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은 인간의 가슴속에서 도덕생활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 의와 불의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를 저버린 사회, 올바른 양심을 갖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회, 불신의 사회일수록 하느님께서 주신 양심의 존귀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양심의 채찍을 안 맞아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생활을 돌아보든지 사회현상을 돌아보면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양심의 만족을 느끼는 것보다는 명예를 얻는 데 힘을 기울이고 양심을 기르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양심을 속이는 데 눈을 파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욕심의 소리가 너무 커서 양심의 세밀한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공무원이 무슨 부탁을 들어주고 처음 뇌물을 받을 때 양심에 불안을 느끼지만 그냥 받아둡니다. 그렇지만 한두 번 받고 보면 습관이 되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나 해주고 왜 뇌물을 안 가져오나 기다리게 되고, 나중에는 마땅히 해주어야 할 것을 급행료를 받고 해주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보겠습니다. 고백성사를 한두 번 미루고 미사와 모든 기도 생활을 한두 번 궐하고 소홀히 할 때 우리의 양심은 무디어지고 마비되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심의 소리를 계속해서 듣지 않으면 양심이 무디어져서 그 다음에는 양심의 소리를 여러 번 듣기는 하나 자꾸 거절하면 그 후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양심이 무디어져서 습관적으로 악을 청하는 결과가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특히 사도 바오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믿음과 맑은 양심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파선을 당했습니다(1디모 1,19). 이 말씀과 같이 양심을 떠나면 그 믿음은 파선을 당합니다. 신앙인들은 양심이 맑은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둘째로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겠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1요한 1,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자비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시지는 않으시고 주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면서 “우리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서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1요한 1,9). 여기에는 반드시 참된 회개를 동반해야만 합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다함께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사도 베드로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자기 죄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예수께 용서를 청해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을 했습니다. 우리도 자기 죄를 먼저 깨닫고, 또 죄로 인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뉘우칠 뿐만 아니라 온전히 죄를 끊어버리도록 노력하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시다.

  특히 사순절 동안 신앙인들은 맑은 양심을 갖고 훌륭한 싸움을 싸워 믿음을 굳건히 하고 잘못된 점은 참된 회개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되겠습니다.











36.          사순 제5 주일 요한 8,1-11 (다)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강영구 신부



오늘은 사순 제5 주일입니다.

19세기 중반에 인도에서 살았던 라마크리슈나라는 성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한 수도승이 사원 옆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수도승의 집 앞에 어떤 창녀가 살고 있었는데, 밤낮 없이 사내들이 그 집에 들락거렸습니다. 이 광경을 보다 못한 수도승이 어느 날 그 창녀를 불러다 놓고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여인이여, 그대는 밤낮으로 죄만 짓고, 그 죄의 대가를 어떻게 받으려고 하는가?”

  이 말을 듣고 그 가난한 여인은 자기의 부정한 행실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자신의 구차한 목숨을 이어 갈 수가 없어서 그 일을 당장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여인을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여인은 더욱 큰 죄책감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수도승은 자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실이 변하지 않자, 하루는 이렇게 작정하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내들을 상대하는지 세어 보리라.”

  

그 날부터 그 수도승은 여인의 집으로 남자가 들어갈 때마다 마당 한구석에 돌을 하나씩 던져 놓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감에 따라서 돌무더기는 커져서 드디어 큰 무덤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승은 여인에게 그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이 돌무더기가보이지 않는가? 이 돌 하나하나가 그대가 상대한 사내들의 숫자다. 그대는 이 돌무더기만큼 많은 죄를 지었다. 자, 그래도 그 악마 같은 짓을 집어치우지 않겠는가?”

  가엾은 여인은 그 돌무더기를 보자 너무 많은 것에 놀라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자신의 죄 많음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빌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느님, 이 죄 많은 여인을 굽어살피소서. 어서 이 더러운 육신을 거두시고 이 고뇌에 찬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소서.”

  

가련한 여인의 기도가 하느님께 전달되어서, 그 날 죽음의 천사가 그 집 위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교롭게 그 수도승도 그 날 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국의 사자는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깊이 회개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어 천국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 만만한 수도승의 영혼을 묶어서 지옥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창녀의 영혼이 천국으로 오르는 것을 본 수도승은 외쳤습니다. “이게 바로 그 의롭다는 하느님의 심판인가? 나는 일생 동안 금욕과 절제, 그리고 가난 속에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저 여자는 죄 속에 파묻혀서 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천국으로 데려가다니‥‥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말을 듣고 천국의 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다. 너는 네가 생각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된다. 너는 일생 동안 수도승이라는 자만심에 빠져서 청정히 살아왔다. 너는 스스로 의롭고 깨끗하다는 자기 도취에 빠져서 단 한번도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빌어 보지도 않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도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저 가련한 여인은 비록 몸으로는 죄를 짓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항상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빌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대와 같은 수도승에게 공경심을 가지고 그대의 청정한 삶을 동경하며 사모해 왔다. 그래서 그녀의 가슴은 하느님의 자비와 공경과 깨끗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너는 몸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이 여인의 죄를 꾸짖고, 그 죄를 헤아리기에 열중했다. 그래서 너의 가슴은 죄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너는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 하느님은 공평하시다”(김정섭 편저,'행복한 마음', 1787년 김영사 간, 274-776쪽).

  

형제 자매 여러분,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선인과 악인의 차이는 얼마나 됩니까? 성인과 죄인의 차이는 얼마나 됩니까? 하느님 앞에 인간의 의로움과 착함이란 무엇이며, 또 악함이란 무엇입니까? 기실 성인과 죄인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면 우리 인간은 모두 용서받아야 할 죄인일 따름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하여 간음하다가 끌려 온 여인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는 평소에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시키러 왔지 없애러 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마태 5,17 이하). 간교한 그들은 예수를 빠져 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려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평소에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시던 예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그 여인을 놓아 주라고 하시면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시키려 오셨다는 예수의 말씀도 역시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아무도 감히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이가 든 사람들부터 한 사람씩 차례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하기는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었으면 죄가 더 많은 법이지요.

  스스로 착하고 의롭게 산다는 사람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때문에 눈먼 사람들이었고, 자기의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눈이 멀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곧 멸망의 시작입니다.

  

하느님 앞에 성인과 죄인의 차이는 없습니다. 성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도 한순간에 악마와 같이 변할 수 있고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고, 이웃과 형제들을 단죄하고 그 허물을 탓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옥으로 끌려갔던 수도승이나 간음하다가 끌려 온 여인을 고발함으로써, 예수까지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두 눈먼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저의 이야기요, 여러분의 이야기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를 향해서도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지옥으로 끌려간 수도승이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이웃과 형제들의 허물과 결점을 들추려고 했기에 수도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구도의 길에 한 발자국도 정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도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7장 1절 이하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꺼내어 주겠다. '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이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자신을 향해서 눈을 돌려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 많은 사람들인지를 깨달아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게 되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비는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꺼내기 위한 노력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면, 내 이웃과 형제들의 허물과 약점들을 용서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구도의 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구원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회개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느님께로 다가가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벌거벗은 모습,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도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닙니다. 그러나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깨달음에 도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눈을 떠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면 천상 높은 곳으로 오르게 될 것이고, 눈먼 상태로 살아가면 지옥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의 그 의로우심 앞에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며, 허물과 결점 투성이의 인간임을 깨닫게 되면, 그 때부터 위로 오르게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은 보지

않고 남의 허물과 결점만을 살피게 되면 저 아래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은 이웃과 형제들을 향해 던지려고 우리 가슴에 품고 있던 돌멩이들을 꺼내어서 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 가슴속에서 돌멩이를 꺼내어 버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실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37.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유영봉 신부



묵상 : 올가미를 슬기롭게 빠져나가시는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인다. ‘단죄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형제들을 단죄하고 벌하려 했던가? 우리도 죄를 뉘우치며 주님 앞에 끓어 용서를 청하자.



돌에 맞아 죽을 죄

 초대교회에서는 살인과 배교, 우상숭배와 간음을 큰 죄로 간주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공적인 보속을 명하였다, 시대에 따라 법 감정이 변하듯이, 요즘은 일반인의 생각도 많이 바꿔 듯하다.

어떤 40대 주부가,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영세를 하기 위해 본당신부와 면담될 하면서 질문을 하였다. “신부님도 얼마 전에 방영된 '애인'이라는 연속극을 보셨지요? 신부님, 제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주부로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다하면서, 직장이나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도 죄가 됩니까?"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는가 싶으면서도, 질문을 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신부는 약간 난처해졌다.

그러나 말해줄 것은 해야 한다. “만나서 차 한잔 정도 마시는 것이 큰 죄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남편 아닌 남자친구를 개인적으로 만나다 보면, 인간관계의 정이란, 나 혼자만의 생각대로 조절되는 것도 아닌데, 찻집에서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외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고 하지만, 부부관계란 항상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부부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가에 자주 가면 아무리 조심해도 물에 옷이 젖듯이, 그것은 위험한 모험입니다. '세상 흐름이 그러니까 그래도 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지요." 그 예비신자는 “잘 알겠습니다” 하였지만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예수님께 놓아진 올가미

오늘 복음의 상황은 겉으로는 단순히 죄녀 하나를 불러 예수님의 고견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면 그 당시 모세법으로는 돌로 쳐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역설해오신 터였다. 평소의 주장대로 “죄녀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면 예수님은 모세법을 어긴 죄인으로 고발될 것이고, 법대로 돌로 쳐죽이도록 묵인하며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주장을 번복해야 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께 대한 재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모두들 끌려온 여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돌을 불끈 쥔 손에는 살기가 돈다.

사태는 험악하고 심각하다.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답을 재촉하지만, 예수님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신다. 그러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하셨다.

사람들은 한대 맞은 표정들이다. 예수님은 끌려온 죄녀를 향해 쏟아지던 단죄와 저주의 눈길을 각자를 향해 돌려보도록 하신 것이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그냥 둔 채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문제삼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대신학교 다닐 때 ‘3선 개헌'을 반대하여 삭발 데모를 한 경험이 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별 느낌이 없었는데, 복도를 지나가다 큰 거울에 비친 나의 낮선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옷매무새와 말씨와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너무나 쉽게 판단을 한다.

문제는 남들의 눈에, 아니 하느님 앞에 비친 나의 모습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는 죄짓지 말라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간음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소위 문민정무가 끝나기 몇 일 전에, 23명의 사형수를 처형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 중에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죽으면서 장기를 기증한 이들도 있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한다. 그러나 시기와 증오와 복수심에 눈이 멀다 보면, 그런 것은 사치스런 말장난이라고 여기기 일쑤다. 그래서 가차없이 단죄하고 매장시키며, 그들을 밟고 올라서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돌을 던질 자격으로 본다면, 예수님보다 더 당당할 자가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향해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죄대로 우리를 갚으신다면 살아남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자. 고해소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맹세하노니,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노라”.











38.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인이 죄인을 찍어누른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3,16-21 (보아라.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내 백성이 양껏 마실 물을 주리라)

제2독서 필립 3,8-14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을 것입니다)

복 음 요한 8,1-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죄인은 다른 죄인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자기 죄 때문입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죄인 사정은 죄인이 더 잘 알고 용서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역시 선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높은 선을 가진 분은 죄인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를 들추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바로 그 대표적인 분이며 이것이 바로 오늘 성서의 내용입니다.



어떤 학자가 죄수들을 시험하는데 한 청년을 간통한 남자로 꾸며 강력범들이 수감돼 있는 감방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감방 안의 모든 죄수들이 신이 나가지고 별의별 방법으로 그 청년을 괴롭혔습니다. 너 같은 놈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면서 온갖 욕설과 비난을 하더랍니다. 자기들 안에 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그 청년을 역시 똑같은 죄목으로 위장을 해서 죄 없이 억울하게 갇혀 있는 이들의 감방에 넣어 보냈더니 아무도 그 청년을 괴롭히지 않더랍니다. 누구도 청년의 죄를 따지거나 묻지 않았으며 오히려 감방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 친절하게 도와 주며 위로하더랍니다. 자기들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우리 모두가 그와 비슷한 체질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대생활 할 때도 보면 대개 졸병들에게 심하게 기합이나 주고 몰인정하게 다루는 것은 역시 사고자들이거나 말썽꾸러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문제를 참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정과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더 찍어누릅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합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의 유배생활을 끝낸 유대인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죄로 인해서 나라를 빼앗겼으며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은 궁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간다 해도 희망이 없었으며 보이는 미래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심한 자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하시며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들추지 않으십니다. 깨끗하게 잊으십니다. 왜냐 하면 우리 죄가 아무리 커도 그분의 자비와 사랑은 더욱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잘못이 있었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쳐서 벌떡 일어서야 하며 또한 남의 잘못이 있으면 하느님의 애정으로 덮어 주고 용서해 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간음했던 여인은 원래는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죄인이 죄인을 더 비난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박해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물론 간음한 여인의 죄도 큽니다. 벌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위험한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과 오만입니다. 오늘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자기들 딴에는 완벽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거기에 간음했던 여인이 도구로 등장하는데 세상없는 예수님도 그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걸리고 저렇게 해도 걸리도록 그들은 예수님을 유도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여인을 “돌로 쳐죽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자가당착이 되어 자기 모순을 범하게 되며 또 유대인에게는 사형선고의 권리가 없으므로 로마법에도 저촉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하신다면 이는 하느님의 율법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행위며 또한 음행을 장려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역시 주님이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시자 다 도망갑니다. 그 기세 등등하던 자들이 비굴하게 내뺍니다. 왜냐하면 진짜 죄인은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와, 간음했던 여인을 매장하려 했지만 그러나 망신을 당한 것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죄인들입니다. 너나없이 용서받은 죄인들이며 또 앞으로도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이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하려면 먼저 내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합니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자비를 가져야 합니다. 성서에 보면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고 했습니다(야고 2,13참조).



사순절은 서로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께서 특히 용서해 주 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웃에게 그 용서를 나누는 시기입니다. 아무에게도 돌을 던지지 맙시다. 그 누구에게도 죄인으로 몰아대지 맙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돌을 던지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죄인으로 판단치 않으십니다. 자비를 가집시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39.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죄 없는 자 돌로 치시오.

서울대교구 홍보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3독서 모두 지난 일, 고통의 과거, 잘못된 생활을 떨쳐 버리고 희망을 지니며 살라는 믿음의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제2이사야의 말씀입니다. 바빌론의 유배를 끝낸 유다인들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무너진 성전, 폐허가 된 예루살렘, 부서진 성곽, 여기서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망막하기만 한 것입니다. 자유는 비싸고 귀한 것이지만 이제는 노예가 아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할 더 큰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기적을 행하신 야훼 하느님을 상기시킵니다.



갈대바다를 맨발로 건너게 하신 야훼,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 주신 하느님, 이집트의 병거를 갈대바다에 빠뜨려 멸망케 하신 야훼, 하느님 그분을 기억하며 새로운 힘을 얻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러한 과거에만 집착치 않고 더 큰 희망, 큰 꿈을 지니라고 외칩니다. 화려한 과거, 자랑스러운 지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겨내는 믿음과 희망이 더욱 위해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더 큰 미래, 더 위대한 미래를 창조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것을 능가하는 전혀 새로운, 그리고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겨울이 지난 초봄의 싹, 이것은 분명 희망의 상징이며 삶의 보증입니다. 사막과 광야에 큰 길이 뚫릴 수 있고 또 물이 샘처럼 솟아 비옥한 땅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막과 광야에서 일어날 기적, 그것은 바로 유다인에게, 아니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기적, 은총의 기적인 것입니다. 사실 자유와 해방을 맛 본 민족은 그 경로가 아무리 험해도 큰길처럼 기쁘게 그리고 단숨에 뛰어넘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희망을 지녔고 희망이 보이고 희망이 보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보증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현실의 어려움들을 뛰어넘어 은총의 샘물이 철철 넘치는 기적의 나, 내일의 나를 창조하며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의 말씀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체험입니다. 크리스찬을 박해했던 바오로는 예수를 체험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께 송두리째 맡기고 투신했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믿음으로 모두에게 신념의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다 쓰레기로 여기면서 확신에 찬 삶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영광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한 바오로는 그러나 교만치 아니하고 현실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공헌하지도 않으며 아직도 자신은 앞으로 계속 달음질쳐야 할뿐이라고 새롭게 믿음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반복, 더 크고, 더 앞에 있는 것을 붙들기 위해 부단히 달음질치는 자세,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빠스카 신비는 이러한 긴장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주변에 눈길을 두지 말고 전심전력 앞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뛰어야 합니다. 숨가쁘게 그리스도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인간권리가 보장받는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그리고 감옥에서 숨져 가는 우리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통의 현장 감옥으로 달음질쳐야 합니다. 그곳을 넘어서만이 부활과 영광, 기쁨이 실현될 것입니다.

  

아, 사도 바오로여, 당신처럼 높은 곳을 향하여 그리고 갇힌 자를 구출하기 위하여 용감히, 조금도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달음질치도록 우리 모두를 재촉하소서.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자비로이 용서하시며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시는 예수의 사랑을 들려줍니다. 당시 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지게 하고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간음한 여인을 잡아 온 것입니다. 율법대로 하면 그 여인을 돌로 쳐죽여야 하며 예수의 가르침대로라면 살려야 하는데, 어찌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대답하면 그 여인은 죽어야 하므로 예수의 판단을 잔인하다 할 것이고 자비로이 살려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한 계략입니다. 비슷한 계략을 우리는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서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마태 22,15-22 참조).



예수는 이러한 함정에 걸리지 않으며 법과 제도를 훨씬 뛰어넘는 새롭고 근원적인 가치를 제시하십니다. 예수는 사목적 대답을 주십니다. 즉 법적인 판결과 집행에 앞서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강론을 듣거나 복음을 읽어도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주인공들 중에 나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고 있는가? 죄녀를 잡아와 법대로 돌로 치라고 외치는 나인가? 아니면 예수처럼 자비로이 용서해 줄 나인가, 아니면 혹시 내가 부끄럽게 끌려온 죄녀로서 누구의 손길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위기와 절망에 처한 이 여인에게 그 누구도 예측 못했던 새로운 힘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현재 그리고 어떠한 내일을 설계해야 하는가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빠스카의 이 깊은 신비를 새로이 깨닫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부활을 체험케 하소서. 아멘.











40.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다)  간음죄로 고발된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말씀은 「간음죄로 고발된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여인에 대한 판결을 빌미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그 여자를 ‘살려주라’ 고 하면, 그것은 「간음한 사람은 돌로 처죽이라」고 되어 있는 율법을 거스르는 것이 될 수 있고, 또 반대로「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인을 용서하고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하셨던 당신의 말씀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인 동시에,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로마총독의 권한인 사형집행권을 월권한 죄로 고발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진퇴양난의 간교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는 아주 지혜로우면서 명쾌한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둘씩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며, 그가 회개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예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예수님의 자비하심을 온전히 믿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감사와 희망 중에 성실히 회개의 삶을 실천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옛날 미국 개척시대 당시, 횡행하는 양(羊) 도둑질이 커다란 사회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법을 하나 제정했는데, 그것은 붙잡힌 양 도둑의 이마에 영어로 ST, 즉「sheep(양)」과「thief(도둑)」의 앞자인「s」와 「t」자의 낙인을 찍는다는 것이었습니다. ST자가 새겨진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사람의 이마에 찍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이마에 양 도둑이라는 표를 하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그 정신적인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두 사람의 양 도둑이 함께 붙잡혔습니다. 두 사람은 법대로, 이마에 ST자를 새기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차갑고 멸시하는 눈으로 보는 것 같자, 그는「이왕 버린 몸」이라 체념을 하곤 완전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여, 남에게 못할 짓만 하다가 폐인이 되어 비참히 죽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사람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이마에 찍힌 그 불명예를 지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을의 궂은 일을 기쁜

마음으로 도맡아 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며 성실히 살았습니다. 그러자 차츰 마을사람 모두가 그를 신뢰하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새 그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바뀌어 양 도둑에게 ST라는 낙인을 찍는 벌이 없어진지도 오래였습니다.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이 어지신 할아버지가 왜 이마에 ST라는 글자를 찍고 다니시는지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했는데, 그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ST‥‥ 아! 그건 saint(聖)의 약자일 거야! 할아버지께서 워낙 훌륭한 분이셔서 성인이라는 글자를 이마에 새기신 걸거야!」



죄를 지었으나 그것을 회개하고 거듭 태어나,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열심히 살아, 결국 하느님과 이웃들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앞으로 열심히 잘 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복음)‥‥ 「용

서받은 과거 죄」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난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말라」(제1독서).



그러므로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하느님-예수님)를 향하여 달려갈 뿐」(제2독서)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죄, 어떤 악에 사로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인간은「죄를 짓는 존재」, 하느님께서는「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ST신자. 성인신자가 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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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추석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라고... 자녀들을 위하여 2008-09-14 6722
  1272    
연중31-34주일
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690
  1271    
사순시기
다해 사순 제 1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2-05 6618
  1270    
사순시기
다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08 6608
  1269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2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598
  1268    
연중25-30주일
나해 연중 제 28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568
  1267    
연중8-13주일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5-24 6517
  1266    
행사강론
주님 봉헌축일 성민호 신부 2008-09-06 6476
  1265    
사순시기
나해 사순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08 6467
  1264    
대축일 강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대축일 강론 모음 2008-07-04 6421
  1263    
연중19-24주일
나해 연중 제 2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9-06 6317
  1262    
사순시기
나해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14 6311
  1261    
연중8-13주일
나해 연중 제 1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6-23 6310
  1260    
부활시기
다해 부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주일강론 모음 2008-03-29 6308
  1259    
행사강론
십자가 현양 축일 <요한 3,13~ 17> 강론모음 2008-09-06 6278
  1258    
대림시기
다해 대림 제 2주일 주일강론 모음 주일강론모음 2007-11-25 6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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